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지드와 아레스는 오랜만에 돌아온 하류 구역 언덕배기 위에서 저 아래 황폐해진 터를 보고 있었다. 지난날의 회한을 그리는 걸까.
타닥타닥 붙어 있었던 판자 지붕의 목조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흉물스런 잡초더미가 겨울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 용병 거주지의 마지막 보루였던 이곳은 더 이상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제국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른 성벽만이 보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아레스가 말문을 열자 지드 역시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그다지 좋은 기억들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즐거운 일도 많았었지.”
“그렇고말고요. 폐하께서 경호 대장이셨을 때가 저희 아홉 대원들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그 말에 지드는 갑자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아.”
“…….”
그의 시선은 결코 떠올리기 싫었던 하류구역 5구간 쪽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지난 날 대원들 셋을 잃고 레온과 테세우스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바로 그 지점, 어찌 그때의 일을 평생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막내 아레스는 이곳에서의 감회가 남다른 듯 보였으니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레스 역시 그 나름대로 가슴 아픈 일이 있었으니 바로 7호 이든이 제국으로 훌쩍 가 버린 일이었다.
친형제보다도 더욱 깊었던 이 둘의 우정은 예기치 않은 운명이 갈라놓았으니, 이번엔 아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지드가 성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꾸나. 제국 수도로 통하는 비밀 통로는 아직까지 존재하겠지?”
“물론입니다. 그곳을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생각 잘하셨습니다. 이번엔 반드시 아가씨와 녀석들을 구출해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
그날 오후, 수도 내 어느 여관 5층에는 지드와 아레스가 정보원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피체 왕국은 팔라카스 제국과의 전쟁 준비 일환으로 이미 이곳에 상당수의 정보원들을 심어 놓았는데, 현재는 아카시안과 그녀의 세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을 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보원의 표정이 다소 어두운 듯 지드는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게라쿠스는 아카시안님이 자신의 청을 들어줄 때까지 그녀의 세 동생들을 궁 어딘가에 가두어 놓고 있답니다. 헌데 그게 말입니다…… 황제의 행동이 다소 기이한 구석이 있는데 그는 마치 그녀와 숨바꼭질 게임을 하듯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숨바꼭질 게임이라니?”
“그동안 아카시안 님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 차원인지, 옛날부터 기이한 일을 즐겨 했던 황제가 미로 같은 궁에다 아카시안 님의 동생들을 숨겨 두었다고 합니다. 그래 놓고는 동생들을 찾게 함으로써 그걸 즐긴다나요. 소문에 듣기론 인질들이 갇힌 지 벌써 삼 일이 지났으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방치된 상태랍니다. 이에 아가씨께서 무조건 청혼에 응할 테니 동생들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게라쿠스는 이미 광기에 젖은 듯 그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합니다.”
“뭐라고!”
지드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레스 역시 황제의 그런 행동에 무척 화가 나는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지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정보원에게 물었다.
“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로 황궁을 기존보다 무려 다섯 배나 확장하려 하고 있는데, 저희 정보원들은 이곳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미 그곳의 한 부분의 공사권을 따낸지라 두 명 정도는 출입이 가능합니다.”
“두 명이라…….”
“마침 황궁 본관 쪽에 보수해야 할 곳이 있기에 어차피 인부 두 명이 오늘 밤에 들어가서 작업을 해야 합니다.”
지드는 주저거림 없이 말했다.
“그거 잘됐군.”
정보원이 가슴 안쪽으로부터 증표로 보이는 금속을 두 개 건네주었다.
“황궁 성문에서 본관까지 갈 수 있는 신분증입니다. 다만 그 어떤 무기나 장신구조차 몸에 지닐 수 없으니 그 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구나 연장조차 그 안에서 줄 것이니 일단은 본관에 들어가서 작업을 하는 척하시다가 그 이후에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맙네. 어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걱정 말게나. 다만 탈출 경로에 대한 것을 신경 쓰도록.”
“이미 그쪽도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그저 황궁으로부터 인질들을 구해 오시면, 그 뒤는 제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황궁의 본관은 최근 확장 공사로 상당히 넓혀졌기에 그 규모가 원형 경기장에 비견될 만큼 엄청 넓어졌다. 수많은 시녀들과의 향락과 숨바꼭질을 위해 곳곳에 미로 같은 것을 만듦으로서 매일 밤 쾌락을 즐겼으니 그곳은 오로지 유희만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얘들아! 흑……!”
아카시안은 절규하듯 동생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있는 거야! 제발 좀 대답해. 흑!”
벌써 오늘밤이 3일째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가두어진 남매들, 아카시안은 궁 안을 돌아다니며 필사적으로 그들을 찾으려 했지만 이곳의 미로가 워낙 복잡한지라 왔던 길로 되돌아오기를 수십 번이나 되었다.
지치고 힘들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았지만 동생들 생각에 계속해소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애처롭기가 그지없었다.
“흑!”
그녀는 무조건 벽을 더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모처럼만에 저편에 빛이 새어 나옴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그리고 향했다.
“얘들아! 흑. 제발 좀…….”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의 알몸 상태의 황제 게라쿠스와 시녀들이 목욕탕 안에서 음란한 짓을 하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아카시안을 발견하자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도 발견 못하셨나? 쯧, 이걸 어쩌지? 오늘이 삼 일째라…… 내일이면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겠어. 그 안에 발견하지 못하면 큰일일 텐데?”
아카시안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제발 동생들을 살려 주세요! 흑.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제발!”
그러자 황제가 성질을 버럭 냈다.
“진작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빌어먹을! 하지만 이젠 늦었어. 감히 그동안 황제의 청을 거절하다니. 어차피 이번 일, 그러니까 동생들의 운명은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나를 원망하지 마라.”
아카시안은 무릎을 꿇고 사정까지 했다.
“제발요. 흑!”
허나 게라쿠스는 더욱 매몰차게 그녀를 내 몰았다.
“당장 눈앞에서 꺼져 버리시지? 그럴 시간이 있다면 동생들이나 찾든지.”
그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전라의 시녀들의 몸뚱이들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요것들! 이리와라. 하하!”
첨벙첨벙!
“이러시면 안 돼요. 호호.”
아카시안은 차마 그런 작태를 보지 못하고 다시 어두운 복도로 나와야만 했다. 벽에 기댄 채 멍한 얼굴로 일관하는 그녀, 망연자실한 심정은 이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점차적으로 동생들을 찾을 희망이 꺼져 가는 느낌이었다.
***
같은 시각.
드디어 본관 입구에 도착한 지드와 아레스, 그들은 여전히 경비 장교들의 삼엄한 제지를 받으며 현관 쪽으로 안내 되고 있었다.
한 장교가 그제야 이들에게 현관 위쪽 작은 환기구 구멍을 가리켰다.
“네놈들이 작업해야 할 공간은 저곳을 통해서 기어 들어가야 한다. 며칠 전 나무판자 하나가 황제 폐하 바로 옆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여기 우리 모두 참살을 당할 뻔했지. 만일 그곳을 철저하게 보수하지 못하면 네놈들의 목부터 날아갈 것이다.”
지드와 아레스가 굽실거렸다.
“아이고! 맡겨만 주십시오. 절대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빌어먹을! 말들은 잘하지. 어쨌든 한 가지 더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절대로! 천장 위에서 본관 바닥으로 내려가지 말 것이다. 그곳은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머무르시는 곳이다. 너희들 같이 천박한 것들이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엄청난 불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즉시 죽음이라는 것도 말이야.”
“아이고, 그거야 당연한 아닙니까!”
“주둥아리 닥치고 당장 올라가. 작업 현장은 안쪽 깊숙이 있으니까 꽤 들어가야 할 것이다. 공사는 반드시 아침이 밝아 오기 전까지 해야 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마침 준비해 온 사다리가 현관 위쪽으로 대어지자 지드와 아레스는 주저 없이 그곳으로 올라갔다.
환기 구멍은 생각보다 넓었다. 잠시 후 통로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지드와 아레스. 비록 천장 위를 통과한다지만, 과연 황궁답게 튼튼하고 고급 목재를 사용했는지라 가면서도 그 어떤 삐걱거림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통로의 일정 지점마다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환기구가 있기 때문에 바닥을 볼 수 있었으나 이들은 내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레스가 물었다.
“내려가서 살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미로처럼 벽들을 얽히고설키어 놓았으니 차라리 여기 위쪽이 훨씬 살펴보기가 나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넓지만 그래도 두 명이 움직이기에는 워낙 비좁아서요.”
“그럼 이렇게 하지. 난 왼쪽을 살펴 볼 테니까 자넨 오른쪽으로 가 보게나. 만일 아카시안이나 동생들을 발견하게 되면 환기구 입구 쪽에서 만나고.”
“예, 그리 하겠습니다.”
“길 잃어버리지 않도록 표시하는 거 잊지 마!”
지드는 한참을 더 들어간 후에야 제법 큰 공간을 발견 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본관의 정중앙으로서 천장 한복판이 분명한 것 같았다.
그때 아래로부터 훈훈함이 느껴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감지했으니, 정중앙의 합판 틈새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호호! 자꾸 어딜 만지는 거예요.”
“네 이년, 방자하구나! 내가 누군데 거부를 하는 거냐.”
제법 큰 욕탕 한 사내가 열 명의 여인들과 알몸으로 유희를 즐기는 듯 보였다. 순간 지드는 저 사내가 황제 게라쿠스임을 단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바로 그때 입구 쪽으로 한 여인이 힘없는 모습으로 등장했고 지드의 두 동공은 더욱 확장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다름 아닌 아카시안이 아니던가.
아카시안은 동생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인 만큼 다시 한 번 사정하기로 마음먹고 죽기보다도 싫은 이곳에 되돌아왔다.
황제는 그녀를 보자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왜 또 왔느냐.”
이번엔 아카시안이 아까와는 다르게 다소 당당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 동생들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그 태도는…….”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저희 집안에 이러실 수는 없으십니다.”
“갑자기 뭘 잘못 먹었나? 지금 뉘 앞이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는가.”
“제 선친께서는 평생 황족을 위해서 모든 열정과 힘을 다하셨고 지난번 원로원의 득세로 인한 숙청 시기에도 기꺼이 의로운 자결을 하심으로써 선대 황제만을 위한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그 말에 게라쿠스는 다소 찔렸는지 움찔거렸다.
“나 역시 그 점을 감안하여 지난 오 년 동안이나 기다려 오지 않았는가!”
“제발 제 동생들을 풀어 주시기 간청 드립니다. 저 때문이라면 그 대상을 직접 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닌지요!”
“……벌하라니?”
“황제 폐하의 청을 감히 거절한 제게 모든 잘못이 있습니다.”
게라쿠스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그 의미는 지금이라도 내 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아카시안은 결심한 듯 답했다.
“네.”
“지금, 분명 네라고 그랬겠다!”
그는 좌우에 있던 시녀들에게 손짓을 하며 나갈 것을 지시했다. 곧이어 온천 안에는 게라쿠스와 아카시안이 남게 되었다.
황제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렇다면 이리 오라!”
아카시안이 잠시 망설였다.
“동생들부터 풀어 주신다면.”
그러자 게라쿠스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네가 당장 옷을 벗고 이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동생들을 안전하게 놓아 줄 것이다.” “…….”
주저거리는 그녀에게 황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 이리 오라! 무려 오 년 동안 자발적으로 내 품에 안기는 그대를 상상했도다. 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겠느냐.”
그때 아카시안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옷을 벗으려 했다. 동생들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게라쿠스는 꿈틀거리는 욕망에 늑대와도 같은 눈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흐!”
바로 그 순간, 천장으로부터 그녀의 코앞에 뛰어 내린 존재가 있었다.
착!
“헉!”
깜짝 놀라는 아카시안, 게라쿠스 역시 기겁을 한 듯 물속으로부터 벌떡 일어났다.
첨벙!
지드는 재빨리 손가락을 퉁겨 탄지신공으로 황제의 신체가 꼼짝 못하도록 혈을 점하였다.
퉁!
“욱.”
다행히 그가 외치기 직전에 점혈을 했기에 지드가 침입한 사실은 그 누구도 몰랐다. 지드는 아카시안이 괜찮은지 살펴보았다. 이에 그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지드에 대해 무척이나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그였지만 설마하니 황궁에 그가 느닷없이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지드 님.”
“아카시안!”
“흑.”
눈물부터 핑 돌았다. 한편 황제는 몸만 마비되었을 뿐 의식은 그대로였으니 그저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사내의 행태를 지켜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지드가 그에게 다가왔다.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고작 이딴 식으로 행동을 하다니, 무척 실망했소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박살을 내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참겠소. 우린 어차피 서로 간에 전쟁을 벌여야 할 사이이니…… 굳이 이런 방법으로 그대를 제압할 필요는 없겠지. 난 당당하게 그대의 군대와 겨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사실 지난 오 년 동안 아카시안과 동생들을 건드리지 않은 대가로 그대를 살려 두는 것이니 운 좋은 줄이나 아시오.”
지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안고 천장 위쪽으로 도약했다.
홱!
착!
천장 넓은 공간에 올라오자 아카시안은 울먹이며 말했다.
“동생들을…… 그 애들을 찾아야 해요.”
지드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마 지금쯤 아레스가 찾아냈을 거요. 아,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 걱정 마시오. 환기구 통로로 돌아다니면 미로가 별 소용없거든요.”
잠시 후 지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레스는 세 남매들과 함께 환기구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에 아카시안은 그 좁은 통로에서 그들과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곧이어 지드는 원래의 계획대로 천장 한 곳을 강력한 지력으로 파괴하고는 지붕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정보원이 준 본관 지도를 꺼내 들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이곳이 높고 가파른 황궁의 지붕이라지만 지드는 아카시안과 아린으로 하여금 자신의 팔뚝을 꽉 잡게 하였고 아레스는 두 남매를 챙기어 경공술을 펼치며 신속하게 이동했다.
잠시 후 캄캄한 밤중에 도둑고양이들처럼 미끄러지듯 달렸으니 새벽녘이 되어서야 성벽 인근 숲 지점에 안착 할 수가 있었다.
때마침 정보원들이 대기시켜 놓은 마차 한 대가 있었다.
지드와 일행은 재빨리 그 안으로 들어가 그곳을 떠났다.
***
그 이튿날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누군가의 본관 침입에 이어 황제가 그토록 눈독을 들여왔던 아카시안과 그의 남매들하고 함께 사라졌으니 이는 요 근래에 일어난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무슨 이유인지 마비를 당한 채 전혀 움직이지 못했으니 그날 모든 황궁 의원들이 달라붙어 무려 일곱 시간 동안 근육 이완을 한 뒤에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황제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한동안 자신의 숙소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며칠 후에 정신을 차린 듯 사태에 직접 참견하기 시작했다.
그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고 특수기관을 다그쳐 당시 본관을 침입했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황제를 위협했던 자의 언급을 토대로 그가 피체 왕국의 국왕 지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카시안과 그의 남매를 데려갈 가장 유력한 후보자가 그였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은 쉽게 밝혀진 셈이었다.
황제가 그런 불상사를 당한 것은 전적으로 보안을 책임져야 할 특수검사부의 태도가 문제였으니 최고 책임자인 레온은 경질을 당하고 말았다.
집정관 카르세크는 부랴부랴 나서서 황제를 진정시켰고 자신의 오른팔이자 황족의 수호대장 격인 레온의 경질을 보류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황제의 분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무의로 끝나고 말았다.
그동안 승승장구를 해 왔던 레온에게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로서는 이만저만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집무실에는 카르세크와 그의 아들 이든 그리고 탁자 맞은편에 레온이 상당히 침울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궁 침입 사건이 비록 경비대 책임이라지만 황제 폐하의 개인 경호는 특수부 검사들이 맡기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최고 수장인 자네는 그저 목숨을 잃지 않고 경질 당한 자체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야 하네.”
카르세크의 말에 레온은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확장한 본관에서 지극히 사적인 향연을 즐기시느라 저희 특수 검사들을 직접 물리셨기에 할 수 없이 건물 밖에서 대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일이 저희 특수검사부 책임이라 하십니까!”
카르세크가 답답한 듯 말했다.
“관직 생활을 십 년 정도 했다면 어느 정도 눈치는 있어야 하는데 아직 순진하기는. 쯧! 지금 상황이 말일세, 자네 부서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희생양을 찾아서 하루속히 마무리 져야 할 만큼 긴박한 것이기 때문임을 왜 모르는가. 그저 위에서 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야 그나마 겨우 수습이 된다는 정도는 알아야지.”
“그, 그래도 억울합니다. 저는 수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 지난 십 년 동안 물불 가리지 않고 오로지 황제 폐하와 집정관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까짓 일로 하루아침에 경질이 되다니요! 정말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까짓 일이라니! 자칫 잘못했다면 황체 폐하의 목숨이 위험해질 뻔했는데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어쨌든 이미 확정된 일이니 그만하게나. 만일 그 누구를 탓하고 싶다면 그 사건을 일으킨 자를 떠올리게나.”
“…….”
레온의 머릿속에는 뻔뻔한 자의 미소 짓는 얼굴이 그려졌다.
순간 분노의 안광이 폭렬되었으니.
‘……그놈 때문에!’
현재 피체 왕국의 국왕인 지드, 어차피 조만간 소멸 될 나라이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당장 그곳을 찾아가 그놈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도 남았다.
한편 아버지 옆에서 지켜보던 이든은 어제만 해도 당당해 보였던 레온이 하루아침에 저 꼴을 당하자 내심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난날 대장 지드를 제압하고 대원들 셋을 죽인 원흉이 아니던가.
그렇게 본다면 언제가 결판을 내어야 할 철전지 원수에 지나지 않는 자였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 그보다 한참 열세이기에 지금까지 때를 기다려 왔을 뿐이었다.
물론 레온은 제국의 최강 무사답게 전혀 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초라 한을 보이자 한편으로는 동정심이 가기도 했다.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하더니만.’
그때 아버지가 레온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자네의 경질은 나로서도 무척 가슴 아픈 일이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의 안위에 관계된 일이기에 최소 이 정도 선에서는 막아야만 했지. 어쨌든 너무 상심 말게나. 그렇다고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넨 내 오른팔이 아닌가? 당장 인생을 접으라는 것은 아니니까 희망을 잃지 말게나.”
레온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 희망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있지. 난 자네를 그냥 썩혀 둘 생각이 전혀 없거든.”
“그렇다면…… 아직 제게 일이 남아 있다는 겁니까.”
“마침 제3군단장이 나와 절친한 친구 사이이니 일단 그곳으로 가게나.”
이에 레온의 눈빛이 반짝였다.
“3군단이라고요!”
“보병 중대 병사들과 백의종군하며 훗날 때를 기다리게나.”
“네……? 보병 중대라니요?”
순간 레온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확 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위치라면 적어도 대대장급이라 생각했는데 중대장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마저 끝까지 말을 미처 듣지 못했던가.
“보병들과 잘 어울리게나. 게다가 중대장이 뭐라 해도 무조건 명령을 듣게나. 상관의 말은 필히 복종해야 하니까 말일세.”
레온은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중대장이 아니라면 그냥 일반 병들이란 말인가.
‘…….’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당장 바닥에 대가리라도 박고 죽고 싶었다.
어찌 사람의 신세가 하루아침에 이 모양 이 꼴이 된단 말인지. 그때 들려오는 집정관의 말.
“며칠 내로 보병 부대에 합류하는 좋을 것일세. 자! 그만 나가 보게나.”
“…….”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나는 레온, 그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죽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집무실을 나가자 이든은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듯 아버지에 물었다.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가 너무하다는 거냐.”
“레온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수하였잖아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정말 매정하군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일단 내가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사실 이번 사건은 이 애비에게조차 불똥이 튈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전직 특수검사부 수장이었던 내 대신 레온이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니 일단 황제 폐하께서 노여움이 풀리실 때까지 어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특수부 수장이었던 자를 하루아침에 장교도 아니고 일반 병사로 전락시키는 것이 올바른 처사일까요?”
“그를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단다.”
“그럴 수밖에 없다니요?”
“레온의 전투력은 너무도 뛰어나기에 장교로 배정했다가는 금세 공을 세우고 승진할 테야. 군단 내에서 최고 장교나 참모로 오르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지. 헌데 그러다가 황제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다. 나는 그가 당분간 숨어 지내기만을 바랄 뿐. 어차피 모든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집정관은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나가기 전에 이든에게 한마디 당부하는 것일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네 녀석도 이제는 제1군단 대대장의 신분인데 그저 하는 일 없이 쏘다니지만 말고 병사들과 함께 훈련을 하든지 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내년 원정이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는데 말이야.”
쿵!
아버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이든은 반대편 테라스 문을 열고 모처럼 만에 차가운 공기를 쐬기로 했다.
“후. 시원하군.”
얼굴뿐만 아니라 심장도 관통이라도 당한 듯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씁쓸함이 느껴졌던가. 그의 한숨이 절로 품어져 나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지드 대장님이 나타나서 아가씨와 그 동생들을 데려 갈 것이라고 확신해 온 그였기에 며칠 전의 사건은 이미 예정된 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장님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갔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만, 어디 사람의 마음이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던가.
‘대장님과 대원들은 진짜로 내가 제국에 전향한 줄로만 알고 있는 것일까…….’
지난 5년 동안 전혀 연락 없이 지내 왔기에 그의 걱정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은 있었다.
이젠 아카시안 님이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그들에게 전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전쟁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이거…… 이젠 뭔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의 고민은 언제 하류 구역 주민들의 피체 왕국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옛 동지들을 택하느냐 아니면 아버지를 택하느냐 하는 아주 원천적인 문제가 그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니 보통 머리 아픈 일이 아니었다.
비록 아버지가 권력이라는 미명아래 피도 눈물도 없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행위들을 많이 저질러 왔다지만 결국 오랜 세월 끝에 어머니와 자신과 여동생을 다시 되찾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류구역을 공격하고 그 주민들을 학살한 원흉이 아버지라지만 그게 다 가족들과 재결합하기 위한 몸부림이란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든은 아버지의 군단 대대장이 되어서 자신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피체 왕국을 공격하는 일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런 부분이 현재 그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아. 대체 그때가 되면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