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물결이 있는 곳
따뜻한 남쪽 레알카스 지방
폭풍의 언덕이여! 그대의 바람이 필요하리라
시원한 한 줄기로 나를 인도하소서
양치는 목동들이여! 뿔 고동 소리가 들리는 곳
아!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드디어 귀향을 합니다
누이들 친구들이여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숨결과
부드러운 손길
하프의 은은한 선율과 여인의 아름다운 음성이 계곡을 타고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노래를 끝낸 여인은 하프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집어넣고는 검을 챙기어 산 아래쪽으로 향했다.
가끔 길옆에 서서 꽃향기를 맡는가 하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산 노을에 물든 양떼구름의 장엄한 행렬에 넋이 빠지기도 했다.
커트를 친 짧은 머리카락에 생기 어린 발랄함이 돋보이는 그녀는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였다.
“아차, 놀다 보니 또 늦었네. 카르발디가 꽤나 잔소리하겠어. 후우…… 상관은 난데 왜 내가 번번이 그자의 투정을 받아 줘야 하는지 모르겠네. 에이, 오늘 뭐라 했단 봐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뭐라 중얼거리며 숲 안쪽으로 계속해서 들어갔고 곧이어 통나무들로 빽빽이 지어진 담벼락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요새인 듯한 그곳 망루 위에서 한 용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대장님 오셨으니 당장 문을 열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앙 쪽에 입구가 위에서 아래로 열리는 것이었다.
끼이익.
에르가니아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다시 닫혔다.
쿵!
잠시 후 용병들이 즐비한 가운데 그녀가 지나가자 모두들 기립하여 예를 갖추었다. 본관 건물인 곳에서 덩치 큰 사내들이 나오더니만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대장님! 어딜 갔다가 오시는 겁니까?”
“아니 오늘따라 왜들 난리예요?”
“아까 전에 카시우스 용병 집단으로부터 전령이 왔는데 그곳이 완전히 박살나게 생겼다지 뭡니까.”
깜짝 놀라는 에르가니아.
“뭐라고요!”
“아무래도 정예 특수검사 놈들에게 급습을 당한 모양입니다.”
“특수검사라면 레온과 테세우스가 여기까지 들어왔단 말인데.”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마저 당할 판입니다.”
“카르발디는 안에 있나요?”
“아, 예! 부대장님께서 이번 사태를 무척 걱정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원형 탁자에는 용병 대장 에르가니아와 부대장 카르발디, 그리고 참모진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카시우스마저 당했다면 정확히 이제 남은 용병 집단은 우리를 포함하여 세 개에 지나지 않는데 머지않아 씨가 마르겠군. 젠장.”
에르가니아가 불끈했다.
“부대장이 돼 가지고서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카르발디 역시 한마디 하고 말았으니.
“대장이야말로 대체 어디를 쏘다니다 지금 들어오는 거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이라도 한 건지, 나 참.”
“지금 뭐라고 했어요!”
“한번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해 보시오. 팔라카스 제국의 그 폭군 자식 게라쿠스가 오 년 전 하류 구역 반란 사건 때 정식 등록 용병들이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황제에 등극하자마자 지독한 복수극을 시작했고 오늘날 이백여 개가 넘는 용병 집단들이 와해가 되거나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 이 마당에 어디 가서 하프나 켜고 노래나 부르니 내가 속이 터지지 않겠소.”
에르가니아가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말 다 했어요? 그것도 참모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기에 애초부터 누가 내 용병 집단에 가입하라 했나요.”
“또 그 얘기! 누군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왔나. 용병 연합회 동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떠났을 거요.”
“왜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당장 가지 그래요?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뭐요!”
그러자 카르발디가 화가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진짜 탈퇴할 테니까 그런 줄 아시오.”
끼익.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지는 카르발디.
쾅!
문이 닫히고 실내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에르가니아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참모진들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누구 나와 내기할래요?”
그러자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손을 들고 말했다.
“저요!”
“저도요!”
“물론 해야죠.”
“나도.”
에르가니아가 빙그레 웃었다.
“후후. 다섯에 걸 사람은 탁자 오른편에 각자 백 페니 씩 놓고 열에 걸 사람은 왼쪽 탁자에 백 페니를 놓아요.”
“그, 그렇게나 많이요?”
“그동안 푼돈 내기만 했는데 오늘은 예외로 하기로 하죠.”
“백 페니라면 한 달 월급의 절반인데…….”
결국 참모들은 마지못해 돈을 걸었고 에르가니아는 무슨 이유인지 혼자만이 중앙 탁자에 100페니를 걸었다. 누가 물었다.
“그건 뭡니까?”
“스물에 걸려고요.”
“내기에서 지면 저희 모두에게 배당을 줘야 하실 텐데요.”
“대신 내가 이기면 그대들 돈을 모두 따겠지요. 자 지금부터 숫자를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열아홉! 스물!”
바로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르발디. 그가 다소 비굴한 웃음을 짓더니만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농담 한번 해 본 건데 뭐 그리 심각한 얼굴들을 할 건 없잖아. 그나저나 의리도 없는 자식들 같으니. 나간다는데 붙잡는 녀석이 하나도 없다니. 에잇! 인생 헛살았다.”
사실 참모진들이 경직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내기에 졌기 때문이었다. 에르가니아가 탁자 위에 놓인 돈을 모아 자신의 가죽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그때 카르발디가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햐! 진짜 너무하는군. 떠나려는 나를 붙잡지는 못할망정 나 가지고 내기를 해?”
“그 수법 통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아무튼 당신 덕분에 돈을 따서 기분은 좋군요.”
“무슨 대장이 저러냐! 그래 부하들 돈 따먹어서 좋겠다.”
잠시 후 회의가 끝이 나자 참모진들은 저마다 죽상이 되어 회의실을 떠났다. 그리고 실내에는 대장과 부대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에르가니아는 방금 전 내기에서 땄던 500페니의 돈주머니를 카르발디에게 내미는 것이 아니던가.
“그 돈이면 용병들 20명 월급은 될 거예요.”
“나 참! 이런 비겁한 방법을 써서라도 용병 집단을 유지해야겠소?”
“참모들이 하는 일도 없이 지나치게 많은 월급을 가져가니 그다지 비겁한 방법은 아니라 생각해요. 사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만큼 충당해 줄 생각이고요.”
“그래 봐야 이미 자금이 모두 바닥났는데 대체 우리가 얼마나 버티리라 생각하오.”
“해 보는 데까지 해야죠.”
“그나저나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그 무식한 살인마들인 레온과 테세우스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용병들을 척살하느라 혈안이 된 이 마당에 대체 이곳을 집착하는 이유가 뭐요?”
“…….”
그녀는 애써 대답하는 것을 꺼려했고 가벼운 한숨만 쉴 뿐이었다. 사실 카르발디가 그녀의 속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한번 술에 취한 그녀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영혼을 지겹게도 사로잡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용병 연합회 동기생인 지드였다.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카르발디는 지드의 용병 집단에 아주 잠깐 가입한 적이 있었다. 헌데 그가 제5구간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가는 바람에 마지못해 탈퇴를 했었다.
그 이후로 수년 동안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어디 멀리 숨어서 지내나 생각을 했었다.
그는 애초 이곳에 임무를 띠고 나온 실전 흑검사였기에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머나먼 고국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 발길을 붙잡아 두게 되었으니 우연찮게 시험 동기인 에르가니아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용병들을 해산하고 나와 함께 당장 중부 대륙으로 갑시다. 나는 아르카도 제국에서는 그래도 잘나가는 귀족 가문이란 말이오. 그대 하나 정도는 평생 벌여 먹일 자신이 있소이다.”
“그런 식의 얼렁뚱땅 청혼 수법이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아무리 보아도 우린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세요. 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마치 연인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요!”
“어찌 그대는 나같이 잘생기고 가문 좋은 청년의 청을 마다하는지 도통 모르겠군요.”
“여자가 반드시 그런 조건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당신이야말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시는지요?”
“그래서 그대가 택한 사람이 고작 하류 구역 출신의 하류검사입니까?”
순간 에르가니아의 표정이 확 굳어지고 말았다.
“무슨 말이죠?”
“지난번 술 많이 취했을 때 한 말 기억이 나지 않소? 현 상황이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언젠가는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라고 말이오.”
그녀가 무척 당혹스러워 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주세요!”
“뭐, 대장이 나가라면 나가야겠지요. 하여간 그 작자는 복도 많지.”
“그만하라니까요!”
탁!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에르가니아는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의 용병 집단이 저 등불과의 신세와도 같지 않던가. 참으로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잠깐 스쳐 지나간 한 남자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에 이토록 진하고 강하게 남아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해맑은 웃음하며 순박한 행동, 자신이 하프를 켜고 노래 부를 때 옆에서 소년의 천진한 얼굴로 그 얼마나 좋아했던가.
정말이지 에르가니아는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는지 문뜩 창가 쪽으로 향했다.
덜컹―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밤하늘에 수많은 별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도 꽉 찬 보름달 안에는 오래전 꽃을 한 아름 꺾어서 자신을 병문안 온 지드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들려오는 용병의 다급한 외침.
“전초기지 산 정상에 봉화가 피어올랐습니다!”
봉화가 피워지는 단 하나의 이유는 적들의 침입밖에 없었던가. 에르가니아는 물론 요새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적들이 경계 구역을 넘은 것 같습니다!”
곧이어 참모진들이 소집이 되었고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 역시 연병장으로 나와서 부대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제1대대, 제2대대는 각자의 위치로. 궁수 부대는 망루를 기준으로 두 걸음 간격으로 투창 부대와 자리를 함께한다. 그리고 요새 밖에 잘 보이도록 횃불들을 모두 지피게나. 투석 부대원들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나 다시 확인해 보고 대기 부대는 이탈자가 생길 시에 신속하게 대체할 준비를 하도록 한다!”
이 모든 명령은 카르발디의 입을 통해서 우렁차게 전달이 되었다.
그만큼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고나 할까. 그동안 여러 번 위협에 처해 있었을 때에도 그가 지금처럼 발 벗고 나서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단체의 존재 유무가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흑검사의 위치에 있는 그는 벌써 고국에 돌아가야 할 몸이었지만,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에르가니아 때문이었다.
같은 시각.
봉화가 위치한 산 정상 전초 기지에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섯 개의 뿔 달린 흑색 투구와 기상하게 생긴 흉갑을 걸친 엄청난 거인이 붉은 안광을 폭렬하며 용병들을 마구 살육하고 있었다.
“크크!”
팍.
“아아아―!”
“컥!”
그가 휘두르는 병기 주변에는 검은 기류가 불타오르는 듯 보였는데 용병들은 그것에 닿자마자 녹아들듯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가 하면, 심지어 형체마저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리기까지 했다.
마치 지옥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악마가 강림하여 인간을 심판하는 형상이랄까. 그저 지켜보는 자체만으로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크아악!”
무려 백여 명이나 되는 용병들을 그 짧은 시간에 싹 쓸어 버린 괴물 전사는 승리의 포효를 하듯 무기를 하늘로 들어 소리를 질렀다.
마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역회전하는 것처럼 몹시도 거북했으니 분명 인간의 음성과는 그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의 빨간 안광과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흉측한 송곳니마저 그야말로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악마였다.
바로 그때였다.
숲 안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사내의 음성.
“아르여! 그대를 다시 봉인하노니 내 신성한 검 안으서 안식을 취하리라!”
그러자 놀랍게도 그 거대한 지옥 전사가 스르르 검은 기류로 변하더니만 마치 바람과도 같이 흘러 지금 막 언덕배기에 모습을 드러낸 흑발의 사내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던가.
웅!
그의 주변을 두어 번 돌더니만 검 면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팅!
가벼운 금속성의 파공음이 들리자마자 사내는 검을 등 뒤로 다시 찼다.
그때 수하들로 보이는 흑색 군장 사내들 수십여 명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제야 흑발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다행히 레온보다 한발 앞선 것 같군.”
동료로 보이는 자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말문을 열었다.
“과연 테세우스이군. 용병 토벌 시작은 레온이 먼저 했지만 이제 그 대미는 자네 덕분에 우리 제오 지부가 장식을 하게 생겼으니 말이죠, 후후!”
테세우스 역시 굳어진 표정에서 모처럼만에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이게 다 카이 수장님 덕분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지. 방금 전처럼 엄청나고 무시무시한 전투 기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아마도 일 년은 늦어졌을 걸세. 그렇게 본다면 자네가 자라투스 대공님과 우리 제오 지부를 살려 주는 셈이고 더 나아가서 원로원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걸세.”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쨌든 전초 기지를 박살냈으니 다음 차례는 저 아래 본진이라.”
그때였다. 맞은편 숲 안쪽으로부터 다소 익숙한 음성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저들끼리 자화자찬이라! 하하, 한마디로 놀고들 있군.”
순간 카이와 테세우스는 깜짝 놀란 듯 그곳으로부터 등장하는 은빛 머리칼의 건장한 사내와 그의 뒤쪽 한 무리의 예사롭지 않은 검사들을 보게 된다.
“레온!”
수장 카이가 외치자 테세우스의 안색이 다시 차갑게 변했다.
레온은 그런 그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용케도 여기까지 잘 왔지만 사실 나와 내 수하들이 먼저 이곳에 도착했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주지. 내가 이곳 전초 기지를 네놈들 제오 지부에 넘긴 것은 바로 테세우스 저 자식의 전투 기술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감히 내게 맞서려 했기에 얼마나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다크퍼스 소환자라? 후우, 이거 정말 놀랍군! 대체 우리 특수검사부가 언제부터 그런 사악한 힘을 빌리는 자를 영입할 수 있단 말인지. 아마도 자라투스 대공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지.”
수장 카이가 불끈했다.
“네가 감히 제오 지부 수장이자 대공님의 성함을 함부로 거들먹거리다니 오만하고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그러기에 사람은 줄을 잘 서야 되는 법. 너희 원로원 파들이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황제 폐하와 카르세크 집정관님 덕분이 아니던가.”
“헛소리!”
“내심은 그렇지 않을 텐데, 후후!”
그제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테세우스가 한마디 했다.
“적어도 우린 너처럼 개 노릇은 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너보다는 우리가 낫겠지.”
순간 레온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얼굴 근육에 경련마저 일어났다.
“개 노릇이라니! 너 이 자식, 말 다했냐!”
“흥분했다면 미안하군. 그저 내 관점으로 보기에 자네는 주인을 위해서 무조건 달리는 사냥개와도 같은 느낌이라서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뿐이라네.”
그는 약 올리듯 말이 끝나자마자 방향을 홱 돌려 숲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레온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외쳤다.
“너 이 새끼! 어디 가는 거야! 지금 당장 나와 한판 붙어 볼까!”
테세우스가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당장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
“지금 내게로부터 도망가는 건가!”
그가 피식 웃었다.
“풋! 웃기지도 않는군. 너를 제압해 봤자 나와 우리 지부에게 별로 이득될 게 없다고나 할까. 아니 오히려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겠지.”
레온이 화를 참다못해 결국 반월형 병기를 팔로부터 서서히 풀었다.
스르르.
“당장 서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그러자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는 테세우스, 그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우리 대결은 뒤로 미루어 두면 어떻겠나.”
“미루다니?”
“어차피 언젠가는 한번 붙을 텐데 웬만하면 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 거란 말이다. 그래야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최강이 가려질 테고 더 나아가서는 역사 서고에도 이름이 남겨질 게 아닌가.”
“역사 서고…….”
그 말에 레온의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계속 들려오는 테세우스의 음성.
“이제 화제를 돌리지. 자네도 알다시피 저 아래 협곡에는 그동안 우리가 추격해 왔던 수백의 용병 집단들 중에서 최강의 용병 집단이 포진해 있다네. 저들은 제국의 추격대와 맞붙어 무려 열일곱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상당한 자들이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장과 부대장의 전투 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지.”
그 말에 레온이 처음으로 테세우스 말에 순순히 동조를 하는 듯했다.
“대장이 여자라는 소문을 나도 들은바 있다.”
“어쨌든 저들이 코앞에 있으니 난 당장 내려가서 전투를 벌이겠네. 물론 대장은 내가 맡을 테니 부대장은 네가 상대해라.”
레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당연지사 제일 지부 수장인 내가 대장을 맡고 네놈은 부대장을 상대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가 아닌가.”
“마음대로 하게나. 난 상관없으니.”
“이번 일이 끝나면 네놈의 제안대로 수도에서 정식으로 대결을 벌이겠다. 누가 최강인지는 확실히 알게 해 주겠다.”
“얼마든지.”
***
잠시 후 협곡 아래 요새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레온과 그의 수하들이 동쪽 담벼락을 넘어 칩임을 했고 카이의 제오 지부 특수검사들은 테세우스를 선두로 서쪽 벽을 넘어 들어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팔라카스 제국의 최강 검사인 레온과 테세우스가 합공을 하니 제아무리 역전의 전설을 만들어 왔던 용병 집단이라 할지라도 속수무책 밀릴 수밖에 없었다.
챙!
“아악!”
파! 파! 파! 팟!
“컥!”
“뒤로 물러나지 말라!”
“적들이 너무 강력합니다.”
한편 요새 본관 건물 테라스에는 대장 에르가니아와 부대장 카르발디가 매우 경직된 표정으로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전투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섣불리 나서서 전투 현장에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동쪽의 은발 사내와 서쪽의 긴 흑발 사내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투 기술 때문이었다.
카르발디가 볼멘 음성으로 말했다.
“빌어먹을!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내 예상이 맞다면 저기 반월형 병기를 사용하는 자가 레온일 테고 악령 전사를 불러 낸 자가 테세우스가 분명한데, 저 둘이 합공을 해 왔으니 정말 기가 막힐 일이로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들도 나가서 싸우죠.”
“상대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요!”
“그렇다고 부하들이 희생당하는 마당에 여기서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요.”
에르가니아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냅다 레온이 있는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카르발디가 다급하게 외쳤다.
“당장 돌아오시오! 어차피 별로 승산 없는 싸움 우리라도 피신합시다.”
“어째 당신은 사내가 돼 가지고서 항상 살 궁리만 모색하는 거지요?”
“일단 살고 봐야 내일이 있는 법 아니오?”
“정말 못 말리는 남자군. 어쨌든 당신이 서쪽 테세우스를 맞아 주세요. 사실 우리들 실력도 만만치 않잖아요.”
“솔직히 난 겁나는데…….”
요새 동쪽 연병장은 레온이 굳이 나설 필요조차 없이 특수검사들이 공력 검술을 무차별하게 시전하면서 용병들을 맥없이 쓰러트리고 있었다.
파파파팟!
“아악!”
“이런 제길! 너, 너무 강해.”
사실이 그랬다.
레온의 수하들은 공력이란 특별한 에너지 매체를 사용하기에 용병들이 제아무리 전장 경험이 많고 강력한 검술로 대항한다 할지라도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파팟!
“아악!”
바로 그 순간 고공을 날아오르며 섬광을 뿌리는 자가 나타났으니 그 기세가 제법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레온에게도 미쳤다.
‘갑자기 누가?’
그의 고개가 높다란 허공을 응시할 때였다.
파파파파파팟!
정확히 7번의 파공음이 들리더니만 그처럼 무적을 자랑해 왔던 자신의 직속 수하들이 피를 토하고 나가자빠지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무시무시한 검광을 펼쳤던 주인공이 지면에 착지하면서 그 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이 깜짝 놀랐다.
“뭐야, 여자잖아?”
불현듯 무치 용병 집단의 대장이 여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소문에 듣던 대로 결코 범상치 않은 전투력을 지녔다고나 할까.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높이를 떠오르며 순식간에 상급 계열의 특수검사들 일곱 명을 단번에 즉사시킨다면 이는 고수 중에서도 상당한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래서인가. 레온은 모처럼만에 흥미를 나타냈다.
다른 수하들이 그녀에게 달려들려 하자 그가 만류했다.
“다들 뒤로 물러서! 너희들 상대가 아니다.”
레온이 앞으로 몇 발자국 나서더니만 직접적으로 물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네가 대장이 맞겠군.”
“…….”
에르가니아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서쪽 연병장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곳은 카르발디와 테세우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자신의 전투 상황보다도 신경이 더 쓰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온 역시 서쪽을 바라보더니만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꾸 그쪽을 쳐다보는 것을 보니 아마도 테세우스와 붙은 자가 애인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후후!”
그러자 에르가니아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레온에게 집중했다.
방금 전 그녀의 고공검술이 무색할 정도로 상대의 기세는 이미 자신을 서서히 압도해 감을 느껴야만 했으니, 지금까지 보아 온 존재들과는 그 수준부터 천양지차 달랐다.
그때 레온이 한발 나서더니만 팔뚝에 장착이 된 반월 병기를 서서히 끌러 내렸다.
쩌벅.
스르륵.
지면을 딛는 발자국 소리에 이어 장비를 푸는 음마저 상당히 위협적이었는데 곧이어 그의 독특한 병기가 진정한 반달 모양으로 펼쳐졌을 때에는 에르가니아의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두려움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레온이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병기를 임자를 만난 것 같은데? 한동안은 적수가 없어서 녹이 슬면 어쩌나 했는데 때마침 제법 전투를 아는 자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 그나저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대상이 여자라는 사실이지. 내 병기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아주 잔인하게 잘게 썰 텐데, 그 모습을 어찌 감당해야 할는지 벌써부터 걱정이야!”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반월 병기를 들어 허공으로 살짝 띄워 놓았다.
웅.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휘리리릭!
파파파팟!
드디어 팔라카스 제국 역사상 최강의 병기인 반월 검이 강력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에르가니아 역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고 고공검술로 눈앞으로 다가오는 병기를 막으려 했다.
탁!
“이얏!”
챙! 창! 챙! 창! 챙! 창! 창!
그녀의 검에서 병기와 부닥칠 때마다 불꽃이 일어났고 허공에 뜬 채로 도합 7번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녀의 체공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어차피 지면으로 안착해야만 했다.
착!
애석하게도 반월 병기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듯 이번에는 고공으로부터 수직 하강의 공격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공력변환기술로 조종하는 레온이 있었으니 참으로 편리한 전투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로선 단번에 밀리는 형국이었고 그 옛날 시조님이 남기신 고공검술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상대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초강력의 힘을 다시 한 번 느껴야만 했다.
“헉! 헉!”
벌써부터 숨이 차올랐다. 마치 숨 돌릴 틈도 없이 반월 병기가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무섭게 하강해 왔다.
휘리리릭!
파파파팟!
“이얏! 360 발검기술!”
결국 그녀는 시조가 남긴 흑석신전 360 검술을 시전 함으로써 상대의 무시무시한 병기에 대한 방어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챙! 창! 챙! 창!
참으로 한심한 대결이 아닐 수가 없었다. 레온이 아닌 그저 쇳덩이만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정수가 담긴 검술로 맞대응해야만 하는 신세이니 말이다.
그마저도 뒤로 밀리는 형국이라면 대체 저 레온이라는 자는 얼마나 강한 존재란 말인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치자 에르가니아는 겁이 더럭 났다.
승부사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으니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균형을 잃고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헉!”
털썩!
바로 그때였다.
“조심해!”
반월 병기가 기다렸다는 듯 시퍼런 날로 그녀에게 달려들 때 누군가 쏜살같이 다가와서 그녀를 낚아채고는 계곡 쪽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쯤 서쪽 연병장에서 한창 테세우스와 전투를 벌여야만 했던 카르발디가 아니던가.
에르가니아는 그 자신이 안겨 가면서도 다급하게 물었다.
“뭐예요!”
“저들은 우리 상대가 아니니 무조건 도망가야 한단 말이오!”
그제야 그녀는 카르발디의 참혹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로 범벅이 되었고 그의 흑색 군장 군데군데가 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끔찍하게 짓이겨지거나 뜯겨 있었으니, 그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 도망을 생각했고 마침 동쪽 연병장에 위기에 빠져 있던 에르가니아를 발견하고는 지금처럼 안고 무조건 뛰었던 것이다.
타다닥!
카르발디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녀와 함께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영을 빠져나갔다. 그의 실체가 흑검사 제5공격자인 만큼 빠르게 도주하는 방법도 일종의 기술에 속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런 행동에 대해 스스로 충격과 절망감에 한동안 휩싸일 것이 뻔했다.
중부 대륙에서 자신의 전투 서열이나 그 위치는 가히 최상급에 해당할 정도의 고수라 자부해 왔건만, 남부 대륙에서 쫓겨 가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레온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그만 어이가 없어 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랄까. 마침 서쪽 진영에서 테세우스가 칼르발디를 추적하려고 다가오자 심통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네놈이 놓친 녀석 때문에 내 먹이마저 달아나 버렸잖아! 이 빌어먹을!”
“그자가 싸우다 말고 도주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일세.”
“그러니까. 단번에 끝장을 냈었어야지.”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더라고.”
“하기야 그게 네놈의 실력이자 한계일 테니까.”
레온이 비아냥거리자 테세우스가 인상을 붉히며 말했다.
“상대가 흑검사라면 그런 말이 나올까.”
그 말에 레온이 조금은 놀란 얼굴을 했다.
“흑검사라고?”
“그자의 검술이 지면의 포스를 이용하여 검광을 만들어 냈으니 필시 흑검사가 분명하겠지. 어쨌든 아쉬운 일일세.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함께 추적하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듯하니 멀리 가지는 못하겠지.”
테세우스가 계곡 쪽으로 달려가자 레온 역시 그의 뒤를 쫓아갔다.
“넌 이제 나서지 마라! 그 두 놈은 내가 해치울 테니까.”
“어림없는 소리. 혼자 공을 가지려고.”
“빌어먹을! 내가 제일 지부 수장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내 상관은 아니지. 한심한 작자!”
“뭐, 뭐라고! 지금 뭐라 말했나!”
잠시 후 절벽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한 레온과 테세우스, 그들은 다소 허탈한 심정으로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발자국과 흔적으로 보아 그 두 명이 여기까지 와서는 아래 저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로 투신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곳이 워낙 높다 보니 설령 뛰어내릴지라도 산다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레온과 테세우스는 목숨을 걸고 뛰어내려 계속 추적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같았다. 레온이 다시 심통을 드러냈다.
“이게 다 네놈 때문에 놓친 거라고.”
“계속 억지를 쓸 텐가.”
“빌어먹을!”
레온이 등을 홱 돌려 돌아가자 테세우스 역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어쨌든 그동안 눈엣가시 같았던 강력한 용병 집단이 와해된 듯하니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을 것이다.
***
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화창한 날씨였다.
강줄기 하류 지역에 양옆에는 온통 숲 지대로 가득했고 그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양 빛이 너무도 눈부셨고 강렬했다. 언제부터인가 물가 밖으로 나온 듯 강가에 엎어져 있는 두 사람 중 여인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곧이어 여인이 겨우 눈을 떴고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린 듯 바로 옆에 있던 사내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요.”
“…….”
사내는 꿈쩍 않고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둘은 다름 아닌 그 높은 절벽으로 뛰어내려 무모한 탈출을 시도했던 에르가니아와 카르발디였다.
카르발디는 애초부터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강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지금 상태도 꽤 좋지 않음이 분명했다.
에르가니아 역시 자신의 오른쪽 발목과 왼쪽 팔이 심하게 골절이 되었음에 일어날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거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옷이 마르다 못해 비틀어진 것으로 보아 이곳에 적어도 이삼 일은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고는 다시 카르발디의 이마를 짚어 보며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에 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불덩이 같았으니.
“어머, 이를 어쩌지?”
그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누구 계시면 도와주세요!”
그러기를 대략 30여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 강가 한가운데 어떤 노인이 나룻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에르가니아가 다시 외쳤다.
“거기요, 도와주세요!”
그리고, 그제야 노인이 놀란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둘은 노인이 데리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 의해서 들것에 실려 나룻배에 탔고 저녁쯤 되어서야 강가 옆 어느 오두막집으로 옮겨질 수가 있었다. 참으로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마을 장로인 노인이 그 먼 곳까지 약초를 캐러 오지 않았다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에르가니와 카르발디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게다가 이곳은 아주 깊숙한 강가 내륙의 위치한 어느 어촌으로서 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에르가니아는 모처럼만에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는 카르발디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는데, 열은 사라진 듯 보였고 숨이 고른 것으로 보아 고비를 넘긴 듯 보였다.
잠시 그의 모습을 지켜본 그녀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전에는 다소 가볍고 능글맞아 보였던 그의 모든 행동들이 다소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이제는 그런 선입관들이 모두 사라지려 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준 이유도 있겠지만 중부 대륙으로 가서 함께 살자는 그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라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나온 말이란 것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는 아이들 소리에 문득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쏴아!
첨벙― 첨벙―
강가에는 어촌의 아이들이 서로 밀고 넘어트리며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순박해 보이는 어부들이 그물망을 짰고 노인들은 나룻배를 손질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 아래 한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문득 한 존재가 떠올랐으니.
‘지드!’
해맑은 눈빛과 웃는 모습이 닮아서였을까. 그의 모습이 갑작스레 머릿속을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팔라카스 제국의 추적권에 속한 남부 대륙에 굳이 머물 필요가 없었건만, 그의 발목을 번번이 잡는 것이 바로 그를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바로 옆 침대 카르발디를 쳐다보는 그녀. 뭔가 설명하지 못할 갈등이 처음으로 생기는 것 같았던가.
‘후우.’
결국 한숨을 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