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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그 집사의 외출(1) (25/200)

 # 25

그 집사의 외출(1)

하얀 눈꽃이 핀 숲은 아름다운 정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침 산책을 나온 산토끼는 먹을 것을 찾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토끼가 뛸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곳저곳 숲속을 기웃거리던 산토끼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귀를 쫑긋 세웠다. 위험이 다가온다. 그렇게 판단한 토끼는 본능에 따라 숲 안쪽으로 모습을 숨겼다.

잠시 후, 수풀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다부진 몸과 정돈된 얼굴. 꽤 길어버린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그는 알베르트 란이었다.

‘시험을 치르러 나온 지 벌써 1년인가.’

[그렇군요, 마스터.]

이른 아침, 성을 나온 알베르트는 숲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검은 연미복 위에 두꺼운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바깥 공기에 노출된 코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앞에는 유피가 넘겨준 가고일 인형이 있었다.

인형은 숲 밖으로 그를 안내하고 있었다.

겨우 1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운 유피와 만나고, 사부님을 모시고. 이 손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힘을 얻었다.

[회상은 다음에 하시죠, 마스터. 겨우 1년입니다.]

‘내 항상 말하고 싶었던 건데 말이지. 자네는 남의 기분을 좀 더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네.’

[그런 말만 늘어놓으니까 꼰대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놈의 꼰대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건가?’

매번 같은 레퍼토리다. 천칭의 불만에 적당히 어울려주며 알베르트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오늘은 마물이 왜 이리 안 보이는지 모르겠구먼.’

하얀 눈꽃이 핀 숲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상급 마물은 고사하고, 하급 마물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숲속에 사는 동물들을 보는 게 쉬울 정도다. 여기가 정말로 마물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금지된 숲인지, 의심이 들었다.

[마스터는 자신의 힘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스터가 지금 가진 힘이라면 막 소드 마스터에 이른 기사 정도는 충분히 쓰러뜨릴 겁니다.]

‘소드 마스터를 말인가? 하지만 아직 나는 검강을 만들기도 힘들다네.’

미궁 밖으로 나온 뒤 사부님이 보는 앞에서 몇 번이나 연습해보았지만, 알베르트가 완성된 검강을 만든 적은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족의 무공과 기사의 무술 사이에는 벽이라고 해도 좋을 차이가 있죠.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무술과 대인전을 최고로 본 무공. 그 점만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마스터가 승리를 점할 확률은 7대 3은 될 겁니다.]

‘그 정도인가?’

[물론이죠. 거기에 비장의 수까지 있지 않습니까? 주변 일대를 모두 부숴버리는 걸음이.]

‘그건 못 쓸 보법일세.’

천마군림보를 떠올린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시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당시에 알베르트가 첫걸음에 성공했던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기억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무아지경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뭔가 찔러 넣은 감각은 있었는데, 몇 번을 반복해도 그 감각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이후로 천마군림보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마스터.]

알베르트는 걸음을 멈췄다.

비릿한 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산짐승이 사냥하면서 나는 피 냄새와는 다르다. 톡 쏘듯이 코안 쪽을 찌르는 냄새는 마물의 피 냄새였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네.’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알베르트는 기척을 죽였다.

내공을 끌어올린 귀가 병장기 소리를 잡아냈다. 먼 거리는 아니다. 나무 위를 건너뛴 알베르트는 마나가 휘몰아치는 장소로 향했다.

나무 밑으로 보이는 공터는 온갖 마물의 사체로 가득했다. 하급 마물인 고블린이나 오크부터 시작해서, 머리가 날아간 트롤의 시체도 종종 보였다. 알베르트는 시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이아스!”

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푸른 빛의 수환(水環)이 오우거의 어깻죽지를 잘라냈다.

오우거가 포효했다. 붉은 피가 치솟았다. 몽둥이를 놓은 오우거는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눌렀다. 그래도 피는 멈추지 않는다. 여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오우거의 몸을 타고 올라간 그녀는 사브르와도 비슷한 세검으로 녀석의 목을 잘라냈다.

오우거를 지나 숲을 달려간다. 그녀의 뒤로 정령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정령 둘은 그녀를 호위하듯이 따라붙고 있었고, 후미를 지키고 있는 정령은 따라붙는 마물을 떼어내고 있었다.

[실프와 운디네, 거기에 중급 정령인 나이아스군요. 꽤 솜씨가 뛰어난 정령사입니다.]

여인을 향해 뛰어드는 마물은 정령을 넘어서지 못하고 번번이 쓰러지기 바빴다.

그중에서도 실프와 운디네의 합공은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나이아스처럼 응축된 수환을 만들더라도 그걸 쏘아내지 못하는 운디네를 위해, 실프의 바람이 수환을 날려 보낸다. 쫓아오는 마물을 죽일 필요는 없다. 기동성만 잃게 하면 충분하다. 하반신이 잘려나간 마물을 뒤로 한 채 여인은 숲속을 헤쳐 나갔다.

숨이 차오르는 건지, 여인은 후드를 벗었다.

초록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땀과 피로 얼룩져있었다.

“에일린?”

[아는 사람입니까?]

알다 뿐일까. 이전 삶에서는 알베르트에게 정령이 무엇인지 알려줬던 정령사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알베르트는 어둠의 하급 정령인 보이드와 계약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에일린 나이트워커. 루드비히 저택의 식객이었지. 그녀는 인간이 아니네. 숲의 축복을 받은 종족, 엘프라네.’

[그렇군요. 엘프들은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요. 혹시 하프 엘프입니까?]

‘인간과 하프는 아니라네. 그녀는 마족과 엘프의 혼혈이었지.’

[특이하군요. 마족과 엘프의 혼혈이라니. 두 종족의 후손을 보는 건 처음 같습니다.]

천칭의 말이 맞다. 에일린은 축복받은 2대가 아니었다.

엘프와 마족, 두 종족 모두 그녀를 꺼렸다.

에일린의 뒤를 쫓는 마물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족의 시체를 보고 물러나지 않는다. 광기로 번뜩이는 마물들은 추적의 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간혹 움직이지 못하게 된 동족들을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는 마물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마스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스터가 풍기는 기운이 마물을 몰아세운 겁니다. 본능적으로 강자를 피한 마물들이 저 엘프와 맞닥뜨린 거죠.]

‘내 잘못이라는 건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마스터.]

‘······.’

에일린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후위를 지키던 나이아스가 역소환되고, 실프와 운디네의 공격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마나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것이리라. 에일린의 호흡이 가빠졌다. 바람을 일으키던 실프마저 역소환되고, 결국 그녀의 곁에는 운디네 밖에 남지 않았다.

[꽤 위험해 보이는군요.]

‘아마도 로엔 경이 구하러 올 걸세.’

알베르트의 기억이 맞다면 로엔과 에일린의 첫 조우는 금지된 숲이었다.

길을 잃고 마물에게 쫓기는 그녀를 순찰 중이던 로엔이 우연히 구해낸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루드비히 저택에 식객 신분으로 머무르게 된 에일린은 아가씨를 비롯해 알베르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령과 교감을 나누는 걸 낙으로 삼던 엘프다. 그녀가 돌아오지 못하게 됐을 때, 아가씨가 흘린 눈물을 알베르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운디네는 에일린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힘을 전부 발휘하는 건 무리다. 술자의 마나가 다 떨어진 이상 과도한 힘을 썼다가는 역소환 될 가능성이 컸다. 얼어붙은 길에 꾸준히 물을 뿌린다. 추적자들의 속도를 늦추게 하는 것이 운디네의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운디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물은 이미 에일린의 뒷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도 주변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로엔 경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알베르트가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렸을 때였다.

[마스터.]

‘급하니 빨리 말하게. 뭔가?’

[나서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마스터의 기억이 맞다면 이곳에서 활약하는 것은 로엔이라는 기사입니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는다면, 에일린이 죽을지도 모르네.’

알베르트도 알고 있었다.

에일린을 구하는 건 그의 몫이 아니다. 로엔 경의 몫이다.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마스터. 시간의 축은 그리 간단하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어떤 일이 생긴다고 한들,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만약 그 결과를 바꾸고자 한다면 세계를 개변시킬 힘이 필요합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힘을 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이것 또한 그 연장선입니다. 만약 이 일로 에일린이 죽는다면 에일린의 자리를 대체할 누군가가 나타날 겁니다. 마스터는 그분과 천천히 인연을 이어가면 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자네. 그 사람은 에일린이 아닐세.’

[마스터야말로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마스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시엘 루드비히가 아니었습니까?]

‘······.’

다리에 힘이 풀린 에일린은 이제 나무를 등지고 있었다.

운디네와 합을 맞춰 다가오는 오크를 제압하고 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간신히 한 명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그 뒤에는 수십, 수백의 오크가 녹슨 도끼를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에일린의 패배는 자명했다.

[에일린을 구하는 건 로엔이라는 기사입니다. 마스터가 이 자리에서 에일린을 구한다면 그 자리는 마스터가 치환하게 되겠죠. 마스터는 이미 유피에르와 만나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죠. 그런데 저 엘프를 구하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에일린은 타인이 아니네. 우리 가족일세.’

힘이 다한 운디네의 두 손이 축 늘어졌다. 자신을 현계시키는 마나조차 한계에 이르렀는지, 그 모습이 반투명하게 흐려졌다. 운디네의 저항은 끝났다. 이제 오크의 차례였다. 녹슨 도끼가 휘둘러졌다. 이 싸움을 끝장내기 위해 나아간 도끼는, 운디네를 감싼 에일린의 머리에 닿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에일린의 신형이 땅으로 떨어졌다. 에일린의 손에 감싸인 운디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령들은 이곳에서 상처를 입더라도, 정령계로 역소환될 뿐이다. 실제로 상처를 입는 에일린과는 다르다. 어떤 정령사도 정령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지 않았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감당하는 건 마스터의 몫입니다.]

천칭의 말은 소용없었다.

알베르트의 신형은 이미 에일린의 머리에 상처를 남긴 오크에게 떨어지고 있다. 두 발이 오크의 머리에 닿은 순간, 빵이 짓눌리는 것처럼 대가리가 터져나갔다. 머리를 잃은 오크의 신형이 균형을 잃었다. 흔들거리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한 번의 휘둘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알베르트를 보고 있던 두 오크의 목이 주인을 잃었다. 다이어 울프(Dire Wolf)가 뛰어오른다. 그 입에 검집을 물리고, 머리와 몸통을 단칼에 분리해버린다. 목의 절단면이 드러나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로브에서 핏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피가 튄 검을 두르고 있는 건 검기다. 검사를 뽑을 필요도 없었다.

알베르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앞으로 내민 검집은 그저 마물과의 거리를 재기 위한 무기다. 다가오는 마물들을 눈에 담은 그는 무릎을 구부렸다. 노리는 건 순간이다.

단체로 뛰어오른 오크들의 도끼가 알베르트를 노리고 떨어졌다. 피할 수 없다. 이 뒤로는 상처 입은 에일린이 있다. 알베르트에게 주어진 공간은 아주 협소한 공간이다. 발을 떼어 옮긴다 해도 간신히 두 보 정도나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창천검법 5장

쇄천

알베르트는 몸을 굽힌 상태에서 검집과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기에 닿은 마물의 몸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한 번의 휘둘림으로 수십의 마물이 그대로 두 동강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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