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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 현장 검증, 그리고 밝혀지는 비밀들 (33/81)

Chapter 32 현장 검증, 그리고 밝혀지는 비밀들

은빛 기사단장 헤세는 50대 초반의 중년인이다.

지난 2년 동안 신관 아르테스와 대공 라미와 함께 삼두 정치를 해 왔던 군부 최고 실세라지만 그의 점잖은 외모를 보자면 무인(武人)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학자풍에 가까웠다. 그리고 인자하고 침착한 인상을 지닌 듯 보였다.

지드와 일행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는 그의 초대에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단장 헤세가 손까지 들어서 겸연스러워 했다.

“과분한 대접이라니요! 그 유명한 붉은 기사단 단장까지 지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다 옛날 일이죠. 지금은 그저 평범한 신분으로 제 동생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여행이나 다니는 신세랍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젊으신 분이군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제가 역대 최연소 단장이었으니까요.”

그때 단장 옆에 착석해 있던 그의 아들 브라스가 껴들었다.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 단장은 나이나 국적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전투 능력만으로 선출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지드 님은 대단한 실력을 지닌 듯 보입니다.”

이에 지드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단하긴요, 뭘.”

이번엔 단장이 경외의 눈초리로 지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나이에 전직 단장까지 역임을 했다는 것은 검술에 상당한 조예가 깊을 듯 보이는군요.”

지드는 두 부자(父子)가 번갈아 가며 뛰어 주자 만찬 초반부터 뭔가 부담스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리려는 듯 아라퀘스를 바라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저 녀석이야말로 하마터면 갓 스무 살에 붉은 기사단 단장이 될 뻔했지 뭡니까.”

단장과 브라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스무 살이라고요!”

“동생이라는 녀석이 단장 욕심은 있었는지 예선을 거쳐 끝까지 바득바득 올라오더군요. 결국 결승전에서 나와 맞붙어 근소한 차이로 졌지만 만일 내게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제 동생 녀석이 자리를 꿰차고 앉았을 거요.”

아라퀘스는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조금은 쑥스러운 듯했다.

단장이 지드와 아라퀘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두 형제 분 다 대단하셨군요. 그런데 어찌 단장 직은 그만두시고 벌써부터 젊은 나이에 세상 구경을 서두르는지요.”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 어찌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대목에서는 지드가 다소 말하기 거북해하자 단장 역시 눈치를 차리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나. 손님을 모셔 놓고 만찬 대신에 대화만 나누고 있었으니…… 이것 참. 자! 다들 드시면서 계속 말씀을 나누시지요.”

단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드와 일행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만찬회장 분위기도 술에 익은 포도주처럼 제법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단장 헤세는 보기보다 그다지 술을 많이 들지는 않았지만, 말하는 것은 꽤 좋아했는지 자신의 과거 경력과 검술 수련 과정에 오늘날 단장으로 오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했다.

“제가 아들 녀석 브라스만 한 나이 때에 설마 하니 먼 훗날에 드니로 제국의 은빛 기사단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죠.”

그때였다. 술에 흥건히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의 아들 브라스가 문뜩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실 그게 다 국왕 폐하 덕분이죠. 컥! 취한다.”

국왕 얘기가 나오자 단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너, 너 이 녀석,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국왕께서 옛날 검술 동기였던 아버지를 잊지 않으시고 등용을 하리라고는 누가 알았겠어요. 컥!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다 아버지가 꾸민 계략에 의해서…….”

“이놈이 정말!”

단장이 너무도 당황해 그의 입을 막으려는 순간 자기가 알아서 탁자에 대가리를 박고 고꾸라지는 브라스.

쿵.

그런 그의 모습에 단장이 애써 침착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고 정도 술도 이기지 못하다니, 그 녀석 참.”

그때 지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중히 말했다.

“오늘 초대 정말 감사드리고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조금 더 즐기다 가시지요.”

“아닙니다. 내일 일정이 바빠서요.”

“아, 그러셨군요.”

잠시 후 부랴부랴 저택의 대문을 빠져나오는 지드와 일행들, 그들 모두는 만찬석에 술에 취해 엎어진 브라스가 마지막에 말했던 내용이 머릿속 가득했다. 헤라가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까 브라스가 술에 취해서 말했던 단장과 국왕과의 관계 말이에요.”

지드가 눈빛에 힘을 주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러.”

“정말 이 나라는 깊이 들어갈수록 복잡한 것 같네요. 신관 아르테스란 자는 사술에 빠져서 이상한 짓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대공 라미는 국왕의 약점을 쥐고는 왕가를 위협하기까지 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는데다가 단장마저 국왕과 뭔가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 벌써부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네요.”

그때 지드가 잠시 뭔가 골몰히 생각하더니만 말문을 열었다.

“내일은 왕궁을 들어가 봐야 하겠어.”

순간 헤라가 소리 질렀다.

“와우! 드디어 왕궁에 가는 거예요!”

“쉿! 여자 목소리가 그렇게 커서야!”

“단장님이 국왕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요.”

“좋긴 뭐가 좋아. 들어가자마자 골치 아픈 문제부터 풀어야 할 판인데 말이야. 이 나라 모든 시민들이 이 년 전 왕가 습격 사건을 잊지 못하고 오로지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해 주십사 하고 신임 국왕만 기다리고 있다던데.”

“단장님이 해결하면 되잖아요.”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된다더냐.”

아라퀘스가 느릿느릿한 어조로 한마디 껴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소 심통스런 말투였다.

“누가 물어나 봤나.”

“…….”

***

드니로 왕국의 모든 관심사는 오늘 이른 아침에 왕궁에 도착한 신임 국왕에게도 온통 쏠려 있었다.

피사로 제국에서 엄격하게 선출했고 확실히 보증된 지도자라 소문이 났던가. 시민들의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다.

왕가의 몰살로 지난 2년 동안 크나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드디어 새로운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무척 기뻤으리라.

게다가 왕가 습격 사건의 주범이 밝혀지는 것을 염원하던 그들은 벌써부터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를 질러 댔으니, 마치 축제를 연상케 했다. 반면 신임 국왕의 부담은 그만큼 컸으리라.

경비대장의 안내로 왕궁 안으로 들어온 지드와 일행은 일단 대신들을 만나기 위해 왕궁의 드넓은 홀 연단 상석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들과 각계각층의 고위 관료들, 그들은 저마다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더니만 당당한 자세로 홀에 마련된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이에 지드와 일행은 다소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임 국왕을 처음 접견하는 시간이건만 저들 마음대로 자리에 착석한다는 것이 뭔가 예법에 맞지 않는다고나 할까.

허나 왕궁의 예를 전혀 모르는 지드로서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아라퀘스가 다소 인상을 붉히며 뭐라 중얼거렸다.

“국왕에 대한 예법 절차와 순서를 생략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앉다니…….”

헤라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지드는 이들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생각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았다. 아직은 속단하기에 이르지만 아마도 저들은 왕가의 혈족과는 상관이 없는 신임 국왕인 자신에게 초반부터 기세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보여졌다.

여하튼 홀의 자리 배정에 관한 것도 흥미로웠으니 오른쪽 좌석에는 화려한 토가 차림의 대신들이 함께 앉았고 왼쪽에는 신관 복장을 한 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좌석에는 은빛 군장으로 번쩍이는 기사단이 착석해 있었으니 한눈에 봐도 세 개의 세력이 한 홀에서 대립하는 형상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오른쪽 좌석의 대신들 대표로 보이는 자가 손을 들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대공 총책인 라미라 하오. 오늘 이렇게 와 주신 것에 대해 환영하는 바이고 아무쪼록 편히 쉬기 바랍니다.”

“…….”

한마디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아무리 신임 국왕이라지만 자리에 앉은 채로 덕담하듯, 아니 건성으로 말하는 대신 라미의 행동에 대해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이번엔 왼쪽 신관 대표인 아르테스가 손을 들어 말했다.

“저는 신관 아르테스라 하오. 신의 은총과 간절한 기도로 새로운 국왕께서 드디어 오셨으니 제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소이다. 어쨌든 국왕께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매일같이 신전에 나오셔서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또다시 왕궁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겨지니 부디 제 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

저건 또 뭐 하는 늙은이란 말인가. 자기가 신관이면 신관이지 감히 국왕에게 조언을 한답시고 신전에 나와서 기도하라 마라 하다니. 이번엔 맞은편 좌석 은빛 기사단장이 손을 들어 말했다.

그는 어젯밤에 초대했던 손님이 오늘 보니 신임 국왕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척 놀란 표정이었지만 애써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신임 국왕의 도착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상이오.”

인사말이 너무도 간단했던가. 이번에도 지드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단장의 안색이 굳어져 있는 것을 보니 어제 만찬에서 신분을 속였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전달되어 왔다.

그 옆에 보이는 아들 녀석 브라스 역시 다소 얼떨떨한 느낌이었는지 헤라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어쨌든 첫날부터 정말이지 이상한 대면식이랄까. 이번엔 지드가 저들에게 자신의 소개할 차례였다. 하지만 뭔가 내키지 않았다.

마치 불청객을 대하는 저들의 태도에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던가. 결국 지드는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부러 자리에 앉은 채 말문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 이상이오.”

“…….”

이번엔 드넓은 홀의 좌중에 찬물을 끼얹은 듯 썰렁했다.

잠시 후 대신 라미가 다소 언성을 높여 말했다.

“신임 국왕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어 성의 있는 소개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러자 지드는 더욱 심통이 났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대들이 앉아서 나를 맞이했으니 나 역시 이대로 말했을 뿐이오.”

그러자 대공이 지드의 속마음을 간파한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드리웠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여기 왕국 예법이 원래 그렇소이다.”

“그 예법이라는 것이 왕은 서서 말하고 대신들은 앉아서 듣는다 그건가요?”

“그렇소.”

“그렇다면 전 국왕께서도 그리하셨단 말이오?”

“그렇소.”

“…….”

할 말이 없었다. 세상에 뭐 이딴 나라가 다 있던가. 아마도 전 국왕은 허수아비 아니면 바보가 분명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저들에게 철저히 휘둘리는 느낌이랄까. 지드는 성질을 꾹꾹 누르려는 듯 입술마저 은근히 깨물었다.

‘이자들이 한번 해 보자 이건가.’

지드가 뭔가 골몰히 생각하더니만 대공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니 이만 가서 쉬겠소.”

지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떠났다.

헤라와 아라퀘스 역시 그의 뒤를 따랐으니 뒤에 남겨진 참석자들은 멀뚱히 그들의 뒤를 바라보다가 저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하기야 우리들이 똘똘 뭉친다면 자기가 뭐 별 볼일 있겠어?”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약점을 찾아야 할런지.”

“너무 성급하게 생각지 말게나. 신관님이 일단 밑밥을 뿌린 다음에야 작전을 개시함세. 후후.”

“이번에도 재미있겠군.”

지드는 그날 저녁 만찬이 끝난 뒤에 왕궁 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국왕의 숙소 테라스에서 아래 정원을 감상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밝았는지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곧이어 씁쓸한 미소를 짓는 지드.

‘후후. 내가 왕이 되다니.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록 외부로부터 파견 나왔고 여기 텃세가 제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그 자신은 분명 국왕이 아니던가.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하류검사 신분으로 고향에서조차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건만 지금은 그 누구라도 부러워할 위치에 올랐으니 이만저만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으니 앞으로 이곳에서 풀어야 할 문제 때문에 머리가 무거울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저 위 보름달에 아른거리는 영혼들이 너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이유도 있었다.

팔라카스 제국으로 들어간 아카시안과 그녀의 동생들 카르, 네로, 아이린, 그리고 제5구간을 떠나야만 했던 수장 지노와 살아남은 대원들의 근황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들은 늙은 용병들, 그리고 하류 구역의 주민들과 함께 국경선 너머 어딘가로 향한다는 소식이 그가 알고 있는 전부였으니, 벌써 수년이 흐른 지금에 혹시라도 무슨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머나먼 타향에서조차 단 하루도 걱정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곳에서도 산재한 문제들이 만만치 않았으니 누군가 삶이란 첩첩산중과도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휘이잉.

늦가을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자 지드는 얼굴을 내밀어 머리에 오른 열기를 시원스레 식혔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는 눈빛을 드리웠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 나라의 국민들이 그토록 염원해 왔던 왕국 습격 사건의 전모를 밝힐 것이다.

‘슬슬 시작해 볼까?’

잠시 후 그는 내실로 들어와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전 국왕이 지낸 곳치고는 매우 허술한 느낌이랄까. 어찌 본다면 자신이 시내에서 묶었던 여관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본다면 국왕이 너무도 소박한 인물이었던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지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조사를 하려면 이곳부터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을까. 그는 주저 없이 서랍부터 시작해서 벽 침대 밑까지 샅샅이 뒤지며 뭔가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지드는 다소 실망스런 기색으로 침대에 앉았다.

“아무것도 없잖아?”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때 문뜩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었다. 전 국왕으로 보이는 중년인과 그 옆에 부인, 그리고 어린 왕자와 공주가 함께 포즈를 취한 것으로 보아서 왕실 가족이 분명해 보였다.

그저 그림이기에는 너무도 화목한 분위기랄까. 한없이 착해 보이는 국왕의 표정은 인자함이 절로 넘쳐흘러 보였고 왕비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왕자와 공주 역시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천사의 표상을 지닌 듯 천진난만해 보였다.

한순간 지드는 왠지 슬픈 생각이 들었으니, 저들은 왕궁 습격 사건으로 인해 살해를 당하고도 모자라 정원 한복판에서 불에 태워진 불쌍한 영혼들이 아니던가.

“쯧쯧. 어쩌다 그런 참극을 당했을까…….”

바로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똑똑.

“저희예요. 문 좀 열어 주세요.”

헤라 목소리였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헤라와 아라퀘스가 들어왔다. 지드가 대뜸 물었다.

“자료는 구했냐?”

아라퀘스가 품 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더니 지드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 드는 지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것들은 왕궁 습격 사건의 사건 진상 기록으로서 아까 지드가 대신들에게 가져다 달라고 명령을 내려놓았지만 모든 기록들이 없어졌다면서 거절당했던 바로 그 서류들이었다.

그런데 아라퀘스에게 명령을 내린 지 불과 한 시간여도 되지 않아 한 다발을 가져왔던 것이다.

“용케도 구했군.”

“겨우 얻었습니다.”

“어떻게?”

“역사 서고실의 서기장을 찾아갔습니다.”

“거긴 왜?”

“그 어떤 사건 진상 기록일지라도 반드시 서기장이 복사본을 남겨 두어 역사 서고실에서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 두는 관습이 있거든요.”

“그냥 주던가.”

“네. 오히려 서기장은 기다렸다는 듯 선뜻 내주던데요. 그러고는 반드시 사건의 진상을 밝혀 달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더군요.”

“눈물까지?”

“전 국왕 폐하가 너무 불쌍하셨다는 등 뭐라 중얼거리더군요.”

“불쌍하다고?”

“뭣 좀 알아내려 했지만 더 이상은 말하지 않더라고요. 아마도 어떤 세력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들 쉬쉬만 할 뿐 누구도 정보를 주지 않으려 하니 이거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기분이군. 어쨌든 한번 해 보자고.”

“물론입니다.”

지드는 일단 서류를 탁자에 놓고 말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일단 가서들 쉬게나.”

“이 많은 서류들을 혼자 검토하시게요?”

“대충 살펴만 볼 걸세.”

“아, 네. 그러시다면 저흰 이만.”

아라퀘스와 헤라가 문을 닫고 사라지자 지드는 탁자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찌르르. 찌르르.

어느덧 시간은 흘러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다가왔고 풀벌레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럽게 울었다. 벌써 세 시간을 서류에만 집중했던 지드가 간만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보아서 사건 진상 기록 내용 때문이 아닌가 보였다.

“후!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었군.”

그가 대충 살펴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으니.

국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와 공주는 각각 자신들의 방에서 살해를 당했다.

당시 생생한 현장을 기록한 내용을 보자면 국왕 내외의 침대와 카펫에 피가 흥건히 젖어 있었고 격투를 벌인 듯 탁자와 유리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고 했다.

3층 숙소부터 1층 아래 현관까지 핏자국이 나 있었으니 국왕과 왕비의 시신들은 그 누군가에 의해 질질 끌려갔음이 분명했다.

더욱 끔찍한 일은 다른 숙소에 있던 어린 왕자와 공주 역시 살해당한 채 똑같이 밖으로 끌려갔다는 점이다.

정원 분수대 근처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타 버린 4구의 시신들, 누군가 왜 시신들을 불태워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얼굴 부분만을 숯덩이처럼 심하게 태워 버린 것으로 보아서 원한 관계로 인한 소행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누가 감히 국왕을 상대로 그런 독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런지.

사건이 발생할 무렵 왕궁 상황을 살펴보자면 서고에는 대신 라미가 밀린 업무를 보고 있었고 신관 아르테스 역시 왕궁 내에 위치한 신전에서 밤새 제를 모셨다고 했다.

은빛 기사단장 헤세만이 왕궁 밖에서 기사들과 함께 시찰 중이었는데 왕궁 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기록 사실들은 사건 진상을 위해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서 적혀진 내용들인지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진상 기록은 대체적으로 간단했다. 아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깊이 살피려고 한 노력이나 흔적이 엿보이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뭔가 서둘러 기록을 끝냈다고나 할까. 전체적으로 매우 허술하고 단순해 보였다. 어쨌든 참으로 괴이한 사건이 틀림없었다.

한 나라의 국왕과 가족이 자신들의 가장 은밀한 장소에서, 그것도 전쟁이 아니고 평화로운 상황에서 철통같은 경비들이 무색할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지드의 개념으로는 모두지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기록 내용일 뿐이었으니 그저 하나의 사건 얘기를 흥미롭게 들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지드가 잠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홱.

그때 지드가 무슨 이유인지 문을 열고 테라스 밖으로 나가더니만 저 아래 분수대 근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왕가의 시신들이 불태워졌던 곳으로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한 것이었다.

안력을 높였지만 이곳으로부터 좀 거리가 있어서 세밀한 부분을 보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는 테라스 아래 정원으로 몸을 던졌다.

착!

가벼운 착지와 함께 곧바로 분수대로 향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기에 정원에는 시종은 물론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지드는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분수대 앞에 이르자 뒤쪽 잔디밭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지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분수대 뒷면에 그을음 같은 것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으니 필시 이쪽에서 큰 불이 일어났고 시신들을 태운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드는 정원 왼편 끝 쪽에 한 노인이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슬며시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 후.

“노인 양반, 여기서 뭘 하고 계시오.”

“…….”

반응이 없었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도 워낙 고령의 노인인지라 귀가 어두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지드는 그의 옆 가까이에 같이 앉더니 다시 물었다.

“이보시오, 영감님.”

그제야 노인이 지드를 발견한 듯 다소 놀란 기색을 했다.

“누, 누구시더라?”

“안녕하십니까.”

“저, 저기 혹시 신임 국왕 폐하?”

“그렇소.”

“아이고, 황송합니다요.”

“일어나실 거 없소. 그냥 하시던 일 하면서 편히 대하시오.”

“아, 예.”

“아마 노인께서 정원사겠죠?”

“예, 그렇습니다요.”

지드는 노인이 다소 어려워하자 그 역시 잡풀들을 뽑으며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이 황급히 말렸다.

“그, 그러시면 안 됩니다.”

“괜찮소. 옛날에 워낙 많이 해 보던 일이라서.”

“해 보던 일이라니요?”

“신임 국왕으로 오기 전에 이런저런 일들 다 해 봤거든요. 후후.”

그제야 노인이 이상한 눈초리로 지드를 다시 살폈다. 그러자 지드 역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드리웠다.

“노인께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으니 대답해 주시겠소?”

“아 예. 물론이고말고요.”

“그럼 묻겠소.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소?”

“왕궁 정원 담당 정원사로서 60년 넘게 일해 왔습죠.”

“그렇다면 왕궁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여기 정원 손질을 했겠군요. 당시의 계절이 가을이니 아마 정원에 할 일들이 많았을 테니까요.”

“…….”

왕궁 습격 사건 얘기가 나오자 노인의 안색이 경직이 되어 버렸다. 지드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심문하듯 물었다.

“기록에 의하면 사건은 새벽에서 이른 아침에 벌어졌다고 나왔는데 그렇다면 노인 역시 지금처럼 여기서 정원 손질을 하고 있었겠군요.”

그러자 노인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이고, 아닙니다요. 그 전날에 국왕 폐하께서 쉬라고 해서 그날 아침만큼은 정원에 나오지 않았습죠.”

“쉬라니요? 그건 왜죠.”

“그건 저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제 평생 여기서 일하는 동안 한 번 게으름을 피웠던 적이 없었는데 그날 하루만은 국왕 폐하 때문에…….”

지드는 의아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교롭게도 국왕이 사건이 일어난 새벽에 정원사를 쉬게 했다는 것은 뭔가 예감을 했다는 것인가.’

지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뜩 정원 맞은편에 보이는 제법 우거진 숲 지대를 바라보았다. 왕궁의 정원 한가운데 잘 다듬어지지도 않은 거친 구역이 있음에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드가 늙은 정원사에게 물었다.

“저긴 뭐요?”

“왕궁 비밀 화원입니다.”

“비밀 화원이라니요?”

“왕족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랄까요. 국왕 폐하께서는 평소 가족과 저 안에 들어가서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건이 있은 후 저곳은 자물쇠가 채워져 그 누구도 출입을 금하고 있습죠. 돌아가신 국왕 폐하에 대한 일종의 예우랄까요.”

예우라는 말에 지드가 코웃음을 쳤다. 첫날 홀에서 이 나라 대신들이 신임 국왕인 자신에게 대했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씁쓸함이랄까.

“전 국왕께서는 어떤 분이셨소?”

정원사가 주저 않고 말했다.

“정말이지 세상에 그처럼 인자하시고 착한 분은 다신 없으실 겁니다.”

“어떤 면에서 착하고 인자했다는 거요?”

“그분은 일단 왕비님과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일개 시종에게도 항상 즐겁게 말을 걸어 주셨고 정말 편히 대해 주셨지요. 어떤 때에는 그분이 진짜 국왕 폐하이신가 할 정도로 친구처럼 대할 때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희가 난감할 때가 많았습니다.”

“대신들과는 관계가 어땠소?”

“그, 그건.”

정원사는 말하려다 말고 주저거렸으니 그 역시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왜 대답하지 않는 거요.”

“저, 저기 그건 잘 모르는 일입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오?”

“아, 아닙니다. 전 다른 볼일 때문에 이만.”

정원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때 저편 정원 입구를 들어서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흑색 제사 의복을 입은 신관들이었다. 맨 선두에는 신관 수장인 아르테스가 보였는데 그가 지드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잠시 후.

“지난밤은 잘 쉬셨습니까.”

“그렇소. 그나저나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오?”

“벌써 잊으셨소이까. 국왕께서는 매일 아침 신전에 가서 기도식을 해야 한다고 어제 말씀드렸는데요.”

지드가 다소 인상을 찡그렸다.

“꼭 해야 하는 거요?”

“예로부터 왕궁 법도가 그러합니다.”

“…….”

결국 지드는 할 수 없이 신관을 따라나서고 말았다.

웅!

신전 안에 들어서는 순간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곳은 마치 신을 모시는 신성한 신전이라기보다는 뭔가 사술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곳이랄까.

지드는 오감을 넘어서 육감으로 주변을 은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앙 제단서부터 신관들의 의복이 검은색이라는 자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다. 곧이어 아르테스 무슨 이유인지 제자들로 보이는 신관들을 모두 내보내고는 지드와 단둘이만 남았다.

그는 곧이어 지드에게 제단 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라 했다.

지드는 대체 신관의 꿍꿍이속이 뭔가 하고 일부러 복종하는 척 그의 말을 순순히 잘 따르기로 했다.

“여기서 말이오?”

“맞소. 거기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들어 눈을 감으시오.”

“알겠소.”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나라를 위해 마음속으로 비십시오.”

“그러지요.”

잠시 후 신관 아르테스는 가슴 안쪽으로부터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만 뚜껑을 열어 지드의 코앞으로 대었다. 순간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지고 마는 지드.

풀썩.

그제야 아르테스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드러냈다.

“네놈도 이제 내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생겼군. 흐흐.”

그는 지드를 제단석 위에 곧바로 눕히더니만 뭐라 중얼거렸다.

“강력한 최면 액체를 들이마셨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그는 의식이 몽롱한 지드 코앞으로 상체를 숙여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지시하는 것은 뭐든지 하는 꼭두각시가 될 텐가? 자 어서 대답하라.”

즉각 반응이 나왔다.

“하겠습니다.”

“흐흐. 물론이지.”

“자!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눈을 뜨고 왕궁으로 돌아가라. 평소에는 네가 최면에 걸렸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손가락을 퉁길 때마다 너는 내 노예가 되리라. 하나 둘 셋! 깨어나라.”

순간 지드가 눈을 번쩍 떴고 신관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기도식이 끝났으니 돌아가시지요.”

“알겠소.”

지드는 현기증이 나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신전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흘리는 신관, 곧이어 아침 햇살이 환한 가운데 입구 박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드는 다소 멍했던 표정을 순식간에 바꾸고는 뒤쪽 신전을 바라보며 웃음을 띠었다.

“후후.”

내공과 공력 기술의 융합 에너지로 가득한 그가 최면 액체와 같은 것에 의해서 쉽게 넘어갈 리는 없었다.

‘앞으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지켜나 볼까.’

그때는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시점이었다. 지드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지나 숲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이곳은 아까 정원사가 말했던 왕족만 드나들 수 있다던 비밀화원으로서 혹시라도 무슨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한번 살펴보러 들어왔던 것이다.

예상대로 조그만 연못과 큰 나무 위에 움막집으로 보아서 국왕이 그의 자식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법한 지극히 사적인 공간임에 틀림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지만 별다른 것이 없자 그는 문뜩 나무 위 오두막집으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휘잉―

막상 올라와 보니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은 생각보다 높았고 숲 너머 정원과 왕궁 건물이 훤히 보였다.

움막집 나무 벽에는 뭐라 글씨들이 쓰여 있었는데 서투른 문체로 봐서 아마도 왕자나 공주가 낙서한 듯 보였다.

아빠 엄마, 사랑해요.

나도

비밀 화원 대장은 나다. 하하

오빠, 미워!

넌 부대장

싫어!

지드는 낙서 내용을 읽으면서 옛날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을 그들을 떠올렸다. 보아하니 그들은 이곳에서 무척 행복한 시절을 보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참극을 당했으니 이내 기분이 우울해지려 했다. 바로 그때 움막집 처마 위쪽에 매우 세련된 글씨체가 보였고 지드는 무심코 읽기 시작했다.

얘들아, 움막 지붕 위에 너희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우리 드니로 왕국의 독특한 왕가의 법도가 있단다. 그걸 보고 반드시 외우고 실천하도록 해라. 아빠가.

국왕이 자녀들을 위해 남긴 글이었다. 지드는 무심코 지붕 위쪽을 쳐다보았다.

‘드니로 왕국만의 독특한 왕가의 법도라.’

정작 신임 국왕인 자신이 필요한 내용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무에 걸터앉은 오두막집 지붕 위는 제법 높고 가팔라 보였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추락할 수도 있었다.

옛날에는 사다리가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원숭이처럼 민첩해야만 올라가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물론 지드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홱.

착―!

매화 잎사귀가 사뿐히 내려앉는 것처럼 어느새 지붕 위에 올라와 있는 지드. 그가 그 위에 새겨진 글씨들을 살펴보았다.

헌데 왕가의 법도 대신에 다른 글 내용들이 지붕 전체에 아주 깨알 같은 글씨체로 빼곡히 써 있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 지드는 긴장 어린 얼굴로 글들을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필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올라온 분은 신임 국왕이 분명할 거요. ‘드니로 왕국의 독특한 왕가의 법도’란 특별한 사람만이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 나는 국왕 필립스 2세로서 훗날 신임 국왕이 이 글을 반드시 보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계획입니다.

‘죽음이라니, 이건 뭔 말이지?’

지드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그 다음 글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내가 희생을 함으로써 내 가족이 생존할 수만 있다면 난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이오.

그렇기에 오늘 나는 나만의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저 사악하고 악마 같은 자들의 휘둘림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선택할 것입니다.

신관 아르테스의 최면에 걸린 나는 그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왕비마저 성적 노리개로 매일 밤마다 능욕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지옥 같은 삶.

그런 치욕적인 사실을 눈치 채고 세상에 알리겠다며 은근한 협박에 공공연하게 무시를 해 왔던 대공 라미, 그는 아예 대놓고 섭정 정치를 하기도 했고 그것도 모자라 나의 권위를 떨어트려 오히려 대신들에게 굽실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왕가에 대한 무례한 법도는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나는 살길을 찾기 위해서 옛 검술 동료였던 헤세를 단장에 등용하여 내가 처한 상황을 털어놓고 간절히 도와 달라 했지만, 오히려 대공과 신관과 내통을 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여 나와 아내의 약점을 더욱 파고들어 왔다.

주변 모든 것들이 너무도 사악하여 나와 가족은 머지않아 그들에게 영혼까지도 팔아야만 할 처지에 이르렀고 내 아이들마저 대를 이어 노예적 삶으로 전락한다 하니 나는 특단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소.

한 달간 치밀한 예행연습을 수도 없이 해 왔고 드디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나는 왕비와 아이들을 역사 서고 서기장의 도움으로 궁 밖 안전한 장소로 피신케 하였다오.

왕비와 아이들이 피신했다는 대목에서 지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들이 살았단 말인가!’

나는 가장 믿을 만한 측근과 함께 내 방과 아이들 방에 피를 뿌리고 벽에 발라 놓아 마치 살해당한 것처럼 꾸몄고 아래층 현관까지 핏자국을 만들어 놓았고 미리 준비해 온 세 구의 시신들을 분수대 옆에서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시신 검사관들이 신원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숯덩이처럼 태운 후에야 나는 내 몸에 기름을 붓고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준비해야만 했소.

나는 이미 신관의 최면에 걸려 있으니 내가 살아 있는 한 그의 꼭두각시로서 평생 치욕 속에 살아야만 할 테고 내 가족의 신변도 보장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남겨 부디 훗날 신임 국왕께서 선처를 해 주실 것을 염원하면서 사라집니다.

참고로 내 방 그림 벽화를 살펴보면 가족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국왕인 나의 오른쪽 눈을 누르면 그림과 함께 벽장이 열릴 것이오.

그 안에는 신관 아르테스의 사악한 행위들이 적힌 증거 자료들과 절대 금지로 되어 있는 사술 집단들과 내통 기록이 있고, 또한 대공 라미와 단장 헤세의 국고 자금 횡령과 군비 물자를 빼돌린 증거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심지어 그 둘은 역모 계획까지 세워 놓았는데 운이 좋게도 나는 내 측근으로부터 결정적인 증거를 얻을 수가 있었소.

마지막으로 신임 국왕에게 일러둘 것이 있으니 부디 그 자료들을 가지고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주신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편히 감을 수가 있을 것이오.

내 아내와 아이들의 신변을 제발 보장해 주기 바랍니다. 그들이 다시 왕궁으로 복귀하는 것까지 바라지 않소이다.

이미 그대가 국왕이 되었으니 그저 내 가족에게는 시민 신분을 내려 주시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글을 마치겠소.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군요. 날이 밝아 오기 전에 분수대 모닥불에 내 몸을 태워야 하는데…….

글 내용은 거기서 끝났다. 지드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답답한 가슴을 누를 길이 없었다.

아니 눈물까지 글썽였으니 국왕의 참담한 심정이 몸소 느껴짐이 분명했다.

급기야 신관과 대공, 그리고 단장을 생각하니 그의 두 눈빛에 살기가 가득해졌고 끓어오르는 분노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런 개새끼들이!”

***

그 이튿날이었다.

착 착 착 착.

헤라는 다소 늦잠을 잤는데 바깥이 시끄러워서 테라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병사들이 한 무리가 어디론가 급히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니 선두에는 지드와 아라퀘스가 있었다. 그들이 병사들을 대동하고는 이른 아침부터 어디론가 급히 가는 것이었다. 헤라는 재빨리 테라스 밖으로 나와서는 궁금한 듯 외쳤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지드와 아라퀘스 둘은 매우 굳어진 얼굴이었고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급히 왕궁의 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에 헤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한편 지드는 길을 가는 도중에도 아라퀘스에게 몇 번을 다짐시켰다.

“조심해야 해. 체포 도중 놈들은 워낙 추악한 놈들이기에 그냥 붙잡혀 주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우리와 함께 가는 병사들은 기사도 아닌 그저 경비병들이니 만일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 둘만이 나서야만 한다는 사실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살수를 쓰게나.”

“지금 심정 같아서는 아예 처음부터 놈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저기, 그건 아니고…….”

“세상에 그런 나쁜 자들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감히 신하 된 신분으로서 국왕을…….”

아라퀘스는 분노가 극에 달해 말조차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지드가 다시 상기시켰다.

“차분하게 행동해야 해.”

지드는 지난밤에 비밀 화원에서 알아낸 충격적인 사실을 아라퀘스에게 모두 말해 주었고 함께 국왕의 방 천장으로부터 많은 증거 자료들을 찾아내어 일일이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신관 아르테스와 대공 라미, 그리고 은빛 기사단장 헤세가 저질러 왔던 추악하고 더러운 짓거리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지드와 마찬가지로 크나큰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둘은 흡사 지옥의 심판자들처럼 살기 어린 표정이었고 말 그대로 여차하면 검으로 그어 버릴 태세였다. 어쨌든 한 명씩 직접 찾아가기로 했고 그 첫 번째가 신전에 있는 신관 아르테스였다. 잠시 후 신전 앞에 도착한 지드는 병사들을 그 앞에 대기시키고 자신과 아라퀘스만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저벅저벅.

끼익!

아라퀘스가 먼저 계단으로 올라서 거대한 석문을 여는 순간 지드부터 입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음산한 분위기의 신전 내부 중앙에는 신관 아르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제를 지내고 있었다. 신관이 재빨리 일어나 지드를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지금처럼 아침 기도는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에 성스러운 신의 은총이 깃들게 하는 가장 절실한 방법이란 사실 다시 한 번 명심하기 바라오. 자, 그럼 제단 중앙으로 가서 기도식을 갖기로 하시지요.”

지드가 다소 싸늘한 눈초리로 그의 주글주글한 면상 노려보며 말했다.

“기도? 놀고 자빠지고 있네.”

신관이 깜짝 놀랐다.

“지금 뭐라고 말했소?”

“사악한 늙은이! 이제 죗값을 받아야지?”

신관이 어리둥절해하였다.

“죗값이라니요. 혹시 미치기라도 했소!”

지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의 뺨따귀를 후려갈겼다.

“그래, 나 미쳤다!”

짝!

“억!”

그의 얼굴에는 이미 살기로 가득했으니 신관은 두 손으로 자신의 볼따구니를 잡고는 크게 움찔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좋다. 늙은이! 왜 이러는지 말해 주지. 국왕과 왕비에게 최면을 걸어 마음대로 농락한 죄, 절대 금지의 사술 집단과 내통하여 사악한 사술을 이 나라 신전 우상으로 숭배케 한 죄, 그리고 매일 밤마다 많은 시녀들을 불러들여 네놈의 제자들과 욕정과 향락의 파티를 연 죄 등등. 그 외에 많은 죄상들이 있지만 생략하기로 하겠다.”

순간 신관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망발이오!”

그의 수십 명의 제자들 역시 기도하다 말고 일어나 지드와 아라퀘스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지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경고하는데 말로 할 때 순순히 죄를 인정하라.”

“죄는 무슨 얼어 죽을 죄! 이곳에 온 지 며칠 되었다고 건방지게 나서다니!”

신관이 큰 소리로 말하는 데에는 나름 비장의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냅다 지드에게 손가락을 퉁겼다.

탁! 탁!

최면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는데 오히려 지드는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니던가.

“병신 지랄하네.”

“뭐, 뭐야?”

“이런 방법으로 국왕을 비롯하여 왕비마저 네 노예로 전락시켰겠다!”

삭!

지드의 검이 번쩍하는 순간 손가락을 퉁겼던 그의 오른쪽 손목이 삭둑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악!”

털썩.

그 순간 신관의 제자들이 달려들려 하자 이번에는 아라퀘스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저마다 손을 뻗어 사술을 펼치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를 잘못 만난 듯했다. 그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서 어디로 움직였는지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리고 예리한 것이 뭔가를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삭! 삭! 삭둑! 삭둑!

털썩 털썩.

그 역시 지드와 마찬가지로 신관의 제자들이 사술을 펼치려고 뻗은 손들만을 검으로 무 자르듯 했으니 바닥에는 온통 손목 아래 부위들만 나뒹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아아!”

“살려 주세요!”

신전 안은 손목 잘린 신관과 그의 제자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마치 음산한 분위기와 맞물려 지옥의 형벌을 받는 듯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지드와 아라퀘스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듯 여전히 무거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지드가 신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손목이 없으니 손가락 퉁기는 짓거리는 못하겠지. 후후.”

신관 아르테스는 그제야 지드의 사악한 미소로부터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시오, 제발!”

“네놈의 죗값이 너무 무거워 아마 그렇게 못할걸? 생각 같아서는 어디 두어 군데 더 절단을 내고 싶지만 이곳 감옥의 형벌 또한 만만치 않다고 해서 거기에 맡겨 두기로 하지.”

지드가 일어나 신전 입구 쪽으로 향하자 아르테스는 창백한 낯빛으로 신음을 냈다.

“아아아! 차라리 죽여주시오.”

“그렇게 쉽게 죽어서야 되겠나. 늙은이.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숨이 끊어져야지.”

“…….”

지드가 아라퀘스에게 말했다.

“다음은 대공 차례.”

“당연합니다. 당장 가시죠.”

그 둘은 병사들을 대동하고는 왕궁 바깥의 국정을 의논하는 건물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대공 라미를 비롯하여 수십여 명의 대신들이 의자에 철퍼덕 누워서 거드름을 피우며 이런저런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드가 안으로 들어서자 다소 놀란 듯했지만 그들은 예법이고 뭐고 간에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였다.

“아니, 국왕께서 웬일로 이곳에 다 납시었소? 그것도 병사들과 함께 말이오.”

전혀 겁먹지 않은 말투, 아니 오히려 거만한 태도랄까. 마치 이 나라의 진정한 실세인 양 지드를 나무라는 입장이었다. 지드가 외쳤다.

“그대를 비롯해 대신들 모두를 체포하겠다.”

그러자 대공 라미가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체포라고 했소?”

“그렇다.”

“신임 국왕 주제에 감히 나와 대신들을 말이오?”

그러자 아라퀘스가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더니만 손을 들어 뺨따귀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짝!

“아악!”

데굴데굴.

그 충격이 어찌나 셌던지 돼지 같은 육중한 체구가 뒤로 나자빠지는 것도 모자라 몇 번을 굴러야만 했다. 이어 들려오는 아라퀘스의 분노한 음성.

“일국의 국왕 폐하 앞에서 그런 망발을 하는 자는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분위기가 싸해졌던가. 그처럼 기세등등했던 대신들이 기가 죽어 잠잠해졌다.

지드는 아라퀘스의 당찬 행동에 내심 흐뭇하기도 하고 든든함을 느꼈던가.

‘녀석, 제법 세게 나가는데.’

하지만 대공 라미는 여기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드에게 다가가 따졌다.

“여긴 왕도 출입이 통제가 된 국정을 보는 신성한 곳인데 대체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이오!”

순간 들려오는 둔탁한 음.

퍽!

이번엔 지드의 발길이 그의 복부를 인정사정없이 걷어찼던 것이다.

“악!”

데굴데굴.

이번에도 뒤로 몇 번을 굴러서야 멈춘 대공.

“컥! 컥!”

내상을 입은 듯 입가로부터 선혈마저 토해져 나왔다. 지드가 가슴 안쪽으로부터 서류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체포 이유는 국왕과 왕비가 최면에 걸린 사실을 알고도 한 나라의 대신으로서 보호를 하기는커녕 신관과 동조하여 오히려 궁지에 몰아간 죄. 그리고 국고와 군비 물자를 마음대로 탕진하고 심지어 역모까지 꾀한 죄다.”

그제야 대공은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항변할 의지를 잃고야 말았다.

곧이어 병사들 그 양손을 묶고는 개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그러자 대공이 절규하듯 외쳤다.

“살려 주시오! 목숨은 살려 주시오!”

빡!

“악!”

대공이 그 육중한 몸으로 강하게 발버둥치자 병사들 중 감정이 극도로 달해 있는 누군가 칼집으로 뒤통수를 강하게 가격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조용해졌으니 말이다.

해가 서산으로 드리워질 무렵이었다. 오전에 시작된 체포 작전은 이제 기사단장 헤세의 저택에서 그 막을 장식하려 했다.

시민들은 어느새 소문을 듣고 달려와 이곳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니 신임 국왕과 단장 헤세와의 대결 구도의 구경을 놓치지 않으려 함이었다.

지드는 단장의 충복이자 기사단 200여 명이 저택 안에서 항거하리라 미리 예상을 했는지 수백여 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주변을 철통같이 포위토록 하였다.

지드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어떡한담? 단장이 체포 사실을 미리 알고는 은빛 기사단을 동원해서 저처럼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아라퀘스 역시 다소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저택 안에는 단장의 일가들과 시종들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 무모한 공격은 오히려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

“한 가지 있긴 있지만 마음에 들어 하실지.”

“지금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디 있냐. 당장 말해 봐. 무슨 방법인지.”

“담을 넘어 들어가 속전속결 작전으로 기사들을 뚫고 단장을 단번에 사로잡는 것입니다.”

“우리 둘이서 말인가?”

“네.”

“…….”

저 안에는 무려 200여 명의 정예 기사단이 있건만 녀석은 제법 배짱 두둑하게 나왔다. 그만큼 자신의 전투 기술에 자신만만하다는 얘기던가.

하지만 지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지 다소 주저거렸다.

“괜찮은 방법 같기는 한데 그 역시 조금은 무식할 수도 있겠군. 기사들이 많이 죽어 나갈 테니까.”

“국왕 폐하께 대항하는 자들은 당연지사 희생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국왕 폐하라는 어감에 지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국왕 폐하는 얼어 죽을!”

“무슨 말씀이신지?”

“기사 놈들이 이 나라 왕을 대하는 실상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아무튼 한번 해 보자. 저들 은빛 기사단의 원래 본분이 왕실을 보호해야만 하는 명예로운 기사들이라지만, 오히려 국왕을 능멸하고 단장과 함께 추악한 권력의 노예가 되었으니 대항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겠지.”

슥.

지드가 허리춤으로부터 검을 뽑자 아라퀘스 역시 등 뒤에서 검을 집어 들었다.

“들어가시죠.”

“난 오른쪽 담을 넘을 테니 넌 왼쪽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반드시 대항하는 자만을 제거하되 무고한 가족이나 시종들은 해치지 말도록.”

“그 말씀 또 명심하겠습니다.”

잠시 후 저택 안에서는 격전을 치르는 소리가 이곳 바깥에서조차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삭, 슥!

“악!”

파팟!

“컥!”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나 수많은 시민들은 신임 국왕과 호위검사로 보이는 자가 함께 기사단장의 저택의 담을 넘어 전투를 치르는 광경이 놀람은 물론이고 신기하게까지 여겨졌다.

얼마나 검술에 자신이 있으면 단 둘이서 200명의 최강 정예 기사들을 상대로 겁도 없이 저택 안에 뛰어들었을까 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군중들은 오늘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속전속결의 체포 작전 소식을 접하면서 과연 신임 국왕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미스터리 사건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진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단장의 마지막 체포 작전 현장에 와서 참관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속단하기 일렀으니 그 둘이 기사들 모두를 제압하고 단장을 사로잡아서 당당히 모습을 보여야만 안심할 것이다.

챙!

“악!”

파파팟.

“컥!”

털썩!

지드는 자신의 전투보다는 왼편에 넓은 뜰 한가운데 몰려드는 기사들을 추풍낙엽과도 같이 쓸어 버리는 아라퀘스의 검술에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공이나 공력기술도 아닌 순수한 신체의 힘으로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을 동반한다는 것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판이었다.

저 녀석의 검술이 ‘원천 기술’이라 했던가. 지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 괴물 같은 놈을 내가 이겼었단 말이지.’

어느덧 시간은 흘렀고 마당과 곳곳의 입구에는 기사들의 시체들이 쌓여만 갔다. 그들은 비명횡사하면서도 소름이 끼쳤을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지닌 고수들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았을 테니 자신들의 죄를 벌하려 지옥으로부터 온 죽음의 사신들이 아닌가 했을 것이다.

파파파팟!

지드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연신 은빛 군장들을 걸레 조각처럼 찢어발기고 그 속으로부터 살점과 피 보라가 튀었다.

이제 남은 자들은 통틀어 수십여 명 정도일까. 지드와 아라퀘스는 본관 건물 앞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기사들은 아예 전의(戰意)를 잃고는 대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그때 아라퀘스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앞으로 나섰다.

“저자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젊은 녀석이라 그런지 참으로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지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러든지.”

순간 기사들이 검과 창을 던져 버리고 혼비백산 옆 담 쪽으로 가더니만 그걸 넘느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닌가.

“살려 줘!”

“도저히 우리 상대가 아니야.”

담 밖에는 이미 병사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그들 모두는 체포당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피를 토하고 죽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리라.

지드와 아라퀘스가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홀 한가운데 단장이 스스로 배에다 검을 꽃은 채 죽어 있었고 그 옆에는 아들 브라스가 통곡을 하며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죗값을 인정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라퀘스가 브라스에게 다가가서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그의 목덜미에 갔다 대었다.

그러자 지드가 그를 만류했다.

“그만둬.”

“네?”

“병사들에게 넘겨라.”

“아, 예.”

잠시 후 본관 건물 바깥으로 나온 지드는 계단에 걸터앉더니만 회색빛을 띤 공허한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치열한 전쟁 끝에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장군의 허탈한 모습이랄까. 내심 사악하고 더러운 존재들을 깨끗이 청소했음에 가슴은 더욱 시원해져야 하지만 그 반대로 오히려 숨이 턱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살인 후의 감정 추스르는 방법을 아직은 모르는 것일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건만 말이다.

***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났다.

드니로 왕국의 서쪽 높은 바위 산 정상에는 먼 여행객 차림의 지드와 아라퀘스, 그리고 헤라가 저 아래 도시를 바라보며 서로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아쉬움이 없겠어요?”

헤라가 묻자 지드가 씁쓸하게 답했다.

“진짜 왕이 될 뻔했는데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저 자리는 내가 주인이 아니야.”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국왕의 가족들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낸 거죠?”

“국왕이 죽기 전에 비밀 화원 오두막집 지붕 위에다 글을 남겼지.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아꼈던 진정한 가장임이 틀림없어. 어쨌든 그의 아들이라면 아버지처럼 훌륭한 왕이 될 것이야.”

“그렇다고 왕권 인계식도 참석하지 않고 이렇게 새벽에 도망쳐 나오는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러자 지드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막상 왕의 자리를 넘겨준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려서 말이야. 아예 그 꼴 보지 않고 뛰쳐나오는 것이 좋겠지.”

“잘 생각하셨어요. 그런 결정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건데. 아주 의연한 사람 아니면 바보만이 가능하겠죠!”

그때 헤라는 장난기가 생겼는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단장님은 어느 쪽이죠?”

“뭔 말이냐?”

“왕의 자리를 버릴 만큼 의연한 사람이에요, 아니면 바보예요?”

“…….”

지드는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우. 그러고 보니 내가 뭔 짓을 한 거여! 저절로 굴러온 왕의 자리를 차 버리다니. 아무래도 나 미친 거 아니야!”

이에 헤라와 아라퀘스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그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길을 떠났다.

“이미 줘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예요?”

“이거 놔라!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 같단 말이다.”

“어휴! 그만 가자니까요. 진짜 남자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기예요?”

“놓으라니까! 잠시 내가 실성했나 봐!”

“이제 돌아가서 왕의 자리를 다시 내놓으라고요? 정말 사람이 염치도 없네요.”

“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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