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뙤약볕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등을 기대어 쉬고 있는 지드, 그 옆에는 물이 그득 담긴 철통 두 개와 지게가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무슨 골몰을 하는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물을 길어 날라야 하는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신전 뒤뜰에 있는 엄청나게 큰 철통에다 물을 가득 채우려면 아마도 수십 번은 들이부어야 할 것이다.
“나 참, 이 짓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왠지 모르게 속은 기분이었다.
벌써 두 달이 넘었건만 수련은커녕 온갖 잡일들만 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젠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를 만도 했다.
영감이 가르쳐 주겠다던 무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들도 수련이라나?
매일같이 물지게 지기.
나무 구해 오고 장작 패기.
식사 준비하고 설거지하기.
그리고 기타 등등…….
‘아! 정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지난번처럼 잡혔다가는 이번엔 진짜 큰일 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지드는 몇 번이나 탈출하려고 계곡을 내려갔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노인은 귀신처럼 어느새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의 태양 볕은 세상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계곡과 언덕 위에서 왔다 갔다 물지게를 나르는 지드, 그는 철통에다 열한 번째 물을 붓고는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젠…… 때려 죽여도 이 짓거리 못하겠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모포를 얼굴까지 뒤집어 쓴 지드는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는데, 하지만 곧이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
“당장 일어나지 않고 뭐 해!”
“음, 으음…….”
지드는 너무 피곤해서 누가 깨우는 것조차 몰랐다. 곧이어 바가지로부터 찬물이 확 쏟아졌다.
“헉!”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지드가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잠시 후 지드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자 노인이 다그쳤다.
“일 시작해!”
“아직…… 날도 새지 않은 캄캄한 밤중인데…….”
“지금은 새벽이야!”
“새벽이나 밤이나.”
가뜩이나 힘겨운 하루 일과이건만 몇 시간이 앞당겨졌다는 사실은 지드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힘든 과정은 지금부터였다.
노인이 묵직해 보이는 무언가를 바닥에다 던졌다. 지드가 깜짝 놀란 채 그 물건을 살펴보았다.
“이…… 게 뭡니까?”
“철편 갑옷.”
“철…… 편…… 갑옷?”
“오늘부터 그거 입고 일 시작해.”
“설마 이 쇳덩어리들을 입으라는 겁니까……?”
“빨리!”
“피곤해 죽겠는데 갑자기 이게 뭡니까!”
“꾸물거리면 또 맞는다?”
영감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래저래 사는 삶이니 말이다.
지드는 마지못해 철 조각 옷을 집어 들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지고 말았다.
“욱!”
너무 무거웠다.
“설마, 이걸 몸에 걸치라는 얘기는 아니겠죠?”
“그놈 말 더럽게 많네. 입으라면 입을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것을 입고 다닙니까!”
태양이 중천이 떠오를 무렵.
끙끙!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싶었더니, 바로 지드가 마당을 가로질러 장작들을 나르며 내는 신음이었다.
한발 한발 겨우 옮길 때마다 지드는 오만 가지 인상을 다 찡그리며 뭐라 투덜거렸다.
끙! 끄응!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는 지드, 철편 갑옷의 무게 때문인지 오늘 반나절 동안 넘어지기를 수백 번은 넘는 것 같았다.
철퍼덕!
더군다나 이런 차림으로 장작을 패고 물지게를 길어 오라니! 정말이지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어찌 사람을 이리도 고생시킨단 말인가.
그는 너무 지친 나머지 마당 한복판에 누워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누운 채 하늘을 보니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였다.
몸이 너무 고되었는지 눈물이 고이려고 했다.
대체 무슨 놈의 팔자가 이리도 꼬였기에 이제는 이리도 힘든 고생을 한단 말인가.
이건 하류 삶도 아니다. 차라리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드는 철편 갑옷의 옆구리 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툭, 툭.
노인은 만일 이걸 벗을 시엔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몇 번이나 했지만 지드는 이미 반항하기로 굳은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노인이 언제 왔는지 모르지만 지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겨.”
지드는 평소 때와는 다르게 매우 진지해 있었고 그대로 누운 채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보면 모릅니까?”
“뭘?”
“앞으로 이따위 옷 입지 않을 겁니다.”
“어쭈?”
“어쭈 뭐요! 누가 겁날 줄 알고?”
“너 미친겨?”
“그래, 미쳤수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쇼!”
“뭐라!”
“어차피 막 가는 인생! 그동안 노인이 심심해 보여서 이 어린놈이 장단이라도 맞추는 척했지만 이제는 그런 짓들도 질립니다! 이십 대 청춘이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검술을 수련해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요! 난 태어날 때부터 꼬인 인생이었고 어차피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노인이 이번엔 다소 인상을 굳히며 타이르듯 말했다.
“웬만하면 좋은 말로 할 때 일어나지그래?”
별 반응이 없자 지드는 조금 더 강수를 두어 아예 허여멀건 배를 들어 내보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배를 째쇼!”
“뭐라!”
“검술에 한 맺힌 불쌍한 내 인생! 마지막에는 검으로 죽고 싶었거든요.”
지드는 괴로워하는 척하다가 곁눈질로 노인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
놀랍게도 노인의 표정이 숙연해져 있었다.
“듣고 보니 젊은 나이에 고생을 많이 했었군.”
“그런 셈이죠.”
“그렇다고 아까운 목숨을 버릴 것까지야 있나.”
영감의 입에서 동정어린 말이 나오자 지드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생기는 것 같았다.
“사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도 같네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
“스승님도 제가 이러길 원치 않는 것 같은데, 죽기로 한 거 다시 생각해 볼 용의는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볼 용의가 있다라. 허허, 그거 반가운 소리군.”
지드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지드는 가슴에 품고 있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간다면 인생을 다시 멋지게 살 수 있을 텐데요.”
그 말에 노인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만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지드의 심장은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노인이 할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내가 도와주지.”
지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진짜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지드의 안색이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해? 죽고 싶다는 거 도와준다는데.”
“헉!”
노인이 가슴 안쪽으로부터 시퍼런 단검을 꺼내 들었을 때, 지드는 숨이 턱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게 뭡니까!”
“보면 몰라? 단검이지.”
“그걸로 뭘 어떻게 하려고요!”
“아까 배 째라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마는 지드, 단도의 날이 유난히 시퍼렇게 보였다.
“…….”
“보아하니 네 녀석은 인내심이 없고 조금만 힘들면 포기를 잘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나가 봐야 또다시 하류 인생으로 살 테고, 그때가 되면 또 죽고 싶다고 징징거릴 것이 뻔하단 말이여.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그냥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
노인이 다가오자 지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악마가 따로 없었다. 노인의 사악한 표정을 보니 진짜 단검으로 배를 가르고도 충분했다. 지드는 철편 갑옷의 고리를 잽싸게 채웠다.
찰칵, 찰칵!
그리고 냅다 일어나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감싸며 실실 쪼갰다.
“하하. 정말 순진하시네! 농담 한번 해 본 건데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다니요.”
“지금 뭐 하냐?”
“인상 좀 펴시죠. 거참, 무섭게시리…… 헤헤!”
지드는 바닥에 떨어졌던 장작들을 주워서 헐레벌떡 뒤뜰로 향했다. 그 모습은 뒤뚱뒤뚱한 것이 마치 치질 걸린 오리의 걸음을 보는 것 같았다.
철편 갑옷 때문에 거동이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뒤에서 단검을 들고 서 있는 영감탱이가 더욱 두려웠으리라.
그때,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부터 내공심법을 시작할 테니까 점심 먹고 신전으로 들어오너라.”
지드가 가다 멈추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건 또 뭐죠?”
“그걸 익히기 시작한다면 철편 갑옷이 한결 가볍게 느껴질 거다.”
***
“……다시 말하지만 내공이란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부터 시작하느니라.”
노인의 말에 지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숨쉬기를 말하는 거군요.”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숨쉬기는 아니다.”
“그럼 뭡니까?”
노인은 애써 차분한 심정으로 다시 설명했다.
“뭐, 호흡하는 방법이긴 한데, 고도로 숙련시킨다고 말할 수 있지. 그걸 토납(吐納)술이라 한다. 단전호흡 역시 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
“…….”
지드는 벌써 한 시간째 영감이 뭔 말을 떠드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인 역시 한어(漢語)의 개념을 이 세계 언어로 풀이해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노인은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그런 줄 알아. 어차피 내가 하란 대로 하면 되니까.”
“숨쉬기 말이죠?”
순간 노인의 음성이 높아졌다.
“숨쉬기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겨! 일단 나처럼 해 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 그런 그의 모습에 지드가 요상한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이상한 폼으로 앉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하라면 해야 하는 신세인지라.
지드는 바닥에 철퍼덕 앉고는 노인의 자세를 따라하려 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하는 가부좌가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자꾸 옆으로 자빠지니 말이다.
“에구!”
“처음엔 어려울겨. 하지만 자꾸 습관을 들이면 괜찮아질 거여. 이것도 중요한 수련법 중 하나지.”
“…….”
참으로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 영감탱이다. 그냥 철퍼덕 앉아 있는 것이 도대체 뭔 놈의 수련법이란 말인가!
“눈을 감고 정신은 오로지 호흡법에만 집중하는겨. 숨을 천천히 들여 마시고 최대한 가늘게 뱉어 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드는 하는 수 없이 말대로 입을 헤 벌린 채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
제법 정적이 오래 흘렀다. 지드는 대충 가부좌 자세 비슷하게 앉은 채 눈을 감고 스승에게 지시받은 대로 토납(吐納)의 기본 단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가 저려 왔고 몸이 찌뿌듯해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점심 식사 후의 식곤증 때문에 눈이 절로 감기면서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쿵!
결국 앉은 자세 그대로 고꾸라지고 마는 지드, 놀랍게도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잠이 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지드는 문득 불편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는지 눈을 뜨고 말았다.
어찌나 피곤했으면 바닥에 침까지 질질 흘렸던가. 지드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는 영감이 처음 그 자세로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와! 세상에, 앉아서 자는 사람도 다 있네?”
지드가 노인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얼굴을 빤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인간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바닥에 철퍼덕 앉은 자세는 너무나 이채로웠기에 지드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짜 잠이 들었을까? 혹시 실눈을 뜨고 있을지도…….”
지드가 손을 들어 노인의 얼굴 앞에서 마구 흔들어 보았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지드는 이번엔 노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니 숨소리를 가늘게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잠에 깊게 든 걸까?
지드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씩 웃고 말았다.
“역시…… 그럼 그렇지. 후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빡!
“어억!”
노인의 이마가 지드의 마빡을 들이박아 버렸던 것이다. 두 손으로 대갈통을 감싸 쥔 채 뒤로 나자빠져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지드.
“아아! 아악!”
노인은 기가 찬 듯 지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별의별 잡놈이 다 있다지만 대체 저 자식은 어떤 족속이여!”
***
휘잉!
어느덧 계절이 흘러 그토록 무더웠던 여름이 가 버렸다.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지드는 철편 갑옷이 휘날릴 정도로 언덕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던 쇳덩이들이 이제는 한층 가벼워졌다.
정말로 지난 한 달간 내공심법인지 숨쉬기인지를 매일 쉬지 않고 꾸준히 했던 것 때문일까?
헉! 헉!
아직은 숨이 차오르고 힘도 들었지만 확실히 한 달 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졌다.
지드는 언덕에 아무렇게나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보니 울컥 속상한 마음이 올라왔다.
며칠 전부터 노인은 자신의 혈도인지 뭔지를 열어 준다면서 온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푹푹 찔러 넣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냥 몸으로 때우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사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상한 약초를 끓여 달인 검은 약물을 삼키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그렇게 역한 냄새와 쓴맛은 처음이었다. 영감 말로는 무림에서조차 구하기 힘든 영약이라는데 지드 입장에서는 요상한 물약을 제조해서 자신을 실험 대상삼아 억지로 먹인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드, 녀석에겐 여전히 자신이 영감한테 속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머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이대로 그 약들을 주는 대로 강아지처럼 받아먹다가는 큰일 날 수도…….’
그렇다.
철편 갑옷을 입혀서 체력을 키워 준다는 것은 그냥 구실일 뿐, 영감의 의도는 다른 데 있을 수 있다.
분명 스승과 제자의 서약을 할 때 그 자신의 입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검사로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넉 달이 지나도록 검술은커녕 검 한번 쥐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대로 쇳덩어리나 철렁거리며 삶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져 갈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지드는 자리에서 냅다 일어났다.
“왜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지 직접 물어봐야겠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지드, 나이가 이십 대 중반이건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철없는 아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신전의 앞뜰.
“그래서 그거 따지러 온 거여? 아직 이르다니까!”
“저…… 검술의 기본 정도라도…….”
“네놈의 내공이 밑바닥 수준이라서 검법(劍法)에 입문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니라.”
“그냥 가르쳐 줘요!”
“안 돼.”
“왜요!”
“허! 그놈 참, 스승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이건 뭐, 들은 척도 안 한다. 지드는 냅다 바닥에 확 누워 버렸다.
털썩!
“안 가르쳐 주면 오늘부터 이대로 누워 꼼짝하지 않을 겁니다!”
노인이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어째…… 하는 짓이 꼭 그따위냐?”
“배운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노인의 인상이 굳어졌다. 결국 그가 누워서 진상을 부리는 지드에게 가까이 가서는 호통을 치듯 말했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정녕 네놈이 간덩이가 부은 게군.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노인이 냅다 발길질을 하려 하자,
바로 그 순간! 지드가 기다렸다는 듯 노인의 왼쪽 다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홱!
“뭐야, 이거 안 놔!”
“제발요!”
지드는 노인의 한쪽 발을 두 손으로 꽉 쥐어 아예 가슴에 파묻고는 막무가내식으로 졸랐다. 노인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절대 놓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밑바닥 삶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최후의 방법이었다.
뭐라도 붙잡고 죽자 살자 매달리기!
“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못 놓습니다!”
참으로 엉뚱한 녀석이랄까. 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녀석으로부터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뭐란 말인지.
절실하게 배움을 얻고자 매달리는 제자의 끈질김에는 그로서도 박하게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 녀석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자주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당한 안을 제시함으로써 찰거머리 같은 녀석을 떼어 놓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알았으니까 놔라.”
“정말요?”
“그려.”
“나중에 딴말하지 않는 거죠?”
지드는 여전히 못미더웠는지 한 손으로 다리를 꽉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노인이 의아스런 얼굴을 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여.”
“약속!”
“…….”
그 이튿날 오전, 신전 근처 숲속 공터.
홱홱! 홱홱!
지드는 아까부터 노인이 이상한 동작들을 펼치는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술에 앞서 반드시 익혀야 할 호신술이라나?
노인은 이 동작들을 완벽하게 배운다면 그때 검술을 시작하겠노라고 확실히 약속했다. 이에 지드는 노인이 이번에도 연막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찝찝해 하였지만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노인의 호신술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그다지 신빙성이 가지 않았으니 내심 못미더운 표정을 할 수밖에.
‘대체 뭐지……?’
잠시 후 노인이 동작을 끝내고는 지드에게 다가왔다.
“보았느냐.”
“네.”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은 겨.”
“그냥요.”
“이건 소림오권(小林五拳)이니라. 호랑이, 표범, 뱀, 원숭이, 학의 움직임을 따라 이루어진 권법이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지드.
“꼭 배워야 합니까.”
“뭐라?”
“검술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하시죠?”
“…….”
노인이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 유명한 소림오권이 아닌가. 무림 세계를 전혀 모르는 지드에게 있어 소림오권은 무공에 입문하기 위한 적절한 초반 절차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받아들이다니.
더구나 이런 깊은 뜻조차 모르고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 대 패 주고 싶었다. 허나 노인은 애써 끓어오르는 심정을 가다듬고 진중한 음성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방금 전 동작들을 제대로 깊이 익힌다면 검을 든 자들조차 당하지 못하는겨.”
“물론 그러시겠지요.”
노인은 녀석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터 중앙으로 나섰다.
“이리 나와서 따라해 봐.”
“뭐, 하라면 해야죠.”
지드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공터 중앙으로 나갔고 노인이 펼치는 동작들을 건성으로 따라했다.
잠시 후 노인이 두 팔을 길게 늘어트리고 이상한 걸음걸이의 원숭이 흉내를 냈을 때에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았다.
“후후! 푸하하하!”
“…….”
노인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사실 이 세계의 관점으로 본다면 녀석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권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하지만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가 밉살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
노인이 인상을 팍 쓰며 호통을 쳤다.
“입 다물지 못할 겨!”
목소리에 제법 중후한 공력(公力)이 실렸던가. 깔깔거리던 지드가 움찔 놀라 순식간에 안색이 굳어졌으니,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지드의 표정은 마치 겁에 잔뜩 질린 토끼와도 같았다.
“…….”
결국 노인은 이쯤에서 수련의 강도를 대폭 높이기로 했다.
무림에서의 스승의 위치는 하늘이 아니던가.
이 세계의 문화의 어떻든 간에 지드같이 말 많고 잔머리만 잔뜩 있는 녀석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팍팍 돌리는 것이 약이다.
올 들어 세 번째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드는 꽁꽁 얼어붙은 빙판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손을 들어 하얀 눈을 잡으려 했다.
수척한 몰골에 비쩍 마른 팔뚝과 손마디는 그가 지난 두 달 동안 얼마나 혹독하게 수련 당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하고픈 심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사치일 정도로 스승은 자신을 마구 내둘렀다.
새벽에 일어나 철편 갑옷부터 착용하기.
가부좌 자세로 단전호흡을 통한 내공심법 익히기.
아침 식사 대신 약초 달인 물 먹기.
무거운 도끼로 장작 패기.
계곡 아래 강가에서 물 길어 오기.
점심 식사.
신전 뒤 높은 바위정상에 열 번 왔다 갔다 하기.
소림오권 수련하기.
마당에 기둥 세워 놓고 권법 연습하기.
저녁 식사.
장법(章法) 배우기.
오전에 이은 2차 내공심법에 집중하기.
보법(步法) 수련하기.
스승으로부터 직접 한어(漢語, 무림 언어) 배우기.
장작 지피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냉수마찰하기.
이 중에서 장법 배우기는 최근에 포함된 항목이었고, 한어를 배우는 것은 그래야만 구결심법을 암기하고 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억지로 배우는 것이었다.
하루 일과가 이렇다 보니 지드가 자는 시간은 불과 네 시간 정도랄까.
그 외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사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빡빡한 수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벌써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드는 약초 물 복용과 꾸준한 단전호흡, 그리고 가끔 스승이 혈도를 짚어 주며 진신을 불어넣어 준 덕에 수련을 하면 할수록 체력이 향상됨을 느낄 수 있었다.
눈발이 벌써 발목까지 덮기 시작했다.
지드는 냅다 물이 가득 담긴 물지게를 들쳐 메고는 계곡 위 신전으로 향했다.
타다닥!
경쾌한 발걸음이었다.
철편 갑옷에 제법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서도 일반 사람의 뜀박질보다도 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산악 지형의 오르막길을 말이다. 지드는 반년 전 허약했던 자신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노인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이젠 숨조차 차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단번에 산 정상까지도 올라갈 기세였다.
잠시 후, 신전 안.
노인은 지드가 내려놓은 물통 두 개를 살펴보더니만 눈썹이 다소 치켜 올라갔다. 이유인즉 각각 통 속에 물이 반 정도만 차 있었던 것이다.
결국 노인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을 반만 떠 온 겨?”
“아뇨, 가득 채웠는데 급하게 올라오다가 흘렸습니다.”
“한심한 녀석! 보법을 배운 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하는 거냐.”
“말씀드렸듯이 뛰어 올라오느라고…….”
“시끄러, 이놈아. 무공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유연함이거늘! 신체 균형 하나 잡지 못하는 주제에 뭘 배우겠다고 안달이냐.”
순간 지드가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열심히 수련한 이유는 오로지 검법을 배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이 검법을 시작하기로 한 첫날이건만!
스승은 이번에도 트집을 잡아서 시일을 연기하려는 연막작전을 펼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설마 이번에도 검법 수련을 뒤로 물리려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어.”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분명 내일부터 검법 하기로 했잖아요!”
“잔말 말어! 내일부터는 다른 수련을 시작할게다.”
“다른 수련이라니요?”
“내일 가 보면 알아.”
그리고 다시 아침이 밝았는데, 지드는 모처럼만에 잠을 충분히 잤는지 기지개를 활짝 펴고 상쾌하게 일어났다.
오늘은 새로운 수련이 시작되는 날이기에 노인이 이른 새벽부터 깨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어떤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내심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긋지긋한 노인의 음성이 뒤뜰 창고로부터 들려왔다.
“이리 와 봐!”
“당장 갑죠.”
하지만 그 당당한 기세도 잠시, 지드는 뒤뜰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통나무 기둥 수십 개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것이었다.
“저건 뭐죠?”
“앞으로 당분간은 저 위에서 수련해야 할 것이다.”
“……저 위라니요?”
“각 통나무 위에는 네가 겨우 발을 디고 서 있을 만큼의 공간이 있다. 좌우나 앞뒤로 움직일 시 각각의 통나무 단면을 밟고 균형을 잡아야지만 지상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다.”
그제야 지드는 스승의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동시에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쉬워 보여서였을까?
저 정도라면 지금 당장 올라가서 마구 뛰어다녀도 될 법 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던가.
스승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기둥 위 수련에 임할 시에는 반드시 철편 갑옷을 착용하고 물지게에 물을 가득 채운 후 올라가야만 한다.”
순간 지드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30㎏가 넘는 철편 갑옷이야 이제는 숙달이 되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 친다 해도, 물이 가득 담긴 물지게를 지고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그건 좀.”
애석한 일이지만 스승의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다시피 기둥 밑바닥에는 날카로운 자갈들이 가득 채워져 있으니 떨어지면 꽤 아플 거다. 수련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여기서 돌멩이를 던지고 너는 피한다. 그게 끝이다.”
지드가 기겁을 하며 반문했다.
“도, 돌멩이라니요!”
노인은 그의 말을 일축했고 갑자기 허리를 숙여 미리 준비해 온 돌무더기로부터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당장 물지게를 지고 저 위로 올라가라.”
“스승님! 이,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 코앞에서 맞을 겨, 아니면 저 위로 올라갈 겨?”
“…….”
홱! 탁!
“억!”
결국 돌멩이를 두어 번조차 피하지 못하고 물지게와 함께 추락하는 지드. 바닥에 깔린 무식하게 크고 날카로운 자갈 덕분에 그의 고통스런 비명이 메아리치듯 인근 계곡을 울렸다.
“끄으으으으으으!”
앞으로 기나긴 겨울이 남았건만 봄이 찾아올 때까지 지드의 비명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다만 그 횟수가 처음보다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니,
그래도 상당한 진전이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