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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미궁 너머(1) (18/200)

 # 18

미궁 너머(1)

[진짜로 방법이 있는 겁니까, 마스터?]

‘나도 확신은 없네. 하지만 아마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수련조차 안 하지 않았습니까? 마스터가 한 건 그저 명상입니다.]

‘명상이지만 명상이 아닐세. 그게 수련이라는 거네.’

[마스터가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군요.]

알베르트는 독기로 넘쳐나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에 보았던 모습과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광경이다. 기분 탓인지, 고여 있던 웅덩이가 좀 더 많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뇨, 웅덩이의 수는 그대로입니다.]

‘그런가?’

알베르트는 몸 안에 흐르는 내공을 확인했다.

사부님이 직접 때려 박은 이 심법은 특이하게도 단전에 내공을 모으지 않았다. 축기(畜氣)를 하는 곳은 몸 전체다. 비정상적으로 커진 혈도가, 알베르트의 몸 전체가 단전을 대신하고 있었다. 단전에서 모은 내공을 운용할 필요가 없다. 알베르트의 의지가 향하는 것만으로도 내공은 그 뜻을 따라왔다.

심법의 특성 상 많은 내공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전이라는 기관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심법으로 대성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적으로 외부의 기를 다른 방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영약이든, 마석이든, 마정석이든. 혹은 주화입마에 빠져 망자의 길로 떨어진 무인의 내공이라 해도 말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돌부터 바닥에 깔아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곳을 건너는 게 아니네.’

[그럼 어떻게 통과하실 생각입니까?]

‘이 통로를 부숴버릴 걸세.’

알베르트가 꿈속에서 보았던 걸음은 총 세 걸음이었다.

첫 걸음에 담긴 힘은 모든 걸 파괴하는 발자국이었다.

두 걸음에 담긴 힘은 모든 걸 재생하는 발자국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걸음에 담긴 힘은···.

‘내가 펼칠 수 있는 건 첫 걸음이 한계네. 그것도 온전히 펼쳐낼 수 있을지, 자신은 없네.’

[그냥 다른 수를 강구하죠, 마스터. 불확실한 수를 쓰는 건 좋지 않다고 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천칭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패한 뒤에 다른 수를 생각해도 늦지 않네. 이번만큼은 내 고집대로 해보겠네.’

[늙은이의 똥고집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까짓 것, 한 번 부딪쳐보시죠.]

알베르트는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렸다.

기억 속의 사내와 마찬가지로 두 손으로 뒷짐을 진 그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주인의 의사를 알아차린 전신의 내공이 알베르트의 의지에 대답했다.

달린다. 혈도 전체의 내공이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돌고 돌고, 끓어오른다. 사부님이 알베르트의 혈도를 타통시켰을 때처럼, 온몸이 뜨겁게 타올랐다. 아직까지는 통증이 없었다. 신체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졌다는 느낌이 강할 뿐이다.

내공이 점점 얇아졌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실처럼 가늘어진 내공은 아직 알베르트가 원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주천하는 내공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혈도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착실하게 단계를 나아간 뒤 이곳을 밟으라는 건지 아픔이 달리기 시작했다.

알베르트의 시야에 붉은 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마스터! 그만 두십시오. 이대로는 오히려 마스터의 몸이 상합니다!]

천칭의 경고를 무시한다. 아직, 아직이다. 알베르트의 몸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입술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비릿한 쇠비린내가 입안에서 퍼졌다. 코에서 흘러내린 피일까. 그렇지 않으면 눈에서 흘러내린 걸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

천칭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으나, 알베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것처럼, 가늘어진 내공은 어느 새 얇은 바늘처럼 변해있었다.

알베르트의 머리에서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천마의 상징과도 같은 빛깔이 감도는 그 순간, 알베르트는 발을 들었다.

“천마군림보.”

*&*

두 눈을 의심했다.

이 분의 뒤를 밟은 이후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이건 이미 그런 단계를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은, 아니. 우리는 신화 속에 있었다.

『가서, 맹주에게 전해라.』

검황과 도황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파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두 산맥은 이미 무너진 토산에 지나지 않았다.

단 세 걸음.

주군이 보인 세 번째 발걸음에 검황과 도황은 전의를 잃었다.

『천마가, 이곳에 왔노라고.』

남자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아른거리는 눈물 때문에 하늘을 걸어가는 주군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꿈의 끝이, 이 앞에 있었다.

*&*

미궁 바닥이 폭사했다.

일순간 일대를 뒤집어 삼키는 굉음이 울렸다. 알베르트의 발밑에서 시작된 균열은 수십 갈래가 넘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진 균열은 마치 거북이 등껍질 같았다. 지면이 버티지 못하고 갈라졌다. 미궁의 벽도 마찬가지다. 지지할 기반을 잃은 벽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수십 개의 빗금이 떠올랐다. 벽이 힘을 잃자 다음 차례는 천장이었다. 날개 없는 암석이 알베르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스터!]

천칭의 경고도 소용없다.

추락하는 암석은 한두 개가 아니다. 무너지는 천장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눈과 코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알베르트는 힘없이 고개를 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내 그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몸이 흔들린 다음 순간, 알베르트는 암석을 피했다.

[정말로 곤란한 마스터입니다.]

불평은 길지 않았다. 후에 마스터가 정신을 찾고 난 후에 털어놓아도 늦지 않는다.

알베르트의 몸을 인계한 천칭은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가 부서졌고, 망가졌는지. 사용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있는가.

오른손, 왼손, 왼발. 다 문제없이 작동한다.

다만, 오른발은 발꿈치 쪽이 이상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처럼 잘 말을 듣지 않는다. 마나가 지나간 자리가 타버린 것 같다. 빠르게 뛰는 건 무리다. 억지로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그 뒤가 문제다.

마나는 없다고 해도 좋다. 얼마나 쥐어 짜냈는지, 몸 안에 잔류한 마나는 오히려 주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신체 내부가 완전히 타버렸다. 분에 넘치는 힘을 사용한 대가다. 회복시키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상태의 마나는 사용할 수 없다.

먼저 통각을 차단한 천칭은 몸을 꺾었다.

그 옆으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무너지는 미궁을 돌아본다. 살아남을 수 있는 구간을 탐색한다.

전진하는 건 무리다.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 하지만 퇴로도 이미 끊긴 지 오래다. 떨어진 암석들이 길을 막아버렸다. 아직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천장이 전부 무너지기 전에 몸을 빼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일순간 천장이 무너진다면, 마스터가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다른 수를 강구한다.

벽이 무너지는 미궁은 더 이상 계층의 의미가 없다. 차곡차곡 단계별로 밟아가라는 뜻이었을 텐데, 휑하니 안쪽의 모습을 드러낸 미궁은 망자와 온갖 장치가 가득했다.

천칭은 지도를 떠올렸다.

표시가 있던 곳에 문지기와 독소가 있던 길을 보아, 이곳은 총 7계층으로 이루어진 미궁이었다.

뒤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나가는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미궁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방법이 있었다.

판단을 마친 천칭은 몸을 돌렸다.

부서지는 미궁의 벽을 몸으로 무너뜨렸다.

[이런 식으로 부려 먹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 마스터는 이걸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요? 어떤 식으로든 제가 간섭할 거라고 말이죠.]

기분 나쁜 전 마스터의 모습을 떠오른다.

필요할 때만 자신을 부려먹고, 그렇지 않을 때는 철저히 물건으로 대했던 사람. 물건은 물건이다. 절대 사람인 척하지 말아라. 천칭의 의지는 상관없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을 외면했다.

천칭이 품은 감정이 알베르트의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숨길 수 없는 혐오감이 그 표정에서 배어 나왔다. 자신을 알베르트 란이라는 남자에게 보낸 것. 그 여자는 분명 어떤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이 맹목적인 남자는 모른다. 아리시엘 루드비히라는 인간이 얼마나 일그러진 사람인지.

머리로 떨어지는 암석, 막을 수 없다.

왼쪽 어깨를 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왼팔이 빠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신경에 이상은 없다. 관절이 빠졌을 뿐이다. 발은 멈추지 않는다. 머릿속의 지도와 이곳을 비교했을 때, 분명 이곳은 4계층인 장소다.

가부좌를 튼 망자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로 암석이 떨어지고, 그들은 하얀빛으로 화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들을 지난 천칭은 왼쪽 어깨를 맞췄다.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다. 통각이 돌아온다면 비명이 절로 새어 나오겠지만, 지금은 별개의 문제였다.

아픔도 살아있어야 느낄 수 있다.

죽고 나면 모든 게 끝났다.

망자들의 빛이 알베르트를 쫓아왔다.

우습게도, 죽어버린 망자의 마나가 알베르트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내공심법이라는 겁니까, 그야말로 저주받은 힘이지 않습니까.]

강력한 힘은, 그에 맞는 또 다른 힘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이 힘은 분명 세상의 균형을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세계의 천칭을 대변하는 제가 직접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니,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천칭은 4계층의 길목을 지나 5계층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어두운색으로 물든 암석 기둥이 보이는 공간이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아다만티움(Adamantium)이라는 걸 천칭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아다만티움 기둥만이 멀쩡하다는 것이다. 주변 벽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반쯤 반파된 천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이 마스터는?]

알베르트가 취한 행동은 간단했다.

그저 발을 내딛는다. 신체의 마나를 가늘게 만들어 바늘과도 같은 찌르기를 발꿈치에서 지면으로 꽂았을 뿐이다. 마나를 대지로 흘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파급력을 불러올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단순히 마나를 흘린 게 아니다. 바늘과도 같이 날카로웠던 마나. 마나라고는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안쪽을 찔렀다.

자연.

만물에 깃든 모든 순환의 힘. 그 순환의 사슬에 알베르트는 간섭했다.

[분명 자각도 없이 한 짓이겠죠.]

아다만티움 기둥에 몸을 기댄 천칭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머릿속에 때려 박는다.

5계층과 6계층. 미로와도 같던 두 계층은 이곳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안쪽에 있는 계단은 분명 무너져 있으리라.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궁이 좀 더 부서져야 했다. 천칭은 신체로 흘러들어온 마나를 상처 부위로 인도했다. 끓어올랐던 마나는 진정되었다. 곪아버린 상처를 달래기에는 거친 마나였지만, 이곳에서 전진하기 위해서는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내부를 마나로 두르고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천칭은 천장을 보았다.

떨어지는 암석을 시야에 넣는다. 밟고 올라가야 하는 돌을 확인한 그는 기둥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갈처럼 흩날리는 돌 부스러기는 쳐낼 필요가 없다. 생채기가 늘어나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부수고 피해야 하는 건 암석이다. 기둥 끝에 도착한 천칭의 눈에 마나가 흘렀다.

5계층으로 보이는 통로가 천장 끝에서 보였다.

넓어진 시야 사이로 길을 그렸다. 밟아야 하는 곳, 지지면으로 쓸 수 있는 곳. 쓸 만한 기저면은 지금 천칭이 서 있는 아다만티움 기둥뿐이다. 안정성이 떨어지면 제대로 된 움직임이 나올 수 없다. 좀 더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 천칭은 그 사고를 기각했다.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5계층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무너지는 게 늦을 뿐이지, 5계층도, 6계층도. 어쩌면 7계층도 그대로 무너질 수 있었다. 지금은 미궁에서 탈출하는 게 무엇보다 최우선 순위였다. 시간이 없었다. 계산을 마친 천칭은 기둥에서 뛰어올랐다.

빗금이 가득한 벽면을 밟는다.

발이 닿는 순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벽이 무너졌다. 와르르 무너지는 벽돌 사이에 천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자리에서 치고 올라간 그는 떨어지는 암석을 밟고 있었다. 어두운 시야 사이로 덩어리와 같은 돌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머뭇거리는 순간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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