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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붉은 눈물 (33/42)

8장 붉은 눈물

붉은 눈물

엘라임이 로얀을 안고 공간이동을 해 도착한 곳은 어느 동굴 안이었다.

그 사막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깊은 산의 호수 안에 있는 수중 동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동굴 안은 물로 가득 차 있지 않아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물론, 동굴의 깊숙한 곳은 땅으로 뚫린 구멍으로부터 빛이 미세하게 들어왔다.

맑은 물이 흐르는 데다 물의 정령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그 미세한 빛을 반사시켜 안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동굴 속은 어둡지 않았다.

물의 정령들은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엘라임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 곁에 로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의 정령들은 자신들의 왕인 엘라임이 로얀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물의 정령들이 아름다운 빛이 되어 로얀과 엘라임을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밝혀주었다.

로얀의 품에 안겨 있던 엘라임이 그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살짝 물러나려는 순간, 그녀는 힘없이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엘라임!”

로얀은 자신이 당연히 브레스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 그것을 막아선 엘라임을 보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본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자 로얀은 크게 놀라며 그녀를 받쳐 안았다.

엘라임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차가워 보이던 평소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하아, 하아.......”

엘라임이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뿜었다. 예전처럼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색이 너무도 창백했다. 푸른빛을 띠고 있는 입술 하며... 마치 심한 병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령왕이 병에 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얀.......”

그녀는 힘겹게 파리한 입술을 움직이자 로얀은 항상 강해 보이던 그녀가 너무도 아파하는 모습에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 어떻게.......”

“하악! 이 세계의 율법을 어겨서 그, 그런 거야.”

분명 엘라임은 얀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어겼고, 중간계로 백 년간 올 수 없다는 제약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걸까?

“무, 물은 공기 중에도, 어디에도 존재해. 하악! 언제나... 로얀을 지켜보고 있었어.”

“더, 더 이상 말 하지 마!”

로얀은 자신의 품속에서 너무도 힘겹게 말하는 엘라임을 꽉 껴안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시, 시간이 없어. 하아! 로얀은 그때 나와 헤어지고 난 후로... 한 번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어. 오직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아, 아파 했어. 하악! 난 그, 그게 너무 싫어. 왜 로얀은 자꾸 아파만 하려는 거야. 저, 정말 바보같이.”

그녀는 로얀이 카엔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 후로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제약 때문에 중간계로 올 수가 없었다.

로얀이 기억을 잃고 자신을 찾을 때에는 솔직히 기쁘기도 했지만, 기쁨보다는 로얀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더 마음 아팠다.

아무리 봉인이 풀림과 함께 찾아온 시련이자 힘의 대가라고는 하지만 설마 기억을 잃을 줄이야! 전대 다크로얀이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로얀이 또다시 드래곤에 의해 죽임을 당하려 하자 그가 또 한 번 고통을 겪는 것을 보기 싫어 그녀는 율법을 어기고 중간계로 억지로 내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나 엘라임은 지금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그녀는 바로 정령계로 강제 소환될 것이다.

“난 괜찮아. 난 정말 괜찮으니까.......”

“하악! 이제 더,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엘라임이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내뱉자 로얀은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떨리는 그의 손을 엘라임이 잡았다.

“야, 약속해 줘. 나는 정령계에서 쉬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줘. 내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줘.”

그녀는 로얀에게 더 이상 드래곤을 향해 검을 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드래곤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가 또 한 번 죽음을 겪고 여지없이 찾아올 고통을 겪는 것이 걱정되어 이런 약속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약속할게.”

증오스러운 이리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로얀은 블랙 드래곤 카엔을 죽임으로써 이미 복수의 절반을 했기에 눈앞의 엘라임을 택했다.

그는 이리아의 모습을 깨끗이 지워버리며 그렇게 말했고, 엘라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편안한 미소를 띠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

그러자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로얀의 검은 눈동자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내 마음도 너를 좋아해. 너무나도 널 좋아해.”

그의 이 한마디에 엘라임의 눈동자가 떨려왔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로얀의 입술과 엘라임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화아아앗!

그러나 입술이 닿는 순간 터져 나오는 밝은 빛을 보고 느끼며 로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빛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파핫.

그리고 엘라임은 푸른 빛의 가루가 되어 동굴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령계로 강제 소환 당해 버린 것이었다.

* * *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갑자기 나타나 로얀을 데리고 사라져 버리자 이실리아, 루시어스, 페르디난드는 한참 동안 허공에 멍하니 떠 있었다.

그 극적인 순간에 어째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나타난 건지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물의 정령왕이 자신의 일을 망친 것은 분명했기에 이실리아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어부의 마음이었다.

이실리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로얀을 여기에 가두기 위해 들어간 최상급 정령이 몇 개였으며, 그의 손에 사라진 몬스터들이 몇 마리이던가? 그는 이실리아의 계획을 철저히 부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말이다.

“쫓아가자.”

분노에 떠는 그녀의 입에서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지금의 그녀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페르디난드는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루시어스는 달랐다.

“언니, 여기서 그만 하는 게... 쫓아가서 죽이면 다른 드래곤들이 우릴... 컥!”

루시어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짧은 거리를 텔레포트하여 도착한 이실리아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윈 개나 줘버려! 난 나의 계획을 부순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해.”

“아... 아, 알았어.”

루시어스가 힘겹게 말을 내뱉자 그제야 이실리아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반드시 찢어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이실리아는 즉시 엘라임이 공간이동한 곳을 찾기 위해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이 세 마리씩이나 뭉쳐 있기에 엘라임의 행방을 찾는 것은 쉬웠다.

그곳은 여기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여름의 대륙에서 유일하게 나무와 풀로 가득한, 축복받은 산이라 불리는 프리암이라는 산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엘라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엘라임이 로얀을 데리고 수중 동굴로 이동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프리암의 이 호수는 깊고 맑아 물의 정령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마나의 흐름을 지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실리아를 포함한 세 마리의 드래곤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산에 물이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원래의 성격대로 물을 모두 증발시켜 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산은 돌산이 돼버릴 테고, 여름의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을 그렇게 만들면 드래곤 로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이실리아는 그 방법 또한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엘라임과 로얀이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한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루시어스와 페르디난드는 본체의 모습으로 산을 돌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은 더 이 주위를 맴돈 그들이었다.

이실리아는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엔...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아름다운 미소를 띠었다.

[응?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났어?]

때마침 이실리아 근처로 날아오던 페르디난드가 그 말을 듣고는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페르디난드, 인간이란 말이야 한없이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일지라도 스스로 죽으러 나올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이실리아는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프리암의 풍경을 보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쿠르르릉!

그녀가 미소를 짓자 하늘이 몸을 떨었다.

하늘을 떠다니던 먹구름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차가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후둑, 후둑!

쏴아아아......!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이실리아의 몸을 적시지 않고 퉁겨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속에서 과거 유희를 하던 중에 만난 눈이 없던 청년과 그의 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를 유난히 좋아했던, 특이하고 강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 청년을.......

* * *

로얀은 동굴 속에서 드래곤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의 정령들이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도 드래곤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쪼르르르......!

로얀이 앉아 있는 곳 앞으로 호수로 나아가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물은 투명하기까지 해 바닥까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고기떼들이 보였다.

그렇게 동굴 속에서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저 멀리서 마나에 말을 실어 말하는 이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엔,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지.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녀의 음성과 말투에 로얀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과거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었을 때 말하던 부드럽고 친근감이 넘치는 그 말투와 음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듣고 싶지 않아도 멀리서 마나에 실려 들려오는 그녀의 말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난 아주 오래 전에 정말 흥미로운 연구를 시작했지. 그건 바로 영혼에 관련된 거였어.]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그렇게 그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실리아는 오래 전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영혼이란 뭘까라는 생각과 함께 실험을 시작했다.

그녀는 지능이 없는 몬스터를 죽여 영혼을 실험하기도 했고 지능이 있는 인간이나 엘프를 죽여 그 영혼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 실험에는 물론 흑마법이 큰 공헌을 했다. 흑마법을 이용해 실험을 하는 동안 그녀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사람마다 영혼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떤 인간의 영혼은 그녀로서도 쉽게 굴복시킬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어떤 영혼은 과연 이것이 그렇게 잘 났다고 나대는 인간의 영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 결과를 얻기까지 그녀의 손에 죽은 생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영혼의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혼을 몸 밖으로 꺼내 실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생명을 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사이 그녀는 더욱 강한 영혼을 찾는 것에 재미가 들려 점점 더 그 이상한 실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혼을 이승에 잡아두고 그녀가 개발한 흑마법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강한 영혼일수록 그녀가 하는 실험 속에서 오래 버틴다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실험을 위해 더욱 더 강한 영혼을 찾기 시작했다.

영혼을 가지고 노는 것은 금기 중에 금기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하고야 말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드래곤 로드도 눈치 채고는 몇 번이나 이실리아를 찾아왔고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만 드래곤 중에서 가장 비상한 머리를 지닌 이실리아가 너무도 철저하게 사실을 숨겼기에 어떠한 증거도 잡을 수 없었다.

현 드래곤 로드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이실리아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감시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더욱 강한 영혼을 가진 생명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일종의 유희이자 실험도구를 수집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희를 떠난 그녀의 목표물은 고대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는 아이였다. 처음엔 그녀도 어디까지나 전설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레어를 조사하러 왔던 로드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고대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그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몇몇 문헌에서 보아왔던 얘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만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게도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조사를 하기 위해 왔던 드래곤 로드의 행동이 그녀에게 또 다른 범죄를 지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다는 그 아이는 최초의 인간이라 할 수 있었고, 그 피는 대대로 그 아이의 자식 중 단 한 명에게만 물려졌다.

그 아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눈동자 속에 금빛 마나가 맴도는 것이 그 아이의 가장 큰 특징이었기 때문에 마나를 보고 느끼는 드래곤인 그녀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의 영혼은 당연히 강하지 않겠는가?

부푼 기대를 지니고 세상에 나온 그녀였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포기하고 다른 이를 찾기 위해 전쟁터를 찾았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인간 중 혹 강한 영혼을 가진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전쟁터를 떠돌던 그녀는 몇 년 후 한 인간 청년을 보았다. 바로 시엔이었다. 눈이 없는 앳된 청년이 이런 전쟁터에 있는 것부터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죽을 고비를 수십 번도 더 넘게 넘나드는 그를 보며 이실리아는 그의 영혼이 그 어떤 이보다 강할 것이라 추측하며 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영혼을 빼내는 것이야 매우 쉬운 일이니 그를 죽이기 전에 이 흥미로운 인간을 좀더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로얀 바로 옆에서 그를 관찰하기 위해 그의 연인이 된 것이었다.

시엔이라는 인간 청년은 아직 어린 나이에 너무도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매번 전쟁터에서 확인시켜 줄 때마다 이실리아는 흥미로워했다.

너무도 오랜 옛날의, 긴 이야기를 한 이실리아는 말을 늦추며 로얀을 자극시켰다.

[그렇게 난 네 옆에서 연인으로 지냈지.]

이실리아는 로얀에게 드래곤 로드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서, 옆에 듣고 있는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마저 놀랄 이야기를 세세하게 풀어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서 두 드래곤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실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인간을 죽이려는 거다!’

“으득!”

차가운 물이 흐르는 동굴 속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로얀은 이를 꽉 악물었다. 하지만 엘라임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율법을 또다시 어기면서까지 여기까지 온 그녀와의 약속이 아니던가!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때? 난 너무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하하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실리아는 마구 웃어댔고,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는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처럼 어느새 이실리아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흐음... 그럼 그 뒷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할게. 여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던 너라면 안 나오고는 못 배길걸.]

이실리아는 로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지금부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라면 로얀이 반드시 스스로 죽으러 나올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시엔이 여동생이 있던 마을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말이야.]

로얀이 친구 얀이 읽어주는 동생의 편지 내용을 듣고는 용병생활을 정리하고 마을로 간다고 하자 이실리아는 속으로 아쉬워하며 그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녀가 같이 가자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로얀과 그녀는 레이나가 있는 팔레인까지 같이 오게 되었다.

기회를 놓친 것을 분해 하며 짜증스러워하고 있을 때 이실리아는 한 소녀를 보았다. 마을 앞까지 나와 자신들을 반겨주는 레이나라는 소녀...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을 맴도는 금색 마나!

그랬다. 바로 레이나가 그 피를 타고난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이자 로얀의 어머니인 메리엘이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 이유도 그 피를 타고나서였다.

또한 기억을 잃은 레이나가 빠르게 마을 생활에 적응해 가고 뭐든 빨리 배웠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실 메리엘과 나르크가 빛의 숲에서 숨어 살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랬기에 이실리아가 그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엘프들과 페어리들만이 산다는 빛의 숲에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실리아는 그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반갑게 레이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즐거워하는 목소리를 들은 로얀은 미소를 지었었다.

아무튼 팔레인에서 이실리아는 만나기 싫은 놈을 만나야 했다. 바로 블랙 드래곤 카엔이었다.

마법사로 분해 유희를 즐기고 있던 그도 레이나의 눈동자 속에 담긴 금빛 마나를 보고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술자리에서 카엔의 정체를 일부러 말해 버렸다. 여기에는 치밀한 그녀의 계획이 깔려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잔인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카엔은 신기한 힘을 지닌 레이나를 죽이는 것이 아까웠지만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이실리아가 옆에서 드래곤 족의 법칙 운운하며 그를 부추겼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브레스까지 날려버렸다.

이실리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혼이었기에 그녀는 그날 죽은 레이나의 영혼을 잡았다. 또한 로얀의 영혼까지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영혼은 하늘로 치솟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레이나의 영혼만을 데리고 온 이실리아는 자신의 레어에서 그 영혼을 상대로 갖가지 실험을 했다.

생명체의 영혼에 어떤 힘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흑마법으로 영혼을 쥐어짜기도 했고, 어째서 영혼은 사물을 통과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금단의 마법으로 만든 이상한 약을 주입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영혼을 찢고 부수는 행위였고 그에 따른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미 죽은 상태인 레이나는 끊임없이 그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녀가 저승에서 편안히 잘 살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로얀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실리아는 로얀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실리아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다 영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다는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영혼들을 가지고 그 실험을 백 번도 더 했지만 백이면 백, 원래 몸의 주인 영혼과 그녀가 억지로 넣은 영혼은 둘 다 부서져 버렸다.

아니, 이것은 당한 영혼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봐 아예 세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레이나라는 영혼으로 계속 실험을 하다가 어느 정도 질린 그녀는 바로 그 마지막 실험을 행했다.

그녀의 목표가 된 사람은 바로 팔란 왕국의 엘레나 공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연히 지나다 본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공주인 주제에 궁에서 편안히 지내다 죽을 것이지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돕는 그녀가 왠지 거슬렸던 것이다.

이실리아는 왠지 모를 스릴마저 느끼며 왕성에 잠입해 레이나의 영혼을 엘레나의 몸 안에 집어넣었다.

실험은 대 성공했다.

엘레나의 영혼은 이실리아가 저승으로 가기 전 붙잡아 그 마지막 실험으로 부숴버렸다. 또한 어떻게 된 일인지 엘레나의 기억은 자신의 몸에서 떠나기 전 그 레이나의 영혼에 새겨졌다. 이건 이실리아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튼 레이나는 엘레나의 몸에 무사히 자리 잡은 것이다.

그 후 이실리아는 실험의 결과물을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로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레어 속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물론 떠나기 전 두 개의 기억을 지닌 레이나의 머릿속에서 레이나였던 그녀의 원래 기억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실리아는 그동안 그녀의 이런 실험을 아는 몇몇 드래곤에게 나름대로 입막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이실리아가 그런 짓까지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너 미쳤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상관없어. 그 좋은 결계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무리 신이라 해도 중간계에서는 반쪽짜리일 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한 이실리아는 다시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레어 속에 가만히 있는 것은 그녀에게 고문이었는데, 때마침 카엔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친한 드래곤을 모아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솔직히 그녀는 카엔의 죽음에 기뻐했다. 그는 그녀의 실험에 대해 알고 있는 몇몇 드래곤 중 한 명으로, 그 사실을 빌미로 이실리아에게서 보물을 가장 많이 뜯어갔기 때문이다.

카엔의 죽음이 이상해 조사하러 간다는 말에 로드는 미심쩍어 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카엔이 인간에게 죽었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레이나가 죽을 때 곁에 없어서 그 영혼을 놓친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다시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게 된 거야. 두 남매의 영혼이 나란히 내 장난감이 되다니, 우린 정말 인연인가 봐. 아하하하!]

“크으으으.......”

로얀의 꾹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레이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이실리아의 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아파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아니 온몸이 불에 지진 듯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희생된 엘레나라는 여인의 영혼도 안됐지만 로얀은 지금 자신을 오빠라 부르던, 엘레나의 모습을 한 레이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친오빠인 그를 사랑한다며 떠나간 레이나의 마음은 또 뭐가 되는 걸까?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전쟁터에서 이실리아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때 그녀를 마을에 데려오지만 않았더라면......!

스윽.

그가 흐르는 물을 향해 몸을 돌리자 엘라임의 명을 받은 물의 정령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처음 느껴보는 무섭고도 이상한 기운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말... 이번 싸움만 끝나면 널 몇백 년이고, 몇천 년이고 기다릴게. 미안해, 엘라임.......”

첨벙.

로얀은 그렇게 물 속에 몸을 담갔다. 여기서 호수 속을 헤엄쳐 나가야 지상인 것이다.

로얀은 아픈 몸을 이끌고 와준 엘라임과의 약속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깨버린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촤아악......!

호수의 아름다운 물을 뚫고 로얀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쏴아아......!

그런 그를 차가운 빗방울이, 세 마리의 드래곤이 반겨주었다.

[거봐, 나온다고 했지? 이래서 인간이 어리석다고 하는 거야. 아하하하!]

배를 감싸고 웃는 이실리아를 쳐다보며 로얀은 입술을 깨물었다.

광기 어린 이실리아의 웃음을 보고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녀가 같은 편이라는 것에 안심하며 그들 또한 로얀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왠지 로얀이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 그들이었다.

스르릉.......

로얀은 조용히 에리오네를 뽑았다.

웅웅웅......!

주인의 괴로움을 느낀 것일까? 에리오네가 유난히 검신을 떨며 구슬픈 울음소리를 흘려냈다. 그리고 황금빛 오러를 눈물처럼 흘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뛰었다. 그의 영혼이 눈앞의 드래곤... 정확히 이실리아를 찢어 죽이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두 번이나 지켜본 그였다.

레이나가 팔레인에서 죽기 전 자신이 혼돈의 정령왕이 되었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었을 거라 로얀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에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자신 때문에 아파했던 동생이 또다시 허무하게 떠나간 것이다. 그동안 이실리아의 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두근두근두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몸을 떨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세 마리의 드래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나누고는 전투 준비를 했다. 아니, 하려 했다.

푸욱!

드래곤을 향해 날을 번뜩이던 에리오네가 방향을 바꾸어 주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땅의 숨결까지 꿰뚫고 나온 에리오네가 자신의 주인인 로얀의 붉은 피를 머금었다.

스윽.

로얀은 목에서 끓어 나오는 피를 입으로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핏발이 선 그의 눈에서는 진하디진한 피눈물이 그의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의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아픔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세 마리 드래곤 모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에리오네의 그립을 잡고 있던 로얀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부릅떠진 채로 붉은 피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

「혼돈의 정령왕」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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