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천마의 유산(4)
[일단 오늘은 물러나죠. 마스터의 상태부터 천천히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편이 좋겠군.’
[저와 함께인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죠. 마스터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스터의 정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천칭이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어려운 소리를 하고 있구먼.’
[마스터만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전 마스터는 제가 따로 설명해드릴 필요조차 없었죠.]
‘아가씨 말인가?’
[네, 아리시엘 루드비히 말입니다.]
그리운 이름을 들은 알베르트는 찬란했던 아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생각했던 거지만, 정말로 아름다웠던 분이었다. 미모만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도에서 이름 난 가문의 영애들과 아가씨를 비교하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알베르트의 눈에는 아가씨가 더 예뻐 보였지만, 그건 그의 주관이 섞여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교회에 나간 아리시엘 아가씨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해서는 그런 매력을 가질 수 없다. 명석한 두뇌와 압도적인 마법 실력. 마나의 축복을 받은 아가씨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류를 만들어냈었다. 그 신비함에 혹해서 몰려드는 늑대가 얼마나 많았던가. 마치 불에 이끌리는 불나방처럼, 수없이 많은 늑대가 아가씨의 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늑대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늑대들의 배경이나 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아리시엘 아가씨의 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불타오르는 저택에 머물러 있었다. 저택의 참사를 겪고 난 아가씨는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고, 무척이나 불안정한 상태였다. 언제나 함께 했던 알베르트도 그 때의 아가씨에게는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아카데미와 사교회에서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지만, 혼자가 되는 저택으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망가졌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한다. 아가씨에게 그 사건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였는지,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도.
그렇기에 그는 아가씨를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던 식솔들을 찾아 헤맸고, 그 과정에서 유피에르와 만나게 되었다. 인형사 유피에르 바토리. 아름다운 13황녀의 모습을 떠올린 알베르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녀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네, 머리가 똑똑한 거로 따지면 따라갈 사람이 없는 마녀였습니다. 하지만 제 마스터로 어땠는가를 묻는다면, 솔직히 지금 마스터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어쩐 일로 자네가 날 높이 쳐주는 건가?’
[전 마스터는 이렇게 제가 말하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제 의지가 나서는 걸 허락했죠. 함께 있음에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다고 할까요. 그녀는 절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물건은 물건으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 아리시엘은 절 물건으로 대할 뿐이었죠.]
‘그건···. 아니, 아가씨도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을 걸세. 그분의 마음씨는 따뜻하기 짝이 없다네.’
[제가 아는 전 마스터의 이미지와 마스터가 아는 이미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전 마스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였습니다. 특히나 마족을 죽이는 데는 그 누구도 겨룰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였죠. 제국의 그녀를 수호자라고 불렀지만, 마족은 학살자라고 부르지 않았을까요?]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세나.’
냉철하게 흘러나오는 천칭의 말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추억을 더듬는 거라면 모를까, 아가씨에 대한 험담은 듣고 싶지 않았다.
[마스터의 의향이 그렇다면 그만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 명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 마스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저밖에 없습니다. 마스터의 생각과는 달리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호인(好人)이 아닙니다. 철저히 자신의 이득을 위해 모든 걸 계산하는 여자죠. 분명 마스터를 회귀시킨 것도 어떤 목적이···.]
‘그만하라고 했네.’
알베르트는 좀 더 강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천칭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그 이야기를 끝으로 말을 잇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아직도 알베르트의 머릿속에 잔류해 있었다.
*&*
붉은 삿갓의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건물의 앞에는 무림맹(武林盟)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보였다. 정파의 자긍심이자 사파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신성한 장소. 하지만 그것도 이미 지나간 옛말에 지나지 않는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눈에 담긴 무림맹의 건물은, 사이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내 친히 그대들에게 하문하마. 그대들은 본좌를 막기 위해 그곳에 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안내를 맡기 위해서 스스로 나온 것인가?』
중후하게 울려 퍼지는 사내의 목소리에 몸을 숨기고 있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신선 같은 노인이었다. 두 눈을 감은 노인의 허리춤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검이 있었다. 빙백검(氷白劍). 무림지보 중 하나라고 불리는 명검이다.
“무량수불. 시주의 오만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구려.”
거목 위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자신의 키만 한 도를 한 손으로 멘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붉은 용이 새겨진 도는 화룡도(火龍刀)다. 눈이 있는 무인이라면 두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어이, 영감. 자고로 사내라면 저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 하는 거네.”
그렇다. 무림에 몸을 담은 무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얼굴이다.
검황(劍皇)과 도황(刀皇).
현존하는 무림의 전설. 정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저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곳이 마지막 관문이라는 걸 의미했다.
“주군, 이곳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사내를 따라온 붉은 옷의 무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 한 명 한 명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황과 도황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다 큰 어른과 젖먹이를 비교하는 것처럼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하지만 동귀어진을 할 각오로 싸움에 임한다면 약간의 시간을 버는 것은 가능하리라. 찰나에 지나지 않을 시간. 그러나 그 시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주군이 건물 안까지 들어가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삿갓의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천 명에 이르렀던 사파의 물결은 이제 수백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순탄한 여정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모두 온전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극심한 내상을 입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왼팔을 잃어버린 이들도 있다. 극양의 무공에 당한 것인지, 얼굴이 타버린 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본다면 그들의 행색은 패잔병이나 다름없으리라.
하지만 너덜너덜한 신체와는 달리 그들의 눈은 죽지 않았다.
극심한 통증을 앓고 있음에도, 사내를 바라보는 사파인들의 눈은 강한 빛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만족합니다. 주군이 보여준 꿈. 그 끝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것도 운명이라는 거겠죠.”
“이 못 배워먹은 놈들에게 꿈의 편린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군.”
사내의 앞으로 두 남자가 걸어 나왔다.
푸른색의 견장과 붉은색의 견장을 단 남자는 좌호법과 우호법이었다.
“먼저 가시죠, 주군.”
“늦게나마 따라가겠습니다.”
검을 쥔 주인과 마찬가지로 날이 상한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남자가 검을 뽑자, 붉은 물결 안에서 하얀 물결이 일어났다. 전의를 불태우는 사파인들을 보며 도황은 한숨을 쉬었다.
“사파의 잡것들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먼. 안 그런가, 영감?”
“시주는 거친 말부터 바꾸는 게 우선일 것 같구려. 잡것이라고 해도 쓸 만한 잡것이 있고, 못 쓸 잡것들이 있는 법입니다. 저것들은 쓰레기도 되지 못할 잡것들이죠.”
“크하하핫! 맞는 말이구먼. 주제도 모르는 쓰레기지, 저것들은.”
반박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사파인들이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검의 떨림이 사라지고, 신체가 멎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공간에서, 오직 검황과 도황만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내려오는 둘의 발을 멈춘 것은 삿갓을 쓴 사내였다.
『대답은 없는 건가? 그렇다면 안내가 아니라 감히 이 몸을 막으러 온 거로 판단하지.』
검황이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놀란 듯 그의 눈에는 이채가 어려 있었다.
“어린 것이 제법이구나. 이 공간에서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것들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소, 영감? 이 정도로 끝났다면 내 실망했을 거요.”
낄낄거리는 도황을 앞에 둔 채 사내는 목소리를 높였다.
『듣거라! 본좌는 너희들에게 꿈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대들은 그 꿈을 좇아 이 몸을 따라왔지. 꿈을 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들은 본좌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꿈을 향해 달렸다. 그대들은 이미 꿈을 이루기 위한 자격을 충분히 증명했다. 이제는 이 몸이 대답할 차례겠지. 꿈의 이정표를 보여준 본좌가 그대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마.』
사내는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검을 잡는 게 아니다.
다가오는 검황과 도황을 앞에 둔 채 그는 뒷짐을 지었다.
『보거라! 그리고 그대들이 따라온 사내가 어떤 남자인지 깨달아라.』
사내는 발을 들었다.
“어이, 영감!”
“시주나 조심하시게.”
첫 걸음.
발자국이 지면에 닿는 순간 쩌저적, 하는 굉음이 울렸다. 땅이 갈라진다. 붕괴된 지반은 검은 균열을 드러냈다. 사내의 발아래에서 시작된 균열은 검황과 도황을 향해 달렸다. 지축을 흔드는 진동이 협곡을 집어삼켰다. 산문 앞에 있던 무림맹의 비석도 무사하지 못했다. 비석은 갈라진 땅 아래로 추락했다. 검은 구렁텅이로 떨어진 비석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 귀찮게 하는구먼. 왜 애꿎은 땅을 가르고 그러는 건가?”
그 재해 속에서 도황의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황과 도황이 서 있는 장소는 지면은 균열이 생기기는 했으나, 갈라지지 않았다. 커다란 산과 마주한 것처럼 사내가 만든 한 수는 그들의 앞에서 끊겨 있었다.
무량수불, 하고 검황은 짧게 중얼거렸다. 그의 허리춤에 있던 빙백검이 두둥실 떠올랐다. 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아름다운 검신이 빛났다. 빙백검 위로 푸른 검강이 타올랐다. 검강에 휩싸인 검은 빙글빙글 선회하기 시작했다.
“살수를 먼저 취한 것은 시주이니, 원망하지 말게나.”
자네를 죽이겠네. 검황은 점잖게 말했을 뿐이지, 그 안에 담긴 뜻은 단순명료했다.
사내는 듣고 있지 않았다.
아직 그의 걸음은 끝나지 않았다.
두 걸음.
검은 구렁텅이를 드러냈던 지면이 입을 닫았다. 협곡 전체가 흔들렸다. 갈라졌던 지면의 균열이 수복되고, 무너졌던 지반은 시간을 거꾸로 되감는 것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되돌아온 협곡은 이전과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변한 것은 하나. 산문 앞에 있던 무림맹의 비석이 사라졌을 뿐이다.
자욱한 먼지가 일어난 협곡에 고요함이 돌아왔다.
도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부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걸 재생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어이, 영감. 이건···.”
도황의 경계 어린 목소리보다 앞서 검황의 검이 출수 되었다. 맹렬한 한파를 머금은 검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검황의 검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카랑, 하고 검붉은 검강을 두른 검이 빙백검을 받아쳤다. 사내의 허리춤에 있던 붉은 검이다. 의지를 가진 것처럼 두둥실 떠오른 검은 그를 지키듯이 주변을 선회했다.
바람이 일었다. 사내의 머리를 누르고 있던 삿갓이 살짝 떠올랐다.
그 아래로 천마의 상징이라는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튕겨 나간 검이 다시 검황의 의지대로 움직였을 때는, 이미 사내의 세 번째 걸음이 지면에 닿은 뒤였다.
그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세계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