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9 지드! 붉은 기사단 단장이 되다 (30/81)
  • Chapter 29 지드! 붉은 기사단 단장이 되다

    그날 저녁 궁 안에 마련된 지드의 숙소에는 대공 메르가 일찌감치 찾아와서는 그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난 어쩌라는 겁니까.”

    “어쩌기는요. 애초부터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이곳으로 데려온 그대가 잘못한 일이 아니겠소. 아까는 단장 선출을 위한 대결이라는 사실에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단 말이오.”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지만 제가 오죽 급했으면 그리했겠습니까.”

    “아무튼 난 이만 떠나겠소. 원래 성격상 어디 한군데 붙어 있지를 못해서 말이오. 지난번 저와 헤라를 초대해서 귀한 대접을 해 주신 일은 감사드리지만 그 때문에 여기서 발목을 잡히기는 싫습니다.”

    지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던 헤라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하며 방문 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털썩.

    대공 메르가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까지 흘렸다.

    “아아. 이 일을 어쩔꼬. 결국 나는 물론이고 우리 가문마저 이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아아.”

    지드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붙잡아 두기 위해 연극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소 퉁명스런 말투로 말했다.

    “갑자기 또 왜 그러시는 겁니까.”

    “피가로 제국과의 분쟁을 해결 못하면 저와 제 가문은 끝이란 말입니다. 흑!”

    그가 눈물까지 보이자 지드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끝이라니요?”

    지드가 관심을 가지자 대공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축 늘어진 어깨에 굳어진 표정을 보니 그가 대단한 연극인이 아닌 이상에야 진실 된 모습으로 보였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이에 지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얘기하라고 하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괴로운 듯 사정 이야기를 꺼내려 하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지드는 혹시라도 그에게 말려들어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공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이곳을 떠나기로 한 제 결심을 바꿀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 이젠 붙잡을 생각도 없소이다. 다만 이 답답한 속내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할 뿐 더 이상 바라지도 않지요. 어차피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에 당연지사 제가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것이 낫겠지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헤라가 처음으로 말문을 꺼냈다.

    “오빠! 우리 그렇게 급한 건 아니잖아요. 일단 의자에 앉아서 대공님의 사연을 들어 보는 것이 어때요.”

    그녀가 지드의 손을 잡아끌고는 거실 중앙의 탁자로 향했다.

    “놔.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잠시 후 대공도 자리에 앉았고 어떤 내막이 있었는지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여가 흘렀을까. 처음과 달리 지드의 표정이 흔들림 있었으니 대공이 처한 상황이 진짜로 심각하긴 심각한 것 같았다. 그가 지드에게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으니.

    ***

    아마스란 왕국의 북동쪽 아란시아 지방에는 천애의 자연 조건을 지닌 휴양지가 있었다.

    그곳은 남부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최고의 장관을 지님으로서 본토의 왕족과 귀족들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귀빈들마저 사시사철 별장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각국의 기사단들 역시 호위 자격으로 모여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은 전통적으로 검술 실력이 출중했고 그 위상마저 대단했으니, 이들은 휴양지에 모여든 각국의 귀빈들을 통해서 그 존재감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백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붉은 기사단의 전통과 명예가 어느 순간 곤두박질치고도 모자라 오히려 자국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즈음일까. 당시 붉은 기사단 단장이었던 파멜은 당시 어느 지방의 반란군 토벌에 대한 공으로 국왕으로부터 아란시아 휴양지에서 한 달 정도 머물다 오라는 포상 휴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100여 명에 달하는 기사단원들에 대한 휴가를 요청했는데 결국 그에 대한 허락을 받아 내기에 이르렀고 무척 기뻐했다.

    얼마 후 그곳에 도착했던 단장 파멜과 단원들은 낮에는 뜨거운 온천욕으로 몸을 풀었고 밤에는 매일 파티를 하며 술을 마셔 대었다.

    워낙 유명한 관광 명소이기에 주변국들의 귀빈들 역시 많이 보였는데 그들 중에는 피가로 제국으로부터 온 집정관도 와 있었던 것이다. 제국이라 함은 왕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국인데 바로 그곳에서 최고의 실세가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만저만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단장 파멜은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 단장의 자격으로 부랴부랴 그를 찾아가서 환영의 인사를 건넸고 집정관 역시 그의 호의에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 둘은 술과 자연, 그리고 검술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사내들로서 금방 친해졌으니 매일 밤마다 술의 향연에 푹 빠져 이런저런 세상 얘기들을 주고받는 사이까지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검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그 둘은 대화를 나누다가 묘한 경쟁 심리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얘기 발단은 다음과 같았다.

    “이보시게, 아우. 자네의 아마스란 붉은 기사단원들의 검술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난들 나와 함께 이곳에 온 호위병들과 얼추 그 수준이 비슷한 것 같은데?”

    피사로 제국의 집정관의 말에 파멜은 갑자기 호승지기가 일어났는지 술잔을 들이켜다 말고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반박을 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 단원들을 일개 호위병들과 비교를 하다니요. 집정관님께서야말로 아무리 제국이라 할지라도 호위병들이 저희 아마스란 왕국의 상징이자 명예라 할 수 있는 붉은 기사단과 비교 자체를 하시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집정관이 피식 웃고 만다.

    “허허. 자네야말로 뭔가 착각을 하는 듯하군. 명색이 집정관인 나를 모시고 온 호위병들인데 그저 그런 병사들이 왔겠는가? 그들 역시 어느 정도 검술 수준을 갖춘 검사 출신들이 분명하네만.”

    파멜은 지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제국에서 제법 내로라하는 검사 집단이 있다면 특수검사부나 상급 계열 관할 소속 근위대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에 집정관님의 호위병들로 온 자들은 그 아래에 해당하는 중급 계열의 호위검사들로 알고 있는데 설마 하니 그들이 제 붉은 기사단을 능가하리라 보십니까?”

    “…….”

    집정관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손으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번뜩였고 입가에 미소가 살짝 올라갔다.

    “내가 이런 얘기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웬만한 왕국의 기사단원들은 우리 제국의 중급 계열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아네. 실제로 지난 수년 동안 제법 많은 기사단 출신들이 제국 검사 시험에 도전해 왔지만 그다지 탐탁지 않은 실력을 보였거든. 물론 자네의 붉은 기사단은 남부 대륙에서도 제법 유명세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아네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 본다면 별 볼일 없을 것 같단 말일세.”

    순간 파멜은 술이 확 깨 버리고 말았다. 은근히 자존심을 꽉꽉 밟는다고나 할까.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현실이 아니던가.”

    “너무 장담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본다면 왕국에서 최고 능력을 지닌 검사라 할지라도 일단 우리 제국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날부터 평범한 수준의 검사일 뿐이지. 우물 안 개구리들이 그 안에서는 서로 잘났다고 마음껏 우기는 것은 자유이지만 세상 밖은 생각보다 넓고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 붉은 기사단은 강합니다.”

    “물론 그러실 테지. 허허.”

    “애초부터 강한 검사들 위주로 한 명 한 명 엄선해서 선출했으니까요.”

    “그래 봐야 우물 안에서 뽑았겠지.”

    “강함이란 우물 밖에서도 통하는 겁니다.”

    “오호라. 과연 그럴까.”

    “당연하다마다요.”

    단장이 세게 나오자 집정관 역시 조금은 기분이 상했던가.

    “내 장담하건대 지금 당장 자네 부하들과 내 호위병들과 대결을 벌일지라도 절대 지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네.”

    파멜 역시 이쯤에서 눈이 홱 돌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시다면, 확인해 볼까요?”

    “확인이라니?”

    “대결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집정관도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대답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그리 함세. 그리고 이왕 할 거면 내기 한번 하는 것이 어떤가.”

    “내기라니요?”

    “그래야 긴장감도 있고 재미있지 않겠는가.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만일 자네 단원들이 내 호위병들을 이긴다면 자네가 원하는 그 무엇이라도 내기에 걸겠네.”

    파멜이 깜짝 놀랐다.

    “네?”

    집정관이 갑자기 뭘 생각하더니만 다시 말했다.

    “아, 그렇지. 나는 프리다 평원을 걸겠네. 거긴 얼마 전 내 사유 영지로 사들여 놓은 것이니 잃어도 크게 상관 않겠네. 그렇다면 자네는 뭘 내놓을 건가.”

    “저, 저기…….”

    파멜이 머뭇거리자 집정관이 눈초리를 가늘게 뜨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왜, 이번 대결이 자신이 없는가?”

    그가 불끈했다.

    “자신이 없다니요!”

    “그럼 프리다 평원과 견줄 만한 뭔가를 내기에 걸게나. 가령 여기라든지.”

    “여기라니요?”

    “맞아. 그게 좋겠군. 생각해 보니 이곳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곳이라니요?”

    “아란시아 휴양지 말일세.”

    그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됩니다! 여긴 왕국의 영토인데 제가 어찌 그런 내기를 할 수 있습니까.”

    “여기 전체를 걸란 얘기가 아닐세. 영토가 아닌 그저 휴양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절반만 내주면 된다네. 그거야 여기 지방 관청이 관할이니 자네의 입김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겠나. 하지만 내가 지면 자네는 프리다 평원 전체를 가질 수 있으니 세상에 이처럼 좋은 내기가 어디 있겠는가.”

    “…….”

    이번엔 파멜이 생각에 잠겼다. 그의 제안이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닌 듯싶었던가.

    그의 말대로 휴양지는 지방 관청 관할인데다가 마침 총독 역시 자신의 친구였기 때문에 설령 패한다 할지라도 당장 자신의 입지에 영향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내기는 거의 90% 이상 승산이 가능해 보였다. 붉은 기사단은 그야말로 그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뽑은 일당백의 뛰어난 검사들 출신으로서, 하나같이 만만한 자들이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제국의 중급이자 이류 계열의 호위병들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법이었다.

    집정관에게 은근히 비하당해 왔던 것을 이번에 단단히 갚아 주자는 셈으로 파멜은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정관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렇다면 우리 이 내기를 문서로 남기 세나.”

    “문서라니요.”

    “아무리 내기라지만 제법 적지 않은 이익이 오가는 판인데 문서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파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지금 하는 행동이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해 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너무 자신감에 차 있으면 사리판단이 흐려질 때가 있는 법,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아마스란 왕국 내 최고의 인재들만으로 구성된 붉은 기사단이 최강이란 생각이 머릿속 가득했기 때문에, 제국의 이류 검사 계열의 호위병들에게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하고 또 했다.

    결국 그는 집정관의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파멜의 확신은 빗나가 버렸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신음하는 붉은 기사단원들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야만 했던 것이다.

    완전히 패배. 그것도 호위병 10명에게 100여 명이나 되는 기사단원들이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나가자빠졌으니.

    시합이 끝나자 집정관은 망연자실한 파멜에게 한마디 했다.

    “휴양지 수익권은 내 개인 재산에 많은 보탬이 될 걸세. 아무튼 고맙게 쓰겠네. 아, 그리고 수익권을 다시 찾고 싶다면 다음에 다시 한 번 내기함세나. 대신에 그때에는 더 큰 것을 가지고 와야 하네. 그동안 잘 쉬다 가네. 허허!”

    집정관이 얄밉게 한마디 던지고 자리를 뜨자 파멜은 그제야 철저히 당했구나 하는 느낌이 확 오기 시작했다.

    ‘아!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훗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당시 집정관의 호위병들은 상급 계열 중에서도 특수부에 해당하는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본다면 집정관은 애초부터 파멜의 심리를 이용해서는 의도적으로 내기에 끌어 들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휴양지로부터 얻는 관광 수익이 제법 상당했음을 알고는 처음부터 꾸민 계획이랄까.

    현재 집정관은 휴양지의 수익권 나머지 절반마저도 욕심이 생겼는지 계속해서 내기를 제안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본국으로 돌아온 파멜은 그의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계속해서 미루어 오자 급기야 집정관은 내기 사실을 아마스란 국왕에게 알리겠다는 은근한 협박까지 했다.

    만일 그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파멜은 국가 재산의 직권 남용에 내기를 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파멜은 자결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죽음 후에 또 다른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게 생겼으니, 그가 바로 지금 지드에게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대공 메르였다.

    그는 그 자신이 파멜을 붉은 기사단장으로 직접 선출한 장본인이자 절친한 친구로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릴 새도 없이 이미 집정관의 함정에 빠져 목숨을 끊은 단장. 만에 하나라도 그의 자살 동기가 세상에 밝혀진다면 대공 메르 그 자신의 입지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단장의 그러한 행동을 알고도 사전 방지를 하지 못한 죄 역시 중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새로운 기사단장을 선출한 뒤에 피사로 제국의 탐욕스런 집정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휴양지의 권리를 되찾아오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

    대공 메르의 얘기를 모두 전해 들은 지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듣고 보니 문제가 제법 심각했다. 왕국의 수익 분쟁에다가 대공의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 문제에 개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것이라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지드가 다소 망설이자 대공 메르가 초조한 기색을 했다.

    “제발 부탁하네. 자네 능력이라면 필히 집정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휴양지의 수익권을 되찾아올 수 있을 걸세.”

    이윽고 지드가 말문을 열었다.

    “그 집정관이라는 자가 내기를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내기라면 나도 조금 좋아하는데요.”

    순간 대공의 기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 정말인가?”

    “네.”

    “그렇다면 단장을 수락하는 것인가?”

    지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일단 붉은 기사단원들에게 안내를 해 주시죠.”

    대공이 뛸 듯이 기뻐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잠시 후, 연병장으로 나온 지드와 대공은 이미 대열을 맞추어 서 있는 100명의 붉은 기사단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드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연단에 올라와서야 이윽고 대공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나이들이 어린 것 같군요??”

    “그, 그렇죠.”

    “그리고 왠지 좀 힘들이 없어 보이는데요. 적어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사단 정도라면 멋들어지고 당당한 자세가 나와야 하건만 마치 신병 집합소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놓은 것 같습니다.”

    “…….”

    대공이 대답을 못하자 지드가 뭔가 눈치를 차린 듯 넘겨짚어 보았다.

    “제게 또 숨기고 있는 있습니까?”

    그제야 대공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 숨겨서 뭐 하겠소. 사실 이들은 대충 숫자만 맞춘 일반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전직 단장이 자살하고 나서 대부분의 부하들 역시 자진 탈퇴해서 뿔뿔이 흩어진 상태입니다.”

    “세상에, 그렇다면 붉은 기사단은 이미 해체된 거란 소립니까?”

    대공이 화들짝 놀라 그의 입을 막았다.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번 일도 오로지 대공만 알고 계셨단 말인가요?”

    “후우, 지금까지 잘 숨겨 왔지만 이젠 들통 날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도와주십쇼. 국왕께서 워낙 연회를 좋아하시고 국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라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지만 앞으로 한 달 후 아란시안 휴양지로 가시는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이 들통이 나고 말 겁니다. 그전에 그대가 이들을 데리고 가서 해결을 봐야 합니다!”

    지드는 너무도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진짜도 아니고 가짜 붉은 기사단을 데리고 가라니요!”

    “복장은 그럴듯하게 잘 입혀 놓았으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내일 아침에 당장 떠나 주기 바랍니다. 모든 여비와 여타 준비 사항은 이미 완벽하게 다 되었습니다.”

    “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이 임무를 수행할 수나 있겠습니까?”

    대공이 진지한 표정으로 지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수락했던 단장을 포기하는 건 이 나라 국법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요?”

    “아무튼 그게 법입니다!”

    대공은 혹시라도 지드가 마음이 바뀔까 봐서 말이 끝나자마자 등을 홱 돌려 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 지드는 멍한 얼굴을 할 뿐.

    ‘대체, 대체 이게 뭐야!’

    그로부터 수일 후.

    짹짹.

    새들이 정겹게 지저귀는 산악 지대였다. 지드와 헤라는 바위 언덕 아래 전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가 단장 제의를 수락한 것은 잘한 것 같아요. 적어도 여행을 하면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게다가 붉은 기사단마저 거느리고 가니까요.”

    헤라의 말에 지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숲 안쪽 공터에 듬성듬성 보이는 기사단원들을 바라보았고 이내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이거 정말 큰일 났군! 대공이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어쩔 수 없이 단장이 되긴 되었지마는 진짜도 아닌 기사단 복장만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저들을 이끌고 머나먼 분쟁 지역으로 파견 간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벌써부터 쑤셔 오네.”

    헤라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쉽게 생각하세요. 단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군.”

    “딱히 뭘 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대처하면 되잖아요. 저도 옆에 있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도와 드릴게요.”

    지드가 헤라의 얼굴을 바라보더니만 가벼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후우! 정말 내 자신이 한심하군.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게다가 애한테 도움을 받는 처지까지라.”

    헤라가 불끈했다.

    “애라니요! 전 숙녀란 말이에요!”

    “숙녀 좋아하시네.”

    “어제 생일이 지났으니까 이젠 열여섯 살이고 법적으로도 결혼할 나이란 말입니다.”

    “그래, 한 살 더 먹어서 좋겠다.”

    “치.”

    “…….”

    휘이잉.

    한차례 상쾌한 바람이 이 둘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맑고 청명한 가을날이지만 지드는 여전히 조바심을 내며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지드.

    지휘관 경험이 전혀 없는 그로서는 기사단을 어떻게 인솔해야 할지, 또는 체계는 어떤 식으로 세워야 할지 전혀 모른 채 보름여 동안 행군만 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사단들의 기강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 이건 붉은 기사단들이 아니라 한 무리의 보잘것없는 패잔병들을 보는 듯했다.

    상관이나 그 부하들이나 얼치기 출신들이랄까. 헤라는 풀 죽은 지드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정말 보기보다 소심하네요.”

    지드가 불끈했다.

    “그래, 나 소심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단장님이 걱정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이냐?”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면 그만이잖아요.”

    “누가 뭐라나.”

    “그럼 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

    지드가 이번엔 별로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헤라 역시 먼 풍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 언덕 아래로부터 한 명의 기사가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왔고 지드에게 보고했다.

    “단장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지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를? 대체 누가?”

    “지난번 단장 선출 행사에서 단장님의 상대인 듯합니다.”

    “뭐라? 그렇다면 아라퀘스 그 녀석이란 말인가.”

    지드는 냅다 일어나 언덕 아래로 향했다.

    잠시 후, 지드의 예상대로 자신을 찾아온 자는 아라퀘스가 맞았다.

    기사단 있는 숲속 한가운데 버팅기고 서서 방금 전에 모습을 나타낸 지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드가 물었다.

    “뭔 일이냐?”

    “재대결을 원합니다.”

    “재대결?”

    “그렇소.”

    지드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난 패한 자와는 재대결하지 않는다.”

    아라퀘스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 게 어디 있소!”

    “여기 있다.”

    “진정한 검사는 자고로 언제든지 대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이지 시건방진 놈이 틀림없었다. 정형화된 말투에 예법적인 행동에 지드가 진저리를 쳤다.

    “나 진정한 검사 아니거든! 그러니 제발 가 줘라. 가뜩이나 지금 머리 아파 죽겠는데.”

    “대결을 받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소.”

    “뭐라!”

    지드가 노려보자 그는 아예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같이 쳐다보았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더니. 나 참,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는지.”

    지드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갔다.

    그날 저녁, 식사를 위해 잠시 막사 밖을 나온 지드는 아직도 숙영지 내를 떠나지 않은 아라퀘스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생긴 대로 끈질기게 노는군.’

    지드는 그가 있든지 말든지 별 상관없이 공터를 가로질러 식사하는 곳으로 갔다.

    날이 어두컴컴해지자 기사단은 각자 막사에서 잠을 청했고 지드 역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한편 아라퀘스는 저녁을 쫄쫄 굶었건만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댄 채 여전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무 뒤에서 먹을 것들을 식판에 담아 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헤라였다.

    “이것 좀 드세요.”

    아라퀘스는 갑자기 나타난 소녀를 살펴보며 조금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누구시오?”

    “단장님 동생입니다.”

    “동생이라고요?”

    “친동생은 아니고요.”

    “그럼?”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아, 네.”

    “아무튼 여기서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네요.”

    “고생은요 뭘.”

    “웬만하면 그냥 돌아가시죠. 단장님 고집이 워낙 세서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이리 뵈도 명색이 제국 사관학교 출신인데 포기란 말은 내 사전에 없소이다.”

    “…….”

    헤라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20살이 되었을까. 비록 자기보다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뭔가 고정되고 판에 박힌 말투로 보아서 정식 교육을 철저히 받은 장교 출신이 분명했다.

    그가 왜 세상을 돌아다니며 강자들과 대결을 펼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은 세상 경험이 많이 필요한 풋내기란 것이 그냥 느껴졌다.

    헤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여기 식판이나 받아 줘요. 당장은 먹을 것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제야 아라퀘스가 냅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고맙소.”

    “그럼.”

    헤라가 사라지자 아라퀘스는 며칠은 굶주린 사람처럼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먹었다.

    우걱우걱.

    쩝쩝. 꿀꺽.

    ***

    이튿날 기사단은 숙영지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지드는 공터 한가운데 자빠져 자는 아라퀘스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뭐야? 이 녀석, 아예 여기서 잤잖아?”

    그때 헤라가 지드 옆으로 와서 말을 건넸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데요?”

    “괜찮기는! 졌으면 인정할 것이지 다짜고짜 와서 재대결을 청하다니. 게다가 젊은 놈이 싸가지가 전혀 없단 말이다.”

    “그건 아마 그가 자라 온 환경과 습관에 배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아요.”

    “습관이라니?”

    “어제 잠시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요, 어느 제국의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것 같아요.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지드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으니 그의 잔머리가 간만에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가만있어 보자…….’

    잠시 후 지드는 무슨 이유인지 발로 그의 발을 툭툭 치며 깨웠다. 눈을 부스스 뜨며 일어난 아라퀘스가 주변을 살펴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날이 밝았나. 거참, 내가 늦잠을 다 자다니.”

    “너, 나와 재대결을 원한다고 했지?”

    정신이 번쩍 드는 아라퀘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가짐을 바로 하며 말했다.

    “제 청을 받아 주시는 겁니까?”

    끄덕끄덕.

    “고맙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아니라니요?”

    “나는 해야 할 임무가 있거든. 그거 끝나고 나서 하잔 소리야.”

    “알겠습니다. 대결만 받아 준다면 언제까지 기다리겠소.”

    “헌데 내 임무가 제대로 끝나려면 자네 도움이 필요할진데.”

    “제 도움이요?”

    “자네 사관학교 출신 맞나?”

    “어, 어떻게 그걸……?”

    지드가 냅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일단 손 내밀어 봐.”

    아라퀘스가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자 지드가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기사단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기사단이라니요?”

    “이후로 자네가 기사단 부단장으로서 저들을 인솔하고 지휘할 것이다!”

    “네……?”

    “저기 떨거지들을 잘 좀 교육시켜 봐라. 아니 기강부터 잡는 것이 급선무야.”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아라퀘스는 지드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 기사들을 보며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보름여가 지났고 이들은 목적지인 아란시아 휴양지에 거의 이르렀다.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은 정통과 역사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은빛 군장에 붉은 망토, 그리고 투구 위로 풀풀 날리는 붉은 깃털의 기사단 행렬을 보려고 몰려든 마을 주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착! 착! 착! 착!

    절도 있는 행군으로 마을 한복판으로 지나가는 붉은 기사단. 가끔 아라퀘스가 그들 옆에 서서 혹시라도 대열을 흩트리지 않는 자가 있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았다.

    나이는 무척 젊지만 과연 제국의 사관생도 출신이라 그런지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제법 카리스마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하나 둘! 하나 둘! 각자 대열에 신경 쓰도록! 하나 둘, 하나 둘!”

    대략 100여 명의 붉은 기사단들이 마을을 통과하고 평원으로 접어들 때였다. 지드는 다시 선두 대열로 돌아온 아라퀘스를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더니만 이내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다음 마을에서부터 티 내지 말고 가자.”

    그러자 아라퀘스가 반문했다.

    “무슨 말씀인지요?”

    “내 말은 말이야, 그러니까 기사단원들이 먼 길을 와서 각자 피곤할 텐데 굳이 마을을 지날 때 군기를 바짝 세워서 행군하게 한다는 것이 좀 그렇다 이 말이다.”

    “기사단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명예로운 군인들이라서 주민들이 보는 데서는 정식 행군을 해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절차라는 말에 순간 지드가 당황한 나머지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나도 알아! 그런 절차가 있다는 거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 융통성 있게 살자 그 말이다.”

    “마을을 지날 때 기사단 행군에 관한 사항에는 어느 나라든지 예외가 없는 걸로 아는데요.”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니. 나도 안다니까 그러네. 나는 다만 그러니까 뭐냐…….”

    절차고 나발이고 전혀 모르는 지드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너! 상관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꼬박꼬박 말대꾸냐.”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아는 거 많으면 네가 단장해라. 단장 하라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때 헤라가 옆에서 마지못해 껴들었다.

    “아무래도 단장님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고 신경이 날카로우신 것 같아요. 웬만하면 오늘은 근처 어딘가에 숙영지를 정하지요.”

    지드는 내심 헤라가 적당할 때 껴들어 주었음을 고맙게 생각했고 당장 반응을 보였다.

    “이보게, 부단장!”

    “네, 단장님.”

    “날도 저무는데 숙영지 칠 곳을 알아보도록.”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자마자 냅다 수행하러 가는 아라퀘스, 처음 볼 때 그 건방진 청년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졌으니 지드는 확 달라진 녀석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가.

    “저 녀석 왜 저리 공손하게 달라진 거지?”

    그때 헤라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사관학교 출신이라서 뭔가 다르긴 다른 것 같아요.”

    지드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거기 나오면 다냐.”

    “명령에 복종하는 자세부터 다르잖아요. 전에는 아라퀘스 님이 단장님을 대결 대상으로만 여겼기에 오로지 승부에만 집착했지만 이제는 복종해야 할 상관이니 철저하게 자신의 본분을 지키자는 것이지요. 솔직히 단장님도 그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이용하는 거잖아요.”

    지드가 언성을 높였다.

    “조그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군. 그나저나 너, 앞으로 아라퀘스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잘하는지 계속해서 살펴보고 나한테 보고해라?”

    헤라가 난색을 표명했다.

    “저더러 아라퀘스 님을 몰래 감시하라고요?”

    “명령이다.”

    “너무해요.”

    “지금부터 실시!”

    지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저만치 막사로 향했고 헤라가 잔뜩 삐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심술쟁이!”

    대뜸 들려오는 음성.

    “나 귀 밝다!”

    “웁!”

    헤라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

    끼이익. 끼이익.

    금빛 문양으로 가득한 호사스런 대형 마차가 대략 백여 명의 근위대에 둘러싸여 프리다 평원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마차 창문 안에는 중년인 2명이 보였는데 저마다 예사롭지 않은 토가 차림에 창밖 풍경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쩍 마른 자가 뚱뚱한 대머리 중년인에게 물었다.

    “여기 프리다 평원 전체가 자네 개인 소유란 말인가.”

    “그렇다마다.”

    “정말 너무하네그려. 이 정도 영토라면 웬만한 왕국을 세우고도 남겠는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고 또 심술을 내는 건가. 군단 사령관인 자네 능력에 이런 정도 포상을 챙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 친구가 또 억지를 쓰네.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이제 겨우 이 년째인데 번갯불에 콩이라도 튀겨 먹으라는 것인가. 자네야말로 지난 십 년 동안 집정관의 직분으로 있었으니 엄청난 부와 축재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젠 그것도 모자라서 이런 남부 지장에 광활한 영토를 사들이고 마치 황제 노릇을 할라 치니 이거 원 기죽어서 살겠는가.”

    황제 얘기가 나오자 집정관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말을 제지했다.

    “이, 이 사람이! 감히 황제 폐하를 얘기하는 겐가!”

    “하면 어떤가. 지금 우린 휴양지에 쉬러 가는 것이니 그동안 속에 넣고 있었던 이런저런 얘기하는 것도 괜찮다 생각하네. 더군다나 자네는 집정관이고 나는 군부 사령관이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사실 요즘은 황제조차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건만.”

    “그만함세.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소리도 있잖은가.”

    “자넨 여전히 황제 소리만 하면 벌벌 떠니 언제 강심장이 될 텐가.”

    “그만하래도!”

    “알았네. 그만하지. 어차피 머리 식히러 머나먼 이곳까지 온 것이니 정치 얘기랑은 멀리하고 철저히 쉬다 가야겠지. 그나저나 소식을 들어 보니 자네가 아란시아 휴양지 수익권의 절반을 챙긴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

    반짝거리는 대머리에 축 늘어진 볼 근육이 한눈에 봐도 탐욕이 넘쳐 보이는 집정관이 하얀 이빨까지 드러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이라네.”

    “자넨 어찌 그리도 수완이 좋은지 모르겠군. 그곳은 아마스란 왕국의 영토임이 분명한데 어찌 수익권까지 얻었는지 그 비결 좀 가르쳐 주겠나?”

    “비결까지는 아니고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아니 멍청한 단장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지.”

    “멍청한 단장이라니?”

    “사실 그 작자와 내기를 했거든. 내 호위병과 그자의 기사단과 대결을 벌일 시 누가 이기는지 말일세.”

    “뭐라? 그 방법은 우리끼리 주고받던 장난 내기가 아닌가. 설마 그자가 그런 유치한 방법에 넘어왔단 말인가.”

    집정관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예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하. 나 역시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그 단장이 너무 심각하게 나오기에 한번 진짜처럼 해 봤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 호위병들은 피사로 제국의 최강의 검사들이라 할 수 있는 특수검사부 출신이 아닌가. 헌데 나는 그들에게 일반 호위병 복장을 입힌 뒤에 아마스란 왕국의 붉은 기사단과 대결을 하게 만들었다네.”

    “이거 대국의 집정관께서 아예 사기를 제대로 치셨군그려.”

    “나야 장난으로 시작했다지만 오히려 속은 놈이 병신 아닌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세상에 왕국 소유의 휴양지를 내기에 거는 작자가 어디 있던가. 어쨌든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익을 챙기게 되었으니 그게 어딘가.”

    “지금 가는 곳이 거기란 말이지?”

    “내가 절반은 주인이니 이번 여행은 마음 놓고 하게나.”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원래 수익권을 돌려주지 그러나.”

    순간 집정관의 안색이 굳어졌다.

    “돌려주다니! 무슨 소리인가.”

    “자넨 제국의 집정관이 아닌가. 소왕국의 영토에 관심을 갖는 자체가 체통이 서지 않아 보이네만.”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네그려! 그렇기에 자네는 재산 불리는 데에는 아주 꽝이란 말일세. 아란시아 휴양지로 말할 것 같으면 남부 대륙 최대 규모의 관광지로서 해마다 인접 국가들로부터 수천여 명의 귀빈들이 몰려들어 돈을 팍팍 쏟아 내고 가는 곳이라네. 지난 한 해 들어온 수익금 절반이 내가 수년간 번 금액과 같으니 한마디로 거긴 금광이나 마찬가지라네.”

    “어련하시려고?”

    집정관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음성마저 낮게 깔렸다.

    “사실 이번에 내가 아란시아 휴양지로 가는 이유는 아예 그곳을 통째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일세.”

    놀라고 마는 사령관.

    “뭐라고!”

    “보고 받은 정보에 의하면 그 단장이라는 자는 자결을 했고 그 후임자가 기사단을 이끌고 휴양지에 온다는데 이번에도 같은 수법으로 완전히 그곳을 가질 셈이네.”

    “그 수법이라면, 자네의 최강 근위병들을 일반 호위병 복장으로 위장을 시켜 대결을 벌이겠단 말인가.”

    “아닐세.”

    “아니라네.”

    “이번엔 시종 복장으로 위장을 시킬 걸세.”

    “시종이라고!”

    “새로운 단장의 경계를 풀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이 좋을 듯해서 말일세. 아마도 그자는 전임 단장이 잃어버렸던 수익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걸세.”

    “그 대결이라는 것이 시종들과 기사단원들의 대결이겠군. 그나저나 이번 내기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야 내 사유지인 프리다 평원을 내놓고 휴양지 나머지 수익권을 마저 따 와야겠지.”

    “지금 말하기는 뭐 하고 일단 가서 봄세.”

    “하여간 자네 욕심은 끝이 없군.”

    “그 때문에 살맛나는 게 아닌가. 가지면 가질수록 내 영혼에 살이 더하는데 어찌 신이 내려 준 이런 축복을 마다하겠는가. 이번 일만 잘되면 자넨 평생 공짜로 휴양지 생활을 누리게 해 주겠네.”

    “됐네, 이 사람아! 차라리 돈 내고 즐기는 것이 마음 편하지.”

    “자네야말로 그런 궁색한 생각을 버리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