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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꿈을 계승하는 자(1) (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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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계승하는 자(1)

동이 떠오른다. 숲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을 본 스켈레톤은 몸을 일으켰다.

낡은 삿갓을 머리에 눌러 쓴 그는 지키고 있던 문을 뒤로했다. 성의 정원에 들어온 그는 언제나 그렇듯, 성을 내려다보는 거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스켈레톤이 밟고 있는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 스켈레톤의 몸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예에 눈이 밝은 이가 보았다면, 스켈레톤이 천근추(千斤墜)의 묘리를 담은 내공을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동이 점차 커졌다. 성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충격이 성 지면에 퍼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거목이 뿌리부터 반으로 갈라졌다.

빛무리가 쏟아졌다.

지하를 뚫고 나온 검붉은 빛줄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빛줄기가 만들어낸 꽃잎이 흩날렸다. 승천한 빛은 성의 최상층을 무너뜨린 뒤에야 멈췄다. 흩날리던 빛이 사그라진다. 탑을 꿰뚫은 형체는 그 힘이 다했는지, 지면을 향해 맥없이 추락했다.

스켈레톤은 손을 뻗었다.

날개를 잃어버린 천사는 무형의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성의 정원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살점 하나 없는 손바닥으로 낡은 칼자루가 들어왔다.

뒤이어 칼자루에 매달려 있던 주인이 그 옆으로 떨어졌다. 꼴사나운 소리가 울렸다. 볼썽사납게 땅으로 떨어진 연미복의 남자는 스켈레톤의 앞까지 굴러왔다.

“으···.”

먼지투성이의 남자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스켈레톤을 보더니 멍하니 입을 벌렸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돌아왔습니다, 사부님.”

사부님은 낡은 삿갓을 살짝 올렸다.

검은 두 눈에 알베르트의 모습이 담겼다. 겨우 50일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몇 년 만에 보는 사람 같았다. 새하얀 피부와 얼굴, 발을 확인한 그의 눈은 머리에서 멈췄다. 검은색이었던 알베르트의 머리카락은 옅은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어서 와라, 아이야.』

사부님의 아래턱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

어검비행(馭劍飛行)의 후유증일까. 알베르트는 시선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몸이 기우뚱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데, 사부님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아래턱을 흔들고 있었다.

『제법 쓸만한 얼굴이 되었구나.』

웃기는 얼굴을 잘못 말씀하신 게 아닐까.

알베르트는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쥐어짜 시선을 바로 잡았다.

사부님의 모습은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다.

묘한 안도감을 얻은 알베르트는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래, 네가 바라던 힘은 그곳에 있었느냐?』

“과분할 정도로 받았습니다.”

『흥, 지금부터가 더 힘들 것이다. 분에 넘치는 힘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제자,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사부님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금이 기회였다.

“사부님.”

『뭐냐?』

미궁을 돌면서 생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사부님의 존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름이라···. 너무 오래된 나머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군. 나는 오래된 일족의 출신이었으니까.』

[도망쳤군요.]

사부님은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사부님이, 천마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알베르트는 물었다.

설마 목적에서 바로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사부님의 시선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깊은 눈동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동공에 알베르트의 검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사부님은 시선을 내렸다. 손바닥의 칼자루를 잠시 응시한 뒤 그는 대답했다.

『아니, 본좌는 천마가 아니다.』

거짓말이다.

알베르트는 그 대답을 부정하기 위해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사부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몸은 천마가 남긴 사념에 불과하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

[역시 그랬나요. 그렇죠.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이 사람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죠.]

들려오는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화를 삭이며 물었다.

‘자네는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건가?’

[확신을 가진 건 지금입니다, 마스터.]

‘나는 요즘 자네가 정말로 내 편인지 의심이 들 때가 많네.’

[전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스터. 전 천칭입니다.]

알베르트는 천칭과 실랑이를 벌이는 걸 그만두었다. 이렇게 된 그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꾸는 하나다. 그놈의 천칭 타령이다.

『그렇군. 이 몸의 제자인 너에게도 별호 하나 정도는 필요하겠지.』

천마의 사념, 사부님은 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의 끝은 알베르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네가 천마다.』

······.

“네?”

한 박자 늦게 알베르트가 반문했다. 방금 사부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지?

『그 이름에 걸맞은 무인이 되려면 먼저 그의 유산부터 되찾아야 할 것이다. 이 칼자루도 그중 하나다. 일찍이 무림에 있었던 신석을 가공해서 만든 신물이다.』

사부님의 손에 있던 칼자루가 스르르 녹아들기 시작했다.

붉은색을 띠는 액체로 변한 칼자루는 작은 통 안으로 쏟아졌다.

『우리는 이 돌을 현자의 돌이라고 불렀다.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를 취하는 신물이지. 무엇을 원하느냐, 아이야. 이것은 네가 바라는 형태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가르는 명검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모든 것을 막는 방패가 될 수도 있지.』

사부님은 알베르트를 향해 통을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현자의 돌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걸쭉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들었다.

썩 유쾌한 미관을 가진 신물은 아니다.

통을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받지 않겠습니다.”

『본좌에게는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이다.』

“딱히 사부님께 드리겠다고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만···.”

딱!

사부님의 지팡이가 번뜩였다. 알베르트의 머리를 향해 지팡이가 떨어졌다. 지팡이를 맞은 알베르트는 이전처럼 머리를 쥐어 잡지 않았다. 심후한 내공으로 찬 눈이 사부님을 바라봤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가져가거라. 원래는 그 아이에게 줄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흥, 썩 꺼지거라.』

손사래 치는 사부님을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성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성을 뒤흔든 소란 때문일까, 유피에르는 옥좌에서 알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마녀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테이블에는 푸른 수정구와 고깔모자가 있었다.

“방금 그 소란은 너구나?”

“미안하게 됐어.”

“시끄러운 식객이구나, 넌. 그래. 정리해놓는다면 상관없어. 용무는 그것뿐?”

“아니. 이걸 주고 싶어서 왔어.”

알베르트는 현자의 돌이 담긴 통을 꺼냈다. 유피에르가 옥좌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자의 돌!?”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졌다.

숨길 수 없는 흥분을 얼굴에 드러낸 유피에르는 알베르트의 앞으로 뛰어왔다. 현자의 돌이 담긴 통을 받은 그녀는 안쪽에서 질척거리는 현자의 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눈에 어린 감정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와도 같다. 학구열에 불타는 그녀를 보며 알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좀 유피에르 같네.”

“뭐?”

알베르트의 혼잣말에 유피에르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품위 없게 맨발로 옥좌 앞까지 뛰쳐나온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는지 어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현자의 돌이 담긴 통을 양손에 쥔 그녀는 옥좌로 돌아가 앉았다.

“이걸 내게 주는 이유가 뭐야?”

“체통 지킬 필요 없어.”

“시끄러워, 방금 건 잊어버려.”

“유피에르의 뜻이 그렇다면야.”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유피에르는 뒷수습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피에르의 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레이디에게 부끄러움을 줄 필요는 없다. 후환이 두려우니까.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내가 주기로 약속한 마정석은 유피에르에게 주기가 그렇거든.”

아가씨에게 이미 선물로 드린 물건이다. 알베르트가 다시 마정석을 회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수습 집사 신분으로 되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알베르트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약간의 허세는 필요하겠지. 그래도 가면의 두께는 두껍지 않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가져올 수는 있어. 하지만 현자의 돌은 다시 받아갈게.”

알베르트가 손을 내밀자 유피에르는 현자의 돌이 담긴 통을 휙, 하고 탁상 위로 올렸다.

유피에르의 반응이 귀엽다. 그녀를 보고 있잖니,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할 것만 같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용모에 따라서 행동거지가 정해진다고들 하는데, 알베르트는 그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 걸 다시 가져가는 것만큼 나쁜 건 없어.”

“그럼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할게.”

“좋아.”

서로가 만족하는 상황이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알베르트는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한 건 낙찰이군요.]

‘운이 좋았네. 이런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마치 소변이 마려운 고양이처럼 유피에르는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 시선은 계속 현자의 돌이 담긴 통을 훔쳐보고 있었다. 알베르트가 있는 탓에 확인하지 못할 뿐이다. 신경 쓰여 죽겠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현자의 돌로 뭘 할 생각이야?”

“내가 그걸 왜 너에게 알려줘야 해?”

“내가 준 건데,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아?”

잠시 고민하던 유피에르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에르는 통을 열었다. 안쪽에 담겨있던 현자의 돌이 뱀처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핏덩이와 같은 액체가 주르륵 흐른다. 유피에르의 손바닥 안쪽으로 들어온 현자의 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현자의 돌이 휘몰아쳤다. 손안에서 일어난 작은 바람은 태풍이 되었다. 나선을 그리는 붉은 액체는 나무의 형상을 취했다. 나무가 성장한다. 새잎이 자라고, 단풍이 물들고, 이내 시들었다.

알베르트는 유피에르를 보았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마스터.]

현자의 돌의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흙처럼 퍼진 현자의 돌에서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뭉치기 시작한 액체에 뼈대가 생겨나고, 길쭉하게 그 형상이 길어졌다. 순식간에 유피에르의 앉은키를 넘길 정도로 성장한 현자의 돌은, 지팡이의 형태를 갖췄다.

아아, 그랬던 건가.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눈에 익은 붉은 지팡이. 리치가 들고 있던 지팡이와도 비슷한 형태를 한 지팡이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였다. 이전 시대의 그녀는 항상 저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그 이름은 분명···.

[세피로스의 지팡이(The Staff of Sepiroth). 군단장 유피에르를 상징하는 지팡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인족을 학살하던 유피에르에게 훌륭한 무기를 되찾아주셨군요.]

‘그만 비꼬게나.’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넣은 유피에르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내가 뭘 할 생각이냐고 물었지? 내일 아침에 성 정원으로 나와. 그럼 알게 될 거야.”

옥좌에서 일어난 유피에르의 발아래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치 뿌리를 내린 식물과도 비슷한 마법진이다. 뿌리 끝에서 뻗어진 원의 위에서 붉은빛이 물들었다. 다음 순간 유피에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한다는 일이 뭘까요, 마스터?]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먼.’

이전 삶에서 알베르트가 유피에르와 만나는 시기는 앞으로 10년 정도가 더 흐른 뒤의 이야기다. 그 이전에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베르트도 알지 못했다. 그저 성안에서 고독하게 지냈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뿐이다.

[혹시 파멸의 저주라도 읊는 거 아닙니까? 인족들이 전부 죽으라고 말이죠.]

‘내 유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거야 모를 일이죠. 마스터 앞에서만 얌전한 척 아양을 떨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네.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 테니,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무슨 무책임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어서 가서 유피에르를 막을 준비를 하죠, 마스터.]

‘자네나 실컷 하게.’

오늘은 이만 쉬고 싶었다.

시끄럽게 소란을 떠는 천칭을 무시한 채 알베르트는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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