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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4 복수할 가치도 없는 자 (25/81)
  • Chapter. 24 복수할 가치도 없는 자

    숙영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언덕 위 지대에는 제17대 지원 부대원들이 숲 안쪽에 몸을 숨기고 저 아래 벌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대공 자라투스는 맨 선두에서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 주는 지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넋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말했다.

    “저, 저 녀석은 지난번 용병 연합회에서 보았던 그놈인데!”

    단번에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흑검사를 꺾고 자신과 여러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니 말이다.

    그가 용병 수천 명을 이끌고 이렇듯 개선장군처럼 5구간으로 당당하게 합류하러 갈 줄은 꿈에라도 생각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

    사실 이 순간 지드의 전투 모습에 그 누구보다도 훨씬 크게 충격을 받은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테세우스였다.

    그 역시 용병 연합회에서 지드와 직접 말해 본 적이 있었으니 당연지사 지드가 누구라는 건 금세 파악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경직하게 만든 이유는 바로 그가 사용한 검술과 검 모양 때문이었다.

    ‘설마 저자가 네온을…….’

    그의 머릿속에 네온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

    “그자는 양날이 뭉툭한 검은 검을 사용했는데…… 허공에 꽃의 잔상을 만들고는 심지어 폭설 같은 환영을 만들더라고…… 일종의 마법 같았는데. 어쨌든 난 그만 처음 보는 사술에 방심하고는……! 너무 억울해. 이번 임무만 마치면…… 너랑 함께 살 수 있었는데……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지 테세우스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이 지드에게로 향했다.

    ‘저, 저자가 네온을 죽였단 말인가!’

    그는 주먹마저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한편 제5구간 내의 용병들과 주민들은 적진 한가운데 진영을 뚫고 달려오는 구원자들을 향해 기쁨의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와와!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천당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갔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격의 사치를 누릴 만한 자격은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요새 정문을 열고 저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망루 위에 멀뚱히 서 있던 티온이 말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

    “내 뭐라 했나. 분명 기적이 일어날 거라 했지.”

    “세상에! 기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군.”

    “웬만하면 인상 좀 펴고 말하지.”

    “저들의 대장을 보고 싶군. 과연 어떤 인물인지 말일세.”

    “나 역시 궁금해지는군.”

    그날 저녁.

    찌르르. 찌르르.

    아르게논의 집무실 바깥 주변에는 유난히 풀벌레들이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커다란 탁자를 빙 둘러싼 자들은 현재 5구간에 주둔하고 있는 용병대장들이었다.

    아르게논 본인과 친구 티온, 그리고 용병대장 이리가시가 그들이었고, 그 맞은편에는 아까 낮에 용병단을 이끌고 정면으로 제국군의 숙영지를 돌파했던 제5구간의 영웅이 있었다.

    바로 지휘관 지드와 돌격대장 스카페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게논은 무려 2,000여 명이나 되는 엄청난 병력의 용병 대장이 안면이 있는 자임을 알고는 무척 놀라워하고 있었다.

    “오호!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지드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뒤늦게 합류해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앞으로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때 티온이 껴들었다.

    “둘이 아는 사이였던가.”

    “지난번 텃밭을 가꾸고 있을 때 이 청년이…… 아니 이 젊은 대장이 내 물지게를 대신 져 주었지. 당시 난 이 청년이 용병단 창설 허가증을 얻었다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었건만…… 설마하니 엄청난 병력의 용병 대장이었을 줄이야! 난 정말 꿈에도 그럴 줄은 몰랐다네.”

    그러자 티온이 지드의 얼굴을 빤빤히 쳐다보며 살피기 시작했다.

    “흠. 인상은 꽤 순해 보이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서 저 많은 용병들을 이끌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지드는 노인의 질문에 다소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게 말이죠.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 역시 오늘 오전까지도 이렇게 많은 인원을 지휘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에 당장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마치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구릉지에서 구성된 용병집단이 아닌가.

    마침 스카페트가 이들의 대화에 껴들었다.

    “내가 설명 드리지요.”

    참석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사실 그 역시 이들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리가시 용병대장이었다.

    그의 전직이 이리가시 용병단 돌격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만의 용병단을 창설하기 위해 지난번 용병 연합회의 특별 허가 시험에 동참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가, 스카페트는 일단 옛 상관인 이리가시에게 먼저 예의를 표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대머리 중년인이 다소 서운한 듯 말했다.

    “지난번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매정하게 떠나더니만 다른 용병단 돌격대장이 되어 나타난 건가.”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양해해 주십시오.”

    “양해는 뭐, 그냥 그렇다는걸세.”

    스카페트가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앞으로 모셔야 할 분은 바로 여기 지드 대장님이란 사실을 정식으로 알려 드리지요. 이분과는 용병 연합회에 처음 뵈었는데, 용병단 특별 허가 신청 과정을 거치면서 친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때 지드가 친했다는 얘기에 머쓱한 얼굴을 했다.

    마치 그런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구심 가득 찬 표정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스카페트가 시험 과정 내내 자신을 하류검사라고 얼마나 무시했던가.

    헌데 지금은 자신을 포장시켜 무척 띄워 주려고 하다니.

    내심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계속 들려오는 스카페트의 목소리.

    “당시 나는 지드 대장을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이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눈여겨 지켜보았지요. 과연 내가 평생 충성을 할 수 있는 분인지 아닌지 말이오.”

    그 대목에선 지드가 다소 어이없어 뒤로 자빠지려 했다.

    ‘후후.’

    “그런데 말이죠. 정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지 뭡니까.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관문에서 지드 대장이 몰래 침투해 들어온 흑검사를 발견하고는 그와 대결을 펼쳤고 고강한 전투력으로 제압을 하더군요.”

    그 대목에서는 아르게논을 비롯한 참석자들 전원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흑검사를 제압했다고!”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고말고요.”

    “세상에!”

    “지드 대장이야말로 요즘 시대 떠오르는 영웅상이라 할까요? 한번 막사 밖을 보십시오. 이분의 예사롭지 수하들과 무려 이천여 명에 달하는 추종자들이 목숨을 걸고 충성을 서약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이분은 여기 앞에 계시는 아르게논 님의 그 옛날 전성기 때 모습을 본다 해도 과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지드는 또다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자가 뭘 잘못 먹었기에 저런 헛소리를 마구 떠들어 댄단 말인가.

    아무리 과장이 심하다지만 어디 감히 아르게논 님과 비교를 하는지.

    정말 이대로 두고 놔두었다가는 무슨 개망신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그가 스키페트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이었다.

    헌데 아르게논이 먼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허허. 나 역시 이 청년이 처음 내 물지게를 들어 주었을 때 결코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네. 그리고 아까 낮에 제국군의 한가운데를 진격해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찼는지!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야.”

    그러자 이번엔 티온이 다소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거야 조금 더 두고 봐야 하겠지. 적어도 자네만큼 훌륭한 지휘관이 되려면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는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며 부하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과 유대감이 있어야 한다네. 게다가 그 외에 수많은 검증이 필요할 테고, 훗날 세인들에게 보증을 받아야지만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있지. 그러니 괜히 젊은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띄워 주지 말게나.”

    “허허, 이 친구. 정말이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니까.”

    그때 티온이 진중한 얼굴로 지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보게, 젊은 대장. 내 한 가지만 물어봄세.”

    “네, 말씀하시지요.”

    “자네와 용병단원들이 여기 5구간으로 합류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하네만 모두가 살아서 돌아갈 생각으로 들어온 건 아니겠지?”

    “무슨 말씀인지요?”

    “괜히 숨길 거 없이 솔직히 말하겠네. 자네 역시 큰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니 애초부터 이 싸움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걸세. 하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겠네. 어찌 본다면 우리 행동이 제국의 수도 성문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셈인데…… 설마하니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제국을 전복시킨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패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전투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런 희망이 부하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그러자 티온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의로운 싸움이란 승리보다도 그 과정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게나. 설령 이곳에서 우리 모두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항거를 했다는 그 자체가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간직되리라는 점 말일세.”

    “…….”

    이번에는 지드가 별 반문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비단 그뿐이던가, 아르게논과 이리가시, 그리고 스카페트 역시 숙연한 얼굴로 일관했다.

    제5구간에서 둥지를 틀고 제국군에 대항하는 이들의 공통점.

    그것은 티온의 말대로 그 어떤 실리나 이익 혹은 세상의 이목을 계산하고 영웅인 척 행동하는 그런 류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저 삶에 찌들고 억압에 방황하는 하층민들을 대변하는 생존 싸움이랄까.

    이후 전투 역시 그 어느 때보다는 치열할 테고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컸다.

    잠시 후 막사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지드.

     그의 옆에서 스카페트가 호위검사 역할을 하며 가까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스카페트가 따라붙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지금 지드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에 잠겨 있었다.

    아까 티온의 말이 머릿속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곳에서 살아 나갈 가능성이란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애초 그런 것을 감안하고 용감하게 돌진해 들어왔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무척 씁쓸했다.

    죽음.

    지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과연 죽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과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할 테고 그 자신은 끝없는 어둠속을 방황하는 영혼이 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현실이 실감 났는지 그는 가벼운 한숨을 짓고 말았다.

    ‘후우.’

    삶이 원래 장난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그 계단을 밟아 가면 밟아 갈수록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고나 할까.

    지금 자신의 모습은 거대한 해일(海溢)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등불의 처지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아니 살아야 할 명분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 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 전쟁을 승리로 끌어내는 기적.

    그것을 만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짓는 지드의 그런 모습에 스카페트가 한마디 건넸다.

    “대장님, 뭔 생각을 그렇게 하쇼?”

    “아, 아니오.”

    “그나저나 아까 낮에 펼치셨던 그 기상천외한 검술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소? 보아하니 대장님 수하들 모두가 대장님의 가르침을 받은 듯한데.”

    “…….”

    ***

    같은 시각.

    제국 군 사령부 지휘 본부에는 레온의 보고를 받은 카르세크가 큰 충격을 받은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에는 그러한 감정이 잘 실려 있었다. 떨림, 흥분, 의심, 의문…….

    “그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지난번에 방문했던 제8구간 언덕 위 목조 건물 경호대원들 중 7호란 자의 이름은 이든이고 그의 원래 주거지는 제10구간 24호 건물임을 확인했습니다.”

    거긴 분명 카르세크가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숨겨 두었던 주소지 그대로였다.

    “아…….”

    “그 이든이란 청년이 지난번 저택의 담을 넘는 것을 제가 발견했었는데 이제 보니 별관에 거주하시는 여동생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카르세크는 기쁨의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내를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고 말았다.

    아까 낮에 자신의 병사들 숙영 진영을 뚫고 제5구간으로 들어갔던 7호 이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레온 역시 그런 그의 심중을 읽었던가.

    “낮에 나타났던 용병집단의 대장은 지드라는 자로서 아드님은 그 밑에서 일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명칭이 7호로 보아서는 지드라는 자의 직속 수하가 아닌가 싶습니다.”

    카르세크가 결국 탄식의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왜 하필 거기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는 그 자신이 금번 반란군 제압의 임무를 맡고 조만간 제5구간을 철저히 초토화시킬 예정이었는데, 20년 만에 찾은 아들이 적들의 지휘관들 중 한 명의 수하가 되어 그곳으로 합류했으니.

    이 어찌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는 뒷짐을 진 채 한참을 고민했고 여전히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

    바로 그때 막사 밖에서 들리는 경비대장의 음성이 있었다.

    “황자 폐하께서 납셨습니다!”

    순간 카르세크와 레온이 깜짝 놀라 입구 쪽 바라보았다.

    “갑자기 황자님이라니.”

    마침 휘장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황자 게라쿠스, 카르세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통보도 없이 어인 일로 이런 늦은 시각에…….”

    그는 카르세크를 보자마자 대뜸 한마디 했다.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황없이 이리 급하게 달려왔소, 당숙.”

    “급한 일이라니요.”

    “앞으로 내일까지 5구간을 섬멸하지 못한다면 원로원에서 강력한 항의가 있을 것 같소이다.”

    “아니…… 그들이 왜?”

    “그야 그동안 하류 구역으로부터 나온 좋은 돈줄이 사라지려 하니 날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그렇지, 전쟁이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어떻게 단 시일 내에 끝낼 수 있답니까! 그들이 제아무리 긴급 원로원 상정 의결 기관을 발동시킨다 할지라도, 한창 전투 중인 이곳의 상황을 간섭할 수도 없는데다가 저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정말이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아닙니까.”

    “나 역시 당숙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소. 하지만 이 시점에서 정작 두려운 것은 원로원이 아니오.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다음 카드로 내미는 존재들이오.”

    “다음 카드로 내미는 존재들이라니요.”

    “바로 정식 허가 등록 용병 집단들이지요. 현재까지는 이리가시 용병단만이 5구간에 합류했지만 만일 나머지 수백 단체가 들고 일어난다면 이건 그야말로 제국 사상 초유의 엄청난 반란군과 맞서야 할 상황에 이를 거요. 그들 모두의 병력을 살펴보자면 어림잡아 수만 명에 이를 테니.”

    “혹시 원로원 의원들이 집단으로 실성한 거 아닙니까. 그들이 반란에 동참한다면 제국의 기반이 무너질 테고 결국 자신들도 피해를 입을 텐데요.”

    “그들 역시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각 용병대장들과 은밀히 만나 계획을 추진하는 듯하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막가자는 거로군요. 이런 개념조차 없는 일이 어디 있답니까!”

    “아직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 그들이 준 기간 내에 5구간을 섬멸하면 그것으로 일은 마무리될 것이오.”

    “그 기간이라는 것이…… 그 말조차 되지도 않는 기간이 내일까지라고 하셨지요?”

    “정확히는 내일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말이오.”

    “…….”

    카르세크가 잠시 침묵을 지키자 황자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아도 내 재량으로 구성된 특별 병력이 내일 새벽에 이곳에 도착할 테니 내일 총공격을 한다면 확실히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 것이오.”

    황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보겠소. 난 단지 이 얘기를 당숙께 직접 전해 주러 왔던 거요. 내일 한 번의 전투가 우리 황실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될 것이기에.”

    곧이어 막사 밖으로 나가는 황자를 배웅하기 위해 카르세크와 레온이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수도로 사라져 가는 황실 마차를 보며, 카르세크는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후우…….”

    그러자 레온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드님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왔던 아들이 반드시 초토화시켜야만 할 적진에 있으니 말일세. 허허, 하늘이 원망스럽군.”

    레온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저와 제 수하들이, 아드님을 반드시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카르세크가 근심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가능할까? 전투가 치열할 테고 아들 역시 그들 과 한편이 되어 공격해 들어올 텐데…….”

    “어차피 전력은 내일 지원군의 가세로 저희에게 한참 기울어져 있잖습니까. 전투가 시작되면 저와 제 수하들은 적들과 접전을 벌이는 척하며 아드님의 행방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발견하는 즉시 생포해서라도 긴급히 후방 쪽으로 데려오는 방법을 취할 것입니다.”

    “오호. 정녕…… 정녕 자네가 그리 해 주겠나? 그렇게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네!”

    “수장님의 아드님이라면 그분 역시 제가 충성을 작은 주군이신데 당연지사 그렇게 해야겠죠.”

    키르세크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주었다.

    “정말 고맙네.”

    ***

    그 이튿날.

    어느덧 태양이 서산으로 기웃거리는 주황빛 노을 세상이었다.

    인간들의 격한 충돌에도 불구하고 고개 위쪽에 펼쳐진 하늘은 언제나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와와!

    삭! 슥!

    “컥!”

    챙! 챙!

    그야말로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전투 양상은 가히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드 용병단이 가세한 것이 제5구간의 기세를 꽤 많이 드높였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제국 군단의 체계적인 보병 공격에 이은 공성 전략이 막바지에 이르러 빛을 발할 때였던가.

    저들의 주력 부대가 이르게논과 티온이 버티고 있는 중앙 구역에만 집중적으로 밀려 들어오니, 다른 곳에 비해서 엄청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아르게논과 늙은 용병들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힘을 쏟아 부어 공력검술로 대응하고 있었다.

    까마귀 떼들이 하늘을 선회하며 깍깍 울어 댈 때였다.

    5구간의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대장이 화살에!”

    수하들이 깜짝 놀라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살펴보니 아르게논의 가슴과 목 부근에 각각 한 발씩 맞은 것이 아니던가.

    “대장님!”

    티온이 말했다.

    “당장 안으로 옮기자. 그리고 대장님의 부상을 절대 말하지 마라.”

    아직 한창 전투 중이었기에 티온의 말이 옳은 듯했다.

    곧이어 몇 명의 용병들이 그를 망루 임시 참호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티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부하들을 진두지휘하며 다시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한편 중앙을 둘러친 말뚝 벽을 따라가면 움푹 팬 지형의 5구간 방어 기지가 보인다.

    방향이 서쪽이기에 유난히 붉은 노을이 강하게 덮고 있었던가.

    치열한 접전으로 피가 튀고 땅바닥으로 흘러내릴지라도 빨간 석양 세상과 그 아래 대지의 핏빛 색상이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곳은 지드와 대원들, 그리고 새로 가입한 수많은 하류검사들이 생사를 오가며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홱! 홱!

    “악!”

    “저들의 사다리를 허용치 마라!”

    홱! 홱! 홱! 홱!

    “컥!”

    벽 근처라도 가까이 근접해 오려는 제국의 방패 부대 병사들과 공병단들!

    그들에게 절대 한 치의 공간도 허락지 않으려는 하류검사들 간에 활과 투창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지드 용병단의 새로운 돌격대장 스카페트는 과연 역전의 용사였다.

    그 많은 용병들을 지휘하면서도 적절한 대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지드는 그가 나타나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것이다.

    지드는 자신의 옆에서 호위 역할을 하며 열심히 전투에 임하는 1호와 2호를 보며 외쳤다.

    “나머지 대원들의 소식은 어찌되었지?”

    그러자 2호 게리가 말했다.

    “거긴 숲 안쪽으로 가려져 있기에 아직 상황이 어떤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지드는 불안한 안색으로 왼편 숲에 가려진 전초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무 일 없겠지.’

    서쪽 방어 지역 중에 유일하게 툭 튀어 나온 숲지대 공간이었다.

    그곳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전초기지 건물을 세우고 전투력이 강한 대원들 3호 크리스를 비롯한 사대천황과 7호 이든 그리고 8호 아레스로 하여금 약 100여 명의 하류검사들과 함께 사수케 하였던 것이다.

    빽빽한 관목과 바위들, 가파른 언덕 위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으니 적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곳은 매우 성가신 진영에다가 반드시 넘어야만 할 고지인지라 치열한 접전이 각고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팟팟팟팟!

    “아아악!”

    휘잉!

    삭! 슥! 삭! 슥!

    “욱!”

    예사롭지 않은 강력한 검술의 소유자들이 턱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적들은 전초기지 담벼락에 올라서기도 전에 비명횡사를 하고 언덕 아래로 픽픽 쓰러져야만 했다.

    “보시오! 형님보다 내 기술에 쓰러진 적들이 더 많이 있잖소.”

    “허튼소리! 오른쪽 언덕 아래를 봐라. 저 아래 적병의 시체들이 바로 내 검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지.”

    “그거야 사대천황 형님들이 옆에 계시니 어부지리로 얻은 결과 아니오!”

    “정말 환장하겠군. 그 형님들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냐?”

    아니나 다를까.

    싸움 도중에서 말다툼을 하는 7호와 8호, 그 옆에 사대천황들이 보다 못해 한마디씩 한다.

    “네놈들이 제정신이냐? 지금 상황 어떤데 싸움질이냐!”

    “그렇게 힘이 남아돈다면 적들 베는 데 전력을 다해라.”

    “대체 쟤네는 왜 그러는 건지…… 쯧!”

    어쨌거나 전초기지의 상황은 그럭저럭 괜찮은 듯싶었다. 그 덕분에 서쪽 구역 전체가 다른 구역에 비해서 비교적 전투 양상이 치열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동쪽과 남쪽의 상황에도 제법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으니,

    양쪽 간에 팽팽한 세를 유지할 수 있음이 그곳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하기에 이르렀던가.

    서쪽 전초기지 높은 담벼락을 단번에 넘어온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개미떼들처럼 쳐들어 온 병사들과는 천양지차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 기세에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자들이었다.

    이에 하류검사들 100여 명이 달라붙어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불과 10여 명의 정체불명의 적들에게 단번에 베이고 말았다.

    파파파팟!

    “악!”

    파팟!

    “욱!”

    사대천왕과 7호와 8호가 재빨리 그쪽으로 갔다.

    대체 어떤 자들이 담을 넘어와서는 용병들 모두를 제압하고 진영의 한가운데 서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타다닥!

    “빨리 가자!”

    곧이어 난데없이 침입한 한 무리들의 군장 차림의 사내들과 마주친 대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제자리서 경직이 되고 만다.

    “헉!”

    “뭐, 뭐야!”

    그들로부터 팍팍 쏟아지는 엄청난 기세들이 어찌나 강력한지, 어깨가 움츠려 들고 오금이 떨릴 정도였다.

    맨 선두에 보이는 자가 대장인 듯한데 은빛 머리칼을 가지런히 뒤로 넘긴 하늘빛 군장을 착용했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와 손목까지 길게 걸쳐져 있는 희한한 형태의 반월 병기가 시퍼런 날을 번뜩이며 무시무시한 광을 뿜어내었다.

    웅!

    그 뒤로 부하들로 보이는 자들 역시 각자 이상한 모양의 병기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는 당당히 서 있었으니 하나같이 특이한 군장 차림에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흘리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원들 중 제일 위인 3호 크리스가 다소 긴장어린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뭐 하는 놈들인가!”

    은빛 머리칼 사내는 그에게는 안중이 없었다.

    그리고 유독 7호만을 유심히 살펴볼 뿐이었다.

    ‘저, 저자는…….’

    7호 역시 그를 알아보았던가.

    지난번 어머니와 동생이 이사한 수도 안의 저택을 찾아갔다가 담을 넘어 나오던 중에 우연히 마주친 경호대장이라는 사내가 분명해 보였다.

    ‘저자가 왜 이곳에…….’

    7호 이든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지닌 반월형 병기가 왜 그리도 무시무시하게 보이는지 말이다.

    바로 공교롭게도 막내 아레스가 은빛 사내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저자 말입니다. 지난번 우리 건물을 찾아온 자들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요.”

    황자 게라쿠스가 아카시안을 만나러 왔을 때 그와 카르세크의 호위 검사의 자격으로 따라왔던 레온, 그들이 비록 2층 테라스 위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레스는 그들 중 레온을 목격했는지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다른 대원들 역시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씩 했다.

    “정말 어디서 본 얼굴인데?”

    “나도…….”

    “막내 말대로 우리 저택을 방문했던 그 세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그때 은빛 머리칼 사내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듯 드디어 7호 이든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중한 말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작은 주군.”

    “…….”

    순간 이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군이라니!

    대원들 역시 무슨 소리인가 하고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는 특수 검사부 제일의 수장님 호위 검사인 레온이라 합니다. 우린 일전에 수장님 저택 앞에서 만난 적이 있었죠. 그때 진작 알아뵙고 모셨어야만 했는데 뒤늦게나마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소개는 짧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저와 함께 가시죠.”

    “가, 가다니! 어디를 말인가.”

    “어디긴 어딥니까. 작은 주군을 애타게 찾고 계시는 아버님에게로 말이죠.”

    “난! 아버지가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

    “그렇다면 지난번 저택을 왜 찾아오셨는지요.”

    “그, 그건…….”

    이든이 무척 당황해하자 아레스가 물었다.

    “형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마 저자와 아는 사이라도 됩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단지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게 뭔 소리요? 전에 그런 말씀 하지 않았잖소.”

    다른 대원들 역시 다소 이상한 눈초리로 7호를 노려보았다.

    “너, 어떻게 된 거냐.”

    “설마…… 저자와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당장 설명해 봐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말이다.”

    이든은 대원들이 자신을 추궁하듯 하자 더욱 당혹스러워 했다.

    “설명이라니요! 다들 왜 이러십니까.”

    그때 레온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만 다소 의도적으로 이든에게 더욱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이제 저런 하류 잡배들 같은 버러지들과의 관계를 청산하시고 아버님을 도와서 제국의 위대한 황족의 일원으로 돌아오시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저는 수장님의 호위 검사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작은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급기야 7호가 화를 버럭 내며 큰소리로 항변했다.

    “빌어먹을!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진짜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보군!”

    그러자 레온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하기야 작은 주군의 그런 태도, 이해할 만합니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동료들과 오해를 사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자 아레스와 대원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져만 갔다.

    아무래도 7호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만큼은 저 둘의 대화로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든 역시 그런 그들의 눈길이 거북했는지 급기야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다짜고짜 레온에게 달려들었다.

    홱!

    “너, 이 자식! 나와 대원들을 이간질시키려는 수작인 거 다 안다.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

    타다닥!

    삭! 푹!

    털썩!

    다소 둔탁한 음과 함께 이든이 레온의 바로 앞 흙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 어떤 가격이나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레온이 실신한 이든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더니만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여기 작은 주군을 잘 모셔라.”

    부하들이 재빨리 다가와 이든을 건네받는다. 한편 대원들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저마다 멍한 반응들이었다.

    이든의 숨겨진 과거가 뭐든 간에 현재 그는 기절한 채 적들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것과 더불어 대체 저자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하기에 무공을 익힌 이든이 검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당해야만 했는지 머릿속이 꽤 복잡했을 것이다.

    결국 사대천왕을 비롯하여 아레스가 동시에 검을 빼 들고는 레온과 그의 수하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다 같이 공격하자!”

    “좋소!”

    타다닥!

    “이얏!”

    순간 진동음이 들려왔고 뭔가 번쩍 하더니만 사대천왕들과 아레스 사이로 홱 지나갔다.

    파팟!

    “컥!”

    “악!”

    털썩! 털썩!

    파공음에 이은 비명이 들리더니만 대원들이 여기저기 흙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경악할 일이지만 사대천왕들 세 명이 각각 팔과 다리들이 절단이 된 채 피를 토하고 즉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들 중 3호 크리스는 오른쪽 어깨를 베여 피를 흘린 채 서 있었고 아레스는 허벅지를 깊게 베인 듯 누워서 신음을 내고 있었다.

    “형, 형님들…… 컥! 컥!”

    크리스는 이미 숨이 끊어진 4호와 5호 그리고 6호의 끔찍한 시신들을 바라보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분명 꿈일 거야. 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악!”

    레온은 주변 상황을 쭉 둘러보더니만 한마디 했다.

    “이곳 때문에 우리 아군이 고전을 한 듯한데 이젠 그것도 해결이 되었군. 후후.”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부상당한 크리스와 아레스를 바라보았고 반월 병기를 다시 들어 보이니 아예 끝장을 내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슥!

    “작은 주군의 수치스런 과거라면 그 흔적들을 완전히 지워 버려야 하겠지.”

    순간 반월 병기가 그의 손을 떠나고 말았고 첫째 공격 목표가 바닥에 누워 있는 아레스였다.

    웅― 파팟!

    팅!

    “앗!”

    무시무시한 병기가 아레스의 목을 절단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검 하나가 나타나 그것을 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에 레온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허공으로부터 누군가 그의 앞에 착지를 하는 것이었다.

    순간 레온은 그를 알아보고는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이게 누구신가. 지난번 저택 앞에서 복면을 쓰고 나타나 내 병기를 막아 내더니만, 이번에도 훼방이신가!”

    지드는 눈앞에 보이는 대원들의 끔찍한 시신들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엄청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이 찢어 죽일 새끼!”

    3호에서 막내까지 전초 기지에 보내 놓고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냅다 이곳에 왔건만 이런 참극이 벌어져 있을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대원들 중 세 명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3호와 8호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듯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충격과 흥분에 미칠 지경이었다.

    “아아아…….”

    지드는 현철중검을 앞세워 초반부터 강공인 독고구검 2초 파검식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타다닥!

    파파파팟!

    그제까지 제법 여유를 부렸던 레온조차 상대의 초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는 반월 병기를 날려 보내 정면으로 맞서게 했다.

    웅!

    회전력에 이은 강력한 진동음, 엄청난 기세로 현철중검과 충돌했다.

    팅!

    마치 불꽃놀이처럼 섬광이 사방으로 튀었고 굉음 또한 귀를 찢어 놓을 듯 크게 들려왔다.

    헌데 반월 병기는 주인인 레온에게 돌아갔다지만 놀랍게도 현철중검은 방향을 바꾸어 지드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마치 누군가의 의해 조종되는 듯 말이다.

    휘리리릭!

    지드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는 도약하려는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검은 어느새 목까지 다가와 있었다!

    심지어 지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검 끝이 살갗에 닿으니 지드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보니 바로 뒤 나무에 등을 기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이 궤적을 그리며 이리저리 부딪치고 있었다.

    방금 전 시전했던 독고구검 2초 파검식은 여타 검법만을 파훼하는 검술이기에 레온의 반월 병기에 효과가 없었다 치더라도, 어떻게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현철중검이 오히려 상대의 힘으로 조종되어 자신을 공격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2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항거도 못한 채 이런 수모와 치욕을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라니.

    마치 꿈처럼 몽롱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검 끝의 무게가 더해지며 지드의 목에 피가 나기 시작했다.

    꾹!

    “우욱.”

    레온은 공력변환기술로 아예 검으로 지드의 목을 관통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 병기를 두 번씩 막아 낸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그렇게 본다면 네놈의 그 희한한 검술도 쓸 만해 보이는 것 같은데…… 이거 아쉽군, 만일 다른 지역에 활개를 펼쳤다면 제법 행세를 했겠지만 하필 나를 만난 것을 재수 없게 여겨라. 그럼 이만. 내 적어도 고통 없이 끝내 주는 배려는 있지.”

    검 끝이 살아 있는 듯 본격적으로 힘을 받으려는 찰나였다.

    누군가 나무 뒤쪽에서 나타나더니만, 지드의 목을 누르고 있는 현철중검의 손잡이를 확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순간 레온이 깜짝 놀라 그를 살펴보았다.

    “뭐, 뭐야! 넌……!”

    갑자기 나타난 자는 뒤로 고개를 돌려 레온에게 짧게 한마디 했다.

    “이자는 나와 볼일 있으니 내게 넘겨주게.”

    “너는…… 대공의 호위 검사!”

    놀랍게도 그는 테세우스였다.

    비록 레온의 공력이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지만 테세우스 역시 대악령의 포스를 지닌 다크퍼스인지라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심지어 레온의 공력이 잔뜩 실린 현철중검을 손으로 완전히 잡아당겨 근처 바위에 던져 버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홱! 쾅!

    레온과 테세우스의 양쪽 포스를 고스란히 담긴 검이 바위와 충돌하자, 큰 폭발음을 내며 바윗돌이 산산조각이 났고 검은 바닥에 푹 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레온은 처음으로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난데없이 웬 방해를 하는 건가!”

    테세우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분명 말했을 텐데, 이자와 볼일이 있다고.”

    “…….”

    레온은 테세우스의 기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천양지차 다를 정도로 엄청 강력한 포스를 느꼈는지 그답지 않게 주춤거리기까지 했다.

    그때 들려오는 나팔 소리.

    뿌우우! 뿌우우!

    아군 진영으로부터 전군은 당장 퇴각하라는 신호음이었다.

    이에 의아해하는 레온과 그의 수하들.

    “갑자기 후퇴 신호라니……?”

    “뭔가 잘못된 신호 같은데?”

    누가 봐도 전투 양상은 제국군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음이 분명할진데 퇴각 신호가 들려오니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군대란 명령에 움직이는 집단이다.

    그런 만큼 그곳에 잘 길들여진 레온은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차피 작은 주군을 찾아서 안전하게 모셨으니까 사실상 내 임무는 이미 끝이 난 셈이지.’

    레온은 거기까지 생각하자 부하들에게 말했다.

    “모두 여기서 빠져나가자!”

    “알겠습니다!”

    7호 이든을 들쳐 멘 부하부터 담을 넘어갔고 그 뒤로 다른 자들이 따랐다.

    그리고 레온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방해한 테세우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한 번 내 일을 참견하면…… 그때에는 각오해라.”

    테세우스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마음대로 해 보시지.”

    “그 말, 기억해 두지.”

    레온은 말이 끝나자마자 담을 넘어 아군 진영으로 사라졌다.

    타다닥!

    테세우스는 그제야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망연자실 멍하니 서 있는 지드에게 다가갔다.

    부하들의 죽음과 심각한 부상,

    그리고 방금 전 레온에게 농락당할 정도로 너무 무기력한 패배에 대한 충격으로 지드는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테세우스는 그런 그의 멱살을 다짜고짜 낚아채고는 나무 뒤로 밀어붙였다.

    쿵!

    “욱!”

    “네가 네온을 죽였지!”

    “…….”

    눈의 초점마저 풀린 채 아무런 항거도 못하는 지드, 이에 테세우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땅바닥에 홱 내팽개쳐 버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 고작 이런 실력 가지고 어떻게 네온을 그렇게 만든 거냐! 흑!”

    그는 억울한 듯 눈물마저 뿌리고 말았다.

    자신의 약혼녀를 죽인 철천지원수의 모습이 너무도 약해 보였던가.

    바로 그때였다.

    전초기지의 담벼락을 넘어 오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대공의 오른팔인 특수 검사 카이였다.

    “이봐! 어딜 갔나 했더니만 여기 있었군. 대공께서 당장 자네를 찾아오라 하셨네.”

    하지만 테세우스는 그의 말이 들리는지 마는지 바닥에 개처럼 엎어져 쓰러져 있는 지드를 허탈하다는 듯 바라보며 뭐라 한탄했다.

    “아아아…… 신이시여! 이런 형편없는 자가 정녕 네온을 죽였습니까! 아아, 너무 억울합니다! 흑.”

    심지어 눈물을 뿌리는 테세우스.

    영문을 모르고 옆에서 지켜보던 카이가 결국 그에게 다가가서는 팔을 잡아당긴다.

    “이보게나. 퇴각 나팔이 아까 전에 울린 것을 못 들었나 본데, 이럴 시간이 없다고. 지금 당장 5구간과의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 정식 등록 용병 단체 소속의 수만 명 용병들이 제국의 수도를 공격할 것이야.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기에 원로원 회의에서 부랴부랴 긴급 결정과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네. 자, 그러니 당장 본진으로 돌아가세나!”

    테세우스는 마지못해 카이의 팔에 끌려 그의 뒤를 뒤따라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테세우스의 머릿속은 지드에 대해 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네온을 죽인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다.

    검만 내리치면 된다.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어째서……,

    검을 들어 그를 내려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인가.

    이미 레온과의 결투에서 힘이 빠져 버린 껍데기와 승부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

    아니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별 볼일 없는 존재여서 피를 묻히기 싫었던가.

    어차피 죽일 녀석이건만,

    선뜻, 그리고 결국 그의 검은 치켜 올라가지 않았다.

    레온은 카이에 의해서 절로 진영을 빠져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을 들추어 보자면 또 다른 뜻이 있었으리라.

    ‘나중에 두고 보자. 네놈이 제정신일 때 말이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리는 없겠지만 네놈 역시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자와 연애를 할 테고 결혼을 하겠지. 나는 그때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네온이 당한 것처럼 똑같이 네 여자를 희생시켜 그놈의 고통을 즐길 것이다. 그것만이 네온을 위한 진정한 복수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넌 복수할 가치도 없는 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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