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미궁 너머(2)
천칭은 떨어지는 암석 사이를 돌파했다.
파괴할 수 있는 돌덩이는 쳐낸다. 그럴 수 없는 암석에는 몸을 내준다. 마나의 우선순위는 허리와 발이다. 어깨와 팔까지 두를 여유는 없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오른쪽 손을 들었다. 약지와 새끼가 부러졌다. 그래도 속도가 늦춰진 돌은 천칭의 이마에 상처를 냈을 뿐이다. 왼쪽 어깨가 내려앉는다. 조금 전에 탈골됐던 탓이다. 한 번 빠지기 시작한 어깨는 망가진 장난감과도 같다. 위팔의 머리를 뱉어냈다. 왼쪽 팔이 축 늘어졌다.
왼쪽 팔은 쓸 수 없다. 오른쪽 팔은 아직 무사하다. 손은 쓸 수 없다. 암석은 계속해서 떨어진다. 눈과 머리를 보호한다. 오른쪽 팔꿈치가 꺾였다. 다행히 노선이 틀어진 돌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끝이 가깝다.
5계층의 입구를 본 천칭은 추락하는 암석을 뒤로 한 채 뛰어올랐다.
간신히 5계층에 도착한 천칭은 잠시 몸을 숙였다.
그가 멈추자 뒤따르듯이 올라오고 있던 하얀 빛이 그대로 흡수되었다. 내준 것은 무엇인가. 왼팔과 오른팔이다. 다리와 허리는 무사하다. 마나도 어느 정도 수급했다. 덩어리진 마나는 어쩔 수 없다. 급한 대로 쓸 수 있는 마나를 바로 기용한다. 한계를 넘어버린 신체는 마나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마스터가 깨어나면 한바탕 욕을 퍼부어줘야겠군요.]
쉴 틈도 없이 천칭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몸은 이미 진작 한계를 넘었다. 그러나 쉴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발을 멈췄다가는, 영원히 잠이 들 확률이 높았다.
잠시 후, 그가 있었던 5계층의 입구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5계층의 안쪽은 광활한 홀이었다.
좌우 벽면에 늘어선 망자들이 형형색색 한 눈으로 이곳에 들어온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검. 낡았지만 통일된 붉은 옷을 입은 망자들. 본래라면 꽤 위압감을 풍겼을 것 같은 모습이다. 여기까지 도착한 이를 맞이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미궁의 여파를 이곳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떨어지는 암석에 파묻힌 망자들 대부분이, 이미 목숨을 잃은 뒤였다. 하얀빛으로 화해 마스터의 몸으로 들어오는 마나를 보며 천칭은 코웃음 소리를 냈다.
[겉멋만 든 것은 인족이나 마족이나 매한가지군요.]
어렵게 지나갈 필요는 없다. 망자들이 모두 암석에 파묻히기를 기다린다. 무너지는 구간을 피한 천칭은 숨을 돌렸다. 잠시 후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진 망자를 확인한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추적자는 아직 천칭의 발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무너지는 바닥. 불안정한 천장.
쫓기고 있는 건 여전하지만, 천칭은 여유를 되찾았다.
충만히 차오르는 마나가 기분을 들뜨게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다.
만약 알베르트가 마법만 구사할 수 있었더라도, 천칭은 그의 몸을 빌려 여러 기적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체의 이상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마법이라는 힘이었다.
6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다른 곳과 달리 어떤 장치도 없었다.
망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통로를 밝히는 야명주의 빛을 따라 천칭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1계층과 마찬가지로 문을 가로막고 있는 한 망자를 볼 수 있었다.
푸른색의 장식품을 어깨에 단 망자가 한 손에 든 것은 커다란 도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다가오는 천칭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손을 모은 그는 천칭을 향해 묵례를 올렸다. 이성이 없는 망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알베르트가 이곳에 있었다면, 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올렸겠지만 지금 그 이성을 인계하고 있는 건 천칭이었다.
[꼴값 떨고 있군요. 죽었으면 진작 흙으로 돌아갈 것이지. 무슨 미련이 남은 겁니까?]
낡은 도를 뽑은 그는 천칭을 응시했다.
아마도 선수는 양보해주겠다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며 천칭은 제자리에 앉았다.
싸울 필요는 없었다.
늦든 빠르든, 어차피 곧 이 6계층도 무너져 내린다. 그 틈을 노려 통과하면 될 뿐인 이야기다. 눈앞의 망자도 무인이다. 검을 들지 않은 천칭을 상대로 먼저 도를 휘두르진 않을 것이다. 천칭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가부좌를 틀고 내부의 상처를 달래는 그를 보고 망자는 도를 거두었다. 준비되기를 기다리겠다는 건지,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신체 내부를 확인한 천칭은 얼굴을 찌푸렸다.
덩어리 진 마나가 너무 많다. 닥치는 대로 마나를 흡수한 몸은 이미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신체는, 마나를 담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부서지기 직전의 그릇을 보는 것 같다. 마스터의 안전을 위해서 빨아들인 마나를 주변에 방출시키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천칭은 일단 덩어리를 부수는 것부터 시작했다.
첫 번째 돌덩이를 깨부수자 뜨거운 마나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꾸역꾸역 나온 마나로 일단 내상부터 회복한다. 상처를 수복하는 건 무리다. 마법을 배우지 않은 알베르트의 몸으로는 힐(Heal)조차 구사할 수 없다. 루미에르 교가 사용하는 신성력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룰 수 있다고 한들, 천칭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천칭은 하나의 벽을 더 만들기로 했다. 알베르트는 혈도라고 부르는 길목에 마나로 벽을 세워 또 하나의 길을 만든다. 튼튼하지는 않다. 아마도 마나를 달린다고 치면, 일회용밖에 되지 못할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전신의 혈도를 새로 코팅한 천칭은 두 팔을 확인했다.
왼손은 어깨가 빠져있다. 꺾인 오른손으로는 맞출 수 없다.
벽 쪽으로 다가간 천칭은 어깨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피가 튀어 올랐다. 기분 나쁜 소리가 뒤를 잇는다. 천칭은 왼쪽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신경은 살아있는 건지, 약하게나마 반응했다. 하지만 어깨가 덜렁거리는 건 여전하다. 마나로 관절을 맞물린다. 덜렁거리는 어깨가 위팔의 머리와 다시 결합했다. 손가락을 쥐고, 펴본다. 움직인다. 꺾인 오른쪽 손가락을 잡은 그는 다시 원위치로 되돌렸다.
네 번째 손가락과 다섯 번째 손가락. 안쪽으로 꺾인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해물은 되지 않는다. 마나를 이용한다면 억지로 움직이는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다시는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 마스터의 목숨값과 손가락을 천칭에 올려본다. 당연히 무게는 마스터의 목숨값으로 내려갔다.
살아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치료야 마스터가 그렇게나 믿고 있는 유피에르에게 부탁해보죠.]
임전 태세를 마친 천칭은 망자를 보았다.
천칭의 준비가 끝난 걸 알았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를 자신의 어깨에 올린 망자는 천칭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천칭은 다가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본 천칭은 숨을 죽이고 소리에 집중했다.
미궁 내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벽이 무너지는 소리.
5계층을 집어삼킨 거구(巨口)는 곧 이곳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래도 6계층은 꽤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양이다. 천칭은 두 발을 털었다. 먼저 무너지는 곳은 망자와 그가 디디고 있는 바닥이다. 망자가 추락할 것을 계산에 집어넣은 그는 벽면을 타고 그대로 달릴 생각이었다. 마나는 충분하다. 천칭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망자의 도에서 붉은 오러가 일렁였다.
천칭은 망자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다.
탁해진 눈동자는 흐릿하다. 제대로 상이 잡히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무언가 기묘한 힘이 담겨있었다. 천칭은 손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팡이 검에 손가락이 맞닿아 있었다. 검과 도. 망자와 마스터. 발 쪽으로 모았던 마나가 천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천칭은 일단 마나를 달랬다.
끓어오르는 마나를 진정시키고 다시 발쪽으로 길을 인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마나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았다. 천칭의 의사에 반대하듯이 마나는 다시 신체를 달구기 시작했다.
이건 마스터의 투기다.
눈앞의 무인과 싸우고 싶다는 마스터의 의지였다.
[훌륭한 무인이라. 그렇군요, 마스터. 마스터는 이미 훌륭한 무인입니다.]
천칭은 마나의 흐름을 붙잡았다.
억지로 비틀고, 차갑게 식힌 마나를 완벽히 수중에 넣었다.
[하지만 저는 무인이 아닙니다. 마스터를 살릴 수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되도 상관없습니다.]
호승심이 보이는 망자의 눈빛을 무시한 천칭은 무너지는 바닥에서 발을 굴렀다.
천칭의 발끝에서 시작된 마나는 지면을 흔들었다. 알베르트가 보인 것에 비하면 세 발의 피. 단순히 마나를 땅에 넣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힘과 합쳐진 충격은 순식간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망자의 눈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이미 늦은 뒤다.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망자를 뒤로 한 채 천칭은 벽면을 달려 6계층의 출구를 통과했다.
[멍청하다니까요, 마족들은. 나는 당신들을 절대로 좋아할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6계층을 뒤로 한다.
X 표시가 새겨져 있던 7계층은 이제 천칭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7계층은 지금까지의 미궁과는 사뭇 다른 장소였다.
미궁에서 보았던 인공벽이 사라지고, 동굴의 그것을 닮은 커다란 암굴이 나타났다. 바닥이 갈라졌던 균열이나 벽면에 새겨진 금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동굴 바닥과 벽면을 만져본 천칭은 이곳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천칭이 지나온 통로에서 미궁이 무너지는 붕괴음과 무거운 충격 소리만이 들려왔다.
마스터가 만든 균열은 7계층 아래의 미궁만 붕괴시켰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래도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천칭은 걸음을 옮겼다.
공동 안쪽은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칭은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불은 필요하지 않았다. 동굴을 구성하는 검은 광석은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었다. 물길이 트여 있는 건지, 동굴 한쪽에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보였다. 물줄기는 끊임없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구의 약수는 이 물이었던 모양이군요.]
천칭의 머릿속에서 지도가 겹쳐졌다.
7계층의 밑은 미궁의 입구가 있던 장소였다. 과연 그 입구가 지금도 온전하게 있을까? 붕괴의 진행도를 봤을 때, 미스릴 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식수의 위치를 확인한 천칭은 너덜거리는 신체에 힘을 넣었다. 커다란 마수가 입을 벌린 것 같은 공동 속으로 진입했다. 길은 점차 좁아 들었다. 외벽이 가까워지고 성인 남성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길만이 이어진다. 움직이기 힘들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천장은 끝없이 높아졌다.
비좁은 외길을 빠져 나온 천칭을 맞이한 건 끝없는 계단이었다. 까마득한 계단은 마치 보이지 않는 천장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마스터의 갈증이 느껴졌다. 한차례 위기를 넘기자, 이 신체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싶은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분을 조금 보충해둘 걸 그랬다.
[멈출 수는 없겠군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몸을 쉴 필요가 있었지만, 마스터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
이곳에서 멈췄다가는 틀림없이 죽는다. 신체 어느 한 부위를 못 쓰게 되더라도,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천칭은 망가진 몸에 채찍질을 가했다. 계단을 오르고, 오르고. 올라서. 그 정상을 본다. 입 안에서는 단내도 퍼지지 않았다. 푸석푸석한 비릿한 향이 감돌뿐이다.
계단의 끝에는 오래된 문이 있었다.
알베르트가 의식이 있었다면, 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문 안쪽은 황량한 풍경이었다. 일주문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단 하나뿐인 전각(殿閣)이 벽 쪽에 붙어있었다. 전각의 위치는 지도에서 X표시가 되어있던 바로 그 장소다.
천칭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