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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뜻밖의 해적-34화 (3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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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하는 길, 가고 싶은 길

    모리안 해, 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 바다. 해적들의 근거지인 녹슨 면도날이 자리잡고 있는 이 바다에, 최근에 우리의 이름을 모르는 녀석들은 한 명도 없다.

    한 척의 배, 마스트가 없는 배가 돌아다니면서 상선대고 상선이고 가리지 않고 털어버린다는 그 이야기.

    "저희 이야기입니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묶인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선장을 보며 히죽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마리아가 맡아야 하는 일이지만. 내가 이렇게 상대 배의 선장 앞에서 개폼을 잡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리아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야, 나 피 쏟는다."

    ... 그런 말을 아무렇게 할 수 있는게 내가 알고 있는 마리아라는 선장이었으니까. 거기에서는 놀랄 일도 없었다. 그냥, 아 그런가보다. 그래서 요즘 저렇게 구리구리한 컨디션으로 배 위에 서 있는구나 했지.

    "일단, 한 이틀 정도 니가 대신해라."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싸움 젬병이라고.

    "제가 칼 들고 있으면 사람들 사과 깎아먹으려는 줄 알겁니다."

    그 말에 마리아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로제 있잖아. 그 녀석이면 싸움에서 내 빈자리는 채우고도 남음이 있을거다."

    ... 그건 그렇지만. 그 녀석 사람 목 딴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괜찮을까?

    "지가 적응해야지."

    마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선장실에서 칩거를 시작했고. 나는 하혈을 하는 마리아를 대신해서 임시적으로 이틀 정도 선장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남자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배짱으로 대포를 쏘신 겁니까?"

    그 말에 선장이 읍읍거렸다. 입이 꽉 막혀서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도 않네. 나는 천천히 그의 목에 단검을 가져가고 말했다.

    "바다는 그 죽음을 내어주리라(Sea will present his death before him)."

    안녕히 가세요. 나는 그의 목을 그은 다음 발로 밀어서 바다로 넣었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뒤를 슥 돌아보면서 목을 까딱 했다.

    "보내드려라."

    짐을 싹 털고 나서 바다의 날개로 자리를 옮긴 나는 그 배를 바라보았고. 선원들에게 말했다.

    "익사 시켜주자."

    곧, 측면에 있는 몰대포들이 물을 쏘아내고, 나무판이 박살나면서 안에 물이 가득 차오른 배가 가라앉는다.

    일반적인 해적질의 사이클이다. 일주일 나가있고, 돌아와서 3일 있고. 근처 해역을 돌아다닐 때에는 항상 이런 식의 흐름을 유지하게 된다. 그렇게 10일 단위로 짤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해적질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녹슨 면도날 섬에 다시 돌아온 우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 이게 뭐야."

    솟아오르는 연기. 곳곳이 박살나고 부서져서 더 이상 배를 댈 수 없게 되어버린 항구.

    주변에 떠다니는 망가진 배들과, 물을 머금고 퉁퉁 불어터진 시체들.

    녹슨 면도날이...

    "리사는?!"

    로제가 그 상황을 보자마자 얼굴에 경악을 담은 채로 외치고. 마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어떤 개 씹새들이..."

    우리는 급한대로 배를 근처에 대고 천천히 항구를 살펴보았다.

    "... 함포 사격이다."

    마리아가 이를 갈듯이 말하고, 툭 하고 주변에 널부러져있는 포탄들을 발로 찼다.

    "이 일련번호는... 카멜롯 왕국에서 쓰는 방식인데. 저기에 있는 포탄들의 일련번호는...?"

    공화국의 일련번호잖아. 마리아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 포탄들을 바라봤다.

    "두 녀석들이 같이 공격했다고?"

    상상하기 힘든 일이잖아. 두 국가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로 유명한 녀석들이다. 근데 해적들의 항구를 같이 공격하다니.

    "이거..."

    로제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집어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종이를 들고 내용을 읽어보았다.

    [네 놈들 중 한 집단이 로제 발미온 영애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를 당장 토르소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두 국가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될 것이다.]

    ... 로제 발미온이라고?

    나는 로제를 바라봤다.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저에요."

    어두운 얼굴로 그 선단지를 바라보는 로제. 우리는 계속해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마리아가 턱,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자주 가던 술집. 리사의 술집이다.

    박살나 있었다. 더 이상은 건물의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박살난 건물과,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그리고, 그 근처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

    리사의 시체였다.

    죽기 전에 험한 꼴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옷은 다 찢어져서 제대로 몸을 가려주지도 못하고 있었고, 희번뜩하게 뜬 눈과 곳곳에 나 있는 흉측한 멍과 상처들. 그리고 가랑이 사이에 말라붙어있는 정액.

    로제가 그 장면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시체에게 다가간다.

    마리아는 턱에 힘을 주고 그 시체를 노려본다.

    로제가 희번뜩하게 뜨고 있는 눈을 천천히 감겨주면서 중얼거린다.

    "저를...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그리고, 로제가 뒤를 돌아본다.

    "... 죄송해요.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로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토르소로 돌아갈게요."

    그 말에 마리아가 대답한다.

    "너는 해적이다. 배에 한 번 탄 이상..."

    그 말에 로제가 마리아를 바라본다.

    "사람들이 저 하나 때문에 죽었어요! 녹슨 면도날 섬이 작은 규모의 동네 마을도 아니고! 저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다고요!"

    마리아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제가 여러분과 만나지 않았으면, 배를 타지 않았으면 리사는 죽지 않았을거에요. 그쵸? 근데 지금 죽었잖아요. 저런 모습을 하고...!"

    로제가 고개를 숙이고 어꺠를 들썩인다.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의 고통이 덜어질 수 있을까.

    덜어질 수는 있을가.

    로제가 고개를 확 들고 마리아를 바라봤다.

    "돌아가야겠어요. 저는 이런 걸 보고 싶었던게 아니에요."

    마리아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 진심이냐."

    그 말에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만 해도 꿈을 꾸고 있는 것 처럼 행복했는걸요. 이제 깨어나야 할 시간이겠죠. 저는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선장님과, 레이먼드와, 선원 여러분과 함께 한 시간은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꽉 잡을 채로 고개를 숙인채로 옆으로 돌리는 로제.

    "그걸로 만족하냐."

    라는 나의 대답.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며 외친다. 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다.

    "가기 싫죠 당연히! 이전에도 말했잖아요! 근데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녀가 흐읍,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닦아내고 나와 마리아를 보면서 말했다.

    "보내주세요."

    그 말에 마리아가 그녀를 바라봤다.

    "... 인생도 항해랑 비슷해."

    그런거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보내달라고요!

    "우린 해적이지. 너도 해적이야. 우리가 인정한."

    마리아가 천천히 다가가고. 로제가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말하지. 인생이라는 항해에 있어서, 가야하는 길이 있고, 가고 싶은 길이 있다고."

    로제의 눈가를 마리아가 닦아낸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가야하는 길과 가고 싶은 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가야 하는 길을 가야 한다고. 그게 용기있는 선택이라고."

    마리아가 씨익 웃으면서 눈물을 닦아준 다음 그녀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해적다운' 선택은 말이지. 가야 하는 길 대신에 가고 싶은 길을 가는거다. 씨발 뒷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니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거야."

    그러니까, 다시 물어볼게 로제. 마리아가 허리를 약간 숙여서 로제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돌아가고 싶냐?"

    그 말에 로제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넘친다.

    "가기 싫어... 가기 싫어요! 가기 싫은데 그래도...!"

    그 말에 마리아가 로제의 입에 살짝 손가락을 가져간다.

    "그럼 된거다. 너는 우리와 함께한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녀의 이마를 검지 손톱으로 톡 치고 말했다.

    "카멜롯이랑 아이리 공화국, 둘 다 갈아마셔주지."

    우리 사랑스러운 마스코트 로제의 가슴을 아프게 하다니, 응? 그 말과 함께 마리아가 선원들을 죽 훑어보자, 모두가 함께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요! 아주 죽여버립시다!"

    그리고, 마리아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 말한다.

    "아는 사람들 있으면 장례 치루어주고, 이틀 뒤에 보자."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와 로제는, 함께 땅을 파기 시작했고,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파놓은 자리로 리사를 묻어주고 표시를 해 놓았다.

    로제가 입을 열었다.

    "...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요."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사실, 해적이 되면 나가지도 못한다."

    그런가요. 로제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그 무덤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 작품 후기 ============================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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