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길 잃은 자
길 잃은 자
차가운 대지 위에서 펼쳐진 정령왕과 드래곤의 싸움이 불러온 것은 찬란한 금빛 광채였다.
카엔은 자신의 눈앞에서 찬란한 금빛을 뿜어내는 로얀을 보고 눈동자에 이채를 띠었다.
[크흠, 마검과 성검에 그런 능력도 있었나? 흠, 이거 갈수록 탐이 나는군.]
카엔은 저 금빛 검신이 단순히 마검과 성검의 힘 때문이라 생각는데, 사실 그런 생각에는 인간의 힘을 인정하기 싫은 그의 마음도 반영되어 있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카엔의 말을 들은 둥 마는 둥하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스윽.
그의 고개가 들어올려지더니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블랙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탓!
그리고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차가운 대지를 힘껏 박차고 날아오른 그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카엔의 몸통 부분을 향해 날아갔다. 한데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황금이 뿌려지듯 금빛 광채가 휘날렸다.
카엔은 자신에게로 곧장 날아오는 로얀을 보고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마나 소드 정도면 드래곤의 비늘은 분명 뚫린다. 하지만 마법 중 최강의 방어마법이라 할 수 있는 카이저 실드로 보호받고 있는 상태에서라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해도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카엔은 자신의 마법과 단단한 비늘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카엔의 몸통과 가까워진 로얀이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빛으로 빛나는 다크리온이 바람을 가르며 카엔을 향해 돌진했다.
[카이저 실드.]
밑에서 검을 휘두르는 로얀을 비웃으며 카엔이 여유있게 시동어를 외치자 그의 말은 곧 마법이 되어 그의 몸 전체를 감쌌다.
드래곤이 펼친 마법은 지난번 로얀과 싸움을 벌였던 어둠의 신전의 리치가 사용한 카이저 실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콰하하항......!
밝은 빛의 막이 카엔을 감싸안는 순간 다크리온이 그 막과 격돌했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하늘을 찢는 커다란 파공음에 한껏 여유를 부리던 카엔은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바람을 찢으며 여전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또다시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 순간, 다크리온의 날이 카이저 실드의 막에 살짝 부딪혔다.
콰강!
쿠쿠쿵......!
그 결과 거대한 에이션트 드래곤 카엔은 엄청난 진동을 느껴야 했다. 비록 카이저 실드가 로얀의 검에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상당했던 것이다.
[큭, 썬더 스톰!]
콰지지직!
콰르르릉......!
카엔이 다시 외친 마법 시동어와 함께 하늘에 검은 장막이 덮어 씌워지는 듯하더니 하늘이 진동했다. 7서클의 광범위 마법인 썬더 스톰이었다.
그것은 번개의 폭풍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는 마법으로 강한 살상력을 지녔지만 마나의 소모가 극심해 오래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마나 덩어리를 지니고 있는 드래곤은 썬더 스톰이 필요로 하는 마나가 무궁무진하게 많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쿠오오오!
콰르릉......!
매서운 폭풍이 로얀을 감싸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을 동반한 번개의 폭풍은 그의 몸을 찢어놓으려 했지만 실상은 그의 옷자락 하나 제대로 찢지 못했다.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로얀은 동상처럼 단단해져 번개의 폭풍 따위는 아무런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휘오오!
콰르릉......!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협을 느낀 블랙 드래곤 카엔은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그 누구에게서도 피해나 상처를 받지 않은 채 곱게 자라온 드래곤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 극도로 흥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느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나 다른 종족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다시 본신으로 현신해 자신에게 해를 가했던 존재를 모두 죽이고 마법으로 치료하면 그만이었다. 드래곤들이 유희를 하면서 만나는 적들 중에는 그들 본신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인간은 달랐다.
지금 카엔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로얀이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본체로 현신한 드래곤과 이렇게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빛을 뿌리는 두 개의 검!
과거 검에 미친 드래곤의 저서를 봤을 때가 생각나자 더욱더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카엔이었다.
[크하하하!]
카엔은 드래곤인 자신인 고작 인간 따위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 못 마땅한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 로얀의 모습은 썬더 스톰에 뒤덮인 채 점점 카엔의 시야에서 지워져갔다.
쿠르르릉......!
하늘을 날지 못하는 로얀은 몸을 감싸는 폭풍 때문에 하늘에 떠 있을 수가 없었다.
스으윽.
로얀의 양팔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금빛이 폭풍에 휘날려 아름답게 빛났다.
후웅! 후웅!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썬더 스톰.”
콰르르릉!
휘오오오!
그러자 두 개의 검에서 번개의 소용돌이가 하나씩 튀어나와 로얀의 주위를 돌며 카엔이 만든 썬더 스톰의 폭풍을 쳐내기 시작했다. 이제 7서클까지 복사가 가능한 로얀이 카엔의 마법을 복사한 것이다.
그의 복사 능력은 상대의 힘을 복사하여 다른 모습으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위력이 늘어나거나 사용하는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 로얀이 썬더 스톰을 양손으로 두 개 펼친 것도 그런 특징이 작용해서였다.
콰릉......!
콰릉......!
하늘을 가득 메우고 번쩍이는 번개들이 서로 부딪쳐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콰르릉......!
그와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번개의 폭풍 속에 잠식되어 버렸던 로얀이 서서히 카엔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크! 이 벌레 같은 인간 놈, 죽여주마!]
휘오옹!
쿠오오오.......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너무도 말짱한 모습의 로얀을 보고 카엔은 극도로 흥분해 입을 벌렸다. 그러자 주위의 마나가 그곳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엔은 또다시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를 쓸 생각인 것이다.
카엔은 이번에는 미리 언령을 구사해 로얀의 몸을 묶어두었다. 브레스를 피하지 못하게 할 심산인 것이다. 드래곤이 펼치는 언령 마법은 그들보다 상위의 존재가 아니라면 모든 존재에게 통하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쿠오오.......
로얀이 산성 브레스에 사라져 버리는 상상을 하며 마나를 모으고 있던 카엔의 큼직한 두 눈이 갑자기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스으윽.
뾰족한 에리오네를 든 채 번개의 회오리를 타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로얀의 모습을 그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쿠오오오!
사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로얀은 조금 전 카엔이 쓴 썬더 스톰을 약간 변형시켜 번개의 회오리를 만든 후 그것을 타고 카엔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휘오오오!
로얀과 그의 손에 들린 에리오네가 금빛을 뿌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브레스를 쏘기 위해 높이 날아오른 카엔은 두려움이 일어남을 느꼈다.
쿠오오오!
파지지직!
번개의 회오리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카엔의 몸을 두르고 있는 카이저 실드의 막 위로 전류가 살짝살짝 흘렀고, 바로 그때 로얀이 몸을 움직였다.
번개의 회오리를 그 자신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었기에 카엔과 최대한 가까워졌을 때 그 위에서 뛰어오른 것이다. 덕분에 카엔의 턱 밑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그는 왼팔을 위로 크게 휘둘렀다.
콰가가각!
에리오네가 카이저 실드의 막에 부딪치면서 폭발음을 냈다.
카엔은 인간인 로얀이 자신의 언령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버리고는 날아와 자신의 턱 밑으로 사라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엔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로얀 때문에 지금 너무도 불안했다. 드래곤의 언령 마법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애써 부정하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지금 자신과 싸우고 있는 인간을 골든 마스터라 말하고 있었다.
휘오오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카엔은 턱 밑으로 파고 들어온 로얀을 찾기 위해서 더 높이 나는 수밖에 없었다.
콰가강!
하지만 날개를 움직이려던 카엔은 에리오네의 검신이 감히 뚫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카이저 실드의 단단한 막을 뚫고 자신의 턱 밑까지 파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푸거거걱!
푸화확!
[쿠워어어어억!]
금빛 찬란하던 에리오네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에리오네의 검신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여행은 그립에 묶인 기다란 보라색 끈을 적심으로 해서 끝이 났다. 물론 여행의 시작은 흑색 카엔의 비늘에서부터였다.
카엔의 턱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른 금빛 검이 검은 구름을 머금었다. 워낙 두꺼운 드래곤의 가죽 때문에 검신이 머리통을 완전히 뚫고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살짝 튀어나온 에리오네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이 하늘에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엔은 고통에 찬, 거친 비명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로얀을 향해 쏘려던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는 어떻게 됐을까?
카엔의 입 안에 모이고 있던 엄청난 양의 마나는 이미 대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콰르릉......!
번개의 회오리에서 빠져나온 로얀은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머물고 있었다. 카엔의 머리통을 꿰뚫고 박혀 있는 에리오네의 그립을 잡고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콸콸콸......!
거대한 드래곤의 몸뚱이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블랙 드래곤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바짝 말라 있는 모르드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
[쿠워어억! 크아아악!]
하늘 높은 곳에서 천둥처럼 터져 나오는 커다란 카엔의 음성이 귀를 따갑게 했지만 로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흑색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그의 두 눈은 자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사이에서 착 가라앉은 채 두꺼운 블랙 드래곤의 비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에 찬 너의 비명소리는 하등한 몬스터와 다를 바가 없군. 그것은 너희도 몬스터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도마뱀아!”
그리고 로얀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엔의 발광 속에서도 침착하게, 이번에는 다크리온이 들린 오른팔을 움직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레이나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심장이 요동쳤지만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이었다는 것과 눈앞의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만을 알 뿐 동생의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어 기억을 조작해 자신을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드는 로얀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저 블랙 드래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이 카엔을 보며 분노하고 있었고, 그의 모든 것이 눈앞의 드래곤을 죽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퍼걱!
묵직한 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금빛으로 빛나는 다크리온이 굵직한 블랙 드래곤의 목에 박혔다.
푸화확!
카엔의 머리통을 뚫은 에리오네와는 달리 다크리온은 그의 비늘을 베고 목에 박혔기에 훨씬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턱.
로얀이 에리오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팔에서 힘줄이 솟아올랐다. 순간, 팔을 굽힌 그는 다크리온의 손잡이를 발로 밟고는 카엔의 등 위로 올라가기 위해 거대한 신전의 기둥처럼 굵은 그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마치 암벽을 타듯 카엔의 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목에서 느껴지는 그 이질적인 느낌에 카엔의 몸부림과 고통에 찬 울부짖음은 배가되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그는 마법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오오오!
카엔은 고통 속에서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누볐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발광에도 불구하고 로얀은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오오오!
콰가가가가!
콰르르릉......!
그때, 로얀이 만든 번개의 회오리가 덮쳐왔다. 그러나 이미 그의 품에서 벗어난 힘, 로얀에게는 그것을 조정할 능력이 없었다.
쿠구구구구......!
“큭!”
[크아아악!]
로얀과 카엔이 동시에 비명소리를 흘렸다.
로얀은 번개의 회오리 때문에 카엔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쳐 잠깐 추락하다가 다행히 카엔의 몸뚱이에 꽂혀 있는 다크리온의 그립을 잡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떨어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짤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카엔은 로얀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카이저 실드는 이미 깨졌고 로얀으로 인해 두 군데에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다가온 번개의 회오리가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그것을 건드렸기에 카엔은 고통에 크게 몸부림치며 서서히 지상으로 추락해 갔다.
[쿠오오오오......!]
드래곤의 포효가 하늘을 뒤덮었다. 에리오네가 입에 박혀 있었지만 커다란 그의 머리통을 뚫기엔 검신이 짧았기에 입을 최대한 벌리며 포효를 한 것이다.
카엔이 추락하자 그에게 매달려 있던 로얀도 지상을 향해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 안에 잡혀 있는 다크리온의 그립을 더욱 강하게 움켜잡았다. 차가운 칼바람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콰르릉......!
카엔이 큰 상처를 입고 추락하고 있는 탓일까? 그가 펼친 썬더 스톰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로얀이 만들어낸 번개의 회오리 역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밑에서 로얀과 카엔의 역사에 남을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다크로드를 포함한, 살아남은 다섯 명의 세드니스였다.
스르륵.
하늘을 날 수 없어 밑에서 자신들의 왕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왕과 카엔이 모르드 평원의 차가운 대지로 추락하자 그쪽으로 급히 몸을 움직였다.
* * *
고오오오.......
차가운 칼바람이 로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현재 그는 카엔과 함께 빠른 속도로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쾅! 콰가가강!
이윽고 모르드 평원을 뒤흔드는 굉음이 뒤따라 들려왔다. 위대한 종족이라 떵떵거리던 블랙 드래곤 카엔이 입에 에리오네를 꽂은 채 차가운 대지에 처박힌 것이다.
카엔이 로얀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상대를 얕잡아본 탓이 컸다. 드래곤답게 마법을 이용해 머리를 써서 싸웠다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이 중간계에서 강한 이유는 마법도 마법이지만 그들이 이끄는 엄청난 몬스터의 수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만약 드래곤이 작정을 하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무리 봉인이 하나 더 풀린 로얀이라도 이렇게 쉽게 카엔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크르륵.......]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머리가 들어올려졌다. 그의 입은 그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스윽.
“.......”
블랙 드래곤 카엔의 몸을 배경 삼아 로얀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검은 산이 그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얀의 전신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 피는 모두 카엔의 것이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 카엔의 몸에 매달려 있었던 덕분에 직접적인 충격은 받지 않아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충돌의 여파로 마지막 순간에 퉁겨 나가기는 했지만.......
뚜벅뚜벅.......
로얀은 몸을 일으킨 직후 카엔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검인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은 여전히 카엔의 몸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찬란하게 금빛을 발하던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은 로얀에게서 떨어진 지금은 그것을 모두 허공에 날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크아아아! 헬 파이어!]
화르르르......!
드디어 카엔이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고 정신을 차린 것일까? 로얀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카엔은 몸을 일으키며 드래곤의 대표마법이라 할 수 있는, 로얀이 복사할 수 없는 8서클 화염계 마법인 헬 파이어를 썼다.
콰하하항!
뜨거운 열기가 모르드 평원 전체로 퍼져 나가자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한번 붙으면 꺼지지 않는다는 헬 파이어의 불꽃이 로얀을 덮쳤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로얀에게는 헬 파이어를 막을 검도 없었다. 카엔은 드디어 저 괴물 같은 인간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화르륵!
그러나 불꽃이 점점 바람에 날리며 로얀의 모습이 드러나자 카엔의 눈동자가 커졌다.
[크으윽, 말도 안 돼! 골든 마스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뒤로하고 불꽃 속에서 로얀이 걸어 나왔다. 그러나 헬 파이어의 화염은 그의 옷자락에도 붙지 못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가루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카엔은 그러한 로얀의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검에 미쳤던 드래곤의 저서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금빛 오러를 온몸에 뒤집어쓴 골든 마스터는 오러를 몸에 두름으로써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하는 강인한 육신을 지니게 된다. 아니, 금빛 오러를 뿌리는 단단한 골든 마스터의 육신은 변화하는 기후에 더욱 강하다.>
그래서 카엔 자신이 쓴 헬 파이어의 열기가 골든 마스터로 여겨지는 로얀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한 화염이나 차가운 냉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바람의 속성을 지닌 마법이나 대지 계열의 마법이면 통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카엔은 이제 침착하게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하지만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 로얀은 바로 그의 눈앞에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타탁.
로얀이 지면을 박차고 카엔의 거대한 몸뚱이 위로 올라갔다.
[크르르.......]
바로 방금 전에 냉정하게 전투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던 카엔은 인간이 자신의 등 위에 올라타자 그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화가 치솟은 그는 날개를 움직이려 했다. 하늘로 날아올라 로얀을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앞뒤 정황을 살펴볼 때 인간인 로얀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쿠쿠쿵!
카엔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 진동에 비틀거리던 로얀은 이내 발을 움직여 카엔의 날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턱.
그리고 그는 카엔의 날개를 손에 쥐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카엔은 자신의 날개에 이질적인 느낌이 전해져 왔지만 무시하고 날개를 움직였다.
콰드드득! 부우욱!
[쿠어어억!]
날개를 움직이려던 카엔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모르드 평원이 떠나가라 커다란 비명성을 토해 냈다.
그의 등 뒤에 달린 거대한 날개는 반쯤 뜯겨 있었고 붉은 피를 뒤집어쓴 로얀의 두 손이 그것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팔에서 힘줄이 불끈거릴 때마다 날개는 점점 더 찢어졌다.
부우욱.
[쿠워워워억!]
로얀은 카엔의 등에서 치솟는 피를 맞으며 그 위를 걸었다.
이윽고 다크리온이 꽂혀 있는 카엔의 목 부분에 당도한 그는 손을 뻗어 카엔의 목에 박혀 있는 다크리온의 그립을 쥐었다.
푸욱.
푸화화확!
단단하게 박혀 있던 다크리온이 뽑혀 나오자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카엔이 그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는 순간, 로얀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다시 금빛을 머금었다.
쿵! 쿵! 쿵!
“죽어라.”
미친 듯 날뛰는 카엔을 보며 로얀은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이것을 한 번만 휘두르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카엔의 목은 차가운 대지 위에 뒹굴 것이고 이름뿐인 여동생의 복수도 하게 되는 것이다.
후우웅!
로얀의 오른팔에 힘줄이 솟음과 동시에 금빛을 뿌리는 다크리온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부우욱!
묵직하고 묘한 느낌이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다크리온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카엔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푸화화하학!
쿠쿵!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위대한 종족이라 떠들어대던 카엔은 이렇게 차가운 대지에 머리를 식혔다.
뚜벅뚜벅.......
로얀은 걸었다. 자신의 단 한 번의 휘둘림에 죽어버린 카엔의 머리를 향해 그는 걸어갔다.
턱.
에리오네의 그립을 감싼 보라색 끈의 감촉이 느껴졌다.
푸우욱.
카엔의 머리에 깊이 박혀 있던 에리오네가 금빛을 머금으며 서서히 밖으로 뽑혀 나왔다.
스윽.
로얀의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죽어버린 카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신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푸거거걱!
스거걱!
푸화화확!
로얀이 갑자기 카엔의 머리를 향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온몸에 튀었지만 로얀은 그것을 그대로 맞으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로드.]
멀리서 세드니스들이 다가와 로얀의 주위를 감싼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이 없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왜 내가 레이나라는 나의 여동생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인간의 삶은 어떨까?”
[로드.......]
“그렇게 소중했던 존재에 대한 기억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 과거 내가 맹인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동생의 목소리조차 떠올려지지 않는다.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이 모든 게 거짓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게 빌어먹을 신의 장난이 아닐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실타래처럼 엉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로드와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당신은 그 누구의 손으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왕이시자 단 하나밖에 없는 혼돈의 정령왕이십니다.]
“그런가... 하지만, 하지만 레이나라는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 안 나는 것이 너무도 슬프다. 그리고 괴롭다. 크아아아아!”
콰가가가강!
로얀은 내렸던 팔을 다시 들어 올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둘렀다. 금빛 광채를 휘날리며 허공을 가르던 두 검은 곧 카엔의 거대한 시체에 와 닿았고 붉은 피와 살덩어리를 튀기며 주위를 파헤쳐 갔다.
* * *
몰딘 왕국의 수도인 모르딘에 기이하고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사건이 벌어졌다.
모르딘의 대로 한복판, 왕성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생명체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죽어 있어 더 이상 생명체라 불릴 수 없는 것이었지만.......
웅성웅성.......
그저 거대한 생명체의 시체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를 입고 하늘을 날던 몬스터가 떨어졌다고 보면 되니 말이다. 아주 드물게 정말로 몬스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와이번은 무척이나 포악해 여러 몬스터와 싸움을 많이 벌였고, 심한 상처를 입은 와이번이 하늘을 날다 이곳에 떨어진 적도 아주 오래 전에 한 번 있었다.
하지만 이 생명체를 보고는 도저히 와이번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잘리고 날개가 뜯겨 나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이 생명체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검은색의 단단한 비늘... 이 거대한 생명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본체는 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보기 힘들었다. 아니, 혹 본다 하더라도 그 순간 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드래곤이 드래곤 산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본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뭔가를 파괴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철그덕, 철그덕!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왕국의 병사들이 드래곤의 둘레에 둥글게 서며 그들의 접근을 막아도 끝날 줄을 몰랐다.
이윽고 왕성의 문을 통해 기사들이 발맞추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몰딘 왕국의 현 국왕인 이얀이었다.
갑자기 왕성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중간계 최고의 강자라던 드래곤의 처참한 시체! 그것을 보고 국왕은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여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궁금증을 느끼고 왕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날 왕은 드래곤을 보자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혹 있을지 모를 다른 드래곤들의 복수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그날 이후 드래곤을 부위별로 나눠 마법사 길드에 팔아 넘겼고, 몰딘 왕국의 재정을 확 끌어 올렸다.
드래곤은 어디 하나 값지지 않은 곳이 없는, 그야말로 보물 보따리였던 것이다.
그가 그때 눈물을 흘린 것이 돈 보따리가 도착해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린 것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생긴 돈으로 세금이 줄어들고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백성들은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지난 밤 이곳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드래곤이 어두운 밤 바닥에서 솟아났고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그 주위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무시되었다. 저 거대한 드래곤이 어떻게 그림자 속에서 솟아난다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햇살이 쨍쨍 빛나던 화창한 날에 몰딘 왕국은 거대한 돈 보따리를 손에 넣게 되었었다.
드래곤의 가죽이나 뼈만으로도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나오지만 정말 값진 것은 드래곤 하트였다. 드래곤의 마나가 결집되어 있는 이 덩어리는 가격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이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이 드래곤은 드래곤 하트도 온전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 *
몰딘 왕국이 길에 버려진 드래곤을 주워 부자가 되고 있을 무렵 크라우트라는 곳에서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라우트는 몰딘 왕국에서 빈트러드 제국으로 가는 길 가운데 있는 모르드 평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숲으로 지독하게 덥고 진득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대륙에서만 자라는 굵고 단단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뻗어 있는, 매우 울창한 숲이었다.
콰가가강......!
푸드득!
평화롭기만 하던 그 푸른 숲에 굉음이 터지자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가가강!
쿠쿠쿵.......
굉음이 들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로얀이 검은 흑발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로얀은 양손에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을 쥐고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 금빛 오러까지 씌어져 있는 두 검은 거대한 나무들을 잘라 숲을 파괴해 갔다.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는지 그의 주위는 더 이상 나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자리를 옮기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로얀으로 인해 아름드리나무들이 허무하게 베어졌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크라우트 숲은 사라지고 말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르는 로얀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골든 마스터가 되면서 생긴 엄청난 힘을 그의 몸이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사는 드래곤조차도 죽기 직전 들어섰다는 골든 마스터의 경지를 하루아침에 이루고 그 힘을 얻었으니 그의 몸이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로얀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갑자기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 그의 머릿속에 남겨진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카엔의 브레스가 날아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혼돈의 정령왕으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 후 잃어버린 과거 속에 있던 친구인 얀을 만났고 어머니를 만났다. 그들이 친구이고 부모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없다는 것이 그를 괴롭혔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 속의 한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따라오는 이름이 있었다. 레이나라는 여동생.......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그녀를 위해 살아왔다고 항시 말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그녀와 함께했던 일들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도 한 가지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며칠 전 죽인 카엔과 또 다른 드래곤을 죽여야 한다는 것!
그 또 다른 드래곤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드래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콰가가강!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기억을 부여잡고 로얀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고, 숲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로얀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혼돈의 정령왕인 로얀에게서 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였다.
검은 후드 속에서 암흑과 함께 번뜩이는 두 눈밖에 보이지 않는 다크로드의 모습에서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왕을 걱정하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콰가가강!
“크허헉! 헉헉......!”
벌써 몇 시간 동안이나 검을 휘두른 로얀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금빛 오러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얀은 카엔을 죽인 직후 피범벅이 된 그의 몸뚱이를 보며 남은 세드니스에게 명했다. 얀에게 이 몸뚱이를 가져다주라고 말이다. 얀과 했던 흑섬에서의 약속은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에 한 것이었기에 기억하고 있는 로얀이었다.
다크로드가 로얀의 곁에 있기로 하고 나머지 네 명은 카엔의 몸을 가지고 떠나자 로얀은 모르드 평원을 지나 쉬지 않고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드디어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바로 이 숲이었다. 그리고 그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로드, 더 이상 힘을 쓰신다면 육체가 붕괴될지도 모릅니다.]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며 다크로드가 그렇게 말하자 로얀은 그의 손을 밀치고는 두 검을 바닥에 꽂아 그것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헉헉.......”
거친 숨을 토해 내던 로얀은 성검과 마검의 그립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각각 감고 있는 두 끈은 피에 찌들어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너덜너덜해진 채 길게 늘어져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슥.
로얀은 손을 뻗어 바람에 휘날리는 끈을 잡았다. 부드러운 끈의 감촉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 고통 속에서, 이 괴로움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얼굴만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다크로드.”
[예, 로드.]
“엘라임이 보고 싶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로얀은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그녀라면 자신의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혀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는 몸을 떨었다. 한 번도 정령계에 가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곳에 가는 방법을 몰랐다. 아니, 누구나 아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 산맥의 중심에 떠 있는 거대한 성지인 룬이라는 곳을 통해 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룬은 정령계뿐만 아니라 마계와 같은 곳으로도 갈 수 있는 통로였고, 때문에 드래곤 산맥의 모든 드래곤이 관리하고 지키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리 로얀이라 해도 드래곤들이 바글거리는 그곳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성공 가망성이 없는 일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왕이 너무도 바라고 있었기에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드래곤 산맥의 중심에 있는 룬이라는 곳을 통해 정령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로얀도 알고 있었다. 바로 모든 드래곤들을 죽이고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찮은 인간을 그들이 지키는 성지인 룬에 들여보내 줄 드래곤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전면전은 힘들겠지.”
[.......]
“드래곤과 함께 들어간다면 어떨까?”
다크로드는 순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로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을 잡아 길 안내를 하게 하면 말이야.”
다크로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드래곤이 과연 로얀에게 잡힐 것인지,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었지만 혼자 유희를 즐기고 있는 드래곤을 어떻게 찾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드래곤 산맥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드래곤이 유희 중에 발견한 장난감을 다른 동족 드래곤들이 신경 쓸 리가 없으니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로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나 남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드래곤 산맥으로 가야만 했다.
“그렇군. 함께... 하겠나.”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 산맥 깊숙이 들어간다 해도 룬을 지키는 드래곤의 눈을 피해 정령계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저희 어둠의 정령들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합니다.]
스르륵.
다크로드의 말과 함께 곳곳에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이 숲에 살고 있던 어둠의 정령들이었다.
수백의 어둠의 하급 정령 다크... 칸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어둠의 정령의 수를 과연 측정이나 할 수 있을까.
로얀은 처음 숲 속에 들어왔을 때 어둠의 정령의 기운을 느꼈지만 곧 검을 휘두르며 정신을 잃었다고 할 수 있었기에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로얀은 황폐해진 풍경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거대한 바위 위에 앉은 후 손을 뻗어 검의 그립을 잡았다.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왕과 함께하겠습니다.]
다크로드가 몸을 숙이며 부복하자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수백의 다크들이 조용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드래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반드시 찾아 죽이겠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드래곤 산맥을 뚫겠다. 너희들과 함께!”
화아아앗!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크라우트 숲 전체로 퍼져 나갔다.
쿠오오오!
그리고 그 검은 빛은 곧 어둠의 정령 다크와 그들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다크로드에게 빠르게 스며들었다.
쿠오오오!
그러나 하급 정령인 다크에게는 가는 빛줄기가 흡수되는 반면 상급 정령인 다크로드에게는 굵직한 빛줄기가 쏘아져 나갔다.
“그 누구든 나의 앞길을 막는 자는 죽이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지만 나는 혼돈의 정령왕, 이것을 즐기겠다. 그리고 드래곤 산맥을 넘어 그녀를 만나겠다.”
크라우트 숲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검은 빛 속에서 로얀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의 강한 의지가 하늘 높이 퍼져 나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