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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서 버려졌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다시태어나고 25살이 되었다.
21세기의 첨단 사회에서 졸지에 너저분한 중세 근처의 배경으로 떨어진 나는 굶어 죽을 뻔 하다가 배를 타게 되었고, 그렇게 15살 때부터 이어진 항해가 자그마치 10년. 그 동안 이 세상에서 가 볼 만한 곳들은 다 가본 것 같다. 그야, 내가 탄 배가 단순한 상선이 아니라...
탐험가의 배였으니까. 처음에 갑판을 닦을 때에는 이전에 갔던 군대가 생각날 정도로 서럽고 더러운 일들이 한가득이었다. 다른 자식들 해먹 침대에서 자고 있을 때 딱딱하고 벌레들이 돌아다니는 맨 바닥에서 잠을 자고, 제일 먼저 일어나서 선원들 깨우고, 갑판 청소하고 밧줄 다시 묶고...
그런 개같은 일과를 마치면 식사로 주어지는 건 물에 적시지 않으면 먹을 수도 없고. 바닥에 탕탕 내려치면 구더기와 바구미가 우수수 떨어지는 건빵(선원들은 벌레들의 요새라고 불렀다)과 한 입 씹으면 소금기에 혓바닥이 절여질 것 같은 무지무지하게 짠 육포 두어 조각. 배급되는 럼주 같은 것들을 먹으면서 하루 하루를 연명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쌓인 경험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온 세상을 탐방하면서 지도를 그리는 탐험가의 배 답게. 제대로 된 항로를 따라가지 않는 일이 예사였고. 무풍지대에 갇혀서 음식 없이 20일을 표류한 적도 있다. 너무 북쪽으로 가서 동사해 죽은 녀석들 시체를 치우고, 바다 위에서 눈보라를 맞이하는 참신한 경험도 해보고.
그렇게 나보다 더 오래 뱃생활을 한 녀석들이 하나씩 죽어나가자. 자연스럽게 나의 지위는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체할 녀석이 없으니까!
처우가 개선되고, 맨 바닥에서 자던거 모포 깔고 자고, 모포 깔고 자던거 해먹 침대에서 자고. 해먹 침대에서 자던거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고.
마침내 키를 붙잡고 항해를 할 수 있는 1등 항해사의 직위까지 올라왔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이다.
바람 좋고, 해수 흐름도 살펴보니 제대로 가고 있고. 어제 본 별자리도 반짝거리면서 너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어. 라고 말해주었다.
아무 문제도 없이 가끔 조타륜을 붙잡고 부는 바람에 따라서 명령을 내리고 키를 이리저리 조작하기를 두어시간. 마스트의 꼭대기에서 뭔가를 관찰하던 녀석이 외쳤다.
"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배? 여기에 배가 있다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여기 무역하는 항로가 아닌데.
나는 거칠게 자란 수염을 슥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 럼주 쳐먹고 헛 것 보는거 아니냐?!"
"어제 딸딸이 치고 일찌감치 잤습니다! 컨디션 최고입니다! 계속 다가오는데요!? 남에서 동으로... 10도? 15도? 그 언저리입니다!"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돌려서 그쪽을 바라봤다.
"... 진짜네."
여기에 무슨 배가 오는 거지. 혹시 동업자인가. 이 근방의 지도는 제대로 그려져 있는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려서 가져가면 돈을 꽤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때, 무지무지하게 당황한 목소리가 마스트 위에서 울려퍼졌다.
"조... 졸리 로져가 걸려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씨바아아아알?! 갑판장! 애새끼들 다 깨우고 돛 다 펼쳐! 바람 제대로 잡고 도망친다!"
이 배 만큼 무장이 빈약한 배도 없다. 포라고 있는게 꼴랑 좌현 4개, 우현 4개. 포탄도 엄청 부족하고. 여기에 있는 녀석들 중에서 사람이랑 싸워본 경험이 있는 새끼들은 없다. 바닷 비린내에는 쩔어있지만, 피비린내에는 익숙하지 않은 자식들 투성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조타륜을 조타수에게 넘기고 선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선장, 해적이다!"
그 말에 선장실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여기에 해적이라니, 무슨 소리냐."
나도 모르겠다. 열대지역에서 북극곰을 보면 봤지. 여기에서 해적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다니는 배도 하나 없는 이곳에서 해적들이 뭘 얻을 수 있겠어.
"바람 잡았냐? 어디서 다가오고 있어!"
선장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남동 13도. 바람은 잡고 튀고 있다."
그 말에 선장이 약간 안심하고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상선도 아니고. 짐도 별로 없잖아. 웬만해서는 따라잡힐 일이 없어."
저 말은 사실이다.
짐이라고 할 만한게 먹을 거랑 진짜 필요 최소한의 폭약과 포탄 정도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굉장히 슬림한 녀석이다. 기름끼 쫙 빼고 단백질만 꽉꽉 눌러놓은 녀석이라고. 웬만해서는 잡히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망원경을 빼앗아서 다가오는 해적선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짚고 있다가 마스트에 대고 외쳤다.
"이 바닷물에 절여 죽일 바구미 같은 새끼야! 클리퍼면 클리퍼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못 도망친다. 이거 기껏해야 갤리온인데. 클리퍼는 안에 물건 꽉꽉 채워놓고도 20노트는 낼 수 있는 배다. 마스트가 4개에다가 돛이 잔뜩 달려있는 그 깡패같은 새끼의 속도에 비하면 이 귀염둥이 갤리온은 돛단배 수준이라고. 물론, 왠만한 수준의 갤리온이라면 내구도 호구에 속도만 빠른 클리퍼랑 직접 뜨면 어떻게 이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배에 대포가 적다고! 싸우면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아니 씨발...! 클리퍼 쉽이 뭐 주워먹을게 있다고 이 망망대해를 떠돌아?!"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선장을 봤다.
"선장, 백기 걸자."
그 말에 선장이 나를 보며 외쳤다.
"우리는 프라이드 있는 바다의 탐험가다! 기껏해야 해적 새끼들에게 항복하자고?!"
이 새끼 지금 정신이 나가서 상황판단이 안되는 모양이네. 전투 준비! 라고 외치는 선장을 바라보다가 내가 갑판을 보며 외쳤다.
"선장 말 쌩까라! 백기 걸어! 이 상태에서 깝치면 단체로 수장된다!"
"너는 오늘 부로 항해사에서 해임이다! 저 녀석 말 듣지 말아라! 남자답게 죽는다!"
... 진짜. 이 선장 예전부터 해적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여기에서 그러면 우리 다 죽이려는거냐. 진짜 방법이 없구만.
나는 손가락으로 선장을 가리켰다.
"선장 동아줄로 꽁꽁 묶어라. 저 녀석이랑 가지고 있는 물건들 싹 빼주면 어떻게 협상질이라도 해 볼 수 있겠지. 아니면 저 새끼 말 듣고 다 죽던가."
잠깐 시간이 지났다.
햇볕이 쨍쨍한 가운데. 저 멀리에 있던 배는 점차 저기에서 일하고 있는 녀석들 수염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고. 우리는 백기를 건 상태에서 양 손을 들고 있었다.
두 배가 점차 가까워지고. 널판지가 놓인 상태에서, 해적들이 건너오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아서 아주 기쁘군."
선장모를 쓰고,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남자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말했다. 그가 주변을 슥 둘러보다가 묶여있는 선장을 보고 말한다.
"선장이 이 꼴이 되었으니. 여기 항해사가 누구지?"
그 말에 내가 천천히 앞으로 나선다. 보기만 해도 살벌해 보이는 애꾸눈 씨가 커틀러스를 뽑아들고 칼면으로 내 뺨을 톡톡 쳤다.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가시오. 협조하겠소."
그 말에, 애꾸눈이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외쳤다.
"이 새끼만 남겨두고 다 목을 따라!"
그 말에, 선원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그들의 목에 커틀라스가 그어지고, 그 시체들이 바다로 떨어진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이 새끼들 완전... 악당이잖아!?
"일단 이 녀석은 묶고. 물건들 빼라. 그래도 저항을 하지 않은 성의를 봐서..."
애꾸눈의 하나뿐인 눈깔에 섬뜩한 기세가 번득거렸다.
"무인도에 버려주지."
아 시발... 오래 버텼다 싶었지. 뱃 생활이 더럽게 위험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는 1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2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3번 기도하라더니만.
이 녀석들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싸이코들이였잖아. 물건 다 빼준다고 하고, 거기에다가 선장도 바쳤는데 어떻게 남은 인원 목을 다 따고 나는 무인도에 버릴 생각을 하는거냐.
"미안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 식량이 없던 차에 네놈들이 있더군. 니들 먹여가면서 무인도 찾다가는 기껏 구한 식량이 빨리 동나잖나?"
... 클리퍼 쉽이 시발 왜 여기에 있나 궁금했는데. 길을 잘못들었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했다.
"니들 항해사 호구냐?"
그 말에 해적 선장 애꾸눈 씨가 말한다.
"그냥 지금 물고기한테 먹이는 수가 있다."
... 일단 살아있는게 중요한거니까. 나는 아가리를 닥치고 얌전히 동아줄에 꽁꽁 묶여서 창고에 쳐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