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천마의 유산(2)
[특수한 과정을 거친 거겠죠. 본래라면 똑같을 수 없습니다. 힘을 전부 소진한 마족의 말로가 망자입니다. 망자 하나하나가 모두 생전의 마족입니다.]
‘저것들이 원래 마족이라는 말인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마족은 힘을 다룰 때면 신체의 내부를 드러냅니다. 골격과 사람의 얼굴이 공존하는 모습. 그 힘을 한계까지 끌어낸 결과가 저 모습입니다.]
알베르트는 유피에르의 얼굴이 해골로 변해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다. 제국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쥐고 다루는 침략자. 힘을 쓰면 얼굴 아래의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기괴한 모습에, 제국은 침략자들에게 마족(魔族)이라는 이명을 붙였다.
[망자의 강함은 일반 언데드와 다릅니다. 생전에 어떤 존재였는지에 따라 그 위험도가 다르죠. 무인이었는가. 마법사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마족이었는가. 또 망자가 되고 난 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가도 중요합니다.]
‘뭘 어렵게 말하고 그러는 건가? 그러니까 녀석들은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않나?’
[아뇨, 마스터. 약한 망자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망자는 대부분 강합니다. 하급 언데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알베르트는 숨소리를 죽였다.
머리를 찧고 있는 녀석은 아직 알베르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애꿎은 벽을 머리로 찧을 뿐이다. 지팡이 검에 마나를 흘러 넣었다. 검집 안의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지척까지 다가간 알베르트는 검을 바로 쥐었다.
천칭의 경고에 따른다.
신체의 마나가 활성화되고, 검은 오러가 검신을 덮었다. 롯의 목을 꿰뚫었던 초식이 그 자리에서 재현됐다.
창천검법
1장 자추
오러와 맞닿은 놈의 살결이 타올랐다. 살점이 익는 냄새가 났다. 쏘아진 뱀의 혀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녀석의 심장을 도려냈다. 뻥 뚫린 가슴에서 검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녀석은 돌아보지 않는다. 곧 죽는다는 자각조차 없는 건지, 그저 머리를 벽에 박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마침내 놈은 움직임을 멈췄다.
숨이 끊긴 것일까. 머리를 벽에 기댄 채 서 있던 놈의 내용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망자는 형체를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해할 수가 없구먼. 언데드도 공격을 받으면 저항하기 마련이네. 하지만 이 망자는···. 혹시나 하지만, 그냥 죽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감정이입 할 필요 없습니다, 마스터. 망자의 행동을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알베르트는 말을 끊었다. 망자의 시체가 갑자기 눈부신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알베르트는 검을 들었다. 그러나 빛은 검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검을 통과한 빛은 그대로 알베르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알베르트는 두 손을 들었다.
빛이 들어온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안쪽의 상황은 달랐다.
[놈의 마나를, 흡수하신 겁니까?]
‘그, 그런 것 같구먼.’
적은 양이 아니다. 마치 마석을 흡수했던 때와 같다.
돌 같은 마나 덩어리가 들어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랍군요.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망자의 마나가 마스터에게 흡수되었습니다.]
‘혹시 함정은 아닌 건가? 일종의 저주 같은 거라든지 말일세.’
[아뇨. 그런 것과는 다릅니다. 신체 내부에서 흐르는 마나를 보았을 때···. 마스터의 심법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요?]
‘사부님이 알려주신 심법 말인가?’
사부님이 전수해준 심법. 알베르트는 아직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검법과 달리 사부님은 심법의 이름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몸에 억지로 때려 박은 길을 따라 마나를 연공하고 있는지, 어딘가 매끄럽지 않은 곳은 없는지에 관해서 물어볼 따름이었다.
천칭에게 주변 경계를 부탁한 알베르트는 가부좌를 틀었다.
녹여야 할 것은 방금 전에 흡수한 마나 덩어리다. 내부로 들어온 이물질을 녹이기 위해 알베르트의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름을 타고 내려온 마나는 천천히 덩어리를 두들겼다. 덩어리 주변을 깎아내며 녹아든 마나는, 금세 알베르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마나와, 덩어리의 뒤를 미는 마나.
강물이 흐르듯 마나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 덩어리는 알베르트의 몸속으로 녹아들었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몸 안의 마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체감되었다.
[말도 안 되는군요. 이거라면···. 마스터의 부족한 마나량을 늘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이것도 사부님이 의도하신 걸까?’
[그렇지 않으면 마스터를 이곳에 내려보내지 않았을 것 같군요. 사부님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주겠다고. 제가 봤을 때는 그 기반을 만들 생각으로 보입니다.]
‘음···.’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 검을 바로 쥐고 그 상태로 창천검법의 초식을 펼쳐보았다.
1장 자추.
2장 공절(空切).
3장 순살(瞬殺).
4장 화무(花舞).
5장 쇄천(鎖天).
마나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모든 초식이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마나가 늘었을 뿐이다. 오러를 뽑아낼 때는 도움이 되겠지만, 초식의 완성도가 올라갈 수는 없다.
무의 길에 지름길 같은 건 없다.
그저 하루하루 반복되는 수련이 쌓이고 쌓여서 더 높은 경지를 만들 뿐이다.
적어도 알베르트가 사부님에게 배운 가르침은 그러했다.
묘한 위화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알베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미궁은 깊었다. 사부님이 준 제한시간은 100일이었지만, 알베르트는 50일 안에 끝내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천칭. 최대한 자네를 활용하겠네.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알려주게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마스터. 마스터가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텐데 말입니다.]
다중영창에서는 절 따라올 자가 없거든요, 하고 웃음 짓는 천칭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베르트는 웃었다.
*&*
알베르트가 지하 미궁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곳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요령은 생겼다. 먼저 망자를 사냥하고 얻은 덩어리 같은 마나는 매일 아침에 흡수한다. 망자를 해치울 때마다 운기조식을 하는 건 효율이 나오지 않을뿐더러, 위험을 동반했다. 아침마다 운기조식을 취하는 건 사부님이 알려주신 기초 중의 기초다. 덩어리를 녹이는 속도도 빨랐고, 몸에 흡수되는 과정도 훨씬 매끄러웠다.
식사는 하루에 두 번, 벽곡단이라는 환약으로 해결했다. 맛이라고 할 건 없지만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식수도 부족하지 않다. 숲을 통과하던 때처럼 먹을 거나 마실 거로 고생하는 일은 없으리라.
이 미궁에는 망자를 제외한 다른 존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까지 해치운 망자들은 모두 비무장 상태였다. 벽에 머리를 찧고 있던 놈부터 시작해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놈. 기도를 올리고 있는 놈. 기묘한 춤을 추고 있는 놈. 뭔가 머릿속의 반쯤 망가진 것 같은 망자만이 알베르트를 반겼다. 덕분에 알베르트는 손쉽게 마나량을 늘릴 수 있었다.
망자들을 쓰러뜨리면서 몇 가지 실험도 같이 진행했다.
덕분에 놈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첫째, 오러를 두르지 않은 검으로는 망자를 벨 수 없다.
둘째. 망자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셋째, 놈들은 평범한 망자가 아니다. 흡수되는 마나의 양을 보았을 때, 최소한 무인. 혹은 마법사다.
그러니까 만약 녀석들이 저항했다면 알베르트는 고된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항 없는 녀석들은 차곡차곡 알베르트의 마나로 변했고, 늘어난 마나를 바탕으로 알베르트는 오러를 뽑아내는 데 큰 피로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실전은 언제나 힘든 법이죠. 각오는 되셨습니까, 마스터?]
‘물론일세.’
알베르트는 눈앞의 망자를 바라보았다.
문을 등진 채 의자에 앉은 놈은 다른 망자들과는 달랐다.
일단 내용물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붉은 장식물을 어깨에 달고 있었다. 온전한 형체를 한 망자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지도 않는다. 그 허리춤에는 낡은 검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망자를 쓰러뜨릴 때도 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문을 막고 알베르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문지기와 마주한 알베르트는 두 손을 모으고 묵례를 올렸다.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그에 맞추어 문지기도 낡은 검을 들었다.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거리를 좁히기 무섭게 문지기의 검이 번뜩였다. 빠르다. 이전에 교전했던 롯과 비교할 속도가 아니다. 단숨에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과 알베르트의 검이 부딪쳤다. 카라랑, 하고 검과 검이 맞물렸다. 검은 오러를 두른 알베르트의 검과 이가 빠진 낡은 검이 교차했다.
일합, 이합, 삼합.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던 망자의 검은 태연자약하게 알베르트의 검을 받아냈다.
오러를 두른 검과 낡은 검.
경합될 리 없는 두 검이 수를 나누는 상황에 알베르트는 어금니를 물었다.
‘오러를 두른 것도 아닌데, 왜 부서지지 않는 건가?’
[형상화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스터. 녀석의 검에는 마나가 감돌고 있습니다.]
‘옅게 두른 마나로 오러를 막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스터.]
‘그게 말이 되는가?’
이론적으로야 가능하다.
마나를 갈무리해서 만든 것이 오러다. 오러를 공정하는 바로 밑 단계가 마나인 만큼, 상대방의 오러에 베이지 않을 만큼의 마나만 검에 담는다면 충분히 합을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설마 그걸 재현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의 마나가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면 지치는 건 마스터 쪽입니다. 오러를 거두고 마나를 갈무리하는 걸 추천합니다.]
‘그럴 수는 없네. 자네, 잊고 있는 거 아닌가? 녀석들은 오러가 담기지 않은 검으로는 베어낼 수 없네.’
불공평하지만 별수 없다. 망자의 육체는 오러가 담긴 검이 아니면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문지기의 발이 바닥을 찍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큰 진동이 울렸다. 순간 디딜 곳이 약해진 알베르트의 균형이 무너졌다.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낡은 검이 크게 휘둘러졌다. 뭉툭한 면이 알베르트의 정수리를 노렸다. 검으로 응전하기에는 늦는다. 알베르트는 균형을 잡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 넘어졌다.
[마스터!]
문지기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을 피해 알베르트는 땅바닥을 굴렀다.
거리를 벌린 알베르트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올 리 만무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놈은 일어나는 알베르트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엉거주춤 서 있는 알베르트가 다시 자세를 취하는 걸 기다리는 건지, 그는 검을 바닥에 꽂았다.
[뭐 저런···. 무시당하고 있군요, 마스터.]
천칭이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쓰러진 알베르트를 공격해 끝을 내도 모자를 판정에,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닐세.’
[뭐가 말입니까? ]
‘이제 알겠네. 그는 무인이네. 무인이었던 망자가, 나를 무인으로 봐주고 있는 걸세.’
[망자에게는 이성이 없습니다, 마스터. 진짜 노망이라도 난 겁니까?]
알베르트는 다시 두 손을 모은 채 문지기에게 묵례를 올렸다.
사부님은 이 자세를 포권? 이라고 불렀던 거로 기억한다. 마족의 세계에서는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인사다.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건지, 문지기는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다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