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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4 흑검사 추려 내기 (15/81)

Chapter. 14 흑검사 추려 내기

대공 자라투스는 기본 심사를 거친 후 44명의 용병 집단 특별 허가 신청자들 중에 정확히 절반에 해당하는 22명을 탈락시켰다.

3일 후에는 본격적인 관문 테스트를 통하여 진정한 옥석을 가릴 예정이었다. 드디어 흑검사를 가려내기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함이었다.

대공의 탁자 앞에는 지난 기간 동안 대원들로부터 제공 받은 정보 서류들이 가득했지만 그의 표정은 다소 실망스러워 보였다.

“불충분한 자료들 가지고 분석에 의존하기보다 앞으론 직감으로 가려내야 하겠군.”

결국 그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부어 버렸다.

와르르!

“이제야 속 시원하군.”

***

며칠 후.

연합회 넓은 연병장 주변에 빽빽이 둘러친 나무들로부터 새소리들이 정겹게 들려왔다. 이제는 한낮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대는 늦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보름여 전 시작된 본격적인 관문 테스트의 열기는 어느덧 그 막을 내리고 있었고 오늘은 22명의 본선 진출자들 중에 그야말로 옥석들이 가려지는 날이었다.

연단 위에는 총관과 서기장 그리고 이번 행사에 실질적인 참여를 했던 대공 자라투스가 모습을 드러냈고, 연단 맞은편 계단식 돌 관중석에는 신청자들의 호위검사들을 비롯하여 관중들 수백여 명이 질서정연하게 착석하고 있었다.

곧이어 총관이 앞으로 나오더니 가슴 안쪽으로부터 조그만 양피지 두루마기를 꺼내 들었다.

“그동안 심사에 임해 주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곧이어 제이 차 통과자들을 부를 테니 그 즉시 연단 오른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 바랍니다.”

22명의 대기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동안 제법 길었던 시험 과정에 있어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야 통과자를 가려 주니, 이만저만 속이 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들려오는 총관의 음성.

“호명 대신에 번호를 부를 것이니 잘 듣기 바랍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신청 번호 1번! 4번! 5번! 7번! 17번! 22번! 39번! 44번!”

드디어 합격자들이 가려지는 순간이었다. 총관의 말이 다소 빨랐던가.

대기자들 중에는 미처 듣지 못한 자들이 여럿 있었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들 중 지드는 자신의 번호 44번을 정확히 들었고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통과했네!’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얼떨결에 신청했던 용병 집단 특별 허가의 자격증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팔라카스 제국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용병 집단 창설 기회는 결코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니다. 가뜩이나 하류검사 출신인 그로서는 남달리 감회가 새롭다고 할 수 있었다.

비단 이 순간 지드만이 흥분하는 것은 아니었다. 관중석에 있던 호위검사들은 각자 자신들의 주군 번호가 불리는 순간 함성을 지르며 한바탕 난리를 치고 있었다.

물론 7호와 8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장님! 드디어 해내셨군요!”

“만세! 우리도 용병 집단을 창설할 수 있다니!”

그때 연단에 총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출자들은 모두 여덟 명임을 알려드립니다. 자 이제 호명한 자들은 미리 말했듯이 오른쪽으로 모여 주기 바랍니다.”

총관은 양피지를 거두고는 이번엔 바로 뒤에 있는 대공 자라투스에게 다가가더니 뭐라 말을 건넸다.

“대공께서 선택하신 여덟 명을 호명했습니다.”

“고맙소.”

“그동안 과정을 보아 온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생각해도 저들 모두는 용병 집단을 창설할 만큼 충분한 실력을 갖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

대공이 대답 대신에 말없이 자리에서 쑥 일어나더니만 여덟 명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오.”

“시작이라니요?”

“지금까지는 잔가지들을 친 것에 불과했을 뿐이고 이제는 저들 중에 가지가 아닌 몸통을 가릴 생각이오.”

“저들이 최종 통과자가 아니란 말인지요.”

“그렇소.”

“그 의미는 또 다른 관문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왜 또…….”

총관으로서는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저들의 실력 정도라면 당연지사 모두 합격 판정을 내릴진대 대공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의도는 용병단 창설자들을 뽑는 것보다 흑검사를 가리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아마도 다른 속뜻이 있을 수가 있었다. 대공이 말했다.

“이보시오, 총관.”

“네, 대공님.”

“내가 그대 연합회 행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견하는 것이 껄끄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흑검사의 출현은 제국적인 차원으로 다루어야 하는 문제이오. 만에 하나라도 입수한 정보대로 흑검사가 본색을 드러내어 집정관의 따님을 암살한다면 그야말로 그대의 용병 연합회는 물론이거니와 나 역시 추궁을 면치 못할 것이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넓은 아량으로 받아 주시오.”

국가에서 파견 나온 자가 그리 말하는데 총관이 별수 있겠는가.

“네, 그리 하겠습니다.”

“그렇게 받아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자, 그럼 이제부터 난 내 할 일을 하겠소. 여덟 명 중 네 명만을 가려내는 척하며 하나하나 세세하게 살펴보아 최종적으로 가장 의심되는 자를 추려 낼 생각이오.”

하지만 총관은 여전히 흑검사 가려내는 작업보다도 당장 통과자 숫자에 더욱 관심이 갔다.

“네 명만이라니요. 그건 너무 작은데요? 보통 한 해에 열 명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그거야 나중에 추가 모집을 공고해서 다시 뽑도록 하시오. 그럼.”

대공은 말이 끝나자마자 합격자들에게 다가갔고 총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한편 저마다 들뜬 마음을 겨우 누르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여덟 명의 합격자들, 그들은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릴 줄은 모르는 상태였는지 저마다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용병단을 창설하다니, 검술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 당신이야말로 정통파 최고의 실력자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저를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보! 드디어 내가 해냈다오.”

지드는 주변 통과자들의 감격스런 얘기를 듣고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역시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승님과 어머님, 냉대했던 가족들 모두와 이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실 현재 지드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존재는 통과자들 중 하나인 아주 미모의 여인이었다.

지난번 주방에서 새벽에 나타나 먹을 걸 알려 주고 사라진 천사라 할까. 그동안 심사를 거쳐 오면서 그녀가 통과되기를 내심 그 얼마나 바랐던가.

그런데 그녀가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지드로서는 보통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당사자는 그다지 기쁜 내색 없이 담담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지드가 모처럼만에 큰 용기를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이려 했다. 사실 이전에도 몇 번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자신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기에 결국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돌아선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엔 반드시!’

모처럼만에 좋은 기회가 아니던가. 이번에 진짜 결심을 굳히는 지드.

하지만 그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찬물을 끼얹듯 대공이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열장을 꺼내어 들어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이들이 신청서에 기재했던 것들로서 신상 명세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대공은 합격 번호 순서대로 한 명씩 호명하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1번이 누군가.”

“접니다.”

“손들고 일어나 보게나.”

한 명이 슬며시 일어났고 대공은 그에 대한 신상 자료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만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메시인가.”

“메시 맞습니다.”

“여기 신상 자료에는 외부 출신이라 적혀 있는데, 정확히 어느 나라 사람인가.”

“아르카도 제국입니다.”

대공이 눈빛을 번뜩였다.

아르카도 제국은 중부 대륙에 위치해 있는 패권 제국들 중 하나가 아니던가.

대공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멀리서도 왔군.”

“비록 출생지는 그곳이지만 유년기 때 이미 캘커트 반도에 내려와 거기서 한동안 살았고, 지금은 어찌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흘러왔소.”

“나이는?”

“마흔한 살.”

“나이가 많군.”

“당신도 만만치 않은데요?”

“…….”

대공이 그 다음 번호를 불렀다.

“4번.”

그러자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자리에 일어나서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대공님.”

대공은 그녀와 안면이 있는 듯 다소 씁쓸한 표정을 했다.

“결국 여기까지 올라왔군.”

“당연하죠. 제 꿈이 용병단을 갖는 것인데요.”

“아버님이 집정관이신데 굳이 용병단을 창설할 필요가 있을까?”

“아버님이 집정관이시지 제가 집정관은 아니거든요. 저는 제 나름대로 독립을 하고 싶고 용병들을 거느리고 싶단 말이에요.”

“그래도 집정관님께서 뭐라 하실지 모르겠군.”

“허락 받고 왔으니까 신경 끄세요.”

“그 말을 믿어야 할지…… 흠.”

대공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그녀에 대한 신상 서류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과거에 전설적인 특수검사였던 집정관의 딸인 만큼 모든 비전을 물려받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10대의 나이에 관문 테스트를 통과해서 여기 다른 경쟁자들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집정관의 옛날 행적으로 기인한 일 때문에 흑검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사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이겠지만, 자라투스는 특수검사부의 수장 임무에 더욱 충실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테스를 흑검사 잡는 미끼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집정관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특수검사부 소속 대원들은 비밀 기관 특성상 큰 제약을 당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대공이 다음 번호를 불렀다.

“5번.”

그러자 맨 왼편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접니다.”

대공은 이번에도 신상 자료와 그 당사자인 5번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고 뭐라 투덜거렸다.

“하나같이 출신지들을 기재하지 않다니! 다들 기본이 안 된 자들이로군.”

그때 대뜸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

“난 무안 왕국 출신이오.”

“무안 왕국이라, 어디 보자.”

“남부 대륙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소왕국이기에 아마 대공께서는 잘 모르실 듯합니다.”

대공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기야 남부 대륙에만 크고 작은 군소 동맹국들이 무려 50개에 육박하니 제국 차원의 나라들이나 몇몇 큰 규모의 왕국들만이 그가 아는 전부였다.

대공은 중년 사내로부터 제법 범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짐에 눈빛을 반짝였다.

“여기 적힌 이름이 바쿠어스라 하는데, 본명인가?”

“본명은 아니오. 하지만 20년째 그 별칭을 쓰고 있으니 본명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오.”

“바쿠어스의 본뜻이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그거야 어렵지 않소. 내가 사는 지방에 하나의 끔찍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소. 그 옛날 적군의 목만 잘라 수집하는 전쟁광의 이름이 바로 바쿠어스인데 어느 날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부르더구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나 역시 내게 도전해 오는 자들을 제압한 뒤 일종의 승리 의식으로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오.”

순간 대공이 인상을 찡그렸고 다른 대기자들 역시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살인한 일들이 자랑스럽다는 듯 기름진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누런 이에 거북한 미소를 짓는 괴물 같은 자.

대공은 그를 지나쳐 다음 순서를 불렀다.

“7번.”

“접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는 긴 흑발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사내였다, 조각과도 같은 얼굴에 검은 눈동자가 이글이글거렸다.

대공이 물었다.

“자네 출신지는 이곳 팔라카스 제국이라 여기 적혀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

“십칠 세까지 살았었죠.”

“나이가 스물일곱이니 십 년 전 이곳을 뜬 셈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지?”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럼 자네 역시 고강한 검술을 배우기 위해 마스터들을 찾아다녔던 모양이군.”

“그렇다고 볼 수 있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했던가. 대공은 그저 사내와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그가 엄청난 능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보다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이름이 테세우스라 적혔는데, 본명인가?”

“본명이오.”

“본인이 원하는 성취는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사내가 당당히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오.”

“자신만만하군. 고국을 떠난 지 십 년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는가?”

“방랑 생활이 싫어졌소.”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면서 용병단을 창설하기로 했나?”

“일단 그렇게 할 생각이오.”

“그렇다면 십 년 전 이곳을 떠난 이유가 뭔가?”

테세우스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

대답이 없자 대공이 다시 물었다.

“방금 전 질문에 대해서 말해 보게나.”

“대답 않겠소.”

사내는 단호하게 말했고 대공이 조금은 당황해하는 표정이었다.

“방금 전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나.”

“별로 떠올리기 싫은 일이오. 말하고 싶지 않소.”

테세우스는 자신의 신분을 밝힐 이유도 없거니와 대공의 질문에 일일이 자세하게 답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그저 형식적인 문답에만 충실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법한 대공은 테세우스의 다소 건방진 태도로부터 객기가 아닌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진실성을 엿보았는지,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에도 비협조적이면 그때에는 봐주지 않겠다.”

한편 그런 그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지드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흘끔 쳐다보았다. 수척하고 고독한 표정으로부터 깊은 고뇌가 들어찬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 본다면 냉담함을 넘어서 냉혹함의 기운마자 감도는 것 같았다.

마치 큰 슬픔을 당한 자에게서 느껴지는 기분이 그로부터 들기도 했다. 대공이 다음 번호를 불렀다.

“17번.”

이번엔 한 여인이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10명 가운데 집정관의 딸인 테스와 함께 유일한 여성 통과자였다.

머리를 가지런히 뒤로 묵은 은발의 소유자, 아무래도 북부 지방 계통 인종이 아닌가 싶었다.

“에르가니아라, 자네 본명인가.”

차분하고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확한 본명은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입니다.”

에르가니아는 상당한 미인에다가 보조개가 들어가는 은근한 미소조차 너무 아름다워 보였으니 중년에 이른 대공조차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출신지는 어디인가.”

“아마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타밀로튼 제국입니다.”

“타밀로튼 제국이라.”

대공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식견으로는 남부 대륙은 물론이거니와 중부 대륙과 북부 대륙의 패권 제국들의 명칭을 모두 알고 있건만 타밀로튼이란 제국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심중을 읽기라도 한 듯 에르가니아가 말문을 열었다.

“바다 건너 대륙에 있습니다.”

“바다 건너라……?”

“네.”

대공은 그녀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통과자들 역시 각기 회한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 대륙 외에 또 다른 대륙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각종 문헌에 기록이 되어 있었으니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듯 대놓고 거기 출신이라 말한 자는 모두에게 처음이었으리라. 교류가 없는 까마득히 머나먼 곳으로부터 왔다는 이방인의 말은 대공마저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거기서 왔는지 아닌지 당장 확인할 길이 없으니 이번 신원 조회도 허사로군. 후…….’

대공이 다음 번호를 불렀다.

“22번.”

“…….”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번호를 호명했다.

“22번!”

“…….”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대공이 인상을 팍 썼다.

“22번, 당장 대답하지 않겠나!”

그제야 누군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을 툭 내뱉었다.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요?”

“뭐라!”

대공은 굳어진 얼굴로 방금 전 목소리가 들려왔던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체 누가 건방지게 함부로 말하는지 말이다.

대공과 눈이 마주친 자는 30대 중반 정도로, 회색 머리칼에 비쩍 마른 몰골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사내였다.

가려진 앞머리로 드러나는 얼굴에는 제법 긴 흉터가 왼쪽 눈두덩에서 오른쪽 입매까지 나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 성질 있어 보인다고 할까.

그저 무표정한 얼굴인데도 살기가 등천하는 것만 같았다. 특수검사부의 수장인 대공 자라투스마저 처음에는 다소 움찔거릴 정도였으니 그의 기세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은 분명해 보였다.

“방금 자네가 말했나.”

사내는 대공의 노여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히 말했다.

“그렇소.”

대공은 성질 같아서는 당장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내심 나름대로 참기로 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흑검사를 가려내는 일이기에 이런 일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만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데 이유가 뭔가.”

“최종 관문을 통과했으면 용병집단 창설 허가증이나 줄 것이지, 무슨 신상 조사 같은 것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냐 말이오. 우리는 지난 보름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바쁜 일정에 혹독한 과정을 거쳐서 겨우 여기까지 버티어 왔소이다.”

대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누가 최종 관문이라 했나.”

“그건 무슨 말이오.”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네 명을 더 가려낼 생각이다.”

“뭐라고요?”

사내뿐만 아니라 다른 통과자들도 매우 놀란 듯 보였고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또 심사가 있다니!”

“여기서 끝이 아니라니…… 젠장,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용병단 하나 창설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제국의 특수검사부에나 지원할 걸 그랬소.”

그 말에 대공이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들은 자신이 제국에서 파견 나온 특수검사부 수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내가 다시 항변하듯 따졌다.

“여기 통과된 열 명의 지원자들 모두는 용병 집단 창설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격이 있을 텐데 왜 또 네 명을 가려낸단 말이오.”

“불만 있는 자들은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도 좋다.”

“…….”

그 말에는 다들 침묵만 지킬 뿐 더 이상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대공이 다시 신상 자료를 다시 들여다보며 칼자국 사내에게 눈길 주었다.

“지금부터 불성실한 대답을 하거나 소란을 일으킨다면 당장 쫓아낼 것이다. 알겠나.”

“…….”

“왜 대답이 없나.”

“……알겠소.”

“진작 그럴 것이지. 스카페트가 본명인가.”

“그렇소.”

“출신지는?”

“모르오.”

“모르다니?”

“용병들이 주워 길렀다니까 세상천지가 내 집이나 마찬가지겠지.”

“그렇다면 현재 용병 집단 소속인가?”

“탈퇴했으니까 현재는 떠돌이 용병에 불과하죠.”

“탈퇴 이유는?”

“별걸 다 물어보는구려. 내가 직접 용병 집단을 만들어 볼까 하고 이곳에 특별 허가 신청을 하느라 탈퇴했소.”

“그렇다면 전직 용병 집단의 명칭과 자네 보직을 말해 보게.”

“이리가시 용병 집단의 돌격대장이 원래 내 신분이오.”

순간 대공이 눈빛을 번쩍였다.

“이리가시 용병 집단이라.”

그 집단은 용병 집단들 중에서 꽤 알려진 곳으로 제법 규모가 컸다.

특히나 지난번 니스 왕국의 내전에 직접 참가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용맹을 떨친 일화도 있었는데 이 스카페트라는 사내가 바로 거기 돌격대장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제법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대공이 다음 번호를 불렀다.

“39번.”

그러자 누군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씩씩하게 말했다.

“이름은 카르발디고요, 나이는 30살입니다.”

“…….”

갑작스런 소개에 대공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허여멀겋고 잘생긴 외모의 사내는 그 목소리마저 시원스러웠다.

“출신지는 어딘가.”

“아마도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꽤 먼 곳에 있거든요.”

“내 분명 어디 있냐고 물어봤네. 그에 따른 대답만 짧게 하게나.”

사내는 멋쩍은 듯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메스타니아 지방이라는 곳을 아시는지요.”

“메스타니아 지방이라면 혹시 얀센 구릉지가 있는 곳이 아닌가.”

“아시는군요? 13군단 때문에 그곳이 꽤나 유명해졌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머나먼 남부 지방에서조차 알아 주다니, 정말 신기하군요.”

그곳은 아르카도 제국의 변방 지역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아독이라는 최연소 흑검사가 제13군단과 메스타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저 유명한 얀센 구릉지 너머 클레메타스 제국으로 진군했던 일화는 너무도 잘 알려진 얘기였다.

대공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샤칸 대장이라 아는가.”

그러자 카르발디가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고말고요. 현재 저희 지역 통합 족장님이거든요.”

샤칸은 메스포타니아 기병대장으로서 아독의 13군단과 함께 위대한 진군의 역사를 이룩한 전설적인 맹장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대공은 자신의 신분만 아니라면 그에 대한 얘기들을 밤을 새우도록 물어보았을 것이다.

현재 대공의 자리에 오르기 전, 그가 젊었을 때는 제13군단이 한창 활약을 했었고 대륙 전체에 그들의 놀라운 신화가 끊이지 않고 퍼져 나갔었다.

사람들은 최연소 흑검사인 아독이란 인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나타냈지만 유독 그만은 그늘에 가려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기병대장 샤칸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때 사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하려 했을까.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곳이라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했지만, 아직도 샤칸이란 이름을 들으면 심장이 쿵쿵 뛰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이라도 내 안부나 전해 주게나. 남부 대륙에 자네 족장을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일세.”

“저를 뽑아만 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죠. 헤헤.”

대공은 신상 자료를 한 번 더 확인하더니만 마침내 최종 남은 한 사람의 번호를 불렀다.

“이제 마지막이군. 44번.”

“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일어서는 지드, 그는 졸린 듯 눈마저 풀려 있었다.

낡고 허름한 가죽 차림새는 전형적인 하류검사 복장으로서 처음부터 대공의 표정이 다소 실망스러워 보였다. 그가 신상 자료를 뒤적거리더니만 다시 지드의 얼굴을 노려보듯 했다.

“자네는 신상에 대한 기록을 아예 하지 않았군.”

“마땅히 할 게 없어서요.”

“할 게 없다니?”

“이렇다 할 경력 같은 것이 전혀 없거든요.”

“……뭐라?”

“제 출신지는 용병 거주지 하류 구역입니다. 거기서 거의 자라다시피 했지요.”

대공의 인상이 찌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

“글쎄요?”

다소 뻔뻔하게 생긴 녀석이 말투마저 빤질하니 대공의 표정은 점차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심 차분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물었다.

“이름은?”

“지드입니다.”

대공은 겉으론 말도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하류검사 주제에 무슨 실력이 있다고 여기까지 통과하게 되었지?’

지드 역시 대공의 표정을 읽었는지 속으로 말했다.

‘그거야 직접 시험을 주관한 당신께서 앞으로 진행하면서 판단하실 일인 것 같은데요?’

사실 지금까지 시험 과정은 기본적인 체력과 격투 기술 그리고 물리적인 검술 과정이 중점적이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만 하더라도 대공의 테스트가 워낙 까다롭고 강력했기에, 여기 모인 통과자들 모두가 파괴력과 쾌검에 있어서 웬만큼 상급에 해당하는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용병집단을 창설하고 용병대장의 자격을 부여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뽑아 놓고 보니 여덟 명중에 하류검사 따위가 턱하니 껴 있음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인가, 대공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시행한 시험 과정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확신했고 내심 이만저만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살다 보면 별일이 가끔 일어난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는군.’

그는 통과자들 모두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본격적인 시험 과정은 지금부터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그야말로 각자 숨기고 있는 비전 절기들을 모두 선보여야만 다음 최종 관문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오로지 네 명만이 용병 집단 창설에 대한 허가증을 얻게 될 것이다.”

대공은 잠시 여덟 명의 합격자들을 빙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예선 과정을 거치느라 수고했을 텐데 일단 각자 숙소로 가서 푹 쉬고 앞으로 삼 일 후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모여 주기 바란다. 그럼, 해산하도록.”

대공은 말이 끝나자마자 저편에 총관과 서기관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본관 건물 쪽으로 향했다. 여덟 명의 통과자들 역시 각자의 숙소로 향했고 그들의 호위검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관중석으로 내려와 동행했다.

7호와 8호 역시 냅다 뛰어나오며 반갑게 대장을 맞이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역시 대장님이라니까요?”

지드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으니까 너무 좋아들 하지 마라.”

“까짓것, 통과해 버리면 되죠!”

그러자 지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엄살을 피웠다.

“네 녀석들, 역시 방금 전에 심사관인 대공이 통과자들 전원의 신상을 일일이 조사하는 것을 보지 않았더냐? 하나같이 막강한 실력을 갖춘 자들 같은데 그중 절반인 네 명을 떨어트린다 했으니 나 역시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러자 7호가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후! 대장님답지 않게 왜 엄살이십니까?”

“엄살이 아니다. 솔직히 겁도 난다.”

이번엔 8호가 말했다.

“하기야 대장님도 사람이니까 그러실 수 있겠죠. 하지만 대자객을 제압하셨던 실력만 보여 준다면 별 문제없이 최종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지드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쉿! 조용히.”

대장의 갑작스런 행동에 7호와 8호가 의아스러워했다.

“조용히 하라니요.”

“그런 얘기 떠들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우린 숙청 대상 가문을 은밀히 보호하는 경호 임무를 띠고 있잖냐. 더군다나 대자객으로부터 추격을 받는 신세이고 말이야. 그러니까 웬만하면 다른 사림들이 우릴 그냥 별 볼일 없는 하류검사로 생각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 법 싶다.”

이에 7호가 반문했다.

“저흰 이미 백전대장들과 한판 붙어서 승리했는데, 누가 우리를 하류검사로 보죠?”

지드가 잠시 당황했다.

“그거야 어차피 지난 일이고 앞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내 목적은 오로지 용병 창설에 대한 허가증이니, 우린 그거만 손에 쥐고 조용히 이곳에서 사라져 주면 그만이다.”

지드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내심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그게 없다면 조만간 폐쇄될 거주지 구역에조차 살 수도 없는 신세가 될 텐데, 그런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 시험을…… 후우.’

***

그날 늦은 밤.

본관 집무실에는 대공 자라투스와 총관과 그리고 서기관이 모여서 탁자에 놓인 자료들을 뒤적거리며 제법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기 바라오.”

대공의 지시에 서기관이 나름대로 펜대를 놀려 오늘 통과한 여덟 명의 신상 정보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후 대공은 서기관이 간략하게 정리한 자료 한 장을 건네받고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성     명 : 메시

출 신 국 : 아르센 제국 / 중부 대륙

나     이 : 30세

검술원류 : 상승검술(중부 대륙의 검술 원류는 대부분 상승검술에서 기인하기에 그렇게 추정함.)

특정사항 : 흑검사가 유독 많이 배출된 아르카도 제국 출신자임.

성     명 : 테스 클라디우스

출 신 국 : 팔라카스 제국 / 남부 대륙 명문 가문 클라디우스 가(家) 장녀

나     이 : 17세

검술원류 : 특수검술(아버지 집정관으로부터 사사 받은 것으로 추정됨.)

특정사항 : 다소 어린 나이에 철없는 행동을 하나, 그녀의 전투 능력은 상당할 것이 분명함.

성     명 : 바쿠어스(일명 목을 베는 자)

출 신 국 : 무안 왕국 / 남부 대륙

나     이 : 41세

원     류 : 무거운 도끼

특정사항 : 수년 전 남부 지방에서 한때 도끼 살인귀로 악명을 떨쳤던 자로 추정됨.

성     명 : 테세우스

출 신 국 : 팔라카스 제국

나     이 : 27세

검술원류 : 밝히지 않음.

특정사항 : 엄청난 포스와 능력을 숨기고 있는 실력자로 예상됨.

성     명 : 에르가니아 무치 바가스

출 신 국 : 타밀로튼 제국 / 아란타시아 대륙

나     이 : 25세

검술원류 : 알 수 없음.

특정사항 : 실제 바다 건너 대륙으로부터 왔는지 확인할 수 없음.

성     명 : 스카페트

출 신 국 : 팔라카스 제국으로 추정됨. / 니스 용병집단 돌격대장 출신

나     이 : 35세

검술원류 : 밝히지 않음.

특정사항 : 상당한 전투 능력이 있음에도 애써 숨기는 듯한 인상이 느껴짐.

성     명 : 카르발디

출 신 국 : 메스타니아 토착민 출신 / 중부 대륙 아르카도 제국 속국

나     이 : 27세

검술원류 : 상승검사로 추정됨.

특정사항 : 그가 거주하는 부족 국가에는 기병대장 샤칸 대장이 통합 족장으로 있다 함.

성     명 : 지드

출 신 국 : 용병거주지 하류 구역 / 팔라카스 제국 영역 내 속함

나     이 : 31세

검술원류 : 없다고 추정 중.

특정사항 : 하류검사로서 운 좋게 본선까지 오른 것이 확실함.

낮에 대충 신상에 대해 물어본 내용을 토대로 간략하게나마 여덟 명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대공이 말문을 열었다.

“이 자료만으로 흑검사의 윤곽조차 가려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최종 심사가 시작되면 각자 밝히기를 꺼려했던 검술 원류를 보일 테고, 그렇게 되면 대략 의심되는 자의 실체가 떠오를 것이라 봅니다.”

이번엔 총관이 말문을 물었다.

“심사 과정은 어찌하실 겁니까?”

“과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대결을 시키게 할 것이오.”

순간 총관이 깜짝 놀랐다.

“방금 전 대결을 시킨다고 하셨습니까?”

“그리 말했소. 반으로 나누어서 말이오.”

“그렇다면 8명을 네 조로 나눈다는 말씀인지요.”

대공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니요?”

“모두가 한꺼번에 대결을 벌이는 것이오.”

총관과 서기관이 납득이 가지 않는 듯 대공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꺼번에요!”

“그렇소.”

“……한 공간에서요?”

“그래야만 그들의 전투력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흑검사란 존재는 워낙 교묘해서 일대일 대결시에 자신의 실력을 숨기도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거요. 허나 여덟 명이 살아남기 위해 주변에 보이는 경쟁자들에 기술을 펼친다면 많은 혼란이 일어나겠지요. 그런 와중에 흑검사 역시 위기에 몰릴 상황을 맞이한다면 급한 김에 강력한 포스를 일으킬 테지.”

그 말을 들은 총관과 서기관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 쉽게 드러날까요?”

“물론 아니겠지. 하지만 내게는 대책이 있소.”

“대책이라니요?”

“발검 전 지면에 검을 박는 자를 찾으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소. 흑검사 모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포스를 모으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면으로부터 흑사술의 음습한 에너지를 매개체로 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오.”

“과연! 대공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흑검사의 목표가 테스일 가능성이 크므로 유독 그녀에게 집요한 공격을 하는 자를 눈여겨볼 것이오. 그자가 흑검사일 가능성이 크니까.”

“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우린 그때까지 편안히 앉아서 지켜보면 그만인 거요.”

“말씀을 듣고 보니 이거 벌써부터 떨리는군요. 그런 엄청난 존재가 벌써 손에 잡힌 듯하네요.”

“허나 끝까지 방심해선 아니 될 것이오.”

“방심은커녕 긴장이 너무 되어 심장이 두근두근합니다.”

“용병 연합회의 최고 수장께서 너무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니오?”

“두려운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술 한잔 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대공이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사뭇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지금 와서 보니 대공은 그리 꽉 막힌 관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겉으로 보이는 퉁명스런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다고나 할까. 특수검사부 수장이면서도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았고, 이처럼 공무를 떠나서 뒤풀이를 할 만큼 여유도 있는 자였다.

***

같은 시각.

한 사내가 난간 밑에 엎으려 대공이 있는 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그는 바로 지드였다.

그는 청력(聽力)을 최대한 발동시켜 지금까지 대공과 총관 그리고 서기관이 하는 대화를 모두 엿들을 수 있었다.

표정이 굳어지고 다소 어둡기까지 한 지드, 3일 후에 벌어질 본선 시험 과정 내용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했다.

여덟 명의 경쟁자들이 한꺼번에 싸워야 한다는 대목 말이다.

‘젠장! 이거 머리 아프게 생겼군. 우리가 짐승들도 아닌데 한 번에 싸움을 붙이다니…….’

지드는 대공의 다소 무지막지한 심사 과정 계획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일 그런 시험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후보자들 모두가 강력한 전투 기술을 지닌 자들인 만큼 서로 간에 심각한 부상자들이 생겨날 건 뻔한 일이었다.

지드는 그런 점에 대해서 이만저만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이 반짝였으니, 그 역시 흑검사란 존재에 대해서 내심 궁금증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흑검사가 누구일까?’

생각해 보니 대공이 저런 무지막지한 시험을 택한 이유가 바로 흑검사를 추려 내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바로 그때 지드의 눈빛이 다시금 번뜩였다.

‘아 그렇지! 만일 흑검사를 미리 찾아낸다면 대공이 시험을 최소할 수도 있겠어.’

지드는 난간을 부여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카펫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것처럼 영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잠시 후 가벼운 한숨을 짓고 마는 지드.

“그런데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대공은 총관 그리고 서기관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모처럼만에 일과는 상관없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술자리가 끝이 나고 총관과 서기관이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대공은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검은 표지의 제법 두툼한 책자는 아까 낮에 직속수하가 제국의 역사 도서실을 모두 뒤져서 겨우 찾아낸 중부 대륙 검술 원류에 관한 내용이 담긴 귀중한 자료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란 말이나 승리하려면 적부터 알아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에 입각한, 흑검사를 가려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대공은 중부 대륙의 검술원류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늦은 밤이 지나고 어느새 훌쩍 푸르스름한 여명(黎明)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녘임에도 대공은 아직도 잠에 들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장을 덮고는 푹신한 의자 뒤로 편안히 눕는 대공 자라투스.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새벽 내내 읽었던 책자 내용들이 이리저리 궤적을 그리며 머리를 지근거리게 하였다.

중부 대륙의 검술원류는 한마디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검술의 역사가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일단 각 명문 가문마다 비전 검술이 전해져 오니 각 후계자들에게 전해지는 검술 종류만 하더라도 그 숫자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비전을 전해 받은 검사들은 일종의 선택 받은 자들로서 승계검사(承繼劍士)라 칭했다.

그러고는 다음 단계라 할 수 있는 흑검술 가장 기초적인 과정에 입문하는데, 이때부터는 대지의 암흑 포스를 이용한 검강을 처음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검강을 만들어 내고 검을 통해 어느 정도 위력을 발산하는 소위 흑검술 제1공격과 제2공격이 가능한 정도까지를 상승검사라 칭한다.

흑검사란 칭호를 듣기 위해서는 흑검술 제3공격에 이르러야 하는데, 사실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격은 해마다 열리는 흑검사 인준 시험을 통과한 흑검사뿐이다. 흑검사 인준 시험은 엄격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최소 흑검술 4공격의 능력이 필요하다.

설령 인준 시험에 통과했을지라도 흑검사란 정식 호칭은 주어지지 않는다.

교육대에서 3단계 코스를 거쳐서 흑검술 제5공격에 이르러야만 그제야 실전에 투입될, 그야말로 완벽한 흑검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교육대까지 입문한 많은 재능 있는 대기자들 중 무려 7할에 해당하는 자들이 중도 포기할 정도로 실전 흑검사로 가는 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렵다.

그렇기에 흑검사란 존재는 제국에서 몇 안 되는 극소수의 특별한 존재들로서, 그들의 가치는 가히 일국의 군단 규모와 비견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놀랍게도 실전 흑검사에서 또 한층 높은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흑검술 제6공격자들인 타미레온 급이었다.

타미레온 급은 중부 대륙에서조차 역사상 몇 명만이 겨우 올라설 수 있었던 최고의 경지로서 현재는 대륙을 통틀어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책자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흑검술은 타미레온 급을 넘어서는 제7공격과 그 최종 8공격인 궁극적인 단계까지 존재한다고.

‘후…….’

대공은 머리가 아찔한 듯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는 다시 그 뼈대만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승계검사 : 비전 승계자들.

상승검사 : 승계검사에서 발전된 흑검술 제1공격과 2공격 입문자들.

예비 흑검사 : 흑검술 제3공격 경지에 오른 자들.

흑검사 : 흑검사 인준 시험을 통과한 자들로서 흑검술 4공격 시전이 가능함.

실전 흑검사 : 흑검 교육대를 거쳐 제5공격에 이른 자들로서 본격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흑검사 타미레온 급 : 흑검술 제6공격자들.

그리고, 그 외에 흑검술 제7공격과 최종 궁극적인 8공격까지 존재하리라 추정됨.

정말이지 중부 대륙 검술 원류의 계보만으로도 대공은 이만저만 복잡한 심경이 아니었다.

이제야 알았던가. 그 자신이 이번 여덟 명에 속해 있을지 모르는 흑검사를 가려내는 일이 그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특수검사부 수장인 대공, 그 자신은 검강을 다루기 위해 얼마나 고전했던가. 불과 수년 전에 터득한 최고의 기술이건만, 중부 대륙에서는 흑검사도 아닌 그 밑 단계인 상승검사들부터 검강을 시선할 수준이었으니, 그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경직되는 것도 당연하다 볼 수 있었다.

“……남부 대륙 검술 수준이 중부 대륙에 비해 이리도 떨어져 있을 줄이야.”

어느덧 푸르스름한 새벽녘도 동이 트는 밝은 빛에 환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공은 그와 반대로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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