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수중무검 심중유검(手中無劍 心中有劍) (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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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중무검 심중유검(手中無劍 心中有劍)

    전각에서 하룻밤을 쉰 알베르트는 무너진 터를 살펴보고 있었다.

    완전히 쑥대밭이 된 터는 폐허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난 탓에 잔해들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주변을 쭉 둘러본 알베르트는 7계층인 이곳이 미궁의 끝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제외하고는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허나. 천장이 나가라고 만들어놓은 출구는 아닐 터, 올라온 계단을 도로 내려가 다른 길을 찾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6계층의 입구에는 1계층처럼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푸른 장식품을 찬 망자였죠.]

    ‘푸른 장식품? 견장인 모양이군. 그거 혹시 챙겼는가?’

    천마를 경호하던 좌호법과 우호법이다.

    붉은 견장에서 천마에 대한 기억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푸른 견장은 또 다른 실마리를 줄지도 몰랐다.

    기대에 찬 알베르트의 물음에 천칭은 대답했다.

    [아뇨, 전 마스터의 목숨을 챙겼습니다.]

    ‘······.’

    [지금은 칭찬해주셔야 하는 타이밍입니다, 마스터.]

    ‘그것참···. 정말 고맙네, 천칭.’

    미궁에는 가득하던 망자도 이곳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풍화된 물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무인의 유골로 보이는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손이 닿자 재로 변해버리는 뼈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유골도 더러 있었다.

    알베르트는 터의 구석진 곳까지 전부 둘러보았으나, 결국 아무 소득도 건지지 못했다.

    ‘출구는 여기가 아니라 아래쪽에 있는 것 같네.’

    [왜 엄한 곳을 짚는 건지 모르겠군요. 출구라면 저기 있지 않습니까?]

    ‘어디 말인가?’

    [위입니다, 마스터.]

    천칭은 알베르트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천장을 입에 담았다.

    ‘무리일세. 끝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저 끝에 출구가 있을지 어떻게 확신하는가?’

    [지금의 마스터라면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위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막혀있다고 한들, 바람이 들어오는 틈새는 있겠죠. 그 틈새를 부수고 지긋지긋한 이곳에서 나가는 겁니다.]

    알베르트는 동굴 벽면을 만져보았다.

    암벽등반을 하기에 좋은 벽은 아니다. 경사는 거의 직각이나 다름없다. 중간중간마다 튀어나온 돌부리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없다. 거기에 물기를 머금은 벽면은 누군가의 손이 닿는 걸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라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알베르트가 고개를 젓자 천칭이 한숨을 쉬었다.

    [수련하시죠, 마스터.]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길 바라네. 여길 넘으려면 얼마나 수련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네. 시간도 문제일뿐더러, 여기는 끼니를 때울 만한 것도 없다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수로 쓸 수 있는 수원지가 계단 밑에 있다는 사실이다.

    물이 있다면 며칠은 버틸 수 있겠지. 이렇게 고립될 줄 알았다면, 입구에 있던 벽곡단을 미리 챙겨둘 걸 그랬다.

    무너진 전각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몸 상태를 확인했다.

    갑작스럽게 터진 일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의 상태는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한계 이상으로 운용한 내공 때문에 혈도는 너덜너덜해졌고, 목줄에서 풀려난 내공은 신체 내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난도질당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몸 상태는 호전된 정도가 아니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내공이 혈도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혈도 곳곳에서 흐름을 막던 덩어리들은 전부 녹아있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흡수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찌꺼기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불순했던 내공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내공이 그 움직임을 쫓아간다.

    굳이 알베르트가 내공을 올릴 필요가 없다.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인물을 보는 것처럼, 알베르트가 하고자 하는 행동에 따라 내공이 반응했다. 일을 진행할 때 필요한 공정이 필요 없다. 생각과 동시에 결과가 그 손에 나타났다.

    ‘이상하구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마스터의 머리가 이상한 건 으레 있었던 일입니다.]

    은근슬쩍 심한 소리를 꺼내는 천칭의 말을 무시한 채 알베르트는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몸 상태가 너무 좋아서 말일세.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몸 안의 혈도가 거의 타버렸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이제야 그걸 물어보는 마스터도 마스텁니다.]

    ‘뭘 이런 상황에 또 칭찬하고 그러는 건가.’

    [칭찬한 적 없습니다, 마스터.]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천칭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마스터의 신체 내부도 그렇지만, 팔도 다리도 모두 성하지 않았습니다. 다리는 다 부서졌지, 안쪽은 만신창이지. 제가 아니었다면 움직일 수도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죠. 유피에르가 손을 써준다면 모를까, 아마 그 상태로 1시간만 더 흘렀다면, 마스터는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천칭의 말과는 달리 몸 상태는 좋은 걸 넘어서 최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지팡이 검을 쥐었다. 내공이 들어가자 파르르 떨린 지팡이 검에서 검집이 빠지고, 하얀 검신이 드러났다. 그 위로 검붉은 기운이 생겨났다. 실처럼 펼쳐진 기운은 드리워진다. 검을 잡아타듯이 올라간 실은 이내 형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일렁이던 기운이 차츰 응집되더니 이내 하나의 형태가 되어 검에 떠올랐다.

    검강.

    닿는 모든 걸 파괴하는 전설적인 기운이 알베르트의 손에서 재현되었다. 작열하는 검강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각이 진 면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검사의 형태로 돌아왔다. 알베르트는 내공을 회수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마스터의 사부님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의 몸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

    [마나의 재배열이 있었습니다, 마스터. 지금 마스터는 다시 태어난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저희는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마족들은 다른 말로 부르겠죠.]

    마나의 재배열. 깨끗해진 피부. 상처의 수복. 탁한 기운이 사라진 몸 안의 혈도.

    배운 적 없지만 이미 이해하고 있는 알베르트의 지식은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경험한 것 같구먼.’

    절정에 이른 고수들만이 이룬다는 전설적인 경지.

    지식으로밖에 없는 그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걸 알베르트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른 성취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걸까?

    아무리 사부님의 안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성장 속도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성장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모종의 일로 잊어버린 기억을, 몸이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떨쳐낼 수 없는 감각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사부님과 진중한 대화를 나눠 보자.

    답을 알고 있다면, 그건 사부님밖에 없을 것이다.

    확인할 것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마지막으로 발을 들었다.

    주인의 의사를 알아차린 내공이 순식간에 그 형태를 달리했다.

    [그건 그만두시죠, 마스터.]

    ‘뭘 말인가?’

    [이번에는 안 도와줄 겁니다.]

    ‘눈치 한 번 귀신같이 빠르구먼, 자네.’

    천마군림보를 펼치려던 알베르트는 껄껄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겁니까?]

    ‘무인이란 건 그런 걸세.’

    [드래곤의 콧수염을 건드리는 소리는 잠꼬대로나 하시죠.]

    ‘원, 농담도 못 하겠구먼.’

    떨어진 검을 회수한 알베르트는 잔해더미로 걸음을 옮겼다.

    잔해 위로 엉덩이를 올리자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졌다. 먼지가 일어났다. 땅바닥에 엉덩이를 찧은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잔해의 아래쪽은 텅 비어있었던 모양이다. 먼지가 가라앉길 기다린 알베르트는 잔해 밑에서 삐죽 튀어나온 칼자루를 볼 수 있었다.

    알베르트는 바닥에 반쯤 꽂힌 검을 살펴보았다.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검이었다. 바닥에 꽂혀있기는 하지만, 검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낡은 상태다. 무뎌진 검날은 사람의 피부에 생채기를 내는 것조차 힘들겠지.

    칼자루에는 기괴한 형태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붉은빛이 살아있는 것처럼 물결쳤다.

    [아는 검입니까?]

    천칭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의 손에서 빛나던 바로 그 애검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칼자루를 쥐려던 알베르트는 손을 멈췄다.

    미궁에서 겪었던 여러 사건사고 때문일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천마의 검이 왜 여기에 남아 있는 걸까? 혹시 저걸 쥐는 순간 이곳이 부서져 내리는 건 아닐까. 뭔가 예상치 못한 함정이 나타날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마스터? 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7계층에서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혹시 저 검이 마지막 시련이지 않을까?’

    [낡아빠진 검이요?]

    조심스러운 알베르트의 태도에 천칭은 코웃음 소리를 냈다.

    [설사 함정인들 어떻습니까. 지금 마스터의 상태라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뭔가 일어났으면 좋겠군요. 그럼 마스터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베르트는 천마의 칼자루를 쥐었다. 살짝 힘을 넣자 내공이 주인의 의지에 답했다.

    쑥, 하는 소리와 함께 천마의 검이 바닥에서 뽑혔다.

    바닥에 박힌 검신을 내버려 둔 채 말이다.

    “응?”

    알베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에 쥔 칼자루를 바라보았다.

    말끔하게 검신이 빠져나간 칼자루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마스터.]

    ‘아니, 이건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알베르트의 손에 있던 칼자루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알베르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신의 내공이 칼자루로 빨려 들어갔다.

    “설마 마검인가···!”

    다급히 알베르트는 내공을 억눌렀지만, 그보다 칼자루가 빨아들이는 힘이 더 강했다. 게걸스럽게 식탐을 드러낸 녀석은 순식간에 알베르트의 내공을 반절이나 먹어 치웠다.

    [손을 떼십시오, 마스터!]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랬다네!’

    칼자루의 허기는 그래도 달래지지 않는다. 모든 걸 먹어 치우는 아귀나 다름없다. 알베르트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순식간에 빠져나간 내공 탓에 눈앞이 하얘졌다. 머릿속을 덮치는 현기증은 태연히 넘길 수준이 아니다. 굳게 다문 입 사이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탐욕스럽게 알베르트의 내공을 집어삼키던 녀석의 몸체에서 검붉은 기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검신에 모인 검붉은 기운은 한 가닥, 한 가닥 실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실이 한데 엮인다. 누에가 만드는 고치 같다. 검붉은 실이 짜낸 고치는 점점 크기를 불렸다. 경계선에 각을 만들고, 옆면에 날을 세우더니. 고치는 이내 검의 형체를 갖췄다.

    내공이 빠져나간 허탈감에 시달리면서도, 알베르트는 검강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래. 그랬던 거로군. 내공의 양이 문제가 아니었어. 공정 과정이 더 중요했던 거야. 자네도 보이는가? 이 얼마나 훌륭한···.”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마스터!?]

    천칭이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알베르트의 몸이 붕, 하고 떠올랐다.

    다음 순간, 천마의 검은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

    비상하는 천마의 검에 매달린 알베르트는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휙휙, 하고 귀가 울린다. 몸 전체가 끌려가는 부유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지 않은 것은, 알베르트의 비위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공동의 풍경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기절하는 게 차라리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알베르트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천칭의 목소리가 그의 이성을 계속 깨우고 있었다.

    [마스터! 마스터!]

    ‘좀 닥쳐주면 안 되겠나?’

    사실 자네가 가장 잘하는 건 그놈의 마스터 소리 아닌가?

    [멀쩡하시군요. 걱정해서 손해 봤습니다.]

    ‘······.’

    천칭의 어조는 평탄하기 짝이 없다. 괴로운 건 자신이 아니다. 이 죽을 맛을 겪는 건 알베르트 혼자였다. 우라질. 참다못한 알베르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천장의 끝이 가까워졌다.

    막다른 곳이다. 나갈 수 있는 통로는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죽는다. 아무리 검강의 파괴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천마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검풍이 몰아쳤다.

    천장과 가까워질수록 검붉은 기운은 더 짙어졌다.

    『그리하여 그대의 손에 검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으니.』

    짙어진 색이 점차 강렬해졌다.

    깨져나갈 것처럼 부르르 떠는 천마의 검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 안쪽에서 새어나간 빛줄기는 사방으로 갈라졌다. 쏟아지는 빛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아기 새와 같다. 검 안쪽에서 발버둥 치는 새끼의 발길질에 점차 빗금의 수가 늘어났다.

    검에서 시작된 빛줄기는 멈추지 않는다.

    점과 점을 잇듯이 나아가던 빛줄기가 비상하는 알베르트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줄기가 모여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자아낸 빛은 꽃잎을 피웠다.

    하나, 둘, 셋. 피어나는 꽃잎의 수는 순식간에 여덟 개로 늘어났다.

    정갈하게 핀 꽃잎의 끝에 화려한 봉우리가 맺혔다.

    빛의 꽃이 어둠을 몰아냈다.

    공동 아래에서 피어난 여덟 개의 꽃이 천장을 수놓았다.

    몽환적인 광경에 알베르트는 시선을 빼앗겼다.

    『진정 모든 것을 베어내는 마음의 검이 그대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덟 개의 꽃봉오리가 만개했다.

    그 안에서 꽃의 형상을 취한 검이 떠올랐다.

    꽃의 검은 알베르트를 수호하듯이 그의 주변을 선회했다.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더니 새하얀 꽃잎이 눈앞에서 흩날렸다.

    승천하는 여덟 개의 꽃.

    알베르트보다 먼저 비상한 화검(花劍)은 빛의 궤적을 남겼다.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알베르트는 천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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