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꿈을 계승하는 자(2)
다음 날, 알베르트가 성의 정원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는 상태였다.
주변 곳곳에 뿌려진 잿가루와 꿈틀거리는 동물의 내장. 산양의 뿔을 비롯해 마법 촉매제로 보이는 물건들이 정원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스켈레톤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수는 많지 않다. 내려온 알베르트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그 수는 겨우 다섯이었다.
[꼭 그거 같지 않습니까? 신에게 산제물을 바치는 이교도들의 의식 말입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사바트(Sabbath)라고 했던가요?]
불길한 소리를 늘어놓는 천칭을 무시한 채 알베르트는 유피에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늦었네.”
“유피에르가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알베르트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늦겨울의 해는 아직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얀 맨발에 마녀복 차림으로 나온 유피에르의 손에는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뭘 할 생각인 거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쪽이 이해하기 편할 거야.”
스켈레톤을 앞에 둔 채 유피에르는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그녀의 발치에서 기괴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알베르트는 이해할 수 없는 마법식이 정원 바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뿌리를 뻗고, 뿌리에서 나아간 원이 모여 있는 스켈레톤 주변으로 자리를 잡았다.
잿가루를 따라 붉은빛이 달렸다.
지팡이에서 가까운 원부터 시작된 빛은 원을 채우고, 줄기를 채우고, 나무를 채우고, 이내 뿌리를 채웠다. 10개의 원에 빛이 가득 차자, 그녀가 자아낸 마법진의 붉은 선이 뚜렷이 드러났다. 지면에 그려진 하나의 나무가 가리키는 끝에는 스켈레톤이 있었다.
「무엇보다 높은 지고한 왕관이 길 잃은 양들을 안내할지어니.」
영창이 시작된다.
유피에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미 하나의 언령(言靈)이다. 마법진의 구성에 간섭하는 마나의 흐름이, 배열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만약 알베르트가 마법을 보는 눈이 있었다면, 눈앞에서 일어나는 마법식이 얼마나 정교한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서클 마법과는 궤가 다르다.
이미 정연화 된 질서에 억지로 마나를 쑤셔 넣는 게 아니다. 순환하는 마나의 흐름을 살짝 트는 것으로 완성된 자연을 다른 그림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지혜에 형상을 부여하고, 뿌리에서 시작된 권능을 이 손에 쥐게 하소서.」
나무에 기대고 있던 사부님이 천천히 알베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전개되는 마법진을 지켜보았다.
「이 오른손에 깃든 최초의 광명이 그대를 축복하리라.」
스켈레톤의 우측에 있던 5개의 원에서 환한 은빛이 새어 나왔다.
「이 왼손에 깃든 태초의 심연이 그대를 지켜보리라.」
스켈레톤의 좌측에 있는 5개의 원에서 탁한 검은빛이 새어 나왔다.
「풍요로운 지성은 빛과 어둠의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니, 그 행로의 끝에는 거룩한 지성이 숭고한 영광으로 향하리라.」
나무의 한가운데서 모인 빛과 어둠이 섞이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빛이 혼탁한 흑백으로 물들었다. 마치 마법진이 살아있는 것 같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유피에르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마나의 소모가 상당했는지,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낸 알베르트가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그녀의 몸에 손대서는 안 됩니다, 마스터.]
손수건으로 유피에르의 이마를 닦으려던 알베르트는 천칭의 경고에 손을 멈췄다.
지팡이를 쥔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마나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각 원에 모여 있던 마나가 순환하듯이, 뿌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뿌리의 끝에 모인 스켈레톤들을 향해 마나가 닿은 순간, 변화가 시작되었다.
“설마···.”
마법진 안에 있던 스켈레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거꾸로 되감는 것처럼, 뼈밖에 없던 그들의 몸에 장기가 생겨났다. 내장이 붙고, 위가 생겨나고, 폐와 심장이 늑골 아래에서 나타났다. 투명한 혈관 안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그 위에 살점이 덧붙여졌다.
점토가 뭉치는 것처럼 반죽이 된 스켈레톤은, 바야흐로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작별 인사해, 아저씨.”
『고맙구나, 아이야.』
유피에르의 앞으로 나아간 사부님은 인간으로 돌아온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던 스켈레톤들은 사부님을 보더니 고개를 숙이더니, 포권을 취했다.
『새벽이 밝아온다.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가거라.』
인사는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사부님은 그들에게 등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무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다음은 유피에르의 차례였다. 이 마법을 발현한 그녀에게 무인들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말을 할 여유는 없다. 유피에르는 손을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시선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마스터, 뭔가 말이라도 좀 해주시죠?]
‘아니, 그래 봤자 나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고민하는 알베르트의 눈에 사부님의 등이 보였다.
『이제, 네가 천마다.』
사부님이 건넨 그 말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었을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무게가 아직 무엇인지, 알베르트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에서 가벼운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생각을 정리한 알베르트는 무인의 시선에 대답했다.
“뒤는 걱정하지 마시길.”
[못 미더운 말을 또···.]
불만이 찬 천칭의 반응과는 달리 무인들은 그걸로 만족했는지, 그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인사가 끝난 걸 확인한 유피에르는 지팡이를 들었다.
「지금 그 넋을 달래지어니, 이곳에서 다시 한번 생명의 순환이 돌으리라.」
소용돌이치던 마나의 흐름이 지팡이 끝으로 향했다.
응집된 마나가 닿자 현자의 돌은 강렬한 빛을 냈다. 끝이 가깝다. 치솟는 마나가 한계에 달하자 유피에르는 지팡이를 들었다.
「사자회귀(死者回歸).」
그녀가 자아낸 언령은 주문의 끝을 고했다.
지면에 떠올라있던 나무는 일순간 빛을 내뿜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지자, 그 자리에 있던 무인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법진이 사라지고 유피에르의 거친 숨소리만이 정원에 남았다. 지팡이에 기댄 채 그녀는 숨을 돌렸다. 알베르트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말없이 수건을 받은 유피에르는 이마를 닦았다.
“시체를 쓴 게 아니었구나. 이들 모두가 무인이었어.”
성안의 스켈레톤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 넘어간다. 어디서 그 많은 시체를 조달해왔는지 의문이었는데,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래, 이들은 구시대의 마족들이야. 일찍이 무인이라고 불렀던 자들이지.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이승에 묶여있는 이들이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거야? 유피에르의 마법에 묶여있는 거라면 역소환이 가능하지 않아?”
유피에르의 제어에서 벗어나면 그들 모두가 돌아가지 않을까?
알베르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일반 언데드라면 그래도 되겠지. 하지만 이들은 달라. 강력한 저주에 걸려있는 무인들을 강제소환 하는 날에는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몰라. 내가 하는 건 역소환과는 달라, 알베르트. 순환의 흐름에서 벗어난 그들을 그 노선으로 다시 인도하는 거야.”
“저주에 걸려있다고?”
“우리 마족 전체에 걸린 마법이야.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범한 마법으로는 불가능해. 그래서 이 지팡이가 필요했던 거야. 길을 열기 위해서는 세피로스의 나무가 필요했거든.”
반도 이해하지 못한 알베르트를 보며 유피에르는 모자를 벗었다. 별무리를 닮은 은발이 물결쳤다.
“고마워, 알베르트 란. 마족의 13황녀인 나, 유피에르 바토리가 네게 감사를 표할게. 그 대가라고 말할 만한 건 아니지만, 네가 바라는 걸 하나 들어줄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이전 삶에서의 유피에르는 솔직함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이런 식의 제안을 받아 본 기억은 없었다. 놀라움은 잠시였다. 알베르트는 정신을 수습했다. 뭘 요구하는 게 좋을까? 앞으로 닥쳐올 3차 대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힘을 빌려 달라고 할까. 아니, 일단 황자들과 알아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피에르가 손쉽게 승낙할까? 애초에 인족이 1황자인 시더와 5황자인 아벨을 아는 것은….
[교미라도 생각하고 있습니까?]
알베르트가 일의 우선순위를 비교하고 있을 때였다. 뭔가 뜬금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교미요, 교미. 성관계. 섹스라고도 하죠.]
‘자네는 좀 빠져있게.’
머릿속이 당기는 느낌에 알베르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쓸데없이 고민하고 있길래 던진 말입니다. 제안하기 어려운 부탁은 꺼낼 이유가 없습니다. 마스터도 이야기하기 힘든 부탁을 유피에르가 들어줄 것 같습니까?]
‘그런 건가?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지 않을까?’
[마스터. 항상 달릴 필요 없습니다. 가끔은 돌아갈 필요도 있는 법입니다.]
알베르트는 머릿속을 식혔다. 천칭의 말이 맞았다.
유피에르와는 이제 첫 단추를 끼우는 단계다. 여기에서 무리한 부탁을 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저 단발로 끝나는 관계. 알베르트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유피에르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살짝 놀란 것처럼 눈을 돌렸다.
그 눈치를 보고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분위기를 너무 타버린 나머지, 감당하지 못할 제안을 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정말인지, 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그녀와는 너무 달라서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래서 유피에르가 싫어졌는가를 묻는다면, 알베르트의 대답은 달랐다.
천칭의 말이 맞다. 정말로 큰 콩깍지가 자신의 눈에 달린 것 같았다. 조심스레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럼 날 알이라고 불러줄 수 있겠어, 황녀님? 나도 당신을 유피라고 부를게.”
알베르트는 유피에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큰 재물은 원하거나, 힘을 원하는 손이 아니다. 그저 친분을 다지자는 제안을 담은 손. 순수한 호의를 건네는 알베르트의 손을 유피에르는 가만히 응시했다. 작은 비소(鼻笑)가 울렸다.
유피에르는 알베르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알.”
“잘 부탁해, 유피.”
알베르트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손을 뗀 유피는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려졌다.
“왜 웃는 거야?”
“아니, 유피는 정말 멋있구나 해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알베르트는 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녀 스스로 타인과의 교류를 끊기 위해서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게 아니었다. 이곳은 모래성 같은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철옹성. 성안의 무인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만든 요새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
뜬금없는 알베르트의 고백에 유피에르는 두 눈을 깜박였다.
짧은 침묵 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10년 뒤에나 찾아와, 그럼 상대해 줄지도 모르겠네.”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바로 쥔 그녀는 등을 돌렸다.
공간이동을 할 마나도 남지 않은 건지, 그녀는 걸음을 옮겨 성안으로 사라졌다. 맨발로 떠나가는 유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알베르트는 턱에 손을 얹었다.
‘음, 타이밍이 나빴던 모양이군.’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마스터?]
‘회심의 고백이지 않았나?’
[낭만이고 분위기고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칭은 알베르트의 대답에 뭔가 질려버린 것 같았다.
[나이를 먹더니 연애 세포도 굳어버리신 모양이군요.]
‘그렇게까지 뭐라고 할 건 없지 않나.’
안 그래도 차여서 기분이 우울한데, 가차 없는 천칭의 말에 알베르트는 더 시무룩해졌다.
[이전 삶에서 왜 마스터가 유피에르와 이어지지 않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
[뭐,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삶에서는 제가 마스터와 함께합니다. 제 조언을 듣는다면 그녀와 교미하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니겠죠.]
‘자신 있는가?’
반신반의하는 알베르트의 물음에 천칭은 웃음소리를 냈다.
[안 그런 척하는 것과는 달리 마스터도 유피에르의 몸에 흥미진진한 모양입니다?]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지 않나.’
계면쩍은 표정을 지은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맑은 하늘이었다. 깊어가는 겨울이 끝나면 곧 봄이 오리라. 쓸쓸한 이 정원도 생기가 가득 넘치는 곳으로 변하겠지. 그 모습을 보는 건 꽤 기대되는 일이었다.
“그럼 청소부터 시작해볼까?”
몸을 푸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거목 위에 앉아 있던 보랏빛의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이 성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