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아가씨의 유산(3)
알베르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검은 연미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소년은 앳된 용모임에도 제법 옷맵시가 두드러지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 평생을 그와 함께해 온 연미복이다. 몇 번이나 옷매무시를 고친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손동작에 천칭이 짜증을 내기 시작할 무렵.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됐어?”
“들어오셔도 돼요, 노아 누님.”
문을 열고 들어온 주근깨 머리의 소녀는 알베르트를 보고 두 눈을 깜박였다. 말끔한 그 모습이 익숙하지 않다는 듯 잠시 지켜보던 노아는 웃음을 머금었다.
“몰라보게 변했는데, 알. 그 얼굴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집사라고 해도 믿겠어.”
“제 얼굴이 뭐 어때서 그렇습니까?”
“음···. 그렇지?”
“뭐가 말입니까?”
“인상이 밝은 편은 아니잖아?”
“그 말은 조금 뼈아픈데요.”
노아는 웃음이 멋쩍은 웃음으로 변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한 알베르트도 살짝 웃음을 지었다.
“생일 축하해, 알.”
“고맙습니다, 누님.”
오늘은 알베르트의 15번째 생일날이었다.
그리고 루드비히 공작가에서 수습 집사가 맞이하는 15번째 생일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이제 집사로 자리 잡는 거네?”
“그렇군요. 기대했던 이 날이 이리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알베르트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마쳤다.
만전을 기한 채 첫 번째 시험을 맞이하는 건, 지난 삶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는 어떠했는가. 초조함에 시달린 나머지 잠자리를 설쳤었다.
“노아 누님은 어떻습니까? 아가씨를 보는 일은.”
아리시엘 루드비히.
자랑스러운 아가씨가 태어난 지 이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앞에 있는 노아 누님은 아가씨의 시녀 겸 유모가 되어있었다. 유모가 은퇴할 날을 이제 멀지 않았다. 그녀가 공작가에서 나가고 나면 노아 누님은 아가씨의 수발을 들게 될 것이다.
“말도 마.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잠을 못 자서 죽겠다니까.”
“그래도 얌전한 편이지 않습니까?”
“그게? 어우. 끔찍하다니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과는 달리 노아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벌써 아가씨의 매력을 깨달은 걸까. 역시나 우리 아가씨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모양이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알베르트를 본 노아는 돌연 얼굴을 찡그렸다.
“근데 누님이라고 부르지 말랐잖아. 겨우 두 살 차이인데, 내가 엄청 늙은 것처럼 보이잖아.”
“미안합니다, 누님. 저도 모르게 편안해지다 보니 말입니다.”
“내가 만만해 보인다는 거야?”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노아는 입가를 찡그렸다. 알베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 깃든 감정은 따스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시니까 빨리 가자.”
노아의 뒤를 따라 알베르트는 방에서 나왔다.
사용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복도는 루드비히 공작가의 예술품으로 가득했다. 도자기와 검 거치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장식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역대 가주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있었다. 알베르트는 검성(劍星) 블라드 루드비히의 초상화를 지나쳤다.
[예전부터 말해왔던 거지만, 마스터는 그 말투부터 고쳐야 합니다. 내면이 노땅이든, 치매 들린 늙은이든 간에. 현재 마스터의 용모는 10대 소년입니다. 그 나이에 맞는 말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집사라면 모름지기 모시는 주인님보다 타인의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되겠죠.]
‘옳은 말이군. 내 노력해봄세.’
[말은 잘 하시군요. 바뀌려는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진짜 노망이라도 들린 거 아닙니까?]
‘하려고만 한다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다네. 집사란 모름지기 수십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는 법일세.’
알베르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15살짜리 꼬맹이의 언변을 흉내 내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노아의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그도 원칙을 잘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노아의 앞에 설 때면 그 말투가 무너지고는 했다.
[하여간 노땅의 똥고집은. 정말 노망이라도 나서 안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편할 것 같습니다.]
‘노아 누님을 상대하고 있으면 옛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그리고 그리운 기분에 젖어 드는 걸 알베르트는 바라고 있었다.
[이해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늘어가는 건 똥고집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스터는 훌륭한 노땅이 되었으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
천칭의 비아냥거림에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은 요 5년간, 천칭은 그에게 있어 큰 힘이 되었다. 어떨 때는 길잡이가 되어서. 어떨 때는 동료가 되어서. 알베르트의 길을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었다.
‘마법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전 마법 같은 싸구려 원시 기술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알려드리죠, 마스터. 전 세계를 대변하는 일곱 개의 의식 중 한 성좌를 차지하고 있는 고귀한···.]
‘그렇게 말해도 늙은이의 귀에는 마법처럼 신기한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네.’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냥 마법이라는 걸로 하죠. 마스터에게 있어 미지의 지식은 전부 마법이니 말입니다.]
툴툴거리는 천칭을 달랠 생각으로 말을 고르던 알베르트는 바깥이 가까워진 걸 확인하고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이 나온 문은 저택 뒤쪽의 통용구였다.
밝은 빛이 얼굴을 두들긴다. 저택 앞쪽에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알베르트가 향한 정원의 입구에는 물결과도 같은 문양이 새겨진 외벽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2층 테라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축제의 주인공처럼 아리따운 귀족 영애들이 정원을 내려다보며 밀담을 속삭이고 있었다.
담화 소리 밑으로는 테라스가 깎여나가고 있었다. 이름 모를 영물이 조각된 외벽은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따다 장식해놓은 것 같은 고고한 모습이다. 소탈함을 강조하는 평상시의 저택은 연상조차 할 수 없다. 과하게 말한다면 황제가 사용하는 별궁처럼 보일 정도였다.
[화려하군요. 오늘 있을 시험 때문입니까?]
‘세바스찬 집사장님 이후로는 처음 있는 시험이네. 주인님의 입장에서는 힘을 싣고 싶었겠지.’
그 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했을 뒷이야기다.
루드비히 공작령은 제국의 중심이 아닌 국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국 내에서도 검으로 불리는 루드비히 가문의 힘이 아니면 마족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예로운 일과는 반대로, 루드비히 가문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졌다.
제국의 수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루드비히 가문은 마족을 감시하고 숲의 경계선을 지켰다. 이는 중앙 귀족들에게 미치는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불러왔고, 결국 제국의 왼팔인 크로만 공작가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 화려한 출정식 뒤로는 그런 비화가 숨겨져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가는 건재하다.
국경을 지키는 제국의 오른팔이 쇠락하지 않았다는 걸 중앙 귀족들에게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름 모를 귀족과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정원을 오갔다.
정원 너머로 보이는 저택의 수호수(守護樹)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드비히 가문을 언제나 지켜주었다는 신성한 신목. 아직 건재한 고목의 모습을 보며 노아는 말했다.
“그럼 먼저 가 있을게. 인사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
“노아 누님.”
“응?”
돌아보는 주근깨 머리의 시녀.
아직 빠지지 않은 볼살은 풋풋한 그녀의 나이를 엿볼 수 있었다. 시골 소녀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노아 누님을 보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이제는 시험이 끝나면 보겠군요.”
“금방 돌아올 거잖아.”
이야기는 그 때 또 하자, 노아는 무대 뒤쪽으로 향했다.
알베르트는 그녀와 달리 정원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무대로 이어지는 융단에는 빅토리아 시녀장과 세바스찬 집사장의 모습이 보였다.
입구로 들어선 알베르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융단의 좌우로는 제국의 유력한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모두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깃발이었다.
시작은 변경의 챈드리 백작 가문의 깃발이다. 커다란 이빨 모양을 한 깃발은 북방의 야만족들을 무찌르겠다는 챈드리 백작의 힘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국력은 곧 힘이다. 그 말대로 챈드리 백작은 마족과의 3차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에도 선봉대로 나섰던 부대였다.
그 뒤를 잇는 건 은빛의 창이다. 사악함을 몰아내고 신성함을 지킨다는 성 미뉴에트 백작 가문의 깃발이다. 뛰어난 신성력을 가진 사제를 숱하게 배출해낸 성 미뉴에트 가문은 제국 내에서도 인정받는 명문이었다.
다음 차례는 펌프킨(Pumpkin) 문양의 깃발이었다.
제국의 상권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재상을 몇 번이나 배출한 리그문트 후작 가의 문양이다. 재력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그 아래로 줄을 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은 끝이 없었다.
마치 예전에 하던 집사 공부를 반복하는 것 같다.
이어지던 깃발을 살펴보던 알베르트의 시선에 빅토리아 시녀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래 걸렸구나, 알베르트.”
“그렇지도 않아요, 시녀장님.”
이제 겨우 5년이 지났을 뿐이다.
생일을 맞이한 알베르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있느냐?”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자신이 없었다면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알베르트를 바라보던 시녀장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는 눈이 있는지라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지만, 알베르트의 눈에는 빅토리아 시녀장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넌 언제나 자신이 넘치는구나. 하지만 알베르트. 금지된 숲은 장난이 아니란다.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이다. 이 시험을 반드시 통과할 필요는 없단다. 어디까지나 관례에 지나지 않는 행사란다. 나는. 아니, 우리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고 있단다.”
그 대답에 알베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사장 바깥에서 알베르트를 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손을 흔들었다.
“힘내라, 알!”
“너라면 할 수 있어.”
키가 멀대같이 큰 정원사인 필립의 모습도 보였다. 과묵한 그는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알베르트는 무심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정말로 따뜻한 곳이에요, 우리 공작가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만.”
그냥 받아줄 만도 하건만, 진지하게 대답하는 시녀장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은 사자기사단이 주변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숲 안쪽이 위험한 곳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 점을 명심하거라.”
“걱정이 많으시군요, 시녀장님.”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로 믿는다.”
“저는 루드비히 가문을 섬기는 몸입니다, 시녀장님.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가진 모든 걸 바칠 생각입니다.”
“알베르트?”
빅토리아 시녀장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친 알베르트는 다시 발을 옮겼다.
이제 그 앞에 남은 깃발은 두 개였다.
하나는 루드비히 공작가를 의미하는 익숙한 검 문양의 깃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다른 깃발은 독수리 문양을 한 깃발이었다.
제국 내에서도 두 개밖에 없는 공작 가문.
무(武)를 대표하는 루드비히 공작 가문과 마(魔)를 대표하는 크로만 공작 가문. 루드비히 공작가의 경쟁자로 일평생 흔들리지 않는 왕좌를 차지한 가문이다. 그 깃발 뒤로는 외눈 안경(Monocle)을 쓴 이지적인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행운을 빈다는 듯 한쪽 손을 흔들었다.
크로만 공작가의 가신들을 지나치자 세바스찬 집사장이 알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루드비히 공작가의 집사는 나와 너밖에 없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 알베르트?”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치르는 시험의 위험성 때문이죠.”
알베르트는 세바스찬 집사장의 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 루드비히 공작가의 집사로 인정받는 이 시험은 금지된 숲에 있는 가문의 상징을 5일 안에 가지고 오는 시험이다. 본래 집사 된 자의 담력과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이 시험은 예전과는 많이 변질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대가 흐르면서 금지된 숲이 너무 위험한 지역이 되어버렸지. 사자기사단이 주변을 지키고 있을 테지만, 혹여라도 길을 잘못 들린다면 바로 구조를 요청해라.”
“세바스찬 집사장님은 어떠셨습니까? 그때도 이렇게 위험했습니까?”
알베르트의 물음에 세바스찬 집사장은 생각에 잠겼다.
루드비히 공작가의 마지막 집사인 그는 시험을 통과한 유일한 집사였다.
“집사가 될 너한테만 하는 이야기다만, 숲 안쪽의 이름 없는 성은 위험하지 않다.”
“숲 안의 성이라면…?”
“공작령에서 도는 소문이다. 숲 안에는 마녀가 살고 있다지. 자,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주인님에게 가거라.”
마지막 남은 깃발, 루드비히 공작가를 상징하는 검 문양의 깃발을 지나자 큰 단상이 알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루드비히 공작가의 가주인 라시엘 루드비히 공작과 부인인 아나스타샤 라이언하트가 있었다. 금실 좋은 공작 부부는 이곳까지 온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한쪽 무릎을 구부린 그는 신하의 예를 갖췄다.
“라나(蘭)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알베르트 라나. 오늘 네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무엇이냐?”
“루드비히 공작가의 집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신이 되고 싶다라. 좋다, 너에게 가문의 가주로서 몇 가지 질문을 해보마.”
라시엘 공작이 손짓하자 한쪽에 서 있던 사자기사단의 기사가 검을 올렸다.
“우리 가문은 예로부터 검(劍)을 숭상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검은 제국을 침입하는 마족을 베고 신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대편에 서 있던 사자기사단의 기사가 검에서 오러를 뽑았다.
닿는 모든 것을 베어낸다는 눈부신 오러가 주변에 빛을 뿌렸다.
“우리 가문은 예로부터 무(武)를 숭상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힘은 핍박받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강자로부터 교만함을 빼앗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알베르트의 대답은 막힘이 없다.
마치 사전에 가져다 놓은 문구를 읽고 있는 것 같다.
“좋은 대답이다. 알베르트 라나. 검과 무를 숭상하는 루드비히 가문의 가주로서 너에게 시험을 내리노라. 금지된 숲에 준비해놓은 우리 가문의 상징을 찾아오거라. 기간은 5일. 가문에서 지급되는 식수와 식량은 단 3일 치다. 길 곳곳에는 보급품이 숨겨져 있으니, 이를 찾고 상징을 되찾아오거라. 그 끝에 네가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온다면 나는 루드비히 가문의 가주의 이름을 걸고 너를 우리 가신으로 받아들여 주마.”
“유어 그레이스(Your Grace).”
라시엘 공작은 검을 뽑았다.
제국의 4대 명검 중 하나라는 유그피르의 검에 형체를 가진 오러가 덧씌워졌다.
오러 블레이드.
소드 마스터를 상징하는 불패의 기운이 유그피르의 검을 덮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제국에서 단 4명뿐인 소드 마스터. 그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칭해지는 라시엘 공작의 오러 블레이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로 주변을 밝히던 라시엘 공작은 천천히 알베르트를 향해 검을 내렸다.
서늘한 기운이 알베르트의 머리에 닿았다.
이글거리는 오러 블레이드가 알베르트의 머리카락을 태웠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오고 간 검은 이내 라시엘 공작의 검집으로 수납되었다.
“만약 생존이 힘들 것 같다면 언제든지 지급된 스크롤을 찢거라. 숲 안에서 대기 중인 사자기사단이 그 이름에 걸고 널 구하러 갈 것이다.”
알베르트에게만 들리는 낮은 음성이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라시엘 공작이 말했다.
“사실 나도 이 시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
소탈하게 웃은 라시엘 공작은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출정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순서는 이걸로 끝이다. 하지만 알베르트의 순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러를 뽑았던 기사, 사자기사단의 부단장 로엔 발 나하드의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길게 숨을 뱉어냈다. 떨리는 가슴이 약간 진정된 것 같았다.
“주인님, 고개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허락하마.”
라시엘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단상 위에는 주인님과 인자한 표정을 한 안주인님이 있었다.
“제게 발언의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이제는 순전히 알베르트의 몫이었다.
아가씨를 잃은 그 순간부터 알베르트의 시간은 그곳에 묶여있었다.
“저는 루드비히 공작가를 사랑합니다.”
라시엘 공작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 알베르트 라나는 맹세합니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은, 아가씨를 위해서니까요.”
스스로의 다짐과도 같다.
각오는 마쳤다. 이제 앞으로 나갈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감히 주인님에게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어떤 상을 내려주실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흠. 우리 가문의 집사가 된 너는 후계자인 내 딸을 보필하게 될 것이다.”
“그건 아리시엘 루드비히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확인을 마친 알베르트는 라시엘 공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묻고 싶은 건 그게 전부입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마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허락하마.”
라시엘 공작을 대신하듯이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시엘 공작과는 달리 그녀는 단상 위에 있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은 채, 공작부인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두꺼운 화장 아래로는 숨길 수 없는 피로함이 엿보였다. 아리시엘 아가씨를 출산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터다. 아직 산후조리에 힘을 쓸 시기인 만큼,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알베르트의 안색을 살펴본 그녀는 볼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조금 어둡구나, 알베르트. 많이 긴장한 모양이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정 시험이 힘들다면 중간에 스크롤을 찢어도 괜찮단다.”
사전에 라시엘 공작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아니면 안주인님이 남편에게 부탁해둔 것일까. 아마도 두 쪽 다 맞지 않을까. 라시엘 공작님은 아나스타샤 부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알베르트를 아끼는 것은 당연지사겠지.
“건방진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마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슬럼가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갈 운명이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이다.
아가씨의 어머니이자, 생명의 은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섰음에도 그 미모는 아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인자함과 따스함이 항상 함께했던 아나스타샤 공작부인. 하지만 그런 면모를 가졌음에도 그녀의 끝은 밝지 못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구나, 알베르트. 널 맞이한 건 우리 가문에게도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는 아니란다.”
“마님은 정말 상냥하신 분입니다.”
따뜻함이 가슴을 간질였다. 마음속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낀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잠시 아리시엘 아가씨를 봬도 되겠습니까?”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이 허락하자 노아가 요람 안에 있던 아가씨를 안고 내려왔다.
알베르트를 본 노아는 힘내, 알! 하고 작게 입을 달싹였다.
요람 속에는 갓난아기인 아가씨의 모습이 있었다.
생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아리시엘 아가씨는 연약한 아기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알베르트는 아리시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분 탓일까, 그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알베르트는 품속으로 손을 옮겼다.
이 날을 위해 준비했던 물건을 꺼낸 그는 아가씨의 요람 안으로 목걸이를 넣었다.
“저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마석입니다. 위대한 자를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전승이 담겨있죠. 이 시험은 꽤 오래 걸릴 겁니다. 제가 없는 동안 이 마석이 아가씨를 지켜줄 겁니다.”
“기다려라, 알. 그건 너희 가문의….”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마님. 이렇게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가씨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알베르트는 풀어드리지 않았다.
깊게 고개를 숙인 그는 그 자리에서 세 번의 절을 올렸다.
한 번은 라시엘 공작을 향해.
한 번은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을 향해.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아가씨를 향해.
알베르트는 등을 보이지 않고 단상 앞에서 물러났다.
“다녀오거라, 알베르트.”
“다녀오겠습니다, 집사장님.”
세바스찬 집사장이 건네는 배낭을 받은 알베르트는 익숙한 정원을 뒤로했다.
그 등 뒤로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따뜻함은 충분히 받았다.
이제는 그 따뜻함을 지켜야 할 시간이다.
[가실까요, 마스터?]
‘이제 승부수를 던져야 할 시간이구먼.’
중요한 건 시험이 아니었다.
이 시점이야말로 분기점. 저택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마도 먼 시간이 지난 후다.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알베르트는 금지된 숲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