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잠시간의 재회와 영원한 이별
잠시간의 재회와 영원한 이별
로얀은 주위에 그림자가 없어도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몸을 숨겼다. 이렇게 몸을 숨기면 드래곤 정도의 생명체가 아닌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몸을 숨긴 로얀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성 주위를 맴돌았다.
‘녀석의 방이 어디였지?’
수십 년 전에 한번 얀의 방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워낙에 오래전의 일이었다. 더군가나 그 당시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는 카엔에게 당한 얀으로 인해 흥분한 상태라 방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로얀은 왕인 얀이 있을 그의 침실을 찾기 위해 창가를 기웃거리며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
로얀은 들려오는 소리에 아차 싶었다. 어둠의 정령들에게 시키면 단숨에 찾을 수 있는 것을 괜히 돌아다닌 것이었다.
얀에 대한 생각으로 어둠의 정령들에 대한 것을 잠시 잊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말을 한 것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허리를 숙인 채 말한 다크로드였다.
다크로드와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이 명을 내리지 않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다크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대기하고 있던 어둠의 정령들이 성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웅.
어둠의 정령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로얀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무리 아바마마께서 단도술을 쓰셨다고는 하지만 그런 걸 왜 익히는 거죠?”
바닥으로 내려선 로얀의 귓가로 누군가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로얀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내가 뭘 익히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흠칫.
로얀은 또 다른 이의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꽤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잔디가 푸르게 깔려 있었다.
네 명의 젊은 아이들과 기사로 보이는 무리들, 그리고 마법사와 시녀들로 보이는 이들이 몇몇 보였다. 모두 그 네 명의 아이들의 신하인 듯했다.
그들은 커다란 나무를 중심에 두고 서 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대치하고 있는 아이는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은 청년과 금발에 짧은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이었다.
금발의 청년은 커다란 나무의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두 아이는 여자 아이로 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와 금발의 소녀였다.
금발의 소녀가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오똑한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녀였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는 작은 키에 푸른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청년은 한 손에 작은 단검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는 힐끔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지니고 있는 긴 장검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거운 검을 매일 들고 다니는 게 난 싫거든.”
금발의 청년의 이름 로얀 폰 크라이센이었다. 지금은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몰딘 왕국의 영웅 흑안의 검사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린 그를 안고 이얀 대제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는 1황자이자 황태자이기도 했다.
황태자인 그에게 다른 동생들이 말을 막하는 것은 그가 오래전 그렇게 하라고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것이다.
황태자와 이렇게 맞설 수 있는 아이는 제국에서 단 세 명뿐이었다. 바로 그의 동생들이었다.
오래전 죽은 황후의 머리카락 색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인지 두 명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두 명이 1황자 프로미스 폰 크라이센과 두 번째 공주이자 막내인 프란시아 폰 크라이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 공주인 미시아 폰 크라이센이 있었다.
로얀은 그들의 바로 옆에 있었지만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이 없었다.
“후후후, 형님은 이제 그 자신하던 정령술도 쓰지 못하잖습니까?”
“.......”
싱글벙글거리던 황태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그런 반응에 프로미스는 승자의 표정이 되었다.
“바람의 정령 없이 펼치는 형님의 단도술은 약합니다!”
“.......”
피식.
“가자.”
마지막으로 못을 박듯 말한 프로미스는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기사들이 뒤따랐다.
이황자인 프로미스의 힘의 원천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단도술을 익힌 황제보다는 진정한 기사의 검을 익힌 황제를 원했다.
프로미스는 이제 겨우 들어선 것이지만 그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소년이었다.
“고집 그만 피우세요. 정령은 우리들을 버렸답니다. 그럼.”
미시아는 황태자를 향해 충고하듯 말하곤 프로미스를 따라 그곳을 벗어났다.
로얀은 미시아의 말속에서 나온 정령들에 대한 것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정령이 사람들을 버렸다? 무슨 소리지?’
동굴 속에만 있던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또한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이 있는 카야 산맥에 모여 있었기에 그들도 세상의 소식에는 어두웠다.
기사들과 많은 시녀들이 나가자 나무 주위에는 오랜 세월 제국을 지켜온 궁정마법사와 다섯 명의 마법사, 그리고 몇몇 기사들이 남았다.
모두 제국의 정통을 따르고 황제인 이얀 대제의 명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충신들이었다.
나뭇가지 위에 있던 황태자가 밑으로 뛰어 내렸다. 그의 옷은 평민들의 옷처럼 수수했고 여행복처럼 간편해 보였다.
“웃차.”
타탁.
“넌 왜 남았지?”
그리고 그는 남아 있는 동생 프라시아를 향해 물었고 그녀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전 오라버니가 좋아서요.”
“우하하. 그래. 내가 원래 프로미스보다 잘생겼잖아? 쿡쿡.”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프라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태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말대로 그가 프로미스보다 잘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조금 잘생긴 축에 들었지만 프로미스는 그야말로 미남의 표본이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황태자의 황족답지 않은 웃음소리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궁정 마법사 라셀 레이드만은 달랐다. 그는 황태자의 저런 활발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령이 사람을 버렸다는 게 무슨 소리지?”
그때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로얀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등장한 로얀으로 인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굳어 버렸다.
가장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황태자였다. 그는 프라시아의 손을 잡고 뒤로 끌어당기며 로얀을 경계했다.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촹!
황태자는 침착하게 물었고 기사들은 검을 뽑으며 로얀을 둘러쌌다.
느껴지는 마나로 보아 마법사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행동은 로얀에게 무의미했다.
그는 그들의 준비를 무시한 채 눈앞에 서 있는 황태자의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스윽.
“다크로얀.”
로얀의 대답에 황태자는 주춤거렸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 흑안의 검사의 팬인가?”
황태자답지 않은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그였다.
“내 말에 답하라. 정령이 사람들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소리지?”
그런 황태자에게 말하는 로얀 또한 특이했다. 제국의 황태자를 대하는 사람의 말치곤 너무도 불경했다.
“네 이놈!”
“라셀!”
로얀이 황태자인 그의 앞에서 불경한 태도로 나가자 궁정 대마법사인 라셀이 호통을 쳤지만 황태자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의 말보다 기사들의 검이 더 빨랐다.
“하압! 윽!”
재빠르게 다가가던 기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동상이 되어 버렸다. 푸른 잔디 위에서 검을 들고 달려가는 모습으로 멈춰져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멈추자 마법사들은 의아해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 몸이 안 움직입니다.”
기사들의 한결 같은 대답에 마법사들은 급히 그들에게로 다가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물론 그건 로얀의 짓이었다. 그가 그림자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묶은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라셀! 좀 조용히 해!”
황태자는 라셀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저지하곤 로얀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험, 저기 난 황태자인데.......”
아무리 자유분방한 성격의 그라도 대뜸 반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황태자의 신분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반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황태자의 그런 말에도 로얀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바라만 보았다.
“정령들은 1년 전부터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계약자의 부름에도 소환되지 않았죠. 그리고 이렇게 하늘이 흐린 것도 정령들이 사람들을 버렸기 때문이래요.”
급히 로얀에게 대답해 준 것은 의외로 황태자의 뒤에 있던 프라시아였다.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는 점점 상황이 악화 되어 가는 듯하자 급히 나서 로얀에게 답해 준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로얀은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설마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엘라임은?’
“이제 답이 되었겠군. 그럼 이제 정체를 밝혀 보실까.”
황태자는 자신의 단검을 꾹 쥐고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새겨져 있던 장난기 어린 빛이 사라져 있었다.
단검이 내뿜는 예기 때문인지 로얀은 생각을 접고 답해 주었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
“치, 친구?”
로얀의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일순 주위는 커다란 의문에 휩싸였다.
황성에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더구나 이렇게 정문이 아닌 다른 이들 몰래 들어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그들에게 로얀은 의문에 대한 답 대신 분노를 선사해 주었다.
“네 녀석의 아버지 말이다.”
로얀은 정확히 황태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태자의 모습이 얀을 그대로 닮아 있었고, 주위의 반응을 보고 로얀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얀의 말은 이들의 이성을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든 것은 바로 눈앞에 있던 황태자였다.
휘익.
그의 날카로운 단검이 로얀을 향해 날아왔지만 그의 공격은 로얀에 의해 너무도 쉽게 막혀버렸다.
“......!”
로얀의 손에 황태자의 단검이 붙잡혀 있었다.
섬뜩한 날을 잡고 있었지만 로얀의 손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스팟.
로얀의 움직임을 본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의 팔이 늘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그의 손가락이 황태자의 넓은 이마를 때렸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악!
“크으윽!”
황태자는 붉게 부어 오른 이마를 부여잡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쓰러질 듯한 그의 몸을 프라시아가 부축했다.
여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황태자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찢어질 듯 부릅떴다.
그는 로얀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셀은?!’
그러다 문득 같이 달려들었던 신하들이 생각난 황태자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기사들의 검은 마법사들의 목에 닿아 있었고 마법사들의 손에 맺힌 마법은 기사들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로 석상이 되어버린 듯한 그들의 등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로얀이 소울 바인드를 사용해 그들의 몸을 조종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윽.
황태자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로얀을 노려보며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빈틈을 노려 다시 한 번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얀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 황태자의 행동을 모두 보았지만 로얀은 신경 쓰지 않고 혹시나 자신이 잘못 짚었나 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그의 말에 어찌 된 일인지 황태자의 눈에 일던 분노가 눈 녹 듯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일어난 감정은 경악과 놀라움이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이렇듯 변화를 보인 것은 로얀의 음성에 묻어난 무언가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아버지의 이름을 저렇게 편안하고 따뜻하게 부른 이가 있었던가?
어머니조차도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이름은 고사하고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황제 앞에서 말을 꺼낼 때도 어렵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게다가 눈앞의 사내는 아버지의 애칭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말하기까지 했다.
섬뜩.
‘서, 설마?’
황태자는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로얀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으로 문득 스쳐지나 가는 것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자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흑색의 검과 백색의 상반된 검을 지니고 다니는 최강의 검사이자 이얀 대제의 하나뿐인 친구 다크로얀에 대한 것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것도 눈앞의 이가 그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이다.
‘말도 안 돼!’
황태자는 자신의 생각을 급히 지웠다. 너무도 바보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흑안의 검사는 자신의 부친의 친우였다. 지금의 나이는 73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도저히 말이 안 된다.
황태자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기에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며 로얀을 향해 당당히 외쳤다.
“나는 대제국 몰딘의 황태자인 로얀 폰 크라이센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의 외침에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한 몸부림도 담겨져 있었다.
황태자의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의 이름을 붙이다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황태자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로얀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얀의 아들이 맞군. 흐음, 그럼 그쪽은 녀석의 딸인가?”
황태자의 말속에 담긴 위엄과 위압감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로얀에겐 조금의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로얀의 눈동자가 이번엔 프라시아에게로 향했고 그의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궁정 대마법사인 라셀은 눈동자를 굴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를 듣던 그는 문득 오래전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자식 내가 죽을 때는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까 자네가 그 녀석이 오면 나에게 안내해 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흑안의 검사라 불리는 내 친구 녀석 말이야.”
“헛! 저, 정말이십니까!? 그분은 돌아가셨다고.......”
“쿡쿡, 누가 그러던가. 아마 쌩쌩한 것도 모자라 날아다닐 거다. 아, 그리고 무진장 젊은 모습일 테니 늙은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마. 윽, 녀석이 하나도 늙지 않은 걸 생각하니 배가 아프네. 하하하.”
병에 걸린 지 얼마 안 되어 황제가 그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그날 황제는 오랜만에 시원스럽게 웃었었다. 그랬기에 그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날 라셀은 황제의 옆에서 흑안의 검사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떨었었다.
‘서, 설마...진짜 다크로얀?’
말도 할 수 없는 라셀은 눈동자만 굴리며 로얀과 또 다른 로얀인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라셀이 어떤 생각을 하건 로얀은 프라시아를 향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녀석을 전혀 닮지 않았어.”
“.......”
로얀의 말에 프라시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였다.
그때 그의 뒤에 있던 황태자가 달려나오며 로얀의 어깨를 붙잡았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동생은 건들지 마라.”
스윽.
동생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과 강한 의지가 담긴 그의 말에 로얀은 비웃음이 아닌 묘한 미소를 띠우며 뒤돌아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네 녀석이 가장 그 녀석을 닮았군. 그러니까 황태자가 된 것이겠지? 나의 용건은 단 하나다. 얀의 방으로 안내해라.”
로얀의 말이 있은 뒤 황태자의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우선 라셀과 나의 기사들을 풀어 줘라.”
황태자의 이어진 요구에 로얀은 살짝 라셀과 기사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소울 바인드를 풀었다.
콰당!
화륵.
갑자기 소울 바인드가 풀리자 마법을 시전하던 마법사들은 급히 마나를 흘렸다. 자칫 잘못하면 기사들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황태자는 라셀과 기사들에게 걸려 있던 소울 바인드가 풀리자 급히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그의 손엔 작은 프라시아가 쥐어져 있었다. 혼자 로얀의 곁에 두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셀, 괜찮아?”
“예, 전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괜찮으신지요?”
“난 괜찮아. 그보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황태자는 로얀을 힐끔 쳐다보며 라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로얀은 그 말을 다 듣고 있었지만 황태자와 라셀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과 로얀 사이의 거리가 꽤 되기 때문이었다.
라셀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황태자에게 말했다.
“음,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황제폐하의 친우인 흑안의 검사일지도 모릅니다.”
“뭐? 하지만 그의 지금 나이는 70살이 넘지 않는가?!”
현명한 궁정마법사인 라셀이 자신이 생각했던 그 황당하고도 이상한 생각을 똑같이 한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너무도 진지하게 이 말을 꺼냈다는 사실이었다.
황태자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라셀은 오래전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서로 속삭이며 말하고 있던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 순간 로얀의 입가로 미소가 스쳐지나 갔다.
그런 와중에도 황태자와 라셀의 대화는 이어졌다.
“휴, 저도 믿기지 않을 뿐더러 확실치 않으니 황태자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라셀이 한참을 머뭇거리며 말한 것이었지만 즉시 들려온 황태자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다.
“좋아!”
라셀의 말에 황태자는 평소의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오랫동안 생각지 않았다.
그는 힘차게 답하곤 로얀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응?”
“아버지의 침소로 데려다 주겠다.”
“.......”
“하지만 그곳에서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황태자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뒷말을 흐렸지만 들려오는 로얀의 대답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럼 빨리 가지.”
“.......”
“이익!”
그런 로얀의 태도에 황태자는 말없이 한숨을 쉬며 앞장섰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기사들은 로얀의 태도에 분개했지만 다행히 라셀이 저지해 그에게 달려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태자가 프라시아를 옆에 두고 먼저 앞장섰고, 로얀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라셀과 기사들이 뒤따랐다. 물론 라셀의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도 모두 동반한 채 움직였다.
뚜벅. 뚜벅.
딱딱하고 반들거리는 왕성의 대리석으로 된 복도를 걷는 황태자와 일행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나 황태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시원스럽게 대답은 했지만 혹 자신이 판단을 잘못하여 로얀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지금에 와서 내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공주이자 황태자 로얀의 막내 동생인 프라시아는 겁에 질렸던 눈빛은 사라지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뒤따라오는 로얀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로얀은 역시나 아무런 표정 없이 정면을 응시한 채 걷기만 했다. 아무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긴장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죽음을 보러 가는 것이기에 아무리 그라도 마음에 동요가 올 수밖에 없었다.
촹!
여기저기 경비를 서고 있던 왕성의 기사들이 창을 가슴에 붙이며 황태자 일행에게 허리를 숙였다.
역시나 로얀의 검은 옷이 문제가 되어 그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지만 앞장서 걸어가던 황태자가 미리 나서며 잘 말해 주었기에 별다른 문제 없이 무사히 왕성을 거닐 수 있었다.
허나,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까지 황태자가 저지할 순 없었다.
끼이익.
몇 개의 문을 아무런 저지 없이 통과한 황태자 일행은 거대한 문 앞에 섰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문이었지만 주위의 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문이었다.
이얀 대제의 방문은 그가 고집하여 직접 명령하여 단 것이었다.
이 문은 흑안의 검사인 로얀이 엘라임과 왔을 때 달려 있던 문과 같은 것이었다. 혹, 그가 자신의 방을 찾지 못할까 봐 달아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이런 문을 만들어 단 이유를 물어 볼 때 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회피했기에 그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곳이다.”
촹!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까.”
황태자가 문 앞에서 멈추어 섰고 문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황실 근위대가 그를 향해 예의를 취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살짝 고개만 숙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실 근위대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두껍게 부풀어 있지는 않았다. 마법까지 걸려 있는 갑옷이기에 그들은 좁은 실내에서의 싸움에서도 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황태자의 방문에 황실 근위대장이 말을 걸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말을 걸던 그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로얀에게로 향해졌다.
로얀을 바라보는 황실 근위대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이번에도 로얀의 옷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때의 그 문이군.”
사방에서 날카롭게 쏘아보는 이들의 시선 속에서도 로얀은 사람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문을 감상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태자 전하, 저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평소 차분하던 황실 근위대장이 언성을 높이며 로얀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그게.......”
로얀을 어떻게 설명할지 망설이며 황태자는 주춤거렸다.
[잘 찾아 오셨군요. 이곳이 그분이 계신 곳입니다.]
그때 로얀에게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로얀의 명을 받고 이얀이 있는 곳을 찾으러 나갔던 다크로드의 음성이었다.
다크로드는 이얀의 침소를 찾는 즉시 달려가려 했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로얀의 기운을 느끼곤 침소의 문 주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던 로얀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들려온 음성에 화답하듯 로얀은 문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자신을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황실 근위대의 모습이 보였지만 로얀이 보고 있는 것은 벽이며 바닥이며, 모습을 감추고 있는 어둠의 정령들의 모습이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로얀과 다크로드 간에 짧은 대화가 오고 갔고 로얀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촹!
“멈춰!”
황실 근위대가 그의 앞을 막았고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황태자가 놀라 외쳤다.
스윽.
문을 바라보며 걸어가던 로얀이 고개를 돌려 부들부들 떨리는 황실 근위대 대장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날 뭐라고 설명할 거지?”
그의 눈동자는 근위대 대장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뒤에 서 있는 황태자에게 향해 있었다.
로얀의 말에 황태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황태자에게 말까지 놓는 로얀을 보며 황실 근위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려 했다.
[다크로드.]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행동으로 펼쳐지지 못했다.
스르륵.
로얀의 말이 흘러나온 직후 다크로드와 그와 마찬가지로 최상급 어둠의 정령인 다크니스들이 일제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황실 근위병들의 바로 앞에 한 명씩 모습을 나타내었고 즉시 그림자를 이용해 그들의 움직임을 묶어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어둠의 정령들이 한 명이 근위병 한 명의 몸을 묶어 버렸기에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뜬 황실 근위병들의 눈에서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비추어졌다.
강하기로 소문난 황실 근위대의 대장은 다크로드가 직접 그의 몸을 묶었기에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뚜벅. 뚜벅.
살아 있는 석상이 되어 버린 황실 근위병들을 지나 로얀은 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이 문을 여는 그 짧은 시간이 로얀에겐 너무도 길게만 느껴졌다.
뚜벅. 뚜벅.
로얀이 문을 열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자 멍하니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황태자와 그 일행이 급히 그의 뒤를 쫓아 황제의 침소로 들어갔다.
로얀의 난폭한(?) 행동에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황태자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로얀은 아주 천천히 거대한 황제의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황제의 침상답게 화려했고 아름다운 색상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스윽.
침상의 바로 앞으로 다가간 로얀은 휘장을 천천히 거두었다.
“쿨럭, 누구냐?”
깨어 있었는지 침상에서 이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힘없고도 쉰 목소리에서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져 왔다.
“꼴이 말이 아니군.”
들려온 이얀의 그 쉰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로얀은 휘장을 거칠게 걷어 올리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따라 들어온 황태자와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두 줄의 맑은 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흐흐. 눈물을 흘리는 네 녀석의 꼴은 좋은 줄 아냐.”
앙상한 몸의 이얀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얀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 50년 전의 그 장난기 많고 활기차던 그의 얼굴이 변해 있었다. 50년이란 세월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로얀의 말에 전혀 놀라지 않은 듯 태연히 대꾸한 이얀이었지만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 대답해 준 그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로얀과 이얀의 만남을 본 다크로드는 눈앞에 서 있는 황실 근위대 대장을 풀어 주었고, 다른 어둠의 정령들도 황실 근위병들을 풀어 주었다.
촹!
“하아압!”
스거거걱!
풀려난 직후 근위병들은 검을 뽑아 휘두르며 황제가 있는 침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검이 어둠의 정령에게 전혀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문을 부수듯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쾅!
“폐하!”
“모두 물러가라!”
우르르 몰려 들어온 황실 근위병들은 들려오는 이얀의 호통소리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문 앞에 멈추어 선 채로 멍하니 이얀의 호통소리가 들려온 침상을 바라보았다.
이얀의 몸 상태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기에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근위기사들이 멍해진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얀의 목소리가 곧 다시 들려왔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다. 그와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
“치, 친구......?”
이얀의 이어진 말에 근위병들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황제의 친구처럼 보일 만한 인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계신 분이 흑안의 검사라 불리시는 분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근위병들에게 이제 확실시 된 사실을 황태자가 앞으로 나서며 손으로 로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이 있은 직후 근위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얀에게로 천천히 향했다.
“저, 정말로.......”
황태자의 말에 너무도 놀란 황실 근위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로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젠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멍하니 있던 황실 근위병들을 일깨운 것은 황제 이얀의 목소리였다.
상반신을 일으킨 상태에서 힘겹게 말한 이얀을 보며 황실 근위대는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방문을 닫고 방을 빠져나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끼이익.
쿵.
급히 빠져나간 황실 근위병들 때문인지 방 안이 왠지 썰렁해진 듯했다.
“로얀을 제외한 프라시아와 그대들도 모두 그만 나가보게.”
황실 근위병들을 내보낸 것도 부족한지 황제 이얀은 황태자를 따라왔던 공주인 프라시아와 라셀, 그리고 기사들도 모두 내보냈다.
그의 말속에 담긴 로얀이라는 이름 때문에 흑안의 검사라 불리는 로얀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그,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공주인 프라시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고, 나가기 싫은 듯한 모습이 역력한 라셀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뒤를 힐끔힐끔거리며 물러났다. 흑안의 검사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마법사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끼이익.
쿵.
그런 라셀의 기분처럼 방문이 쓸쓸히 닫혔다.
방 안엔 이얀과 흑안의 검사인 로얀, 그리고 황태자만이 남았다.
세월 속에서 앙상한 손이 되어 버린 이얀은 그 손을 들어 황태자를 가리켰다.
“난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어.”
그의 음성은 노인답게 힘없고 갈라져 내렸지만 로얀을 대하는 그의 말투만은 50년 전과 조금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봤다.”
로얀은 그의 말에 답하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그런 모습을 황태자를 멀리서 가만히 선 채로 바라보았다.
로얀의 말에 이얀은 들었던 손을 내리고 웃으며 말했다.
“쿡쿡, 그래 소감이 어떻던?”
“한 명을 제외하곤 너와 닮은 녀석이 없더군. 다행히도.”
“엥? 다행히도?”
“그럼. 너처럼 괴상한 성격을 가진 녀석은 한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하하, 쿠, 쿨럭. 젠장! 넌 어째 모습도 그대로인데다 성격도 더 밝아진 것 같다.”
“안 좋은 건가?”
“쿨럭, 쿨럭. 아니! 지금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 특히 웃음이 많아진 모습이 말이지.”
말을 하는 이얀은 친구인 로얀에게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일부러 목소리를 뚜렷이 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의 목안 깊숙한 곳에서 짙은 혈향이 풍겨져 왔고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
침상 옆에 놓여져 있는 선반 위의 천을 집어 든 이얀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고운 천 위에 붉은 피를 쏟아내었다.
고개를 돌린 채 피를 토해내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로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스윽.
문득 보인 이얀의 앙상한 손을 로얀은 가만히 움켜쥐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만 같은 앙상하고 작은 손이었다.
“정말 앙상한 나뭇가지 같지?”
그렇게 물어 보는 이얀의 목소리는 왠지 서글퍼 보였다.
“아니, 그 어떤 인간의 손보다도 강하고 부드럽다.”
“하하하, 마음에 드냐?”
“뭐가?”
“내가 50년에 걸쳐 만든 그늘이.”
“.......”
붉은 피가 축축이 젖은 천을 한 손에 움켜쥔 채 웃으며 말하는 이얀의 모습을 보며 로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대화가 있은 직후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아무런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통해 50년 동안 하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50년이라....... 네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냈냐?”
말없이 무언의 말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중에 먼저 말을 내뱉은 것은 이얀이었다. 그가 말하는 할 일이란 드래곤들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얀의 물음에 로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로얀의 대답에 이얀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그 대답이 왜 그런지 모르게 그의 가슴속에 슬픔을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망할 놈의 자식! 그랬으면 돌아왔어야지.”
“미안하다.”
“망할 놈.”
빙긋.
로얀의 대답이 있은 뒤 로얀과 이얀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미소를 띄웠다.
그 대화 뒤로 로얀과 이얀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에겐 황태자의 존재가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지금 방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황제의 병문안을 온 이들이 흑안의 검사가 왔다며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근위병들에 의해 가로막혔고, 흑안의 검사라는 말에 놀란 이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근위기사들에 의해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그리고 흑안의 검사가 왔다는 소문이 왕성에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귀족들이 그와 안면이라도 트기 위해 몰려왔다.
수많은 기사들이 인간으로서 검의 끝에 다다른 로얀을 보러왔지만 차마 황제의 침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로얀과 이얀은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밖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들에게 그런 건 아무런 방해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 뒤로 로얀은 계속 이얀의 방에서 머물렀다. 로얀은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었기에 쭈욱 이얀의 옆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밥을 먹을 때도, 그가 잠을 잘 때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이제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을 뿐더러 배고픔이란 것도 없어졌기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얀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왠지 그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오는 듯했다.
잠을 자고 있는 이얀의 모습을 보던 로얀은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그의 그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바라보던 로얀은 그의 모습에서 옛 추억을 떠올렸고, 그의 얼굴 곳곳에 핀 검버섯에서 지난 세월의 아픔을 느꼈다.
그가 떠올리는 추억은 대부분이 전쟁에서 지냈을 때의 추억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옛날의 모습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때 했던 말들과, 그때 들려왔던 소리들, 그리고 그때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흘러 들어왔던 향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엔 항상 눈앞에 있는 이얀이 등장했었다. 그는 항상 환하게 웃으며 귀찮을 정도로 로얀을 따라다녔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이야기 하다 지쳐 잠든 이얀의 자는 모습을 보던 로얀은 계속해서 옛 추억을 되새겼다.
로얀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 것을 시녀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감히 그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모두들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로얀 다음으로 이얀을 찾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황태자 로얀이었다. 그는 혼자 이얀의 방으로 오기도 했고 프라시아를 대동한 채 오기도 했다.
가끔 이황자와 첫 번째 공주인 미시아가 오기도 했지만 그들은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들르는 듯했다.
그들은 침대 옆에 붙어 있는 로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로얀의 외모는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로얀의 모습을 확인하고 바로 물러났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으로 인해 밖에서 로얀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많은 이들이 되돌아갔다.
어느덧 오 일이 흘렀다.
처음 로얀이 왔을 때 그를 본 이얀은 반가움 때문인지 기운을 차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이얀은 점점 죽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 일째 되는 날 로얀은 이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드래곤을 죽이는 부분에서 이얀은 통쾌해 하며 웃음을 보였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태자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황태자가 알기에 로얀은 블랙 드래곤 한 마리를 잡은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하지만 흑안의 검사인 로얀의 입에서 나온 드래곤의 수는 모두 네 마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스스로 말했다.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과 눈빛으로 보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황제 이얀은 그 엄청난 일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의 하루가 훌쩍 가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로얀의 이야기를 웃으며 듣고 있던 이얀은 밤이 되어 로얀이 이실리아가 죽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끝내자 한참을 웃었었다.
로얀이 이실리아를 죽이고 복수를 끝마쳤다는 것에서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웃었던 걸까? 그건 그만이 알 일이었다.
어느새 밤이 되었지만 아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어둠이 깔린 창밖을 보며 이얀이 힘없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
“뭐든지.......”
“저기 있는 내 아들 녀석이 무사히 나의 뒤를 이어 받을 수 있게 도와주라.”
친구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미안한지 그는 창밖을 바라보려 말했고, 로얀을 바라보지 않았다.
스윽.
이얀의 말에 로얀은 지금껏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신과 이름이 같은 황태자 로얀을 바라보곤 다시 이얀을 향해 말했다.
“걱정 마라.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황태자의 이름이 나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도와주는 거다.”
“그거면 됐어.”
여전히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앉아 있는 이얀은 다시 로얀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 멀리 서 있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황태자 로얀. 너에게 나와 친구의 대화를 들려주고 싶었다.”
“.......”
황태자는 아버지인 이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 보거라.”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황태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이얀을 향해 말했다.
“내일 아침은 저도 같이 식사해도 될까요?”
“하하. 그렇게 해라.”
방을 나서며 뒤돌아본 이얀의 모습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드는 황태자였다.
그런 그에게 이얀은 환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렇게 황태자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가 나가는 것을 이얀은 흐뭇하게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끼이익.
쿵.
이제 둘만 남게 된 로얀과 이얀은 서로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쳐서인지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
한동안 웃음이 이어졌다.
그 웃음이 잦아들 때쯤에 이얀이 말했다.
“그 너의 정령들은?”
“몸을 숨기고 있지.”
“흐음, 요즘 세상에 어둠이 드리워지고 가뭄이 계속되는 등,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정령과 관련이 있다던데 무슨 일이냐?”
“그걸 나도 잘 모르겠다.”
“엥? 넌, 정령왕이잖아?”
“지난 50년간 난 겨울의 대륙의 산속 동굴에만 있었거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전혀 몰라.”
“허참, 어떻게 50년 동안이나 동굴 속에 박혀 있냐. 이런 괴물 녀석.”
“.......”
이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어진 이얀의 말을 들었다.
“아! 페어리족의 여왕이라는 꼬마 아가씨가 찾아왔었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프 아가씨와 함께 왔더군. 널 급한 일이 있다며 급히 찾고 있던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
로얀은 이얀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걱정 마라. 아무런 일 없어.”
그는 이얀이 걱정하지 않도록 웃으며 답해 주었고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자꾸만 흘러만 갔다.
“쿨럭. 쿨럭.”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얀의 기침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붉은 피를 항상 동반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얀이 손에 쥔 천을 입가에 가져가는 횟수가 늘어만 가고 있었다.
“쿨럭, 쿨럭. 꼭 내 부탁을 들어주라.”
피를 한차례 토하며 이얀은 로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꺼내는 그의 눈동자 속엔 미안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로얀은 힘이 다 빠져 버린 친구를 가만히 안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너무도 작아져 버린 이얀을 품안에 안은 로얀은 그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그때, 그날....... 그 전쟁 속에서 너를 만나고 인연을 맺은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가 세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은 황제인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그리고... 꼭 영원토록 행복하길 바란다.”
이얀은 로얀의 품속에서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그리고 또렷이 흘러나왔던 그의 음성은 갈수록 작아져 갔고 희미해져 갔다.
“아직 50년간 하지 못했던 말을 다 나누지 못했다.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할까?”
로얀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편안한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얀을 바라보는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끝난 직후 아침이 왔고 방 안엔 로얀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아침임에도 햇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아침 속에서 로얀은 천천히 식어가는 친구의 몸을 안은 채 한동안 석상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석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람에 떨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리는 그의 몸과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달랐다.
그렇게 몰딘 제국을 세운 위대한 황제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얀 대제는 73세의 나이에 가장 믿고 좋아했던 친구의 품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