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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천마의 유산(3) (1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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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유산(3)

선공은 문지기의 것이었다.

머리를 노리는 베기, 튕겨낸다. 손목에 걸리는 중량감이 무겁다. 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마치 몽둥이를 받아낸 느낌이다. 문지기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이격, 삼격. 검을 부술 기세로 몽둥이를 부딪쳐온다. 오러를 두른 검은 뚫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겁다. 검이 문제가 아니다. 손목이 버티질 못한다. 알베르트의 신체가 비명을 지른다.

마나를 끌어 모은다. 순간적으로 오러를 방출했다. 검은 기운이 폭사한다.

눈앞에서 터져나가는 오러에 문지기는 뒷걸음질 쳤다. 물러나는 녀석을 뒤쫓듯이, 알베르트는 발아래로 마나를 모았다. 단번에 문지기와의 거리를 좁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문지기는 반응했다. 카랑! 한 번 더 검이 맞물렸다. 낡은 검은 끊어지지 않는다. 오러 너머로 보이는 검은 이가 나갔을 뿐이지,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두 검이 재차 힘겨루기에 들어섰다.

[시간 낭비입니다, 마스터. 다른 수를 강구하죠.]

천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는 오러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운이 더 짙어졌다. 검은 오러가 마치 하나의 형상을 갖출 것처럼 흔들렸다. 망자의 손에 쥐어진 검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무식한 수입니다.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입니까? 과연 이 망자의 마나가 주인님보다 적을까요?]

‘그야 그건 나도 모를 일이네. 하지만 내가 오러를 끌어낸다면, 녀석도 오러를 끌어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알베르트의 검에 깃든 오러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검에 마나를 두르는 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문지기의 낡은 검 위로 오러가 둘러지기 시작했다. 푸른 오러가 일렁이기 시작한 문지기의 검은 떨림이 멈췄다.

[소용없습니다, 마스터. 이대로라면 오히려···.]

‘아니, 내 승리일세.’

떨림이 멈췄을 터인 문지기의 검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이전의 알베르트가 들었던 검이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듯이. 낡은 검은 문지기의 오러를 견딜 수 없었던 건지 쾅, 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조각난 칼날이 알베르트의 얼굴과 가슴을 스쳤다. 통증을 느낄 여유는 없다. 문지기의 자세가 무너진 지금이 기회였다.

자세는 불안정하다. 제대로 된 초식이 나올 리는 없겠지.

그러니까 보완한다. 아직 마나의 여유는 있다. 신체의 기능을 최대한 이끌어냈다.

창천검법

2장 공절.

베어낸다.

알베르트는 다급히 올라오는 놈의 팔과 함께 문지기를 일도양단했다.

어깻죽지부터 생긴 균열이 허리 쪽으로 내려갔다. 문지기는 두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알베르트를 보고 그 입이 작게 움찔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포권을 올리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직후, 문지기는 두 눈을 감았다.

두 동강 난 상반신과 하반신이 땅으로 떨어졌다.

[뭐라고 하신 지 들으신 겁니까?]

‘아니,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는 알고 있다네.’

분명 후회 없는 결투였다고,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문지기의 시체는 스르르 녹아들었다. 다른 망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얀빛으로 화한 마나는 알베르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다른 망자들과 달리 흡수된 마나의 양이 훨씬 많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덩어리는 못 해도 네 덩어리다.

[뭔가 떨어져 있군요, 마스터.]

망자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낡은 붉은색의 장식품이 떨어져 있었다.

몸을 수그린 알베르트는 장식품을 쥐었다.

『이렇게 살 것인가? 핍박받고 멸시당하는 나날. 하찮군. 자네들이 손에 얻은 힘은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서였나?』

눈 아래에서 달리는 광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사내는 삿갓을 눌러쓴 붉은 무복의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가능하다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이다. 모두 힘없는 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군.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 건가? 이것이 꿈같은 이야기라고? 이 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시야가 흐려졌다.

그 풍채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은데, 이미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무림은 정파들에게만 웃는 세상이 되었다. 쓰레기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사파는 하나둘 맥이 끊겨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정파가 이룬 무공의 경지는, 이미 사파인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은가? 정녕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 몸의 뒤를 따라오게. 그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흙은 새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될 걸세.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어리석구먼, 자네는. 이 몸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그런 약한 말을 하는 건가?』

남자는 등을 보였다.

이미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파도와도 같았다. 큰 흐름에 몸을 맡기는 물결처럼. 붉은 망토를 두른 이들은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연검을 몸에 지닌 요염한 몸매의 여인은 흑도의 꽃이라고 불리는 사희(蛇姬)다.

자기의 몸보다 큰 대도를 어깨에 얹은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는 녹림왕(綠林王)이다.

허리가 굽은 꼽추의 노인은 하오문의 문주인 암독제(暗毒帝)다.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까마귀 같은 남자는 천살귀(天殺鬼)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사파의 한 산맥과도 같은 명호를 가진 고수들이다. 절대 누군가의 아래로 들어갈 일이 없어 보였던 악귀들마저 그 사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흑도인들이 바야흐로 한 사내의 밑에서 화합을 이뤄낸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이루어낸 남자는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했다.

『천마가 군림하는 걸음(天魔君臨步)을 막을 자는 이 세상에 없다네.』

[마스터?]

알베르트는 이마를 짚었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마치 꿈속을 걷는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했다.

‘자네는, 보지 못한 건가?’

[무얼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 광경을 본 건 알베르트 혼자 같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자신의 것이다. 환상 속의 남자만 눈물을 흘린 게 아니었다. 알베르트도 똑같이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쥐고 있던 견장을 확인해보았다. 낡은 유품은 벌써 바스러져 있었다. 무언가 적혀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뒷면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견장에는 얼룩진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정말인가? 마도구지 않았던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마스터. 치매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환청과 환각이 생겼다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스터가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닐세.’

알베르트는 마나를 흘려보내 견장을 불태웠다.

삼매진화(三昧眞火). 순식간에 타오른 견장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 미궁의 끝을 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천마.

알베르트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

문지기가 지키고 있던 계층을 지난 알베르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통로였다.

마물의 뱃속이 이런 느낌일까? 꿈틀거리는 천장에서는 푸른빛의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바닥을 녹여버리는 독기는 냄새가 강렬했다. 알베르트는 옷소매로 입가와 코를 가렸다. 그저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머릿속이 빙글 돌았다.

[독입니다, 마스터.]

‘그것도 상당히 강한 독으로 보이는군.’

유피에르가 만든 연미복에는 독에 대한 기본적인 내성을 부여하는 ‘안티 포이즌’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도 독소는 위협적이었다. 연미복에 가려진 신체는 괜찮지만, 바깥으로 드러난 신체는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손만 하더라도 벌써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냥 통과하는 것은 무리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베르트는 일단 통로에서 멀어졌다.

문으로 돌아온 그는 문지기가 앉았던 의자에 몸을 실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무작정 달려보는 건 어떻습니까?]

고여 있던 웅덩이들은 깊어 보이지 않았다.

내공으로 발을 보호할 수 있다면 독소가 몸에 침투하기 전에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얼마나 긴 통로인지 알 수 없네. 개죽음당하지 않겠나?’

[통과하고 난 이후도 문제죠. 망자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신체를 파고들 정도의 독기다. 연미복을 입었다고 한들 무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차라리 다른 통로를 알아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무술은 사사해주시지 않았나 보군요.]

‘음···. 보법을 알려주시긴 했지. 하지만 그거로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네.’

[보법? 혹시나 하지만 그 나뭇잎 위를 걸어갔던 수련 말입니까?]

천칭은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부님이 알베르트에게 알려줬던 보법이다.

땅바닥 위에 있던 나뭇잎을 밟고 지나가는 보법이었다. 사부님이 밟은 나뭇잎은 바스러지지 않았고, 알베르트가 밟은 나뭇잎은 바스러졌다. 솔직한 말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무술이다. 알베르트도 그 뒤로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보법을 응용할 수 있다면 미궁의 돌을 바닥에 뿌리고, 돌이 녹기 전에 밟고 지나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련할 때처럼 나뭇잎이 아닌 돌을 밟고 간다는 건 훨씬 쉬운 일이기도 할 테고.

‘아, 그건 나뭇잎을 밟고 걷는 수련이 아니네. 그와 비슷한 건 초상비(草上飛)라고 하지. 사부님이 보여줬던 보법의 진짜 힘은 단 세 번의 발걸음으로 모든 걸 파쇄 한다는 지존의 걸음일세.’

[그건 어디에서 들은 겁니까, 마스터?]

‘어디라니, 당연히 사부님의···.’

알베르트는 말을 잇다 멈췄다. 사부님은 그런 말씀을 해준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머릿속은 이미 사부님이 보여줬던 보법이 그런 거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보법이라는 말. 저는 오늘 처음 들어봅니다.]

‘보법, 보법···. 그렇군. 문지기가 보여준 환각은 그저 보여주기만 한 게 아닌 모양이네.’

알베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분명 난생 처음으로 입에 담은 말이었는데, 몇 십년을 사용하고, 들었던 것처럼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알베르트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마스터? 뭘 보신 거죠?]

‘나는···. 천마를, 보았네.’

알베르트는 천천히 자신이 보았던 것을 천칭에게 털어놓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1분도 안 되었을 짧은 순간이었다. 천마라고 불린 남자와 그 주변을 뒤따르던 붉은 옷의 사내들. 그들 하나하나가 알베르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한 무인이었다. 그건 무인이었던 문지기의 기억이었던 걸까? 그렇지 않으면 이 미궁에 남은 유산인 걸까?

[알수록 대단하군요. 생전의 기억을 다른 이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능력을 전수하는 비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스터의 사부님이 주고자 했던 힘은, 이 비법이었던 모양이군요.]

‘능력을 전수해···?’

[직접 힘을 전수한 게 아닙니다. 그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죠. 반면 이것은 다릅니다. 타인의 삶을 전수한 겁니다.]

‘미안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구먼. 이 늙은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말해주면 좋겠네.’

이해하지 못하는 알베르트를 위해 천칭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군요. 마스터는 이전 시대에 살고 있던 무인의 지식과 경험을 얻은 겁니다. 마족들이 갖고 있던 지식이나 용어도 이미 알고 계실 확률이 높겠죠.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이건 기적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힘입니다.]

‘그런가. 이게 기연이라는 거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그런 거라고 알베르트는 이해하고 있었다.

특별히 떠오르는 기억이나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위화감이 파생되는 일도 없다. 타인이 본다면 너무나도 불합리하게도, 그저 결과를 이해할 뿐이다. 그 중간에 있어야 하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를 보면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답이 왜 나온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머리 한구석이 빈 것 같은 공허감.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알베르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잠시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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