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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들.
그랜트와 바리스는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희에게는 좋은 내용입니다."
바리스의 말에, 그랜트가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한단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구나."
그랜트는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고는 서류를 바라봤다.
"녀석들도 해적이지만. 국가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사실 상 해군과 다를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저희가 거부할 이유도 없습니다."
해적에게 크게 당한 바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랜트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서류를 한 번 바라봤다. 가르시아 해의 해적 영주, 그 동안에 빠른 속도로 다른 해적들의 항구를 먹어치우고 세를 불린 게르하르크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래,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기도 하구나."
아이리 공화국과 해적이 싸울 때에 양 측에 큰 피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생각 외로 양쪽 모두 피해는 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이리 공화국은 더 쉽을 두 대 보유한 상태였고. 로른 해의 주도권은 여전히 아이리 공화국이 잡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고 있을 때에, 함께 일해보자고 하는 게르하르크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를 만나보셨습니까."
바리스의 말에 그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하르크라는 남자는 지금 배 한 척 만을 가지고 당당하게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바리스가 그랜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신뢰는 힘들지만. 신용이 나쁘지는 않아보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 로른 해에 있는, 자신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해적단 하나를 공격하는 것. 카멜롯 공화국도 그 해적단에는 빚이 있고. 적의 적은 동맹인 법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느냐."
그랜트의 말에, 바리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게르하르크는 카멜롯 공화국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가 직접 마리아 해적단과의 싸움에 참가할 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그랜트는 의자에 기댄채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자가 원하는 것은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함선들과 카멜롯 왕국의 전함들을 함께 연합해서. 해적들을 정리하는 것. 바리스는 고민하는 그랜트를 보며 말했다.
"내가 있는 한에는, 다른 자들이 카멜롯의 바다를 넘보지는 못한다."
그랜트는 무겁게 말했다. 스스로도 이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고, 또한 한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스는 곧바로 그 한계를 지적했다.
"제독님의 나이가 팔십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런 말씀은 죄송하지만..."
지금은 그가 버티고 있다. 아이리 공화국도 카멜롯 왕국의 주변해를 함부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싸움을 걸지 않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해적들과의 원정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첫번째.
그리고, 벌써 30년도 전의 일이지만 아이리 공화국이 카멜롯 왕국에게 입었던... 그랜트에게 입었던 피해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이 두번째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고, 사람은 늙고 노쇠하다가 죽는다. 그랜트가 없는 카멜롯의 바다를 다른 자들이 지키기에는 그 빈틈이 너무 크다.
"나는 간계에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랜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고는, 바리스를 바라봤다. 바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랜트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함께 한다고 그랜트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는 배신하지 않는다.
답답할 만큼이나 강직한 성격이 그랜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모든 카멜롯의 해군들은 그랜트의 그런 점을 신뢰하고. 아무리 어려운 명령이라도 기꺼히 따르지만. 적이 간계를 가지고 그랜트를 건드리면 그는 그 성격으로 인해서 무력해지곤 했다.
해전이 일어나면 누구보다 뛰어난 장군이지만. 책사는 되지 못하는 남자. 바리스는 그것이 답답했다. 다른 자들이 칼에 독을 바르고, 싸움이 있기 전에 독약을 음식에 타면. 그랜트는 독을 바른 칼을 맞고, 독약을 먹고 나서 싸움에 나가 이기고 돌아오는 전사였다.
뒤편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고는. 목소리가 들렸다.
"게르하르크가 만나뵙고자 합니다."
그랜트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거라."
잠시 뒤에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게르하르크가 걸어들어온다. 그는 곧바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서 그랜트를 바라봤다.
"제안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제독."
가르시아 해에서와는 다르게 그는 능숙하게 다른 나라의 말을 하고 있었다. 게르하르크의 물음에 그랜트가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아직도 생각 중이라네."
그랜트의 말에, 게르하르크가 조용히 서류 하나를 더 내밀었다.
"잠깐의 동맹이 아닙니다. 저는 나름대로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하면 카멜롯 왕국과 긴 시간 인연을 유지했으면 합니다."
게르하르크가 내민 서류를 확인한 그랜트는 그를 바라봤다.
"상호 보호 조약인가.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나라를 대표하는 건 아닐진데."
그 말에 게르하르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이리 공화국이 로른 해에서 강대해진다면. 아마 다른 곳으로도 눈을 돌리고 싶어할 겁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일이니. 이 정도는 서로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랜트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여전히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있지 않나."
게르하르크는 그 말에 한 호흡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가르시아 해의 해적 항구들과 카멜롯 왕국의 해군들 사이에 체결되는 조약입니다."
계속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게르하르크를 보면서. 그랜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밖에 보이는 풍경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이를 똑바로 먹으면.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 그 동안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그대로 경험이 되니."
바리스가 일어나서 서 있는 그랜트를 부축하고 그랜트는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살짝 감은채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눈이 불길하다네."
그 말에 게르하르크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한 불안감일 뿐입니다. 해적과 처음으로 계약을 맺으시다보니 가지고 계신 불안감이 그렇게 표출된게 아닐까요."
그 말에 그랜트가 허허허 하고 웃다가 뒤를 돌아보았고. 그 눈에는 번득이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불길함과, 불안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로 보이는 모양이지."
그랜트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해적단에 복수를 원한다고 말하는 그 눈에 그렇게 욕심과 탐욕이 넘실거리는 이유를 모르겠군."
작은 욕심이 아니다. 나라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어도 모자랄 것 같은 눈빛. 저 눈빛은 그랜트가 젊은 시절에 봤던 반란군 수장의 눈빛과 닮았고. 배다른 자식을 죽이는 왕비가 하고 있던 눈과 닮았으며, 주변의 소규모 상인들을 싸그리 갈아마시면서 세를 불리던 탐욕스러운 상인들에게서 보았던 눈빛과도 닮아있었다.
다만, 그 욕심의 크기는, 그런 욕심들과는 궤도를 달리하고 있다.
그랜트는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게르하르크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문득 깨달은 듯이 서류 하나를 더 꺼냈다.
"아, 이건 카멜롯 왕께서 보내신 교서입니다."
그 말에 그랜트의 표정이 굳었다. 열어보지 않고도 내용이 짐작이 갔다.
"..."
그랜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나란 남자는 기교가 부족하다. 세련되지 않았다. 교서에는, 게르하르크와의 협력하라는 명령이 왕의 인장과 함께 써져 있었다.
그랜트와의 만남을 끝내고 나서. 게르하르크는 얼굴을 구기고 자신의 방에 있었다.
"더럽게 귀찮은 영감탱이로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는 자신의 등 뒤로 넘실거리는 기운을 다시 휘감아 올려서 손 위에서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탐욕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성취하기를 원하는 목적이 있고. 거기로 달려가게 하는 원동력인 탐욕이 있다. 게르하르크가 만들어내는, 바다의 악마에게 받은 능력은 그 탐욕을 키운다.
모든 사람들은 탐욕과 함께 다른 감정들도 가지고 있다. 도덕, 양심, 의지...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나름대로 가려서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여자를 가지고 싶다고 그 여자의 애인을 죽이는 사람은 드물고. 돈이 필요하다고 자기 자식을 파는 부모도 드물다.
하지만, 게르하르크가 마음 먹고 다른 사람들의 탐욕을 키우면. 그 탐욕이 다른 감정들을 누르기 시작한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변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가지기 위해서 그녀를 가두고, 아는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돈을 위해서 뭐든지 하는 인두겁을 쓴 짐승으로 사람을 바꿔버린다.
그래서 게르하르크가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원하는 목적이라는게."
그랜트는 게르하르크가 건드릴 수 없었다. 성취하기 원하는 목적이 올바름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사람의 탐욕을 키운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 탐욕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할 리가 없으니.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올바름을 갈구하고. 결국에는 그 과정에서 키워졌던 탐욕이 짓눌려 사라진다.
키우면 키울 수록, 오히려 더 곧아지고, 정결해진다. 게르하르크의 힘으로는 그랜트를 망가뜨릴 수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카멜롯의 왕을 노렸고. 결국, 카멜롯의 제독인 그랜트는 거기에 따를 수 밖에 없다.
"... 마리아 해적단, 레이먼드."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뒤편에서 일렁이는 검은 아지랑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이제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그 말에, 게르하르크가 서늘하게 웃었다.
"확실하겠지. 너희들을 묶고 있는 그 족쇄가 풀린다면. 더 이상 그 나가의 유물인지 지랄인지에 접근이 막히지 않는게"
- 확실하다. 나가들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있다. 완전히 풀려난다면.
그럼 됬어. 가능하면 직접 살을 씹어버리고 싶었으니. 게르하르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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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관은 역시...
바다 아래에서, 붉은 사슬 한 가닥에 꿰뚫려 있는 형체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증오가 가지겠지.
게르하르크는 탐욕, 레인은 증오.
- 새로 계약한 녀석은?
- 그건 왕관거리도 아니야. 질투는 언제나 그렇지.
그 말에 바다 속에서 비웃음이 울려퍼진다. 탐욕과 질투는 비교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자신보다 나은 무언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마음.
비교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불태우며 강해지는 증오에 비할 바가 아니다.
- 하지만, 지금 증오는 그 남자의 거미줄에 걸린 모양이던데.
남은 사슬 하나는 원래 에밀이 가질 수 있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강해지고, 비교하지 않아도 스스로 강해지는 감정.
- 아... 그 에밀이라는 녀석은 대단해. 다만...
그는 너무 '오만'하다. 자기 거미줄에 걸린 녀석이 그냥 모기가 아닌데도, 묶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자기 거미줄에 걸린 먹이가 사실은 자기 집을 통째로 뜯어내고 그를 씹어먹을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한다.
뭐, 어차피 그 상황도 악마들에게는 작은 여흥거리일 뿐. 레인이 그 상태에서 망가져도 딱히 문제될 일은 아니다.
애초에, 이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그 절차가 필요했을 뿐이니. 지금 와서는 힘을 나눠준 녀석들이 다 죽어버려도 상관이 없다.
나가의 배들이 주인을 다 찾고 나자 봉인이 풀렸고, 그 이후에 주인들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들이 다시 가두어지는게 아니듯이. 사슬이 끊어진 이상 그 녀석들에게 뭔 일이 일어나도 끊어진 사슬이 다시 생겨나지는 않으니.
힘을 준다고 했고,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준다고 유혹하지만. 애초에 지킬 필요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
레인이 원했던 것은 그들이 주는 힘으로 이루기에는 벅찬 목표였다. 자신들이 완전히 풀려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가 증오하는 자들에게 다가갈 수도 없으니까. 악마들이 다 풀려난다고 해도. 나가의 유물을 가진 자들과 싸우게 된다면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한 때, 악마들과 싸워서 그들을 바다에 가둬버린 나가들의 유물이다. 악마들 자신들이 나와서 싸우는게 아니라면 그 힘의 파편을 받았을 뿐인 자들이 아무리 그 힘이 강해지고 능숙해져도. 나가들의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한 작품들의 소유자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리가.
============================ 작품 후기 ============================
좋은 밤 되세요.
ps.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완결이 200화가 넘을 것 같지는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