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6 패권 제국(5권) (37/81)
  • CHAPTER. 36 패권 제국

    팔라카스 제국으로부터 황제 게라쿠스의 특사 레온이 다녀간 그날, 국왕 지드는 취임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부랴부랴 긴급 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새로운 왕이 이끄는 신생 국가인지라 아직은 내각의 각 중요 부서장들조차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열린 회의인지라 일단은 건국 초기의 고위 공신들을 위주로 참석케 하였다.

    그들 중에는 폭풍 용병단의 살아 있는 전설인 티온과 이리가시 용병 집단 대장인 이리가시가 가장 영향력 있는 쌍두마차로서 각각 지드의 좌우에서 든든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임시로 정한 자리 배석은 다음과 같았다.

    티온

    이리가시

    그 둘이 국왕 옆에 착석해 있었고 그 아래 넓고 기다란 테이블에는 핵심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있었다.

    오른쪽부터 살펴보자면 지드의 경호대장 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대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경호수장 지노

    경호대원 1호 비스크

    경호대원 2호 게리

    경호대원 3호 크리스

    경호대원 8호 아레스

    이렇게 다섯 명이 앉아 있었고 맞은편 왼쪽에는 지드가 아카시안과 그 세 동생들을 위해 경호 임무를 띠고 팔라카스 제국의 하류 구역에 돌아와서야 뒤늦게 인연을 맺은 자들이 있었다.

    자리 배석을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리가시 용병 집단 작전 참모 하키리우스

    지드 용병 집단 돌격대장 스카페트

    전직 용병대장 에르가니아

    전직 용병부대장 카르발디

    아르카도 제국 사관학교 출신이자 현직 근위대장 아라퀘스

    국왕 개인 비서 헤라

    지드는 그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내심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믿음직스런 존재들이라 할까. 신생 국왕의 관료들답게 하나같이 비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팔라카스 제국으로부터 새벽에 특사가 방문했던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했고 그 반응은 예상대로 매우 충격적이었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얼떨떨한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고 개중에는 신음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거참, 안하무인이 따로 없군.”

    “한마디로 날벼락 같은 얘기네요! 우리가 마치 이곳 부족민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것처럼 말하는데 엄연히 그들과 충분한 타협을 보고 난 뒤에 건국을 준비해 온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현재 주민들 절반이 부족민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딴 망발을 하는 건지.”

    수장 지노의 말에 스카페트가 덧붙여 말했다.

    “저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자신들의 영토 가까운 국경지대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아무래도 생트집을 잡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트집이라지만 이건 밑도 끝도 없이 당장 떠나라 하다니.”

    이번엔 티온이 말문을 열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향후 대처에 관한 얘기들부터 나눕시다.”

    티온은 말하다 말고 자신과 대등한 영향력을 지닌 이리가시에게 물었다.

    “대장께서는 이번 사태를 어찌 생각하시오.”

    그러자 이리가시는 손으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소 고뇌에 빠진 듯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 역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닥쳐 온 것 같소. 황제가 특사를 파견해서 그런 말을 국왕 폐하께 전했다는 것은 경고성이 아니라 아예 협박에 가까운 일인데 만일 그들의 뜻대로 하지 않을 경우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티온 역시 그의 말에 동조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이번 사태를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저들의 말대로 왕국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끝까지 남아서 대항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오.”

    “한마디로 공갈 협박이 맞는군요.”

    그 말에 참석자들의 반응은 찬물을 끼얹은 듯 매우 무거워 보였다.

    “…….”

    회의실에는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고 그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여는 자들이 없었다.

    지드 역시 별다른 대안 없이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국왕으로서 저들에게 뭔가 자신감을 심어 줄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만일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만 한다면 이제 겨우 건국 초기 왕국이 승리할 확률은 거의 희박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선뜻 왕국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자는 말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 나라를 어찌 세웠던가.

    오랜 핍박을 받아 왔던 하류 구역 주민들이 저들로부터 벗어나서 세운 독립 국가가 아니던가.

    그 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고 아직도 울분과 한이 남아 있는 상태이건만, 저 오만하고 야욕적인 제국은 이제 와서 여기 그 보금자리마저 뺏으려 하니 한마디로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 왔던 국왕 지드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작전 참모 하키리우스가 말문을 열었다.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지금 회의 골자는 저들의 말대로 이곳을 떠나느냐 아니면 끝까지 대항을 하느냐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팔라카스 제국이 노리는 것은 이곳에 세운 왕국이나 영토가 아닌 그 주체들에 대한 말살 정책이 아닌가 봅니다.”

    “주체라면…….”

    “바로 국왕 폐하를 비롯한 신생 왕국의 모든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출신이 하류 구역 출신들이자 용병들로서 수년 전 제국에 대항했던 바로 그 일을 황제 게라쿠스는 아직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황제 즉위 이전부터 감히 제국에 대항했던 용병 단체나 하류검사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이백여 개에 달했던 용병 집단들이 그의 척결 정치에 의해서 거의 모두 와해가 되었고 이제는 이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지드는 더욱 굳어진 표정으로 하키리우스의 말뜻을 받아들였다.

    “결국 우리가 어디로 떠나든지 끝까지 추격해 와서는 모두 말살을 한다 그 말뜻이군요.”

    “그렇습니다.”

    그의 대답에 회의실은 마치 장례식이라도 치른 것처럼 침울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 이리가시가 하키리우스에게 말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 말에 하키리우스가 다소 진중한 표정으로 일관하더니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설령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들 황제 게라쿠스는 또 다른 트집을 걸고 나올 것이 틀림없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국과의 전쟁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전쟁이란 말에 참석자들은 다시 한 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잠시 침묵이 흐른 가운데 이번엔 티온이 말했다.

    “사실 다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 아니었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자체가 몹시도 두렵고 무모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는 나와 봐야 아는 것이니 모두들 침울해 할 필요는 없소이다.”

    이번엔 다소 괄괄한 성격의 스카페트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거대한 제국이 아닙니까. 수십 수백 번을 싸운들 우리가 패할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어찌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답니까.”

    순간 티온이 화를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탁자를 쳤다.

    탁!

    “그게 무슨 망발인가!”

    갑작스런 호통에 육중한 체격의 스카페트가 움찔거렸다.

    상대 역시 자신처럼 돌격대장 출신이었던데다 지금은 그도 존경해 마지않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 아니던가.

    “저, 저는 그냥 현실적으로나 전력으로나…….”

    티온이 혀를 끌끌 찼다.

    “자네 나이면 뜨거운 쇠도 갈아 마실 정도로 혈기가 왕성할 텐데 명색이 요즘 제일 잘나가는 돌격대장이란 자가 그런 약한 소리를 하니 이거 정말 실망이 크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는군.”

    그제야 스카페트가 머리를 숙여 공손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선배님 앞에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실수를 하다마다. 자네 직분이라면 설령 사태가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일지라도 오히려 전의를 심어 줄 위치에 있거늘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내 어찌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내 젊은 시절은 절대 후퇴란 없었네. 내가 유일하게 존경해 마지않는 아르게논 그 친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오히려 이번 사태를 반겼을 걸세.”

    아르게논 얘기가 나오자 참석자들의 눈은 더욱 빛이 났고 그의 말에 좀 더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한참 열세에 놓인 처지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는 일이야말로 삶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준다고 늘 얘기하곤 그랬지. 정말이지 매우 긍정적이고 특이한 사고를 지닌 친구였는데…….”

    그는 말하다 말고 옛 친구가 눈앞에 아른거렸는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그가 그리워지는군. 그 친구라면 이번 사태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을 텐데 말이야.”

    한편 지드는 아르게논의 얘기가 나오자 숙연한 마음이 들면서도 눈빛이 반짝였다.

    ‘아…….’

    그렇지 않아도 그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이번 사태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던 터였기에 말이다.

    어쨌든 티온이 그의 생각을 대변해 주지 않았던가.

    그는 오히려 이번 사태를 반겼을 거요. 한참 열세에 놓인 처지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는 일이야말로 삶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준다나요.

    지드의 머릿속에는 티온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강하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사실 그가 바랐던 것은 구체적인 대응책이나 혹은 해결책 등의 의견이 아닌 용기였다. 아니 희망이라 할까. 제국에 대항할 명분 있는 메시지를 얻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날 회의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가운데 막을 내렸다.

    ***

    저녁 무렵 지드는 국왕실로 돌아와서는 테라스로 나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휭!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졌다.

    늦가을의 풍경은 왠지 모르게 그의 심정과도 같이 쓸쓸해 보였던가.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난간을 꼭 쥐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떡하지.’

    그의 머릿속에는 팔라카스 제국과의 전쟁에 대한 일로 가득 차 있었으니 정말이지 앞길이 막막해 보였다. 명색이 국왕의 신분인 그 자신이 한숨이나 쉬고 있다는 그 자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는 국왕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옆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툭툭 박으면서까지 깊은 고뇌와 자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왕이 이렇게 힘든 자리인 줄 알았다면…….’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똑―

    뒤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

    “근위대장 아라퀘스입니다.”

    “무슨 일인가.”

    “하키리우스 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순간 풀 죽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서 들라고 하게.”

    잠시 후 아담한 국왕 접견실에서 지드가 고령의 하키리우스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웬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회의 때 못다 한 생각을 이렇게 개인적으로라도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요.”

    지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못다 한 생각이라니요?”

    “현재 국왕 폐하의 안색을 뵈니 이번 일로 상당히 고심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디 나뿐이겠습니까. 모든 대신들 역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 아닙니까.”

    “물론 저 역시 현재 이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라 봅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신다면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리라 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요?”

    “적어도 제 소견으로는 말입니다.”

    그의 말에 지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지난번 공청회장에서 자신을 그렇게도 깎아내리며 날카로운 입담을 보였던 그가, 지금은 자신에게 충정 어린 눈길을 쏟고 있다니.

    그에 대해 조금은 어색한 면도 있었지만 이 마당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대의 소견을 한번 듣고 싶군요.”

    하키리우스는 차분한 눈길로 지드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계절적으로 지금이 늦가을이란 점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다니요?”

    “적어도 우리는 반년 정도의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죠.”

    “무슨 말씀인지 대체…….”

    지드는 계속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하키리우스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팔라카스 제국은 군단을 구성하여 이곳을 침략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인 만큼 그들은 내년 봄이나 초여름에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 그런가요.”

    “이 지역은 유난히 폭설이 잦고 겨울이 길며 눈이 녹는 시점 또한 늦봄까지 기다려야 하니 중무장한 제국의 군단 병사들도 그전에는 감히 올 엄두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드의 안색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말이 조금은 희망적이지만 그저 약간의 시간만 벌 수 있을 뿐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얘기가 아니던가.

    그의 관점에서는 반년 정도 시간을 벌기보다는 한참 열세에 놓여 있는 왕국의 미래가 여전히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키리우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이곳은 산악 지형의 지리적인 특성을 모두 갖춘 천연의 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애초부터 사방이 돌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터를 잡게 한 것입니다. 들어오는 진입 구간에는 적들의 공성 파괴기가 접근할 수 없도록 울퉁불퉁한 바위 지면을 자연 그대로 놔두었고 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보병 방패 군단 역시 대열을 맞추는 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성벽은 다른 왕국의 것보다 훨씬 높고 두껍게 지었으며 망루마저 지붕을 쌓았으니 저들은 사다리마저 쉽게 대어 놓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 외에 여러 부분도 다소 신경을 썼는데 나중에 자세히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지드는 그 대목에서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서 왕국의 위치에서부터 여타 세심한 부분까지 관여를 하여 생각했으니 말이다.

    과연 그는 이리가시 용병 집단의 매우 유능한 참모가 확실한 듯했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에 지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렇다면 성벽 얘기는 그저 서론에 불과하다는 건데.

    “본론이라면 다른 말씀이 있으신지요.”

    “물론입니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부터 그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려고요.”

    “음?”

    “지금부터 국왕 폐하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들과 전 국민들이 힘을 합쳐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전에 당장 필요한 것은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건국 공신들의 보직 문제입니다.”

    그 대목에서는 지드는 공감했다.

    “나 역시 그 일이 시급하다 생각하긴 하지만, 헌데 그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이니…….”

    “그렇다면 제가 한번 의견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대가요?”

    지드는 잠시 멈칫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작전 참모라지만 용병 집단에 속한 직급이고, 더욱이 티온과 이리가시보다 그 영향력에 있어서 한 등급 밑에 있질 않은가.

    그런데 어찌 혼자서 공직 결정에 대한 일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미 티온 님과 이리가시 님과 상의를 드린 끝에 나온 내용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편히 경청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제야 지드가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마음 편히 듣겠소.”

    “일단 공신이란 의미로 보직을 내려야 하는 일은 뒤로 미루어 두심이 좋을 듯합니다.”

    “뒤로 미루다니요.”

    “사실 그들에게는 공신이란 말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비록 건국을 함께 했던 자들은 분명하지만 이곳 부족민들과 아무런 충돌이 없었기에 전쟁은 물론이고 소소한 전투조차 없으니 그저 건물 짓는 일만 거들었을 뿐 공신의 자격은 없다는 말이 옳은 듯 보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공신의 범주에 속할 만한 임무들을 그들에게 내주어 경쟁을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그 등급을 매겨 왕국의 주요 공직을 배정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순간 지드의 눈빛이 모처럼만에 번뜩였다.

    “계속 말해 보시오.”

    “우선 인재들을 세 개 조로 나누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첫째 조는 경호수장 지노를 지휘관으로 내정하고 그의 대원들인 일 호 비스크, 이 호 게리, 삼 호 크리스, 팔 호 아레스를 비롯하여 병사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 할 것이고 두 번째 조는 이리가시 용병대장을 지휘관으로 저와 용병대원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조는 에르가니아 용병대장을 지휘관으로 카르발디와 현 근위대장인 아라퀘스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들 역시 일정의 병사들을 대동토록 할 것입니다.”

    “그들 임무가 뭡니까?”

    “주변 세력을 넓히는 일입니다.”

    “주변 세력이라…….”

    “팔라카스 제국에 대항키 위해서는 현재 병력 규모보다 최고 열 배는 되어야 합니다.”

    그 말에 지드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열 배라고요! 대체 그 많은 병력을 어디서?”

    하키리우스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미 주변 영토에 대한 사전 조사를 끝낸 상태입니다. 일단 주변을 시작으로 더 나아가서는 서쪽의 광활한 숲과 동쪽의 평원 지대에 흩어져 있는 부족민들을 굴복시켜 북쪽의 산족들을 우리 측으로 전향을 유도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세 개 조가 각각의 병사들을 이끌고 원정길에 오르는 것이죠.”

    “과연 그들이 원정대에 순순히 굴복을 하겠습니까?”

    “물론 대항이 거셀 것입니다. 하지만 세 개 조의 원정대들은 서로의 경쟁 때문에 물불 가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리라 봅니다. 저들끼리는 신생 왕국에 대한 유리한 관직을 얻으려고 내심 그 열정들이 대단할 테니까요.”

    그 대목에서는 지드가 모처럼만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아주 괜찮은 묘안이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요. 그나저나 늦은 봄 제국의 군단이 침략해 오기 전에 그 임무를 끝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확장된 영토로부터 추가된 병력의 덕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지드는 감탄해 마지않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원정 결과에 따라서 각 지휘관들에게 왕국에 걸맞은 보직을 배정하게 한다. 정말 획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군요. 그나저나 나라고 가만있을 수는 없잖소. 내가 할 일은 뭐 없겠소.”

    하키리우스가 빙그레 웃고 말았다.

    “국왕 폐하께서는 그저 계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저희들로서는 엄청난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이니 딱히 할 일은 없으십니다. 다만 티온 님께서는 이곳에 남으시어 계속해서 몰려드는 떠돌이 용병들을 받아 주는 일을 하시기로 했지요.”

    “이제 보니 나만 쏙 빼놓고 이미 사전에 결정을 보신 모양이군요. 나 참.”

    “그 점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아직 결정을 본 것은 아니고 국왕 폐하께 먼저 아뢰어 하명을 얻기 위해 이 자리를 찾아뵌 것입니다.”

    지드 역시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이지 힘이 나는군요. 아니 희망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아직은 왕으로서 부덕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뭔지를 놓고 고심했는데 일거에 해결을 해 주는 듯 보입니다.”

    “그러시다면 허락을 해 주시는 건지요.”

    “허락을 하다마다요. 시간이 급한데 당장 내일부터라도 시행을 하세요.”

    “그러시다면 하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키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지드는 이만저만 믿음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이리가시 용병 집단을 위해 평생 헌신을 해 왔던 그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왕국을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잠시 후 지드는 바깥 테라스에 나가서는 제법 쌀쌀하게 부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해결 못한 일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국호(國號)를 짓는 일이었다.

    ‘나라 이름을 대체 뭐로 짓지.’

    신생 국가의 명칭은 반드시 건국왕이 지어야 한다는 의례 때문인지 지드는 그조차 골머리를 앓는 듯 보였다.

    ‘에고, 워낙 배운 것이 없어서…… 뭐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지.’

    그때 지드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퉁기었다.

    탁!

    “아, 그렇지! 나도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는 다소 흥분된 얼구로 테라스를 왔다 갔다 하더니만 다시 중얼거렸다.

    “자고로 전쟁에는 병법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스승님께서는 늘 말씀하셨는데.”

    그는 냅다 내실로 뛰어 들어가더니만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방문을 불쑥 열고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으니.

    “뭐 하세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웃통을 벗고 있던 지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야!”

    “저 헤라예요.”

    “그걸 몰라서 물어! 노크도 안 하고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해.”

    “그치만 문이 열려 있었는걸요?”

    “그래도 인기척은 하고 들어와야지. 그리고 여긴 국왕 실 아니냐.”

    “전 국광 폐하 개인 비서잖아요. 혹시라도 문 열고 주무시는 줄 알고 문단속하려고요.”

    “알았다 알았어. 그만 하자.”

    지드가 웃옷을 입고 긴 장화 같은 것을 신으려 하자 헤라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얼레, 어디 가시려고요?”

    “응. 좀 먼 곳에.”

    “왜요?”

    “그냥 그런 줄 알아.”

    “저는 개인 비서로서 알 권리가 있는데요. 그리고 국왕 폐하는 사적으로 마음대로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죠?”

    “넌 그냥 모른 척해라.”

    “그렇게는 안 되는데요.”

    “뭐야!”

    “티온 님께서 국왕 폐하에 대한 일들을 반드시 보고하라 그랬거든요.”

    지드는 여전히 옷가지를 배낭에 챙기면서 귀찮은 듯 말했다.

    “거참, 성가시게 구는군.”

    “아무튼 안 돼요.”

    참으로 완강하게 나왔다.

    그러자 지드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너. 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을래?”

    “여행이요?”

    “내가 가는 곳이 왔다갔다 고작해야 열흘이 걸릴 텐데 같이 다녀오면 어떻겠어? 보아하니 요즘 들어 이곳에만 갇혀 지내는 것이 답답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후후.”

    “…….”

    당장 대답을 하지 못하는 헤라, 몰론 총명한 그녀는 지드가 자신의 입을 막으려고 잔머리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도 세상 밖 구경을 하고 싶었으니.

    “열흘이면 된다고요?”

    “내 분명 약속하지. 거기 가서 뭣 좀 가져오려고 말이야. 이게 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 네가 이해 좀 해 줘라.”

    “티온 님에게 뭐라 하지요……?”

    “편지를 남겨 두면 되지.”

    “아! 그 방법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같이 가요.”

    “역시 얘기가 통하는군.”

    “대신에, 날짜는 반드시 지켜야 해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왠지 그 표정 못 믿겠는데요? 같이 가는 게 불안해졌어.”

    “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보게나. 내가 국왕이란 것을 잊어버린 모양인데.”

    순간 헤라는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웁!”

    “하하!”

    ***

    팔라카스 제국 수도 중앙에 위치한 원형 경기장은 남부 대륙에서 만큼은 최대 규모로서 무려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최근 이곳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용병 척결 작전 시기 동안 잡혀 온 수천 명의 포로들을 사나운 맹수들과 전투를 붙여 놓고 있었다.

    이른바 처절한 죽음의 향연이었다.

    감히 제국에 대항했던 용병들에 대한 엄격한 처단식이라 할까.

    지난 5일 동안 무려 2천여 명의 포로들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맨손으로 수백 마리의 맹수들과 싸우다가 육신이 찢겨서 그들의 먹잇감이 되어 왔었다.

    그리고 오늘은 행사의 마지막 날로서 나머지 용병들이 앞서 간 동료들의 전철을 밟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와!

    와와―!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운 제국의 시민들은 자비나 배려와 같은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짐승들이 용병들을 덮칠 때 짜릿한 쾌감을 대리만족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사를 주관한 황제 게라쿠스와 그의 측근들 역시 시민들의 열렬한 반응에 매우 흡족해하고 있었다.

    황제 바로 옆자리에 착석해 있던 집정관 게라쿠스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주관하셨다니, 무척 훌륭한 생각이셨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동안 당숙께서는 용병 척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타지 생활만 수년 동안 하지 않았소. 그리고 오늘날 그 임무를 성공리에 마쳤으니 난 그 보답으로 이런 행사를 가지게 된 것이오. 그러니까 내 성의 있는 선물이라 받아 주면 좋겠소.”

    “정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사실 이번 행사를 진행함으로서 꽤나 골치가 아팠소. 원로원 늙은이들이 재정 문제를 들고 나와서는 꼬치꼬치 껴드는 바람에 말이오.”

    “그 작자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늘 트집만 잡으려고 안달이 나 있죠.”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잡아다가 저 아래 포로들과 함께 짐승의 밥으로 던져 주고 싶은 심정인데.”

    카르세크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만 그래도 그들은 팔라카스 제국의 원로원 의원들이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해를 끼치기보다는 여러모로 이용만 잘하시면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자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미 그들은 황제 폐하의 거대해진 위상에 눈치를 보는 신세들이 되었는지 수십 년간 하류 구역에서 착복한 불법 세금들을 모두 토해 놓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황제가 굳어진 인상이 풀리면 실소를 흘렸다.

    “하기야 그 돈으로 오늘날 이 멋진 행사를 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겠지. 하하.”

    카르세크는 황제의 비위를 계속해서 맞추기라도 할 듯 더욱 낮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지난번 용병 척결 원정길에 있어서 원로원으로부터 제법 성의 있는 도움을 받았었지요.”

    황제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움이라니요? 그자들이 그런 협조도 한답니까.”

    “자기들이 살려면 당연지사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후후.”

    “무슨 뜻이요?”

    “원로원에서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키우는 인물이 있는데 용병 척결 원정길에 동참케 함으로써 경험을 쌓게 하는 것 같습니다.”

    “대체 그가 누구요?”

    “혹시…… 자라투스 대공을 아십니까.”

    “물론 알다마다요. 그 작자는 원로원 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오.”

    “바로 그자가 천거한 인물입니다. 그 젊은 검사는 테세우스란 특수부 소속인데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전투력으로 제법 많은 공을 세웠다지 뭡니까.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임무 수행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으니 굳이 연관시키자면 원로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 검사가 그리도 대단한 능력을 갖추었소?”

    “갖추다마다요.”

    그러자 황제는 카르세크 뒤에 서 있는 레온을 흘깃 쳐다보더니만 다시 집정관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레온과 비교를 하자면 어떻소.”

    그러자 그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그건…… 그러니까 비교하기 좀…….”

    “당숙께서도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 직속 수하인 레온이 낫다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자의 능력도 워낙 뛰어나기에 말이죠.”

    “예상 밖에 대답이로군요. 그 어떤 자도 레온과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인데 말입니다. 레온이 제국의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강력한 무인(武人)이라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기야,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당숙께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필시 대단한 인물이 틀림없구려. 뭐 우리로선 좋을 게 없는 듯 보이는데 심히 경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도 예의 주시하며 살펴보고 있는데 워낙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해서 대공 자라투스가 감싸고도는 바람에 직접적인 견제는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머지않아 그자가 특수부 검사 제5지부장에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 봐야 일개 검사에 지나지 않겠지요.”

    “하기야 그건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니라 봅니다.”

    한편 레온은 뒤에 서서 황제와 집정관이 대화 내용을 묵묵히 듣고 있으면서도 내심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유인즉 테세우스와 비교를 당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자존심이 무척 상한다고나 할까.

    언제부터 그 자식이 자신의 코밑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로 커졌단 말인가. 하기야 원로원에서 팍팍 밀어 주니 가능한 일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자신이 가늠해 볼 때에도 녀석의 전투 능력이 절대로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 들어서 세인들이 말하기를 그만이 레온 자신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호적수라는 말에 이만저만 심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가 그 자식과 봐야 할 텐데.’

    그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까지 꽉 쥐고는 미리부터 전의를 불태우는 듯 보였다.

    한편 황제 게라쿠스는 문득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만 귀족 부인들 틈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카시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황제가 손짓을 보내자 귀족 부인들은 저마다 황급히 일어나 주변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곳엔 잔인한 광경을 보다 못해 엎드리다시피 한 아카시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말문을 열었다.

    “머지않아 황후가 될 텐데 고작해야 저까짓 구경거리를 무서워하다니. 쯧쯧.”

    순간 아카시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래도 그는 황제가 아니던가.

    “아!”

    다소 사악한 미소를 흘리는 게라쿠스.

    “후후. 그냥 앉아 있게나. 난 그대와 편히 대화나 나누려고 온 것이니까.”

    “…….”

    그녀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황제가 입맛을 다셨다.

    “쳇. 나만 나타나면 아예 말도 하기 싫다 이건가.”

    “…….”

    “네가 좋든 싫든 간에 오늘은 그동안 미루어 왔던 본론적인 얘기를 할 거야. 내 황제 체면에도 몇 번이나 구애를 했건만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는다는 나를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네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 그랬다면 벌써 뭔 일이 일어났겠지. 하지만 난 결코 그리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그대의 아버지는 내 선왕이 가장 아꼈던 충성스런 신하이니 그 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다가, 무엇보다도 네가 먼저 내 마음을 받아들여 스스로 와 주는 것이 적절한 수순이라 생각했거든. 하지만 벌써 수년이 흘렀고, 지금은 인내의 한계점까지 다다랐다는 점을 말해 주고 싶군.”

    황제는 말하다 말고 인상을 팍 썼다.

    갑자기 울화가 치민다는 듯 주먹까지 쥐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 오늘은 뭔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대로 계속해서 기다린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아서 오늘은 네 마음을 움직일 뭔가를 준비해 두었지.”

    그제까지 반응이 없었던 아카시안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다시 가득하기 시작했다.

    그때 황제가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자 즉시 나팔이 울렸다.

    그리고 원형 경기장 한쪽 문이 열리면서 여인들 네 명이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왔다.

    아카시안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으니.

    “저, 저들은!”

    게라쿠스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자네가 가장 아끼는 시종들이라. 후후. 지금까진 용병들이 짐승들의 밥이 되었지만 그도 이젠 싫증이 나려 하는데 아마 저 계집들이 조금은 분위기를 바꾸어 주려나?”

    아카시안이 참다못해 외쳤다.

    “그만두세요! 아무런 죄도 없는 저들을 당장 풀어 주세요.”

    “오호라! 저들이 죄가 없다니? 그건 무슨 망발이지? 네가 내 청혼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저년들을 붙여 놓았건만 오히려 한통속이 되어 나를 멀리하게 만들었으니……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억지라니! 황제의 말은 곧 국법이거늘, 난 네 그 태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아카시안은 다급한 심정으로 다시 절규하듯 애원했다.

    “제발 저들을 살려 주세요.”

    황제가 사악한 미소를 흘리더니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부터 당장 내 침소에 들겠느냐. 후후.”

    이에 아카시안이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 그건…….”

    “빌어먹을! 별로 기대도 안 했다. 여하튼 지금 내 심정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 오늘은 시종들의 비명에 만족하도록 노력해야겠지.”

    경기장 곳곳에는 이미 용병들의 뜯겨진 내장과 살점들로 참혹한 현장이 되어 있건만, 짐승들은 아직도 한참 굶주렸는지 뒤이어 등장한 연약한 시종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제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철장 속의 짐승들이 다시 경기장 한복판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으르렁

    이어 시종들의 절규가 들려왔으니.

    “사, 살려 줘요!”

    “아악!”

    “아아아아!”

    그처럼 미친 듯이 환호를 질러 대었던 관중들조차 여인들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모습에는 다들 말문이 막혔는지 그저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움직임만 있을 뿐이었다.

    “뭐, 뭐야, 저 여인들은.”

    “복장으로 보아서 황궁 시녀들 같은데?”

    “대체 뭐 잘못을 했기에 저런 끔찍한 벌을 받는 게지.”

    “에고. 황제 폐하의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소문이 있는데 혹시…….”

    “쉿! 함부로 폐하를 거론하다니. 자네도 사자 밥이 되고 싶은 것인가.”

    “그, 그렇다는 거지, 나 참.”

    “그럼 입조심하게나. 주둥아리 잘못 놀려서 끌려간 자들이 꽤 된다고 하던데.”

    “자, 자네만큼은 못 들은 걸로 하게나.”

    아카시안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그만 해요! 흑! 제발 멈추게 해 달라고요!”

    “결국 시종들의 목숨보다도 네 그 몸뚱이라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흑!”

    게라쿠스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더니만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해 봐야 시종들이었다만, 다음에는 네가 가장 아끼는 녀석들 차례라는 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두고 보라고.”

    한마디 하고 뒤로 사라지는 황제에 아카시안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의 의미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고 말았으니.

    “안, 안 돼! 저, 절대로.”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세 명의 동생들이 있는데 설마하니 황제의 다음 목표가 그들을 말하는 것이던가!

    ***

    같은 시각, 상석의 오른쪽 원로원 의원들이 몰려 있는 곳에는 대공 자라투스와 제5지부 수장 카이, 그리고 테세우스가 앉아 있었다.

    경기장은 이미 참혹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고, 그들 셋은 하나같이 저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측근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그제야 저들끼리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저건 좀 심하군. 시녀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대공의 말에 카이 역시 공감했다.

    “황제 폐하께서 요즘 들어서 광기가 부쩍 심해진 듯 보입니다.”

    “갑자기 그런 건 아니었지. 원래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다고나 할까. 자네도 알다시피 한때 나는 폐하의 유년기 시절 검술 담당관을 지내지 않았던가. 당시에도 매우 까다로운 성격에 폭력적 성향이 있었지.”

    카이가 저편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카시안을 쳐다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께서 푹 빠진 저 여자 때문에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웬만하면 구애를 받아들이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버티는 건지. 쳇!”

    그러자 대공이 카이를 다소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저 여인의 입장에 놓여 있다면 황제의 청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겠냐?”

    “그, 그건 좀.”

    “거 보게나. 더군다나 저 여인의 아버지는 전대 황제 폐하의 가장 충성스런 신하로서 그 인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많은 공을 세운 장군이란 말이지. 과연 그 아버지의 딸답게 매우 지조가 강하고 성격도 곧바른 것 같은데, 하필 황제 폐하의 눈에 들었으니…… 꽤 고생이 심할 걸세.”

    “그래도 상대는 황제인데 웬만하면 그냥.”

    순간 대공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러워!”

    “에고 깜짝이야.”

    “이런 줏대 없는 생각을 가진 놈이 제오 지부 수장이라니. 쯧쯧.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되는군.”

    그는 말하다 말고 옆에 묵묵히 듣고만 있는 테세우스를 흘깃 쳐다보더니만 다시 카이에게 말했다.

    “테세우스 좀 본받게나. 사내대장부다운 그 기상을 말이야.”

    카이가 불끈했다.

    “하필 테세우스 얘기는 왜 합니까? 저는 저고 그는 그 아닙니까. 각자 다 개성이 다를 뿐이죠!”

    그때 갑자기 대공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아, 그나저나 앞으로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거참.”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내년부터 똥줄이 타들어 가게 생겼으니 하는 말일세. 어쩌면 팔라카스 제국의 군부 소속의 관료들과 모든 병사들은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삶을 마감해야 할지 모른단 말이지.”

    “전쟁이라니요.”

    “아까 낮에 황제 폐하께서 드디어 원로원 최고 의장님과 여타 최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주 청천병력과도 같은 얘기로 참석자들을 무척이나 놀라게 만들었다네.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고 내용을 말하자면 내년 초여름이 시작될 6월을 기점으로 대규모 군단들을 편성하여 정복길에 오를 것이라나.”

    “정복이요!”

    “그럼세. 말 그대로 정복이지.”

    “어디를 대상으로 말이죠?”

    “남부 대륙 전체…….”

    그 말에 수장 카이뿐만 아니라 옆에서 조용히 듣고 만 있었던 테세우스 역시 무척 놀라는 기색이었다. 카이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남부 대륙 전체라면 모든 나라들을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얘기잖아요.”

    “그런 셈이지.”

    “그게 말이 되나요.”

    “글쎄 말이다. 남부 대륙에는 우리 팔라카스 제국 외에 무려 네 개 제국이 당당히 버티고 있고 수많은 군소 동맹들이 있건만 그들 모두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한 도박이라 볼 수 있지.”

    “황제 폐하께서 요즘 이상해 보이는데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마는군요. 아무리 정상이 아니라지만 너무하긴 너무하네요.”

    그제까지 침묵을 지켜 왔던 테세우스가 모처럼만에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패권 제국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죠.”

    패권 제국이란 말에 카이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패권 제국이라고!”

    “네, 제가 알기로는 남부 대륙 역사상 지금으로부터 대략 천 년 전 피가로 제국이 단 한 번 남부 대륙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여 그야말로 패권 제국으로서 군림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합니다. 아마도 황제는 그걸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공이 덧붙여 말했다.

    “정확히 꿰뚫어 봤군. 황제는 내년 여름까지 현재 군단 병력을 대폭 늘릴 것이고 여타 군비 체계를 확실히 갖출 예정이더군. 한마디로 이미 모든 군부 관계자들과 의논을 끝낸 상태에서 원로원에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셈이지.”

    카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그렇다면 우리 특수 검사들도 죽었다 복창해야겠군요. 전시 상황에서 우리 임무가 이만저만 중요한 게 아닐 테니까요.”

    대공 자라투스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 보였다.

    “자네의 생각보다 더욱 심할지도 모르지. 집정관 카르세크는 눈에 가시 같은 우리 오 지부를 필시 그냥 두지 않고 위험 지역으로 마구 내돌릴 가능성이 크다네. 그렇게 내다본다면 그야말로 우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살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워야 할 걸세.”

    “아이고, 진짜 죽었네요.”

    테세우스만큼은 담담한 얼굴이었고 아주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어쩌면 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뭔 말이지?

    “어차피 황권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원로원 파인 우리 오 지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공적을 세워 인정을 받는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정복에 있어서 활약이 두드러진다면 오히려 황제의 신임을 얻을 테니 결코 비관적으로만 내다볼 필요는 없을 겁니다.”

    대공 역시 어느 정도는 공감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네. 어차피 패권 제국을 세우기 위한 동참의 길에 올랐다면 황권이고 원로원이건 간에 무조건 열심히 싸우는 수밖에 없을 거야. 더욱이 우리 오 지부에는 레온에 버금가는 테세우스가 있으니 든든하기도 하지.”

    그 말에 테세우스가 다소 멋쩍은 반응을 보였다.

    “별말씀을…….”

    대공이 다시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내년 첫 번째 공격 대상국도 정해졌다는 얘기가 있지,”

    카이가 다시 물었다.

    “그게 어디죠?”

    “신생 왕국이라 아직 이름이 없다네.”

    “그런 왕국도 다 있답니까.”

    “수년 전 하류 구역을 떠난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라 하더군. 얼마 전 왕이 선출되었는데 조만간 국호를 정할게야. 하지만 곧 사라질 나라인데 먼 상관있겠냐.”

    “안 됐군요.”

    “안 되기는 뭘 안 돼. 국경 근처에 나라를 세운 그들이 멍청한 거지.”

    “그도 그러네요.”

    “자, 감세나. 원로원 의장님이 보자 하시는데 아마도 내년 전쟁을 해서 벌써부터 우리 특수부에 별도 지시가 있을 것 같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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