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6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 (17/81)

Chapter. 16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

이튿날.

드디어 최종 관문 시험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제의 불상사로 두 명이 빠진 후보자들은 이제 여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어제의 사건을 의식해서인지 야외 점심 식사 후 분수대에 모여서 함께 휴식을 취했다. 저마다 드넓은 정원으로 뿔뿔이 흩어져서는 각자 쉴 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지드 역시 정원 가장자리에 조그만 숲속으로 향했고 언덕을 지나 인공 호숫가가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정말 시간 때우기 힘드네! 애초 용병단 창설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는 건데.’

그는 뭐라 중얼거리더니만 결국 그늘 진 잔디밭에 벌렁 누워 잠을 청하려는 듯했다.

짹짹.

청명한 가을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꾸역꾸역 피워 오르고 있었다. 계절적으로 선선하고 상큼한 날이랄까?

이렇게 좋은 날에는 어디 야산에 놀러가서 날짐승을 사냥해 꼬치구이 한 입에 맥주 한잔 들이키는 것이 사는 맛이다.

지드는 비록 하류 구역에서 고단한 삶을 지탱해 왔었지만 경호대장이 된 이 순간에도 그때의 동료들과의 행복했던 시절들을 떠올리곤 했다.

‘후후!’

실없는 녀석처럼 실실 웃는 지드.

오늘날 대자객을 제압할 만큼 상당한 전투 기술을 지녔건만, 그의 얼굴에는 해맑고 순수한 감성이 여전히 드리워져 있었으니.

아직은 하류 생활의 겸어한 기억과 습관이 진하게 베어 있는 듯 보였다. 어찌 본다면 그런 그의 모습이 더욱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리라.

“내 나이 이제 삼십 줄로 접어들었는데, 이거 님 한번 만나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늙어 죽게 생겼구나.”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이라도 하듯 눈 감은 채 허공에다 대고 하소연을 했다. 남들 다하는 연애 한번 못해 본 한이 컸던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지드는 자기 탓이려니 하고 그저 삶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내 주제에 무슨!’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악기 연주음과 예쁜 노랫소리.

황금빛 물결이 있는 곳,

따뜻한 남쪽 레알카스 지방.

폭풍의 언덕이여! 그대의 바람이 필요하리라.

시원한 한줄기로 나를 인도하소서.

양치는 목동들이여! 뿔 고동 소리가 들리는 곳,

아!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드디어 귀향을 합니다.

누이들, 그리운 친구들이여.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숨결과

부드러운 손길.

능숙한 하프 솜씨에 마치 천상의 여신이 강림하여 서정시를 읊는 듯한 음성은 지드의 마음을 단숨에 녹여 버리고도 남았다.

물론 그냥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벌떡 얼어나 노랫말의 진원지를 찾아보니 인공 호수 맞은편에 한 여인이 보이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 지드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로서 지금까지 지드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고나 할까. 갑자기 긴장한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호흡마저 가팠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저벅저벅.

지드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함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원래 잔머리는 많지만 여자 앞에 서면 숙기가 없어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그의 성격으로 보자면 지금의 그의 행동은 의외라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무공을 익힌 후에 생겨난 그 어떤 자신감이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여인은 지드가 다가오자 밝은 미소로 맞아 주었다.

“혹시 제 노래가 폐를 끼쳐 드렸는지요.”

지드는 애써 당황함을 누르고 목소리를 깔며 점잖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저 노랫말에 이끌려서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소.”

정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느끼한 목소리였다. 그토록 말 한번 걸어 보려고 그 얼마나 기회를 봐 왔던가.

첫마디라도 진짜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내뱉기로 스스로 수백 번은 다짐했으리라.

하지만 억지로 꾸민 말투가 절대 나을 수가 없다는 것이 진리임을 알기나 할까.

원래 음성에 미성이 약간 섞여 있는 그로서는 나잇값 한답시고 있는 대로 낮추어 말했으나 왠지 초반부터 어색한 느낌이었다.

여인은 그런 지드의 모습에서 오히려 친숙한 면을 느꼈는지 더욱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역시 방금 전 부른 노랫말이 무척 괜찮다고 느꼈거든요. 얼마 전 중부 대륙을 여행하면서 배운 곡인데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꽤 많이 알려진 곡이더군요. 제13군단의 행군가라던가요?”

“아, 그렇습니까.”

확실히 제목을 듣고 나니 그 역시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지드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녀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아름답고 또 다소 지적인 요소까지 갖춘 그녀의 외모는 일견 쉽사리 접근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외로 부드럽고 밝은 기질이 있었다.

지드가 뭔가를 떠올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혹시 그대 이름이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였던가요?”

여인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이름을 정확히 외우고 계셨네요?”

“아…… 뭐, 네.”

에르가니아는 감격했는지 두 손마저 모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딱 한번 말했을 뿐인데 앞에 있는 사내가 정확히 준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기쁘군요.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숙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예의가 아니겠죠. 하하!”

지드는 그 자신이 말해 놓고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언제 여자 앞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치기를 했단 말인가. 게다가 호탕한 웃음하며.

이번엔 에르가니아가 말했다.

“이름이 지드시죠?”

“와우! 정확합니다.”

“이름이 짧아서 금방 기억이 났어요!”

“아하! 거참 다행이군요. 아마 이때를 대비해서 부모님께서 제 이름을 짧게 지어 주셨나 봅니다.”

“…….”

쏴―

한줄기 바람이 수면을 흔들어 놓으니 햇빛에 비친 잔물결들이 반짝였다.

지드는 문득 돌멩이 하나를 주워 물에 던졌다.

홱!

퐁당―

잔잔했던 수면 위에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곧이어 에르가니아가 물었다.

“용병 거주지라는 곳은 어떤 데죠?”

갑작스런 질문에 지드가 얼떨결에 답했다.

“용병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수도 성벽 밖에 있나요?”

“네.”

“여기 팔라카스 제국은 용병들의 천국이라 들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고 하더군요.”

“그 말은 사실입니다. 크고 작은 용병단들만 이백여 개가 넘거든요.”

“와우.”

“나 역시 용병단 때문에 현재 심사 과정을 거치고 있고요. 그대는 무슨 이유로 여기 온 거죠?”

“오랜 여행 생활을 하다 보니 돈도 거의 떨어지고, 너무 지쳐서 당분간 금전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편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까 용병 연합회란 곳이 있더군요. 마침 용병단 특별 허가 신청을 받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주저 없이 당장 신청했지요. 그곳에 가면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용병단 창설과는 상관없이 이곳에 들어왔다면 심적 부담이 없어서 좋겠군요.”

“그거야 그렇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은 아닌 것 같아요. 후보자들은 경쟁 때문에 서로 말도 하지 않으려 하지, 심사관들은 인상을 팍팍 쓰며 어떡해서든 심사 과정을 어렵게 만들어서 떨어트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를 않나.”

“그게 일인걸요, 뭐.”

“아무튼 이곳에 들어온 지 한 달여 만에 당신과 처음으로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이제야 정말 숨통이 트이는군요.”

“나야말로 믿겨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과 대화를 나눈다는 자체가. 후, 이게 꿈이 아니기를 빌어야겠죠?”

“제가 아름답다고요? 후후. 그런 말은 좀 듣긴 들었지요. 아무튼 그렇게 봐주시니까 고맙네요.”

참으로 예쁘고 매력적인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미모에 끌려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밝고 명랑한 성격 덕분에 마치 옛 친구처럼 자연스럽고 편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물었다.

“지드 님은 심사에 통과하면 물론 용병단을 만들겠죠?”

“물론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거든요.”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요?”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지드, 그는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 갔다.

“얼마 후면 용병 거주지 내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폐쇄되고 거주민들이 추방당할 처지에 놓이게 될 텐데, 정식으로 허가받은 용병 단체들만이 그 대상에서 제외될 겁니다.”

지난번 대공과 총관의 대화에서 얻은 중요한 정보였다. 그녀의 미모에 끌렸기 때문일까, 평소 같았음 꺼내지 않았을 말이지만 너무도 쉽게 흘러나왔다.

“그건 왜죠?”

“글쎄요? 아마도 제국 사람들은 용병 거주지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하긴, 수도 인구에 버금 갈 정도로 북적거리는 것도 꼴 보기 싫을 테고, 해마다 여름이면 전염병도 발생하고, 범죄율 역시 높아만 가니까 제국으로서도 매우 골치 아픈 구역임에 틀림없을 게 맞을 거예요. 하지만 높은 세금을 받아 가면서 단 한 번도 일절 투자를 하지 않았으니 거주자 탓만 할 건 아니죠.”

에르가니아는 매우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법이 시행된다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니겠군요.”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대란이 일어나는 거죠. 지난 수십 년 동안 오로지 용병이 되기 위해서 식솔들을 데리고 와서 정착한 주민들 모두가 쫓겨나는 신세가 되겠죠. 하류 구역의 거주민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갈 데가 없는데!”

“그렇다고 제국에서 아무런 대책 마련도 해 주지 않고 강제 철거를 할 리는 없을 텐데…….”

지드의 언성이 조금은 높아졌다

“대책 마련이라니요? 그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고 국적도 다른 떠돌이 용병들에 대해 관대할 것이라 보십니까? 아마 거주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군대를 풀어서 인정사정없이 몰아치고도 남을 자들입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에르가니아.

“정말 큰일이군요. 그들에겐 생사가 달린 문제일 텐데요.”

“수많은 사상자들이 날 가능성이 큽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쟁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될 테죠.”

에르가니아는 그저 무거운 한숨마저 쉴 뿐이었다. 지드 역시 괜히 이런 주제를 꺼냈나 싶었는지 침묵을 지켰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이번엔 지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대륙으로부터 건너온 것이 사실입니까?”

그러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꽤 먼 곳에서요.”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으로부터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 질문에 에르가니아는 대답 대신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잠시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제가 배웠던 검술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요.”

“시험이라니요?”

에르가니아는 지드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덩달아 멋쩍어했다.

“설명하자면 좀 긴데요? 게다가 이런 얘기 누구한테 하기는 처음이에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는데요.”

“뭐, 그냥 두서없이 말해 볼게요.”

제법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무려 쉬지 않고 1시간을 얘기 했으니 말이다.

골자만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그녀는 암흑 세력으로부터 대륙을 구한 영웅을 시조로 두고 있었는데, 그 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지하석실 어느 은밀한 곳에 비전을 숨겨 놓았었다.

몇 대에 걸쳐 후손들이 그곳에 살았고 수백 년이 지난 어느 날, 7살이었던 에르가니아는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 정말 우연히 그 책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비전 내용은 그저 보고 흉내만 내면 따라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다가 시조의 부연 설명까지 첨가되어 있었고, 15년 세월 동안 그녀는 모든 내용을 별 문제 없이 마스터한 것이다.

비전 끝머리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시조께서 배운 기술을 절대 그녀가 살던 대륙 내에서 쓰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에르가니아는 시조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후 그녀는 자신이 배운 비전에 대해 다시금 궁금증이 발동했다. 자신이 익힌 비전을 전혀 낯선 곳으로 가서 한 번쯤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2년 후, 그녀는 몇 번의 항해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이 대륙에 도착할 수 있었고, 결국 어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마음껏 수련을 함과 동시에 드넓은 세상을 여행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지나가던 검사들과 마주쳐 우연찮게 대결을 벌인 적도 꽤 있었는데, 대략 수십 번을 싸웠지만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다고 했다.

종합해 보면 어느 날 문득 그 자신을 돌이켜 봤더니 엄청난 고수가 되어 있었다는, 마치 동화 같은 얘기였다.

지드가 다시 물었다.

“시조께선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떤 종류의 비전을 남기신 거죠?”

그녀가 대답대신 빙그레 웃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전 자체가 비밀스러운 것을 간직한다는 뜻이니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군요. 이제 가 봐야겠어요.”

“아……! 무, 물어봐서 죄송합니다. 저…… 그렇다면 시조 성함 정도는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제 이름을 참고하시면 돼요.”

저만치 숲을 빠져나가는 에르가니아, 그런 그녀의 뒤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는 지드가 다소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이름이라…… 그보다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사실 지드는 대화를 하고나자 그녀가 바다 건너에서 넘어왔다는 얘기부터도 그다지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순진한 양의 가면을 쓰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종의 연막을 친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드는 아직은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때이니 만큼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평정심을 가지도록 노력했다.

다시 머리가 지끈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자신이 흑검사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하긴, 대공조차 힘겨워 하는 일인데 자신이 뭔 수로 하겠는가.

용병 연합회에 들어온 이후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대공이 혈안이 되어 찾는 흑검사의 실체.

그 자신이 애타게 원하는 용병 창설 허가증.

그 둘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앞으로 남은 기간은 단 하루, 이제 내일이면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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