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천마의 유산(1)
알베르트는 미약한 양초 불을 좌우로 흔들어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폭이 조금 넓은 통로였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통로 마디마다 있을 것 같은 조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양초 불이 좀 더 밝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알베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천칭.’
[무슨 일입니까, 마스터?]
‘아니, 말이 없길래 자는 줄 알았다네.’
[마스터의 의사를 확인하는 중인데, 제가 끼어들 건덕지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놀랍구먼. 자네가 그런 기특한 말도 할 줄 알다니.’
[마스터는 절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천칭이 토로하는 불만 어린 목소리에 적당히 대답한 알베르트는 계단을 내려갔다.
곧 커다란 문이 그를 맞이했다.
거무튀튀한 색으로 빛나는 문이었다. 하얀 토끼와 검은 뱀이 그려진 문은, 어둠 속에서도 광택이 나고 있었다.
‘미스릴인가? 그냥 코팅만 한 거로는 보이지 않는데···.’
[마스터의 말대로입니다. 이건, 통짜 미스릴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알베르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미스릴의 값어치는 쉽사리 입에 올릴만한 광물이 아니다. 미스릴에 깃든 신비한 힘은 사자(死者)를 몰아내고, 부정한 기운을 쫓아냈다. 마나와 친화력도 높아 마도구로 사용되는 일이 잦았다. 마법사들은 없어서 못 쓸 정도로 귀한 물건이다. 손기술이 뛰어난 드워프(Dwarf)들 외에는 다룰 수 있는 장인도 한정되어 있다 보니, 미스릴을 주원료로 사용한 물건은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전 삶에서 보았던 주먹만 한 덩어리도 입이 벌어질 만한 가격을 자랑했는데, 이만한 크기의 문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을까? 분명 알베르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격이리라.
[미스릴은 파사(破邪)의 돌이라고도 불리죠. 문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계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베르트는 문을 밀어보았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좌우로 여는 미닫이문은 아니다. 마나로 신체를 강화한 알베르트의 힘으로도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나를 흘려 넣는 건 어떻습니까, 마스터?]
‘한 번 해보겠네.’
천칭의 제안에 알베르트는 문고리로 마나를 넣어보았다.
알베르트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는 문에 닿자 스르르 흡수되었다. 문 안쪽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마나에 반응한 미스릴 문은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열리기 시작했다. 입과 코를 손으로 가린 알베르트는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것 같은 틈새를 만든 문은 그 움직임을 멈췄다.
지팡이 검을 쥔 알베르트는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문 안쪽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던 계단과는 달리 방 안에는 야명주(夜明珠)가 장식되어 있었다. 양초 불을 끈 알베르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약수가 떨어지는 통과 곡물의 씨앗이 담긴 거로 보이는 자루가 있었다. 그 반대쪽에는 돌침대가 있고, 작은 책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의자에는 썩어문드러진 해골 한 구가 맥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종잇조각이 덕지덕지 붙은 또 하나의 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부님이 말한 지하는 저 문 안쪽을 말하는 것 같았다.
[벽곡단(辟穀丹)과 식수. 몸을 쉴 수 있는 장소. 연공실(硏攻室)과 다름없는 곳이군요.]
‘연공실?’
[마족들이 수련하는 장소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연공실에서 수십 년 동안 폐관 수련이라는 걸 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알베르트는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풍화된 해골은 알베르트의 손이 닿자마자 부서져 내렸다. 모래더미 같은 해골을 내버려 둔 채 알베르트는 책상 위의 종이를 보았다. 종이에 그려진 것은 하나의 지도였다. 검은 자국이 남긴 방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는 미궁과도 같은 지도다. 중간중간마다 체크 표시가 된 지도는, 가장 안쪽에 X자로 표시된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X자 표시까지 합치면, 지도에 체크 된 표시는 총 7개였다.
[이 사람도, 사부님의 제자였던 모양이군요. 마스터의 사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세. 이 사람이 해골이 되어 여기 있다는 건···. 실패했다는 거겠지.’
형체도 온전치 못한 해골을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눈을 돌렸다. 지도를 가져갈 수는 없었다. 오래된 종이는 손길이 닿으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았다.
‘외울 수 있겠나?’
[두말하면 잔소리군요. 이 정도는 간단합니다, 마스터.]
‘매번 고맙네.’
[새삼스럽군요.]
든든한 파트너의 말을 들은 알베르트는 방 안쪽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미스릴로 된 문은 아니다. 평범한 돌로 만들어진 문 앞에는 낡은 종잇조각들이 가득했다. 종이 하나하나에서 강력한 마나가 느껴졌다.
‘마족들이 사용하는 마도구인가?’
[부적이라는 물건입니다. 주로 어떤 것을 봉인하거나 마법의 촉매제로 사용하더군요. 여기서는 아마도···. 문을 봉인한 거로 보입니다.]
‘봉인이라, 안에 무엇을 숨겨 놓았는지 궁금하구먼.’
알베르트는 문에 손을 얹어보았다.
부적이 곳곳에 붙은 돌문은 마치 만신창이처럼 보였다. 손에 살짝 힘을 넣어보았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의 문과 마찬가지로 알베르트는 마나를 넣어보았다.
그 순간, 문 앞에서 글자가 떠올랐다.
「천마의 은을 입고자 하는 자, 이곳에 들어와라.
천마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자.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리라. 」
“천마(天魔)?”
알베르트가 떠오른 이름을 멍하니 되풀이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의문에 대답한 건 천칭이었다.
[마족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설적인 무인입니다.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자. 두 손으로 능히 천하를 제패하는 자. 구시대의 무인 중 한 명으로 2차 대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말이 있죠. 검성 블라드 루드비히가 아니고서는 검을 견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는 무인입니다.]
‘무인이면 무인이지, 천마는 또 뭔가?’
[인족들만 모를 뿐이지, 무인들은 모두 별호가 있습니다. 유피에르에게 못 들은 겁니까?]
‘으음···.’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기사나 마법사들도 그럴듯한 명호가 있는 걸 생각해보면, 마족도 다를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의미라도 있는 건가?’
[있습니다. 대부분 자신이 사용하는 힘을 기반으로 명호가 정해지더군요. 가령 냉기를 주로 사용하는 자라면 빙혈(氷血) 같은 명호 말입니다.]
무섭다기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오는 이름이다. 정말로 그런 이름을 자신 있게 대고 다닌다는 말인가? 알베르트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거 참. 이상한 이름을 짓는구먼. 그럼 천마는 뭔가? 무슨 뜻으로 지은 이름인지 알고 있나?’
[천마는···.]
알베르트의 반문에 천칭은 말꼬리를 흐렸다. 무언가 갈등하고 있는지 천칭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늘 아래 단 한 명뿐인 지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강자인 무인을 의미합니다.]
‘절대 강자?’
[천마는 역대 무인 중에서도 그 힘이 가장 강한 무인입니다. 무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고금을 통틀어 그보다 강했던 무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무인에 국한할 것이 아니군요.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의 힘은 대륙에 존재했던 어떤 생명체보다 강한 자였습니다. 천마가 사라진 지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천마라는 별호를 쓰는 무인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천마라는 건 2차 대전쟁의 무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검성이신 블라드 루드비히님이 승리하셨을 텐데?’
2차 대전쟁의 영웅, 초대 루드비히의 가주였던 검성 블라드 루드비히는 침략자인 마족을 패퇴시켰다. 역사상 최초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다는 그의 검이 없었다면 제국은 멸망했을 것이다.
[순진하군요, 마스터. 설마 그 기록을 믿는 건 아니시겠죠?]
‘하지만 역사에 의하면···.’
[당시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죠. 남아있는 기록도 간단할 뿐입니다. 마족을 검성이 쓰러뜨리고, 2차 대전쟁이 끝났다. 참으로 편리한 역사책이군요. 진실은 언제나 감춰지는 쪽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스터?]
‘······.’
[뭐, 천마가 왜 물러났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전 마스터도 유적지라는 유적지는 다 쑤시고 다녔지만, 결국 진실을 밝혀내지는 못했죠. 단순히 그가 변덕을 부렸는지, 혹은 권력 다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는 마족 내에서 재앙이나 다름없는 사건이 일어났다는데, 진실은 아무도 모르죠.]
‘그 말은 혹시···.
알베르트는 문을 노려보았다. 떠오른 글귀가 사라지면서 문이 개방되고 있는 찰나였다.
[이 안에 그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라지 않던 상황이구먼.’
쿵, 하고 열린 문 안쪽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
문 안쪽은 흐릿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에는 야명주가 있었으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가시거리가 짧다. 조심스레 발을 옮겨 본다. 다행히도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은 없었다. 성 위와는 달리 지하는 벌레나 뼈 무더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건 그저 약간의 먼지뿐. 역설적이게도, 버려진 것 같은 지하가 유피에르가 사는 성보다 깨끗해 보였다.
‘평범한 지하는 아니구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겠나?’
[연공실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수련을 쌓기 위해 만든 미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미궁이라, 그럼 마물도 나오는 건가?’
[마물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마스터. 놀린 거 아닙니다.]
‘알고 있네.’
알베르트는 지도를 떠올렸다.
빙글빙글 돌면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미궁이었다. 그 끝에는 X표로 표시된 무언가가 있었다. 그곳에 미궁의 주인이 있을지, 보물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겠지.
[곧 붉은색 표시가 있던 장소입니다.]
'무언가가 있구먼.'
알베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개 사이로 흐릿한 것이 일렁였다.
사람인가? 혹은 마물인가?
잘 보이지 않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쿵, 하고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충격음은 마치 고장 난 악기를 켜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의 근원지로 알베르트는 좀 더 다가갔다. 전방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알베르트는 지팡이 검을 매만졌다. 여차하면 발도할 수 있게 신체의 마나를 활성화했다.
거리가 줄어들수록 소리는 커졌다.
쿵쿵거리는 소리는 이제 물기가 젖은 것처럼 찰박거리는 소리까지 섞여 있었다.
통로 안쪽으로 들어간 알베르트는 이윽고 소리의 주인과 조우했다.
허여멀건 하니 얇은 신체를 가진 좀비 같은 존재였다. 반쯤 찢겨나간 신체는 내용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바깥에 드러난 골격과 내장기는 볼썽사납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언데드가 아니다. 죽었다고 생각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지만, 녀석은 살아있었다.
‘대관절 뭐 하는 짓인가, 저게?’
하지만 놈의 끔찍한 외관은 두 번째 문제였다. 알베르트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놈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까부터 울리는 소리는 놈이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소리였다. 어느 누구 하나 없는 장소에서 그저 머리를 벽에 때려 박는다.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녀석의 머리는 둔한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살점이 무뎌지는 소리를 냈다. 얼마나 머리를 내리쳤는지, 단단한 미궁의 벽이 살짝 패여 있었다.
[뭔가 의도를 갖고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저 목적 없이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망자(亡者)입니다, 마스터. 3차 대전쟁 당시 마족의 주력군이었던 병사들입니다.]
‘망자라고? 내가 본 망자들과는 다르구먼. 대부분 일관성 있게 생겼던 건 물론이고, 명령에 복종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알베르트는 이전 삶에서 보았던 망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나 같이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일종의 스켈레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좀비와 스켈레톤의 중간 단계인 언데드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그저 해골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