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숲의 마녀(4)
블라우가 안내한 장소는 성의 꼭대기에 있는 탑이었다.
회전계단을 타고 빙빙 올라간다. 탑 끝에 있는 방 앞에서 블라우는 멈췄다. 방 안쪽에 유피에르가 준비한 옷이 있는 모양이다. 알베르트가 방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붉은 스켈레톤이 있었다.
스켈레톤으로부터 옷을 받으라는 걸까?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낀 블라우의 입에서 유피에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사역마인 롯이야. 롯을 쓰러뜨리고 저 연미복으로 갈아입어. 물론 쓰러뜨렸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피에르가 주는 일종의 시험이라는 이야기겠지. 롯의 모습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유피에르가 직접 조종하는 거야?”
“설마. 난 너한테 그럴 만한 가치를 못 느끼겠어.”
천만 중 다행이다. 일단 최악의 수는 피했다.
유피에르가 손을 쓰는 게 아니라 롯의 자율 의지에 따른 교전이라면 그래도 승산이 있었다.
“알았어. 기한은?”
“인심 썼어. 3년 줄게. 그 전에 네가 죽는다면 더 편할 것 같지만.”
블라우의 입을 빌린 유피에르가 말했다.
능글맞은 악의가 담겨있음에도 알베르트는 태연히 대화를 이어갔다.
“3년이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전에 끝내도 상관없는 거지?”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인간.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봐. 과연 네가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블라우에게 말해. 간단한 식사 같은 건 제공해줄 수 있을 거야. 무기는 성안에 있는 거라면 뭘 써도 상관없어. 물론 그에 따른 위험 부담은 네가 감수해야 해.”
“파격적이네. 이곳을 내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는 거네. 괜찮겠어? 나 같은 인간이 당신의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너무 좋아하지 않는 게 좋을걸. 어떤 트랩이 설치되어 있는지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거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유피에르.”
“걱정?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기분이 상했는지, 그 말을 끝으로 유피에르는 입을 닫았다.
알베르트의 귓가에서 [요령이 없군요, 마스터.] 하는 천칭의 목소리가 울렸다.
알베르트는 방 안의 롯을 살펴보았다.
푸른 골격을 가진 블라우와는 달리 롯은 붉은 골격을 가진 스켈레톤이었다. 성을 배회하던 다른 스켈레톤과는 다르다. 롯의 골격은 잘 만들어진 갑옷과도 같았다. 그 위에 걸친 옷은 검은 연미복이다. 이전 삶에서는 유피에르가 알베르트에게 대가 없이 선물해줬던 복장이다. 저택에 있을 때는 루드비히 가의 연미복을 입었지만, 외출이 있거나 특별한 날에는 알베르트가 챙겨 입었던 그 옷이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마스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겠지.’
롯은 스켈레톤이라고 얕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켈레톤 중에서도 상위로 분류되는 용아병(龍牙兵). 그것도 레드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롯의 강함은 중상위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를 능가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유피에르가 직접 조종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만약 유피에르의 손에 있는 롯을 쓰러뜨려야 했다면 알베르트의 승산은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자네라면 보일 거로 생각하네. 저 연미복은 평범한 옷이 아니라네.’
[얼추 보아도 알겠습니다. 덧씌워진 마법만 해도 10종류가 넘어가는군요. 과연, 훌륭합니다. 웬만한 마도구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성능입니다.]
‘유피가 직접 만든 연미복이라네. 원래는 쓸만한 갑옷을 만들 생각이었다는데, 갑자기 변덕이 들어서 연미복으로 만들었다지. 쓰임새는 보다시피 롯에게 입혀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이상한 취미를 갖고 있군요.]
‘그녀는 뼈 애호가니까.’
정확히는 골격 애호가라고 자주 말했지.
성에 있는 언데드가 다 스켈레톤인 건 아마도 그녀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 터다.
‘유피의 주사역마는 이 롯과 블라우라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목이 없는 장소에서는 주저 없이 사용했지. 평소에는 아공간에 있다가, 그녀가 필요하면 불러내는 식이었지. 두 스켈레톤의 역할은 간단하네. 블라우는 유피의 무기가 되고, 롯은 그녀를 지키는 수호기사네.’
[즉 블라우는 유피에르의 검이고, 롯은 방패라는 거군요.]
‘좋은 비유로군. 전투 능력만 따진다면 블라우는 별로 위험하지 않네. 그저 짐을 들고 다니는 스켈레톤에 지나지 않아. 유피가 그녀를 다룰 때가 문제지. 다만, 롯은 이야기가 다르네. 유피가 제어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녀석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없네.’
[아하, 그렇군요. 그렇게나 강한 상대라니 승산이 없는 것도 당연하군요. 마스터, 저는 그 발언이 자랑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상대와 나의 실력 차이에 관해서 이야기한 걸세. 역량의 차이조차 모르고 싸움에 임할 수는 없지 않나?’
[조금 전 마스터의 말은 어떻게 들어도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거로 들립니다만.]
‘싸우지 않고 연미복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 어떤가, 쓸만한 화술이라도 알려줄 건가?’
[마스터.]
‘농담일세.’
유피에르의 명을 받은 이상 롯은 쓰러지기 전까지 연미복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방 안의 구조는 단순했다. 아무것도 없는 그저 작은 방. 연무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에 있는 건 롯 혼자. 잔꾀를 부릴만한 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의지할 수 있는 물건도 없다. 더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유피에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다른 것에 기대지 말고, 순수한 무력으로 롯을 쓰러뜨려라. 전리품으로 얻은 연미복을 가져오라는 말이다.
[쓰러뜨리면 부활하는 거 아닙니까? 저거 언데드지 않습니까.]
‘그러지는 않을 걸세. 유피가 말했지 않았는가. 자기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딱 한 번만 롯을 베어 넘기면 될 뿐이네.’
유피에르가 바라는 건 진검 승부다.
[말은 쉽군요. 알고 있겠지만, 마스터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지금은 포기하는 게 맞네.’
알베르트는 방문을 도로 닫았다. 롯의 모습을 눈에서 지운 그는 블라우를 보았다.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어. 제한 시간은 3년인 거지?”
유피에르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블라우는 머리를 끄덕였다.
시간은 최대 3년. 그녀가 준 기간은 길다. 그렇다면 승산은 있었다. 블라우를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탑을 내려왔다.
[무슨 생각입니까, 마스터?]
‘사부님을 보러 갈 생각이네.’
[사부님? 이곳에 마스터의 사부님이 있었습니까?]
‘내 멋대로 그리 부르고 있을 뿐이네.’
탑에서 내려온 알베르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지저분한 정원을 지나자 낡은 성문이 보였다.
성문에는 약속한 것처럼 스켈레톤이 서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보았던 문지기다. 지팡이를 든 문지기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는 다가오는 알베르트를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알베르트는 문지기를 향해 발을 옮겼다.
[농담이겠죠, 마스터? 설마 스켈레톤이 사부님이라는 건 아니겠죠? 하다못해 데스 나이트나 듀라한급이면 안 되는 겁니까?]
하급 언데드를 앞에 두고 천칭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실을 부정하는 그 말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게나. 그는 일반적인 스켈레톤이 아니야. 나도 사부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 한 번뿐이지만, 그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네.’
리치와 싸울 때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유피에르와 함께 교전을 계속하던 그는 문득 문지기가 보여줬던 자세를 떠올렸다. 정말로 지나가듯이 보았던 움직임. 기억 한 편에 남아있던 그 동작을 바탕으로 알베르트는 리치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지기는 그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이상 스켈레톤 문지기는 알베르트의 사부님이었다.
작은 가르침이든, 큰 가르침이든 그 크기는 상관없다. 이전 시대에서 리치와 알베르트의 운명을 판가름하게 만든 수다.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랐다.
[한 번? 그거 우연 아닙니까?]
‘그건 우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던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급 마물처럼, 스켈레톤은 문에 기대어 서 있을 뿐이다.
낡은 삿갓 아래로 보이는 스켈레톤의 눈은, 특이하게도 검은 안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이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알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본 최고의 검객은 사부님일세.’
[라시엘 공작보다 말입니까?]
‘주인님의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에 비할 바가 못 되네.’
당시에는 그 차이를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알베르트는 당시 사부님이 보였던 한 수가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의 정수라는 것이 담겨있다면, 그건 사부님이 행한 수에 존재하지 않을까?
[마스터의 말을 천천히 들어보니, 저 문지기는 전설 속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도 되는 모양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네.’
진심이 담긴 알베르트의 대답에 천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마스터를 제자로 받겠습니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네. 유피에게 사부님의 일화를 들은 기억이 있다네. 생전에 그가 제자를 받을 때 어떻게 했는지 말이지.’
그 외의 이야기는 들은 것이 없다.
알베르트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일은 없었고, 유피에르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껄끄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리치와의 사건 이후로 정세는 급변했다. 마왕의 부활. 3차 대전쟁의 발발. 유피에르가 떠나고 아가씨는 전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힘차게 돌아갔다.
떠나지 않는 알베르트가 이상했는지, 문지기는 스윽 그를 돌아보았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시선과 마주친 알베르트는 그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문지기는 알베르트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그는 말없이 응시하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성안에서도 독보적인 거목이었다. 루드비히 저택의 수호수와도 비슷한 크기다. 다만, 이 나무에는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벌거벗은 나무 위에는 흔한 새 둥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 관찰할 것이 있다는 듯, 문지기는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베르트 라나. 사부님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문지기는 돌아보지 않는다.
들리지 않았던 걸까? 다르다. 그는 알베르트를 무시하고 있었다. 혹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알베르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문지기를 향해 그는 아홉 번의 절을 올렸다. 구배지례(九拜之禮). 유피에르에게 들었던 사부님의 일화다. 그는 제자를 받을 때 항상 구배지례를 받았다고 들었다. 제자가 사부에게 처음으로 올리는 기본 예의다. 그러나 문지기는 절을 올리는 알베르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절을 마친 알베르트는 가볍게 묵례를 올린 후 자리에 앉았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구먼.’
[기다리다뇨? 무엇을 말입니까?]
‘사부님이 날 제자로 받아들여 줄 때까지라네.’
[진심입니까. 마스터는 진짜로 바보군요.]
‘다른 방법이 없다네.’
아가씨를 구하는 건,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황자의 신뢰를 얻어서 그 칼끝을 동족에게 겨누게 한다는 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알베르트도 알고 있었다. 만약 다른 길이 있다고 한다면, 이 수밖에 없었다.
무인(武人)의 길을 걷는다.
기사와도 비슷한 마족의 무인이 될 수 있다면 변수가 생길지도 몰랐다.
[스켈레톤을 사부님으로 모신다니, 진심입니까? 제가 마스터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회한이 드는군요. 차라리 노망이 났다고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랬다면 미쳐서 그런 거라고 이해라도 할 텐데 말입니다.]
천칭의 목소리에는 지울 수 없는 불만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베르트는 정원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사부님으로 모실 스켈레톤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