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미궁 너머(3)
무너진 무림맹의 구조물 중 무사한 건물은 한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이한 기운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전각. 천마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괴이한 기운을 흘리는 건물은 그가 펼친 천마군림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맹주, 그대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면 본좌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
마치 구름을 밟는 것처럼, 하늘을 걷던 천마는 전각을 향해 내려왔다.
그 주변에서 검붉은 검강이 둘러진 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떠오른 검의 수는 여덟 자루다. 천마의 손짓에 따라 사출된 여덟 개의 검은 전각을 향해 떨어졌다. 전각의 지붕과 검강을 두른 검이 부딪친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쿵, 하고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검은 전각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천마의 입가가 씰룩였다.
여덟 개의 검이 전부 꽂혔는데도 불구하고 전각을 둘러싼 무언가를 뚫지 못했다. 허리춤에 있던 그의 애검이 손아귀로 들어왔다. 이미 손속에 자비가 없어진 천마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검붉은 빛줄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쏟아지는 빛 안에서 검과 하나가 된 천마는 전각을 향해 쇄도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전각을 보호하던 막이 깨져나갔다.
막이 깨졌음에도 천마는 멈추지 않는다. 전각을 그대로 꿰뚫은 그의 뒤를 쫓아 여덟 개의 검이 전각 안쪽으로 떨어졌다. 검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폭발음이 울렸다. 전각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전각 바닥에 꽂힌 천마의 검이 부르르 떨렸다. 그 검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응집되는가 싶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각 안으로 따라 들어왔던 검이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혼자서 이곳에 들어오다니!”
“천마라는 그 이름, 다시는 무림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장로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손이 번거로워지는 게 귀찮아서 검을 모두 출수했던 건데, 숨을 멈춘 장로보다 숨을 쉬고 있는 장로의 수가 많았다. 그들이 감싸듯이 지키고 있는 것은 탁한 검은 빛을 내뿜는 무림의 보물, 신석(神石)이다. 분명 신성한 하얀빛을 내뿜는 신물이었을 텐데, 지금은 탁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들. 결국, 무지몽매한 너희가 화를 불러오는구나.』
낮게 흘러나온 천마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의 노기에 검이 화답했다. 전각의 바닥에 꽂혀있던 천마의 애검에서 검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조심해라!”
“모두 흩어져!”
지면이 갈라졌다. 쩌저적 갈라진 틈은 전각의 바닥을 장악했다. 장로들의 발밑에서 생겨난 균열에서 검붉은 빛이 치솟았다. 전력을 다한 그들의 경신법은 무용지물이다. 솟아오른 빛에 먹혀버린 장로들은 형체를 잃고 쓰러졌다.
예외는 없다.
천마의 애검이 다시 그의 검집으로 수납되었을 때는, 천마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전각 안에 서 있지 못했다.
남은 건 탁한 기운을 뿌리는 신석뿐이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검은 기운이 뿔뿔이 흩어졌다. 금이 생겨난 신석은 곧 두 개로 쪼개졌다.
『귀찮게 됐군.』
우웅, 하는 검명과 함께 천마의 검이 주인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쪼개진 돌 사이에서 나온 건 익숙한 맹주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가 품고 있는 기운은 사이하기 짝이 없다. 천마가 알고 있던 맹주는 없다. 눈앞에 있는 건 맹주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이다.
『너는 뭐냐?』
천마의 물음에 맹주의 탈을 쓴 괴물은 웃었다.
『건방지구나, 인간. 짐이 바로 마왕(魔王)이니라.』
*&*
알베르트는 무너진 전각 안에서 눈을 떴다.
눈에 익은 건물이다. 기억 속에 있던 건물보다 더 낡고,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걸 제외하면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몸이 가볍다. 알베르트는 두 손을 보았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손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아가씨의 손을 보는 것 같다. 연미복 위를 더듬어본 그는 뭔가 허전하다는 걸 눈치챘다. 연미복을 제외한 옷들이 어느 것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자네가 벗은 건가?”
[눈 뜨자마자 하는 소리가 겨우 그겁니까, 마스터?]
천칭의 맥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아닌 모양이구먼.”
[정말인지,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마스터는 모를 겁니다. 그 비루한 몸뚱아리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그대로 뒀으면 미궁에서 끝났을 목숨,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바로 저입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구먼. 고맙네, 천칭.”
[······.]
“뭔가? 이걸로는 부족했나? 정말로 고맙네. 내 진심을 담은 말이네.”
[아뇨. 오글거리니 그만뒀으면 좋겠군요.]
“오늘 자네 참 이상하구먼 그려.”
몸이 가볍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림의 신석이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신석. 제국에서는 마정석이라고 부르는 물건. 이곳에 있던 신석은 수도에 있던 마정석과는 다른 것이었다.
“1차 대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자네는 알고 있나?”
[글쎄요. 하지만 마스터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마족이 침략한 일, 제국의 역사책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아닐세. 그건 사실이 아니네. 무림의 보물이었던 신석을 우리 제국이 훔쳐간 게 모든 일의 원흉이었네.”
일찍이 유피에르가 알베르트에게만 해줬던 이야기다.
어째서 마족이 인간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지.
마족과 인간 사이에 벌어졌던 1차 대전쟁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게 무슨 말이야, 유피?’
‘원래 우리 세계와 너희 세계는 교차할 일이 없던 평행선이었어. 하지만 너희 제국의 초대 황제라는 이실리아가 그 경계선을 무너뜨렸어. 블러드 로열에 있는 마정석. 그 마정석이 원래 누구의 물건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신석. 제국에서는 마정석이라 부르는 물건이다.
무림은 이 신석이 주는 힘을 바탕으로 무공의 경지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그 돌에 담긴 강력한 힘을 알아차린 제국은 신석에 손을 뻗었다. 그것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림인은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무공뿐.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를 방어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나신이나 다름없다.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장거리에서, 제국의 마법사들의 포격을 가했다. 신석을 수호하던 성지는 쑥대밭이 되었고, 제국은 유유히 신석을 가져갔다.
이에 분노한 무림인들은 하나가 되어 제국으로 진격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역사가 말하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제국에 패했고, 그들은 마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다행인 것은 무림 내에 또 다른 신석이 있었다는 거지. 하지만 그 신석은 제국이 가져간 신석만큼 영험한 물건이 아니었네. 결국, 신석의 효능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계가 있었고, 그 선은 무림에서도 정파로 불리는 무림인들만 누렸던 것 같네.”
그 결과 사파는 끝도 없이 추락했다.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초기에는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무림인이 신석의 힘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석의 효능을 더 누리는 정파의 성장을 사파는 따라갈 수 없었고, 결국 사파는 신석의 힘으로부터 멀어졌다.
떨어지고, 떨어졌다. 끝도 없이 추락한 사파인들은 멸시와 핍박을 당했고, 그 불만은 다시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파로 향했다.
그 혼돈의 시기에, 한 사내가 일어났다.
“천마는, 그런 사파를 다시 하나로 화합하고 신석을 모두와 누릴 생각이었던 것 같네. 하지만 무림맹까지 와서 그는 실패했네. 신석은 맹주의 손에 의해 변했고, 이곳에 마왕이 강림했네.”
[그게 마스터가 본 마족의 진실입니까?]
“그렇다네. 무림인들의 진실이지.”
무림에 강림한 마왕은 천마가 제압한 것일까.
결과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곳에 신석이 없다는 사실이다. 신석의 힘으로 더 높은 무공을 연마하던 정파도, 사파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과욕이 파멸을 불러온 거죠.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건 인간밖에 없습니다. 무림인들은 그 대가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인간이라고 불러줄 필요가 없습니다. 유혹에 빠져버린 인간의 말로. 저주받은 이들은 그저 마족입니다.]
같은 인간이었음에도 그들이 제국이 부르는 호칭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마족으로 여긴다면 마족이라고 불러라. 그들은 스스로를 마족이라고 자칭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다른 이종족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속죄인 걸까.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죄를 받아들인 걸까. 알베르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슬픈 일이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네의 말은 차갑기 짝이 없구먼.”
[용서해줄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자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힘을 추구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네. 분에 맞지 않는 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사람일세.”
무림은 멸망했다.
천마는 마왕과 대적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현재 마족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무림의 흔적은 아직 남아있는 건지, 간간이 무인이라는 이들이 마족 사이에 존재했다. 제국의 기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을 보이는 자들. 하지만 그들조차도 조상이었던 무림인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힘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제약까지 붙어 있었다.
마족들은 힘을 쓰면 몸이 투명하게 변하는 저주와도 같은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힘을 전부 사용하고 나면 그들은 빈껍데기가 되었다. 껍데기, 즉 마족의 말로는 곧 망자였다.
그것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저주를 받았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천칭의 말처럼, 무림인의 과욕이 그런 결과를 불러온 것일까?
그렇다면 제국의 결말은 피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모든 욕심의 시작이 된 신석. 그 신석을 훔쳐온 제국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마물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타왕국과 북부에서 내려오는 이교도의 손에서 신민을 지킨다. 그러나 그 힘은 훔쳐온 것. 본래는 제국이 누려서는 안 될 힘이다.
그것도 과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자네는 알고 있었지? 마족이 인간이라는 것을.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자네는?”
[말했을 터입니다, 마스터. 저는 세상을 대변하는 일곱 개의 의식 중 한 성좌를 차지하고 있는 고귀한 자. 천칭입니다.]
“천칭이 대체 무엇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천칭(天秤)입니다, 마스터.]
천칭은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다. 한 번 더 알베르트는 천칭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저는 천칭입니다. 그것 외에는 대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처음 만나는 날 말씀드렸습니다.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는 알려드릴 수 없다고요.]
“······.”
알베르트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입 안에서 떠도는 그 물음만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만 더 대답해주게. 자네는 내가 아가씨를 구하길 바라나?
사실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물어봤어야 했던 말이다.
그런데 알베르트는 그 물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회귀한 그의 옆에서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 천칭. 당연히 그의 목적도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가씨를 구하는 게 그의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알베르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천칭의 정체가 무엇인지, 천칭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천칭의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들어야만 했다.
[제 의사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마스터의 바람을 따라갈 뿐입니다.]
돌아온 천칭의 대답은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