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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복수의 끝(5권) (34/42)

1장 복수의 끝

복수의 끝

쿠르릉-!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듯 바싹 타버린 하늘이 구슬프게 울었다. 검은 하늘 속에선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거센 비바람을 타고 휘몰아쳤다.

콰르릉-!

잿빛 하늘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고, 빛이 번쩍이며 대지를 환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와 작은 누군가의 인영을 관통하며 대지 위로 떨어졌다.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는 각각 금빛과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터진 섬광에 의해 드러난 그 빛의 정체는 바로 드래곤이다. 금빛의 정체는 골드 드래곤 페르디난드였고, 은빛의 정체는 실버 드래곤 루시어스였다.

그 두 드래곤 외에도 작은 뭔가가 보였다.

콰르릉-!

번쩍이는 번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창백해 보이는 인상의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려 팔짱을 끼고 있는 것으로 여유를 가장하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을 떨고 있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양옆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 드래곤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오만하기 그지없으며,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이 공포에 절어 떨고 있었다.

그들은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을 완전히 버렸는지 본체의 모습을 한 채 그 큰 몸을 떨고 있었다.

두 마리의 드래곤 사이에서 떨고 있는 엘프 여인도 실상은 드래곤이었다.

윤기 나는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그녀는 드래곤 중 가장 강하다는 레드 드래곤이다.

레드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금발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면에 웃음을 드리우고 있던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였다.

허공에 떠 있는 그들 세 마리의 드래곤들에게는 몸을 떨고 있다는 것 외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의 그 큼직한 눈이 단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밑에 있는 한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르릉-!

번쩍이는 번개가 조명이 되어 대지를 비추었다. 그리고 빛이 반사되어 더욱 환하게 빛나는 호수의 물에 누군가 보였다.

그곳에는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간이 서 있었다.

그 인간은 호수 속에 발목이 잠겨 있었고, 붉은 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그가 흘리는 붉은 물은 비바람에 섞여 떨어져 내렸고 맑은 호수의 물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떨어져 내렸다.

붉은 물감이 물속에 퍼지듯 그가 흘리는 붉은 액체는 호수의 물과 섞여 나갔다.

그가 흘리는 붉은 물은 두 곳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복부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의 두 눈동자에서 기다란 강줄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액체를 쏟아내며 호수의 물을 탈색시키는 인간은 바로 로얀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뾰족한 에리오네를 박아 넣은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물은 맑고 투명하지 않았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붉은색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눈물이 아닌 짙은 혈향을 지닌 붉은 피였다.

고오오오-!

로얀의 발밑에서 출렁이는 호수가 붉은 피로 물들어 갈 때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 검은 기류는 빛의 성지에서 발록 파라무트가 뿜어내던 마기보다도 짙었고 거대했다.

그 검은 기류는 어둠이 되어 검게 타버린 하늘을 가득 메웠고 하늘이 뿜어내는 섬광도 그 어둠에 가려져 버렸다.

바르르-

검은색 기류가 로얀의 몸을 감는 순간 세 마리의 드래곤이 내는 떨림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들의 떨림이 더욱 심해진 것은 로얀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는 순간부터일 것이다.

로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류가 뿜어내는 기운은 드래곤들도 생전 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차갑고, 섬뜩하며, 온몸의 공포를 긁어내는, 그런 괴이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족의 마기는 분명 아니었다.

고오오오오-!

검은 기류는 소용돌이가 되어 로얀의 모습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검은 기류를 보면서도 로얀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인형처럼 그의 눈동자는 멈추어져 있었다. 흘러내리던 붉은 눈물도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로얀이 검은 기류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로얀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의 몸속 깊은 곳에서 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서 떠나야 한다!’

몸 깊숙한 곳에서 들려온 본능의 외침이었지만 그들 중 몸을 움직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의 발을 묶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힘이 그들을 묶고 있었기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허공에 묶여 있을 때 로얀은 검은 기류 속에서 몸이 흐려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거대한 힘이 로얀에게로 휘몰아쳐 왔다.

쿠오오오-!

그 힘은 로얀의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듯 그의 몸을 관통하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힘이 바로 그의 몸 주위를 돌던 검은 기류들이었다.

로얀의 몸 깊숙이 박혀 있는 에리오네는 검은 기류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그의 몸 또한 부서지듯 무너져 내렸다.

휘오오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이 검은 기류로 변해버렸고, 그 기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머물며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서서히 어떠한 형체를 지니기 시작했다.

[세 번째의 생명이 꺼졌다. 그리고 세 번째의 봉인이 풀렸다.]

죽음 뒤에 항상 하나의 의식처럼 들려오는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어둠의 기류 속에 잠긴 로얀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와 그의 머릿속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세 번째 봉인의 대가는 살아 숨쉬기에 느꼈던 것들이다.]

[혼돈의 정령왕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아니다.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배고픔도 없으며 아픔도 없을 것이다. 물을 부수고 바람을 가른다고 해서 그들이 상처를 입고 죽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언제나 그랬듯이 이내 기억 속에서 지워질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뚜렷이 로얀의 머릿속에 그 말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깊게 박혔던 각인은 사라져 버렸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말 중 아픔이라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무병장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휘오오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말이 끝난 뒤에 검은 기류의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그리고 만들어져 가던 형체의 모습도 점점 뚜렷해져 갔다.

검은 기류가 만드는 형체는 로얀의 모습이었다.

검은 기류는 돌이 하나의 조각상으로 태어나듯 그의 모습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를 비롯한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도 만들어졌고, 그가 입고 있던 옷도 완벽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휘오오오-!

로얀의 형체가 완전해지자 검은 기류는 바람에 씻겨 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로얀의 얼굴을 적셨던 붉은 피도, 복부에 에리오네가 박혀 있던 부분도 깨끗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에리오네는 로얀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그의 허리에 매어져 있었다.

검은 기류가 사라진 자리는 너무도 고요했다.

세 마리의 드래곤을 압박하던 강대한 힘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휘몰아치던 바람도 조용히 침묵했다.

죽음 뒤에 다시 태어난 로얀에게선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을 보는 듯했다.

그의 눈은 깊게 감겨져 있었고 미미한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호수 위의 조각상이 되어 가만히 서 있던 그를 호수의 잔물결이 그의 발목을 간질이며 깨웠다.

스윽.

호수의 잔물결에 응답하듯 로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깊게 가라앉은 검은 심연의 눈동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가 눈을 떴다고 해서 강한 힘이 다시 느껴진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마리의 드래곤은 어쩐 일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세 마리의 드래곤은 멍하니 로얀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 어떻게 다시 살아 있을 수가 있지?]

그들이 미동도 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도 놀란 탓이었다.

루시어스가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의문점을 밖으로 꺼내었다.

그 목소리에 로얀은 고개를 움직였다.

스윽.

로얀은 비를 맞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움찔.

그의 눈동자가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이실리아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를 대한 이실리아의 몸은 움찔거렸다.

멋대로 움직인 자신의 몸에 화가 난 것일까?

그녀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플레어! 헬파이어!”

화르르륵!

불의 속성을 지닌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가 펼치는 화염계 마법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화염계 7서클 마법 플레어와 8서클 마법 헬파이어가 하늘에서 추락하듯 로얀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콰하하항-!

세상을 뒤엎을 듯한 굉음을 터뜨리며 하늘에서 퍼져나가는 홍염의 불꽃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지금 이실리아의 머릿속엔 드래곤 로드에 관한 걱정은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오직 눈앞의 로얀을 죽이는 것이었다.

대지 위로 서서히 내려앉은 이실리아의 마법은 조용히 주위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모든 것을 태워갔다.

초고온의 화염 마법인 플레어와 헬파이어는 조용히 대지 위로 내려앉아 대지를 녹였고, 호수를 증발시켰다.

치지지직!

뜨거운 열에 호수의 물은 자신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알리듯 하얀 수증기를 내뿜었고 호수 주위는 하얀 수증기로 가려 졌다.

[피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맞았으니 이정도면 죽지 않았을까?]

수증기 속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페르디난드가 로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뿌연 수증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말에도 이실리아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이실리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니, 이 정도론 죽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다시 살아났지?’

이실리아의 머릿속엔 로얀이 어떻게 살아났는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로얀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시 살아난 뒤로 계속 이 같은 의문을 품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떠한 생명체건 죽었을 때 언데드가 되지 않는 한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그것은 지상 최강의 존재라는 드래곤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시어스, 다시 발동해!”

이실리아는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루시어스를 향해 외쳤다.

이실리아의 말에 실버 드래곤 루시어스는 즉시 마법을 펼쳤다.

그녀는 지금껏 이실리아의 이렇게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그녀의 말에 따랐다.

이실리아의 명을 받은 루시어스가 펼친 것은 정령석을 이용해 정령의 힘을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로얀과는 너무도 질긴 악연으로 얽혀 있는 주문이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자연의 원소들이여, 저기 평온한 안식처에 내려앉아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리라.]

화아아앗!

곳곳에 박혀 있던 정령석이 다시 한 번 빛을 바랬고 주위 퍼져 있는 정령의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연 속에 퍼져 있는 정령의 힘과는 다른 강한 힘이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로얀의 힘이 빨아들여 질 때 느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그 힘이 정령석에 빨려 들어가자 정령석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실리아는 그런 점까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는 로얀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해하며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역시 살아 있어! 쥐새끼 같은 놈!”

로얀의 모습을 숨겨 주려는 듯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드래곤인 이실리아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후우웅.

이실리아가 눈을 부릅뜨며 로얀을 찾고 있을 때 페르디난드는 한숨을 쉬며 루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루시어스는 마법이 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루시어스, 왜 그래?]

[너, 너무 강한 힘이.......]

루시어스의 말이 떨리고 있었고 도중에 끊겨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곳곳에 묻어 두었던 정령석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쾅!

펑! 펑! 펑!

하나가 폭발하자 연달아 정령석이 폭발했고 대지를 진동시켰다.

얼마나 많은 정령석을 묻어 두었는지 그 폭발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꺄아아아악!]

정신을 집중한 채 정령석으로 흘러 들어오던 힘을 제어하고 있던 루시어스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정령석을 제어하려다 실패했기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상당한 힘을 소모한 모습으로 루시어스는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그녀의 그런 모습과 폭발하는 정령석에 페르디난드는 깜짝 놀라며 루시어스를 향해 날아갔다.

로얀을 찾던 이실리아도 갑작스런 사태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황급히 사태 파악에 나섰다.

휘오오오!

정령석이 폭발하자 그 안에 있던 로얀의 힘과 자연 속에 숨 쉬던 정령의 힘이 개방되어 퍼져 나갔다.

그 힘은 검은 기류가 되어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휘오오오-!

검은 기류가 집결하는 그 중심엔 로얀이 있었다. 로얀은 검은 날개를 펼쳐 보이며 하늘에 떠 있었다.

그의 힘을 빨아들이던 정령석이 한계치를 초과해 버려 하나둘 터져 버린 것이다.

이실리아가 깔아 놓은 정령석은 모두 최상급의 것이었지만 분명 한계는 있었다.

마나석이든 정령석이든 힘을 받아들이고 낼 수 있는 만큼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돌의 계급이었다. 그리고 그 정해진 힘을 초과한다면 힘을 가둬두는 벽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로얀의 힘을 받아들이던 정령석들은 하나둘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그리고 폭발음 속에서 정령석 안에 갇혀 있는 힘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정령석 안에 있는 로얀이 죽기 전 흡수당했던 힘과 자연 속에 퍼져 있던 정령의 힘이 돌 속에서 하나가 되어 풀려났다.

그 힘은 모두 로얀의 몸속으로 하나둘 흡수되기 시작했다.

정령석에 뭉쳐 있던 힘이 하나로 모인 것은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주위를 맴도는 정령의 힘이 만들어내는 빛 무리 속에서 로얀은 허공에 뜬 채로 이실리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날 찾을 필요 없다. 내가 널 찾아갈 테니.”

그의 음성은 삭막했고 차가웠다.

스윽.

화르륵.

로얀의 두 손에 화염이 일렁였다.

오른손의 화염은 눈이 따가울 정도의 붉은 화염이었고, 왼손에 맺혀 있는 화염 또한 그에 못지않은 초고온의 화염이었다.

마나에 친숙한 이실리아는 로얀의 양손에 맺힌 화염의 정체를 단박에 눈치 챘다. 바로 자신이 날렸던 플레어와 헬파이어였던 것이다. 레드 드래곤이 사용한 화염계 마법엔 특별한 힘이 있었기에 이실리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마법은 원거리 마법이었지만 로얀이 펼친 것은 그의 양손에 머물러 있었다. 그 절대 고온 속에서도 그의 손은 작은 화상조차 입지 않았다.

스윽.

로얀은 시뻘건 손을 이실리아를 향해 천천히 들어 보였다.

“처절한 고통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해주마.”

화아앗!

슈아앙!

그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펼쳐졌고, 그는 빠른 속도로 이실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이실리아는 다가오는 로얀을 보며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슈아앙!

그는 그녀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페르디난드!”

루시어스의 상태를 살피던 페르디난드가 있는 곳이었다.

이실리아의 날카로운 외침에 페르디난드는 급히 몸을 돌리며 마법을 시전했다.

그가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대항 한 번 못 해보고 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로얀의 움직임은 빨랐다.

페르디난드는 날아오는 로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드래곤 답게 시동어 하나만으로 카이저 실드를 펼쳤다.

[카이저 실드!]

로얀은 눈앞에 펼쳐지는 두터운 실드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플레어가 맺혀 있는 왼손을 휘둘렀다.

콰하하항!

붉은 화염이 그의 손에서 퍼져 나갔다.

그의 손은 카이저 실드를 서서히 녹이며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크으으윽!]

페르디난드는 점점 다가오는 고온의 열기에 괴성을 질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이실리아는 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지금 그녀의 눈엔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카이저 실드 안의 페르디난드보단 등을 보이고 있는 로얀만이 보였다.

“죽어라! 프로미넌스!”

8서클 화염계 마법인 프로미넌스를 시전하자 그녀의 주위로 초고온의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프로미넌스는 형태만 본다면 파이어 볼과 매우 흡사했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다른 화염계열의 마법이었다.

파이어 볼보다 크기도 작았지만 프로미넌스로 인해 떠오른 화구는 초고온의 화염이 똘똘 뭉쳐져 있었다.

후우웅!

콰가가강!

수십여 개의 화염구가 이실리아의 손짓에 로얀의 등을 노리며 날아갔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붉은 화구는 곧 강한 폭발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얼마나 강한 폭발이었는지 천지가 뒤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에 이실리아의 얼굴에서 떠오르려던 웃음이 지워졌다. 바로 앞에 있던 로얀이 텔레포트라도 쓴 듯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로미넌스는 페르디난드가 펼친 카이저 실드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실리아는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로얀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자 무작정 마법을 난사한 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저 인간이 마법도 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그녀는 로얀이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간이라 자신이 방심해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로얀은 마법을 써서 프로미넌스를 피한 것이 아니었다. 로얀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온의 열에 급히 하늘로 치솟아 오른 것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전보다 더 빨라진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크윽! 이실리아!]

페르디난드는 이실리아에게 화를 내며 비틀거렸다. 결과 적으로 그녀가 그의 카이저 실드를 부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 로얀은 페르디난드의 위에 나타났다.

그는 위에서 페르디난드의 거대한 금색 등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맙군.”

슈아앙!

흠칫!

페르디난드는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로얀을 보며 다시 카이저 실드를 펼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로얀은 이미 페르디난드의 몸에 당도해 있었던 것이다.

로얀의 왼손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오른손은 시뻘건 헬파이어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오른손을 페르디난드의 등판에 꽂았다.

푸욱!

치이이익!

레드 드래곤이 펼친 헬파이어보다 뜨거운 화염이 페르디난드의 단단한 가죽을 녹여버리며 파고들자 단백질이 타는 쾨쾨한 냄새가 뿌연 수증기와 함께 퍼져나갔다.

[끄아아아악!]

그리고 페르디난드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푸욱! 푸우욱!

치지지직!

로얀은 페르디난드가 몸을 뒤흔들며 요동을 칠수록 손을 더욱 더 깊게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페르디난드는 끔찍한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살 속을 파고드는 로얀의 손은 집요했고, 잔혹했다.

손을 집어넣었을 때에 느낀 물컹거리는 느낌이 곧 딱딱한 느낌으로 변해 갔다. 보이진 않지만 페르디난드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푹!

팔 하나를 완전히 페르디난드의 몸속에 집어넣으려던 로얀은 다가오는 인영에 급히 팔을 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후웅!

그가 있던 자리로 날카로운 빛이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다가온 이실리아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와 늘씬한 검신을 뽐내는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레어에서 검을 소환한 것이었다.

명색이 드래곤이 들고 다니는 검답게 그 검은 서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명검이라 할 만한 검이었다. 그 검은 강한 마나까지 뿜고 있었다. 바로 마나를 담고 있는 마법검이었다.

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내뿜고 있었는데, 그건 이실리아의 검술실력이 아니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는 마법검의 힘 덕분이었다.

드래곤들 중 검술을 깊이 있게 익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애써 육체를 단련시켜 힘들게 검술을 연마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천성이 게으르기로 유명한 드래곤들이 아닌가.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며 훈련할 별종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누구나 명검이나 이름난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장식용으로 그저 지니고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유희를 즐길 때에 액세서리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실리아가 들고 있는 마법검도 그런 검 중 하나다.

이실리아는 페르디난드가 로얀에게 공격당한 것이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늦기 전에 몸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마법검까지 소환을 했다.

사실 이실리아에게 페르디난드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로얀의 손이 페르디난드의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기회라고 생각했고, 다가가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이미 그녀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쉽게 그녀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로얀은 이실리아의 머리 위에서 그녀를 향해 낮게 말했다.

“너는 마지막이다.”

그때,

콰하하항-!

로얀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불빛에 급히 다크리온을 뽑아 휘둘렀다. 나머지 한 마리를 잊고 있었기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당황한 건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이었다.

로얀에게 공격을 가한 이는 멀리서 마법으로 인한 상처를 돌보고 있던 루시어스였다.

그녀는 로얀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페르디난드의 몸에 손을 집어넣자 페르디난드 때문에 쉽사리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얀의 손은 이실리아의 공격에 의해 빠져 버렸고,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순간을 루시어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드래곤 브레스를 쏘았던 것이다.

바로 앞에까지 날아온 브레스는 곧 로얀이 내뻗은 넓적한 검신을 지닌 다크리온에 가로막혔다.

콰하하항-!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엄청난 위세로 날아오던 루시어스의 브레스는 놀랍게도 다크리온에 가로막혀 좀처럼 나아가질 못했다.

로얀이 오러 블레이드를 펼친 것도 마나 소드를 펼친 것도 아닌데 브레스는 다크리온을 뚫지 못했다.

다크리온의 주위에 강한 기의 소용돌이가 방패처럼 퍼져 빠져나가려는 브레스를 붙들고 있었다.

그가 죽기 전 펼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강하다 할 수 있는 금빛 오러는 아니었지만 그의 검은 강했다.

과거 한 검에 미친 드래곤이 말했던, 신이라도 벨 수 있다는 오러가 다크리온의 검신에 맺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을 하자면 맺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크리온 자체가 그 오러였다. 다크리온의 속에 강한 오러가 알갱이처럼 뭉쳐져 있었다.

겉으론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크리온의 검신 자체가 오러가 되어 있었다. 그 다크리온은 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브레스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콰하하항-!

거세게 울부짖던 브레스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자 점차 그 힘을 잃어갔고, 점점 불꽃이 꺼지듯 잠잠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스윽.

널찍한 검면을 지닌 다크리온에 가려져 있던 로얀의 얼굴이 브레스가 소멸되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은 정확히 루시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칫.

루시어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몸 속 깊은 곳에서 위험 경보음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슈아아앙!

루시어스를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로얀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결단을 내렸는지 오른손엔 다크리온을 들고 루시어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의 등에 달린 날개는 도약하는 데에 전혀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날개는 출발할 때가 훨씬 빨랐다.

로얀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더니 앞으로 튕겨지듯 날아갔고, 그의 검은 날개가 검은 빛을 흩뿌렸다.

[카이저 실드!]

후웅!

콰가가강!

로얀이 접근해 오자 루시어스는 급히 실드를 펼쳤지만 로얀의 검 앞에 그녀의 카이저 실드는 너무도 쉽게, 종이 잘리듯 잘려 버렸다.

턱!

[......!]

카이저 실드를 가르고 날아든 로얀은 사뿐히 루시어스의 입 앞으로 날아왔고,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잡고 벌렸다.

그는 날카로운 이빨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드래곤의 크기가 워낙에 컸기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드래곤의 엄청난 턱 힘을 로얀은 한 손으로 벌려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당황하는 한편,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온 힘을 다해 입을 다문다면 아무리 로얀이라도 자신의 힘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분이 영 찝찝하지만 씹어 삼키면 그만이었다.

드래곤의 몸속에 존재하는 위장액은 여타 다른 생명체의 것과는 달랐다. 어떠한 생명체라도 드래곤의 몸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루시어스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로얀을 그대로 삼키기로 했다.

콰직!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기 위해 힘을 쓰기도 전에 괴성을 질러야 했다. 다크리온이 억지로 그녀의 살을 비집고 들어온 탓이었다.

[크아아앙!]

다크리온이 하늘로 향하며 비스듬히 루시어스의 입 천장을 꿰뚫은 것이었다.

비스듬히 박힌 다크리온의 검신을 타고 붉은 피가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리고 루시어스의 혀를 적셨고, 그녀의 턱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뾰족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던 루시어스는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하늘에서 몸부림쳤다.

로얀은 박혀 있는 다크리온을 잡고 그녀의 입을 벌린 채 왼손을 뻗었다. 그의 왼손이 향한 곳은 그녀의 어두운 동굴 같은 목구멍이었다.

“이대로 죽어라.”

차갑게 말하는 로얀의 음성이 짙은 살기보다도 싸늘했다.

깊숙한 동굴처럼 보여서인지 그의 음성이 멀리멀리 울려 퍼져 그녀의 가슴속까지 와 닿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디난드는 너무도 놀라 허둥대야만 했다. 로얀이 루시어스의 입속에 있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실리아는 로얀의 음성과 지금 그의 행동을 바라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루시어스의 입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 눈이 부릅떠졌다.

“안 돼! 루시어스!”

친분이 있는 몇 안 되는 루시어스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이실리아는 느꼈다. 바로 로얀의 왼손에 회오리치는 마나를 보면서 말이다.

지금 로얀의 왼손에 모여드는 마나들. 그건 마치 드래곤이 입을 벌려 브레스를 쏠 때에 마나를 모으는 것 같았다. 느껴지는 힘의 파동이며 모든 것이 같았다. 그 브레스는 실버 드래곤의 브레스인 듯했다.

그러한 일련의 모습에 이실리아는 왜 로얀이 마지막 작별인사처럼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실리아의 뾰족한 외침을 루시어스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다크리온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영원히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콰하하하항-!

[커허헉!]

로얀의 왼손에서 실버 드래곤의 브레스가 쏘아져 나갔다.

브레스는 그녀의 입안을 태우며 긴 동굴 속을 관통했다.

푹.

탓.

로얀은 다크리온을 들고 천천히 루시어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하늘 높이에 그녀의 거대한 몸이 풍선 터지듯 터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후두두둑.

쏴아아아-!

붉은 피와, 시뻘건 살점과, 퍼붓는 비가 한데 어우러져 대지 위로 쓰러졌다.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루시어스는 그렇게 죽어 버렸다.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으로 태어났던 그녀의 마지막은 너무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루, 루시어스!]

“루시어스!”

페르디난드는 크게 격노했고, 이실리아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페르디난드는 화가 난 외친 것이었지만 이실리아가 파리하게 질린 것은 로얀이 브레스를 펼친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든 마스터라는 검술 실력에 8서클에 달하는 마법만으로도 벅찬 상대였다. 거기에 이제는 브레스까지 쓴다니!

이실리아는 문득 저 인간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애써 부인하며 로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페르디난드의 뒤를 따랐다.

페르디난드는 루시어스의 끔찍한 결말에 이성을 상실한 듯 크게 격노하며 달려들었다.

콰하하항-!

그는 루시어스가 당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브레스를 쏘며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과연 드래곤에게서 마법과 브레스를 뺀다면 무엇이 남게 될까?

그가 브레스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르릉.

로얀은 날아오는 골드 드래곤의 브레스를 보며 에리오네를 뽑았다.

로얀의 모습은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다크리온을 빙글 돌리며 루시어스의 브레스를 막았던 것처럼 페르디난드의 브레스를 막았다.

[블리자드! 썬더 스톰!]

휘오오오-!

콰르르릉-!

연이어 페르디난드는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펼쳤다. 루시어스의 브레스를 막는 것을 보았기에 그녀는 브레스를 쓰지 않았다.

얼음의 비가 먼저 내려 주위를 얼려 버렸고 연달아 터진 번개의 폭풍이 얼려진 대지를 부수며 파괴해 갔다.

얼음과 번개가 서로 어우러져 배로 강한 파괴력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그런 파괴력에도 그 중심에 선 로얀은 너무도 태연히 서 있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얼음의 비도, 파괴적인 번개도 뭔가에 가로막혀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얀은 두 팔을 내뻗었다. 한 손에 들린 에리오네는 서늘한 한기를 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 들린 다크리온은 번뜩이는 전류를 흘리고 있었다.

후웅! 후웅!

로얀은 그대로 두 검으로 허공을 그었다.

콰아아앙!

콰지지직!

에리오네에 의해 펼쳐진 블리자드는 페르디난드가 펼친 블리자드와 맞부딪혀 서로 공멸해 갔다.

다크리온에 의해 펼쳐진 썬더 스톰 역시 페르디난드가 펼친 썬더 스톰을 부숴갔다.

휘오오오-!

콰지지직-!

서로가 공멸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얀의 블리자드와 썬더 스톰은 소멸되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로얀의 마법이 이실리아가 펼친 마법을 부수고 있었다.

스윽.

하지만 두 마법은 로얀이 손을 거두자 언제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를 쏟아지는 비가 대신했다.

쏴아아아-!

슈아아앙!

페르디난드의 공격을 무산시켜 버린 로얀은 그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페르디난드의 등에 뚫어 놓은 구멍 위로 당도했다.

빙글.

로얀은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돌리며 검신이 아래로 향하게 했다.

슈앙!

푸욱!

[크아아아!]

로얀은 힘껏 밑을 향해 에리오네를 던졌고, 에리오네는 아무런 방해 없이 로얀의 팔이 뚫어 놓은 구멍 속을 헤집고 들어가 버렸다.

살이 구워지고 베이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페르디난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충격을 받았다.

스윽.

흠칫.

페르디난드의 주위를 맴돌던 로얀의 눈이 이실리아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으득.

[폴리모프.]

이실리아는 이를 갈며 들고 있던 마법을 돌려보낸 뒤 본체로 현신했다. 이 모습으론 도저히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건 말건 로얀은 페르디난드의 거대한 몸을 바라보았다.

에리오네를 등에 꼽고 있는 그의 육중한 몸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검과 성검으로 펼칠 수 있는 기술이 있지.”

로얀은 다크리온을 빙글빙글 돌리며 페르디난드의 등에 박혀 있는 에리오네를 힐끔 쳐다보았다.

[서, 설마! 네놈!]

드래곤인 페르디난드가 마검과 성검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검과 성검이 서로 부딪히면 강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슈아아앙!

로얀은 페르디난드가 생각한 것은 그대로 실현시켰다. 힘껏 다크리온을 페르디난드를 향해 던진 것이었다.

로얀이 멀리서 검을 던진 것은 마검과 성검이 부딪히면서 나는 파괴력은 그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검과 성검의 성질을 항상 잘 이용하는 그였다.

페르디난드는 급히 피하려 했지만 육중한 몸을 지닌 그의 움직임 보다 다크리온이 더 빨랐다.

다크리온은 주인의 뜻을 배신하지 않다. 정확히 페르디난드의 몸에 박혔고, 그의 몸속에서 동료라 할 수 있는 에리오네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한 섬광을 터뜨렸다.

쾅-!

[크아아아!]

굉음과 함께 붉은 피와 붉은 살점이 튀었다.

페르디난드의 금색 찬란한 등이 터져 나간 것이었다.

몸속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앞에서는 단단하기로 소문난 드래곤의 가죽도 무용지물이었다.

그 폭발을 일으킨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는 하늘을 선회하며 로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흘러들어 갔다.

쏴아아아-!

역시나 루시어스 때와 마찬가지로 빗줄기와 함께 페르디난드의 붉은 피가 대지에 흩뿌려졌다.

어느새 그 맑던 호수는 피의 호수로 변해 있었다. 그 푸르던 나무는 피의 나무가 되어 붉은 눈물을 흘렸다.

슈아아앙!

등이 터져 나갔다고 해서 페르디난드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쿠어어어!]

페르디난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렀다.

입에선 타액과 함께 붉은 피를 철철 흘렸고 이지를 상실한 광룡처럼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

페르디난드에게 다가선 로얀의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루시어스와는 달리 아무런 말 없이 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다크리온이 호선을 그린 곳은 페르디난드의 굵직한 목선 앞이었다.

스거거걱!

그때, 닿지도 않았는데 섬뜩한 소리가 페르디난드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살이 베이고 뼈가 갈리는 소리였다.

주르륵.

골드 드래곤 페르디난드의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큰 큼직한 눈동자에서 붉은 폭포수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츄화화확!

페르디난드의 목은 서서히 움직였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육중한 몸에서 떨어져 나와 추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피를 철철 흘리는 드래곤의 고깃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쿠우우웅!

육중한 몸과 머리답게 각기 다른 무겁고 육중한 소리를 내뿜으며 바닥으로 떨어져 피를 흩뿌렸다.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를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 로얀은 그들의 죽음에 가까이에 있었기에 그들의 피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주르륵.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붉은 피가 로얀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윽.

천천히 고개를 들어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의 몸보다 큰 거대한 드래곤을 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페르디난와 루시어스를 보던 눈과는 사뭇 달랐다. 지독할 정도로 강한 살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이 날이... 이 순간이... 왔다.”

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그의 살기가 향하는 곳은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로얀이 만났던 그 어떠한 드래곤보다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의 몸은 육중했고, 느껴지는 힘은 강대했다.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이실리아는 로얀의 앞에 섰다.

서로가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본 채 대면하고 있었다.

이실리아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로얀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에게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이실리아는 침착하게 이때까지 로얀이 해왔던 싸움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서, 설마!’

로얀은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와 싸우면서 상대가 발휘한 마법을 그대로 시전했었다.

그가 펼친 마법 중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가 펼치지 않은 마법은 없었다. 8서클에 달하는 마법사라면 어째서 여러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화르르륵.

이실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로얀을 시험해 보기 위해 파이어 볼을 펼쳤다.

시동어 없이 화염의 구가 그녀의 주위에 생성되었다.

수십 개의 커다란 화염구가 공중에 뜬 채 이글거렸다.

화르르륵-!

생성된 파이어 볼은 즉시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로얀은 날아오는 화염구를 보며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화륵.

타오르던 화염구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휘둘려질 때마다 반으로 갈리며 하나하나 소멸해 가기 시작했다.

후웅.

화륵!

마지막 화염구까지 소멸시킨 로얀은 이실리아가 쏘아 보낸 것처럼 주위에 커다란 화염구를 생성시켰다. 이실리아가 펼친 것보다 많은 파이어 볼이었다.

이실리아는 눈을 반짝였다.

눈앞의 로얀은 거울처럼 자신의 똑같은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정말...그런 거란 말인가!’

화르르륵!

이실리아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로얀이 생성시킨 화염구가 비가 되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쾅! 쾅! 쾅!

힘차게 날아간 파이어 볼은 이실리아가 생성시킨 실드에 가로막혀 모두 소멸해 버렸다. 로얀이 생성시킨 파이어 볼이 이실리아의 것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낮은 서클의 마법인 파이어 볼에 드래곤이 펼친 실드가 쉽게 부서질 리가 없었다.

이실리아는 로얀이 날린 파이러 볼이 모두 소멸하자 그에게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상대의 마법을 복사...하는 건가?]

“정확히 말해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는 거지.”

로얀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응대했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이실리아는 로얀의 대답에 몸을 떨었다.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다니?’

상대의 기술을 흡수하는 도플갱어가 있긴 했지만 상대의 기술을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때 이실리아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영상이 있었다. 루시어스가 로얀이 펼치는 브레스에 죽는 모습이었다.

[그, 그렇다면 브레스도 따라한 것이겠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받은 충격은 컸다.

“.......”

스윽.

이번에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로얀은 검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날개도 천천히 움직였다.

로얀이 움직임을 보이자 이실리아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드래곤에게서 마법과 브레스를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지금 이실리아가 믿을 건 자신의 거대한 몸뿐이었다. 아니,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었다.

팟.

로얀은 이실리아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날개가 바람에 휘날렸고, 그는 빠른 속도로 이실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후웅!

이실리아에게 다가가던 로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향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둘렀다.

[카이저 실드!]

쾅!

이실리아는 급히 실드를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머릿속에서 로얀이 카이저 실드를 따라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생각났지만 그의 검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이실리아가 우려한 것처럼 로얀은 카이저 실드를 펼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몸이 카이저 실드를 두른 것처럼 강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반월.”

스가가각!

로얀은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두 검에서 흑색 반월의 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이실리아의 카이저 실드와 부딪혔다.

쾅! 쾅! 쾅!

콰가가가광!

[큭!]

후우우웅!

이실리아는 카이저 실드를 소멸시킨 직후 몸을 맹렬히 회전하며 긴 꼬리를 휘둘렀다. 그 꼬리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져 있었다.

턱.

쾅!

하지만 그녀의 꼬리는 로얀에 의해 막혀 버렸다. 그것도 그의 한 발에 의해 그녀의 꼬리는 허공에 멈춰 버렸다.

드래곤이 휘두른 꼬리의 힘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증거로 로얀이 그녀의 꼬리를 발로 막으면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실리아와 싸우고 있는 로얀은 페르디난드나 루시어스 때와는 달리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쉴 틈 없이 이실리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스윽.

로얀은 자신의 발에 막혀 버린 이실리아의 긴 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쏴아아아-

빛 속에서 하늘로 치솟은 다크리온이 번뜩이며 밑으로 하강했다.

서걱!

그의 팔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고 이실리아가 꼬리를 움직여 피하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번뜩이는 다크리온에 의해 단단한 가죽을 두른 이실리아의 붉은색 꼬리는 쉽게 잘리고 말았다.

잘린 그녀의 꼬리 끝부분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와 함께 그녀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쏴아아아-

붉은 그녀의 가죽보다도 더 붉은 피가 그녀의 잘린 꼬리 부분에서 흘러나왔다.

[으드득!]

이실리아는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와는 달리 이를 악물며 흘러나오는 비명소리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날개를 움직여 로얀에게서 벗어났다. 비명만 지르고 있다간 로얀에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후웅.

눈을 부릅뜬 채 고통을 참아내려 애쓰는 이실리아를 보며 로얀은 다크리온을 가볍게 휘두르며 묻어 있는 붉은 피를 털어내었다.

스팟!

그 직후 로얀은 이실리아를 향해 쏘아져 나가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도중에 멈추어 서버렸다.

맹렬히 다가오던 로얀이 갑자기 멈추어 서자 이실리아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긴장했다.

쏴아아아-!

후우웁!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늘어뜨린 로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크아아압!”

휘오오오!

로얀은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소리를 내질렀고 그의 몸에서 강한 힘이 터져 나왔다.

흠칫.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었기에 이실리아는 로얀이 내뿜는 거대한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그때의.......]

이실리아는 로얀의 몸을 감싸는 검은 기류와 하늘을 뒤덮는 어둠을 보며 지난 싸움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정령석 속에서 힘을 빨리며 비틀거리던 로얀이 최후에 기술을 펼칠 때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몬스터들을 몰살시키다시피 했던 그 기술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하늘에 빛이 사라져 버렸는데도 검은 기류에 휩싸인 로얀의 눈은 번뜩이고 있었다.

휘오오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을 타고 검은 기류가 휘몰아쳤다.

로얀은 두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파하하하핫!

로얀의 말이 울려 퍼지며 검은 섬광이 번뜩였다.

[카이저 실드!]

눈앞을 가득 메우는 검은 기류를 보며 이실리아는 전력을 다해 실드를 펼쳤다.

쾅!

쿠구구궁!

카이저 실드와 검은 기류의 만남은 굉음을 동반했다.

이실리아는 점점 밑으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궁!

검은 기류가 카이저 실드를 힘차게 두드리며 이실리아를 밀어내고 있었다.

콰지지직!

[이익!]

급기야 카이저 실드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이실리아는 온 힘을 실드를 펼치는 데에 쏟아 부었다.

드래곤이 죽을힘을 다해 펼치는 마법은 강했다. 금이 가긴 했지만 카이저 실드는 로얀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쩌쩌쩡!

그러나 카이저 실드는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이실리아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도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실리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어둠뿐이었다. 카이저 실드를 뒤덮은 것도 부족한지 그녀의 시야마저 가린 검은 기류로 인해 로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쿠구구궁!

검은 기류의 방망이질은 점점 더 거세어져 갔고, 그에 따라 이실리아의 몸도 서서히 아래로 추락했다.

콰하하항!

검은 기류가 굉음을 동반한 채 폭발해 버렸다. 이실리아를 쭉쭉 밀고 가던 검은 기류가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콰차차창!

검은 기류의 폭발에 금이 잔뜩 가 있던 이실리아의 카이저 실드는 처참히 부서졌고 그 여파로 인해 이실리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크아아아!]

콰드드득!

다른 드래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실리아도 여성체임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의 몸집에 걸맞는 커다란 괴성을 내질렀다.

이실리아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쭈욱 미끄러졌고 그녀의 거대한 몸집에 숲의 나무들이 부서져 버렸다.

이실리아가 추락했을 때 하늘을 뒤덮었던 어둠은 사라지고 없었다.

쏴아아아-

비를 뿌리는 먹구름 때문에 어둡긴 했지만 아무것도 안 보일 만큼 어둡진 않았다.

스으으윽.

로얀은 보통 몬스터처럼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구른 탓에 부서진 나무와 흙을 몸에 묻히고 있는 이실리아를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찰박.

화아아앗!

로얀의 발이 촉촉하게 젖은 대지 위를 밟았다.

그의 등 뒤에서 그의 배경이 되어 주던 검은 날개는 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찰박찰박.

로얀은 아무런 말 없이 이실리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실리아는 카이저 실드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녀의 커다란 입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붉은 피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찰박찰박.

이실리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로얀을 보며 붉은 피를 흘리며 잘려져 나가던 페르디난드의 목을 생각해 냈다.

평생에 처음 보는 동족의 죽음.

드래곤의 죽음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수명을 다해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도 보기 힘든데, 처참하게 도륙당하며 죽어가는 드래곤은 얼마나 될까?

신족이나 마족에 의해 일어난 큰 전쟁 속이 아닌 이상에는 그런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드래곤이 처참하게 죽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이실리아는 바로 눈앞에서 두 명의 드래곤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죽는 것을 말이다.

이실리아는 몰려오는 두려움에 꾸역꾸역 밀려오는 피를 억지로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쿠쿠쿵.

그녀의 육중한 몸이 움직이자 피로 범벅이 된 레드 드래곤의 가죽이 아름답게 빛났다.

화르르륵!

[이, 인간! 여기서 이만 끝내자.]

이실리아는 몸 주위에 커다란 화구를 생성시키며 사뭇 위협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녀의 말속엔 드래곤 피어도 담겨져 있었다.

“.......”

찰박찰박.

이실리아의 말을 못 들은 것일까?

로얀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이실리아는 다가오는 로얀을 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 그녀는 한 가지 마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10서클의 궁극의 마법을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메테오 스웜.

이 마법이라면 확실하게 이 숲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드래곤 로드에게 어떠한 벌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로얀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운석을 소환해 비처럼 쏟아지게 하는 메테오 스웜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메테오 스웜을 스면 이 근처 모든 곳이 마법의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마법으로 워프를 하면 되지만 눈앞의 로얀에게 있는 기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로얀의 특기는 상대방의 기술을 복사하는 것이다. 만약 워프를 해 몸을 피한 다고해도 로얀이 똑같이 따라해 쫓아온다면 메테오가 무용지물이 됨은 물론이요, 따라온 로얀의 검에 죽음을 겪게 될 것이다.

[이곳과 함께 널 완전히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란 거지?”

이실리아는 로얀을 향해 온 힘을 짜내어 외쳤지만 그의 대답은 냉담했다.

찰박찰박.

“무엇을 한다 해도 네가 나의 검에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스팟!

가까이에 다가온 로얀의 신형이 이실리아가 다시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앞으로 당도했고 그의 팔이 움직였다.

푸욱!

에리오네의 뾰족한 날이 창날이 되어 이실리아의 두터운 가죽을 꿰뚫고, 그녀의 몸속을 헤집었다.

후웅!

부우욱!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그녀의 몸을 갈랐다.

[크아아아!]

그의 검은 그녀가 극심한 상처를 입히는 것을 피한 채 여기저기를 찢고, 가르며 고통만을 주고 있었다.

푸화화확!

쏴아아아-

쏟아지는 비로도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로얀의 온몸은 이실리아가 흘리는 피에 잠겨버렸다.

부릅!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는 로얀을 보는 이실리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결국 메테오 스웜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피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저 인간을 눈앞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크하하하! 그래! 같이 가는 거다! 죽어라! 메테오 스웜!]

쿠오오오오!

그녀의 몸에서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갔다.

그 강대한 마나의 힘에 의해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운석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석엔 고열의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운석들은 대지를 부수고 숲을 태웠다.

콰하항-!

콰하하항-!

더 이상 숲은 어둡지 않았다. 곳곳에서 터지는 폭발음과 타오르는 불꽃 앞에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이 숲은 환하게 빛났다.

부욱!

촤아아악!

크아아아-!

“시끄러!”

로얀은 떨어지는 운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실리아의 몸을 난도질했다.

“이것보다 더! 더한 고통을 내 동생이....... 으아아아!”

콰드득!

부우욱!

크아아아-!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온몸에 힘이 빠진 데다 꼬리까지 잘린 이실리아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로얀은 그녀를 페르디난드나 루시어스처럼 빨리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검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이실리아의 눈동자가 감겨져 갔다.

어느 순간 하늘을 뒤덮던 거대한 운석이 로얀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움직임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파지지직!

콰가가강!

운석이 로얀을 덮치기 직전 운석이 하늘에서 부서져 내렸다.

하늘에서 부서진 운석의 잔해만이 로얀의 등을 두들겼고, 그는 계속해서 이실리아를 도륙해 나갔다.

차가운 얼굴로 미친 듯이 그녀를 난도질하는 로얀의 주위로 많은 수의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스르륵.

모두 모습이 각기 달랐지만 단 하나 공통된 점이 있었다. 모두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며 모두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로얀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날아오는 운석들에 달라붙으며 운석을 파괴했고 그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검은 그림자들에게 보호받으며 로얀은 과거의 모든 분노를 이실리아를 향해 퍼부어 나갔다.

쏴아아아-!

그렇게 로얀은 과거의 아픔과 현제의 분노를 비와 함께 씻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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