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천사 아델레이트 (31/42)
  • 6장 천사 아델레이트

    천사 아델레이트

    드넓은 창공 위로 검은 선이 그어졌다. 흑빛 보석 가루를 뿌리며 날아가는 정체불명의 그것!

    슈아아앙......!

    바람을 찢는 굉음과 함께 구름을 흩뿌리며 하늘을 질주하는 그것은 검은 날개를 등에 단 로얀이었다.

    그 모습에 하늘을 누비던 수십 마리의 새들이 화들짝 놀라며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

    지상의 사람들이나 다른 존재들이 자신이 검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있기에 그는 일부러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사실 인간들이라면 밑에서 어떤 소란을 피우건 상관이 없겠지만 드래곤이나 다른 존재라면 충분히 성가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슈아아앙......!

    구름 뒤 하늘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천계는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천계나 마계 모두 어디에 있는지 발견된 적은 없지만 분명한 건 정령계처럼 마계나 천계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검 속에서 잠을 자는지 파라무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요한 침묵 속에 로얀은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드래곤이 나는 것보다 빠르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슈아아앙......!

    로얀의 한 손에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이는 지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빛의 성지가 표시된 지도였다.

    오래 전 땅 속에 묻힌 빛의 정령들의 고향이자 빛의 성지라 불리는 곳은 의외로 찾기가 쉬웠다. 우연인지 어떤지 드림 스톤이 있던 던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데다가 로얀이 높은 하늘 위에서 드래곤보다 더 빠르게, 자유자재로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로얀은 그곳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박.

    로얀의 발이 모래 속에 살짝 파묻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질리도록 보아온 모래의 바다였다.

    휘오오오.......

    모래의 바다가 로얀을 반기며 출렁였다.

    스윽.

    로얀은 묵묵히 손에 들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때 만났던 빛의 정령이 온 건가?”

    그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마치 용암 덩어리가 땅을 파들어 간 것처럼 타원형으로 매끄럽게 뚫려 있는 거대한 굴을 직시했다. 그 안쪽에서는 밝은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굴을 쳐다보는 순간 예전 엘라임과 빛의 정령을 만났을 때 빛의 정령은 빛의 성지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천족과 함께 중간계로 내려왔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저 굴 안에는 빛의 정령과 천족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스윽.

    탓.

    로얀은 지도를 품속에 구겨 넣은 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파라라락......!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땅의 숨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손을 벌려오는 바람에 거칠게 펄럭거렸다.

    파라락!

    얼마나 밑으로 떨어져 내렸을까? 몇 분이 지나서야 로얀은 땅을 다시 밟을 수가 있었다. 그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쿠쿵.

    로얀의 발이 지면을 밟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의 발은 무릎까지 땅에 박혀버렸다.

    콰드득!

    후두둑.

    땅 속에서 발을 빼내 지면을 새롭게 밟던 로얀은 순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화아아앗!

    갑자기 전신을 엄습해 오는 밝은 빛 때문이었다.

    태양도 정면으로 보는 로얀이기에 빛으로 인한 고통은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살며시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보다도 더 밝았다.

    파지지직!

    [우갸갸갹!]

    마침 마검 다크리온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가늘게 떨리더니 그와 거의 동시에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났는지 파라무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로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이 그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무슨 돌인지 모를 새하얀 돌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밝은 빛은 바로 그 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길게 뻗은 통로가 그 새하얀 돌로 온통 뒤덮여 있었는데, 돌들이 뿜어내는 밝은 광채에서는 상당한 신성력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괜찮나?”

    주위의 광경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로얀이 그제야 다크리온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파라무트는 마족이었고, 마족과 상반되는 힘이 바로 신성력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괜찮지. 갑자기 느껴진 신성력에 따끔거렸을 뿐이야. 이 정도 신성력에 발록의 수장인 내가 상처를 입을 리가 없지! 으하하하!]

    “.......”

    다크리온 속에서 웅웅거리며 말하는 그의 말엔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로얀은 다크리온의 그립을 잡고 뽑았다.

    스릉.

    흑색의 마검 다크리온도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 광채 앞에서는 밤하늘에 빛나는 반딧불에 불과했다.

    묵직.

    다크리온은 파라무트의 몸무게만큼(?) 묵직해진 듯했다. 사실 발록이 본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의 파라무트의 몸무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였지만.......

    스윽.

    로얀은 다크리온을 하얀 벽 쪽으로 옮겼다. 당장이라도 다크리온의 검신이 벽에 박힐 것만 같은 순간!

    [자, 잠깐!]

    스윽.

    [상처는 입지 않지만 기분은 무진장 더럽다고! 원하는 게 뭐냐?]

    “조용히 있을 것.”

    [.......]

    스릉.

    로얀은 나직이 말하고는 다크리온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뚜벅뚜벅.......

    하얀 돌이 사방에 깔려 있는 통로를 걷자 로얀의 발걸음 소리가 어느 동굴 속보다도 크게 울려 퍼졌다.

    밑으로 떨어질 때에 비하면 눈앞에 펼쳐진 통로는 무척이나 짧은 편이었다. 이윽고 로얀은 통로에서 빠져나와 넓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사각의 방이 끝이 아니었다. 맞은편에 또다시 통로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의 벽도 신비한 그 돌이었는데, 그 위에는 빛의 정령으로 보이는 둥근 구들이 즐겁게 노는 것이 조각되어 있었다.

    [와아.......]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조각(?)도 볼 수 있었다. 감탄성까지 내는 그 조각은 둥글둥글한 몸에 큼직한 두 눈이 붙어 있는 하얀 구체였다.

    “윌오위스프.......”

    그렇게 중얼거린 로얀은 그 구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벽면에 새겨져 있는 조각을 보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로얀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곳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호오, 빛의 정령이군! 근데 왜 저리 퉁퉁 불었지?]

    실로 오랜 세월 만에 다시 만나는 빛의 정령을 보고 잠깐 조용하게 있던 파라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뚜벅뚜벅.......

    그러나 로얀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눈앞에 있는 빛의 정령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중간계에는 빛의 정령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빛의 정령은 바로 엘라임과 함께 만났던 빛의 정령일 터였다.

    턱.

    움찔.

    로얀의 손이 조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윌오위스프 위를 덮쳤다. 그러자 윌오위스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허걱! 다, 당신은!]

    몸을 돌려 로얀을 본 윌오위스프는 순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곧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있던 로얀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오랜만이군.”

    [응? 아는 사이였나?]

    윌오위스프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번에 만났던 다크로드에 대한 공포심이 살아나면서 여기 어딘가에 그가 있는가 하고 찾는 것이었다.

    [어이, 빛덩아! 이 몸은 여기에 있단다.]

    웅웅웅......!

    파라무트가 다크리온을 진동시키며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왔다. 그냥 다크리온 밖으로 나오면 될 것을 끝까지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그였다.

    [거, 검이 말을! 아니, 아니, 에고 소드라면 말을 할 수가 있지. 아냐! 에고 소드의 목소리는 주인에게만 들리는 건데!]

    혼자서 횡설수설하는 윌오위스프를 로얀은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반응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쯧쯧쯧! 이 몸은 검 안에 갇힌 게 아니라 잠깐 쉬고 있는 거다. 고로 에고 소드가 아니란 거지. 그건 그렇고 넌 뭘 처먹고 그렇게 자란 거냐? 어디 한번 갈라볼까? 흐흐흐.......]

    웅웅웅!

    파라무트의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크리온이 웅웅거렸다.

    [으아아아......!]

    그의 말에 윌오위스프는 비명을 지르며 사각 방을 뱅글뱅글 돌았다.

    스릉.

    그때 다크리온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그래, 좋아! 갈라보는.......]

    그그그극!

    신이 나서 그렇게 외처던 파라무트의 음성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검을 뽑아 든 로얀이 하얀 벽면을 향해 다크리온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으갸갸갹!]

    하얀 가루를 튀기고 벽에 굵은 선을 남긴 다크리온이 파라무트의 비명소리와 함께 다시 검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파라무트는 침묵했다.

    “넌 왜 여기에 있지?”

    로얀은 아직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윌오위스프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어떤 물건을 찾으러 왔다는 그가 왜 여기서 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이 왔을 천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아델레이트님께서 방해하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셔서요.]

    [저기, 그 아델... 무시기가 누구냐?]

    “천사다.”

    로얀은 넌지시 물어오는 파라무트에게 그렇게 짧게 대답해 준 뒤 다시 윌오위스프에게 뭔가를 물으려 했다.

    [흐흐, 천족 자식이 여기 있단 말이지? 으흐흐! 오랜만에 천족의 피를.......]

    턱.

    파라무트의 말은 로얀이 다크리온의 그립을 잡음과 동시에 끊어졌다.

    “그 천족은 어디에 있지?”

    [저, 저쪽이요.]

    잔뜩 겁먹은 얼굴의 윌오위스프가 눈으로 로얀이 지나왔던 통로 맞은편에 있는 다른 통로를 가리켰다.

    뚜벅뚜벅.......

    그러자 로얀은 다크리온의 그립 위에 손을 얹은 채 윌오위스프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망설임없이 걸어갔다.

    [같이 가요!]

    로얀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윌오위스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런 그의 뒤를 쫓았다.

    뚜벅뚜벅.......

    로얀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뒤를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가 조용히 따랐다.

    항상 로얀의 그림자 속을 지키고 있던 어둠의 정령 다크로드는 지금 로얀에게로 올 수가 없었다. 이곳 빛의 성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강한 신성력과 빛이 로얀의 그림자를 지워버린 데다가 로얀 자체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크로드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얀이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기운을 얼른 감지하지 못했는데, 다크로드가 어느 정도 왕의 기운을 감지하려 했을 때 또다시 빛의 성지로 인해 그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로얀이 그를 직접 소환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정작 로얀은 왕을 찾지 못해 애 태우고 있는 다크로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빛의 통로를 거닐 뿐이었다.

    뚜벅뚜벅.......

    이 통로도 그리 길지 않아 그들은 곧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화아아앗!

    통로를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임과 동시에 밝은 광채가 몸을 덮쳐왔다.

    그곳은 중앙에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고 바닥에는 기이한 문양과 고대어가 가득 새겨져 있는 널찍한 홀이었는데 그 벽면에는 사각의 방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땅 속에 있었기에 여기저기 부서진 곳도 눈에 띄었지만 그 정도로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깎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홀 안에는 총 네 개의 다른 곳으로 가는 통로가 존재했다.

    뚜벅뚜벅.......

    홀 안을 가득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통로를 벗어나자마자 자리에 우뚝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홀 안을 울리고 있는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로얀 그가 아니었다.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가 있었지? 통로를 우연히 발견했다 해도 그 깊이가 상당할 텐데?”

    로얀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건넨 사람은 발목까지 오는 긴 은발에 이곳의 빛과 어울려 빛이 나는 새하얀 옷을 걸친 남자로 조각 같은 얼굴에 눈매가 길어 사뭇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새하얀 옷만큼이나 하얀 피부와 너무도 아름다운 그의 외모는 중성적인 느낌까지 들게 만들었다.

    바들바들.......

    그의 등장에 로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던 윌오위스프가 화들짝 놀라며 로얀 뒤로 몸을 숨겼다. 눈앞의 남자가 바로 윌오위스프 그와 같이 이곳에 온 천사 아델레이트였기 때문이다.

    [찾으시는 물건은 찾으셨나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윌오위스프의 모습을 보고 아델레이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차갑게 보이는 그의 얼굴에 오만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찾았지. 그리고 너의 그 시끄러운 음성에 이렇게 나왔지만.”

    그의 음성 속에는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윌오위스프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델레이트는 뒤를 돌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분수대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 다른 계로 가는 엄청난 대형 마법진이 있을 줄이야... 같은 천족이라 해도 이런 걸 알려줄 수야 없지.”

    그는 사람들이 그리는 착하고 성스러운 천족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담으며 분수대에서 눈을 떼고 로얀을 바라보았다.

    “죽어줘야겠다, 인간.”

    “천족은 처음 보는 것이지만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하하하하! 인간 따위가 감히 어떻게 우리 천족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가?”

    스윽.

    로얀은 아델레이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성검 에리오네의 그립을 쥐고는 서서히 그것을 검집에서 빼냈다.

    스르릉.......

    “응? 성검?”

    웅웅웅......!

    주위에서 느껴지는 신성력 때문에 에리오네는 기분이 좋은 듯 검집에서 뽑혀 나오자마자 백색 광채를 흩뿌리며 맑은 검명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델레이트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르륵.

    한 정령왕과 한 천사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자 겁 많은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잽싸게 부서진 하얀 기둥의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성검... 인간 따위에겐 정말 아까운 물건이지. 내가 친히 접수해 주겠다.”

    [이봐, 로얀! 다크리온을 뽑아야지! 내가 저런 빛돌이보다 못하단 말이야!]

    웅웅웅......!

    로얀이 에리오네를 뽑자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바로 파라무트였다. 그는 에리오네를 빛돌이라 칭하며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스릉.

    쾅......!

    로얀은 파라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크리온을 뽑아 그것을 하얀 벽면에 박아 넣어 버렸다. 그러자 단단히 삐쳤는지 파라무트는 말은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은 이제까지 그가 상대해 왔던 존재들과는 전혀 다른 이였다. 그런 상대를 맞아 무거운 다크리온을 들고 싸울 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호오, 에고 소드인가?”

    아델레이트는 빛의 성지의 신성력 덕분에 마기가 미세하게 느껴지는 마검 다크리온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 마기 때문에 마검이라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마검과 성검을 동시에 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검과 성검의 힘을 검신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말을 하는 마검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드래곤보다 높은, 상당한 존재의 영혼이라면 버틸 수 있겠지만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검이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아델레이트의 결론이 바로 마기를 품고 있는 에고 소드였다.

    다크리온을 벽에 박아 넣은 로얀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아델레이트의 눈에는 에리오네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윽.

    기이이잉......!

    아델레이트가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백색 팔찌가 커지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직 사용법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래, 여기서 너를 대상으로 실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의 아름다운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순간, 그의 팔이 로얀에게로 뻗어졌다.

    스윽.

    후우우웅!

    파지지직!

    로얀도 에리오네를 아델레이트를 향해 겨누며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황금빛이 그의 온몸을 감쌈과 동시에, 주위의 신성력에 반응해서인지 에리오네에게서 평소보다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로얀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상당하자 아델레이트도 움찔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는 자신의 오른 손목 위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팔찌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 빛의 성지는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성검이 이곳의 기운을 받아 강한 힘을 내뿜는다고는 하지만 천족이 신성력을 끌어들여 사용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야말로 이곳은 천족을 위해 존재하는 전투장인 것이다.

    “이것에 이름 같은 것은 없지. 그저 고대의 빛의 정령들이 신처럼 떠받들며 모셔왔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기이이잉!

    쿠오오오!

    팔찌가 회전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짐과 동시에 아델레이트의 몸 속에서 뿜어지는 신성력 또한 배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아델레이트는 이 팔찌의 사용법을 잘 몰랐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바로 신성력을 증폭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아델레이트는 계급이 높지 않은 일반 전투천사였다. 전투천사도 1, 2, 3등급으로 나뉘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3급의 전투천사로 강한 힘에 집착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임무에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팔찌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팔찌가 뿜어내는 빛보다 더 반짝거렸다.

    화아아앗!

    아델레이트의 등에서 순백의 깃털을 자랑하는 두 쌍의 날개가 생겨났다.

    아름답게 빛나는 날개의 등장에 그의 몸은 땅에서 한 뼘 정도 떠올랐고, 그의 신성력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제 그는 천계에서와 똑같이 자신의 힘을, 아니 더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죽어라!”

    후우우웅!

    묵직한 바람의 소리를 일으키며 아델레이트의 오른팔이 휘둘려졌다. 어느새 주먹을 쥔 그는 하얀 깃털을 날리며 로얀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콰드드득!

    그가 지나가자 땅이 굉음을 내며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서는 신이라도 강림한 듯 강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반월.”

    로얀 또한 손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는 이곳에서는 그림자를 이용한 기술은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기술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최상급 정령을 밑에 두면서 생긴 강한 기술은 빛의 성지가 무너질 우려가 있어 쓸 수가 없었다.

    콰가가강!

    밝은 빛에 휩싸여 은은한 흑빛을 뿌리는 수십 개의 반월이 아델레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콰하하항!

    하지만 그 반월들은 아델레이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신성력에 의해 소멸돼 버렸다.

    “흡!”

    쾅!

    로얀은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온 아델레이트의 주먹을 향해 에리오네를 수직으로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콰드드드!

    아델레이트의 주먹과 에리오네의 검신이 부딪치자 폭발음과 함께 로얀의 발이 바닥을 파헤쳐 들어가며 뒤로 쭈욱 밀려났다.

    “훗! 운 좋게 성검으로 오른손을 막았다고는 하나 나머지 왼 주먹은 어쩔 거지?”

    아델레이트는 빙긋 웃으며 놀고 있던 왼팔을 휘둘렀다. 이번에야말로 로얀의 얼굴을 뭉개버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미안하지만 난 외팔이가 아니다.”

    쾅!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로얀의 왼 주먹이 그의 주먹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 와장창 깨져버렸다. 설마 인간의 주먹이 자신의 주먹을 막을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놀란 아델레이트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크윽!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아델레이트는 고함을 내질렀다. 최상의 조건에서 인간에게 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 뿐더러 그의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다.

    끼긱.

    턱.

    아델레이트는 왼 주먹을 활짝 펼쳐 로얀의 왼 주먹을 말아 쥐고는 그대로 그의 몸을 뒤로 내던져 버렸다. 가냘파 보이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말 엄청난 괴력이었다.

    쾅!

    콰르르릉!

    “큭!”

    로얀의 몸이 분수대와 부딪쳤다. 그러자 산산이 부서진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금빛을 뿜어내는 그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기에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으으으!”

    로얀의 멀쩡한 모습에 아델레이트는 광분하며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죽여버리리라!’

    순간, 팔찌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가느다란 하얀 선이 뿜어져 나왔다.

    콰가가가강!

    한 줄기로 흘러나온 그것은 이내 수천 갈래로 갈라져 로얀을 덮치고는 굉음을 일으키며 홀 안의 바닥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피핏!

    “크윽!”

    그 단단한 로얀의 육체에도 가는 상처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곧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백색 광채로 이루어진 선의 공격은 집요했고 공격 하나하나에 강한 힘을 싣고 있었다. 그것은 천족이 뿜어내는 신성력보다 더 밝고 선한 느낌이 드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정령들이 내는 힘이리라.

    콰가가강!

    휘이이익.

    오른팔을 뻗은 채로 로얀이 궁지에 몰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아델레이트가 이윽고 날개를 움직여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으윽.

    츄리리릭!

    높이 떠오른 그가 팔을 거두자 백광의 선이 순식간에 팔찌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엄청나군.”

    아델레이트는 그 짧은 순간에 팔찌가 만들어놓은 엄청난 파괴의 현장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홀의 바닥이 완전히 갈아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얀의 모습을 보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그였다. 파괴되어 있는 돌무더기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로얀의 몸에는 작은 상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큭!”

    아델레이트는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두 팔을 뻗었다.

    휘오오오.......

    그러자 홀 안의 하얀 돌들이 강한 빛과 함께 거대한 신성력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힘은 모두 그의 두 팔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공중에 거대한 빛의 구를 만들었다.

    “하하하하! 이 힘이야! 이 힘이라면!”

    로얀으로 인해 나빠졌던 기분이 확 풀린 아델레이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곧 이 힘의 희생양이 될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존재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윌오위스프와 벽면에 박혀 있는 다크리온 속에서 삐쳐 있던 파라무트였다.

    웅웅웅......!

    다크리온이 강하게 떨리며 거친 음을 토해 내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마기를 풀풀 날렸다.

    화아아앗!

    그리고 다크리온의 검신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불끈불끈한, 갑옷 같은 근육을 가진 남자 파라무트의 등장이었다.

    “흐흐흐... 로얀, 이 몸을 감히 벽에 박아버려서 벌받은 거야. 그건 그렇고.......”

    뚜벅뚜벅.......

    그는 아델레이트가 갈아엎어 놓은 홀 안을 둘러보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하늘에 떠 있는 아델레이트를 바라보았다.

    “허 참! 이래서 면상만 광이 나는 새대가리들이 싫다니까.”

    “마, 마족?”

    아델레이트는 로얀에게 마지막으로 먹일 기술을 준비하다 엄청난 마기에 힐끔 밑을 쳐다봤다가 파라무트를 발견하고는 말을 떠듬거렸다. 여기서 마족이 갑자기 왜 나타난단 말인가? 게다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상당했다.

    쿠오오오......!

    한데 그 마기는 증폭되기까지 했다.

    파지지직!

    “크크큭!”

    파라무트의 온몸을 검은 마기가 뒤덮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이 변할수록 그것을 바라보는 아델레이트의 눈이 크게 확대되어 갔다.

    파지지직!

    파라무트의 전신을 감싸고 도는 검은 마기와 홀 안 가득 퍼져 있는 신성력이 부딪치면서 강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러나 사방에서 달려드는 신성력에도 불구하고 파라무트의 마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쿠오오오......!

    이제 마기가 전신을 짙게 두르고 있어 파라무트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마기가 서서히 파라무트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감에 따라 변화된 모습의 발록 파라무트가 나타났다.

    오우거보다 큰 거구! 그의 피부는 용암을 발라놓은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는 핏빛 갑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워낙에 큰 덩치라 갑옷이 몸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도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으며 간혹 보이는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얼굴도 물론 몸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굵직하고 붉은 그의 뿔은 터질 것 같은 화산을 연상케 했다.

    “크크크... 이 모습, 정말 오랜만이군. 후우웁! 하아......!”

    등에 붙어 있는 너덜거리는 붉은색 거대한 박쥐 날개를 살짝 움직이며 파라무트는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키가 커진 만큼 높은 곳의 공기를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몸을 꽉 채우고 도는 어둠의 기운... 그 하나만으로도 그는 그 오랜 세월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윽! 발록이 어떻게 여기에!”

    아델레이트의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떠져 있었다. 계약을 통해 넘어오는 발록이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밑에 박혀 있는 인간이 지금 발록을 소환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발록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기 때문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하지만 밑의 인간은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자신과 발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넘치는 신성력으로 인해 여기서 마족을 소환하는 진을 그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쿠오오오!

    하급에 속하는 전투천사 아델레이트와 모든 발록들의 수장이자 고위급 마족에 속하는 파라무트와의 대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아델레이트를 바라보는 파라무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그의 거대한 날개가 활짝 펴졌다. 그리고 검은 마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홀 안을 잠식해 가는 그 검은 마기에 대항하여 아델레이트를 중심으로 강한 신성력이 부딪치며 눈부신 스파크를 일으켰다.

    아델레이트는 지금의 자신이라면 발록 한 마리 정도는 가뿐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눈앞의 발록이 발록들의 수장이라는 파라무트라는 사실을 그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지금의 파라무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마족이든 드래곤이든 태어날 때부터 힘이 넘치는 이들은 자신의 힘을 갈고 닦는 일을 귀찮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건 파라무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치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수많은 시간 동안 던전 속에 갇혀 있던 그는 따분함을 이기지 못해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화아아앗!

    콰지지직......!

    파라무트를 향해 아델레이트가 팔을 뻗자 강한 빛이 그를 덮쳤다. 순간, 파라무트의 전신에서 감전이라도 된 듯 스파크가 일자 아델레이트는 묘한 쾌감과 함께 몸을 꽉 채우는 자신감을 느꼈다.

    “아무리 마계의 전투병기라 불리는 발록이라 해도 여기서 난 신이다!”

    콰지지직!

    “쿡쿡쿡.......”

    온몸을 감도는 백색 전류를 보며 파라무트는 음침한 미소를 날렸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 확실히 짜릿하긴 하군, 이 새대가리야. 크흐흐흐.......”

    파핫!

    “......!”

    아델레이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 때 파라무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날아올랐다. 마치 검은 덩어리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했다.

    “주, 죽어라!”

    아델레이트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로얀에게 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백색의 구를 발록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파라무트는 전광석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움직임으로 날아올라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콰직!

    커다란 파라무트의 오른손이 아델레이트의 오른쪽 날개 중 위에 있는 날개를 쥠과 동시에 그의 왼손은 그의 왼쪽 어깨를 쥐었다.

    날카롭고 커다란 붉은 손톱이 각각 순백색의 날개와 어깨에 박혀 들어가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콰직!

    우두둑!

    홀 안 가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헉, 끄아아악!”

    촤아아아!

    눈알이 빠질 듯 툭 튀어나온 아델레이트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마족들의 힘의 근원이 뿔이라면 천족의 힘의 근원지는 순백의 날개였다. 그렇기에 천사들은 날개의 개수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었다. 그런 소중한 날개가 지금 파라무트의 우악스런 손에 의해 뽑혀 나간 것이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붉은 피를 뿌리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터뜨리며 아델레이트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손에 있던 백색 구체는 저절로 소멸해 버린 지 오래였다.

    스으윽.

    파라무트의 기다란 붉은 혀가 자신의 얼굴로 튄 아델레이트의 피를 핥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천족의 피라.......”

    “크아아악! 하악, 하악.......”

    영혼을 뒤흔드는 고통에 온몸을 떨고 있는 아델레이트는 아직 파라무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의 왼손이 아델레이트의 어깨를 아직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족의 피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던 파라무트가 아델레이트의 팔목에 채워져 있는 백색 팔찌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그걸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면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크크크크... 그나저나 날개를 잃은 새는 어떻게 살아갈까?”

    터억, 콰직!

    “크흐흑! 이, 이 자식!”

    아델레이트는 자신의 왼쪽 날개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과 함께 고통이 찾아오자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흐흐흐.......”

    그곳에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백색 날개를 쥐고 있는 파라무트가 있었다.

    화아아앗!

    아델레이트는 여기서 날개를 하나 더 잃는다면 자신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몸 안의 신성력을 모두 끌어 모았다.

    “크아아앗!”

    파하하핫!

    “칫!”

    파라무트는 몸으로 때우기에는 너무도 강한 신성력이 자신을 덮쳐오자 급히 하늘을 날아 뒤로 물러났다.

    “허억, 허억.......”

    힘을 한꺼번에 터뜨린 탓에 아델레이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네 개의 날개 중 하나를 잃은 것이 더 큰 손실이었다.

    “허억! 다음에 만날 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파라무트를 노려보는 아델레이트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델레이트는 그 한마디와 함께 손을 양옆으로 뻗은 뒤 고대어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앗!

    그러자 홀 안 가득 새겨져 있던 고대어와 문양 중 벽면에 그려져 있던 문양과 고대어만이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그 중 빛의 정령들이 평화롭게 노는 석화가 가장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백광의 빛이 홀 안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아델레이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호오, 정말 여기에 그런 마법진이 있었군!”

    파라무트는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아델레이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마법진이 발동했고 그의 모습이 반이나 사라져 있었기에 파라무트로서도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가, 같이 가요!]

    그리고 언제 왔는지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가 파라무트를 스쳐 지나 아델레이트를 감싸는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아아악!

    그렇게 아델레이트와 윌오위스프는 천계로 떠나버렸다.

    “운이 좋은 새대가리인걸? 큭큭!”

    “왜 네가 나선 거냐?”

    지금껏 두 사람의 싸움을 밑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얀이 퉁명스럽게 그렇게 묻자 파라무트는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우리 마계의 마족들은 은원이 확실하다. 네가 나에게 준 은혜는 이걸로도 못 갚지. 안 그래?”

    쿠쿠쿵......!

    이때 빛의 성지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데다가 아델레이트가 팔찌로 빛의 성지를 완전 엎어놓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빛의 정령들이 살았던 빛의 성지가 이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려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여기가 무너지면 이제 다른 계로 가는 방법은 드래곤 산맥의 룬뿐이겠군. 이제 더 이상 재수없는 도마뱀들 안 봐도 된다고 좋아했더니!”

    파라무트는 홀 안을 빙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족과 드래곤은 앙숙관계였다. 드래곤에게 마법을 전해 준 것은 마족이거늘 그 은혜를 잊고 스스로를 마법의 종족이라 칭하는 드래곤들을 마족들이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간계에서 마계로 돌아가는 길은 드래곤 산맥 위에 떠 있는 룬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족들은 인상을 구기며 드래곤 산맥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마족들은 계약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중간계로 유희 나오는 것을 꺼렸다.

    “난 이 마법진으로 마계로 갈 거다. 너도 정령계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나?”

    파라무트는 로얀을 다섯 번째 정령왕인 혼돈의 정령왕이라 머릿속에 각인시켜 놓고 있었기에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로얀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쿠쿠쿵!

    무너지는 빛의 성지... 빛의 성지가 무너지면 엘라임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정말 드래곤 산맥의 룬을 통하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도저히 정령계로 갈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고, 그의 직감은 이리아와의 만남이 코앞에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몽마 나세스의 던전을 통해 고통의 기억이 더욱 뚜렷해지고 복수의 감정이 진해진 지금, 그는 도저히 이리아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도록 내버려두고 엘라임을 만나러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복수심 가득한 자신이 지금 엘라임을 만나러 가봤자 불행해지는 것은 엘라임뿐일 거라는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남겠다는 건가?”

    “.......”

    파라무트의 말에 로얀은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지.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쿠쿠쿡! 심심하면 정령계로 내가 쳐들어갈 테다! 흐흐흐, 그럼 다음을 기약하며... 친구여.”

    우렁차게 외치던 그의 음성 중 끝의 세 글자는 아주 작았다.

    화아아앗!

    날개를 퍼덕여 날아오른 파라무트는 아델레이트와 똑같이 고대어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법진은 아델레이트의 경우와는 달리 흑색 빛을 뿜으며 그의 전신을 뒤덮어갔다.

    이 마법진의 시동어는 어느 계를 가든 똑같지만, 목표 지점을 정하는 것은 시전자가 가진 기운이었다. 예를 들어, 마계로 가기 위해서는 고대어를 중얼거리며 마기를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화아아앗!

    천천히 흑빛에 잠식되어 가던 파라무트는 이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쿠쿠쿠쿵......!

    흔들리는 홀 안으로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빛의 성지가 무너지면서 위를 덮고 있던 사막의 모래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파핫!

    로얀은 몸을 날렸다. 그런 그의 등 뒤에는 언제 튀어나왔는지 검은 날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턱!

    낮게 날며 에리오네를 왼손으로 바꿔 쥔 로얀은 아직까지 벽면에 박혀 있던 다크리온을 뽑아 들고는 홀 위로 날아올랐다.

    쿠쿠쿵!

    순간, 빛의 성지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천장에서 모래와 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로얀은 빛의 성지와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