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1 아크누스의 기병대 (42/81)

CHAPTER. 41 아크누스의 기병대

웅.

으스스.

음산한 기운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협곡과 구릉지에 절묘하게 세워진 구조물들의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라 있었고 그 웅대하고 장엄한 규모는 가히 웬만한 왕국의 건축물들에 버금갔다.

남부 대륙 최대 살수 집단인 대자객신전이 이런 천외 지형에 자리 잡고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리라.

휘잉―

항시 강풍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구름이 걸터앉은 건물의 상단 부분에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양식의 테라스가 보였다.

그 누가 보아도 상당한 신분의 고위층이 머무르는 공간이 아닌가 보였다.

여러 개의 테라스들 중에 맨 왼쪽에 다소 이국적으로 생긴 검은 머리칼 여인이 난간을 부여잡고 머나먼 산등성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을 꼭 다물고 눈앞 전경만 바라보다가 때마침 실내 방문으로부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똑똑.

“누구세요.”

“총관님께서 뵙자 하십니다.”

깜짝 놀라는 여인.

“총관님이요?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저기, 지금 문 앞에 와 계신데요.”

“문 앞이요!”

여인은 재빨리 실내를 통해 들어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려한 금빛 토가 차림의 중년 사내가 시종과 함께 뒷짐을 쥔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시고―”

“그야 물론 자네가 보고 싶어 왔지.”

“또 따님 생각하셨나요?”

그러자 총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녀석이 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육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군.”

총관이 눈물을 글썽이자 여인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죄, 죄송해요. 괜한 말씀을 했나 봐요.”

“괜찮네. 내 딸을 쏙 빼닮은 자네가 위안이 되니 말일세. 그나저나 언제까지 나를 여기에다 세워 둘 참인가.”

“아참, 내 정신 좀 봐. 당장 안으로 들어오세요.”

잠시 후 탁자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이곳이 익숙해졌으면 하는데.”

“벌써 일 년이 지났으니 마치 제집같이 느껴져요. 더구나 총관님께서 이렇게 잘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답니다.”

“그야 당연하지. 자네가 내 딸이 되어 주기로 한 이후부터 우울증이 싹 가셨으니 어찌나 고마운 줄 모르겠네.”

“후후. 감사합니다.”

“더군다나 자네와 오빠의 전투 기술이 상상을 초월하니 우리 대자객신전에서 모처럼만에 보물을 얻은 기분이라네. 한때 특급 자객이었던 테세우스에 버금간다고나 할까.”

테세우스 얘기에 여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가 그렇게 강했던가요?”

“강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범주를 뛰어넘는 녀석이랄까.”

이번엔 여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자가 총관님 따님을 해쳤다고…….”

순간 총관의 안색이 굳어지며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테라스 쪽으로 갔다.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까지 지었으니 여인은 괜한 말을 했나 싶어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괜히…….”

“아닐세, 난 괜찮아.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인걸. 자네 말대로 그 녀석은 내 딸을 죽이고 지금은 팔라카스 제국에서 특수 검사부 소속으로 매우 잘나가는 신분에 있지.”

“특수 검사부요?”

“언제가 기회를 봐서 반드시 내 앞으로 무릎을 꿀릴 것일세. 지금 자객을 보내 봐야 그를 처리할 능력을 갖춘 수하들이 없으니 말일세.”

“대체 그가 왜 따님을 그렇게 했지요?”

총관이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른다네. 둘은 한때 약혼했던 사이였고 서로 사이도 제법 좋아 보였는데 말일세.”

“…….”

여인이 말이 없자 총관은 테라스로부터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사실 자네를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의논하기 위함일세.”

“의논이라니요?”

“최근 동쪽 영토 끝자락에 이름도 없는 신생 왕국이 세워졌는데…… 글쎄, 그곳에서 영토 확장을 위한 방편으로 부족민들을 정벌하거나 규합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제법 출중한 지휘관들 덕분인지 지난 두 달여 동안 그들 원정대가 굴복시킨 부족만 하더라도 열 군데가 넘는데다가 최근에는 산족마저 항복을 하고 말았으니 결코 범상치 않은 군대가 틀림없다네. 그런데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들의 영토 확장이 이곳과 가까워지고 있으니 머지않아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할 듯하네.”

“그 나라가 이곳까지 쳐들어오겠어요?”

“그들은 여기 부근에 대자객신전의 본부가 있는지 모르고 있지. 만일 안다면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도 않았을 걸세. 여하튼 나는 정보원들을 풀어서 그 신생 왕국이라는 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니 바로 팔라카스 제국의 하류 구역 거주민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던가. 현재 국왕은 지드라는 자로서 한때 전설적인 용병대장 아르게논이 후계자로 점찍은 인물이라 하더군. 여하튼 그는 군대를 세 개 조로 편성해 원정군을 구성케 하고 주변 세력 확장을 시작했으니, 아마도 팔라카스 제국에 대한 경계를 준비하는 모양일세. 그 때문에 괜한 우리만 머리 아프게 생겼으니…….”

여인은 총관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 그제야 알았다.

“제가 뭐 도와 드릴 일이라도?”

“서쪽 경계 부근까지 치고 들어온 원정대를 맡아 주게나.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지휘관들의 전투 능력이 막강하다고 하는데 웬만한 자객들을 내보내기에는 다소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여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럼 제게 맡겨 주세요.”

“아주 은밀하게 작업을 해야 하는데.”

“지휘관들만 제거하면 되는 거죠?”

“물론일세.”

“오빠랑 당장 갈게요!”

“그나저나 그는 어디 있나?”

“잘 모르겠지만, 분명 어디서 술 먹고 있을 거예요.”

“또 고향 생각을 하는가 보군.”

“당분간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정말 안 됐어요.”

“거참 안쓰럽군. 아무튼 난 이만 돌아갈 테니까 잘 달래 주게나.”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곧이어 총관이 문을 열고 나갔다. 여인이 문을 살짝 닫더니만 무슨 이유인지 테라스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빠!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그래?”

그러자 당장 들려오는 사내 음성.

“쯧쯧.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무림에서는 명색이 마교 서열 삼 위인 네가 이런 곳에서 총관의 딸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그때 위쪽 지붕으로부터 누군가 테라스 바닥으로 안착을 했다.

착!

이국적인 외모의 검은 머리칼 청년이 한 손에는 술 가죽 통을 쥐고는 비틀거리며 여인에게 다가왔다.

여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휴, 술 냄새! 정말 만날 술만 먹을 거야?”

“이런 황당한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일 년이 흘렀는데 내가 제정신일 수 있겠냐? 그까짓 화산 보물들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차원을 넘어서 여기까지 찾으라고 명령을 내리다니! 빌어먹을 교주 같으니라고!”

“어차피 수년 후에는 귀환할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 잘 참으라고.”

“만일 화산 보물들을 찾지 못하면 돌아갈 처지도 못 될 텐데?”

이번만큼은 여인도 긴장하는 얼굴이었다.

“반드시 찾아야지.”

“어떻게?”

“화산파 장문인이 이 세계에 이십 년간 머물렀다면 필시 제자 하나쯤은 키웠을 거야. 그렇다면 어딘가에 무공을 하는 자가 있을 테고 우린 여기 대자객신전에서 수소문하며 기다리면 되는 거지.”

“그래서 총관의 비위를 살살 맞추는 거였군?”

“꼭 그런 건 아니야. 자식을 잃은 그가 조금은 불쌍해 보이거든. 아버지 생각도 나고.”

순간 사내가 버럭 화를 냈다.

“야, 옥린! 다시 그 작자 얘기 꺼냈다가는 혼날 줄 알아!”

여인 역시 지지 않고 강하게 말했다.

“오빠는 왜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화를 내고그래!”

“아무튼 하지 마라. 이건 경고다.”

“치.”

“제발 좀 정신 차려, 이 녀석아. 누가 너한테 수라혈마의 진신을 강제로 주입시켜 오늘날 살벌한 마두로 만들었는지 말이야. 나 역시 그 작자 덕분에 내 인생 전부를 잃은 느낌이란 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그 덕분에 우린 마교에서도 꽤나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랐잖아. 오빠의 서열이 이 위이니까 머지않아 호법(護法)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관두자. 그냥 술이나 먹고 말지! 으!”

“술 냄새 풍기지 말고 내 방에서 나가 줘.”

“오빠한테 그리 야박하게 굴 건 없잖니.”

“매일 투정만 하니까 그렇지.”

“알았다, 알았어. 나가 주지.”

그가 입구 쪽으로 나가려 하자 옥린이 다시 외쳤다.

“그리고 잊지 마. 내일 아침 총관의 명령으로 서쪽 지역 원정군에 대해 암살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또 총관의 개 노릇을 하자 그거지?”

“우리가 여기서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잖아.”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말이군.”

“잘 알면서 새삼 뭐래?”

“화산 보물을 지닌 놈을 찾자마자 죽여 버리고 난 당장 무림으로 돌아갈 거다. 내가 명색이 십만 마교인들의 추앙을 받는 대마두인데 대체 여기 와서 뭔 일을 하는 건지. 나 참!”

“교주님의 특별 명령이니까 그냥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아무래도 교주가 우리를 경계하는 게 아닐까.”

“어어? 또 그 소리!”

“마교 서열 십 위 안에 우리 남매 두 명이 각각 이 위와 삼 위까지 치고 올랐으니 말이야. 생각해 봐라, 이런 임무에 하위 서열 자들을 얼마든지 보내도 될 텐데…… 교주 그 작자가 뭔가 일을 꾸미는 것이 틀림없어.”

순간 옥린이 화를 벌컥 냈다.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리고 더 이상 의심도 하지 말고. 설마하니 부모가 자식한테 무슨 일을 꾸미기야 하겠어?”

오빠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야 피를 나눈 아버지이지만 나한테는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으니 뭐 그런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오빠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 준 분인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하기야 보살펴 주기는 했지. 자신의 수족으로 부려 먹으려고…….”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네 정말. 나 피곤하니까 이젠 정말 나가 줘.”

“쳇! 진짜 가 주마.”

그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탁!

옥린은 다시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오빠 말대로 장문인의 제자를 찾아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후, 정말 이번 임무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

***

나부스카 영토는 그야말로 끝없이 펼쳐진 평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엔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은 수많은 야생마들이 저들끼리 떼를 지어 자유롭게 질주를 하고 있었다.

근처 언덕에는 대략 수백여 명의 군인들이 숙영지를 구축해 놓고 야영을 하고 있었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이 저 아래 펼쳐진 광활한 초원 지대를 바라보며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신생 왕국 원정군 제1조 대장인 지노와 부대장들인 1호 비스크, 2호 게리, 3호 크리스, 그리고 막내 아레스였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국왕 지드가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초창기 경호 대원들로서, 이제는 새로운 나라에서 각자 알맞은 공신의 자격을 만드느라 나름 열의를 가지고 이번 원정길에 올랐던 것이다.

가끔 다른 조의 소식을 접하노라면 그들은 벌써 수개 부족을 점령하고도 모자라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는데 제1조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말단직에 만족해야만 할 겁니다. 아! 정말 이거, 속이 타 들어가 미치겠습니다.”

육중한 체격에 성질 급한 1호 비스크는 그 굵직한 음성으로 마치 어린아이 투정 부리듯 말했다.

항시 그렇듯 느긋한 성격의 대장 지노는 벌써 50을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그다지 급한 것도 없고 그저 그런가 보다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자기 분수대로 사는 거지, 뭘 그리 조급하게 구냐?”

쿵쿵!

비스크가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정말 미치겠네요. 당장 생각 같아서는 대가리를 땅바닥에 처박고 죽고 싶군요!”

“그럼 그렇게 하든지.”

“아이고, 형님하고 애초 이번 원정길에 오르는 것이 아닌데…… 대체 왜 그리도 태평하십니까? 어제 전령으로부터 소식 못 들었습니까! 제이 조 이리가시 대장은 서부 지역의 칠 할에 해당하는 부족민들을 규합시켰다고 하고 제삼 조 에르가니아 역시 일곱 개 부족들과 두 개 산족들을 병합하여 귀환하고 있다는데 우린 겨우 한 개 족 설득한 게 전부이니…… 이거, 창피해서 돌아갈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따 그놈 참 말 더럽게 많네. 네놈의 그 말투가 대장인 내 무능력을 탓한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나 본데, 자꾸 그러면 맞는 수가 있다.”

“거참 말 한번 잘했수다. 제발 대장이면 대장답게 성질도 내고 때리든 말든지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나와 좀 보쇼.”

결국 그처럼 느긋한 성격의 지노는 인상을 확 찡그리더니만 손을 들어 1호 비스크를 위협하려 했다.

“너 이놈! 내가 진짜 못 때릴 줄 알았더냐.”

“제발 패 주쇼. 나 정말 이 자리에서 맞아 뒈지고 싶소. 이대로 아무것도 한 일 없이 돌아가서 국왕 폐하를 뵙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훨씬 나을 테니 말이오.”

“정말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네.”

지노는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랐는지 그의 장기인 격공장의 자세를 취했고 급하게 운기를 모아 발사 하려고 했다.

만일 장법이 비스크를 강타하기라도 한다면 그의 육중한 체구는 뒤로 10여 m를 붕 날라서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머지 대원들이 그냥 두고만 볼 리는 없었다.

무척 키가 큰 2호 게리가 지노를 말렸고 나머지 3호 크리스와 막내 아레스가 비스크를 말렸다.

“아, 정말! 왜들 그러십니까? 애들도 아니고.”

“놔라, 이거! 너희들도 저놈이 얘기하는 거 다 들었지.”

“저 형님 성격이 원래 그렇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저놈보다 나이들 먹어도 십 년은 더 먹었는데 어디다 대고 눈을 부릅뜨고 대가리를 대미는 거여?”

그러자 비스크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나이 먹은 게 뭐 대수입니까?”

“뭐라고!”

순간 지노가 공중으로 몸을 날리더니만 옆차기를 시도했다.

“에잇!”

탁! 털썩.

“악!”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으니, 그가 몸을 띠우는 순간 게리가 말린다고 그의 팔을 낚아채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아이고!”

“괜찮으세요?”

“이제 네놈들이 단체로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저 말리려고…….”

“아고고, 허리야!”

비스크가 깜짝 놀라 재빨리 지노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도 자신을 때리겠다면 위협을 했지만 그가 혹시라도 부상을 당했나 싶어 걱정이 되었는지 상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형님!”

그러자 지노는 쓰러진 채 허리를 움켜쥐고 있는 상황에서도 한손으로 그를 밀치며 외쳤다.

“저리 가! 괜히 걱정해 주는 척하지 말고 가라니까.”

“…….”

그날 저녁.

탁탁, 화르르!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 주변에 둘러앉은 지노와 1호 비스크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은 저마다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불만 쬐고 있었다.

“…….”

“…….”

아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다소 분위기가 침체되었을까. 벌써 한 시간여째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벌써 겨울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이제 조금 있으면 눈이 녹는 봄의 계절이 다가올 텐데, 이번 원정길에 아무런 수확 없이 귀환한다는 자체가 황당한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막내 아레스가 모처럼만에 말문을 열었다.

“형님들 힘내지요. 사실 우리가 능력이 없기보다는 원정 지역을 잘못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죠. 여기 지형이 대부분 끝없이 펼쳐진 초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쳐들어갈라 치면 그때마다 부족민들은 항시 말을 타고 도망가곤 했지요.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초원의 야생마들을 길들여서 생활했기에 말 다루는 솜씨는 그야말로 능수능란하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을 우리가 무슨 수로 쫓아가겠습니까.”

이번엔 3호 크리스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아마 다른 조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은 분명하다고. 솔직히 우리가 제일 조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래도 국왕 폐하를 초창기에 모셨다는 정통파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 결과는 이렇게 참담하니 난 도저히 얼굴을 들고 귀환할 용기가 나지 않다네.”

아레스가 갑자기 가슴 안쪽으로부터 조그만 양피지를 꺼내더니만 바닥에 펼쳐 보였다.

“그렇다면 한번 마지막으로 모험을 제안하겠습니다. 다들 이걸 보시죠.”

막내의 말에 대원들은 눈빛이 반짝였고 그가 꺼내 놓은 양피지에 집중을 했다.

비스크가 물었다.

“그건 뭐냐?”

“지도입니다. 나부스카 초원 지대를 비롯하여 인근 접경 지대까지 나온 아주 귀한 지도입니다. 우리 원정지가 이곳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개인적으로 거금을 주고 구입했는데, 잘하면 오늘 그 가치를 써먹을 수가 있겠어요.”

“쳇, 그까짓 지도가 뭘 대수라고.”

아레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대수가 될 수 있습니다.”

“뭐라!”

“잘하면 우리도 큰 수확을 얻어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막내 말에 대원들의 호기심은 증폭이 되었고 급기야 성질 급한 비스크가 다짜고짜 말했다.

“당장 설명해 봐!”

아레스가 손으로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은 나부스카 초원 지대 북동 방향에 위치한 칼차크 종족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들은 다른 부족민들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유목 생활을 하는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요새를 짓고 정착하며 사는 종족입니다. 사실 칼차크 종족은 한때 야생마들을 길들여서 제국이나 왕국에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것이 그들의 주요 업무였는데 최근에는 직접 기병대를 만들어 용병 형식으로 임대하는 방법으로 큰돈을 번다 합니다.”

비스크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물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계속해서 들어 보시죠. 혹시 얼마 전에 어느 기병 부대가 자신들의 병력에 무려 열 배나 되는 오천여 보병 부대 제압했다는 얘기는 형님들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3호 크리스가 외쳤다.

“그거라면 나도 잘 알지. 남단 어느 왕국인가? 아무튼 거기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국왕이 어느 곳으로부터 용병 형식으로 임대해 온 오백여 기병대가 있었다지. 그들은 넓은 벌판에 포진해 있는 오천여 보병 부대와 정면으로 맞닥트려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들었는데.”

아레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확히 아시는군요. 사실 그 기병대를 임대해 준 곳이 바로 여기 지도에 나와 있는 칼차크 종족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겁니다.”

그 말에 대원들은 저마다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레스가 계속해서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말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투력도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만일 우리가 그들을 규합만 할 수 있다면 이는 상당한 전과를 올리는 일이 될 겁니다.”

순간 대원들의 표정이 반신반의하듯 어두워졌다.

“규합이라니? 무슨 수로 말이지.”

“흠. 칼차크 종족은 그저 일개 부족민이 아니고 제법 인구수가 많은 조그만 왕국 규모는 될 텐데 우리 병력 가지고 무슨 규합을 한다고 그러나.”

“맞아, 그렇게 용맹하고 대단한 종족을 얻으려면 아마 제국의 군단 규모는 와야 가능한 일이겠지.”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아레스는 여전히 희망을 가진 듯 얼굴이 밝아 보였다.

“형님들께서 제가 뜻한 규합의 의미를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거 뭔 소리냐?”

“물론 처음부터 그들을 규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들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임대라?”

임대라는 말에 대원들의 눈빛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장 지노 역시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는 듯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아레스에게 물었다.

“분명 엄청난 거금을 요구할 텐데…… 그렇게 되면 우린 가진 돈이 없고, 돈이 없는데 그들을 어떻게 임대를 한다는 거지?”

아레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칼차크 종족의 기병대 임대가 후불제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후불제라는 말에 대원들의 반응이 일시에 술렁였다.

“후불제라고?”

“흠.”

하지만 후불제라고 해서 분위기가 갑자기 긍정적으로 돌아서는 것은 아니었다.

제법 날카로운 사고를 가진 3호 크리스가 말문을 열었다.

“후불제 역시 어차피 돈을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기병대가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그 돈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건 좀 이상한데? 그 어떤 용병 단체든지 전투의 승패 없이 일단 참가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거래 내역은 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거늘.”

아레스의 미소는 여전히 입가에 머물고 있었다.

“후후. 물론 상례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만 세상에는 예외가 가끔 있는 법이지요.”

“예외라니?”

“글쎄요. 칼차크 종족은 자존심을 넘어서 자부심이 엄청 강한 자들이라 자신의 기병대가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고 고스란히 이익을 챙겨 왔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그들의 후불제를 택한 이유는 그만큼 자신감이 충만해 있고 나름 전투력이 최고라 자부하기 때문이겠죠.”

“그저 작은 나라의 반란군 진압 정도에 불과해서 그런 대로 공을 세웠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린 제국을 상대로 해서 싸워야 하는데? 과연 그들이 순순히 임대를 해 주면서도 후불제를 택할까?”

그 질문에는 아레스 역시 고민스런 얼굴을 했다.

“사실 저 역시 그게 걱정이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그들을 찾아가서 얘기는 해 볼 수는 있잖아요.”

“흠.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은 잘 알지만…….”

“에이! 내일 당장 형님하고 저하고만 그곳으로 갑시다. 한번 시도는 해 보자고요.”

3호 크리스는 영 내키지 않는지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게 말이다, 과연 잘…… 될까?”

“제게 생각이 있으니까 어쩌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있다니?”

“어쩌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그게 뭐냐?”

“내일 가면서 얘기해 줄게요.”

“…….”

***

초원 한가운데에 굵직한 통나무들 빽빽이 세워 만든 담벼락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보였다.

최근 칼차크 종족의 기병대 위상이 세상에 서서히 알려지면서 족장 아크누스는 거금을 들여 요새 확장 공사를 단행하였다.

원래 오백 명에 불과했던 기병대가 이제는 이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대폭 넓어진 연병장 덕분에 그 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말을 타고 달려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마침 오늘은 사열식이 있는 날. 용맹하기로 유명한 칼차크 종족의 정예 기병대원들 모두가 연병장 중앙 연단 위에 서 있는 족장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을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하며 굳게 다문 입술, 누가 봐도 카리스마가 풀풀 넘쳐흐르는 강한 인상, 아크누스는 지난 9년 동안 그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기병대원들의 바라보면서 이만저만 뿌듯해하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가 오늘날 이런 날을 맞게 된 데에는 그만큼 힘든 과정이 있었다.

문득 지난날의 회한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9년 전에는 칼차크 종족 역시 그저 일개 부족민과 마찬가지로 야생마들을 잡아서 길들이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오늘날 강력한 기병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아크누스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해서 주변 부족민들을 통합했던 것이 원동력이라 할 수 있었다.

칼차크 종족은 태어나자마자 말과 함께 산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야말로 야생마 다루는 솜씨는 대륙에서 최고라 자부할 수 있었다. 또한 말 등에서 자유자재로 무기를 다루는 일 역시 자신이 있었으니, 기병대원으로서 적격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아크누스가 족장으로 선출되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한 일은 바로 유목 생활에 길들여진 부족민들을 훈련시켜 전투 기병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이 결국 오늘날 그 뜻대로 제법 큰 규모의 병력을 갖추게끔 만들어 주었다.

이제 그의 야망은 더욱 넓은 세상을 향하려 했다.

잠시 후 사열식이 끝이 나자 아크누스는 바로 옆에 서있는 기병수장에게 다소 굳어진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직은 전체적으로 열이 흐트러져 보이는군. 내가 누누이 얘기했듯이 이제 우리 칼차크 기병대원들은 그저 말 위서 검술이나 활 쏘는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것보다 하나의 통합된 군대로서 절도와 위용을 잘 갖춘 제국의 기병대 체제를 따라가야 할 것이야. 전투가 벌어질 시에 신속한 명령 체계가 이루어 져야만 저 많은 기병대원들을 수월하게 부릴 수 있으니까 사열식 훈련을 통해서 보다 단결되고 흐트러짐이 없는 기병대를 완성해야 할 것일세.”

기병수장 세올이 즉각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제발 신경 좀 쓰게나. 같은 얘기 보름 전에도 하지 않았는가. 그때와 지금과 별반 달라진 점이 없어 보여 하는 말일세.”

세올이 당황스런 반응을 보였다.

“아, 예. 저기…… 워낙 기병대 규모가 크다보니까.”

“그래서 자네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그전까지는 족장님의 명령만을 따르던 대원들인지라 아직 제가 지휘하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아크누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규모가 커지면서 그동안 미루었던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건만 언제까지 내가 직접 대원들을 데리고 전투에 참가해야 한단 말이지. 어쨌든 사열식은 자네 일이니 확실히 마무리 짓게나. 다음 전투 때 자네기 총괄 지휘해야 하니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연단 뒤쪽으로부터 한 병사가 등장하더니 이들 앞으로 다가왔고 기병수장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요새 정문 앞에 족장님을 찾아온 자들이 있습니다.”

“족장님을?”

이번엔 아크누스가 물었다.

“나를 찾아왔다면 임대 의뢰인밖에 없을 텐데.”

“왕국에서 이곳을 방문한 사신이라 합니다.”

“사신이라고.”

기병수장이 말했다.

“사신이라면 임대 의뢰인이 맞는 것 같은데요?”

“흠, 마침 일거리가 없었는데 잘되었군. 그들을 집무실로 당장 들게 하라.”

“예, 알겠습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집무실에는 아크누스와 기병수장이 탁자 맞은편 두 명의 젊은 사신들을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아크누스가 말문을 열었다.

“이런 오지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 그나저나 그대들은 어느 왕국에서 온 사신들이오?”

두 명 사신들 중 비교적 앳되어 보이는 사내가 대답했다.

“일단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저희는 국왕 폐하의 명령으로 긴급히 파견된 특사로서 제 이름은 아레스이고 옆은 크리스라 합니다. 우선 그토록 용맹하고 명성이 자자한 칼차크 기병대 족장님을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 왕국은 아직 국호가 결정되지 않은 신생 왕국이란 점 참고 하시고 일단 간략하게나마 다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아레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크리스가 가만히 앉아 있자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서 함께 허리를 굽혀 다시 예의를 표했다.

아크누스는 자신 같은 일개 족장에게 사신들이 정중히 인사를 하자 조금은 당황한 듯 같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럴 것까지야…….”

“아닙니다. 당연지사 그래야만 합니다. 사실 저는 사신의 자격이 아닌 개인적으로나마 칼차크 기병대를 이끄시는 족장님을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아크누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명의 사신들 눈빛으로부터 진짜 자신을 만나 보기 위한 열정이 가득 채워져 있음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거 별 볼일 없는 사람한테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그나저나 아까 그대들의 왕국이 아직 국호가 정해지지 않은 신생 왕국이라 들었는데 대체 어디에 위치해 있는 거요. 나는 최근에 나라가 세워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말이오.”

“이곳으로부터 제법 먼 곳 지역에 있습니다. 팔라카스 제국 서북쪽 국경선 인근 영토라 할까요.”

순간 아크누스가 깜짝 놀란 듯했다.

“국경선 근처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팔라카스 제국의 군소 동맹국이겠군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 왕국은 순전히 독립적으로 세워진 자치국입니다.”

그 말에 아크누스가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흠, 팔라카스 제국의 국경선 부근에 자치 왕국이 세워질 수 있다니…… 아마 제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아크누스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레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팔라카스 제국에서는 내년 봄 쯤에 군단을 동원하여 저희 왕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를 보내왔습니다.”

이번엔 기병수장이 답답하다는 듯 한마디 껴들었다.

“그런 줄 예상했을 텐데 어찌 그들의 코앞에 나라를 세운 거요.”

“우리 역시 한때는 팔라카스 제국에 몸답고 있던 용병들이었는지라 멀리 못 가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때 아크누스가 뭔가를 생각해 낸 듯 큰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제국에서 대규모 난민들이 국경선 부근으로 대이동을 했다던데…… 혹시?”

“맞습니다. 당시 그들이 세운 나라가 저희 왕국이 맞습니다.”

그러자 아크누스와 기병수장의 화색이 조금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랬었군. 그나저나 뭔 일 때문에 우리를 찾아온 것이요.”

갑자기 기병수장의 말투가 냉랭해진 것으로 보아 태도가 바뀌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설령 이들이 기병대 임대 의뢰를 하기 위해 방문했을지라도 그 거래가 이루어질 확률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들은 내년 봄 팔라카스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 도움을 얻으러 온 사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족장 아크누스는 소문대로 대장부다운 기질이 있었던가.

“자, 이제 나를 찾아온 용건을 말해 보시게나.”

아레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절실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흰 아크누스 님의 기병대를 임대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

그 말에 아크누스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헌데 정적을 깨트린 것은 기병수장이었다.

“돌아들 가시오.”

아레스와 크리스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돌아가다니요?”

“우린 도저히 승산 없는 곳으로부터 의뢰는 받지 않소이다.”

“승산이 없다니요. 저희 왕국의 국력은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아는지요.”

“신생 왕국이 강해 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게다가 상대는 팔라카스 제국이라는 어마마한 대국인데, 설령 우리가 나서서 도와줘 봐야 바위 계란 치기에 불과할 것이 아니겠소?”

그러자 이번엔 크리스가 억울한 듯 항변했다.

“여기 기병대는 그야말로 대륙에서 가장 용맹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다가 보통 의뢰 대상은 물어보지 않고 그냥 승낙을 한다는데 어찌 이것저것 다 따져 보고 단번에 거절할 수 있습니까?”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우린 상대가 왕국 규모일 때에 한해서만 의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 주고, 당장 돌아가기 바라오.”

크리스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제 보니 칼차크 종족이 용맹하고 자부심이 세다는 말을 다 헛소문이었군그래! 팔라카스 제국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꼬랑지부터 내리니, 나 참.”

순간 기병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허리춤으로부터 검을 뽑아 들었다.

슥―

“뭐라! 이 작자들이 말이면 다하는 줄 아는가. 일개 사신들 주제에 족장님 앞에서 우리 기병대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이다니.”

“내가 틀린 말했습니까?”

“정말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그때 아크누스가 외쳤다.

“당장 그만두게나.”

“족장님…… 이자들이 너무 무례하기에.”

“나라도 그리 했을 걸세.”

“네?”

“여기 사신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살리고자 어떡하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매달리러 온 것일세. 그러니 쉽게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그 말에 아레스와 크리스는 정곡을 찔린 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

곧이어 아크누스가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 말 오해 없이 들으시오. 나 역시 대의명분을 아는 자로서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대들에게 기병대를 임대하여 도와주고 싶지만 세상에는 해 볼 만한 일이 있고 아예 생각조차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오. 그런데 그대들 사정을 보니 후자 쪽인 것 같아 내 심정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지는군요. 난 족장으로서 나의 종족들을 몰살시키고 싶지는 않소이다. 아무튼 미안하게 되었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던가. 결국 아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차비를 했다.

“……시간을 내 주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크리스는 무척 아쉬운지 자리에서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레스가 그의 팔을 잡아끌어 일으키며 말했다.

“그냥 가지요.”

“이봐, 아레스…… 이건 아니잖아.”

“할 수 없지요. 초원 영토에 거주하는 부족민과 종족들이 모두 자멸하는 수밖에요.”

아레스와 크리스가 집무실 문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아크누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리게나.”

“네?”

“방금 전 모두 자멸한다는 뜻은 뭐인가.”

“그냥 앉아서 눈뜨고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당한다는 말인가.”

“저희 왕국과 연합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부족 단체이겠죠.”

“그건 왜지?”

“팔라카스 제국의 황제 게라쿠스가 어마어마한 초유의 군단을 구성하는 이유가 그저 작고 초라한 우리 왕국만을 침략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들의 야욕은 남부대륙 전체에 해당된단 말입니다! 모든 영토를 초토화시키고, 점령하고!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패권 제국을 세우려는 크나큰 야망이란 말입니다.”

아크누스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아레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레스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마주 보았다.

이윽고, 아크누스가 모두를 소집할 것을 일렀다. 물론 아레스와 크리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아크누스는 한 시간여가 지날 동안 아레스로부터 신생 왕국이 세워진 동기와 최근 주변 부족민들을 규합하여 상당한 병력과 원조를 약속받은 일 등을 소상히 설명받았다.

국왕 지드에 대한 소개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다소 과장이 섞였겠지만, 아크누스는 서서히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신생 왕국치고는 제법 탄탄한 인재들이 밑바탕이 되어 이미 수많은 부족민들을 규합했다는 설명에는 그의 두 눈빛이 흔들렸다.

“지난 늦가을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제 절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성과를 이룩한 셈입니다. 만일 족장님께서 기병대마저 임대해 주신다면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이니 팔라카스 제국 군단에는 그리 쉽게 침략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

아크누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쥐고는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으니 아레스의 설득이 조금은 먹혀 들어갔던가.

잠시 후 그가 말문을 열었다.

“만일 자네 왕국이 팔라카스 제국군에 함락을 당한다면 이쪽 평야까지 뚫리는 셈이니 물밀듯이 쳐들어오겠군.”

아레스는 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음을 확신했고 마지막으로 진한 설득을 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거야 불 보듯 자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게다가 황제 게라쿠스는 원래 성격이 포악한데다가 자국민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수백 명의 검투사들을 원형 경기장에 동원하여 맹수들과 혈전을 벌이게 하는데 그 인원들 모두가 부족민들을 잡아다가 훈련을 시킨다 합니다. 결국 거의 모두가 제국의 시민들의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짐승의 먹잇감이 되고 말지요. 만일 저희 왕국이 함락당한다면 제국은 이곳 초원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며 대부분의 검투사나 노예를 포로들로부터 충원할 것은 분명합니다.”

“몹쓸 황제로군.”

“그 이상이죠.”

“물론 그렇게는 안 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희 용병들이 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지 아십니까. 황제는 자신이 태양인 양 신적으로 추앙받기를 원합니다. 그 아래 사람들은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잔혹한 짓을 행했죠. 저희는 몰살을 피하기 위해 무조건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 광활한 초원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수많은 유목민들이 하루아침에 그들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겪어야만 할 것입니다. 물론 족장님께서 애초 제국을 찾아가서 미리 항복이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을지도…….”

순간 아크누스가 말을 끊었다.

“항복이라니! 나는 그 누구에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아레스는 일부러 걱정해 주는 척 다소 묘한 표정으로 밀어붙였다.

“그래도 상대는 제국의 황제인데 일찌감치 그를 찾아가 속국이 되겠노라 협약을 맺고 해마다 검투사들을 위한 부족민들과 좋은 품종의 말들을 조공으로 받친다면…….”

아크누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만 하게나!”

아레스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크누스가 다시 말했다.

“빌어먹을! 내가 언제까지 그곳으로 가면 되겠는가. 그래, 자네 왕국 말일세.”

아레스와 크리스는 두 눈이 동그라졌다.

“뭘 그리 보는가? 기병대 임대 의뢰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걸세.”

“정말입니까!”

“난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네. 허허. 내년 봄 안에 기병대원들이 그곳으로 갈 걸세. 이번에는 나도 동참을 할 테니 그리 알게나.”

“아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시다면 병력 규모는 어느 정도나?”

“현재 이천여 명의 기병대원들이 있지만 상대가 제국이라면 그 숫자를 두 배 정도는 올려야 하겠지.”

“두 배라면…….”

아레스와 크리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500여 명을 예상하고 왔건만 어느 사이 2천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년 봄까지 4천 명으로 더 늘린다니!

이건 웬만한 왕국 규모보다도 훨씬 많은 규모였다. 아레스는 조금 못 미더웠는지 한 가지 물어 보았다.

“그 많은 인원을 몇 개월 사이에 보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와 형제 관계를 맺고 있는 부족들에게 상황을 얘기하면 아마 협조할 걸세. 그들 역시 한 배를 탄 입장을 받아들이고 우리 기병대에 합류를 하겠지. 하지만 한 가지 걸림돌은 있다네.”

“걸림돌이라니요?”

“그들 역시 말을 다루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지만 검술이라든가 활을 쏘는 전투 기술은 새로 익혀야 하니 그게 시간이 걸린다는 걸세. 우리에게는 훈련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 기병수장 하나밖에 없으니, 병력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

아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을 하지 말라니?”

“저희 지휘부가 이곳에 남아서 직접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주 뛰어난 전투 기술을 지닌 자들이거든요.”

“오호!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면 그리 해 주게나.”

“마땅히 그리 해야겠죠.”

“그렇다면 그건 해결이 된 셈이고. 훗날 자네 왕국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나중에 셈은 정확히 하세나.”

“하하, 그야 물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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