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바위 틈 사이 돌무더기를 헤집으며 뭔가를 찾고 있는 보였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찾았다! 그러면 그렇지, 이게 어디 가겠어.”
그 뒤에 서 있던 17세가량으로 보이는 숙녀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
“그게 뭐예요?”
“이거야말로 우리 왕국을 구해 줄 비책이라 할까?”
“비책이라고요?”
“그런 게 있다.”
“그러니까 뭐냐고요. 시원스럽게 말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요?”
“더 이상 말시키지 마라. 나 지금 무척 긴장해 있으니까.”
“치!”
싱그러운 미소의 천진한 눈빛을 한 30대 중반의 사내와 무척 아름답고 귀여운 용모의 여인, 그들은 다름 아닌 지드와 헤라였다.
지드가 옛날 스승님으로부터 무공을 배웠던 이곳, 뒷산 수련장을 떠난 지 어언 6년이란 세월이 흘렀던가.
지금 국왕의 신분인 그가 이곳에 은밀히 와야만 했던 이유는 화산 보물들이 간직된 흑단 상자 안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낡은 고서들만 열 권이 넘었는데 그중에는 독고구검과 십사수매화검법서 등 화산파 무공 비급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급들은 꺼내서 옆으로 놓고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맨바닥으로부터 한 두툼한 책자를 꺼내 들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우. 여기 있었군!”
책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중국 역대 병법서들에 관한 고찰
병법에 관한 책자가 왜 화산 비급들과 섞여 있는지 여기 모르지만 지금 시기에 있어서 그 얼마나 천금 같은 보물이란 말인가.
아마도 스승님은 화산 장문으로서 옛날 위대한 병법가였던 분들의 서적을 모두 구입한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처럼 종합적으로 정리를 하여 개인적으로 연구하거나 보다 깊이 있는 공부를 한 것 같았다.
언뜻 얘기를 들어 보면 이 책에는 삼국지의 고대 전략서의 시초인 육서를 비롯하여 제갈공명 그리고 손자병법을 비롯한 장량 등 그야말로 천재적인 전술가들의 정수들만을 모아 놓은 것이라 했다.
지드는 스승이 사는 중국에 대한 역사에 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수십 수백만의 대군이 큰 전쟁을 치르는 동안 몇몇 걸출한 지략가들에 의해 수많은 나라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다는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병법서는 전쟁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도 통용이 되고 먹혀들어 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국왕에 오른 지드는 앞으로 수개월 후면 팔라카스 제국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해야만 할 테니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이 상자에 병법서가 있음을 생각해 낸 것이다.
지드는 그 책자만 꺼내고는 다시 흑단 상자를 바위틈에 밀어 놓고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숨겼다. 그때 헤라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제목이 이상한 글씨체로 보아서 무슨 주술서 같은데, 그게 뭐예요?”
지드는 대답 대신 여신 흐뭇한 표정만 지을 뿐.
“치! 말하기 싫음 말고요.”
“어차피 알게 될 거다.”
“체엣!”
그는 병법서를 가슴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는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신전과 창고 건물들 그리고 앞마당을 보니 정말이지 감회가 새로웠다.
헤라가 다시 물었다.
“저긴 어디죠?”
“저곳은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장소다.”
“전환점이라고요?”
“그래, 오늘날 나를 있게 해 준…….”
그는 잠시 옛일들이 떠올랐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처음 와서 곰이 잡아 놓은 연어를 훔치려다가 고생한 일,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노인과의 만남.
설마 그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구세주이자 스승이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회한 그득한 눈빛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무림으로 귀환하신 스승님의 소식이 궁금한데.”
“스승님은 또 누구래요?”
“녀석 참, 궁금한 것도 많네.”
“자꾸 혼자서만 중얼거리니까 그렇죠.”
“차차 알게 된다니까.”
“언제요?”
“때가 되면.”
“정말 치사하게 나오네요.”
“어라. 이 녀석 말버릇 좀 보게나? 나 국왕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냐.”
순간 헤라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웁! 죄송요!”
“하하.”
지드는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둘러볼 심산으로 아래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이에 헤라 역시 황급히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아갔다.
“같이 가요!”
잠시 후 수련장에 내려온 지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년 전 그가 이곳에서 대원들을 훈련시킨 이후 떠났을 때와 뭔가 달라져 있었던가.
우선 건물의 대문이 부셔져 있었고 곳곳에 누군가 일부러 뒤진 흔적이 있는 것처럼 매우 어지럽혀져 있었다. 이에 지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참, 이상한데……?”
그는 안력을 최대로 올려 마당을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동공이 확대가 되었다.
“뭐야, 저 이상한 발자국들은.”
하나는 제법 컸고 다른 하나는 작은 것으로 보아 남자와 여자가 이곳을 다녀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눈 내리는 겨울이 오기 전 찍힌 것으로 보아 최소 일 년이 채 지나기 전 흔적이었다.
“대체 누가…….”
지드는 이 세계의 신발 밑창과 다른 독특한 문양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눈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편 헤라는 대체 지드가 무슨 행동을 하나 의아스런 얼굴을 했다.
“뭘 찾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스승님의 족적하고 비슷한데…….”
“족적이라니요.”
“발자국을 말하는 거다.”
“발자국이요?”
“분명 누군가 다녀간 것 같은데.”
그가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골몰했다.
“가만있어 보자. 족적이 이 세계 것이 아니라면 설마 무림에서 다른 누군가 이곳에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드는 심장 맥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사방을 둘러보는 지드.
건물과 창고의 문들이 부서진 것으로 보아서 필시 뭔가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온 자들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해 보았다.
‘혹시 스승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족적의 크기가 확실히 달라. 그리고 두 명이라…… 대체 누가 왔다 갔단 말이지.”
이제는 그의 안색이 굳어지고 있었다.
‘설마 스승님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지드의 불안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
그 이튿날.
“아, 정말 왜 그러세요.”
“내버려 둬라.”
꿀꺽꿀꺽!
“그 술통 당장 이리 줘요! 얼른!”
“어험. 감히 왕이 한잔 하자는데 어디 함부로 그러는 게냐.”
“왕이라면 적어도 체통은 지켜야죠. 이런 야외에서 그렇게 술을 들이켜면 술주정뱅이나 다름없잖아요.”
“뭐야? 야, 이거 놔라.”
지드는 헤라가 술통을 뺏으려고 하자 한 손으로 그녀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술 가죽 통을 움켜쥐고 목구멍으로 들이붓고 있었다.
“좋다.”
“여행을 다니면서 그렇게 술을 자주 마시다니. 정말 못 말린다니까요.”
“이 녀석아, 잔소리하려고 따라왔더냐? 돌려보내기 전에 그만 해라. 귀 따가워 죽겠다.”
휘이잉.
돌산 언덕 위로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지드는 아래 마을 전경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긴 듯 잠시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 병법서를 찾기 위해 옛 수련장을 찾았지만 오늘은 근처에 있는 고향을 들르기로 하였던 것이다. 헌데 헤라는 왜 그가 여기에 왔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지드는 대답 대신 다시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꿀꺽.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나처럼 불효자는 없을 거야.”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난 한심한 놈이라 이거다.”
헤라는 무슨 영문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한마디 했다.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후후. 동의하든지 말든지 난 정말 한심했거든.”
“그런 한심한 사람이 어떻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될 수 있는 거죠?”
“그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 난 거지.”
“정말 술 많이 취하셨나 봐요.”
“아니, 나 정신 멀쩡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말씀만 하는 거지요. 평소 때와는 조금 이상해 보여요.”
수년 만에 고향에 내려온 지드, 막상 오랜만에 보게 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을 볼 생각을 하니 무척 착잡한 모양이었다.
당장 내려가서 국왕의 신분을 밝히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그럴 신세가 아니었다.
이곳은 팔라카스 제국 영토이기에 지드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
설령 가족들에게 비밀을 말한들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여전히 하류검사 혹은 비렁뱅이 신세로 가족들을 대해야만 하는 건지.
어렸을 때부터 가출에 가출을 하고 30대 중반에 또다시 이런 신세로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때 지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언덕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날 저물기 전에 얼른 내려가자꾸나.”
“어디 가는 거죠.”
“그야 마을이지.”
“하룻밤 머물게요?”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대체 저기가 어딘지 말씀해 주시죠.”
“사실 내 고향이다.”
“순간 헤라가 깜짝 놀랐다.
“고향이라고요!”
“내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는 곳이지.”
“와우!”
“뭘 그리 놀라나?”
“이거 정말 뜻밖이네요. 설마 국왕의 신분으로 이런 식의 방문은 예상도 못했거든요.”
“같은 생각이다.”
“국왕의 신분으로 대신들을 대동하고 당당하게 방문하시지 그랬어요.”
그때 지드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
“쉿! 조용히. 너 말이야. 내가 왕이란 사실 절대 말하면 안 된다?”
“그건 왜죠?”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 알았지?”
“…….”
지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 역시 무슨 이유가 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러고 나서 지드와 헤라는 마을길을 걸어 허술해 보이는 흙담집으로 가서는 그리 높지 않은 담장 너머로 머리를 빼어 들었다.
그곳은 낡은 목조 건물의 뒤뜰로 나이 들어 보이는 한 반백의 여인이 빨랫감들을 널고 있었다.
지드는 반백의 그녀를 보는 순간 갑자기 경직이라도 된 듯 멍해 있었고 곧이어 눈물이 핑 돌았다. 6년 전 경호대장의 임무를 띠고 이곳을 떠날 때의 어머니 모습이 무척 늙어 보였던가.
‘엄마…… 흑.’
지드는 헤라를 의식해서인지 속으로 울 뿐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일그러진 인상이 헤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디 아프세요? 마치 울고 싶은 거 억지로 참는 인상 같은데.”
“아니야.”
“그럼 왜 얼굴이 그래요.”
“…….”
지드가 대답이 없자 헤라는 그제야 그의 눈길이 담장 안쪽 여인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혹시 저분이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에 지드는 겨우겨우 참았던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흑!”
마침 그때 빨래 널던 늙은 여인은 담장에 누군가 서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누구시기에 남의 집을 넘어 보는 거죠?”
그녀의 눈길이 한 초라한 몰골의 30대 중반 사내에게 향했고 순간 양동이를 떨어트리고 만다.
탁!
“세상에!”
“흑.”
“너 지드 아니냐!”
지드 역시 눈물 콧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
“지드야! 세상에, 우리 지드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제가 돌아왔어요.”
“그래, 우리 지드! 잘 돌아왔다.”
곧이어 지드는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어머니와 눈물의 포옹을 했다.
한편 두 모자의 상봉을 지켜보던 헤라 역시 감격에 겨웠는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녀는 내심 지드가 30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연신 외치는 모습이 조금은 웃기게 보이기도 했다.
그날 해 질 무렵쯤에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아버지와 큰형 그리고 둘째 형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거실 탁자에 턱 하니 앉아서 헤라와 차를 마시고 있던 지드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들의 인상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이내 냉담해졌고 그저 아는 척하는 정도로 겉치레 말만 했다.
“결국 어디서 헤매다가 돈 떨어지니까 또 기어들어 왔군.”
아버지에 이어 두 형들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왔냐.”
“몰골은 좀 좋아져 보이는데?”
지드는 풀죽은 듯 말했다.
“그냥 그렇지 뭐.”
“나이 서른 중반이 되도록 정착도 못하고 비렁뱅이처럼 떠돌아다니기만 하다니. 이제는 철 좀 들 때도 되지 않았냐.”
아버지의 대물림을 이어받았던가.
이번엔 큰형이 안 하던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둘째 형 역시 한마디 거들었으니.
“놔둬, 형! 저 녀석이 어떻게 살든 말든 이제는 상관 말자고.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지.”
“하기야.”
이번엔 아버지 차례던가.
“이번엔 일체 도움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집안 돈은 내가 모두 관리하고 있으니까 지난번처럼 네 엄마가 몰래 돈을 주는 일은 없을 거다.”
지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별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때 주방에서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시더니만 아버지에게 한마디 했다.
“정말들 너무하는군요. 수년 만에 돌아온 아들인데 따뜻하게 맞이해 주면 안 되나요?”
그러자 아버지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만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러면 뭐 하겠소? 또 집이나 나갈 텐데. 그나저나 오늘은 일이 무척 힘들었으니 당장 저녁이나 차리쇼.”
두 형들도 아버지처럼 좋은 표정들은 아니었다.
“저 철없는 자식은 나이가 서른을 넘었건만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상관없을 테고 그저 세상 밖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겠지.”
“맞는 말이오. 저놈이 검술 실력이 중급 검사에만 미쳐도 막내 일을 상의해 볼 텐데 행색을 보아하니 아직 하류검사를 면하지 못한 모양이고…… 쳇, 다 소용 없는 일이지.”
“아니 제 눈에는 이젠 아예 비렁뱅이 신세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순간 어머니가 화가 난 얼굴로 그들을 나무랐다.
“너희들, 동생에게 그게 무슨 말이니!”
그때 지드가 일어나서 현관 밖을 두리번거리더니만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막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가.
“아리우스는 어디 있죠?”
그 말에 아버지를 비롯한 두 형들의 인상은 더욱 찌그러졌고 어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셨다.
그제야 지드는 막내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알고는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고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는 듯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일단 식사부터 하자꾸나.”
“…….”
실로 수년 만에 돌아온 셋째 아들을 위한 식사 분위기는 매우 침울해 보였다. 그런 가족들의 슬픈 표정을 보는 지드의 심정은 더욱 착잡했으리라.
헤라 역시 손님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있는 셈이지만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드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답답한 속을 태웠다.
‘막내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가족을 내팽개치고 집 나간 지 십여 년이 지나 이제 돌아온 그 자신이 근엄한 아버지 앞에서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지드를 바라보더니만 한마디 건넸다.
“건강하지?”
“…….”
평소의 딱딱한 음성 대신에 부드러운 말투였던가. 지드가 다소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살폈다. 아버지는 가벼운 한숨을 쉬더니만 스푼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두 형들 역시 식사를 마치고는 아버지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식탁에 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지드, 그리고 헤라뿐, 그제야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지드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울기만 할 뿐 어머니는 선뜻 말문을 열지 않으셨다. 지드는 왠지 불안해지는 심정을 애써 달래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잠시 시간이 흘러서야 어머니는 평정을 찾았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막내가 너무 가여워서 그래.”
“가엽다니요! 대체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는 거죠?”
“…….”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이 흘렀을까. 어머니는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다시 눈물을 흘리셨다.
농부의 아내로서 주글주글해진 주름에 해진 손마디는 찻잔을 잡고도 달달달 떨고 계셨다.
소박하다 못해 순박한 가족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지드는 이만저만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빛을 번뜩이며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랬다 이거지.’
지드의 성질을 잘 아는 헤라는 그 대상이 벌써부터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 그녀조차도 전혀 동정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파렴치하고 더러운 짓을 일삼은 존재라 그런가.
그간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막내에 대한 어머니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이 지역에 위치한 7개 마을에게 불행이 닥쳐온 시기는 그동안 비워졌던 총관 저택에 신임 총관이 임관하면서부터였다.
그곳은 수년 전 지드가 경호대장이란 직위를 처음 얻었던 곳으로서 원래 아카시안과 세 남매들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였다.
총관의 이름은 막시무스란 자로서 팔라카스 제국의 황족 출신으로서 황제 게라쿠스의 이복동생쯤 되는 자였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으로서 아직 독신이었는데 보스 기질이 있어 주변에는 상당한 고수들이 경호를 한다고 그랬다.
제국에서 잘나갔던 그가 이런 시골구석의 조그만 지방 총관으로 발령받고 쫓겨 나오다시피 한 이유는 개망나니 같은 행실 때문이었다.
황제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죽이 맞아서 온갖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 왔던 그는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악행은 주로 여자와 관련이 많았는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황권을 배경으로 대신들과 장교 심지어 수하들의 부인들을 납치하거나 강제로 겁탈을 하여 자신의 욕정을 마음껏 채우는 등, 정말이지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인간 밑바닥의 짓을 하곤 했다.
심지어는 원로원 의장의 딸마저 그의 희생물이 되었으니 이는 결코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제아무리 황권이 강하고 원로원 세력이 약화되었다지만 이는 제국의 역사상 가장 불미스러운 사건으로서 여론은 막시무스의 그 추잡한 짓거리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황제 게라쿠스가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는 막시무스를 잠시 동안 머나먼 지방에 피신시킴으로써 이 일을 무마하려 했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막시무스는 수하들을 이끌고 이 지방에 총관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그의 더러운 짓거리는 여기서도 계속되고 말았다.
그가 담당하는 마을은 총 일곱 개 마을로서 모두 합치면 그 인구가 제법 소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세금을 대폭 올려 받는다면 제법 짭짤한 수입이 될 테고 훗날 제국의 수도로 다시 귀환할 때 아주 적절한 자금이 될 것이다.
만일 세금을 내지 못한다면 그 집의 딸들이나 심지어 젊은 아내들을 취할 수 있었으니, 그는 처음부터 총관으로 배정받자마자 이미 머릿속에 다 그려 놓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터무니없이 높아진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순박한 여인네들의 그와 수하들의 성노리개가 되어 왔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그 후 일 년이란 지옥과 같은 세월이 흘렀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막시무스와 같은 자가 극성을 부릴 때 하늘 역시 도와주지 않고 가뭄을 들게 하였으니 주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야만 했다.
어느 날이었다. 막시무스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전 주민들에게 공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을 접한 사람들은 치를 떨고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각 마을에 내려온 공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관할 지역 주민들에게 고한다. 오늘 이후 결혼하는 그 모든 남자들은 아내와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반드시 총관인 내게 먼저 보내야 할 것이다.
나 막시무스는 위대한 황족으로서 그대들의 아내에게 성스러운 축복을 내리고자 함이니 그리 알아라.
단 이 규정을 어길 시에는 그 남편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가 참형을 면치 못하리라.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자가 분명해 보였다. 신부의 첫날밤마저 뺏으려 하는 그의 욕정은 한도 끝도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그의 공고에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을 보였지만 몇 집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뒤에는 할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라야만 했다.
지드의 막내 동생 역시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아내를 막시무스의 하룻밤 욕정 상대로 먼저 신고를 해야 하였으니 이만저만 기가 막힌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극은 그곳으로부터 돌아온 비극적인 소식이었다.
원래 시골 출신들의 여인들이 순수한 경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더욱 강했는지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목을 매달아 자살을 했던 것이다.
이에 막내는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 자신의 보금자리일 뻔했던 새 집 방구석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다고 그랬다.
두 형님들 중 한 분은 독신을 고집했고 다른 형은 상처를 했기에, 이번 막내의 결혼에 모두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런 비극에 발생했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지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막내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자체가 너무도 슬펐다. 아니 형으로서 스스로가 밉기까지 했었다.
만일 옆에 있었다면 그런 일까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때 지드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막내 집이 어디 있죠?”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가도 소용없을 거야.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으니 말이야.”
“가르쳐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휘잉.
언덕 아래 조그만 목조 건물로 내려가는 지드. 찬바람이 답답한 심장을 관통이라도 할 듯 강하게 불어 왔지만 그의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헤라. 그녀 역시 매우 착잡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지드가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이 조금은 불안해 보였다.
원래 순서대로라면 먼저 동생과 그의 아내에 대한 복수극을 펼친 다음에야 여길 찾는 것이 맞을진대 말이다.
아무튼 헤라는 이미 분노에 휩싸인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지드에게 감히 뭐라 말도 걸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집 앞에 도착한 지드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탁탁!
“아리우스!”
“…….”
“나 셋째 형이다. 문 좀 열어 봐라. 할 말이 있으니까.”
“…….”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내다 좀 봐라.”
“…….”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지드는 주먹으로 현관문을 그냥 쳐 버렸다.
우지직!
헤라가 깜짝 놀랐다.
“헉!”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문을 부숴 버리다니. 그만큼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았다.
맥없이 떨어져 나간 문짝 뒤에는 놀랍게도 아리우스가 힘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형…….”
“아리우스.”
“이게 무슨 짓이야. 슬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임마.”
지드는 그의 안색을 살필 시간조차 없이 다짜고짜 손목을 잡고 현관 바깥마당으로 데리고 나왔다.
“헉! 왜, 왜 이래!”
“갈 데가 있으니까, 조용히 따라와.”
얼떨결에 나와 버린 동생은 형이 왜 이러는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형.”
“당장 가자.”
“가자니? 어디를.”
“형이 대신 갚아 줄 테니까 그냥 따라와.”
“갚아 주기는 뭘 갚아 줘.”
“너와 네 아내를 그 꼴로 만든 새끼가 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란 말이다.”
“어, 어? 지,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어디기는 어디야? 총관 저택이지.”
순간 아리우스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그가 형이 잡은 손을 강하게 뿌리치려 했지만 마치 천금에 눌린 듯 꼼짝을 못했다.
“형! 미쳤어!”
“그래 나 미쳤다! 오늘 줄초상 낼 새끼들 때문에 벌써부터 흥분해서 돌아 버리겠다!”
아리우스는 셋째 형이 자신이 당한 일을 듣고는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설마 이렇게 실성할 줄은 몰랐던가.
“정신 차려! 거기 갔다가는 우리 모두 죽는단 말이야!”
“죽기는 뭘 죽어! 자, 당장 가자고!”
“싫어!”
아리우스가 아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가지 않으려 하자 그때 헤라가 그의 옆으로 가서 한마디 했다.
“형은 실성하지 않았으니까 믿고 따라가 보세요.”
아리우스는 헤라를 멀뚱히 바라보더니만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저는 국왕 폐하의 개인 비서입니다.”
“국왕 폐하라니요.”
아리우스는 형뿐만 아니라 같이 동행한 이 여인 또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이걸 어쩌지. 오랜만에 나타난 형이 이젠 아예 실성을 해 버렸으니.’
***
얼마 후.
쾅! 쾅! 쾅! 쾅!
총관 저택의 문이 부수어질 듯 누군가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저택의 마당 안에는 제각각 독특한 군장 차림의 무사들이 수십여 명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험상궂고 예사롭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 중 누가 짜증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저렇게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거야?”
그러자 독사처럼 생긴 사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총관님한테 아내의 순정을 뺏긴 농사꾼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가끔 저렇듯 문이 부서질 정도로 화를 내며 오긴 오지.”
“그래도 자존심들은 있다 이거지?”
“자네 같으면 눈깔 돌아 버리지 않겠나. 결혼 직전의 신부가 누군가의 하룻밤 성 노리개로 전락해 버린다면 말이야.”
“그야 미쳐 버리겠지. 따지고 보면 총관님이 너무하긴 하시는군.”
“그래도 가끔은 우리도 즐기라고 파릇한 신부들을 남겨 주지 않는가. 후후.”
“하기야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야 손해 볼 거 없지. 그렇지 않아도 도시 계집들의 그 당돌함에 지긋지긋해지려 했는데 여기 와서 쫀득한 처녀들을 맛볼 수 있으니 오히려 총관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
“지당하신 말씀.”
“하하.”
“이런 시골 구석도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는 셈이지.”
그때 다시 들려오는 굉음.
쾅! 쾅!
결국 무사들 중 누군가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이런 썅! 대체 어떤 새끼가 겁도 없이!”
“아예 요절을 내 버리라고.”
그러자 대문 바깥쪽으로부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헤. 총관님께 진상 드릴 게 있어서요.”
“진상이라니?”
“일단 문부터 열어 주시죠.”
“혹시 뭘 바치러 온 거냐?”
“아시면서요.”
“알다니?”
“총관님이 좋아하시는 거요. 헤헤.”
“그렇다면 혹시 여자…….”
“헤헤.”
덜컹!
당장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사내와 여자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무사는 당장 그들을 안으로 들게 하였다. 그러고는 앞뜰에 있던 무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가 여자를 바치겠다고 여길 찾아온 놈은 처음 보겠네.”
“그러게 말일세.”
그들 중 하나가 여자와 함께 온 사내에게 물었다.
“그 계집은 너와 무슨 관계냐.”
“제 아내입니다. 헤헤.”
“아내라고!”
무사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보통 강제로 끌려오는 여인들은 눈물 콧물 다 짜면서 거의 반 실신에 이르고, 문밖에서는 남편이 반미치광이가 되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해까지 하질 않던가.
대체 저자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니 말이다.
“진짜 아내를 바치러 왔단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혹시 미친놈 아냐?”
“저 미치지 않았습니다.”
“…….”
무사들은 그만 할 말을 잊은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총관님은 어디 계시죠?”
“뭐야, 저놈?”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쫓아 버릴까?”
“여자는 남겨 두고 그리 하지.”
때마침 누군가 건물의 현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이리 소란스럽나!”
키가 무척 크고 비쩍 마른 자였다. 얼굴은 북어 대가리에 매부리코, 그리고 독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황금색 문양의 토가 차림으로 보아서 총관이 분명해 보였다.
무사들은 저마다 예의를 갖추었다. 그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재빨리 나서서 보고했다.
“이상한 녀석이 찾아왔습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네. 그러니까 아내를 바치겠다고 막무가내로 총관을 뵙기를 원하더군요.”
“아내를!”
순간 총관이 의아한 눈빛을 내보였다. 그때 한 무사가 사내와 여인을 데리고 그의 앞으로 대령시켰다.
“이자들입니다.”
총관이 다소 희한한 동물들을 바라보듯 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아내는 이제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인다고 할까.
무엇보다도 이 마을에 부임한 지 일 년 만에 처음 보는 상당한 미인에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였다.
잠시 후 그가 남편에게 물었다.
“정말 네 아내를 나에게 바치려고 왔는가.”
“아, 예. 그렇고말고요. 헤헤!”
“별놈이군. 자진해서 오다니.”
남편은 여전히 굽실대며 실실거렸다.
“저 별놈 아닙니다요. 당연지사 제국의 황족이신 총관님께서 이런 오지에 오셨다면 마땅히 선물을 바쳐야죠. 하지만 저는 제 집이 가난한 이유로 그저 이렇게까지 약소한 성의밖에 드리지 못한 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어쨌든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남편은 지극히 순박하거나 그 반대로 뭘 바라고 여기 온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총관이 한번 슬쩍 떠보기로 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원하는 거라니요?”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보거라.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 아내를 바치겠다고 하는 놈은 없을 테니까.”
그제야 남편이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헤헤. 눈치도 빠르셔라.”
“역시 내게 볼일이 있어 왔군. 자 이젠 허심탄회하게 자네 속내를 말해 보게나.”
“뭐, 이미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만 이런 시골 촌놈이 원하는 것이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한자리 내려 주시면 그걸로 감지덕지해야죠.”
“한자리라.”
그제야 총관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정말요?”
“일단 네놈이 데려온 아내를 맛본 다음에 그 직책 수위를 결정하겠다.”
“그리 하시죠.”
“보아하니 자네 아내가 상당히 미인인데, 잠자리도 그리하는가?”
그러자 남편이 다소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뭐라?”
“한 가지 문제가 있긴 있습니다.”
“문제라니?”
“좀 까다로운 성격이라서.”
“까다롭다니? 누가 말인가.”
“제 아내가요……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한 가지 특이한 취향이 있습니다.”
“취향이라니.”
총관은 남편이 갑자기 뭔 얘기를 하나 하고 가는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가졌다.
남편은 옆에 있던 아내를 바라보다가 다시 총관에게 시선을 향했고 마치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 제 아내가 눈이 높아서 정말이지 남자다운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검술에 능한 그야말로 사내 중에 사내 말입니다요. 헤헤.”
총관은 다소 어이없는 듯 실소를 흘렸지만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거라면 내가 적격이 아니더냐? 보다시피 내 검술 실력은 제국에서도 정평이 나 있거든.”
“그렇게 말해 놓고 막상 살펴보면 거짓말만 늘어놓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순간 총관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거짓말이라니, 지금 내게 한 소리냐!”
“아이고! 무슨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감히 총관을 빗대어 그런 망발을 하겠습니까. 다만 제 아내 취향 얘기를 하다 보니 그냥 예를 든 거죠. 이왕 말 나왔으니까 말하는데 보다시피 아내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몸매 역시 끝내 주죠. 심지어 관능적인데다가 욕정이 장난이 아니기에 밤일 또한 최고입니다. 헤헤.”
이에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한 태도를 보여 왔던 젊은 아내의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물론 이들은 부부로 위장한 지드와 헤라였다.
헤라는 그저 지드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방금 전 했던 말 내용은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너무 지나치다 싶었다.
하지만 지드의 실실거림은 거기서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제 아내는 그 독특한 취향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를 남편으로 맡고 싶다고 늘 얘기해 왔었죠. 그러던 중 저는 이 지방을 지나가다 그런 소문을 듣고는 당장 달려갔었죠.”
총관이 처음으로 궁금증을 가지고 물었다.
“그건 왜지?”
“저도 검사 출신이거든요. 헤헤.”
“네가 말인가?”
“겉보기에는 이렇지만 그래도 제가 조금 하거든요.”
순간 총관을 비롯한 수하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꼴에 검사라네.”
“완전 비렁뱅이처럼 보이는데. 아니, 간신 녀석이랄까? 저 손 비비며 말하는 것 좀 보게나.”
총관이 조용히 시키고 다시 물었다.
“계속해 봐라.”
“아내는 제 실력을 직접 살펴보고는 놀랍게도 결혼을 승낙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지방에서 당신처럼 검술 실력이 강한 자는 보지 못했다고요.”
“오호라! 네 실력도 제법 쓸 만하나 보군.”
“단, 그녀는 조건을 하나 내세웠습니다.”
“조건이라니.”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가겠다고요.”
그 대목에서 총관의 눈빛이 번뜩였다.
“뭐라!”
“물론 현 남편인 저와 겨루어서 이겨야만 하는 그런 조건입니다. 사실 여기 온 것도 제가 아니라 아내가 억지로 끌고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내가 너와 대결을 벌이고 정식으로 네 아내를 데려오면 그만이겠구나.”
“정말이지 하늘보다 높으신 귀한 총관께서 굳이 저와 대결을 벌이지 않고 아내를 데려가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도통 아내가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요.”
“설마 내가 너 따위에 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요! 허나 아내는 자기 눈으로 실력을 직접 보아야만 인정을 한다 하니 정말이지 답답할 노릇이지요.”
그러자 총관이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당장 준비하라.”
지드는 깜짝 놀란 듯 사색이 되어 외쳤다.
“서, 설마 대결을!”
“네 아내가 그리 원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잖은가.”
“아이고! 아무리 그렇다고 미천한 저와 어찌 대결을 벌이려 하십니까.”
“내용을 듣고 보니 나 역시 당당히 대결을 겨루어 정식으로 저 여인을 얻고 싶구나.”
“그냥 가져가셔도 되는데요.”
“잔말 말고 당장 준비하라.”
“전 진짜 대결할 마음 없습니다.”
“시끄럽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인데, 네 아내가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니 당장 내 실력을 보여 주고 싶구나.”
지드는 사색이 되어 엄살을 부렸다.
“아이고! 난 이제 죽었다.”
“보아하니 검이 없는 모양인데 내 수하 것을 쓰도록 하라. 내가 진짜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네놈의 계집에게 당당히 보여 줄 것이다.”
“설마 대결 도중에 저를 죽이는 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총관이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때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아이고!”
그때 헤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엄살이나 부리고 약한 남자는 필요 없으니까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요. 아니 그것보다는 옷을 모두 벗겨서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하여 수모와 치욕을 주는 편이 훨씬 낫겠어요. 맞아요, 대결에서 패한 사람에게 그런 벌칙을 주는 게 어때요? 아마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호호!”
“…….”
“…….”
느닷없는 헤라의 제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총관이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만 말문을 열었다.
“고것 참 마음에 드는 계집이로군. 아주 흥미 있는 의견까지 내놓다니 말이야. 하하.”
이에 헤라 역시 다소 교만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 과찬의 말씀.”
그녀는 지드가 시킨 대로 말하면서도 마치 자연스럽게 교태를 부리는 듯, 스스로의 관능적인 연기에 놀라고 있었다.
‘나도 이런 면이 다 있었네? 후후!’
이번엔 지드가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할 차례였다.
“이런 여우같은 계집애가! 그래도 난 네 남편인데!”
“남편도 남편 나름이지. 힘도 못 쓰는 주제에 말이야.”
지드가 이번엔 총관에게 하소연했다.
“그, 그런 얘기는 없었잖아요. 저는 단지 한자리 얻기 위해서 아내마저 바치려고 하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답니까.”
총관의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어디 있긴 어디 있다고 그래. 여기 있지.”
“그래도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요.”
“아내를 바치겠다고 여기를 찾아온 네놈이 병신이지. 나를 원망 마라.”
“흑!”
“자! 이번 대결에서 승자는 미인을 얻는 것이고 지는 자는 그 벌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사람들이 모인 한복판에서 춤을 추는 거다. 하하, 알겠느냐?”
“세, 세상에!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런 짓 못합니다.”
순간 총관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그럼 여기서 죽을 테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자, 그만 입 다물고 마당 한복판으로 나오너라!”
휘잉.
잿빛 하늘로부터 하얀 물체가 너울너울 보였다. 공교롭게도 이 순간 올해 들어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던가. 바람마저 부니 은빛 조각들과 함께 제법 찬바람이 얼굴에 차갑게 와 닿았다.
마당 한복판에 총관 마주 대하고 서 있는 지드는 손을 뻗어 눈을 받았으니 금방 녹아 버려 작은 물방울로 변하고 말았다.
원래 천진한 눈빛을 지녔던 그는 오늘따라 사악한 기운을 얼굴에 드리웠으니, 바로 이 저택에 있는 총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지드는 다시 한 번 엄살을 부리며 외쳤다.
“아이고!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 옷 벗고 춤추기라도 한다면 얼어 뒈질 텐데, 제발 좀 대결은 하지 않기를 다시 한 번 빕니다요.”
그런 그의 애원에 총관과 수하들은 너무도 재미있다는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하하! 사내가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 자, 어서 검을 들어 먼저 공격하라.”
총관의 무사들 역시 상황이 흥미 있게 돌아가는 것 같자 저마다 기대에 찬 표정들로 대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지사 총관의 승리로 사내의 벌거벗고 춤추는 모습이 벌써부터 상상이 갔던가.
“괜찮은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흐흐!”
“그나저나 저놈 말일세. 아내도 뺏기고 그것도 모자라 옷까지 벗고 동네를 돌아야 한다니, 정말 남자로서 당할 수 있는 최대의 치욕과 수모를 경험할 텐데! 어찌 본다면 가엽기도 하군그래.”
“다 자기 팔자지 뭐.”
바로 그때였다.
그제까지 실실거리며 최대한 낮은 자세로 비굴하게 굴었던 지드가 갑자기 진중한 자세로 돌변하더니만 총관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정말 대결에서 패한 사람이 그 짓거리를 하는 거 맞소?”
다소 달라진 모습에 총관이 움찔거렸지만 즉각 대답했다.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자 지드가 주변을 둘러싼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들었소? 당신네들 총관이 분명 약속을 한 것을 말이외다! 만일 지키지 않을 시에는 목숨이 날아갈 수 있소이다. 뿐만 아니라 그대들 역시 괜히 참견했다가는 큰일 당할 테니 아예 나서지도 마시오.”
“…….”
“…….”
다시 한 번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자 남편이란 작자가 너무나 큰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정신이 나갔으려니 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곧이어 지드가 검을 들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자 총관 막시무스 역시 검을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
저벅저벅―
헌데 이게 웬일인가.
지면을 딛는 소리부터 다르지 않던가. 벌써 눈이 하얗게 쌓인 앞마당이건만 총관은 여느 걸음과 마찬가지로 그저 평범한 발자국을 남겼지만, 지드가 지나간 자리는 푹푹 패는 동시에 뭔가 열기가 확 달아오르며 김이 올라오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엄청난 포스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총관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뭐야, 이 자식…….”
그의 중얼거림에 지드가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개새끼.”
“지금 뭐라 해나!”
“흐흐.”
“뭐야! 이 새끼가 실성을 했나!”
“먼저 덤벼라.”
“엥? 진짜 미쳤군.”
총관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검을 들어 선제공격을 했다.
“그냥 뒈져 버려라!”
홱!
놀랍게도 지드는 아예 검을 지면에 내려놓은 채 다른 한 손을 들어 그의 칼날을 두 손가락을 가볍게 잡았다.
탁!
“헉! 맨손으로 검을 잡다니―!”
“어때, 놀랐지? 후후!”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렇게도 약하고 비굴해 보였던 여인의 남편이란 자가 갑자기 돌변하여 초고수가 되었던가.
뚝!
단지 두 손가락만으로 두툼한 강철 대검을 분질러 버렸으니 말이다.
“헉! 검이 부러졌다.”
이에 총관과 무사들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경계를 했다.
“이제 보니 뭔가 수상한데?”
타다닥!
총관이 낌새를 느끼고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지드의 검이 저절로 날아가더니만 그의 목덜미에 바짝 대었으니 말이다.
“아.”
총관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력과 무공이 절묘하게 융합된 강력한 검술이 위협을 하니, 그가 제아무리 고수 반열에 이른 자라 하더라도 이미 기본 급수에서부터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었다.
“보통 검사가 아니다!”
“엄청난 자가 분명해.”
그제야 알아봤던가.
무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위협을 당하자 처음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몇몇 경솔한 자들이 지드의 뒤를 노리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하지만 지드의 왼편에 꽂혀 있던 단검이 절로 쑥 빠지더니만 허공을 가로질러 그들의 목을 그었다.
파파팟!
“컥!”
“칵!”
털썩!
데굴데굴.
하얀 눈밭으로 두 개의 수급이 떨어지더니만 붉은 피가 너무도 빨갛게 스며들었다.
한순간에 저택은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리고 말았던가!
검 하나는 저절로 공중에 떠서 총관의 목을 긋기 직전에 있었고 단검은 주변을 빙빙 돌아다니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자들은 목을 댕강 자를 기세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놈들이 있다면 목 없는 시체가 될 것이다!”
무사들은 자신들이 가히 상상조차 못할 엄청난 존재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이번엔 지드가 헤라에게 지시했다.
“문밖에 서 있는 아리우스를 데려오렴.”
“네, 네, 알았어요.”
헤라는 냅다 대문 밖으로 나가더니만 곧이어 어리둥절해하는 아리우스를 데리고 왔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상태였고 셋째 형이 당당하게 서 있는 자리로 마지못해 왔다.
“형…….”
지드가 총관과 동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 새끼가 네 아내를 겁탈하고 자살하게 만든 거 맞지?”
“…….”
막내는 여전히 뭐가 뭔지 감히 얼굴조차 들지 못했고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지드는 그런 그의 모습을 이해한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지드가 이번엔 헤라에게 지시했다.
“헤라, 너 말이야. 아리우스와 함께 모든 주민들을 광장에 모이라고 해.”
“주민들을요?”
“좋은 구경거리가 있을 테니 잔뜩 기대들 하라고 해라.”
“아, 네.”
헤라는 지드의 말뜻을 알 수가 있었다.
아마도 대결 직전에 약속한 것을 이행하려는 것 같았다.
“꾸물대지 말고 당장!”
“아, 알겠어요.”
헤라는 아리우스의 손목을 잡고는 다시 문을 나섰다. 잠시 후 지드가 싸늘한 눈빛과 냉기가 풀풀 넘치는 얼굴로 총관과 그의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총관, 너를 시작으로 한 새끼도 빠짐없이 다들 옷 벗어!”
“…….”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지드는 그럴 틈마저 주지 않았다.
“셋 셀 동안 벗지 않는다면 다들 땅바닥하고 입을 맞춰야 할 거야. 뭔 소린지 알지? 하나, 둘, 셋!”
파파팟!
“컥!”
“칵!”
털썩!
또다시 두 개의 수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악마의 화신을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지드는 열이 더욱 올랐는지 총관에게 다가가더니만 다짜고짜 그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짝!
“억!”
더구나 발로 마구 짓밟기까지 했다.
퍽! 퍽!
“내가 옷 벗으라고 했지!”
퍽! 퍽!
“악! 살려 주세요!”
“닥치고, 그냥 말 들으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얼굴에 피가 낭자하고 피 떡이 되어서야 웃옷부터 훌러덩 벗기 시작하는 총관, 지드가 나마지 수하들에게도 소리쳤다.
“네놈들은 귀가 처먹었냐! 다들 옷 벗으라니까!”
무사들 역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옷 벗는 모습을 지켜보는 지드는 이내 싱글벙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겨울에 좋은 구경거리라! 주민들이 좋아하겠군.”
***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갈 황혼 무렵이었다.
마을 광장에는 헤라와 아리우스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대체 뭔 일인가 하고 모두 나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드의 부모와 형들도 보였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가 막내에게 다시 물었다.
“아리우스! 형은 어디 있니?”
그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역시 지드부터 생각이 났던 것이다. 아리우스가 얼떨결에 말했다.
“저, 저기 총관 저택에…….”
그러자 어머니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아버지와 큰 형들 역시 총관이란 이름에 사시나무 떨 듯했으니 분명 뭔 일이 발생하고 말았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가장이던가.
그가 막내에게 다가와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소상히 말해 보렴.”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형이 그냥 여기서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기다리라고 지시했을 뿐이에요.”
아버지는 흥분해서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그 녀석이 미치지 않고서야 거기에 왜 간 거야.”
그때 어머니는 눈밭에 털썩 주저앉으며 망연자실했다.
“아아, 이를 어쩌나. 흑!”
주민들의 반응들도 이들 가족과 다를 바 없었다. 개중에는 지드에 대해 욕까지 하는 자들로 있었으니.
“제길. 언제가 그 하류 잡배가 일 낼 줄 알았어! 괜히 고향에 돌아와서는 일까지 내다니!”
“대체 그놈은 우리 마을과 무슨 원수가 졌기에 툭 하면 사고를 일으키고 그러지.”
“이번엔 사고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 목숨마저 위협할 정도로 큰일을 저지른 것 같은데?”
“그냥 돌아오지 말고 차라리 어디 가서 객사(客死)나 해 버리지.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순간 아버지가 그들에게 다가가 분노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뭐라 말했어! 이 사람들이 말이면 단 줄 알아! 남의 아들한테 객사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심하긴 뭐가 심해! 어디서 개망나니 같은 자식 낳아 놓고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뭐, 뭐라! 우리 지드가 출세는 못했을지언정 누구한테 해를 끼친 적이 있었더냐! 이놈들아!”
“그 자식이 수년 전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진짜 검사인 척 사기 친 것을 여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웬만하면 그만 열 올리지? 여하튼 이번엔 총관 저택까지 찾아갔다면 이는 이만저만 큰일이 아닐 텐데…… 게다가 우리더러 마을 광장에 모이라고까지 했으니 십중팔구 실성했음이 분명할 거여.”
“…….”
아버지는 더 이상 항변할 생각조차 못하고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다리가 휘청거려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헤라가 그의 팔을 잡고는 고정을 시켜 주더니 주민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안심하셔도 되요. 아마도 지드 님이 총관하고 그 수하들을 데리고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할 테니까요.”
주민들이 이번엔 헤라를 뭐라 했다.
“넌 무어라고 헛소리야!”
“지금 상황에 장난하자는 건가?”
그때 헤라가 마을 어귀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외쳤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그녀의 외침에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집중이 되었다.
그러고는 그들 모두의 동공이 팽창이 되었으니 아마도 이상한 광경에 놀란 모양들이었다.
“아악! 그만 때리세요! 아프잖아요.”
“에취! 추워라! 이, 이게 무슨 망신이냐.”
“죽으면 죽었지, 이 짓거리 도저히 못하겠어!”
팍!
“아악!”
털퍼덕!
벌거벗은 사내들 한 무리가 두 팔로 몸을 웅크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누군가 채찍을 들고는 불평하는 자들을 향해 가차 없이 날려 버리니 이내 살이 찢어지고 피를 튀기며 하얀 눈밭 위에 고꾸라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먼발치서나마 그가 지드임을 알고는 그만 경악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게다가 벌거벗은 사내들은 총관과 그 수하들이 아니던가.
“세, 세상에! 저게 뭔 일이여!”
“아아. 어떻게 저런 일이.”
곧이어 지드는 그들을 데리고 주민들이 모여 있는 광장 한가운데까지 왔다.
그는 예정대로 총관과 그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자! 지금부터 다들 춤을 춘다! 실시.”
“…….”
총관과 수하들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이지 지금만으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는 마당에 주민들 앞에서 춤까지 추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죽을 용기가 있거나 자존심이 있는 자들도 아니었다. 애초 그런 자들이라면 힘없는 여자를 대상으로 죄악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잔인한 습성이 물든 자들로서 약자는 한없이 짓밟고, 자기 욕망을 위해 수많은 여자들을 겁탈하고 죽음으로 내몰게 한 원흉들이 아닌가.
이제 그들은 그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어 처절하고 비참한 맛을 깨달아야 할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총관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지드의 발목을 잡아 애원하다시피 했다.
“제, 제발 그것만큼은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흑. 수하들과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라니,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잔뜩 굳어진 지드의 인상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네놈이 저질렀던 악행들이 이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란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압니다! 알고말고요. 흑.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선처를 베풀어 주세요.”
어찌 보면 참으로 낯 뜨거운 장면이었다.
사십 대 중반의 총관이 알몸 상태에서 두 손을 비벼 가며 비는 모습이랄까.
하지만 지드의 분노는 이제부터였으니 정말이지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독종을 만난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개새끼가!”
짝!
뺨따귀를 얻어맞고는 뒤로 나자빠지는 총관.
“악!”
“반성은 하지 않고 살 궁리만을 하다니. 입 다물고 당장 춰! 나머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다시 채찍을 들어 가축들 다루듯 벌거벗은 사내들을 향해 가차 없이 휘둘렀다.
짝!
“악! 춤출 테니 때리지 마시오!”
짝!
“개소리 말고 당장 행동으로 보여라.”
짝!
“아악!”
그제야 총관과 수하들은 엉거주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드는 계속해서 채찍을 날렸다.
“고것밖에 못하겠나!”
홱!
짝!
“아아!”
지드는 막내의 아내를 겁탈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에 아직도 정신이 나간 듯 악마의 심정으로 저들을 대하고 있었다.
주민들 중에는 가족들도 보고 있었건만 그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들은 대체 저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멍한 상태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들이 아는 지드가 저 무시무시한 사내가 맞는지부터 의심이 가질 않았을까 싶었다.
짝!
“아악!”
짝!
“춤추는데 왜 때립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 좀 더 격렬하게 추라고! 네놈들이 짓밟은 여인들의 원혼이 풀어지도록 말이다!”
짝!
“아악!”
“고것밖에 못하겠냐!”
형벌은 꽤나 오래 지속이 되었다. 저녁부터 시작해서 늦은 밤이 되도록 벌써 수시간이 지났건만 벌거벗은 자들의 춤은 계속되었다.
주민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간 자들도 있었지만 자녀와 아내를 빼앗긴 몇몇 사내들은 저들의 고통스런 몸짓 하나하나를 보며 복수심을 달래려고 했다.
휘잉.
시간이 갈수록 바람이 매서워졌고, 추위가 극심하자 사내들은 춤을 추다가 쓰러져 의식을 잃고 동사(同死)하기 시작했다.
털썩.
“아아.”
원래 검술과 체력으로 다져진 그들이지만 겨울밤에 벌거벗고 몇 시간째 춤을 춘다는 것은 형벌 중에서도 아주 지독한 형벌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새벽녘이 다가왔다. 수하들은 모두 쓰러져 차가운 시신들로 변했고 총관만이 아직도 헐떡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 춤추는 것을 포기하고는 제자리에 섰다.
그러자 지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죽고 싶나!”
총관이 힘없이 말했다.
“처음부터 죽일 심산이 아니었소?”
지드가 사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그랬지. 후후.”
“그나마 한 줄기 살 희망이 있기에 이런 치욕과 수모를 무릅쓰고 하란 대로 했건만…….”
“희망을 가질 자격이나 있었나.”
총관은 허공을 응시하며 한숨을 지었다.
“아아, 이제야 내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겠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정말 내 자신이 밉소.”
“그럼 죽지 그래.”
“자, 나를 죽여 주시오.”
총관이 얼굴을 내밀자 지드가 그에게 다가와 단검을 내밀어 그의 목에다 대었다.
“그나마 죽기 전에 잘못을 깨달은 것 같으니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단검을 그의 목에다 깊이 쑤셔 박았다.
푹!
“욱!”
털썩.
지드는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뚱이를 내려다보며 뭐라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렀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그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허탈한 듯 한숨을 지었다.
***
며칠 후.
휘잉.
들판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마을 어귀로부터 마차 대열과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아주 긴 행렬이 끝없는 벌판을 가로질렀다.
얼핏 봐서 수천 명은 되어 보였던가. 그들은 총관 막시무스의 관할 구역의 일곱 개 마을 주민들로서 본의 아니게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얼마 전 지드가 총관과 그 수하들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십중팔구 제국의 복수가 이어질 거라 생각하니 저마다 짐을 싸들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드가 신생 왕국의 국왕이란 사실을 알고는 모두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이제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마차의 맨 선두에 지드와 그의 가족들이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아직도 꿈을 꾸는 듯 현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그의 말대로 왕국에 도착하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믿을 텐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두에 말을 타고 앞장서서 가는 지드 옆에 막내 아리우스가 다가왔다.
“형.”
“아리우스.”
“지난번 일 고맙단 말을 이제야 하네.”
지드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고맙기는 뭘.”
“아무튼.”
“그런다고 네 아내가 살아 돌아오지도 않잖니.”
“아마 저세상에서도 한이 풀렸을 거야.”
“…….”
잠시 침묵이 흘렀고 동생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형, 진짜 국왕 맞아?”
그러자 지드가 피식 웃었다.
“그게 궁금해서 온 거로군.”
“솔직히 가족들 모두가 궁금해해.”
“나 국왕 맞으니까 안심해라. 이번엔 사기 치는 거 아니니까.”
아리우스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누가 사기래.”
“하하. 녀석! 농담이다.”
“그나저나 형의 다스리는 왕국 이름은 뭐야?”
“…….”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만 지드,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 우!”
“정하지 못했다니?”
“이거 국왕인 내가 국호를 정해야 하는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야.”
아리우스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상한 국왕이네. 하하.”
한편 지드는 아리우스가 처음으로 미소를 머금자 그게 더욱 좋아 보였다.
“녀석 이제야 웃는군.”
“아무튼 기대가 된다.”
그때 지드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아리우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저기 네 아내라면 내게도 소중한 사람인데 혹시 이름이 뭔지 말해 주겠니.”
뜻밖의 질문에 아리우스가 어리둥절했다.
“이름이라고?”
“응.”
“피체.”
“많이 사랑했니?”
“…….”
동생은 형이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나 하고 의아했다. 지드가 다시 말했다.
“내가 당연한 질문을 한 것 같군.”
“그런데 갑자기 그런 왜 물어.”
“흠…… 혹시 왕국 이름에 어울릴까 해서.”
아리우스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뭐라고?”
“좋아, 국호는 피체 왕국이다.”
“형!”
“너만 괜찮다면 결정하겠다.”
“나야 상관없지만 국호를 그렇게 즉흥적으로 짓는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지!”
“…….”
지드가 다시 물었다.
“혹시 이름에 무슨 의미 같은 거 없니?”
“있어. 장인께서 갓 태어났을 때 아내의 눈이 혜성처럼 빛이 난다고 해서 피체라고 지었대. 옛 고어로 혜성이란 의미를 그대로 따서.”
“신생 왕국에 어울리는 이름이 확실하군.”
“그,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나라의 이름을.”
“어쨌든 결정 났다. 너한테 선물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자.”
“형.”
지드는 그동안 아내를 잃고 마음 아파했을 동생의 손을 꽉 잡아 주며 말했다.
“하늘로 간 제수씨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
아리우스 역시 형의 따뜻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였다.
“꼭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흐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