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아가씨의 유산(2)
루드비히 공작가의 시녀인 노아는 오늘도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곱슬이 심한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 아침 일진은 괜찮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응접실의 청소를 마치고, 명화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반복되는 가사와 노동은 어느새 숙련도가 붙어 있었고, 평소보다 빨리 청소가 끝난 덕분에 그녀는 느지막하게 정원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른 사용인과 잡담을 나누는 그 시점까지만 하더라도, 노아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침부터 일이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혹시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티타임이라도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상등품의 홍차로 말이다.
그러나 노아가 품은 기대감은 오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정원에 내려온 지 몇 분.
갑작스럽게 시녀장의 부름을 받고 만 것이다.
복도를 걷는 소녀의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예술품인 도자기와 명화는 망연자실한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녀장의 호출은 자신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애초에 아직 17살밖에 되지 않은 노아에게는 중요한 일이 내려오지 않았다.
혹여라도 있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내려오는 일은 단순했다. 허드렛일과 작법, 예법을 배워가며 루드비히 공작가에 어울리는 시녀가 되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러니 지금 시녀장이 그녀를 부르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하우스 메이드 노아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들어오려무나.”
시녀장의 허락을 받은 노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녀장의 방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저한도로 필요한 물품만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노아가 걸었던 복도 쪽이 훨씬 화려했다. 한 공작가의 시녀장을 맡은 사용인의 방이라고 보기에는 볼품없는 방이다. 다른 가문의 귀족이 방문했을 시, 간신히 무시당하지 않을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집사 장인 세바스찬이 말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방에 들어온 노아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현숙한 느낌의 여인, 시녀장 빅토리아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를 알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시녀장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알베르트는 어디에 있느냐?”
“숲 쪽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구하러 외출 중입니다.”
“약초? 약초라면 며칠 전에 다 구하지 않았더냐?”
“알베르트가 시녀장님에게 말씀드린 기한은 7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로 알베르트가 약초를 채집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다. 아직 기한에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목표로 했던 양을 다 채웠음에도 더 구하러 갔다는 말이냐. 그 위험한 곳을···.”
안주인님이 특별히 당부했던 아이다.
빅토리아 시녀장은 자신의 눈에서 그 아이가 벗어나는 걸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아직 어린 소년은 기특한 일을 많이 해왔다. 저택의 창고를 도맡아서 정리하거나, 사용인들이 곤란한 일로 헤매고 있을 때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타나서 유유히 일을 해결했다.
일사천리.
사용인들 사이에서 알베르트의 평판이 높아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인지.”
빅토리아 시녀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주인님의 눈은 정확했다.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런 사고뭉치는 없을 거로 여겼는데, 단 며칠 만에 소년은 루드비히 공작가에 어울리는 사용인으로 변해있었다.
“한데,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시녀장의 얼굴이 표독스러워진 것을 확인한 노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게, 저기···. 제가 오늘 맡은 업무는 집안 청소여서.”
“동기인 아이가 숲으로 약초를 캐러 갔는데, 너는 여기에 남았다는 거냐?”
높아지는 시녀장의 언성에 노아는 울고 싶어졌다.
우연히 그와 같이 저택에 들어왔다는 동기라는 사실 하나가, 그녀를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있었다. 너무 뛰어난 동기는 다른 동기의 미움을 받기에 십상이다. 지금 알베르트와 노아의 관계는 딱 그런 케이스였다.
“아무래도 너는 특별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구나. 동기와 비교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지, 참. 안 그래도 유모가 손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널 추천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주인님의 후계자도 조만간 탄생할 테고. 네가 잘 해낼 수 있다면 아가씨나 도련님을 보좌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제, 제가요?”
뜻밖의 제안에 노아는 두 눈을 깜박였다.
“물론이란다. 알베르트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동기인 너도 더 위를 노려봐야 하지 않겠니? 그럼 기본적인 예법부터 시작하자꾸나. 바느질은 잘 하지 않더냐?”
“네, 네. 물론….”
노아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건 바느질뿐이다. 동생들의 닳은 옷을 수선하면서 키워왔던 손재주가 이런 식으로 빛을 발할 거라고는, 그녀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
샹들리에 밑으로 보이는 수많은 언데드(Undead)를 보며 알베르트는 숨을 죽였다.
왕좌에 앉아 있는 언데드는 이 고성의 주인이었다. 보랏빛의 로브와 붉은 마석의 스태프를 한 손에 쥔 백골. 언데드 중에서도 상위 언데드로 꼽히는 리치(Lich)다. 물리 공격이나 등급이 낮은 서클 마법은 통하지도 않는다. 간신히 리치의 본체를 쓰러뜨렸다고 해도, 문제는 그 뒤였다. 리치의 핵이 담긴 유골함을 부수지 못한다면, 리치는 몇 번이고 돌아왔다.
반대로 유골함만 부술 수 있다면 굳이 리치와 검을 섞을 이유는 없었다.
[알고 있겠죠, 마스터? 아직 당신의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알고 있네.’
천칭의 속삭임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다.
회귀하기 전의 자신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상대다. 턱없이 약한 이 몸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고성의 주인인 리치는 이레귤러적인 힘을 가진 강력한 녀석이었다. 실제로 지난 삶에서 놈을 쓰러뜨릴 때 알베르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아군이 곁에 있었고, 힘을 합친 끝에서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 당시 리치가 보였던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알베르트 혼자서는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공법으로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전 삶에서 함께했던 그녀와 사용했던 비밀 통로를 찾는데 2년의 세월이 걸렸다.
금지된 숲에서 길을 잘못 들린 나머지 귀가가 늦어질 뻔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잘못 디디기만 해도 이상한 곳으로 떨어지는 숲의 특이성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몇 번이나 마물과 만나고 도망치기를 반복했던가. 지금 이렇듯 알베르트가 살아있는 건 그와 함께하고 있는 천칭의 도움이 컸다.
리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성녀의 축복을 받은 성수를 조금씩 모았다.
루미에르 교가 제작하는 성녀의 성수는 특별했다. 언데드와 마족에게는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몸의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었다. 한 움큼도 안 되는 아르웬 성녀의 성수를 모으는 데만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
덕분에 창고의 일까지 도맡아 처리한 알베르트는 저택의 차 일부분이 시녀들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녀장님에게 걸리면 단순히 꾸지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시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용도 불명으로 사라지던 차는 그 흐름을 멈췄다.
숲을 오가면서 하급 마물의 마석을 착실히 흡수한지 5년이 흘렀다.
알베르트의 나이는 어느덧, 소년티를 벗기 시작한 15살이 되어 있었다.
알베르트는 리치가 앉아 있는 왕좌를 응시했다.
그 손받이 아래에는 녀석의 유골함이 있었다. 손받이에 마나를 흘려보내면 내용물을 공개하는 장치로, 그 순간을 노려 유골함을 부순다면 알베르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리치는 수 시간에 한 번, 스태프를 원탁에 올려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스태프를 원탁에 올리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의식과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알베르트는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리치는 왕좌에서 일어났다.
밑단이 찢긴 로브 아래로 드러난 발은 없다. 공중을 부유한 채 원탁으로 내려온 리치는 스태프를 올렸다. 호위를 맡고 있던 수많은 스켈레톤이 고개를 숙인다. 데스나이트(Death Knight)와 듀라한(Dullahan)이 예식을 올리는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왕좌로 뛰어내렸다.
낙하음을 들은 리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알베르트는 마나를 왕좌에 흘러 넣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받이가 열렸다.
손받이 안에서 나온 건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유골함이었다. 알베르트는 미리 성수(聖水)를 발라두었던 단검을 가차 없이 유골함에 찔러 넣었다. 성수와 닿은 유골함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알베르트는 리치를 확인했다. 크게 흔들린 리치는 원탁을 잡고 간신히 서 있었다.
“실패인가?”
[아뇨, 마스터. 유골함은 부서졌습니다. 하지만 리치가 모아두었던 마나가 강대했던 모양입니다. 사라져야 할 육체를 억지로 붙잡아두고 있는 겁니다. 과연 평범한 리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군요.]
실제로 리치의 주변에서 예식을 올리던 듀라한과 데스나이트는 역소환 되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스켈레톤 정도인데. 그들도 마나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지, 실이 풀린 인형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리치의 손이 들린다. 원탁에서 떠오른 스태프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냥은 쓰러지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공정을 마친 리치의 주변에서 푸른 얼음구와 붉은 화염구가 떠올랐다.
[마스터!]
“알고 있네.”
마무리를 지으라는 천칭의 독촉에 알베르트는 유골함을 던졌다.
왕좌와 부딪친 유골함은 뚜껑이 열리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리치의 핵, 본체로 보이는 뼛조각이 성수와 맞닿아 타오르는 중이었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 위로 알베르트는 몇 방울밖에 안 남은 성수를 쏟아 부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게나.”
반응은 순식간이었다.
리치의 본체인 유골함이 타격을 입자 쏘아지던 얼음구와 화염구가 사라졌다.
우드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백골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리치의 몸이 반으로 꺾였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비틀어버리는 것처럼. 그 몸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꺾였다.
“----. ----!”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 두 눈이 알베르트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 담긴 광기는 소년을 향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쓰러지는 리치를 보고 두 손을 모았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차린다.
리치의 정체가 살아생전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고대에 몰락한 왕이라든지, 저주를 받은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겠지. 혹은 숲 너머의 마족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에게 최소한의 격식을 차리는 건, 알베르트가 사라지는 리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언데드를 둘러본 알베르트는 리치의 주검으로 다가갔다.
마나가 사라진 백골은 더는 반응하지 않는다. 리치가 입고 있던 로브를 챙긴 알베르트는 스태프를 원탁 위로 올렸다.
[좋은 마석이군요. 이걸 사용한다면 마스터의 마나도 제법 쓸 만해 질 겁니다.]
리치의 붉은 두 안광과 마찬가지로 붉은빛으로 빛나는 마석이다. 안에 담긴 마나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서치 마나(Search Mana)를 사용할 수 없는 알베르트의 눈으로 봐도 범상치 않은 마나가 모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검을 쑤셔 넣은 알베르트는 마석과 스태프를 분리했다. 마석이 빠진 스태프는 부르르 몸체가 떨리더니, 이내 썩어빠진 고목으로 변했다. 고목을 원탁 위에 올려놓은 알베르트는 마석을 살펴보았다. 불길하게 보였던 붉은빛이 지금은 사람을 현혹하는 아름다운 색으로 변해있었다.
“이건 마석이 아닐세.”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로 생각했죠. 결국, 노망이 나버렸군요. 걱정하지 마시죠, 마스터. 이성이 나가버린 그 몸, 제가 인계하겠습니다.]
“이때다 싶어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자네. 이건 마정석(魔精石)이라고 하는 물건이네.”
오늘날의 제국이 있게 만든 최상위급의 마석.
이제는 거무튀튀하게 변한 알베르트의 가문에 내려오는 보석과 같은 물건이었다.
일반인이 마정석과 마석을 구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마나가 많이 담겨있는가, 적게 담겨있는가. 이 차이밖에 보이질 않는다. 허나, 마정석을 다뤄보면 알게 된다. 그 안에 담긴 질은 일반 마석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가치를 알고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다룬다면, 어떤 촉매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위급의 물건이었다.
알베르트의 가문에 내려오는 마석이 마정석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그와 이전 삶의 아가씨뿐이지 않았을까.
[제가 본 마정석과는 많이 다르군요.]
“마정석은 평소에는 마석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보석이네. 실제로 내 힘으로는 이 마정석이 가진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네. 그러니 그저 마나가 많은 희귀한 마석으로 보일 뿐이지.”
알베르트가 가진 마나를 모두 쏟아 부어도 이 마정석은 본신으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가 본 건 수도에 있는 마정석이었겠지. 그 당시의 마정석은 꽤 열화 되었을 것이네.”
마정석도 무한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석과 마찬가지로 그 끝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사용할 겁니까, 마스터?]
“아닐세. 이걸 사용하는 건 이 몸이 아니야.”
마정석을 챙긴 알베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고성을 찾아오길 잘했다. 이전 삶에서는 그녀가 이 마정석을 부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하, 그렇죠. 전 마스터에게는 항상 비장의 수가 남아있었죠. 마스터가 준 마정석 말입니다. 이번 시대에는 그 마정석이 없으니, 이 마정석으로 대체하신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이 마정석은 아가씨의 선물로 남겨둘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죠, 마스터.]
알베르트는 마지막으로 홀을 돌아보았다.
역소환 된 듀라한과 데스나이트의 흔적은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뼛조각이 된 스켈레톤의 사체만이 그곳에는 가득했다.
“다시는 올 일이 없으면 좋겠구먼.”
곧 해가 질 시간이다. 늦지 않게 저택으로 귀가해야 했다. 알베르트는 홀을 뒤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