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7 대자객 (8/81)

CHAPTER 7 대자객

그 이튿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르콘 녀석이 아침 일찍부터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 수련생들과 계단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지드, 그는 지드에게 설렁설렁 다가가더니만 냅다 한마디 했다.

“안녕하쇼, 사이비 형씨.”

“…….”

눈길은커녕 대꾸조차 하지 않는 지드, 그런 그의 행동에 아르콘은 아침부터 열이 오르고 말았다.

“이제 연극은 그만하죠? 쳇! 그렇게도 돈이 궁하다면 내가 줄 테니까 당장 여길 떠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르콘은 허리춤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더니만 지드의 발밑에다가 던져 놓았다.

툭!

“이 정도면 당분간 충분히 먹고 지낼 수 있을 거요.”

바로 그때였다.

아카시안이 언제 나타났는지 아르콘에게 다가와서는 뭐라 했다.

“이제 그만해.”

잔뜩 굳어진 표정에 말투마저 냉정하게 들렸던가. 아르콘이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왜 그래?”

“앞으로 지드 님에게 함부로 하지 마!”

“지드 님이라니? 너 지금 이 사기꾼한테 속고 있다는 거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카시안이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거 같아.”

“아카시안! 정말 답답하네. 좋아, 지금 당장이라도 이자와 대련을 해서 그 실체를 밝힐 테니까 잘 봐 두라고!”

아르콘은 다짜고짜 마당으로 가더니만 명상에 잠긴 수련생들을 무식하게 밀쳐 내고는 검을 뽑아 지드에게 외쳤다.

“당장 내려와! 오늘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아카시안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드 님, 쟤랑 상대해 주시겠어요?”

지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뭐, 그렇게 하지요.”

“대신 아르콘이 다치게 않도록 부탁드릴게요.”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아카시안의 세 동생들 중 제일 어린 막내 여자 아이의 이름은 아린이다. 이제 겨우 7살, 아직은 세상이 신기해 보일 어린 나이이다.

아린은 마당에서 아르콘 오빠가 왜 인상을 팍팍 쓰며 대장 아저씨를 쫓아 다니는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타다닥―

“도망만 다닐 거요? 치사하게!”

“도망이 아니라 적당한 때를 보는 거다.”

“뒷걸음질 치는 것이 도망이 아니고 뭐요!”

“옆걸음도 쳤는데?”

“명색이 경호대장이라면 남자답게 정면으로 부딪칩시다.”

“대결에 있어서 정면 공격이 반드시 능수는 아닌 법이지.”

“그래도 지금이 대결 상황이라는 것은 인정하는군요?”

“암, 대결이고말고. 지금 네놈의 허점을 찾느라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말이나 못하면. 쳇! 그렇다면 이것도 한번 피해 보시지. 이얏!”

홱!

“그렇게 느려서 거북이조차 잡을 수 있겠냐?”

“젠장!”

“아서라. 형한테 성질내는 거 아니다?”

“형은 얼어 죽을! 그나저나 이젠 제발 좀 덤벼 봐요!”

벌써 30여 분 지났을까. 아르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지드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절묘한 신법과 몸놀림으로 인하여 번번이 공격이 무산되었다.

이제는 공격하는 자가 지쳐서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던가.

계단에 앉아서 두 손을 턱에 받친 아린이 한마디 했다.

“나도 저 놀이 하고 싶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빠 카르가 피식 웃었다.

“바보. 저건 놀이가 아니라 대련이라는 거다.”

그러자 첫째 오빠가 레드가 반박했다.

“너도 바보네. 저 둘은 진검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대련이 아니라 대결이라는 거다.”

“대련이나 대결이나 그게 그거지 뭐.”

“그건 엄연히 다른 거야. 그저 실력 우위를 점치는 것이 대련이라면 대결은 자존심을 걸거나 심지어 목숨마저 내놓고 싸우는 거란 말이다.”

“그래, 잘났다.”

“뭐라고! 지금 형한테 말대꾸하냐!”

그들 뒤에 앉아 있던 아카시안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너희들, 한 번만 더 싸우면 집 안에 가두어 놓는다.”

누나가 한마디 하자 잠잠해졌다.

사실 이 순간 아카시안의 시선은 지드의 희한한 동작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사람의 신체가 저리도 유연하단 말인지. 게다가 이상한 발걸음은 마치 얼음판에 올라선 것처럼 이리저리 미끄러지듯 하니, 아르콘의 검이 도저히 그의 털 끝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검 사관학교 상반기 2차 과정 차석을 차지한 아르콘의 검술 실력이라면 숲속의 날아가는 새들조차 그의 검날을 피하지 못할진대 경호대장은 너무도 쉽게, 가벼운 동작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드는 공격을 삼가기로 했다. 어제처럼 힘 조절을 하지 못할 경우 아까운 청춘 하나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수를 배재한, 아니, 아예 검을 바닥에만 향한 채 연신 보법과 신법에 의한 방어 동작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녀석, 생각보다 끈질기군. 이쯤 되면 지칠 만도 하건만.’

아르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익혀 왔던 정통 검술의 파괴력과 속도가 저 사이비 경호대장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그저 도망가듯 자신의 검날을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공격을 할 때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허점을 파고들어와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아르콘은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저 사이비가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심지어 아르콘은 겁이 덜컥 났다. 이렇게 끌려 다니다가 갑자기 공격이 들어온다면 막지 못하고 어딘가 절단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도 기세등등했던 그로서도 이젠 이 무의미한 대결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대결 전에 큰 소리를 뻥뻥 쳤고 자존심마저 걸린 문제인 만큼 먼저 빠질 문제는 아니었다.

바로 그때 들려오는 반가운 소리.

“둘 다 이제 그만하세요!”

아카시안의 외침에 지드와 아르콘은 기다렸다는 듯 대결을 멈추었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아르콘은 아카시안으로부터 지드가 어제 자객들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들었다. 아르콘은 깜짝 놀랐다. 특히 지드가 단 일 검에 네 명을 제압했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엄연한 사실이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내가 아는 한 그자는 절대로 그런 실력이 없는데. 거참.”

“네가 인정하든지 말든지 나와 아홉 명의 수련생들 앞에서 생생히 벌어졌던 일이야.”

“…….”

세상에는 간혹 가다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던가. 새파란 청춘 아르콘에게 있어서 지드라는 인물은 점차적으로 베일에 싸여 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는 잡풀이 많이 자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세월이 빨리 지나는 것 같아. 어렸을 때 여기 총관 저택에서 너랑 놀던 시설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벌써 성년이 되었다니.”

아카시안 역시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가 많이 그립지.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놀던 시절.”

그녀는 말하다 말고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라졌어.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동생들마저 위험에 처해 있으니 말이야.”

아르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미안하다. 그동안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그러자 아카시안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너는 네 길이 있는 거잖아. 그리고 신께서 우리 남매를 버리지 않았는지 아주 믿음직한 분을 보내 주셨잖아.”

“믿음직한 분이라니?”

“지드 님 말야.”

지드라는 말에 아르콘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쳇! 그 인간.”

“그분은 우리 남매의 생명의 은인이니까 앞으로 함부로 말하지 마. 어제 자객들이 나타났을 때 경호대장님이 없었더라면 어떡할 뻔했겠니. 정말 생각만 해도 끔직해.”

“…….”

이번만큼은 아르콘도 그녀의 말에 수긍했는지 잠잠히 있었다. 그런데 아르콘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니 뭐가?”

“어제 자객들 네 명이나 쳐들어왔다고 했지.”

“응.”

“대자객 신전은 몰려다니면서 집단행동을 하는 데가 아닌데…….”

“대자객 신전이라니!”

아카시안이 깜짝 놀라 외쳤다.

“사실 나도 검 사관학교에서 떠도는 얘기를 들은 것뿐인데 원로원에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이기 위해 대자객 신전과 손을 잡았다고 했어. 거긴 너도 알다시피 남부 대륙의 최고 살수 집단이고, 반드시 두 남녀가 짝을 이룬 자객들을 파견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유명하잖아.”

대자객 신전이 개입했다는 새로운 사실에 아카시안은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설마 거기서…….”

“아카시안!”

아르콘이 그녀를 겨우 부축하고는 의자에 앉혔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서도 절망적인 얼굴을 했다.

“거기가 나섰다면 이젠 우린 모두 끝났어.”

그 말에는 아르콘이 뭐라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곳에서 개입했다면 목표 대상이 그 누구이던 간에 이미 삶이 끝났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극강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살수 집단, 소문에 의하면 그곳은 전 대륙을 걸쳐 가장 강력한 자들만을 영입하여 아주 은밀한 운영을 한다고 했다.

그들의 대상은 주로 주변국의 정치인들과 장군들, 혹은 상급 전사들이지만 간혹 가다 요즘처럼 자국 내의 정치 싸움의 피바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르콘이 뭔가에 골몰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제 여기서 당한 네 명의 자객은 하청 용병 같은데?”

“하청 용병이라니?”

“숙청 임무를 부여받은 대자객들이 자비를 들여서 고용한 일종의 새끼 자객들이라 볼 수 있지.”

“대자객이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지?”

“그야 내키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지.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적국의 실력자들 제거 임무를 주로 하는 엄청난 전투력의 소유자들이, 숙청 대상의 일개 저택이나 돌아다니며 그 집 가족들은 물론이고 모조리 죽여 버려야만 하는데 그게 쉽게 받아들여지겠냐?”

그제야 아카시안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제 온 자객들은 진짜가 아니잖아.”

아르콘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싸구려 용병들이 분명해. 그러니까 그렇게 맥없이 당했겠지. 만일 대자객 신전으로부터 진짜가 왔다면 큰일 날 뻔했을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더 이상 늦기 전에 빨리 짐 싸서 어디론가 숨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카시안은 그래도 경호대장을 믿고 싶었다.

“우리에겐 지드 님이 계시는데?”

그러자 아르콘이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정말 너 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대자객 신전이라는 곳은 중부 대륙 기준으로 보자면 가히 흑검사에 필적하는 극강 살수들만 모아 놓은 무시무시한 집단이란 말이다! 그나마 하늘이 도와서 하청 용병이 온 거지, 다음에는 진짜 자객이 올 가능성이 크다니까?”

“그렇다면 이젠 어떡하지.”

“어떡하기는! 무조건 저택을 떠나서 어디론가 숨어야지.”

“그러니까…… 어디로 가냐 말이야.”

아르콘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다. 하긴…… 세상 어디로 도망간들 그들이 반드시 찾아내겠지?”

“…….”

***

보름 후.

두 명의 남녀가 잡초가 우거진 저택의 정원을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붉은빛 군장 차림의 여인이 외쳤다.

“테세우스! 이리 와 봐!”

“뭣 좀 찾아냈어?”

“여기에다 시체들을 묻은 거 같아.”

잠시 후 두 남녀는 네 구의 시체들을 찾아내어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넷 다 동시에 당한 것 같아.”

여인이 말하자 검은 군장의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명이서 협공을 하다가 당한 모양이군. 헌데 이상하군. 검날에 베인 자국이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지져져 있는데?”

“불에 지져져 있다는 의미는 검강이 발산되었다는 얘기잖아? 그렇다면 이자들을 제거한 자가 적어도 상승 계열은 된다는 얘기인데…….”

청년이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이봐, 네오시온. 내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어떻게 동시에 검강이 정확히 네 군데를 공격할 수 있느냐 하는 거야. 그 정도 기술이면 흑검술 제4공격자 이상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변화검강에 가깝다고 볼 수 있거든.”

여인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렇다면 흑검사가 등장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이 뭐가 아쉬워 남부 대륙의 숙청 가문 따위에 개입하겠냐.”

여인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하청 용병들을 쓰는 게 아니었는데 너 때문에 이게 뭐니? 시간만 잡아먹고.”

“또 내 탓이냐! 너 역시 숙청 임무를 그 누구보다도 꺼려했잖아.”

“내가 언제!”

“또 딴말하시네?”

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여기 임무를 완전히 끝내지 못하면 우린 한 단계 밑으로 강등 당해서 중부 대륙 진출이고 뭐고 꿈도 꾸지 못해.”

“정보에 의하면 최근 이 저택에 팔라카스 제국 검 사관학교 출신이 여길 다녀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필시 그놈과 연관이 있는 거 같아. 이름이 아르콘이라던가? 여하튼 지금은 숙청 대상들부터 추적하는 것이 순서겠지.”

사내가 말이 끝나자마자 대문으로 향하려 하자 여인이 그의 팔을 잡고는 못 가게 했다.

“잠깐.”

“뭐가 그렇게 급해.”

“지금 급하지 않게 생겼냐?”

“날도 저물었는데 우리 여기 저택에서 하룻밤만 자고 가자.”

“뭐라고?”

여인이 다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우리 말이야. 함께 밤을 지낸 지도 무척 오래 된 것 같아.”

그러자 사내가 다소 당황스런 반응을 보였다.

“이봐, 네온! 임무 중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군.”

“우린 약혼 사이인데 가끔은 애정 표현은 해야 하는 거 아냐?”

“지금은 때가 아냐.”

사내가 퉁명하게 말하고 돌아서자 여인이 성질을 팍 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렇게 뻣뻣할 필요는 없잖아. 정말 자존심 상해서!”

***

같은 시각, 인근 산맥 정상 부근.

일행은 능선 지역으로부터 불어오는 강풍에 옷깃을 여민 채 한발 한발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은 새벽부터 저택을 등지고 한창 산맥을 넘고 있는 아카시안 남매와 지드 일행들이었다.

얼마 전 아르콘은 도시로 돌아기 전에 반드시 저택을 떠날 것을 종용했고 아카시안은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었다.

그녀는 몇 날 며칠 지드와 깊은 논의 끝에 새로운 정착지를 정했고, 드디어 오늘 새벽에 저택을 버리고 먼 여정에 올랐던 것이다.

지드 등에 업힌 막내 아린은 소풍이라도 가는 듯 연신 노래를 흥얼거렸고 두 남자 아이들 역시 철없이 서로 장난치며 가고 있었다.

다만 아카시안만이 저 아래 멀어져 가는 저택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버지와 즐거운 추억이 깃든 집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도 슬펐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아홉 명의 하류검사들 역시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으니, 자객들이 추적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던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이끌어 줄 지드가 있었던가. 비록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그가 가는 대로 함께 할 뿐이었다.

지드는 착잡한 심정으로 어느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택 너머 산등성이 마을 어느 곳에 그의 집이 있었다. 지난 청춘의 모든 세월을 가출로 보냈건만 이 순간 또다시 집을 떠나야 할 신세이니 그 심정은 꽤 갑갑했을 것이다. 그간 총관 저택에서 머문 시간만 해도 1년 반쯤 되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젠 기약 없는 여정길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제는 별 관심조차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드는 예전처럼 초라하고 슬픈 마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기다린다고나 할까.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가득 안은 표정들, 저마다 불확실한 미래 탓에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허나 자신만을 믿고 먼 여정을 결심한 그들의 얼굴에는 또 다른 희망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점이 지드로 하여금 예전에는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책임감이랄까, 아니, 조금 더 확대 해석하자면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듯 보였다.

‘만일 내가 이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모두 위험에 처해질 거야.’

어느새 등 뒤에 잠이 들어 버린 아린, 그리고 저만치 앞서 가는 아카시안과 그의 두 동생들, 고된 삶의 막바지에 정착하려는 아홉 명의 하류검사들이 그의 동공에 아른아른 비쳐졌고 결국 그들을 따라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산등성이 두어 개를 넘을 무렵 지드는 협곡 아래로부터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신법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머나먼 협곡 초입 구간으로부터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들은 두 명의 남녀였는데 그들의 행색이 결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지드는 그들이 혹시라도 아카시안과 아이들을 추적해 오는 대자객이 아닌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는 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경공술을 이용하여 가파른 절벽에 몸을 던졌다.

타다닥!

팍! 팍!

그의 발끝은 흡사 재빠른 다람쥐처럼 가볍게 벽면 여기저기를 치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 모습을 목격했다면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철편 갑옷에 물통을 이고서 하루에도 수십 번 계곡을 오르내렸고, 이어 동굴 안에 풀어 놓았던 100마리의 참새를 잡기 위해 오로지 보법에만 그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했던가.

그리고 스승님이 무림으로 귀환하시고 홀로 남은 2년 동안 화산파 절절 경공 암향표(暗香飄)를 익힌 덕분에 이런 정도의 산악 지형은 눈감고도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었다.

어느새 협곡 밑바닥까지 내려온 지드, 그는 바위 뒤에 은밀하게 숨어서는 저만치 다가오는 두 명의 존재들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와 여인, 그의 예상대로 저들은 범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검사들이 분명해 보였다.

협곡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강했다. 강풍에 흑발을 날리는 하늘색 군장의 사내와 붉은 군장 차림 여인 역시 금발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날렸다.

그 둘은 각각 등 뒤에 검을 이고 있었고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지드는 무언가가 심장을 쥐어 옴을 느꼈고 심장이 쿵쾅거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내공심법으로 다져져 있기에 가까스로 거칠어지는 심호흡을 누를 수가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무공으로 다져진 그에게 있어서 뭔가 위압적인 포스가 엄습해 온다고나 할까.

그 느낌을 굳이 설명하자면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기류가 만나면서 묘한 작용을 이끌어 내는 조화라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지드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저만치 다가오던 두 명의 남녀 역시 뭔가 이상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테세우스, 잠깐만 멈추어 봐. 이상한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아?”

그 역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묘한 느낌이군.”

“묘하긴 한데 왠지 거북스러워.”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북스럽다는 뜻은 또 뭐야?”

“글쎄다. 달리 설명하면 일종의 기세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위압감이라 할까. 지금까지 전혀 맛보지 못한 포스가 분명해.”

여인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쳇! 대체 뭔 말을 하는 건지…….”

“근처 어딘가에 누군가 숨어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

여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뭐라고!”

테세우스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만 아담한 바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곳이 수상해.”

순간 여인이 허리춤으로부터 채찍을 빼 들더니만 냅다 그곳을 향해 후려쳤다.

우르르!

휘둘러 친 채찍은 주황색 빛점을 마구 뿌리며 순식간에 단단한 바위를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홱! 파파파팍!

그 광경에 테세우스와 네온이 놀란 듯 그곳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저기 절벽 위야!”

네온이 황급히 그를 쫓아가려 하자 테세우스가 손을 그녀를 뻗어 만류했다.

“잠깐만!”

“뭐야!”

“저 정도로 빠른 속도라면 네가 쫓아가도 잡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이대로 보고만 있으라고?”

“누가 보고만 있겠대?”

테세우스는 등 뒤로부터 검을 빼 들더니만 손가락 두 개를 검면에 올려놓고는 마법 주문을 외웠다.

“파괴의 신 아르여! 그대의 힘을 빌려다오!”

그러자 신기하게도 검날 주변에 하늘빛 광선이 은은하게 일어났다.

그는 곧이어 영롱한 색광을 띠는 검을 들어 올리더니만 절벽 향해서 강하게 던졌다.

홱! 파파파팟! 팍!

강렬한 파공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검, 자신들을 피해 절벽을 올라 달아나는 사내의 위쪽 부근에 박혀 버렸던 것이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검이 박힌 부근이 폭발해 버렸다.

그 여파로 돌무더기와 함께 굵은 먼지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테세우스와 네온은 산더미처럼 쌓인 잔재들을 헤쳐 가며 그 안에 묻혔으리라 생각되는 한 존재를 찾으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내와 여인은 마지막 돌들을 치우면서 허탈한 심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없는데.”

테세우스가 말하자 네온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녀석의 위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도망칠 수 있는 거지?”

테세우스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뿐.

“어쨌든 도망갔잖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어쩌라고? 도망간 건 도망간 거지. 그나저나 어떤 자인지 궁금하군.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는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왜지?”

“낸들 아나.”

“어떤 놈이지 간땡이가 부었군. 감히 우릴 엿보다니!”

테세우스는 문득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검으로 흉물스럽게 부서진 절벽, 대체 누가 저 높은 곳으로 빠르게 뛰어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폭발을 뚫고서 말이다.

테세우스는 잠시 뭔가 골몰하나 싶더니만 이내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저택에서 하청 용병들을 제압했던 바로 그자가 아닐까.”

네온이 이번에도 입술을 쭉 내밀었다.

“또 그 육감 타령이겠지?”

테세우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육감이 아니더라도 정황이 그런 것 같아. 숙청 대상 저택과 여기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그 누군가가 우릴 엿보고 있었다면 아마도 추적해 들어오는 우리의 존재를 미리 알고는 염탐을 시도했는지도 모르겠지.”

그제야 여인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근처 어딘가에 숙청 대상들로 함께 있겠군.”

“그러길 바라야겠지.”

“그렇다면 당장 찾아보자고.”

***

그날 저녁, 어느 숲속 공터.

탁탁!

화르르―

세 명의 남매들은 하류검사들 사이 틈에 끼어서 아까 전에 사냥했던 날짐승의 꼬치구이가 익어 가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 아린은 이번에도 오빠들이 자기 몫에 욕심을 낼 가봐서 이만저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말하겠지만 내 것은 두 개야. 이번에도 손댔다가는 그냥 콱 물어 버릴 거다.”

아린이 경고를 하자 두 오빠들인 카르와 레드가 불만을 드러냈다.

“넌 왜 두 개야?”

“두 개니까 두 개지.”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아무튼 우린 한 개이니까 그 나머지 한 개는 공평하게 나누어 먹어야 해.”

“싫어!”

그러자 첫째 오빠 카르가 주먹을 쥐고는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뭐가 싫다는 거야! 또 혼나려고?”

그때 옆에 있던 아저씨가 두 오빠들을 나무랐다.

“그만두지 못하겠냐. 그 꼬치구이는 내가 아린에게 직접 준 거니까 너희들은 상관 마라.”

“우리한테는 왜 안 줘요?”

아이들의 질문에 중년인이 즉각 답했다.

“주기 싫으니까.”

“뭐라고요!”

“네놈들은 툭하면 말썽에다가 틈만 나면 싸우고 다투고 하는데 뭐가 예뻐서 먹을 걸 나누어 주냐.”

아린 역시 한마디 했다.

“지노 아저씨 말이 맞아!”

지노는 아홉 명의 하류검사들 중에서 제일 나이 많은 40대 중반이다.

그가 검사의 길로 뛰어든 지 어언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성격과 소질 없는 검술 능력 탓에 오늘날까지 그저 그런 하류검사의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오른쪽 바위 밑에서 조그만 모닥불을 피워놓고는 아카시안에게 상처 치료를 받고 있는 지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에구, 대장님은 어디서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건지.”

아카시안은 지드의 부상당한 팔뚝에 붕대를 감아 주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 등 크고 작은 찰과상을 입은 대다가 현재 붕대 부위는 아예 시퍼렇게 퉁퉁 부어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카시안이 또 묻자 지드는 같은 답변으로 일관했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졌다고 이렇게 심하게 다칠 수가 있는 건가요.”

“심하긴요. 그냥 견딜 만한데요.”

“…….”

결국 아카시안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이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날 밤, 일행들 모두가 잠이 들었을 때였다.

지드는 모포에서 홀로 나와서 근처 바람막이 역할을 해 주는 큰 바위 위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달빛이 제법 밝아 보였고 주변 밤 풍경이 그런대로 늦가을의 정취 풍기는 것만 같았다.

이내 한숨을 쉬고 마는 지드.

“후.”

아무래도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이 몹시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신화적인 존재들을 목격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가슴이 벌렁벌렁했던가. 또한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일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대자객 신전.

지난번 아르콘 녀석이 저택을 떠나 도시로 가기 전에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아마도 이번 숙청 임무를 띤 자들이 대자객 신전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언급,

처음에는 그처럼 거물 같은 존재들이 하찮은 숙청 일에 뛰어드나 싶어서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채찍으로 바위를 산산조각 내고 검 하나로 절벽 한쪽 부분을 날려 버리는 어마어마한 존재들, 정녕 그들의 전투력은 그가 꿈속에서나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자신이 무공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세에 절로 도망칠 수밖에 없던 일이 어찌 본다면 담력이 부족한 이유가 있겠지만, 후회하거나 스스로를 겁쟁이로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비교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다가 설령 자신이 있을지라도 세상에 대자객을 정면으로 맞이해서 대결을 벌일 자가 과연 몇 명이나 존재한단 말인가. 중부 대륙의 흑검사 위치에 오른 자들이라면 또 모를까.

사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들의 추적망이었다.

그들을 살피러 갔다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들키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어리석은 일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행들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지드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지.”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고개를 치켜 올렸다.

“가만있어 보자! 거기라면 아직 결계 진법이 남아 있을 수도…….”

그의 화색이 밝아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숲속 공터로 냅다 뛰어갔다.

그리고 뭐라 외치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 깨워서 그곳으로 이동해야 해!”

경호대장 지드의 성화로 밤낮을 쉬지 않고 산악 행군을 한 일행들, 그들은 심신이 지친 나머지 그만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하류검사들의 그러하니 하물며 아카시안과 그의 동생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막내 아린은 지드의 등에 업혀 왔기에 생생했다.

“대장 아저씨, 우리 다 왔어요?”

그러자 지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 왔고말고.”

“와우!”

지드는 손을 들어 왼편 바위 언덕 지대를 가리켰다.

“저기 바위 언덕 보이지.”

아린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네.”

“거기가 우리가 당분간 지낼 곳이다.”

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긴 집도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분명 우리가 쉴 건물이 있단다.”

집이 있단 말에 일행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 언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저 산악 지형인지라 모두들 실망하는 기색이었고 급기야는 저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대장님이 조금 이상한데?”

“그러게 말이야. 혹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거 아냐?”

그러자 가장 나이 많은 중년인 지노가 사내들을 나무랐다.

“이런 고얀 놈들 같으니, 말이면 다하는 줄 알아!”

그때 지드가 일행들에게 마지막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자, 다들 준비하고 저곳으로 향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카시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정말 저곳에서 지내려고요.”

지드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리 할 생각입니다.”

“혹시 언덕 너머에 건물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아니라고요?”

“건물은 바로 눈 앞 언덕 위에 있습니다.”

아카시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곳을 다시 바라보았다.

“제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진법이 파훼되기 전에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

아카시안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말인지…….

지드는 사방을 둘러보며 금방이라도 대자객들이 추적 망을 좁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 일단 저리로 갑시다. 가 보면 설명이 절로 되니까요.”

잠시 후 바위 언덕에 도착한 일행들은 저마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맞은편 구릉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낡은 신전이 지드를 따라서 구불구불 이상한 길로 들어와 보니 턱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가 귀신에 홀리기라고 했단 말인가.”

“없던 건물이 갑자기 등장하다니, 이게 뭔 조화지?”

지드는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칫 조금만 늦었어도 대자객들의 추적에 그들과 원치 않는 대면을 치를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스승님으로부터 진법에 대한 지식을 익혀 두었기에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 지금 심정은 그렇게도 흐뭇할 수 없었다.

‘이제 살았다!’

“뭐야! 여기서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잖아.”

불과 한 시간여 전만 하더라도 일행들이 머물었던 바로 그 자리에 두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테세우스와 네온이었고 그 어떤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 바위 바닥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네온의 말에 테세우스 역시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맞은편 바위 언덕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거 참 이상한 일이군. 분명 발길이 저쪽으로 이어졌건만 온통 바위 지대만 있고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으니…….”

“나 역시 사방을 돌아다니면 인근 지역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뭔가에 홀린 기분이야.”

“이걸 어쩐담?”

“어쩌기는 뭘 어째? 좀 더 찾아봐야지. 이것들이 숨어 봐야 벼룩이지, 아마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그녀의 말에 테세우스가 모처럼만에 의견을 같이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어디까지 육감이지만 필시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아, 이번만은 네 육감을 믿기로 할게. 그렇다면 일단 여기에다 여장을 풀고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으로서는 그 수밖에 없잖아.”

사내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툭 던지더니만 바닥에 털썩 앉아 버렸다.

“뭐, 그렇게 하지.”

네온이 무슨 이유인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처럼만에 너와 한곳에서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은데?”

그러자 테세우스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발 임무 중에는 딴 생각 좀 하지 말자.”

“호호! 남자가 돼 가지고서 쑥스러워 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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