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무인(武人)의 길(1) (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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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武人)의 길(1)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손끝에는 얇은 무언가를 베어내는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알베르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검을 쥔 손을 바라보았다. 고기와 뼈를 자를 때 느껴지던 생리적인 혐오감과는 달랐다. 그런 부(不)적인 감각과는 다르다. 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검에 둘렀던 오러가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사라지고 이 세상에 남은 건 검이 된 자신과 목표로 했던 롯의 목뿐이었다. 그 감각을 뭐라고 해야 할까?

[마스터?]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정신이 들었다. 황홀하게 느껴졌던 감각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을 지팡이에 수납한 그는 고개를 털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네.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네.’

[하긴, 저도 마스터의 검이 드래곤 본을 잘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러 블레이드라면 모를까, 오러로 말이죠.]

롯의 머리는 알베르트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었다.

알베르트가 베어낸 목의 단면은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자세였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사부님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네.’

[잘 알고 계시군요.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었나 봅니다.]

‘······.’

아직 미완성된 초식이다.

사부님의 동작을 얼추 따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담긴 파괴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분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이 초식을 펼쳐내는 것이 가능하리라.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거목이든, 돌이든. 그런 건 관계없다. 알베르트가 본 것은 거목을 꿰뚫는 사부님의 나뭇가지뿐이었지만. 만약 강철이나 미스릴이 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서운 힘입니다, 마스터.]

‘알고 있네.’

미숙한 알베르트의 손에서 펼쳐진 초식이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롯의 목을 꿰뚫었다.

알베르트 스스로도 자신의 경지가 오러 유저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후한 점수를 준다 한들, 익스퍼트 초입에도 이르지 못하는 경지일 것이다. 검신 위로 오러를 두르는 것만 가능하지, 그 이상의 일은 무리였다. 오러 유저인 사람의 몸을 통해서 펼쳐진 검법의 힘이 이렇다. 그러면 익스퍼트, 아니. 마스터에 이른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는 그 힘은 어떨까.

“이런 거였나요, 아가씨?”

무심코 그 의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와버렸다.

강자가 보는 세상.

약자였던 자신이 봤던 세상과는 기준 자체가 달랐다.

[무슨 소리입니까, 마스터?]

‘아닐세, 혼잣말이네.’

알베르트는 롯의 몸에서 연미복을 벗겨냈다.

그 교전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연미복은 알베르트의 손에 닿자 크기가 줄어들었다.

[대체 몇 개의 마법이 걸려 있는 겁니까?]

‘16개였던 걸로 기억하네. 자가수복부터 시작해서 경도 강화, 마법 차단, 냉온 조절, 독을 비롯한 위험 물질을 막는 안티 마법 외에도 잡다한 마법이 걸려 있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외양만 연미복일 뿐이지, 그 내구성은 미스릴 갑옷과도 비슷할 걸세.’

알베르트는 검은 연미복으로 갈아입었다.

누더기와 같은 옷을 벗어 던지자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운 느낌일세.’

[이제 시작선에 섰을 뿐입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그래도 감회가 새로운 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와 함께했던 연미복이다. 유피에르가 선물해 준 이 연미복에 어린 감정은 가볍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으로 지그시 두 눈을 두른 그는 코를 훌쩍였다.

[눈물샘이 약해진 거 아닙니까?]

‘정말 나이는 먹을 게 못 되는구먼.’

방 밖으로 나온 알베르트를 맞이한 건 블라우였다. 그는 말없이 알베르트의 앞에 섰다.

초에 불을 붙이고 원형 계단을 내려간다. 블라우는 알베르트를 홀로 안내했다.

여전히 더러운 장소였다.

사용하지 않는 길에는 먼지와 벌레가 가득했다. 뼈 무더기를 지난 알베르트는 옥좌에 앉아 있는 유피에르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근 1년 만의 일이다.

별무리를 닮은 은빛 머리와 무료해 보이는 얼굴은 여전했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는 그녀의 자랑거리기도 했다. 첫날에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와는 달리 오늘 유피에르의 차림은 그야말로 마녀에 가까웠다. 검은 로브와 머리에 반쯤 씌어놓은 고깔모자. 아쉽게도 마스터 피스라고 할 수 있는 지팡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 시점의 그녀는 아직 지팡이를 손에 넣지 못한 것 같다.

[저건 그녀의 취미입니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마녀의 차림을 한 유피에르의 모습에 천칭은 조금 질린 것 같았다.

‘그녀 나름대로 대우해주고 있는 거네. 내가 말했지 않았던가? 그녀의 이명은 숲의 마녀라네. 길을 잃고 숲에서 헤매는 자들을 돌봐주는 착한 마녀지.’

[착하기는 개뿔이. 뭔 놈의 콩깍지가 그리 두꺼웁니까? 아예 마족이 아니라 신의 사자라고 부르지 그럽니까?]

‘신의 사자…. 그거 괜찮구먼?’

[마스터….]

옥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알베르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되면 무슨 말부터 하는 게 좋을까. 근 1년 동안 고르고 고른 말을 알베르트는 입에 담았다.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네, 유피에르.”

“저속한 말은 필요 없어.”

“······.”

차가운 한 마디에 알베르트는 풀이 죽었다. 그런 소년의 기분은 아무래도 좋다. 유피에르의 붉은 눈이 천천히 그를 살펴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알베르트의 경지를 꿰뚫어 본 걸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

“너, 달라졌구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알베르트, 알베르트 라나. 이제 기억할 마음이 생겼어?”

“란? 건방 떨지 마, 꼬맹이. 조금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야.”

유피에르의 곁에 다가간 블라우는 그녀에게 찻잔을 올렸다.

홍차의 향을 맡고, 입으로 잔을 가져간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숨이 새어 나왔다.

“집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못해도 10년은 내 아래에서 굴러야 본분을 다할 수 있을걸.”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일류 집사니까.”

“만난 첫날부터 건방진 소리만 하는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그러나 이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그녀는 알베르트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만 보면 알게 될 거야, 유피에르. 말보다는 행동을 보는 편이 빠르지 않겠어?”

“필요 없어.”

유피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반투명해진 얼굴 안쪽으로, 섬뜩한 골격이 드러났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 알아차린 알베르트는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지금 당신의 수발을 들겠다는 말이 아니야. 그 전에 이곳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여기가 뭐 어때서? 내 성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거야?”

“언데드가 살기에는 좋은 장소야. 마나의 흐름도 그렇고, 부정적인 기운도 많이 생겨나니까.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성주인 유피에르에게 살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면, 그게 아무리 좋은 성이라도 의미가 없어.”

“흐응···.”

“내 주관대로 청소해도 괜찮을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성으로 만들어 보일게.”

“좋아. 대신 내 방과 공방은 건드리지 마.”

“알았어. 만약 그곳에 들어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 따로 이야기할게.”

그녀의 공방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방은 아니었다.

그나마 사람이 살만한 장소일 뿐이지, 그 방도 치워야 할 게 산더미였다.

“참, 지하는 조심해.”

“지하?”

“네가 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뭐, 입구에서 막히겠지만 말이야.”

유피에르는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지하? 알베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성에 지하도 있었던가?

*&*

홀 밖으로 나온 알베르트는 사부님을 찾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마찬가지로 사부님은 성문을 등진 채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팡이 검과 삿갓. 평범한 스켈레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새까만 눈. 왜소한 체구와는 달리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등을 보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사부님.”

사부님은 흘깃 알베르트 쪽을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거적때기를 대충 뒤집어쓴 행색이었는데, 깔끔한 연미복을 차려입은 제자의 모습이 낯선 모양이다.

“죄송하지만, 이제부터 수련은 조금 뒤로 미뤄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근 1년 동안 사부님의 곁에서 많은 걸 배웠다.

몸을 쓰는 기본적인 방법부터 시작해서 내공심법, 창천검법, 발을 움직이는 방법 등. 어느새 오러 유저라는 경지에 닿은 알베르트는, 이전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었다. 마족의 무인과 비교하면 변변찮은 힘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가씨를 구하고 세상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굳건한 결의가 보이는 알베르트의 눈을 사부님은 천천히 응시했다. 이윽고 제자의 뜻을 받아들였는지, 사부님은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는 여지없이 알베르트의 머리로 떨어졌다.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는 군요.]

“아니, 그러니까···. 더는 배울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다른 때보다 더 아픈 것 같다. 툭 튀어나온 혹을 누르며 알베르트는 사부님을 보았다.

천칭이 사부님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알베르트는 그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졌다. 복잡한 말이나, 어려운 이야기까지는 무리여도 간단한 대화라면 문제없이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었다.

“성주인 유피에르를 위해서 이곳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래 저는 사용인 신분이거든요.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상 집세는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침 수련을 빼먹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신경 쓸 일이 많아지므로, 이전처럼 밥을 먹고 수련만 하는 그런 생활을 불가능할 것이다. 알베르트가 하나하나 다시 설명하자 사부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꼈다.

[마스터가 배우는 것이 애들 장난인 줄 아느냐고 물으시는군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드리는 말입니다.”

알베르트의 대답에 사부님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스터.]

‘뭐라고 하시나?’

[마스터에게 있어 무(武)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가 알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사부님의 눈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없다. 마치 끝없는 망망대해를 앞에 둔 것 같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인가, 얼빠진 표정을 지은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사부님은 가벼운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알베르트는 차분히 말했다.

“제 짧은 견식으로는 사부님이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무는 지키기 위한 힘입니다.”

[힘이란 건 결국 모든 걸 부술 수도 있다는군요. 지키기 위해서 얻은 힘이라고 해도, 그 힘의 방향이 달라지면 위험하답니다. 그런데도 힘을 원하는 거냐고 묻고 있습니다.]

알베르트가 손에 넣은 힘. 사부님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그 힘은 다른 누군가가 쥔 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강한 걸지도 모른다. 알베르트의 오러는 드래곤 본을 잘라냈다. 만약 그 오러가 검의 형상을 갖추게 된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베어낼까? 아마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내리라.

알베르트는 사부님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는 이미 한 번은 모든 걸 잃었습니다. 제 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혹시 제게 좀 더 힘이 있었다면 모든 걸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약자 주제에 각오마저 굳히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죠.”

그래도 그 때는 그게 옳았다고 생각했다.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노집사가 보게 된 것은 싸늘하게 식은 아가씨의 시체였다.

우스운 일이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서 주먹을 굳게 쥐었는데, 손안에 있던 소중한 것을 오히려 망가뜨리고 만 것이다. 결국, 주름진 손안에 남은 건 후회뿐이었다.

알베르트는 두 번 다시 그 과오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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