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깨어나는 기억
깨어나는 기억
이 세상이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로얀의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나뭇잎이 무성했고 하늘로 쭉쭉 뻗은 커다란 나무가 가득했다. 아름다운 꽃들이 저마다 자신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런 그들을 더욱 아름답게 비춰주었다.
그런 아름다운 숲 속을 거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범함 속에 어떤 따뜻함이 묻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 여인의 품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가 안겨 있었고 활짝 웃고 있는 작은 소년이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말 단란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한 가족이었다.
‘뭐지......?’
로얀은 하늘에 둥실 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존재를 그 단란한 가족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을 나는 색색깔의 새들이 그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지금 로얀의 육체는 마치 유령 같았던 것이다.
셀피아의 오아시스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온 직후 펼쳐진 광경이 이것이었다. 자신은 유령이 되어 그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얀이 주위를 둘러보며 그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기려 할 때!
화하학!
눈앞의 풍경과 단란한 가족이 빛에 휩싸이며 지워졌다. 그러자 태양도 마주보는 로얀의 눈이 강렬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화하학!
그리고 다시 바뀐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로얀은 역시 허공에 떠 있었지만 그의 몸을 관통하고 다니던 새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푸른 하늘과 구름도 없었다.
로얀은 어느 건물 안에 있었고 그의 눈앞엔 조금 전 보았던 가족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평범함 속에 따뜻함이 묻어났던 남자는 붉은 눈동자에 괴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그의 품에는 어린 소년이 안겨 있었다.
남자의 손이 점점 소년의 눈을 향해 다가갈 때 멀리서 어린 소녀를 안고 있던 여인이 절규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거침없이 돌진했고 소년의 눈을 관통해 눈알을 뽑았다.
걸쭉한 액체와 붉은 피가 솟아 나왔다. 소년은 당연히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고통에 찬 고함을 질렀다.
흠칫.
남자의 손이 소년의 눈알을 뽑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로얀은 무심결에 자신의 눈을 매만졌다. 그리고 빛의 숲에서 어머니에게서 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저 소년이 나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난 맹인이었던 걸까?’
로얀은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과거에 맹인이었다는 것을 몇 번 스스로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의 일부분을 잃은 지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하학!
로얀이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려 할 때 다시 장면이 바뀌어 버렸다. 마치 무슨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린 소녀와 어린 소년이 보였다. 평화로운 마을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 소녀가 소년의 손을 잡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소년에게는 누구에게나 있는 눈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녀에게 몸을 맡긴 채 무척이나 행복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공에서 그 모습을 보던 로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아악!
그리고 다시 장면이 빠르게 바뀌었다.
이번에는 전쟁터에서 맹인 소년이 처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화아악!
그리고 어느 순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더니 시간이 정지된 듯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그와 동시에 로얀의 몸이 크게 떨리며 그의 눈이 요동쳤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과 거대한 몸집의 드래곤이 하늘에 떠 있었다. 드래곤은 자신이 죽인 카엔이라는 블랙 드래곤으로 그의 육중한 몸이 평화롭기만 하던 시골 마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드래곤의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에는 맹인 청년과 그 품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고, 그를 마주보고 있는 맹인 청년의 비어 있는 안구에서는 스산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콰가가강......!
거대한 드래곤의 입이 열리며 그곳에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인 브레스였다.
덮쳐오는 브레스를 보며 청년은 품에 안겨 있는 소녀를 으스러져라 꼬옥 껴안았다.
“아, 안 돼! 저, 절대로 안 돼!”
허공에 떠 몸을 떨던 로얀이 절규에 가까운 음성을 내뱉고는 브레스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금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콰가가강!
하지만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는 로얀의 몸을 그냥 관통하고 청년과 소녀와 함께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을 날려버렸다.
“으, 으아아아......!”
화아악!
로얀의 고통에 찬 신음성을 뒤로하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는 누가 옮겨놓았는지 검집으로 다시 들어가 있었고 로얀은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 다크로얀이 기억을 사라지게 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잠시 기억을 잃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잃은 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찾는 자는 강한 힘을 얻을 것이다!
전대 다크로얀이 바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시련!
인간의 육체가 나약하다는 것을 감안한 봉인인 것이다. 스스로 기억을 되찾고 자기 자신을 찾는다면 폭주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크으윽......!”
머리를 후벼파는 고통 속에서 로얀은 슬며시 눈을 떴다. 아니, 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장면들 중에서 가장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허공을 가득 메운 드래곤들과 하늘에 떠 있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천족과 마족들... 그들 모두 단 한 존재를 둘러싼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이 광경은 조금 전과는 뭔가가 달랐다. 정말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이들 중 천사의 새하얀 깃털도, 악마의 칙칙한 박쥐 날개도 달지 않은 존재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엘프의 모습, 어떤 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강한 힘과 위압감을 뿜어대고 있었다. 바로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로얀에게 너무도 친숙한 기운을 풍기는 네 사람이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현재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 이전의 불의 정령왕이었고, 드워프의 모습을 한 노인은 땅의 정령왕이었다. 나머지 초록색 짧은 머리스타일의 남자는 현재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 이전의 바람의 정령왕이었으며 푸른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드리운 여인이 현재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 이전의 물의 정령왕이었다. 물론 그들의 이름 또한 이프리트이며, 실피드이고, 엘라임이었다.
그들 중에서 당연히 물의 정령왕이 로얀의 눈에 뚜렷이 박혀들었다. 엘라임과 다른 외모의 여인이었지만 너무도 비슷한 느낌을 지닌 여인이었다.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도 같았고 느껴지는 기운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로얀이 아는 엘라임이 아니었다.
“너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냐!”
허공에 떠 있는 많은 이들 중 가장 강한 힘을 뿜어대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눈앞의 존재에게 물었다.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 그는 천사의 날개도 아니고 악마의 박쥐 날개도 아닌, 연기처럼 흐물흐물하지만 결코 흩어지지 않는 검은색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크크크크.......”
긴 검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그는 대답 대신 괴이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과 겉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마족이었지만 모든 마족들과 그들을 이끄는 마왕이 그에게 살기를 드리우고 있는 걸로 봐서는 마족도 아닌 듯했다.
사실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은 눈앞의 존재가 결코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불의 정령왕보다 더 강한 화염을 뿜어대고, 바람의 정령왕보다 더 빨리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땅의 정령왕보다 더 강한 보호막을 만들어내며, 물의 정령왕보다 더 엄청난 치료능력을 가진 데다가 신의 육체에까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로얀은 허공에 떠서 물의 정령왕의 모습을 보다가 멍하니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모여 있는 그 누구보다도 친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 붉은 눈동자의 그가 괴이한 웃음만 짓자 그에게 질문을 했던 백발 노인이 드래곤 족에게 눈짓했다.
쩌억.
쿠오오오......!
수천 마리의 드래곤이 동시에 입을 벌리며 마나를 끌어 모으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색색깔의 드래곤들이 저마다 종족 특유의 브레스를 입에 담는데도 붉은 눈동자의 남자는 비웃음만 흘렸다. 아니, 정면으로 돌진했다.
쇄에에엑!
쿠오오......!
그가 돌진하려 하자 물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이 바람과 물로 그의 온몸을 묶어버렸다. 그러나 물질적인 힘도 엄청난 그였기에 정령왕들은 자신들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콰하하항......!
이윽고 브레스가 그를 덮치자 모든 이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침묵... 모두들 침묵했고 경악했다.
콰하하항......!
드래곤의 브레스가 빨려 들어가듯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에게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양손을 내뻗어 쥐 죽은 듯했던 침묵을 깼다.
콰하하항!
그가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양손에서 오색 빛깔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 족의 브레스였다.
아니, 이제는 그의 양손에서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허공에서도 브레스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콰가가가강!
굵직한 브레스의 비를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브레스의 빛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얀의 눈으로 밝은 빛이 흘러 들어왔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화아악!
다시 나타난 장면에는 그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허공에 떠서 오른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여인... 물의 정령왕이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이미 사라져 있었으면 중간계의 대지는 퍼즐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스윽.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움직였다.
“안 돼......!”
로얀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목이 찢어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이 순간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자신으로 보였고 그 손에 들린 여인이 엘라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푸욱!
하지만 그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의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왼손을 여인의 심장 부위로 찔러 넣었다.
정령왕은 죽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손이 가슴에 박히는 순간 여인의 몸이 흑빛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여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으아아아아......!”
로얀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붉은 눈동자의 남자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뽑혀져 나온 다크리온이 강한 마기와 함께 금빛 오러를 뿌렸지만 모두 그냥 관통할 뿐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멈추지 않았다.
“으아, 으아아아......!”
그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파지지직!
[젠장! 여기서 다크리온을 들고 있는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그때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며 그 속에서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에 삐쭉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로얀의 뒷덜미를 붙잡고 자신이 찢고 왔던 하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크아아아......!”
불빛 하나 없는 칙칙한 동굴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끝 부분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로얀이 긴 흑발을 휘날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꽉 막힌 동굴이라 그런지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왔다.
후웅.
콰가가강......!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허공을 갈랐다. 금빛 오러를 뿌리며 날아간 다크리온은 동굴을 부숴버릴 듯 벽을 깎아버렸다.
“하아... 시끄러워.”
로얀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금빛 오러를 뿌리며 날뛰고 있을 때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듯 삐쭉삐쭉 산발이 되어 있었으나 아무튼 남자답게 생긴 이였다.
로얀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다크리온이 내는 위력은 엄청났기에 지금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했다.
스윽.
하지만 로얀이 아직 검집 속에 들어 있는 에리오네에게 손을 뻗으려 할 때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턱!
로얀의 품으로 빠른 속도로 파고든 그는 다크리온을 쥐고 있는 로얀의 팔목을 왼손으로 붙잡고는 은은히 빛나는 돌멩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뻗었다.
후웅, 퍼억!
팔을 휘두르는 남자의 근육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그의 주먹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로얀의 복부에 박혔다.
“크아아악!”
파지지직!
그 순간, 로얀의 복부에 박혀 있는 남자의 손에서 진득한 마기와 함께 검은 스파크가 일어나자 로얀은 괴성을 지르며 그만 다크리온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챙깡......!
“크아아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로얀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츠츠츳.
무너져 내리는 로얀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빠져나와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의 손에 쥐여져 있는 돌멩이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털썩.
바닥으로 고개를 묻는 로얀을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고 바닥에 놓여 있는 마검 다크리온을 바라보았다.
“일단 드림 스톤이 미쳐가는 정신을 되돌려 주긴 했고... 저 빌어먹을 검만 아니었다면 내가 인간 따위를 구할 일은 없었을 텐데, 운이 좋은 건가?”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돌멩이를 보며 드림 스톤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 정체 모를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 * *
로얀이 던전 속에서 정체 모를 남자에게 구함을 받고 있을 때 셀피아에 남은 다크로드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을 안에 서 있었다.
블러드 보그로 모래인간들을 모두 해치운 그는 곧장 로얀을 찾아 떠났다. 로얀과 바질리스크가 사라진 방향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치솟았기에 의외로 쉽게 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라버린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머리카락까지 빛에 잠기며 사라져 버리는 로얀이었다. 그가 그를 잡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로얀은 그 자리에 없었다.
로얀이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지자 다크로드는 왕의 기운으로 그를 찾으려 했다. 기운만 감지한다면 그에게 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듯 왕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로얀이 사라진 자리에 서서 그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찾을 수 없자 다크로드는 발길을 돌렸다.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콰직.
발길을 돌리는 그의 발에 머리가 박살나 진득한 액체를 흘리고 있는 바질리스크가 걸렸다.
로얀을 사라지게 한 원인이 바로 이놈이었기에 다크로드는 발에 강한 힘을 실어 바질리스크의 몸을 밟고 지나갔다.
화르르륵......!
마을을 태우는 붉은 불꽃은 아직도 여기저기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했다.
사박, 사박.......
마을의 입구 쪽으로 나온 다크로드의 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청년이 보였다. 거만하게 자신과 왕을 바라보던 그 인간 청년이었다.
사박, 사박.......
다크로드는 괜한 데 시간을 뺏기기 싫어 청년을 그냥 지나치려 했다.
“자, 잠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청년은 다크로드가 다가오자 얼굴이 환해졌다가 그가 자신을 횅하니 지나쳐 가자 당황한 듯 그를 불러 세웠다.
셀피아에서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건너야 했다. 사막은 혼자서 건너기에는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 사막에는 도적 떼도 있었고 갖가지 몬스터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은 사막의 기후였다.
그런 위험한 사막을 혼자서 지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귀족 청년은 다크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고 갔던 모래괴물들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린 다크로드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로드는 청년의 외침을 흘려버렸다.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에 자신을 명령조로 불러 세운 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왕을 찾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네 녀석! 나는 대 백작가의 장남이다! 보아 하니 용병 같은데, 너의 동료는 이미 죽은 것 같고... 나를 안전하게 호위해 준다면 큰상을 내릴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너에게 수배령을 내리겠다!”
멈칫.
멀리 앞서 나가던 다크로드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춰졌다. 그 모습에 귀족 청년은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하하, 어리석진 않구나! 원한다며 내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너를 기사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사박, 사박.......
다크로드는 몸을 돌려 귀족 청년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자 청년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사박.
이윽고 코앞에 도착한 다크로드가 투구 속에서 그 붉은 눈을 빛내며 귀족 청년을 응시했다.
“하, 하! 부담스러우니 물러... 컥!”
턱.
꽈악.
다크로드의 손이 번개처럼 나아가 청년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커컥!”
발이 공중에 뜬 청년은 숨이 막히는지 인상을 구기며 발버둥쳤다.
“누가 죽었다고 했나? 그리고 그분은 나의 동료가 아니다. 나의 주인, 나의 왕이시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는 다크로드의 말 속에는 온몸을 짓누르는 강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손에 잡혀 있는 인간 청년을 던져버렸다.
훙.
털썩.
귀족 청년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쿠, 쿨럭!”
사박, 사박.......
숨을 헐떡이는 인간 청년에게서 시선을 뗀 다크로드는 몸을 돌렸다.
그는 이미 뮤트에서 멀지 않은 숲 속으로 가기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곳에는 로얀이 진화시켜 놓은 어둠의 정령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들을 모두 동원해 로얀을 찾을 생각인 것이다.
로얀이 어떤 위험한 상황에라도 처한 것이라면 모든 어둠의 정령들을 동원해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찾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사박, 사박.......
앞으로의 일이 정해졌기에 다크로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속도로 사막 위를 걸어갔다.
“쿨럭! 나도 가, 같이 가!”
백작가의 장남이라는 귀족 청년도 다크로드의 모습을 쫓아 급히 달려 나갔다.
* * *
다크로드가 애타게 찾고 있는 로얀은 그때 어느 동굴 안에 있었다.
“크으윽.......”
로얀은 깨질듯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여어!”
아니,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이상한 남자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상체를 벗고 있어 우락부락하고 단단한 근육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로얀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살짝 웃었다.
“더럽게 오랫동안 벽만 보고 살아서 말이야.”
오랫동안 동굴 벽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몇만 년 만에 찾아온 로얀이 신기해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어디지?”
로얀의 대꾸에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언제 인간이 자신에게 말을 놓은 적이 있었던가? 왠지 호기심이 동하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인간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지금껏 그 어떤 생명체도 찾아온 적이 없는 바로 이곳에 말이다.
“그래, 그래. 말 까는 게 대수냐?”
그는 약간, 아니 무척이나 특이한 남자였다. 좋게 말하면 성격이 참 쾌활한 호탕한 남자였다.
그는 혼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로얀은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그를 보다 문득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다크리온을 보게 되었다.
로얀의 시선을 느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크리온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스릉.
웅웅.......
그리고 그는 다크리온을 뽑아 들었다. 주인을 선택하는 마검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뽑은 것이다. 로얀의 동공이 커진 건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마검은 그의 손 안에서 가늘게 울기까지 했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지.”
“.......”
이 던전에서 존재하는 저 남자는 몽마가 만들어낸 꿈일까? 아니면.......
로얀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크리온을 장난감 검처럼 휙휙 돌리다가 검집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 던져놓았다.
“뭐, 내가 연장자이니 먼저 할까나? 난 발록들의 수장인 파라무트라고 한다. 그러는 넌 누구냐?”
그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로얀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바보같이 몽마의 함정에 빠져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갇혀 지낸 비운의 마족 말이다.
“다크로얀.”
로얀은 짤막하게 대답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신을 발록이라 소개한 파라무트는 아군일까, 적군일까?
또한 그에게는 물어볼 것이 너무도 많았다. 평소 무관심한 로얀이었지만 지금만큼은 파라무트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흐음... 인간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지?”
턱을 쓰다듬으며 묻는 파라무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찾을 것이 있어 들어왔다.”
“엥? 찾을 거?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파라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신이 갇혀 있는 이 동굴에는 어떠한 물건도 없었다. 인간이 죽을 각오까지 하며 찾을 만한 물건은 더더구나 말이다.
“드림 스톤.”
“뭐?”
‘인간이 드림 스톤을 알고 있다니!’
파라무트는 놀란 눈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서 돌멩이를 꺼냈다. 그것은 검은색의 돌이었지만 흑빛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게 드림 스톤인가?”
로얀은 이렇게 쉽게 찾게 되자 도리어 당황했다. 드래곤이 만든 함정이 고작 이 정도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원하는 물건이 맞나 보군.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도 여기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
역시나 드래곤이 만든 연극다웠다. 하긴 이곳은 물리적 힘에 있어서는 최강이라는 발록의 수장조차 나가지 못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로얀은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굳혔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파라무트는 눈을 빛냈다.
‘어쩌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를 희망이 샘솟는 파라무트였다.
“여기서 나갈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뭐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로얀이 급히 되물었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그에게는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먼저 그 더러운 몽마 나세스 자식이 만든 이곳에 대해 설명해야겠군. 흐음, 그러니까... 이곳은 일단 들어오면 들어온 자의 기억 속에서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을 차례차례 보여주지.
그리고 그 와중에 미쳐버린다면 그냥 한줌 피가 되어 뒈지게 되지만 만약 모두 견뎌낸다면, 마지막엔 그 기억들 중 가장 끔찍한 걸 보여주게 되지. 네가 미쳐 죽을 뻔했을 때가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야.”
로얀 또한 정신을 잃기 전의 그 장면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니, 엘라임과 비슷한 여인을 죽이는, 자신과 너무도 닮은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신을 잃기 전과는 달리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로얀의 눈빛 속에서 그 의문을 느낀 파라무트가 그 답을 말해 주었다.
“드림 스톤에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자를 치료해 주는 기능이 있지. 나는 그걸로 너를 구했고.”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기억도 몽마가 재생시킬 수 있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기억 상실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묻어두는 거니까. 실제로 갑자기 기억을 되찾는 이들도 있지 않나?”
“.......”
“보아하니 기억을 잃었나 보군. 그러니 보통 인간이 마지막까지 통과할 수 있었겠지.”
스윽.
파라무트는 몸을 일으켜 동굴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뭔가를 생각했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마지막에 본 환상 속의 인물 중 가장 강한 자를 죽이는 것뿐이야.”
로얀의 환상 속에서 가장 강한 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검은 날개를 휘날리며 파괴를 행하던 남자!
그러나 그를 죽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강해도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래곤 전체와 싸우는 게 나을 것이다.
“당신은 왜 탈출할 수 없는 거지?”
“몽마 나세스가 마지막에 내게 보여준 환상 속에서 가장 강한 이는 나의 아버지였다. 사실 상대는 누가 되었든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육체에 상처를 입힐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파라무트의 말을 로얀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환상 속에서는 물리력이 없는 유령이 된다는 것을 몸소 겪었으니까 말이다.
“오래 전, 단 한 번 작은 상처를 낸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난 그날 죽을 뻔했지.”
“......?”
로얀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상이 어떻게 사람을 공격한단 말인가?
“어떠한 상처라도 입히면 환상은 상대를 반격하며 공격한다. 때문에 단 한 방에 심장을 꿰뚫어야 한다. 환상의 존재가 그 누구든 간에 환상의 약점은 심장이 있는 가슴 부분이거든.”
사실 파라무트는 아버지의 공격을 받고 이리저리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공격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처음 갇힌 곳이자 드림 스톤이 있는 이곳까지 와서야 겨우 몸을 쉴 수 있었다.
이곳 중심부에는 몽마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태풍으로 본다면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드림 스톤을 부순다면 탈출할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드림 스톤의 재질이 무엇인지는 마계에서조차도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떠한 수를 동원해도 드림 스톤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환상을 부숴버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일격필살! 단 한 방에 끝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외치고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때 본 너의 상대는 도대체 누구냐?”
그때 그도 보았다. 참혹하게 변한 세상과 그 위에 떠 있던 검은 날개의 남자를.......
그런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도대체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났기에 그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
로얀은 그가 누군지 짐작이 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그때 본 환상은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것이었다. 정령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그의 기억까지 자신에게 흘러 들어왔기에 그런 환상이 보인 것이리라.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였다. 모든 봉인이 풀려 있는 혼돈의 정령왕은 차원계를 날려버릴 정도의 힘을 지닌 괴물이었다.
“그를 죽여야 한다면 죽이겠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만약 첫 공격에 실패하면 넌 죽는다.”
“그래도 할 수밖에.”
로얀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파라무트를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가?”
“응?”
로얀의 시선은 어느새 파라무트가 들고 있는 드림 스톤에게로 옮겨졌다.
“뭐, 이 돌멩이를 이용하면 과거의 기억을 꿈처럼 보여줄 수는 있지. 그렇게 되면 기억을 되찾을지도... 하지만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미쳐버린다면... 그때처럼 드림 스톤으로 치료해 주면 되지 않나?”
정말 무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파라무트였다.
“굳이 기억을 되찾을 필요가 있나? 억지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거다.”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 말을 끝으로 로얀은 입을 다물었다.
“휴우,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라니까. 뭐, 그럼 결정난 건가? 오늘은 잠이나 자. 내일 하지 뭐.”
파라무트는 기지개를 켜며 동굴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림 스톤으로 인해 이제 막 깨어난 그에게 또 같은 짓을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파라무트는 로얀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자신은 여기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지금 이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렇게 떨어져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크리온을 어떻게 만질 수가 있지?”
먼저 말을 꺼낸 건 뜻밖에도 로얀이었다.
“그 빌어먹을 검을 내가 만들었으니까.”
파라무트가 눈을 치켜뜨며 그렇게 말하자 못 믿겠다는 의지가 듬뿍 담겨 있는 듯한 로얀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제기랄! 내가 만들긴 했는데, 난 망치질만 했다. 빌어먹을!”
울분을 토하며 파라무트는 다크리온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 한 마왕과 내기를 한 파라무트는 그만 그에게 지고 말았다. 내기의 대가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내기에서 이긴 마왕은 파라무트에게 망치질을 시켰다.
그냥 마음대로 휘두르는 망치질이라면 이렇게 울분을 토하진 않을 것이다. 그 마왕은 하나의 검을 만들기 위해 옆에서 이것저것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대며 그에게 망치질을 시켰던 것이다. 그것도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검의 재료가 오르하리콘에 그 마왕의 뼈가 추가된 엄청나게 단단한 것이라 파라무트는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다 늙은 마왕과 단 둘이 동굴에 처박혀 망치질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재료가 재료인 만큼 물리적인 힘으론 최강인 파라무트를 마왕이 이용한 것이다. 그의 눈에 파라무트는 망치질하기에 딱 알맞은 적임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피와 땀이 서린 다크리온을 그가 잊을 리 없었다. 그에겐 자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검이었으니까.
그의 이야기를 들은 로얀의 생각은 하나였다.
‘바보.’
마왕과의 내기에 져서 천 년 동안이나 망치질을 하고, 몽마에게 속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이곳에 갇혀 있다니... 그는 바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 * *
“크아아악......!”
칙칙한 동굴 속에서 로얀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억을 되찾기 위한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바닥에 앉아 있는 로얀의 오른손에는 드림 스톤이 들려 있었다. 그곳에서 영롱한 빛과 함께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와 검은 전류처럼 로얀의 전신을 감돌았다.
파지직!
평소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던 로얀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로얀은 환상 속에서, 꿈속에서 헤엄치며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봤던 장면을 되풀이해 보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눈을 잃고 가족을 잃는 그 광경을!
그것을 볼 때마다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며 점점 과거의 아픔이 살아났기 때문인지 로얀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 역시 커져만 갔다.
그가 눈을 감고 꿈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붉은 머리의 파라무트는 다크리온을 들고 아무 말 없이 로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크아아! 커억......!”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로얀이 큰 소리로 외친 뒤에야 묵묵히 앉아 있던 파라무트가 움직였다.
“허억, 허억.......”
로얀은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쓰러져 있던 로얀은 파라무트가 다가오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를 꽉 깨물고 일어서는 그의 눈에서 독기마저 느껴졌다.
츠츠츳.
파라무트의 오른손에서 강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드림 스톤을 활성화시키려면 보통의 마기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또 간다.”
파라무트는 자신의 오른손을 로얀의 오른손 위에 얹어놓았다. 그러자 로얀의 손 안에 있던 드림 스톤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검은 전류가 흘렀다. 파라무트의 마기를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파지지직!
그 전류가 잠잠해졌을 때 파라무트는 손을 떼었다. 로얀은 이미 또다시 꿈 속 여행을 시작한 듯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크으윽!”
아니, 그의 비명소리가 서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놈 인간 맞아? 보통 인간이라면 영혼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을 텐데.”
인간들에게 괴물이라 불리는 파라무트가 로얀을 괴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에 익숙한 그라도 드림 스톤과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몽마 나세스의 마법진이 보여주는 환상은 고통스러웠다.
“크아아악!”
조금 전처럼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로얀을 보며 파라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얀의 이와 같은 행동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환상이 끝나고 지쳐 쓰러져 있던 그가 다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면 파라무트가 다가와 다시 드림 스톤에 마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러면 로얀은 다시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로얀이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마족답게 아무 말 없이 드림 스톤에 마기를 넣어주던 파라무트가 반나절이 지나자 그것을 멈추고는 질렸다는 듯이 로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다크로얀! 이제 그만해. 아무리 네가 괴물 같은 인간이라도 더 이상 하면 정말 미쳐버린다니까. 쉬엄쉬엄 하자고.”
“헉헉... 난 인간이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크으윽!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컥! 계속 부탁한다.”
환상 속을 헤매고 나올 때마다 로얀은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기억의 조각이 모두 모여 하나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래. 넌 인간이 아닌 괴... 뭐, 뭐? 너 정말 인간이 아니야?”
건성건성 대답하던 파라무트의 고개가 획 돌아가며 눈이 큼직하게 떠졌다.
“크흑! 혼돈의 정령왕이라고 하지.”
“뭐? 도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거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굴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던 파라무트가 돌연 멈추어 서서 로얀을 바라보았다.
“흠흠,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 다섯 번째 정령왕이라... 그럼 다시 시작하자.”
파라무트는 다시 오른손에 마기를 모으며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로얀이 정말 정령왕이라면 이 정도로 영혼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지지직!
“크으으윽.......”
로얀이 다시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파라무트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의 육중한 근육이 불끈거리며 뚜둑, 소리를 내었다.
* * *
스오오오.......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동굴 안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동굴 속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파라무트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로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휘오오오......!
파지지직!
바람은 로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전신에서 금빛 전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얀이 이런 변화를 보인 것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드림 스톤을 사용한 지 하루가 지나서였다.
이 동굴 안에서 밖을 보면 밖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고, 햇빛 또한 들어왔다. 그러나 동굴 안에서 보는 밖의 풍경은 셀피아의 오아시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눈앞에 바다처럼 펼쳐져 있던 모래는 보이지 않고 푸른 초목만이 가득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 동굴 밖의 풍경인 것이다. 그러나 푸른 초목을 쫓아 동굴 밖으로 나가면 몽마 나세스가 만든 환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햇빛이 들어오고 밖의 풍경이 보이는 관계로 낮과 밤도 구별할 수 있었는데, 로얀이 이런 변화를 보인 것은 햇빛이 스며들던 아침이었다.
로얀은 몰라도 파라무트는 잠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해달라는 대로 계속해서 드림 스톤에 마기를 주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로얀은 밤새도록 환상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함께 로얀의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 속으로 강한 힘이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파라무트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겠지만 파라무트는 그가 큰 상처를 입었다가 이제야 정령왕으로서의 힘을 회복한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렸다.
쿠오오오......!
로얀의 몸 속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갔고 전신을 감돌던 금빛 가루가 그의 피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스르륵.
감겨 있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뜨이자 동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힘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로얀의 흑색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파라무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로얀의 몸 속에서는 강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을 거라는 걸!
그 자신도 그렇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파라무트의 모습은 본 모습이 아니었다.
로얀은 눈을 뜨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레이나... 이리아... 으드득!”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리고 상반된 감정이 담겨 있는 두 이름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로 흘러나온 이름에서는 진득한 슬픔과 아련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고 뒤따라 나온 이름에는 진득한 살기와 처절한 증오가 담겨 있었는데 특히 이리아라는 여인의 이름을 말할 때의 로얀의 모습은 파괴의 마족이라는 파라무트조차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싸늘했다.
그는 돌아온 것이다. 모든 기억의 조각을 맞추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로얀의 몸 속에서 서로 나가려고 아우성치던 힘들은 이제 몸 속 여기저기에 골고루 퍼져 잠잠해져 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심연의 바다 같은 그의 눈동자에서 금빛 잔상을 남기며 붉은 혈광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파라무트, 동굴을 나가면 바로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가?”
“지, 지금 가게?”
“지금의 나라면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환상일 뿐이니까.”
“그렇다면야... 그럼 나와 같이 가지.”
파라무트가 다크리온을 들고 다가오자 로얀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환상은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때문에 같이 나간다고 해도 서로 갈라져 다른 환상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로얀의 그런 의문을 그의 얼굴 속에서 읽은 파라무트가 활짝 웃으면서 다크리온을 들어 보였다.
“난 다크리온 속에 있을 테니... 부탁 좀 할게.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 말이야.”
스오오오!
츠츠츳.
그리고 로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파라무트는 검은 연기로 화해 다크리온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가 다크리온 속으로 들어가자 넙적한 다크리온의 검신 위로 붉은 선이 굵게 그려졌다. 붉은 피처럼 보이는 그 붉은 선은 금방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파라무트는 로얀이 거절할까 봐 잽싸게 다크리온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꺼내주기 싫다 해도 그 자신의 검을 두고 갈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말이다.
로얀은 어차피 자신을 구해 주었던 파라무트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바닥에 있는 다크리온을 집어 들었다.
‘묵직하군.’
파라무트가 안에 들어가서 그런지 다크리온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로얀은 훨씬 무거워진 다크리온을 스윽 훑어본 뒤 검집에 집어넣었다.
‘엘라임을 만나기 전에 이곳에서 끝내야 할 일이 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로얀을 재촉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파라무트였다.
[빨리 가자고! 밖으로!]
다크리온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 있는 파라무트가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동굴 속에서 해방된다는 생각에 파라무트는 들떠 있었다. 그는 로얀이 나세스의 던전을 부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 같은 로얀의 흑색 눈동자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목을 바라보았다. 파라무트가 들어 있는 다크리온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로얀의 허리에 매여 있었다.
“가자.”
로얀의 음성이 낮게 울림과 동시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 퍼졌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단 일격에 전대 다크로얀의 심장에 검을 박아야 한다!
뚜벅뚜벅.......
파지지직!
로얀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동굴 입구로 다가가자 강한 빛이 그를 덮쳐왔다. 몽마 나세스가 만든 마법진이 발동한 것이었다.
웅웅.......
그의 품속에 들어 있는 드림 스톤도 미세하게 떨려왔다. 나세스가 만든 마법진은 주위의 마기를 끌어들여 드림 스톤에 전달해 주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드림 스톤은 지금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파하하핫!
마법진이 발동하면서 뿜어지는 빛 속에는 검은 마기도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로얀의 몸을 집어 삼켰다.
화아아앗!
로얀은 유령이 된 듯 어느새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전대 다크로얀이 서 있었다. 던전 안에서 빠져나갈 때에는 마지막 환상만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콰가가강!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대 다크로얀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종족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던 로얀이 눈동자를 번뜩였다.
츠츠츳.
그의 전신에서 흑색 스파크가 이는가 싶더니 흑색 기류가 그의 등을 휘감았다. 그리고 커다란 뭔가가 솟아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전대 다크로얀이 지니고 있는 날개와 똑같은 것이 그의 등에 생성되고 있었다.
웅웅웅.......
[이, 이봐! 저 괴물이 너였어?]
다크리온 속에서 주위의 모든 것을 보고 있던 파라무트는 그렇게 외쳤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로얀의 모습은 전대 다크로얀과 너무도 흡사했던 것이다.
“내가 아니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이다.”
[뭐? 혼돈의 정령왕이 언제 생겼기에 벌써 전대고 자시고야!]
정령왕이라는 존재는 상급 신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의해서건, 어떤 사건으로건 소멸되지 않는다. 그들이 소멸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소멸시킬 때뿐이었는데, 사실 그 방법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영혼이 소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다시는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영원히 산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중 자신의 이름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자신이 얼마나 이 던전에 갇혀 있었다고 새로운 정령왕이 벌써 다른 이에게 이름을 물려주었단 말인가?
파라무트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하지 않고 로얀은 에리오네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뾰족한 에리오네가 상대를 꿰뚫기에는 더 쉬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르릉.......
마검인 자신(?)보다 에리오네가 이 상황에서 더 필요하다는 것을 파라무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니, 그는 도대체 자신이 여기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로얀은 처음에는 어색하게 움직였지만 곧 자연스럽게 날개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흑색 날개를 퍼덕이며 전대 다크로얀 바로 앞에까지 날아갔다.
로얀은 이 환상 속에서 유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전대 다크로얀은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콰가가강!
전대 다크로얀의 양손에서 강한 마나의 파동과 함께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지옥의 불길이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태우기 시작했다.
스윽.
그 모습을 보며 로얀은 에리오네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 방에! 제발 성공해라.......]
파라무트도 생각을 접고 침을 삼키며 로얀을 응원했다.
“환상을 베는 것은 진심으로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때다. 진심으로 상대를 꿰뚫고 싶을 때.”
스윽.
로얀의 눈동자가 전대 다크로얀의 눈동자와 맞부딪쳤다.
콰하하항.......
에리오네의 검신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순간, 로얀은 그것을 수평으로 눕힌 채 전대 다크로얀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당신은 환상일 뿐!”
인정을 잃은 로얀이기에 이 시련이 너무도 쉬운지도 모른다. 전화위복의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콰지지직!
에리오네가 금빛 광채를 뿌리며 날아가 전대 다크로얀의 심장에 박혔다.
스윽.
푸욱.
그리고 전대 다크로얀의 팔이 로얀의 가슴에 박혔다.
서로의 가슴에 각기 검과 손을 박은 채로 둘은 그렇게 허공에서 정지했다.
[.......]
다크리온 속에서 파라무트는 침을 삼키며 결과가 어떻게 날지 주시했다.
푸화확!
붉은 피가 로얀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왔다. 실패한 것일까?
“엘라임... 조금만 더 기다려줘.”
쩌쩌쩍.
로얀의 말과 함께 전대 다크로얀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전대 다크로얀이 손을 움직인 것은 로얀 때문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날아오던 천족 천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피는 천사의 피였다. 그 천사의 피가 유령이라 할 수 있는 로얀의 몸을 뚫고 뿜어진 것이다.
쩌쩌쩍!
콰지지직!
전대 다크로얀을 중심으로 환상 속의 세계 전체가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더 심해져 이윽고 커다란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콰하하하항......!
로얀은 온몸을 덮쳐오는 강한 빛에 조용히 눈을 감고 마법진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콰하하항......!
부서진 하늘 뒤로 또 다른 하늘이 나타났다. 로얀은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엔 파라무트가 오랜 세월을 지냈던 동굴이 있었다. 넝쿨로 둘러싸여 있는 그 동굴은 음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왠지 훨씬 맑은 듯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로얀은 주위의 초목을 바라보았다.
웅웅......!
[해, 해냈구나!]
다크리온 속에서 파라무트가 말을 더듬거리며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다크리온의 검신에서 붉은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스팟.
그때 갑자기 로얀 앞에 빛이 뿌려지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족이 여긴... 응?”
빛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정말 너무도 아름답게 생긴 남자였다.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그에게서는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짝!
로얀에게 다가오던 청년이 갑자기 박수를 치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로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살아남았잖아!”
청년은 진심으로 놀라며 로얀의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스릉.......
로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크리온을 뽑았다. 그의 안광이 살기로 짙게 물들고 있었다.
“드래곤인가?”
“하하하! 정말 건방지다는 것도 사실이었군. 뭐 아무튼 난 네가 살아난다에 걸었고, 너는 내가 내기에서 이기게끔 해줬으니 내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지.”
청년은 말과 함께 허공에 손을 뻗었다.
츠츠츳!
그러자 허공에서 강한 빛과 함께 자그마한 갈색 두루마기가 나타났다. 청년은 그것을 손에 쥐고 로얀에게 던졌다.
로얀은 얼떨결에 날아오는 두루마기를 왼손으로 받았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다.”
그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무슨 속셈이지?”
“하하!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원래 약속했던 거고, 드림 스톤 같은 쓸모없는 돌멩이는 필요없다. 그리고 내가 줄 선물은 충고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 뛰어봤자, 너희는 그냥 살짝 밟으면 죽는 벌레일 뿐이야.”
스윽.
금발의 미청년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를 힐끔 바라보며 혀로 붉은 입술을 살짝 핥았다.
“빛의 성지로 가지 말라는 소리다. 그곳에는 나와 나의 동족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피식.
“그나저나 이리아... 아니, 내기에 진 이실리아의 얼굴 볼 만하겠는데?”
츠츠츳!
팟!
그 말을 끝으로 금발의 미청년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빠른 속도로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마법을 사용해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이다.
로얀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들 드래곤 중에 자신의 원수 이리아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츠츠츳!
팟.
“이봐, 괜찮아?”
파라무트가 다크리온에서 나오며 로얀에게 말을 건넸다.
“빛의 성지로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난 빛의 성지로 가겠다.”
“그래? 그럼 난 이만 마계로 돌아가 봐야겠어. 이 은혜는 다음에 반드시 갚기로 하지. 그럼!”
츠츠츳.
그의 몸에서 강한 마기가 휘몰아쳐 나오는 가운데 파라무트는 여유있는 웃음을 담은 채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
그는 마기에 휩싸이기만 할 뿐 사라지지 않았다.
“엥?”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네가 갇히고 난 후 중간계와 다른 계를 막고 있던 결계가 다시 강해졌다.”
결국 로얀은 이 말을 시작으로 결계에 대해 긴 설명을 해주었다. 중간계로 내려오면 힘이 반감된다는 것부터 빛의 성지와 룬이라는 통로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파라무트는 힘이 반감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빛의 성지에 관해서는 지금 로얀에게서 처음 들었다.
“이런 젠장할!”
츠츠츳.
팟!
파라무트는 그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계로 간 것이 아니라 로얀의 검인 마검 다크리온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럼 빛의 성지까지 잘 부탁해.]
던전 속에서 상당히 게을러진 파라무트는 걷기도 귀찮았기에 다크리온 안으로 잽싸게 들어간 것이었다.
너무도 뻔뻔하게 로얀에게 그렇게 말한 파라무트는 검 속에서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라무트는 다크리온 전체로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검의 그립만 밖으로 나와 있어도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
로얀은 왼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펼쳤다. 지도를 꼼꼼히 훑어보던 로얀은 지도를 든 상태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츠츠츳!
로얀의 등에서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예의 그 형체가 없는 검은 날개가 생성되었다.
이것은 정령들의 계급이 높아지면서 저절로 생겨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가 정령왕으로서 강해지면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었다. 때문에 로얀이 최상급의 다크니스에게 전해 주지 않는 한 그들은 이 날개를 펼칠 수 없는 것이다.
로얀의 등에 날개가 생겨도 파라무트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걱정했다.
[험험! 그런 난 한숨 자고 있을게.]
“.......”
그러나 로얀은 아무 말 없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파라무트가 다크리온 안에 있는 이상 그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상 로얀의 뒤를 지켜주던 다크로드는 지금 그가 있는 곳으로 올 수가 없었다. 로얀이 셀피아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정령왕과 한 발록의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