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간 지역 숲 속 공터에는 대략 수백여 명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근처 바위 위에는 지휘관들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자가 늦가을의 햇볕을 쬐고 있었다.
헌데 30대 초반의 사내와 이제 겨우 20살을 갓 넘긴 앳된 청년과 뭔가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었다.
“왜 굳이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이런 데 있는 거요?”
“속이다니.”
“무슨 이유인지 어둠의 포스 꽉꽉 누르며 아닌 척하지만 내 추측으론 당신, 중부 대륙으로부터 파견된 것이 분명하오.”
30대 사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기까지 했다.
“풋.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국왕이 좀 예뻐해 준다고 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진짜 혼난다.”
그러자 청년이 그의 눈빛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며 말했다.
“그렇게 화를 내니 흑검술에 단련된 느낌이 드는군요. 후후.”
“흑검술이라니.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흑검사라도 되는 줄 아냐.”
“거참 말 한번 잘했소. 내가 보기에 당신은 흑검사가 확실히 맞소.”
“…….”
청년의 말에 사내는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둘은 에르가니아가 대장이 이끄는 원정군 제3조 소속 부대장들인 카르발디와 아라퀘스로서 원정 임무를 띠고 왕국을 출발한 이후부터 줄곧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카르발디는 한참 동생뻘인 아라퀘스 녀석과 같은 직급이 되었다는 자체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건만 이제는 자신의 정체마저 눈치를 차리고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이만저만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대체 이놈의 자식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아예 확신을 하고 달려드니 말이다.
“이제 정체를 드러내시죠? 후후.”
카르발디가 불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지금 나와 장난하잔 거야!”
“장난 아니오.”
“지드 그 작자와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까짓 근위대장 한번 시켜 줬다고 오만불손한 모양인데 솔직히 지금 내 심정은 말이야 너 같은 애송이하고 말씨름한다는 자체부터 한심하게 느껴진단 말이다.”
“…….”
그러자 갑자기 아라퀘스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라퀘스가 진중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방금 전 국왕 폐하를 작자라고 했소!”
“갑자기 그 표정은 뭐야.”
카르발디는 뭔가 이상한 듯 이번엔 에르가니아의 얼굴을 살폈다.
“저 자식 왜 그러는 거지.”
에르가니아 역시 다소 한심한 눈빛으로 고개마저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은 여전히 국왕 폐하를 하찮은 비렁뱅이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군요. 그리 함부로 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까요.”
순간 카르발디가 아차 하며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그제야 느꼈던가.
“웁!”
국왕을 작자로 표현했다면 그건 엄연히 왕에 대한 모욕죄로 중형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카르발디는 다소 굳어진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듯 실실 웃기까지 했다.
“하하. 그냥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데 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나. 나 참, 이거 무서워서 제대로 얘기도 못하는군.”
아라퀘스가 근엄한 말투로 꾸짖듯 말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이오. 내 지휘가 비록 3조에 속한 부대장 급이라지만 국왕 폐하를 보필해야 할 근위대장직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라오.”
카르발디는 녀석에게 완전히 약점을 잡힌 꼴이 되어 내심 더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은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잖아.”
“그 말 기억해 주겠소.”
“거참, 빡빡하게 구네. 나 참 더러워서…….”
“지금 뭐라 말했소.”
“그걸 또 들었냐? 혼자 한 말인데, 귀는 또 밝아 가지고.”
“…….”
언제나 그렇듯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고요함이 일정 시간 유지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이번엔 에르가니아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아라퀘스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이유로 카르발디가 흑검사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는 거죠?”
그가 당당히 대답했다.
“그냥 압니다.”
“그냥 알다니요.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 카르발디는 흑검사일 리가 절대 없어요. 지난 수년 동안 제 용병단에서 부대장을 지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조짐을 보인 적이 없었거든요.”
“그거야 철저히 위장을 했거나 속인 거겠죠.”
“속이다니요!”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시죠.”
에르가니아가 눈길이 한쪽으로 쏠리자 카르발디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 이 자식! 진짜 생사람을 잡을 거냐? 난데없이 흑검사 타령이라니. 나 원 참, 어디서 이상한 자식이 나타나서는 사람 성가시게 하네.”
카르발디가 펄펄 뛰자 에르가니아 역시 그의 말에 동조를 한 듯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라퀘스를 나무랐다.
“괜한 추측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요.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그렇게 사람을 몰아붙인다면 난 상관의 자격으로 그대에게 그만 할 것을 명령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자 카르발디는 지원군을 얻은 것처럼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으며 아라퀘스에게 약 올리듯 말했다.
“들었지, 이 자식아? 헛소리 또 늘어놓았다가는 진짜 혼날 줄 알아라.”
하지만 아라퀘스는 기가 죽기는커녕 더욱 또렷한 눈빛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카르발디! 당신이 무슨 연유로 이런 남부 대륙에 평범한 검사로 위장을 해서 활동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볼 때에는 명색이 흑검사 제오 공격 실력자가 확실하오. 혹시라도 자신의 본분을 잊고 이런 데서 노닥거리며 쓸데없이 세월을 낭비하고 있다면 당장 돌아가시오. 제국에서는 흑검사 하나를 양성하는 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국고가 소비되는데 대체 그런 신분에 있는 자가 뭐 하는지…….”
카르발디의 낯빛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뭐라!”
“내 말이 틀렸소?”
그 대목에서만큼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헉! 이, 이 자식이 내가 오 공격자라는 것까지 아네?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아라퀘스는 그의 속마음을 읽었던가. 은근한 미소와 함께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어찌 당신의 정체를 그리 정확하게 꿰뚫어 불 수 있는지 속으로 무척 놀라고 있겠지요?”
“…….”
카르발디는 아예 할 말을 잊은 채 멍한 자세로 일관했다.
반면 아라퀘스는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만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할 상관이자 선배님들이기에 저부터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죠. 사실 제가 흑검사를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제가 흑검사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흑검사라니!”
“정말요!”
아라퀘스는 그들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무덤덤한 말투를 계속 이어 갔다.
“이제 제 나이가 스무 살인데 흑검사 출신이라니, 두 분들 무척 놀라셨겠죠? 하지만 제 아버님은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르셨지요. 어쨌거나 흑검사이셨던 제 아버님을 어렸을 때부터 옆에서 보아 온 내가 흑검사만이 지닌 고유의 어둠 포스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한때 흑검술 제육 공격까지 수련하다가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지요.”
그 대목에서 카르발디는 그만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완전 실성했군, 했어. 쯧쯧! 처음엔 진지한 말투에 진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갑자기 흑검술 제육 공격이라는 둥 미친 소리를 늘어놓다니, 그건 전 대륙을 걸쳐 단 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최상위 경지인데 자신이 그들 중 하나란 말이지. 살다 보니 별놈 인간을 다 보는군.’
흑검술 제6공격이라 함은 그의 말대로 일명 타미레온 급으로서 대륙을 통틀어서 단 세 명만이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저 젊은 놈이 과대망상증이나 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제 보니 너 미쳤지?”
“나요?”
“그럼 여기 그런 헛소리할 놈이 너밖에 더 있냐?”
“나 안 미쳤소.”
“미친 것 같은데.”
아라퀘스가 불끈했다.
“말조심하기 바라오! 내 나이는 어리지만 명색이 제국의 사관학교를 나온 사내대장부란 말이오. 한 번만 더 사람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가만있지 않겠소.”
제법 세게 나오자 카르발디는 재미있다는 듯 일부러 입술을 실룩이며 더욱 약을 올렸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물어보자. 대체 자네 아버지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어린 나이의 아들에게 흑검술 제육 공격술을 가르쳤냐. 하하하. 뻥을 쳐도 적당히 해야 재미라도 있는 법이란다.”
“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물론 그러시겠지. 그래, 좋다. 자네 아버님의 존함이라도 들어 봄세나.”
“아르카도 제국 13군단 소속 흑검사이셨소.”
“13군단이라……?”
“당신도 알 거요.”
카르발디는 즉각 감이 오지 않았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녀석의 말을 받아들이려 했다.
“가만있어 보자, 13군단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가끔은 너무나도 귀에 유명하고 익숙한 명칭을 면전 앞에서 대놓고 듣는다면 언뜻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있는 법.
지금 카르발디가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녀석의 말뜻을 알고는 그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과 함께 어깨까지 들썩였다.
“정말 말도 나오지 않는군. 그러니까 네놈이 그 위대한 영웅의 아들이라 그 말이지?”
“그렇소.”
“엥, 이 녀석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히 대답하네? 한 번만 더 묻자. 그러니까 네가 아독 그분의 아들이라는 거냐.”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뭐야! 진짜라고?”
“이젠 말하기도 귀찮소.”
“…….”
카르발디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뭐야, 저 녀석…….’
저렇게까지 우긴다면 진짜일 가능성이 있는 건데. 결국 카르발디는 진지한 자세로 심문하듯 본격적으로 물어보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곧이어 숲 속 한가운데로부터 경악과 감탄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야 말았다.
“세상에나, 오오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아래 공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저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뭔 소리여.”
“그러게. 완전 돼지 멱따는 소리잖아.”
그날 오후.
서산에 황혼이 물들 무렵 에르가니아는 다소 답답한 심정을 달래려고 사방이 확 트인 근처 언덕 위쪽으로 올라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일렁였다.
휘이잉!
계절적으로 겨울로 접어드는 다소 쌀쌀한 기후지만 지금은 한낮의 태양이 바위 면을 내리쬐고 있었으니 그런대로 상큼한 공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아.”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 그동안 자신의 용병 집단에서 부대장으로 지내 왔던 카르발디가 흑검사였다는 놀라운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또한 바보처럼 감쪽같이 속은 스스로의 순진함에 조금은 화까지 나려 했다.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지?”
에르가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또다시 스스로에게 자책을 했다.
사실 요즘 들어서 그녀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지난번 레온과의 대결에서 제대로 공격다운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패한 채 도망을 가야만 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무겁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자신이 살았던 대륙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레온과 같은 고수와 상대를 해 보니 난생 처음 세상이 넓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늘을 다시 한 번 멍하니 우러러 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 대륙에는 그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웅들이 제법 있는 것 같았다.
이곳 남부 대륙뿐만 아니라 중부 대륙, 그리고 북부 대륙에는 어마어마한 초고수들이 즐비하다고 그랬다.
더군다나 자신의 원정군 제3조에 포함된 부대장 아라퀘스란 청년이 중부 대륙의 위대한 영웅 아독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이만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끔 하프를 켜며 부르는 13군단의 행진곡 역시 그와 연관된 곡이지 않았던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실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우선 수백여 명을 이끄는 3조 대장의 역할은 그런대로 잘 수행할 수 있다지만 만에 하나 레온이나 테세우스와도 같은 막강 고수를 만난다면 그야말로 지난번처럼 패배를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비참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시조 무치께서는 그 옛날 암흑 세력을 상대로 가히 신(神)에 버금가는 능력으로 모두 소멸시켰다고 하는데, 그 후손인 자신은 이런 곳에 와서 그분의 위상을 먹칠하는 셈이니 말이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대륙의 위대한 영웅 시조의 고공검술을 계승받았다지만 어디까지나 독학으로 수련을 한 것이니만큼 반드시 한계가 있을 법했다.
“후.”
한숨을 쉬는 그녀. 고공검술의 한계가 있단 것은 시조께서 착용했다는 천공군장이 오늘날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군장에는 정령 셋이 깃들어져 있어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데다가, 다른 세계의 영험한 포스로 뭉쳐진 정수라 하니 필시 시조께서는 천하무적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잠시 후 그녀는 목에 걸린 조그만 뿔피리 같은 것을 풀어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
그것을 살펴보는 그녀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 보였으니 결코 범상치 않은 물건 같아 보였다.
그나마 남겨진 것은 이것이랄까. 내내 어두웠던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입에 살짝 갖다 대고 불어 보았다.
삐~삐
삐~ 삐이―
상당한 고음이 은은하게 들려왔으니 뿔피리가 확실한 듯했다.
마치 연주를 하듯 계속해서 불었는데 잠시 후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우 우!
우 우!
숲 속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피리의 연주에 맞추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에서 수십여 마리가 합창을 하는 것 같았다.
에르가니아는 그다지 놀라는 않은 표정으로 계속했고 이번에는 늑대가 아닌 다른 짐승의 울음소리도 간간히 섞이기 시작했다.
크르릉!
크르릉!
밤도 아닌 태양이 쨍쨍한 한낮에 짐승들이 단체로 합창을 한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신기한 일었다.
그때 에르가니아가 피리를 입에서 떼자 거짓말처럼 주변이 잠잠해졌다.
그녀는 다시 그 물건을 목에다 걸었다.
이곳에 올라올 때 그 무거운 얼굴에 비해서 화색이 밝아졌다고나 할까.
“믿을 건 이것밖에 없어.”
그녀는 뭐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진영 쪽으로 향했다.
시조께서 고공검술의 탁본하고 함께 유일하게 남겼던 사대병기들 중 하나가 바로 소환호각(召喚互角)이었다.
시조에게는 네 분의 수하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분들 역시 어둠의 세력에 맞선 전사들이었는데 각자 운명이 정해 놓은 병기들을 소유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대병기 중에는 소환호각을 비롯하여 무시무시한 용을 봉인시킨 흑룡검과 엄청난 위력의 신궁, 그리고 마법전서라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오늘날 남겨진 것은 동물들을 부릴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아주 조그만 병기였다.
에르가니아 고공검술을 수련하면서도 그 병기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저 목에 걸고만 다녔지만 지난번 레온과의 대결에서 패한 이후 마음이 달라졌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소환호각의 주인이었던 코코라는 여인은 암흑 세력과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전 대륙으로부터 무려 수십만 마리의 맹수들을 모아 엄청난 격전을 치르게 했다고 했다.
물론 그와 같은 소환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그날 저녁.
화르르.
탁탁.
근 천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각자 숙영 막사에서 잠에 든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지휘 막사 앞마당에는 대장 에르가니아와 부대장 겸 참모들인 카르발디와 아라퀘스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다소 심각한 것으로 보아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겉으로 보여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에르가니아의 원정대 제3조는 기나긴 겨울 동안 신생 왕국의 서쪽 산악 지방의 야만족과 부족민들을 설득하여 규합해야만 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곳은 예로부터 워낙 외지고 척박한 영토인데다가, 야만인들의 성격이 포악하여 자기들끼리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지금도 한창 세력 다툼을 벌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서쪽 일대를 평정하고 가능하면 평화 협정을 맺어서 추가 병력을 얻는 것이 임무이니 지휘관들로서는 이만저만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소 카랑카랑한 성격의 소유자 카르발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평 어린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으니.
“하필 우리 삼 조 정벌지가 산악 지형이 뭐란 말이지. 일 조는 동쪽 평원과 목초지를 맡았고 이 조는 남쪽 해안 지대와 인근 밀밭 지대인데 반해 여긴 야만족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쌈질로 유명한 곳이잖아.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건 차별이 분명해.”
그러자 아라퀘스가 듣다못해 한 소리 하고 말았다.
“차별이라니요! 각 조별 임무는 제비뽑기로 정해진 걸로 아는데요.”
“제비뽑기 좋아하시네. 일 조는 국왕의 최측근인 지노 대장과 옛 경호대원들이니 제일 편한 곳을 임무지로 정했겠고 이 조는 이리가시 용병대장이니 그 역시 영향력이 있는 자로서 해안 지대를 부여받았지만 우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들이니 마땅히 이런 험한 곳을 맡게 했겠지.”
그러자 아라퀘스가 다소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다.
“후후.”
이에 불끈하고 만 카르발디.
“너 지금 비웃었냐? 선배한테 말이야.”
“선배님께서는 명색이 아르카도 제국 사관학교 출신에다 실전 흑검사란 지위에 오른 분인데 그리 충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뭐라고! 네 녀석이 제아무리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까불면 맞는다.”
카르발디는 아라퀘스의 사관학교 11년 선배이자 흑검사 교육대로 쳐도 한참 고참에 속했다.
비록 흑검술 시전 능력 면에서 아라퀘스가 제6공격자인 타미레온 급으로서 위라지만 아르카도 제국은 전통적으로 기수와 선후배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게 여겨 왔었다.
“제비뽑기는 제가 직접 준비하고 시행한 것으로서 절대 부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국왕 폐하께서는 매우 공정한 분이시라 오히려 우리 조가 위험한 지역으로 배정받은 것에 대해서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 크신 게 아닙니다.”
카르발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국왕께서 우리 조를 걱정하다니…… 그건 왜지?”
그러자 아라퀘스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모닥불을 쬐고 있는 에르가니아를 슬쩍 보며 말했다.
“그, 그건 선배님도 아실 텐데요.”
“뭐를?”
“국왕 폐하께서는 저희 삼 조 대장님의 안위를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카르발디의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이에 반해 에르가니아는 자신이 언급이 되자 다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라퀘스의 발언이 삼각관계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그녀는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마치 아라퀘스에게 들으라는 듯 말이다,
“우리 삼 조가 원정길에 오르기 전에 국왕 폐하께서 많이 걱정하셨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병사들에 대한 진심 어린 아주 공적인 일이지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아라퀘스 역시 그녀의 말뜻을 알고는 더 이상 경솔한 발언을 삼가기로 하였다. 에르가니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사실 우리 삼 조에 아라퀘스 근위대장님을 포함시킨 데에는 그 이유가 분명 있답니다.”
그러자 카르발디와 아라퀘스 본인은 정작 처음 듣는 내용인지 귀가 솔깃해졌다.
“우리 임무지가 부족민들과 거친 산족들이 거주하는 산악 지형이라지만 예로부터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역사(力士) 종족을 찾아내는 일이 실제적인 임무랄까요.”
“대체 그건 무슨 얘기요. 처음 듣는 내용인데.”
카르발디의 반문에 아라퀘스 역시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저 역시 그 내용에 관한 어떤 것도 듣지 못했는데요.”
에르가니아 상큼한 미소로 계속 말문을 이어 갔다.
“이때쯤 얘기하면 괜찮다 싶었어요. 워낙 은밀한 임무이다 보니까 국왕 폐하께서는 제게만 지시를 내려 주시고 나중에 부대장들인 그대들에게 말하라 그랬거든요. 예로부터 이곳 산악 지방에는 하나의 전설이 내려왔는데 광활한 삼림 지대 깊은 곳에 특이 종족이 자신들만의 거주 구역 안에서 세상을 등지고 산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내용은 작전참모 하키리우스 님의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 것인데 모든 문헌들을 자세히 살핀 끝에 우리들의 임무지인 이곳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을 엿보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 진짜 임무가 그들을 찾아내어 규합이나 하다못해 협정이라도 맺는 것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후후, 어쨌든 흥미로운 내용 같소. 하지만 과연 역사 종족이 실재할까요.”
“일단은 찾아봐야죠.”
“이 광활한 산악 지형과 숲 영토 안에서 말인가요. 이건 한마디로 모래 바닥에서 바늘 찾기가 아니에요? 그것도 내년 봄까지라니. 후우.”
카르발디는 말하다 말고 이번엔 아라퀘스를 바라보았다.
“이봐!”
“네, 말씀하시죠.”
“넌 어떻게 생각하냐?”
“뭘 말입니까.”
“이번 임무 말이다.”
“글쎄요.”
“괜히 신중한 척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보시지.”
“저는 그저 명령에 따르고 충실할 뿐입니다.”
“후후. 역시나 너답게 무척 합리적인 대답이군. 그나저나 어쩌나?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신비의 종족을 찾아서 겨울 내내 헤매야 되니. 이것 참, 애초 그 사실을 알았다면 오지 않는 건데.”
“…….”
사실 그의 말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막연한 곳에서 막연한 것을 찾는다는 느낌.
에르가니아와 아라퀘스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을 뿐. 카르발디는 더 이상 답답한 심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문득 화제를 돌려 아라퀘스에게 물었다.
“넌 무슨 연유로 국왕 폐하를 모시게 되었냐.”
아라퀘스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얘기하자면 긴데. 뭐, 대결로 만났었죠.”
“대결이라니?”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 자리를 놓고 말입니다. 당시 저는 남부 대륙에 와서 일곱 명의 강자들과 대결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는데 폐하께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냐?”
그 대목에서는 카르발디뿐만 아니라 에르가니아 역시 눈빛을 반짝이며 관심을 가지는 듯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드의 전투 능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가 수하들을 지키지 못하고 레온과 테세우스에게 패하여 수모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카르발디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강하기에 흑검술 제육 공격자에다가 원천기술을 익힌 네가 단번에 패할 수 있단 말이지?”
그 말에 아라퀘스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데. 국왕께서 전에 비해 아무리 실력이 늘었다 할지라도 단번에 초고수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단 말이야.”
“선배님이 생각이 어떻든 간에 난 사실만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카르발디는 문뜩 한 가지 호기심이 들었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렇다면 아버님하고 비교하면 누가 더 강할 것 같으냐.”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아라퀘스는 다소 인상을 찡그렸다. 꼭 질문하는 것도 어찌 저리도 유치한지 말이다.
“애들도 아니고 그런 비교를 해야 합니까?”
“그냥 물어보는 거니까 괜히 열 내지 마라.”
사실 그로서는 유치한 것을 떠나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이곳 머나먼 남부 대륙에 왔건만, 또다시 그 이름을 들으니 아라퀘스의 심정이 그리 좋을 리는 없었다.
“그만둡시다.”
하지만 카르발디가 그냥 물러날 위인은 아니었으니.
“한번 네 생각을 얘기해 보라니까? 국왕 폐하와 아버님과 대결한다면 누가 승자가 될 것 같은지 말이야.”
“그런 애들 같은 질문 그만 하시죠.”
“애들 같다니! 난 진짜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라니까? 중부 대륙의 위대한 전설을 만든 분과 현재 남부 대륙에서 떠오르는 분이랄까. 그런 대결이 궁금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니더냐.”
“여하튼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그렇게 어렵냐.”
“가급적이면 앞으로 제 아버님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그때 에르가니아 역시 카르발디를 나무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싫다는 것은 웬만하면 자제하시죠.”
“쳇!”
곧이어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에르가니아가 가슴 안쪽으로부터 지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원정 지대에 들어가서 임무를 시작해야 하니 일단 지도를 보고 진격 행로를 의논하기로 하죠.”
그녀의 말에 카르발디와 아라퀘스가 자세를 고쳐 잡고 지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사 종족을 찾기 이전에 우선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모닥불이 활활 계속해서 타는 늦은 밤까지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부족민들과 산족과 대처할 때 가급적이면 그들을 설득시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해요. 그래야만 그들의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여기 지도에 표시된 것을 보면 부족민들만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은데 이들을 다 병합하자는 전략이오?”
“물론이죠. 사실 우린 일 조와 이 조와의 아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셈입니다. 봄이 되면 각 조가 성취한 기준대로 평가받고 공신으로서 보직을 얻게 되는데 저는 우리 삼 조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더 많은 해택을 누렸으면 해요.”
아라퀘스 역시 한마디 했다.
“이왕 경쟁이니까 한번 화끈하게 임무를 수행해 보죠.”
하지만 카르발디는 여전히 꿍한 얼굴을 했다.
“누군 경쟁심이 없는 줄 아는가. 다만 역사 종족인가 뭔가 하는 미확인 존재들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지.”
“반드시 찾게 될 겁니다.”
“어련하시겠냐.”
“…….”
***
그로부터 한 달 후.
와와!
파파파팟!
가파른 절벽에 개미 떼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병사들은 산 정상으로부터 빗발치듯 떨어지는 화살과 돌멩이를 피하려고 할 뿐, 그 누구도 감히 올라갈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에르가니아의 원정군 삼 조는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와 숲 속을 뒤져 가며 야만인들과 수십여 차례나 전투를 치르면서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4개 부족민들과 평화 협정을 맺은 뒤 신생 왕국으로의 귀속을 약속받았고 다소 거친 야만족들과는 할 수 없이 지금처럼 무력으로 정벌을 하여 굴복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헌데 야만족들보다도 훨씬 사납고 전투력에 있어서도 월등히 앞서는 산족을 정복하기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로 산 아래 인근 마을을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 심지어는 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가장 악명 높은 메스 산족,
그들은 수많은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유명한 붉은 바위산 정상에 본거지가 있어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힘든 실정이었다.
하지만 에르가니아는 어차피 임무지에 속한 그곳도 일단은 원정 대상에 포함시켜 과감한 공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일단 그들의 거주지는 높은 산 정상으로서 아슬아슬한 구름다리가 아니면 절벽을 올라가야지만 겨우 그 마을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장은 전투다운 전투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위험한 순간을 맞고 있다고나 할까.
와와!
홱! 홱!
“거기서 뭐 해! 당장 위로 올라가란 말이야.”
“뒈지고 싶으면 너나 올라가! 눈이 있으면 위를 쳐다보란 말이다. 뭐가 떨어지는지 말이야.”
순간 뜨거운 물이 쏟아지자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질렀다.
“아악! 저것들이 이젠 끓는 물까지!”
“그래도 각자 손을 절대 놓지 마라!”
“아이고! 뜨거워 죽겠는데 뭔 소리여.”
“참으라고!”
“차라리 떨어져 죽는 것이 낫겠지.”
“네놈이 추락하면 밑에 동료들도 위험해.”
“빌어먹을! 나 혼자 끓는 물을 다 받으라고.”
“미안하네!”
빗발치는 화살들이 병사들의 옷과 살갗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수십 m 아래로 추락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살려 줘!”
“아아악!”
결국 카르발디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절벽 아래로 물려야겠소!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다 추락하고 말 것이오!”
그의 외침에 에르가니아 역시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좋은 결정이오. 앞으로 산족들은 아예 상대하지도 맙시다. 저렇듯 절벽 끝에 숨어서 사는 족속들과 싸워 봐야 희생자들만 생기고 우리만 손해 볼 뿐이죠.”
바로 그때였다.
아래 후방으로부터 무서운 속도로 절벽을 오르며 이쪽으로 올라오는 자가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또한 힘차 보였는지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뭐야, 저 녀석!”
어느새 발밑까지 올라온 아라퀘스, 그가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그들에게 말했다.
“왜 올라가지 않는 거죠?”
카르발디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즉답했다.
“네 눈에는 위쪽에서 화살과 돌멩이들이 마구 떨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더냐!”
“어차피 예상했던 일 아닙니까.”
“누가 예상했다고 그래. 빌어먹을 산족이라고 해 봐야 대충 주거지부터 함락시키면 단번에 전투를 끝낼 수 있을 줄은 알았지. 그나저나 네 녀석은 아래 자리나 지킬 것이지 왜 여기까지 올라와서 참견이냐.”
“답답해서요.”
“그래서 올라왔다 이건가. 그렇다면 네놈은 뭔가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냐.”
그 질문에 아라퀘스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절벽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카르발디를 바라보더니만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님, 우리 이렇게 합시다.”
“뭐를 말인가?”
“제가 먼저 올라가서 저들의 선발진들을 제압할 테니까 그 즉시 대장님과 선배님이 합류를 하지요. 우리 셋이서 산족을 상대하다 보면 그 다음에는 병사들이 뒤를 따를 것이고요.”
“설마 저 위를 너 혼자 올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혼자 갈 겁니다.”
“뭐라!”
“시간이 없으니까 먼저 갑니다.”
아라퀘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절벽을 차고 위쪽으로 무서운 속도로 올라갔다.
타다닥.
파팟!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카르발디, 생각해 보니 녀석은 원천기술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그 유명한 신체발검과 원천분산의 유전을 아버지로부터 타고났을 테니 이런 정도의 장애물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바로 그때 에르가니아 역시 힘찬 도약으로 위쪽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카르발디가 깜짝 놀라 외쳤다.
“대장은 어디 가는 거요!”
“부대장 혼자서는 벅찰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올라가기가 무척 위험할 텐데요?”
“걱정 말아요. 제가 익힌 고공검술 과정에 절벽 타기도 있거든요. 그럼 나중에 봐요.”
“…….”
카르발디는 그만 할 말을 잊은 채 닭 쫓던 개 지붕 바라보듯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과연 그녀는 호언한 대로 수많은 화살들을 절묘하게 피해 가며 믿기지 않는 속도로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무심코 뭐라 내뱉는 카르발디.
“왜 흑검사 교육대에서는 절벽 타기를 가르쳐 주지 않는 거지…….”
청명한 초겨울 하늘 아래 붉은 산봉우리에는 거친 산족들이 무식한 둔기를 휘두르며 두 명의 남녀를 향해 공격을 하고 있었다.
산악 지형에 단련된 종족인지라 매우 민첩한 몸놀림으로 솟구쳐 오르며 개미 떼처럼 달려들었지만, 에르가니아와 아라퀘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역공격을 취하고 있었다.
삭― 슥.
붕붕.
“아악!”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메스 산족이라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공격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실신이나 기절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잠시 소강상태가 흘렀다.
그 와중에 에르가니아가 아라퀘스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칼등으로만 상대해서 기절만 시킨 것은 정말 잘했어요.”
“그래야만 저들을 굴복시킨 뒤에 협조를 얻을 수 있잖습니까.”
“제 생각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 자리에 카르발디가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군요.”
“그건 왜죠?”
“가끔 생각 없이 성질만으로 행동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자 아라퀘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흑검술 시전자들은 어둠의 포스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결코 좋은 성격은 못 돼요. 사실 그 때문에 깨끗이 흑검술을 포기했지만요.”
“아, 네.”
“그런데 말로만 들어 왔던 대장님의 검술을 직접 보니 정말 독특하군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고공검술이라 그랬나요. 대체 원류가 어떻게 되죠?”
“시조께서 남겨 주신 거죠.”
“대단하신 분이셨나 봐요.”
“아란시아 대륙 검술왕이셨거든요. 그대 아버님처럼 제 시조 역시 그곳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오랫동안 칭송되던 분이셨어요.”
“와우!”
바로 그때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빙 둘러 포위만 했던 산족들 어느 틈사이로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거구에 가죽 군장 차림이 한눈에 봐도 산족을 이끄는 대장임이 분명했다.
그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대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여기까지 쳐들어온 거냐!”
아라퀘스가 매서운 눈빛을 드리우며 그에게 말했다.
“그대가 대장인 듯 보이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는 신생 왕국의 국왕 폐하의 명을 받고 주변 인근 부족민들을 통합하는 임무를 띠고 이곳에 왔소. 그대의 산족 역시 그 대상에 속하니 왕국에 귀속되든지 아니면 적으로 남을지 선택하기 바라오.”
“뭐, 뭐라!”
산족 대장은 다소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내둘렀다.
“근처 영토에 왕국이 하나 세워졌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있건만 자기들 마음대로 주변 세력을 강제로 귀속시키려는 것은 한마디로 침략 행위가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든 우린 임무를 수행할 것이오.”
결국 산족 대장이 울컥했다.
“누구 마음대로! 정말 날강도 같은 새끼들이군.”
“그대들 역시 주변 부족민들에게 악명이 대단하더군. 아마 날강도보다 더 나쁜 살인자들이라지.”
“그래서 한번 해보자 이건가. 고작 두 명인 주제에 말이다.”
아라퀘스가 다소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나와 옆에 계신 대장님이면 단시간 내에 이곳을 쑥 밭으로 만들 수 있소. 하지만 웬만하면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아직은 살상을 미루어 두고 있을 뿐 만일 끝까지 대항한다면 이곳 붉은 바위산 색상에 걸맞게 그대 종족들은 반드시 피를 보고 말 것이오.”
그저 위협이라기보다는 진짜 두려움이 팍팍 느껴졌던가.
“…….”
산족 대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마침 그때 절벽을 오르는 자들이 있었으니 카르발디와 병사들이었다.
그가 저편 멀뚱히 서 있는 에르가니아와 아라퀘스에게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해! 당장 쓸어버리지 않고.”
“그러자 에르가니아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당신은 가만있어요. 여기 일은 우리가 해결할 테니까요.”
카르발디가 산족 대장을 한번 훑어보더니만 냉소를 머금었다.
“보아하니 저자 말이야. 인상은 더럽게 생겨 가지고 결코 말로 해결을 볼 것 같지가 않는데.”
그가 살기를 가득 품고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이번엔 아라퀘스가 말렸다.
“선배님! 정말 다 된 밥에 재 뿌릴 거요? 흑검사면 제발 그 위치에 어울리게 행동하시죠.”
“너 말 한번 잘했다. 언제 흑검사가 이런저런 사정 봐주고 싸우는 거 봤냐. 한번 검을 뽑으면 적어도 분이 풀릴 때까지 주변을 초토화시켜야만 멈추는 게 흑검사란 말이다. 자, 비켜! 이번 일은 내가 말끔히 처리해 줄 테니까.”
“어휴. 어째 그럽니까! 도무지 말이 통해야 말이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꽉 막힌 놈 같으니라고. 네 아버님과 심지어 조부님은 흑검사 역사상 가장 포악하고 잔인하다고 소문이 났건만 대체 너는 왜 그 모양이냐.”
“…….”
한편 산족 대장은 저들의 대화를 듣고는 그만 얼굴이 창백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흑, 흑검사라니…… 정녕 저들이!”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 없이 지면에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그 말이 카르말디를 좌절시키고야 말았으니.
“하, 항복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