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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7 테세우스의 출생 비밀 (38/81)

CHAPTER. 37 테세우스의 출생 비밀

흰 토가 차림의 백발노인이 바위산 정상 위에 뒷짐을 쥔 채 저 아래 헐레벌떡 달려오는 은빛 머리칼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짊어질 용도로 묶어 놓은 듯한 끈이 느슨하게 동여매여 있었다.

그의 눈길은 여전히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닌 젊은이에게 집중이 되었고 뭔가 회한의 눈빛마저 드러냈다.

‘녀석이 이제야 오는군.’

휘이잉!

노인은 바람에 긴 수염이 풀풀 날리자 손으로 쓰다듬으며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언덕 위 둔덕까지 오른 사내가 몹시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사내는 레온이었다.

“조부님!”

“그래, 왔느냐.”

그 둘은 제법 오랫동안 포옹한 뒤에야 다시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게 몇 년 만이냐.”

“아마 팔 년은 된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셨으면 환영식이라도 준비했을 텐데요.”

“환영식은 뭔 놈의 환영식이냐. 그냥 너만 보고 바로 내려갈 건데.”

“무슨 섭섭한 말씀이세요. 제가 이제는 제국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산 아래 대형 마차를 대령해 놓았는데 제 수하들인 특수 검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당장 수도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나는 당분간 팔라카스 제국 수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게다.”

이에 레온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니요.”

노인은 갑자기 진중한 얼굴로 제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거기 앉아라.”

“네?”

노인은 바로 옆에 놓인 상자를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를 만나러 온 것은 이것을 전해 주기 위함이다.”

레온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뭡니까?”

“그전에 우리, 얘기나 하자꾸나.”

“…….”

그제야 레온은 노인의 말대로 그의 옆에 앉았다. 아마도 뭔가 하려는 말씀이 있으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오늘날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武人)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데에는 전적으로 조부의 덕이라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폭풍 용병단 부대장이셨던 그는 아르게논으로부터 공력변환기술을 얻어 고향에 돌아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레온에게 모든 열정과 심혈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레온 역시 천성적으로 타고난 단단한 체질과 독한 승부욕이 상당했으니 그야말로 그의 역량은 한 해가 지나갈수록 엄청난 속도로 향상이 되어 갔다.

레온이 17살에 이르러 드디어 공력변환기술의 맥을 알아 가자 노인은 평생 모은 돈을 털어서 희대의 대장장이 말로세카에게 찾아가 강력한 병기를 주문 제작케 한다.

그게 바로 오늘날 레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반월형 무기였다.

레온은 그 병기를 얻자마자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수년간의 수련 끝에 드디어 공력변환기술의 마지막 장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원대한 꿈을 안고 제국으로 떠날 때, 다시 말해 그의 조부와 이별의 정을 나눈 때는 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 되었으니 지금 이 둘의 만남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헌데 노인은 웬일인지 손자의 출세에 대한 기쁨보다는 뭔가 씁쓸함이 깊게 배어 있는 듯 보였으니 레온으로서는 다소 갑갑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러서야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보자.”

“네, 말씀하십시오.”

“지금 네 위치에 만족하느냐?”

“무슨 말씀인지요.”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

왜 그런 질문을 하시나 하고 레온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했으나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즉답했다.

“만족합니다.”

그의 조부는 그의 대답을 예상이라 했듯이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

“허허. 역시 내 생각대로 아직은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군.”

“조, 졸장부라니요?”

“네놈 그 말하는 꼴이 졸장부가 아니면 뭐냐.”

레온은 당장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다. 팔라카스 제국의 제일가는 무인(武人)에다가 황권 세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특수 검사 제1부 수장인 자신을 졸장부라 하니 말이다.

정말이지 조부를 만나면 자신의 뿌듯한 성공을 자랑하며 그 기쁜 미소를 보려 했건만, 그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제 신분을 아직 정확하게 모르시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현재 저는 황제 폐하와 집정관님의―”

순간 노인이 그의 말을 매몰차게 끊고 말았다.

“듣고 싶지 않다.”

레온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부님…….”

“네 녀석이 모시는 자들이 황제건 집정관이건 난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네가 직접 쓰고 만들어 가는 역사(歷史)이니라.”

“역사라니요. 그건 무슨 말씀이지요?”

“후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진정한 영웅을 말하는 것이다. 그저 누구를 위한 신하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닌…….”

“영웅이라니요.”

“한번 생각해 보거라. 오랜 역사를 통틀어 남부 대륙에 진정한 영웅이 있었더냐.”

“저, 저기 꼭 없으란 없잖아요. 수백 년 전 검의 황제로 불렸던 하카스 검사나 신궁의 달인 레오나드로 최근에는 폭풍 용병단의 아르게논 정도가 그래도 인정을 받는다고 할까요.”

이번에도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생각하는 수준이 그 모양이라니. 내가 말하는 영웅이란 중부 대륙의 아독이나 북부 대륙 흑마술 사령관 론, 그리고 시빅 대륙 출신의 이카루시아 같은 그야말로 거성(巨星)들을 말하는 게다.”

“…….”

레온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하니 조부가 그런 위대한 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줄은 몰랐다.

그들이 비록 한 세대 위에서 활약한 옛 영웅들이라지만 어찌 그런 자들과 비교를 하시는지 당황스럽기도 했다.

노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레온.”

“네.”

“앞으로는 멀리 봐야 해. 지금은 그런 자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엄격하게 따지고 보면 네 능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단다. 만일 그들 중 한 명과 당장 대결을 벌인다 할지라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패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한때에는 중부 대륙과 북부 대륙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활약했다지만 이제 세상은 바로 여기 남부 대륙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지. 예를 들어서 그토록 위명을 떨쳤던 흑검사란 존재가 이젠 여기에서 그다지 맥을 추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좋은 예가 아니더냐.”

레온이 처음으로 동의했다.

“그런 그렇지요.”

“하지만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실력 외에 반드시 필요한 게 있지.”

“실력 외에 필요한 것이라니요?”

그제야 노인은 자신이 가져온 상자를 레온 앞에다 내밀었다.

“바로 이거야.”

“대체 이게 뭐죠?”

“군장이다.”

“군장이요?”

“굳이 명칭을 부친다면 말로세카의 군장이라 할 수 있겠지.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희대의 장비라 할까. 아마도 아독이 착용했던 하렘 군장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제작을 하게 되었다지.”

“하렘 군장이라면 단계별 변신이 가능한…….”

“그래, 이 말로세카의 군장 역시 하렘 군장에 비교할 만큼 대단한 것이 분명하다. 너도 알다시피 말로세카는 남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능한 대장장이가 아니더냐. 그가 무려 이십칠 년 동안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 제작한 것이라면 아마도 진짜 물건이긴 물건일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얘기하자면 길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공력기술 시전자만 작동할 수 있느니라.”

“공력기술이라니요?”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말라카스 대장장이가 그 군장을 만들었어야 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아르게논에게 바치기 위함이었지.”

레온이 깜짝 놀랐다.

“네?”

“어차피 그는 이미 죽고 없으니 이 세상에서 공력변환기술을 다룰 줄 아는 자는 너밖에 더 있더냐. 그래서 그로부터 가져 왔지.”

“혹시 강제로?”

노인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그건 네 녀석이 알 바 아니다. 어쨌든 그 군장의 주인이 너라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겠지.”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오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이제 가마.”

레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냥 가시려고요!”

“볼일 봤으면 가 봐야지.”

“그래도 그렇게 가시면…….”

“난 상관 마라. 훗날 네 녀석이 진정한 최강자로 거듭나 있을 때에는 한 며칠은 머물다 갈 테니까 그리 알아라.”

“…….”

레온은 할아버지가 저 아래 멀리 한 점이 되어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 되어서야 지면에 놓인 상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희대의 명장이 수십 년 동안 제작한 군장의 모습이 어떤 모양인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꼭꼭 동여맨 끈을 풀어 드디어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순간 그의 동공이 팽창되었던가!

‘아.’

황혼 질 때 세상을 불게 물들인 노을 색상이라 할까. 몇 단계로 차곡차곡 접혀진 얇은 금속 재질은 한눈에 봐도 매우 정교한 이음새에 겉으로 보이는 문양마저 수려함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하렘의 군장을 본뜬 것이라 하니 레온의 심장은 벌써부터 마구 뛰기 시작했다.

슥.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군장은 상체의 흉갑 부분과 양쪽 어깨 보호대에 이은 팔과 손목 가리개가 전부였지만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침 서녘 노을이 지는 대장관이 이루어지니 레온이 집어 든 군장은 타오르는 불처럼 이글이글 거렸다.

***

팔라카스 제국은 황제의 명으로 군단 구성에서 군비 확장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팎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원래 제국군의 5개 군단 규모가 그 두 배인 무려 10개 군단으로 늘어났고 최근 수년 동안 징집이 된 병사들만 하더라도 수만 명은 족히 넘었다.

게다가 일곱 동맹국들로부터 병사들과 여타 군비 물자들을 충분히 제공받았기에 모든 진행 상황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부 대륙에서 그야말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황제 게라쿠스의 야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넘쳐흐른다고나 할까.

황제의 성화로 최고 군부 관계자들 역시 군단 편성을 위한 회의를 수차례나 한 뒤에 전장에서 뼈가 굵은 야전 사령관들을 주축으로 각 군단장들을 배정케 하였으니,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군력을 서서히 갖추기 시작했다.

황제는 총 군단장에 현 집정관인 카르세크를 내정했으니, 사실상 그가 내년 원정에 대한 모든 통수권을 가지는 셈이었다.

그의 오른팔인 레온 역시 특수 검사부 총괄 책임자로서 첩보, 암살 등 특수 임무에 관여할 것이다.

한편 테세우스는 원로원의 강력한 지지로 원래의 특수 검사직을 탈퇴하고 새로운 보직을 얻었다.

놀랍게도 지원 부대를 책임지는 대장직에 임명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보병 군단과 같은 전투 병력을 지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에 있어서 지원 부대 대장의 위치는 각 군단장 급과 같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직급은 상당히 높다 할 수가 있었다.

지원 부대원들의 숫자는 총 3천 명이 되었고 그들은 십만 명에 달하는 각 군단 병사들에게 식량과 물자들을 지원해 주어야 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바로 그들을 총지휘하는 지휘관이 테세우스이니 일개 특수 검사로서는 파격적인 인사 단행이었던 것이다.

사실 황제와 집정관은 원로원에서 그와 같은 제의를 요청받았을 때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을 너무 누르는 것 역시 좋은 판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반대파 소속 테세우스를 명분상이나마 지원 부대 대장으로 배정토록 한 것이었다.

어쨌든 원로원은 그 자체로 만족해야만 하였고 대공 자라투스와 수장 카이는 아예 테세우스를 위한 만찬회까지 준비했다.

“어서 들게나.”

대공에 이어 카이 역시 흥분에 들떠 있었다.

“설마하니 테세우스가 대장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대체 원로원 의원들에게 얼마나 잘 보였기에 그리도 팍팍 밀어준다니. 원래 나이순으로 보나 기수로 보나 그 자리는 내가 되어야지 맞을 텐데. 자넨 정말 운도 좋네그려.”

순간 대공이 카이를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자넨 실력이 안 되잖은가. 지난번 용병 척결 작전에서 테세우스의 공이 레온보다도 앞섰으니 원로원 의원들께서 마땅히 관심을 가져 주시고 지원하는 것이 아니더냐.”

“누가 몰라서 그런데요? 그냥 부러워서 그런 거지요. 그리고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누군 실력 없고 싶어서 없나.”

“이놈이 어디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럼 눈을 감고 말합니까? 나 참, 무서워 말도 못하겠네.”

“뭐라! 이젠 그 잘난 수장이라고 대공인 나를 무시하는 거냐.”

“누가 무시했다고 그러십니까. 술이 많이 과하신 것 같은데 그만 하시죠.”

“아직 열 잔도 먹지 않았는데 누굴 술 취한 사람 취급하는 거냐.”

결국 테세우스가 나서서 그들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두 분 다 술이 과하신 것 같은데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시죠. 그리고 고작해야 지원 부대에 배정을 받았는데 이토록 과한 대접을 받으니 조금은 멋쩍군요.”

그러자 대공과 카이가 모처럼만에 의견을 같이 냈다.

“고작이라니. 자네의 부대는 무려 열 개 군단들의 모든 지원 물자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나.”

“맞습니다. 수송 병사들만 삼천여 명이니 웬만한 왕국의 총관과 맞먹는 직분이랄까.”

“그렇기는 하지만 어차피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는 지원 임무가 아닙니까.

대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드시 그렇지만 않네.”

“그렇지 않다니요?”

“가령 자네의 부대가 수송을 하는 도중에 적과 마주친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나.”

“그야 물론 싸워야 하겠죠.”

“내 말이 그 말이네. 최소한 습격하는 적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야 하겠지. 그때 자네의 능력이 필요한 거라네.”

테세우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더 나아가서 큰 전투를 벌일 수도 있는 문제이지.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자네의 지원 부대가 웬만한 보병 군단보다 큰 공을 세울지 말일세. 어쨌든 이 점만큼은 명심하게나. 자네는 우리 원로원에서 그나마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

그날 밤 테세우스는 제법 과음을 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방에 돌아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을 겨를 없이 침대에 누웠다.

지원 부대 대장에 임명된 뒤로는 이곳저곳에서 축하 인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오늘처럼 초대되어 연일 만찬까지 곁들이니 이만저만 피곤한 모양이 아니었다.

금방 잠에 들을 것 같은 테세우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정신은 멀쩡했던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그저 몽롱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시간은 새벽녘으로 넘어갔다.

테세우스는 여전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어중간한 정신 상태로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분명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절로 눈이 떠지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이런 현상이 뭔지 그로서도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안개와도 같은 흐릿한 영상이 갑자기 선명하게 밝아 오며 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필시 꿈이 분명할진대 문제는 테세우스 그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認知)한다는 것이었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그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꿈속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고 스스로 발버둥 치려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늪으로 빨려 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정신과 생각을 누군가 조종이라도 하듯 말이다. 결국 몽환적 상태에서 마지못해 끌려가고 마는 테세우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영상을 관찰하는 일뿐이었다.

***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한 독특한 군장 차림의 사내가 어둠의 포스를 풀풀 흘리는 다크퍼스들과 대치하고 있다고 할까.

대략 상황을 살펴보니 아마도 그들에게 잡혀 있는 금발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검은 머리칼 사내가 싸늘한 눈빛에 독기를 내뿜고 있는 듯 보였다.

테세우스는 대체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꿈속의 세계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들의 거친 호흡마저 생생하게 들려왔고 하나하나 행동마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검은 머리칼 사내가 손을 들어 어깨 위로 가져갔다.

웅.

착!

스르륵―

군장의 어깨로부터 금속 병기가 툭 튀어나왔다.

다크퍼스들뿐만 아니라 강당을 잔뜩 메운 수많은 정령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사내가 방금 꺼낸 조그만 병기에 쏠렸다.

그는 마치 서커스 쇼를 하듯 무기를 허공에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만, 돌출 버튼을 눌러서 부채꼴처럼 활짝 펼쳐 보였다.

휘리리릭!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무시무시한 병기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순간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도대체 저 부채꼴처럼 생긴 희한한 무기가 뭐인지 각자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 제왕석에 앉아 있던, 왕으로 보이는 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건 이리스의 타룬 병기!”

그의 외침에 여기저기에서 일대 술렁임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스?”

“이리스라니!”

“설마 그 대살육자인 이리스를 말하는 건가.”

“세상에! 저게 타룬이라면 저 청년이 이리스!”

“오호!”

그토록 오만하고 자부심이 강해 보이는 정령들조차 이리스란 이름이 언급이 되자 순식간에 일어나는 불길처럼 일대 강당 안이 소란스러워졌던 것이다.

이에 더욱 경악에 치를 떠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다크퍼스들이었다.

“허억!”

“이리스라니!”

“이게 웬 날 벼락이야!”

“젠장, 우린 다 죽었다.”

그들 중 대장인 자가 인질로 보이는 여인의 머리채를 더욱 세게 움켜잡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갑자기 이리스라니…….”

그러자 검은 머리칼 사내가 움찔거렸다.

“자, 이제 내 신분을 알았으니 당장 헤르시안을 풀어 줘라.”

“가, 가까이 다가오지 마!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헤르시안을 죽여 버릴 테다.”

겁에 잔뜩 질린 다크퍼스 대장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 있는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로 온통 얼굴들이 굳어져 있었다.

그때 이리스란 자는 혹시라도 여인이 다칠까 봐 다소 긴장감을 느꼈고 재빨리 한마디 했다.

“헤르시안을 놔 주면 너희들 역시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있다.”

그때 대장이 그의 제의에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녀를 풀어 주면 우리를 살려 주겠단 그 말인가. 그런데 왜 타룬 무기를 꺼내 든 거야?”

“지금은 방어용으로만 사용할 것이다. 어쨌든 나 이리스의 이름으로 너희들 목숨을 보장할 테니, 제발 그녀를 놓아 주어라.”

분명 그의 진심인 것 같았다. 아마도 애인처럼 보이는 여인, 사내는 그녀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언뜻 그의 절실한 표정으로 보아서 다크퍼스들이 그녀를 해치지 않는다면 진짜 살려 보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크퍼스들은 대살육자인 그의 위명에 이미 잔뜩 기가 눌린 상태였다.

그들은 그저 절망에 가까운 얼굴로 그를 대할 뿐이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이라니!”

“이리스와 마주친 자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지금 너는 우리를 속이는 것이 분명해! 헤르시안을 놔주는 동시에 저 타룬으로 우리를 발기발기 찢어 죽여 버릴 것이 분명해! 여기 내 수하들마저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도 않겠지.”

한편 지금까지 쭉 광경을 지켜보았던 테세우스에게는 매우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도대체 전생에서 이리스의 악행이 얼마나 무자비했기에 그 무시무시한 다크퍼스들이 저렇듯 벌벌 떤단 말인가.

‘후우. 얼마나 강하기에…….’

그때 이리스가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크퍼스 대장에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헤르시안을 무사히 풀어 준다면 그대들 역시 안전할 것이다.”

그때 대장은 그의 표정을 좀 더 신중히 살피더니만 갑자기 체념의 얼굴로 돌아가고야 말았고 한숨마저 푹 쉬어 버렸다.

“그대가 얼마 전 군장 없이도 붉은 용 에스타란토를 제압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소. 하물며 지금은 군장을 착용한 상태에서 우리 다크퍼스의 숫자가 근 이백여 명이 한꺼번에 공격을 한다 할지라도 승산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겠지. 물론 그대는 절대로 우리를 살려 둘 그런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대살육자이니 우리의 운명은 이곳 아스티안 신전에서 결국 그 종말을 고할 거다. 하지만 우리도 소멸당하기 전 그대를 슬프게 할 희생자를 만들 것이다. 물론 그 희생자는 헤르시안이다.”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헤르시안의 목을 움켜진 팔뚝에 힘을 가해 그녀를 목 졸라 죽이려 하였다.

“에잇!”

“아아!”

“안 돼!”

헤르시안의 목이 조여들면서 그녀의 신음이 강당을 울렸다.

이리스의 안광에 분노의 불길이 화르르 일었다.

“이런 개새끼가!”

이리스는 이미 타룬의 검 날들을 전방으로 향한 채 혹시라도 벌어질 급박한 사태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휘리리릭.

파파파팟!

“아악!”

타룬의 수많은 칼날 중에 한 개만이 발사되었으니 그 주인의 사고와 의지대로 정확히 헤르시안의 목을 움켜쥔 대장의 팔뚝을 향해 가서는 빠르고 정교하게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살려 줘!”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헤르시안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그의 팔뚝만 회 치듯 살점들을 얇게 쓸어 내고 있었다.

참으로 경악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앞으로 밀어 버리는 대장, 이에 앙상한 뼈만 남은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러야만 하였다.

“빌어먹을! 안 되겠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모두 이리스에게 공격을 하라!”

대장의 절규에 찬 명령에 다크퍼스들이 떼를 지어 이리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리스는 대장으로부터 밀쳐진 헤르시안을 자신의 품에 안고는 나머지 타룬 무기들을 작동시켰다.

“얼마든지 오너라, 잡종 새끼들!”

휘리리릭.

순간 수많은 칼날들이 엄청난 파공음들을 내며 각 방향으로 발사되었다.

타룬 조각들은 하나하나 살아 있는 듯 각 목표물을 향해서 관통하는가 하면 난도질을 해 대며 광란의 살육 파티를 시작했다.

이리스는 한 팔로 헤르시안을 안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붉은 검을 잡은 채 근처로 공격해 들어오는 다크퍼스들의 목과 사지를 가차 없이 분리시켜 나갔다.

팍!

컥!

파박!

“크악……!”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도륙의 현장, 이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수많은 정령들은 저마다 끔찍한 이리스의 대 살육에 몸서리를 치며 공포에 떨어야만 하였다.

정녕 저 모습이 말로만 들어 왔던 이리스의 실체란 말인가.

삭.

슥.

“악!”

“크억!”

그처럼 살벌했던 다크퍼스들이 더욱 무서운 병기에 의해 도륙당하고 있었다.

신성한 신전 법정에 그들의 살점과 피들이 뿌려지며 광란의 지옥을 만들어 갔다.

테세우스 역시 그와 같은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타룬이란 병기가 수많은 다크퍼스들을 상대로 이 정도 위력까지 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가.

그로부터 잠시 시간이 흘렀다.

“아아!”

“우우우욱!”

“컥컥!”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신음. 가슴을 관통 당하거나 팔 혹은 다리가 절단된 자들, 아니면 목이 날아간 채 아예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

그들의 핏물은 딱딱한 강당 바닥을 질퍽하게 메웠으니, 어느새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관중석에 있던 모든 정령들은 눈앞에 벌어진 참사에 대해 그 누구 하나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척 척 척 척 척―

휘리리릭!

타룬의 검 조각들은 이내 조그만 병기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리스는 타룬을 어깨 위에 장착하고는 천천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다보았다.

“젠장. 결국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렀군.”

저들이 그의 여인인 헤르시안만 놓아 주었더라도 이런 살육의 현장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이리스는 헤르시안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소 멋쩍었는지 어색한 미소를 자아냈다.

“드디어 만났군.”

그녀는 아직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물만 글썽이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정말이지 현실보다도 실감났던 장면은 거기서 멈추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테세우스의 눈이 절로 떠지며 마치 긴 꿈을 꾸기라도 한 것처럼 침대로부터 상체를 벌떡 일으키기까지 했다.

“헉!”

이마에 땀이 비 오듯이 흘렀고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남부 대륙 최고의 살수 집단인 대자객신전의 제일의 자객이었던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어떤 일로 지금처럼 충격을 받고 식은땀을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대체 그 자신이 왜 그런 꿈을 꾸어야 했는지도 혼란스러웠지만 무엇보다도 다크퍼스들 200명을 도륙한 대살육자 이리스란 존재에 대해 한없는 위축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에 비하면 테세우스 그 자신의 전투 능력은 고작해야 다크퍼스 한 명을 불러내어 그의 힘을 사용하는 소환 기술 정도랄까.

물론 그 자체만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꿈속의 세상은 어느 곳이기에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테세우스는 물끄러미 허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거긴 어디지? 그리고 이리스란 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바로 그때 테라스 바깥으로부터 한 남자의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곳은 나카스니아 대륙이라네. 그리고 그 이리스란 자는 실제로 존재한다네.”

테세우스는 갑작스런 음성에 깜짝 놀라고 만다.

“누구냐!”

그러자 테라스 접이문이 스르르 열리며 거대한 몸집의 군장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세우스는 매우 낯이 익은 그 존재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대는 아르!”

“소환도 하지 않았는데 내 스스로 검에서 튀어나오니 놀랐는가.”

“후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는 바로 테세우스와 소환 계약을 맺고 검에 봉인이 된 다크퍼스로서 이 세계에서는 소위 대악령이라 불리는 아르였다.

그런데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체 그대가 왜?”

다크퍼스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세상에는 가끔 예기치 않는 일이 일어나는 법이라네. 자네 역시 그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너무 놀라거나 내게 거부감을 가지지 말아 주게나. 그동안은 내가 자네를 위해 많은 전투를 치러 주었으니 이번에는 자네가 내 말 좀 들어줘야겠네.”

“말이라니?”

테세우스는 대체 다크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직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다크퍼스가 거실 중앙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만 테세우스에게도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얘기나 나눔세.”

“…….”

잠시 후 탁자 하나를 놓고 테세우스는 검은 뿔 투구의 다크퍼스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알려 주고 싶은 것은 방금 전 자네가 꾼 꿈속 장면은 하나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서 의식 변환 기억으로 전달한 실제 상황이라네. 내가 왜 봉인된 검으로부터 나와서 갑작스레 그런 일을 했는지 궁금할 텐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난 처음부터 자네 검에 봉인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소환 명령에 마지못해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지.”

그 말에 테세우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소환에 응했단 말인지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다크퍼스는 그런 그의 의중을 잘 아는지 계속해서 설명에 들어갔다.

“아까 자네가 보았던 세계는 나카스니아 대륙으로서 이곳 인간 차원과는 다른 별개의 공간이라네. 하지만 그 이리스란 자는 자네와 같은 인간 종족 출신으로서 그곳에서 대단한 악명을 날렸던 무시무시한 살육자라네. 세상에 그와 같이 독종에다가 성질 더러운 인간은 아마도 다신 없을 걸세. 그나마 다행인지 현재는 이곳에 내려와서는 어딘가에 조용히 은둔하며 지낸다는 소문이 있지.”

테세우스는 상대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했지만 그 이리스란 자가 현재 이곳 대륙에 있다는 말에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인간 세계에 있단 말이오?”

“아마도 그 이름을 들어 보면 잘 알 걸세. 여기에서도 꽤 잘 알려진 자이니까.”

“그가 대체 누구요?”

“아독이라 하지.”

아독이라는 말에 테세우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중부와 북부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흑검사로서 그에 대한 일화는 드넓은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한 다른 차원 세계에서 이리스란 이름으로 활약을 했다는 사실은 처음 들어 보는 내용이었다.

다크퍼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네도 보았듯이 그자의 전투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나 할까. 이런 얘기하고 싫지만 당시 이리스가 이백여 명의 다크퍼스들을 살육했을 때 나 역시 그들 중에 하나였다네.”

“그대가!”

“빌어먹을! 내 운명이 다하지 않았는지 나는 시체 더미에 묻혀 유일하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날 충격으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지. 하필 이리스가 거기에 나타나다니!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었어. 어쨌든 나는 그곳으로부터 겨우 탈출을 하여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다크퍼스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그들은 상대가 이리스란 사실만으로 기겁을 하고는 나서기를 꺼려했지…….”

그 말을 하는 아르의 표정은 정말이지 생각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꺼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니, 굳이 변명을 하자면 어차피 용족과 어둠의 종족과 일전을 벌어야만 하는 이리스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그저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까. 하지만 나카스니아 대륙 최후의 전쟁 막바지에 이리스는 차원의 문을 통해서 인간 종족을 데리고 바로 이곳 세상으로 사라져 버렸네. 결론적으로 그는 인간 세상으로 무사하게 귀환했고 역사는 그것으로 기록을 마쳐야만 했지. 하지만…….”

아르는 말하다 말고 잠시 허탈한 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테세우스에게는 여전히 이상하게 보였지만 이미 그의 얘기에 빠져 들었는지라 자기도 모르게 재촉하고 말았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기는…… 그저 더러운 기분이랄까. 명색이 다크퍼스란 암흑의 권능을 부여받은 전투 정령들이건만 인간에 지나지 않는 이리스에게 집단으로 학살당했으니…… 그 얘깃거리는 나카스니아 대륙에서 두고두고 회자거리가 되지 않았는가. 한마디로 창피하다 못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한다고나 할까. 용족이고 그 외에 미천한 마물들마저 다크퍼스들을 우습게 여기니 우리의 활동 영역은 주로 자네 같은 인간 소환 자들과 계약을 하여 대신 전투를 치르는 것이 고작이랄까. 이게 다 그 이리스란 작자 덕분이 아닌가. 젠장!”

대충 얘기를 들은 테세우스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대가 나와의 소환 계약을 위장하여 내 검에 봉인된 척, 수많은 전투를 도와주고 이제와 내 앞에 나타나 그 모든 얘기들을 소상히 밝힐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크퍼스가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물론 있고말고. 크크.”

“그게 뭡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본론을 말하려 했다네. 자, 들어 보게나. 이리스에게 수모와 치욕을 당한 다크퍼스 종족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특단의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

“특단의 방법이라니요!”

“우리들조차 결코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명예 회복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지. 나카스니아 대륙의 역사는 인간 기준으로 장구한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네. 그러니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까. 당시에는 인간 종족이 전혀 출현하지 않았던 오로지 용족과 정령 그리고 다크퍼스만이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지. 그리고 대륙의 패권을 쥐기 위해 용족과 다크퍼스가 꽤나 오랫동안 힘겨루기를 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혜성처럼 등장해서는 막강한 전투력을 앞세워 용족들을 마구 쓸어 버렸었지. 알고 보니 그녀는 용족의 절대적인 권력자 제일대 신성마저도 껄끄럽게 여기는 존재였다네.”

“방금 그녀라 했는데, 그렇다면 여자란 말이오?”

“내 말 끝까지 들어 보게나. 여자도 여자 나름이랄까. 설마하니 다크퍼스들에게 어둠의 원천과 포스를 제공하는 어둠의 여신 본인이 직접 강림하리라고는 그 누구조차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

어둠의 여신이라는 말에 테세우스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혀 생소한 개념이랄까.

하기야 다른 이야기 내용조차 이 세계와는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하니 그의 솔직한 심정은 어느 선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도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강자 논리만이 통하는 나카스니아 대륙에 강해지고 싶은 욕망의 정령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다크퍼스로 전향하는 활발한 시기가 있었네. 그 이후 그녀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고 또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얼마 전 이리스 때문에 이제 그 명목마저 희미해져 가는 우리들에게 다시 강림을 하신 것일세.”

그 대목에서 그는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감격에 겨웠는지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어 갔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여신이고 뭐고 간에 그런 허황된 얘기들이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이다.

다크퍼스는 그런 그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듯 드디어 얘기의 결말 부분을 지으려 했다.

“아마도 자넨 인간이니 지금까지 내 얘기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걸세. 하지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해서도 아니 될 것이야. 사실 나란 존재부터가 이곳 세상에서 활개를 치며 실재한다는 것 또한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후후.”

결국 테세우스가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것이오!”

그러자 다크퍼스 역시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매개체라네.”

“매개체라니요?”

“여신께서는 어둠의 힘이 너무 강하여 인간 세계에 직접 강림을 하셨다가는 그 영향이 일파만파 커질 수 있기에 인간들 중에 어둠의 포스를 지닌 자를 선택해서 그의 에너지와 희석함과 동시에 안내자로 삼으려 하셨네.”

테세우스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하니, 그 대상이 나란 말이오?”

다크퍼스가 입가에 모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임무는 바로 그 적격한 자를 찾는 것이었지.”

“왜 나를?”

“그거야 자네 스스로가 더 잘 알 텐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설마 자네의 뿌리가 어떻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

가뜩이나 하얗게 질려 있는 그의 안색은 아예 돌처럼 단단히 굳어졌으니, 아마도 저 능글맞은 다크퍼스에게 무엇인가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북쪽 대륙에는 흑운성의 기운을 받은 존재가 흑마술 군단을 이끌고 세상을 집어삼킬 듯했지. 당시 그의 힘에 맞설 수 있는 자들은 이리스의 환생자 아독과 용족의 신성 아케이든의 환생자 이카루시아 정도였을 정도로 그의 힘은 그야말로 강대함 그 자체였다네. 이 정도까지 얘기했는데도 시치미를 뚝 뗄 것인가.”

“…….”

테세우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굵고 칙칙한 음성.

“자네가 흑마술 군단 총사령관 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 유일하게 그 비밀을 알고 있던 자네 어머니는 이곳 남부 대륙으로 오자마자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숨을 거두었으니 말일세.”

순간 테세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손으로 탁자를 쳤다.

꽝!

“더 이상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자 다크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살을 부리듯 말했다.

“후후. 어차피 거기까지만 얘기하려 했으니 흥분을 가라앉히게나. 그나저나 하던 얘기마저 하기로 하지. 어쨌든 어둠의 여신께서 인간 세계로 강림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리스의 환생자인 아독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마침 론의 아들이 이 세계에 있으니 자네의 도움을 받으려는 걸세.”

“누구 맘대로!”

“싫든 좋든 그렇게 해야 할 걸세.”

“닥쳐! 헛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꺼져!”

“자네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흑운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어둠의 권능을 사용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네. 그렇게 본다면 자넨 같은 원천이자 동향이라 할 수 있는 어둠의 여신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할 테니 쉽게 말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랄까.”

다크퍼스는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희미하게 사라지려 했다.

스르르.

또다시 들려오는 그의 음성.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네. 조만간 그분께서 자네에게 모습을 드러낼 걸세. 다소 장난을 좋아하니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기대하게나. 그럼 난 내 임무를 마쳤으니 그만 귀환을 해야겠지. 후후. 론의 후계자여! 부디 어둠의 힘을 되찾고 부활하기를 바라네!”

팟!

테세우스는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응시만 할 뿐 한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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