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고성의 스켈레톤(3) (11/200)

 # 11

고성의 스켈레톤(3)

120일차.

거목을 앞에 둔 알베르트는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나무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꽂혀 있는 나뭇가지는 총 3개. 모두 이전에 사부님의 손을 탄 나뭇가지뿐이다. 알베르트의 손에 있는 나뭇가지의 끝은 날카로운 편이 아니었다. 그냥 주변에서 흔히 주울 수 있는 나뭇가지다. 그래도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뭇가지를 쥔 알베르트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소리가 사라졌다.

나뭇가지와 나무. 나뭇가지를 쥔 손의 감각도 옅어지는 착각.

그저 하나만을 보고 그곳을 찌른다.

마치 손이 나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감각. 화들짝 놀란 알베르트가 나뭇가지를 놓쳤다. 분명 나무를 꿰뚫은 건 나뭇가지였는데, 자신의 손이 그 안에 있는 착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손을 살펴봤다. 두 손은 이곳에 있다. 주먹을 쥐었다가 핀 알베르트는 나무를 확인했다. 그가 놓친 나뭇가지는 나무를 파고든 채 앞쪽에 박혀 있었다. 사부님의 나뭇가지만큼 많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4분의 1 정도가 박힌 상태여서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 하하핫! 보셨습니까, 사부님!?”

사부님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알베르트의 등으로 손을 올렸다. 혹시 이전처럼 때리는 건가 싶어 무의식적으로 알베르트가 몸을 웅크렸다.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사부님의 손은 천천히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칭찬 받았군요, 마스터.]

‘신기한 기분이구먼.’

멋쩍은 표정을 짓는 알베르트를 보며 사부님은 나무에 박혀 있던 나뭇가지를 뽑았다. 무엇을 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나뭇가지로 나무를 내리쳤다. 서걱, 하고 고기가 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를 가르고 들어간 나뭇가지는 거의 반 마디를 남겨놓고 안쪽에 박혀 있었다.

사부님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 손에는 다른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농담이시죠?”

수련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200일차.

어느 아침의 일이다.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계절. 간밤에 내린 비는 정원에 활기를 돌려주었다. 푸른 세계를 가만히 관찰하는 사부님과 한쪽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는 인상 나쁜 검은 머리의 소년, 알베르트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사부님, 하나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대답 대신에 사부님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알베르트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온 지팡이는 알베르트의 지팡이에 막혔다.

톡, 하고 두 지팡이가 엇갈렸다. 직후 사부님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툭툭, 하고 연달아서 떨어진 지팡이는 여지없이 알베르트의 머리를 가격했다.

알베르트는 신음을 흘리며 혹을 매만졌다.

이곳에 온 뒤로 혹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부님은 알베르트 앞에서 팔짱을 꼈다. 물어보라는 듯 그의 검은 시선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사부님은 얼마나 강한 겁니까?”

아가씨의 곁에서 여러 강자를 보아왔지만, 사부님의 힘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강함이었다.

알베르트의 물음을 들은 사부님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지팡이를 들었다. 알베르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던 지팡이는 갑자기 그 움직임을 멈췄다. 사부님은 지팡이를 정원 바닥으로 가져갔다. 관리되지 않은 정원 바닥 중에서도 모래더미가 모인 곳을 찾은 그는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그린 것은 삐죽 튀어나온 머리와 툭 튀어나온 눈, 험상궂은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알베르트를 묘사한 거로 보인다. 그 옆에 그린 것은 커다란 검이었다. 마족의 언어로 劍罡을 쓴 사부님은 그대로 그림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망토와 갑옷을 두른 남자였다. 한 손에 든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와 비슷한 걸 그려놓은 것이 기사를 묘사해놓은 것 같다. 마지막 차례는 뿔이 달린 남자였다. 해골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섞어놓은 그림은 전설 속의 악마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사부님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동그라미 쳤다. 동그라미 바깥으로는 비와 해, 구름을 그렸다.

자연을 그린 그림을 끝으로 사부님의 지팡이는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은 지팡이 끝으로 툭툭 빗방울을 건드렸다.

“사부님이 비라는 겁니까?”

한 방 맞을 각오로 알베르트가 물었는데, 놀랍게도 사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뿐인 제자를 놀리고 싶은가 보군요.”

알베르트는 다시 그림을 확인했다.

인상 나쁜 청년. 검. 오러 블레이드. 기사. 악마.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비와 구름, 해. 사부님이 그림의 바깥쪽을 가리킨 걸 봐서는 아마 자신은 이 모든 걸 뛰어넘는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스터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칭이 숨을 삼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자연과 동일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겁니다.]

‘그건 나도 보면 아네. 사부님이 달이나 해라는 거지.’

[그런 말이 아니라 혹시 이 사람은 성좌에 근접한···. 아니, 됐습니다. 마스터에게 말한 제가 바보죠.]

‘여하튼 대단한 분이라는 거 아닌가?’

[그래요, 대단한 분입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 사람의 말을 들을 게 아니었군요. 들으려고 하니 알 수 없었던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제가 사부님의 의사를 읽어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자네는 이상한 데서만 만능이구먼?’

[칭찬이라는 건 알겠는데 표현이 참 기분 나쁘군요, 마스터.]

사부님이 떠난 자리에는 어설픈 그의 그림만이 남아 있었다.

*&*

300일차.

알베르트는 오랜만에 성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블라우를 본 그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성주인 유피에르가 잠시 눈을 뗀 모양이다. 근 1년 만에 방문한 꼭대기 층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언젠가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대기 중인 롯과 작은 방 안. 지팡이를 바로 쥔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유피에르, 거기에 있지?”

대답이 돌아온 건 5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누군가 했더니, 아직 살아있었던 모양이네.”

“죽었으면 했어?”

“관심 없어. 무슨 용무로 찾았는지 빨리 말하지 않을래?”

“당신이 낸 과제. 오늘 끝낼 생각이야.”

“과제?”

그런 것도 있었나? 하고 유피에르는 잠시 기억을 되짚는가 싶더니, 곧 두 손을 마주쳤다.

“아, 널 스켈레톤 집사로 만들어달라는 이야기였던가?”

“스켈레톤은 빼고.”

“그럼 관심 없는데.”

유피에르의 목소리가 심드렁해졌다.

“3년 안에 롯을 쓰러뜨리고 연미복을 입고 오랬잖아.”

“그랬던가? 워낙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여서 잊고 있었나 보네. 잘해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기대는 안 하고 있겠지만.”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건지, 실이 풀린 인형처럼 블라우의 몸이 축 늘어졌다. 반대로 방 안에 있던 롯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는 끝이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긴 알베르트는 지팡이 검을 들었다.

[옵니다, 마스터.]

롯의 신형이 흔들렸다. 땅을 박찬다.

휑한 뼛조각을 드러낸 용아병은 보이는 것과 다르다. 녀석의 기세는 남달랐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롯의 손이 알베르트의 얼굴을 노렸다. 지팡이 안쪽에서 드러난 검신이 롯의 손과 부딪쳤다. 카랑, 하는 쇳소리가 울렸다. 검과 손 사이로 시선이 교차했다. 검신을 잡은 롯의 손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베르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의 신체를 타고 검으로 흘러 들어간 마나는 검은 오러를 만들었다.

거리를 벌린 건 롯이었다. 오러와 맞닿은 롯의 손이 튕겨 올랐다. 붉게 타오르던 롯의 손끝에는 그을림이 남아 있었다. 롯은 신기하다는 듯 손을 쥐억거렸다.

[의외군요. 마스터의 오러로 어느 정도 견제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완성된 오러 블레이드라면 모를까, 알베르트가 다룰 수 있는 어설픈 오러로는 롯의 몸을 베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경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부님이 준 지팡이 검이 아무리 명검이라 할지라도,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롯의 강도를 따라갈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알베르트는 방어에 전념했다.

롯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다. 보이지도 않던 사부님의 지팡이와 비교한다면 이쪽은 어린애 애교 수준에 가까웠다. 사부님이 아닌 상대와 실전에 나서는 건 간만의 일이다. 전력을 다한 이 신체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는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떤 수준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상대는 유피에르의 사역마인 롯이다.

실력을 가늠하기에는 어디 한 점 나무랄 곳이 없었다.

롯의 손을 검으로 막으며, 검집으로는 녀석의 몸을 노렸다. 뼈와 맞닿은 검집은 딱딱한 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돌을 때리는 것 같다. 타격을 줄 수 없다. 롯의 화만 돋울 뿐이다. 녀석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속도를 올리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선다.

오러와 맞닿은 뼈에서 불똥이 떨어졌다. 합의 회수가 늘어날수록 롯의 뼈가 달아올랐다.

단순한 타격으로는 오러를 돌파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놈의 몸에서 붉은 열기가 치솟았다.

[레드 드래곤의 본!]

공기가 달아올랐다. 롯의 지척에서 손을 받아넘기던 알베르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메마른 호흡이 새어 나왔다.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저 주변을 뜨겁게 만들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합을 겨룰 때마다 롯의 열기는 알베르트의 신체에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탐색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일순간 오러를 강화한 알베르트는 롯과 거리를 벌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알베르트는 호흡을 골랐다. 싸울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그와는 달리 언데드인 롯은 지치지 않는다. 거기에 마나도 무한이 아니다. 사부님의 내공심법을 배운 이후로 이전보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좋아졌지만, 총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롯은 알베르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알베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몸 안을 도는 마나의 기운이 신체를 강화했다.

손에 쥔 건 지팡이 검과 검신을 덮는 검집이다. 특이하게도 사부님은 알베르트가 오러를 만드는 걸 싫어했다. 처음에는 그 까닭을 몰랐던 알베르트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기교에 기대지 마라. 자세를 완성한 후에 오러를 접해도 늦지 않는다. 사부님이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 그런 가르침이었으리라.

눈앞에 있는 건 거목이 아니다. 이미 죽어있지만,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언데드다.

연미복을 입은 터라 신체 특정 부위를 노리는 것은 힘들다. 연미복으로 가려지지 않은 부분, 노리는 곳은 녀석의 목이다. 달라진 건 없다. 찔러 넣는다.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반복한 자세다. 실패는 없다. 찔러야 할 곳은 어느 하나 바뀌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숨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날카로워진 감각이 잡소리를 차단했다. 눈에 비치는 것은 뛰어오는 롯의 모습뿐. 그중에서도 튼튼해 보이는 목을 시야 중앙에 고정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언제 나아가느냐다.

오러를 둘렀다고 한들, 마나로 신체를 강화했다고 해도. 이 검이 롯을 꿰뚫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한계까지 기다린다. 녀석이 가까워지는 순간, 가속도가 최고속에 달하는 순간을 맞춰 노린다.

기도가 달라진 알베르트를 느낀 걸까, 롯의 붉은 뼈가 화마에 휩싸였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롯의 지척에서 느껴지던 작열감이 알베르트의 얼굴을 태웠다.

[마스터?]

호흡이 멎는다.

알베르트의 눈썹이 타올랐다. 그 순간, 롯의 목이 보였다.

[마스터!]

불타는 손이 쇄도했다.

작열하는 불길이 그대로 알베르트의 얼굴로 떨어졌다.

창천검법(蒼天劍法)

1장 자추(刺追)

“···!”

그 불길이, 거짓말처럼 알베르트의 코앞에서 멈췄다.

알베르트의 검이 놈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화마가 사라졌다.

방을 태울 것 같던 작열감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눈썹을 태우던 옅은 불길도 금세 잦아들었다. 롯의 몸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꺼졌다. 그 한 수로, 이 교전의 행방은 결정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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