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종말의 전쟁
종말의 전쟁
몰딘 제국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검게 탄 하늘 아래 횃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왕성 앞 대로로 나와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으며 모르딘의 상징이 되었던 검은 옷 금지령이 사라져 너나 할 것 없이 흑색 일통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금지령이 사라졌다는 것은 황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역시나 황제 이얀 대제의 죽음 때문이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던 이얀 대제였기에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그의 죽음을 접하자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모두 거리로 나와 눈물을 흘렸고, 왕성 앞엔 타오르는 횃불을 든 사람들로 인해 불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왕성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싸늘했다.
냉랭한 기운을 풍기며 왕성을 지키는 용맹한 왕성의 이름 높은 기사들은 오열했고, 황제를 보호하는 로얄 나이트들인 황실 근위대의 기사들도 투구 속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대륙을 통일하고 제국을 세운 황제답게 금으로 만든 화려하고도 거대한 관 안에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누워 있었다.
죽은 황제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의 입술이 그리고 있는 호선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커다란 관 속에 누운 황제가 높은 왕성의 계단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그의 가족들과 황제의 친척인 황족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는 것이 황태자인 로얀이었고, 그 뒤를 프로미스와 두 공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섰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로 보아 모두들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그 뒤로 다른 나라에 비해 그 수가 확연히 차이나는 황족들이 서 있었다.
황족들의 뒤로는 궁정 마법사인 라셀과 황실 근위병들이 섰고, 관직 순으로 모든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 속에서도 의아해 하며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황제의 관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내였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엔 강한 의문과 함께 불쾌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검은 옷에 갈색 망토를 두른 장신의 남자는 두 개의 검을 차고 있었다. 바로 로얀이었다.
그는 친구 이얀이 죽은 직후 지금까지 그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었다.
이얀이 숨을 거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침이 되어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시종들에 의해서 알려졌다.
흑안의 검사를 만나기 위해 문밖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이들이 모두 기겁을 했고, 황제의 죽음은 모르딘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문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서거소식은 배로 빨리 퍼지게 된 것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왕성은 소란스러워졌고 흑안의 검사를 보기 위해 왔던 그들은 자신이 온 이유를 잊어버리고, 황제의 죽음만을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왕성은 한동안 떠들썩해졌고 황제의 장례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윽.
로얀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얀이 갔을 하늘 저편을 보기 위함이었다.
친구가 간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그의 머릿속엔 그동안 이얀과 함께 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로얀은 자신의 두 검을 쓰다듬곤 이얀이 잠든 관을 지나 그의 관 앞에 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이들에게 말하겠다. 나 다크로얀은 친구 이얀의 마지막 유언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전한다.”
로얀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인 채 흐느끼는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말했다.
그의 힘이 담긴 목소리는 왕성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었고, 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들어 올려졌다.
그들의 고개가 모두 일제히 번쩍 들어올려진 것이었다.
웅성웅성.
그의 그 말이 가져 온 파장은 컸다. 그의 말속에 담긴 뜻 중에 자신이 흑안의 검사라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크로얀은 흑안의 검사를 말함이 아닌가.
불경하게도 황제의 옆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것도 모자라 그의 앞에 선 뒤 이 자리에서 갑자기 그런 허언을 하자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외곽 병비대의 경비대장인 알트는 로얀을 알아보곤 더욱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트는 로얀이 황제의 관 옆에 서 있을 때부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헌데 그가 흑안의 검사 다크로얀이라 스스로 말하자 입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로얀은 왕성 앞 대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촹.
웅웅웅!
그렇게 손을 움직인 로얀은 말없이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를 뽑았다. 그리곤 마나 소드를 펼쳤다. 백광의 오러가 두 검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오러 중에서 이게 가장 높은 것이기에 로얀은 마나 소드를 펼친 것이었다.
고오오오-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백광의 오러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었고, 두 개의 검으로 백광의 오러를 펼치는 사람은 대륙에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로얀이 검을 뽑아 백광의 오러를 생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너무도 젊은 모습 때문이었다.
이제 73세가 되었을 로얀의 모습이 약관의 청년으로 보이니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눈치 챈 궁정 마법사인 라셀은 옆에 있는 황실 근위대 대장의 팔을 툭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의도 속엔 여기 모인 이들 중 흑심을 품은 자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라셀이 계단 위로 올라갔고 그 뒤를 따라 황실 근위대 대장이 올랐다.
두 사람은 뒤돌아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분은 제국의 두 영웅 중 한 분이신 흑안의 검사가 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처척! 척!
가장 먼저 두 사람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일제히 로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간으로서 검의 극에 달한 이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는 표현이었다.
원래는 허리를 숙여야 했지만 황제가 있는 자리라 고개만을 숙인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드래곤을 이긴 영웅이 눈앞에 있는 것이기에 기사들은 감격해 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모두 예의를 표했고 궁정 마법사와 근위대 대장이 증언했다. 황제의 한 팔이었던 지혜로운 마법사와 황제가 가장 믿는다 할 수 있는 최 측근인 황실 근위대장이 증언한 것이다.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승하한 황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이황자 프로미스는 왠지 무척이나 당황한 듯했다. 또한 그의 곁에 있던 여러 대신들의 몸이 떨렸다.
그들의 반응은 로얀이 스스로 다크로얀이라 밝힌 뒤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들이 계획했던 그 무언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전 대륙의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흑안의 검사가 나타난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전혀 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73세의 나이에 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함이 아닌가.
이황자를 비롯한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렇게 포기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로얀의 말대로 황태자가 그대로 황위를 물려받을 것이고 그에게 반기를 들려 했던 이들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모두 참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들 중 이황자와 그를 따르던 여러 신하들은 더욱 그러했고,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것을 부정하려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지른 이는 이황자 프로미스였다.
그는 지금 극도의 공포로 인해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여기서 이대로 물러난다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50년, 50년이다! 50년이 흘렀는데 어떻게 흑안의 검사가 고작 20대 초반의 외모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한 귀족이 이황자의 말에 동조하며 외쳤고, 이황자파의 모든 귀족들이 앞으로 나서며 외치기 시작했다.
이황자파의 귀족들을 색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잘 숨는다고 해도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의 권위와 모든 것을 내놓는다면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에는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권력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들은 한배를 탄 몸인 것이다.
“무엄하다!”
“이분은 확실히 흑안의 검사이시네!”
궁정마법사 라셀이 다급히 나서며 그런 귀족들을 향해 외쳤고 이황자파의 귀족들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궁정마법사의 보증은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아니, 그렇게 취급해야만 했다.
“라셀! 당신은 황태자파에 속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대의 발언은 납득이 될 수 없다!”
이황자 프로미스가 황태자파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그 스스로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고 상황이 급박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그 말에 이황자파의 귀족들이 동조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럼 저의 말도 못 믿으시겠습니까?”
그때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말을 건넨 이는 황실 근위대 대장이었다.
그는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보좌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로 오직 황제 이얀에게만 충성을 바친 강직한 기사로 유명한 이였다.
그렇게 황실 근위대 대장의 발언으로 상황이 싱겁게 종료스려드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익! 쳐라! 지금 이건 음모다!”
그건 절규에 찬 악에 바친 외침이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황자파를 이끌다시피 했던 제국에 있는 두 명의 공작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로 서 있는 사병들을 향해 외쳤고,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황자파의 다른 귀족들도 덩달아 자신들이 데려온 사병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
그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감히 내 명령.......”
스거거걱!
목이 터져라 외치던 공작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투투툭!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기사들을 선동하던 공작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아니, 갈기갈기 찢긴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반듯하게,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며 하얀 계단을 적셨고, 계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갔다. 그 끔찍한 모습에 사람들은 일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로얀은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다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자 아버지의 시신 옆에 있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공작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그저 뭔가가 베이는 섬뜩한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 묘기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이곳에 단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황태자는 로얀을 바라본 것이었다.
황태자의 그런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도 어느새 흑안의 검사로 추측되는 로얀에게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로얀은 나직이 말했다. 천천히 흘러나온 목소리가 모르딘 전체로 퍼지는 듯했다.
“내 친구가 자는데 시끄럽게 지저귀지 마라.”
그의 그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다시 한 번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거거걱!
푸화화확!
그리고 또다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투투툭!
역시나 떨어져 내리는 사람의 육신이 계단을 굴렀다.
이황자의 양옆에 있던 귀족 두 사람이 동시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소리만을 들었을 뿐 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덜덜.
바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이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자 중간에 홀로 남은 이황자 프로미스는 몰려오는 두려움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털썩.
그의 근처에 있던 첫 번째 공주인 미시아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고, 프라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스윽.
꿀꺽.
로얀의 눈동자가 천천히 사람들을 훑었고 이황자 프로미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접한 프로미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그때 로얀의 시야를 가리며 뛰어든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황태자 로얀이었다.
그는 로얀이 귀족들을 죽이고 자신의 동생인 프로미스까지 죽이려 하자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막아선 것이었다.
스윽.
황태자를 잠시 바라보던 로얀은 그의 진중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만하겠다는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프로미스가 로얀을 말렸고 상황이 종료되는 듯하자 이황자파의 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얀이 귀족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버렸기에 그의 신분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그 귀족들은 처참하게 갈라져 죽어 버렸었다.
로얀은 이로써 흑안의 검사라는 것이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이 된 것이었다.
로얀에게 대항하는 것은 드래곤에게 대항한다는 소리와 같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력으로 증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고 흠모하는 대륙의 모든 기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둘 모두를 충족하고 있는 상대다.
스릉.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로얀은 검을 다시 검집에 꼽고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황태자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얀의 유언에 따라 다음 대 황제는 예정된 대로 황태자 로얀이다.”
“와아아아-”
갑작스런 발표였지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눈앞에 펼쳐진 전설이 될 이야기에 환호했다.
절세의 영웅 앞에서 황제의 보위를 이어 받은 황제는 분명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렇게 로얀은 갑작스런 발표를 하곤 뒤돌아 편안히 잠든 이얀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굳이 이 자리에서 그런 발표를 한 것입니까?”
그런 로얀을 향해 이제 황제가 된 황태자가 다가와 말했다. 이얀의 장례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발표를 한 로얀이 이 순간 원망스러웠다.
“얀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떠나는 것보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떠나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의 대답에 황제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뿌리며 오랫동안 거리를 지켰다.
그렇게 제국을 통일했던 이얀 대제는 여느 왕과는 달리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떠나갔다.
이 자리의 그 모든 것이 역사서에 쓰여질 것이고 음유시인들의 노래 속에 담길 것이다.
* * *
“정말 이렇게 떠나시는 겁니까?”
황태자에서 황제가 된 로얀은 이얀의 방이었던 곳에서 떠나려는 흑안의 검사 로얀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로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가 말하는 일이란 정령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어둠의 정령 외의 다른 정령들이 중간계에서 사라졌다면 이는 필시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해야 할 일?”
로얀은 황제의 반문에 답하지 않은 채 말을 계속이었다.
“이얀이 사용했던 단도술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정령이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니 절대 이얀의 단도술을 버리지 마라.”
“정령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아버지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단도술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스윽.
로얀은 등을 돌리며 이제는 황제가 된 이를 바라보았다.
“넌, 어떤 나라를 만들 거지?”
“그저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나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황제의 대답을 들으며 로얀은 몸을 돌렸다. 그의 눈앞엔 열어둔 창문이 보였다. 그곳을 통해 나가려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러한 너의 대답이 네가 황제가 된 이유다.”
“.......”
로얀의 말에 황제는 웃음을 지었고 로얀은 천천히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로~얀~!”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느다란 것으로 보아 여성인 것 같았다.
타탁!
그리고 로얀이 나가려 했던 창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이는 두 명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뾰족한 귀의 아름다운 엘프와 나풀거리는 하얀 드레스에 분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흰색이 유난히도 어울리는 귀여운 소녀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밖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검을 손에 쥔 그들은 잠시 엘프와 소녀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굳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는 그들을 경계했다.
로얀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이들을 보며 말했다.
“나의 일행이다. 여기서 그만 헤어지지.”
방으로 들어온 이가 인간이 아니었고, 이들과 하는 대화를 황제나 다른 인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황제는 로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깨닫고는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그 반응에 기사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들도 로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 나라의 황제로서 다른 이에게 허리를 숙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에게 만큼은 허리를 숙이겠습니다. 편안히 가시길 바랍니다.”
황제는 그 말과 함께 기사들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끼이이익.
쿵.
황제와 기사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로얀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레아.”
“이익! 도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레아라 불린 하얀 드레스의 소녀가 로얀의 앞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50년 전 빛의 숲에서 헤어졌던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였다.
그녀는 50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얀은 레아의 격한 반응을 뒤로하고 말했다.
“그쪽은 그때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군.”
로얀의 눈동자가 이번엔 레아의 뒤에 서 있는 엘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오래전 로얀이 엘프의 마을에서 한번 붙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프 타니아였다.
로얀의 말에 타니아는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님.”
그녀의 말투가 50년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가장 큰 변화가 로얀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타니아가 레아를 통해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니아의 말투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로얀은 레아를 바라보았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었나?”
로얀의 물음에 레아는 발꿈치를 들며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이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야!”
너무도 갑작스런 이야기에 로얀은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지?”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시작하려고 해.”
“그놈들이 전쟁을 일으키는데 왜 세상이 망한다는 거지?”
로얀은 천족과 마족의 전쟁과 세상이 망한다는 상관관계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천족과 마족은 항상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리는 사이였기에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적대시 한다고 해도 세상이 망할 정도로 전쟁을 벌이진 않았다. 아니, 그렇게 전쟁을 벌일 수가 없었다. 천족과 마족이 규모 이상의 전쟁을 벌이면 정령왕들이 나서 전쟁을 무산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족과 천족이 짜고 정령왕들을 모두 가둬 버렸어.”
로얀의 안색이 굳어졌다.
레아는 한숨을 쉬며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천족과 마족은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면 항상 나타나 훼방을 놓는 정령왕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본능대로 마음껏 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천족과 마족은 그렇게 정령왕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싸워 보기 위해 그들을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을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천계의 천신과 마계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루시퍼에 의해 이루어졌다.
천계에 속한 신이나 마계에 속한 신이라 할 수 있는 마왕들은 모두 천신과 루시퍼의 명에 따르기에 반대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단 네 명이서 천족과 마족 모두를 상대하는 정령왕들을 가두기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를 위해 천족과 마족은 각자 강한 힘이 깃든 무구를 찾는 것을 시작으로 네 명의 정령왕들을 가둘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족과 마족의 연합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천족과 마족은 네 명의 정령왕을 그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곳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준비해 두었던 마법진을 펼쳤다.
마족이 구한 무구와 천족이 구한 무구가 기둥이 되어 펼쳐진 마법진이었다.
만반의 준비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도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것으로 네 명의 정령왕을 가둘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펼쳐진 마법진.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들이 성공한 데에는 그들이 준비한 마법진과 무구의 힘보다는 다른 요인이 더 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정령왕을 가둔 천족과 마족은 부모님이 떠난 자리에 집안에 남은 아이들처럼 서로 즐거워하며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정령왕들이 갇히자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왕을 잃은 정령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기 시작했다. 지금 중간계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이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 후 레아는 로얀을 찾아 나섰다. 천족과 마족의 전쟁을 막기 위해선 정령왕의 힘이 필요했고, 그들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이는 정령왕인 로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겨울의 대륙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로얀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정령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로얀이 있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맥만큼은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아의 이야기는 로얀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으로 끝났다.
“엘라임이 그렇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다.”
“휴우. 아무튼 그 바보 같은 마족과 천족이 전쟁을 벌이면 한쪽은 사라지게 될 거야. 둘 중 하나만 사라져도 세상은 붕괴될 거라고.”
“세상이 붕괴된다는 것을 천족이나 마족은 모르는 건가?”
“알고 있겠지. 아마 전쟁 도중 스스로 중단하려 할 거야. 하지만 밀리는 쪽이 멈추길 바랄까?”
밀리고 있는 도중에 전쟁을 중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설사 완벽한 패배는 아닐지라도 상대에게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다 상관없다. 하지만 엘라임을.......”
으드득.
엘라임을 가둔 천족과 마족을 생각하며 로얀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레아와 타니아가 들어온 창문을 바라보았다.
급히 나가려는 로얀을 보며 레아는 그의 망토를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봐! 천족과 마족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드래곤 산맥에 있는 룬을 통해 가는 수밖에 없어.”
“알고 있다.”
“예? 그럼 어떻게 룬으로 갈 건데? 음, 로얀은 모르겠지만 드래곤들은 널 안 좋게 생각해.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드래곤 슬레이어 때문에 그들의 자존심에 심한 금이 갔기 때문에 아마 널 보면 공격하려고 할걸?”
레아는 당연 로얀이 망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 같이 그에 대해 의논하길 바랐다.
하지만 들려온 로얀의 음성은 너무도 확고했다.
“내 앞을 막으면 모두 죽이고 간다.”
“그, 그 아무리 너라도 불가능해!”
“오래전 룬을 통해 정면으로 드래곤들을 뚫고 정령계를 가고자 했었다. 그리고 나에겐 나를 따르는 정령들이 있다. 걱정 마라.”
로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레아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50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의 그였다. 그 때문에 레아는 굳어 버렸고 타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화앗!
로얀은 그렇게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빠져나온 로얀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휘날렸고 검은 하늘에 빛을 뿌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로얀의 뒤로 검은 날개를 휘날리는 다크니스들이 솟아올랐고, 하급부터 최상급까지의 모든 어둠의 정령들이 모두 로얀의 뒤를 쫓았다.
어둠의 정령들이 로얀과 함께 모르딘을 떠나자 황제의 방 안엔 레아와 타니아만이 남았다.
로얀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타니아가 레아를 향해 말했다.
“이걸로 우리가 할 일은 끝난 건가요?”
“아니.”
“네?”
“난 정령계로 가봐야겠어.”
레아는 타니아에게 그렇게 말하곤 급히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몸을 날린 레아는 투명한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 높이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