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과거의 사슬
과거의 사슬
휘오오오.......
황량한 모르드 평원 위에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시체를 파먹으며 즐거워하던 구슬픈 까마귀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지금 대지 위에는 수백의 인영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인 세드니스와 다크 엘프들로 이루어진 어쌔신 군단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세력 모두 움직임에 소리가 없었다. 발걸음 소리도,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장의 함성소리도 일절 없었다. 그들은 지금 소리없는 침묵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채챙!
스거걱.
그 침묵 속에 금속의 비명소리와 섬뜩한 살 베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지만 그 누구도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았다.
어둠에 속한 종족인 다크 엘프들은 이 황량한 대지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몸을 숨겼다. 그것은 다크 엘프 고유의 기술이었다.
스르륵.
[쉐도우.]
스스슥.
그런 그들의 행동에 세드니스는 그들 나름대로 맞대응했다. 아무리 몸을 숨겨도 그림자는 어딘가에 존재하기에 세드니스는 다크 엘프의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그들을 도륙했다.
어둠 속에 녹아드는 다크 엘프의 기술도 대단했지만 어둠의 정령인 세드니스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쉐도우라는 기술은 어딘가에 있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그림자 속으로 텔레포트되는 특이한 기술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우욱!
푸화확......!
정령인 세드니스와는 달리 붉은 피가 몸에 흐르는 다크 엘프들은 허무하게 죽어갔다. 붉은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이들은 모두 다크 엘프들이었고 세드니스는 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 속에서 세드니스가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 다크 엘프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리 세드니스를 향해 검을 휘둘러도 그들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벌써 세드니스의 모습에 기겁하며 공포에 질려 떨었을 테지만 어쌔신인 다크 엘프들은 그저 묵묵히 죽어갈 뿐이었다.
뚜벅뚜벅.......
조용한 침묵의 전장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도 조용하기에 단 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전장의 북소리처럼 크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로얀은 두 검을 쥐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케인이라는 다크 엘프들의 수장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카엔보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케인이 먼저였다.
웅웅웅.......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백광의 오러 마나 소드를 분출하자 로얀을 바라보는 케인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케인은 날이 휜 작은 검 두 자루를 양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처럼 부드럽고 소리가 없었다.
뚜벅뚜벅.......
한 명의 정령왕과 한 명의 다크 엘프가 서로를 마주보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점점 빨라짐에 따라 그들 사이의 거리도 좁혀져갔다.
후웅.......
로얀이 오른손을 들어 케인을 향해 휘두르자 다크리온의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휘리릭!
순간, 케인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의 그립이 다크리온의 그립을 때렸다.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최고의 어쌔신 케인이었지만 마나 소드를 두르고 있는 두 개의 검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자살 행위였기에 검날이 아닌 다른 부분을 공격한 것이다.
텅......!
로얀은 검의 손잡이 부분인 그립이 가격당하자 중심을 잃고 순간 주춤거렸다. 그 순간을 케인은 놓치지 않았다.
스르륵.
쇄에엑!
바람을 가르고 나아간 케인이 로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검으로 그의 허리를 베려 했다.
스르륵.
하지만 케인은 계속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에리오네의 날이 그의 머리를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뜩한 에리오네의 날은 케인의 잔상만 베었다.
턱.
로얀은 케인이 에리오네를 피해 자신의 품속에서 빠져나가자 급히 다크리온을 고쳐 잡으며 중심을 잡았다.
스르륵.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케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로얀이었지만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은 침묵의 전장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세드니스와 다크 엘프들뿐이었다. 케인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쉐도우.”
스르륵.
로얀은 세드니스가 다크 엘프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쉐도우를 펼쳐 어딘가 숨어 있을,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케인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스르륵.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당연히 케인의 그림자 속이었다. 그는 에리오네를 앞세운 채 그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쉐에엑!
그 순간, 머리를 내민 로얀을 향해 날카로운 빛줄기가 쏟아졌다. 자신의 부하들이 어떻게 죽는지 목격한 케인이었기에 로얀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도 세드니스처럼 검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었다.
후웅... 퍽!
“......!”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던 케인도 그 순간만큼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의 검은 죄없는 차가운 대지를 관통하고 박혀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로얀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케인은 로얀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크 엘프들의 고유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놀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어떻게 다크 엘프의 기술을 인간이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스르륵.
로얀은 케인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케인의 몸을 덮치려 했다.
“헬 파이어!”
화르르륵!
콰가가강......!
하늘에서 커다란 지옥의 불꽃이 분출했다. 아무런 주문 없이 마법의 시동어 단 한 마디만이 모르드 평원에 울려 퍼졌을 뿐인데 하늘에서 지옥의 화염들이 로얀을 향해 떨어졌다.
로얀은 자신에게로 떨어지는 지옥의 불꽃을 향해 두 검을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화르르륵!
치치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케인은 지옥의 불꽃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헬 파이어는 성검인 에리오네와 마검인 다크리온은 녹이지 못했다. 간간이 검을 타고 달려드는 불꽃에 여기저기 그을리긴 했지만 로얀은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네 녀석은 여전하군. 그때나 지금이나.”
불꽃이 걷히자 로얀의 독기 어린 눈동자가 허공에 떠 있는 카엔에게로 향했다.
지금의 상황은 과거 팔레인이 사라질 때와 흡사한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카엔이라는 블랙 드래곤과 팔레인의 사람이었던 시엔이 있다는 점이 흡사했다.
그러나 다른 점도 하나 있었다. 바로 시엔, 아니 로얀이 카엔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얀의 말에 카엔은 순간적으로 옛 기억에 사로잡혔다. 지금의 상황이 그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기억 저편에 박아두었던 팔레인이라는 마을의 이름과 눈알이 없는 안구로 브레스를 쏘는 자신을 바라보던 시엔이라는 청년을 말이다. 아무리 드래곤이 망각이 없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과거의 세세한 일은 깊이 생각해 봐야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는 또 다른 의문에 사로잡혔다. 시엔이라는 인간은 분명 그의 브레스로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그렇다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시엔이라 말하는 이 인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세드니스들의 검날은 그 순간에도 다크 엘프들을 도륙내어 차가운 대지 위에 서 있는 다크 엘프들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갔다.
카엔은 허공에 둥실 뜬 채로 로얀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살아난 거지? 혹시 그 녀석이 연구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로얀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로얀이 어떻게 죽지 않았는지 잠깐 생각하던 카엔은 그 생각을 흘려버렸다. 그에게는 로얀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하는 것보다는 그가 살아남아 자신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웅웅.......
로얀의 검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이 투영되어서인지 그의 눈에서도 빛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서늘하고 차가운 빛!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
꾸욱.
로얀은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두 검에서 솟아오른 백광의 오러가 바람에 풀풀 날리고 있었다.
“쿡쿡! 날지도 못하는 인간이 날 죽이겠다? 가소롭군.”
로얀을 향해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짓던 카엔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자신 앞에서 건방을 떠는 로얀을 천천히 가지고 놀아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하늘에서는 재미가 없었다. 사냥감이 너무 빨리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차가운 대지 위로 내려온 카엔은 로얀을 바라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지직!
빈 공간에서 생겨나는 불빛이 눈을 시리게 했다. 이윽고 그곳에서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금색으로 된 검신에 여러 가지 보석이 박혀 있는 아름다운 검이었다. 드워프를 노예처럼 부리는 드래곤들이 드워프에게 시켜 만든 검이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인간이라... 쿡쿡, 즐겨주마. 그리고 너를 개조해 나의 가디언으로 만들겠다.”
“흐아아압!”
타타탓!
로얀은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을 바라보는 카엔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발을 굴려 그를 향해 달려 나갔다.
우웅.......
그런 로얀을 보며 카엔은 자신의 검에 백광의 오러를 피워 올렸다. 용병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실력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급 이상이었다. 마법능력도 뛰어난 데다 검술실력까지 뛰어난 것이다.
타탓!
카엔도 로얀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쾅!
그리고 터져 나오는 폭발음!
다크리온의 넓고 커다란 날이 카엔의 검과 부딪치며 금속음이 아닌 폭발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오러끼리 부딪친 결과였다.
주춤.
쾅!
서로의 검을 퉁겨내고 주춤거리던 두 사람은 다시 검을 부딪쳤는데, 이번에는 에리오네가 카엔의 검을 맞받아 쳤다.
쾅! 쾅! 쾅!
그들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져갔다. 중급 이상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간의 희대의 대결이 지금 모르드 평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곳 주위에는 과거 로얀이 죽였던 제국 병사들의 말라버린 시체들과 뜨거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다크 엘프들의 시체가 벽이 되어 하나의 커다란 경기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콰쾅!
끼리릭.
수십 합을 겨루는 동안 처음으로 금속음이 흘러나왔다.
카엔의 검과 로얀의 다크리온이 공중에서 부딪친 채 멈춰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힘 대결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주위는 이미 초토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성검과 마검을 상대하는 카엔의 금색 검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그것들을 받아 치고 있었다. 역시 드위프의 작품다웠다. 하긴 천하의 잘난 드래곤이 들고 다니는 검이니 오죽하겠냐마는.......
“두 개의 마나 소드라... 너를 꼭 나의 가디언으로 만들고 싶군. 정말 굉장한 키메라를 만들 수 있겠군.”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카엔의 말에 살기 어린 로얀의 대답이 들려왔다.
“너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응?”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널 이 자리에서 죽일 것이다!”
콰쾅!
파치직.
로얀은 카엔의 검을 힘껏 퉁겨내었고, 서로에게서 전해져 오는 힘에 두 사람은 멀찍이 뒤로 밀려났다.
스거걱.
촤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살 베이는 소리와 붉은 비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죽음의 반월.”
츄가가각!
다크리온이 흑색의 오러 수십 개를 카엔을 향해 날렸다. 허공을 날아가는 반달 모양의 오러가 파공음을 흘리며 나아갔다.
“카이저 실드.”
콰가가강!
하지만 죽음의 반월은 카엔의 마법 앞에 막혀버렸다.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방어마법을 로얀의 죽음의 반월로도 뚫을 수가 없었다.
“호오, 재미있는 기술을 쓰는군. 그럼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
“헬 파이어.”
화르르르......!
검을 쥐고 있지 않는 카엔의 왼손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가 싶더니 그것이 로얀을 향해 뻗어 나갔다.
콰가가강!
“쉐도우.”
스르륵.
하지만 그 지옥의 불길은 로얀을 태울 수가 없었다. 그가 재빨리 쉐도우를 썼기 때문이다.
스르륵.
웅웅웅.......
사라진 로얀은 카엔의 바로 뒤, 그의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로얀의 손에 들린 에리오네가 맑은 검명을 토해 내며 카엔을 향해 날아갔다.
씨익.
턱!
마나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읽어내는 드래곤 카엔은 로얀이 자신의 그림자에서 나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그의 안면을 왼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는 웃으며 그를 위로 들어 올렸다.
스윽.
“죽인다.”
카엔의 손 안에 잡혀 있는 로얀의 안면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들려 올려졌다.
푸욱.
뾰족함을 자랑하는 에리오네가 카엔의 가슴을 뚫었다. 아니, 뚫으려 했다.
후웅.
콰가가각!
순간 방심했던 카엔은 로얀의 칼 끝이 피부에 닿자 급히 그를 멀리 내던졌다. 에리오네에 살짝 대였을 뿐인데 그의 가슴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계속 웃음을 흘리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그것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잔뜩 성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감히 나의 몸에 상처를 입히다니!”
뚜벅뚜벅.......
카엔은 멀리 날아가 쓰러져 있는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스윽.
“죽인다.”
로얀은 조금 전부터 이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로얀을 향해 다가오는 카엔의 왼손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그것이 그의 손 위에 머물렀다. 바람이 점점 그의 손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휘오오오.......
“소닉 바이브레이션!”
슈아아아앙!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마법 시동어와 함께 음속의 바람이 로얀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콰가가강!
음속의 바람이 로얀을 덮치는가 싶더니 그 주위가 모랫바람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얀의 모습도 점점 가려지더니 이윽고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바람의 비명소리만이 대지를 가득 울렸다.
모래 먼지 속에서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빠르게 휘두르며 소닉 바이브레이션의 바람을 쳐내고 있었다. 혼돈의 정령왕으로서 다시 살아난 그는 감각이 몇 배로 발달되어 음속으로 다가오는 바람의 소리를 모두 읽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를 읽고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음속의 바람이 간간이 로얀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와 그의 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크크... 살아봐라. 그 속에서 어서 발버둥쳐 봐라!”
조소가 담긴 카엔의 음성이 대지를 울렸다. 그리고 음속의 바람은 그의 손끝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로얀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6서클까지 복사할 수 있는 로얀은 7서클의 소닉 바이브레이션은 복사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쉐도우를 써서 피할 수는 있겠지만 카엔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누구의 그림자에 숨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얀은 모래 먼지 속에서 카엔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달려 나갔다.
소닉 바이브레이션의 바람이 들어와도 검으로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대로 멈추어 있다면 카엔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움직임으로 해서 그의 틈새는 더욱 벌어져 음속의 바람은 그의 몸 여기저기 찢어놓았다.
투툭.
붉은 핏방울이 로얀의 몸에서 흘러나와 메마른 대지를 적셨다.
슈아아앙.
콰가가강!
터벅터벅.......
로얀은 음속의 바람이 바닥과 부딪치며 내는 모래 먼지 속에서 카엔을 향해 걸어갔다.
카엔은 로얀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마나 스캔해 보면 로얀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이 정도나 퍼부었으니 살아남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에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뻗었던 손을 거뒀다.
“크아아압!”
그때, 모래먼지 속에서 기합성이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플레어!”
카엔은 급히 손을 다시 들어 화염계 마법인 7서클의 플레어를 썼다.
로얀은 바로 앞에서 뻗어오는 초고온의 화염을 몸을 살짝 틀어 피하며 에리오네를 카엔의 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 넣었다.
푸푹.
쿵.......
다크리온이 바닥을 굴렀다. 피한다고 피하긴 했지만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마법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어 플레어의 화염에 로얀의 오른손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에리오네의 날카로운 날이 카엔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크으윽, 감히 인간 따위가!”
카엔은 왼손을 말아 쥐고는 로얀을 향해 날렸다.
퍼억!
푹.
콰가각......!
로얀은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고, 에리오네는 자연스럽게 카엔의 몸에서 빠져나와 로얀과 함께 날아갔다.
피피핏.
츄아악.
에리오네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드래곤의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이런 상처를 입은 것도, 이런 고통을 겪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르륵.
카엔이 눈을 부라리며 발광하고 있을 때, 로얀 곁으로 다크로드가 모든 세드니스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다크 엘프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이미 전멸한 뒤였다. 드래곤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채 숨을 거둔 다크 엘프들이었다.
“크아아아! 죽여버리겠다! 볼케이노!”
화르륵.
콰가가각!
콰르르릉......!
카엔의 외침과 함께 차가운 대지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땅의 울부짖음이었다.
그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그곳에서 붉은 용암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로얀과 세드니스가 있는 곳을 향해 뻗어 나갔다. 8서클의 마법인 볼케이노였다.
콰르르릉......!
삭막하기만 하던 모르드 평원에 붉은 용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암으로부터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하늘로 뻗어 나갔다. 그 열기에 이곳저곳에 앉아 놀던 까마귀들이 급히 하늘로 날아올라 허공을 맴돌았다.
까아악!
까아악!
까마귀들의 거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크크크... 순순히 나의 가디언이 되겠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음산한 까마귀 울음소리 속에서 중간계 최강의 생명체인 블랙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블랙 드래곤 카엔은 모르드 평원을 붉은 불의 대지로 바꾸어놓고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휘오오오.......
“응?”
하지만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뜨거운 수증기가 바람에 휘날려 출렁이는 가운데 검은 후드로 온몸을 가린 전사 백 명이 한 남자를 보호하듯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호하는 인물은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다크로얀이었다.
로얀의 한쪽 어깨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오른팔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오른손에 항상 자리 잡고 있던 다크리온은 차가운 대지 위에 뒹굴고 있었다.
“크윽!”
찌이익.
로얀은 망토를 뒤로 젖히고 안의 옷을 거칠게 찢어 그것을 팔이 사라진 곳에 가져다 댔다.
플레어의 초고온이 지나갔기 때문일까? 오른팔이 잘려 나간 곳은 까맣게 타버려 피가 많이 흐르지 않았다. 그을린 살이 서로 엉겨붙어 붉은 피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큭!”
로얀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드니스들을 향해 말했다.
“물러나라.”
[그 명령만큼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흑색의 후드로 전신을 가린 백 명의 세드니스에게서 동일한 답이 흘러나왔다.
“나의 명을 어기겠다는 말이냐?”
로얀은 그들의 말에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한쪽 팔을 잃어서인지 그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예전과 똑같았다.
그의 그런 모습에 세드니스를 이끄는 수장인 다크로드가 다가왔다.
[여기서 당신이 소멸된다면 앞으로 명령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그 명령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영원히 로드의 명을 듣겠노라 다짐했습니다. 끝이 있는 것은 ‘영원히’가 아닙니다.]
스윽.
그 말과 함께 그가 로얀을 향해 허리를 숙이자 다른 세드니스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하늘에 떠 있는 카엔을 바라보았다.
“멈춰라! 난 죽지 않는다!”
로얀의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세드니스들은 양손에 붙어 있는 흑검의 날을 번뜩이며 카엔을 향해 팔을 치켜들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로얀은 지금 위급한 상태였다. 죽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팔이 잘리고 피가 뿜어졌다. 그리고 그의 맥박은 차츰차츰 느려지고 있었다.
[우리의 왕이 오시기를 수십만 년이나 기다렸습니다. 오늘만입니다. 오늘만...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처척.
일제히 카엔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린 그들은 자세를 낮추었다.
[우리들의 왕을 위해!]
파파팟!
그리고 그들은 검은 빛이 되어 카엔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늘을 날지 못해 지면에서 점프한 것뿐이지만 그들은 하늘을 나는 듯 허공을 갈랐다.
[죽음의 반월!]
슈아아앙!
카엔은 갑자기 달려드는 세드니스들을 보고 얼떨떨해 하다가 이윽고 가소롭다는 듯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카이저 실드.”
카카카캉!
백 명이 쏘아 보내는 흑색 죽음의 칼날은 하늘을 수놓았고, 그 끝은 카엔이었다.
카카캉!
카엔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으로 점프하며 죽음의 반월을 쏘아 보내는 세드니스들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감히 하찮은 인간 주제에! 크윽!”
쿵! 쿵! 쿵!
카이저 실드에 끊이지 않고 부딪쳐오는 죽음의 반월 때문에 카엔은 점점 지면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카카캉!
카엔이 하늘에서 지면으로 어느 정도 내려오자 세드니스들은 모두 땅 위에 내려서더니 팔을 내렸다.
[사신의 춤.]
스가가가각!
죽음의 칼춤이 시작되자 칼바람이 카엔을 덮쳤다. 흑색 칼날이 일으키는 바람은 폭풍이 되었고, 검날의 폭풍은 카엔을 집어삼켰다.
“크르륵, 크아아아!”
카엔은 고통스러워 괴성을 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달려들어 귀찮게 하는 세드니스들에게 분노한 것이었다.
“모두 죽여주마. 폴리모프!”
화아아악.
카엔의 입에서 마법 시동어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그 강렬한 빛에 세드니스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물러났다. 어둠의 정령답게 본능적으로 빛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두근두근.......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얀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느려지던 맥박이 요동치고 있었다. 폴리모프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의 심장은 뛰었는데, 서서히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카엔을 보자 온몸이 들끓는 듯했다.
마냥 커지기만 하던 빛이 이윽고 사라졌을 때, 로얀은 본래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거대한 흑색 날개와 커다란 도마뱀의 몸을 가진 블랙 드래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카엔은 심령어라는, 영혼을 통한 음성을 내뱉었다. 드래곤의 거대한 입으로는 직접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크크... 하찮은 인간들이여, 모두 죽음으로 나를 화나게 한 대가를 보상하라!]
크르르릉.......
모르드 평원에 퍼져 있는 마나가 카엔의 커다란 입이 서서히 벌어지자 그곳으로,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위의 마나가 요동쳤다. 과거 최하급의 어둠의 정령이었던 세드니스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변해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바로 저것이었다. 저것이 바로 모든 것을 날려버린,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 드래곤의 병기라 할 수 있는 브레스라는 것이었다.
쿠오오오......!
[죽어라!]
쿠하하하항!
그리고 드디어 모든 것을 파괴시킬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가 허공을 갈랐다.
거대한 기의 덩어리라 할 수 있는 브레스가 향한 곳은 로얀이 있는 쪽이었다. 재빠른 세드니스가 피할 거라는 것을 알고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로얀을 향해 쏜 것이다.
파파팟!
로얀에게로 향하는 브레스를 보자 세드니스들이 일제히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카엔의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세드니스는 로얀의 기사가 분명했다. 기사라는 족속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바보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카엔은 로얀을 향해 브레스를 쏜 것이었다.
“크아아악!”
로얀은 자신의 앞에 쳐지는, 세드니스의 몸이 만들어낸 흑색 장막을 보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브레스를 보고 잠깐 과거의 기억 속에 잡혀 있던 로얀은 한 발 늦고 말았다. 그가 세드니스를 향해 몸을 날리기도 전에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강렬한 빛이 로얀의 눈을 따갑게, 아니 어둡게 만들었다. 그가 마지막에 본 것은 흑색 검을 들어 올리며 브레스를 당당히 맞이하는 세드니스들이었다. 흑빛으로 빛나는 세드니스들! 그러나 그들은 곧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에 그 빛을 잃어갔다.
콰가가가강......!
천지를 뒤흔드는 파공음과 함께 모르드 평원이 뒤흔들렸다.
“크으윽!”
주위의 땅이 갈라지는 바람에 로얀은 중심을 잡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로얀의 주위는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 앞에서 브레스를 몸으로 막아준 세드니스들 덕분이었다.
휘오오오.......
팔레인이 날아갔을 때처럼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황량한 대지와 찬 바람만이 불었다. 그 뜨겁던 용암도, 출렁이던 뿌연 수증기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블랙 드래곤의 강한 산성 브레스는 대지를 녹여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움푹 파여 있었다.
로얀은 중심을 잡으며 앞을 쳐다보았다. 다섯 개의 인영... 그 폭발 속에 정령의 힘을 쏟아 부어 막던 세드니스 중 몇 명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완전히 소멸한 다른 어둠의 정령은 백 년이 지나야 다시 살아날 터였다.
[피하십시오.]
살아남은 다섯 세드니스 중 한 명인 다크로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엔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뒤를 남은 네 명의 세드니스가 뒤따랐다.
[크크크크... 나의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다니, 그 질긴 목숨은 칭찬해 주마. 하지만 그 질긴 목숨이 또 한 번 이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휘오오오.......
고오오오......!
또다시 모르드 평원의 마나가 들끓기 시작하더니 카엔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어서 피하십시오!]
처음으로 로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 다크로드는 점점 벌어지는 카엔의 입과 그 속의 강한 마나 덩어리를 보며 팔을 들어 로얀의 앞을 막아섰다. 그와 같은 행동은 다른 세드니스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가라. 너희들은 나의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은 최초의 인간들이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아니 넌 두 번째인가? 안 그런가, 시엔이라는 어리석은 인간아?]
카엔이 세드니스와 로얀을 보며 말을 내뱉고 있을 때 로얀은 뼈마디의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한 발, 한 발 차가운 대지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크리온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다크리온보다 훨씬 가벼운 에리오네를 입에 물고 다크리온을 왼손에 들었다.
입에 물린 에리오네의 그립을 감싸고 있는 보라색 끈이 엘라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제 끝이다!]
쿠하하하항!
카엔의 입이 크게 벌어졌을 때 그의 입에서 브레스가 쏘아졌다. 이제 남은 세드니스는 모두 다섯 명이었고 그들만으로는 브레스를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에리오네를 입에 물고 말하고 있는 그의 음성은 둔탁하고 무겁게 들렸다. 어떤 비장감이 담겨 있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우드득.
로얀이 한 발, 한 발 차가운 대지 위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온몸의 뼈가 요란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나의 가족을 잃지 않을 것을 여기서 다짐한다.”
콰드득.
쿠하하항......!
파팟!
카엔의 브레스가 떨어짐과 동시에 로얀의 몸도 세드니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턱.
로얀은 하나밖에 없는 팔로 다크로드의 몸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 브레스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당황한 세드니스가 급히 그를 데리고 빠져나가려 할 때, 로얀은 자신의 입에 물려 있던 에리오네를 고개를 힘껏 돌려 던졌다.
후웅.
그리고 왼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넙적한 다크리온의 날이 가는 에리오네의 날을 부숴버릴 듯 가까이 다가갔고, 두 검은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마검과 성검은 부딪치면 강한 폭발을 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주위의 공기가 출렁이는 듯했다.
쩡!
콰가가강......!
쿠하하항......!
엄청난 폭발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통해 일어나자 강한 마나 덩어리인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가 이 폭발에 합류했다.
콰하하항......!
천지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로얀 뒤에 서 있던 세드니스들은 폭발의 여파로 뒤로 밀려났다.
하나 다크리온을 쥐고 에리오네를 친 로얀은 물러나지 못했다. 아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의 육신은 이미 한 줌 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또다시 일어난 죽음... 죽음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겪는 기분은 과연 어떠할까?
로얀이 폭발 속에 사라져 버린 후, 여전히 광택을 내뿜고 있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푹! 푹!
두 개의 검이 차가운 대지에 박혀 있는 가운데 모르드 평원에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휘오오오.......
[크크크... 이번에는 살아남을 수 없겠지? 마검과 성검의 성질을 이용하다니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었어. 쿡쿡! 아무튼 저 두 개의 검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펄럭펄럭.......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점령하고 있던 카엔은 바닥에 꽂혀 있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세드니스들은 혼이 없는 생명체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억겁의 세월을 기다려왔다. 기나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꺼내줄 왕을 기다려온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야 겨우 왕을 만날 수 있었다. 한데 그 왕이 죽어버린 것이다. 제정신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로얀은 첫 번째 죽음이 있었을 때와 똑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두 번째의 생명이 꺼졌다. 그리고 두 번째의 봉인이 풀렸다.]
로얀은 암흑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죽음 뒤에 언제나 찾아오는 전대 다크로얀의 음성이 그를 붙잡기 전까지는 그는 그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두 번째 봉인의 대가는 기억이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모든 기억은 사라질 것이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이라면 레이나와 함께했던 시간과 용병으로서 전쟁터를 뒹굴던 것들이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고 나서 엘라임 이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에게 있어 레이나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을까?
[어디에도 얽매이지 마라. 어떠한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어떠한 것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혼돈이 바로 너다. 혼돈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완전히 섞일 수 없는 고독이다. 너는 홀로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는 존재,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다시 생명을 얻을 때 전대 다크로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로얀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그 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휘오오오.......
찬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휘오오오.......
흠칫.
드래곤이 그 거대한 몸을 떨었다. 주위를 잠식하는 거대한 기운 때문이었다.
멀리서 돌처럼 굳어 있던 세드니스들의 몸도 서서히 풀렸다. 허공에 붉은 물방울이 점점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물방울은 천천히 형체를 갖추어갔다.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생겨나 인간의 형상이 되었고, 옷도 함께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땅의 숨결이라는 땅의 정령왕의 작품까지 살아났다.
스륵.
인간의 형상이 된 붉은 액체, 로얀이 눈을 떴다. 한 줌 핏물로 변했던 그의 몸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 모습에 카엔은 공중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하마터면 마나 조절을 잘못해 지면으로 곤두박질칠 뻔할 만큼 놀란 카엔이었다.
놀라기는 세드니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로얀의 죽음도, 그의 봉인이 풀리는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로얀이 죽지 않는다고 한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로얀은 눈을 떴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서서히 내려와 지면에 발이 닿았을 때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크윽!”
단지 짧은 신음성을 내뱉었을 뿐!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이 사라진 그는 반쪽짜리 기억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으으으......!”
로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간간이 머릿속을 맴도는 레이나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게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크아아! 이건 말도 안 돼! 네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
카엔은 로얀이 살아났다는 것보다 조금 전 허공에서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속에 담긴 힘에 몸을 떨었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 괴물 자식! 넌 대체 뭐냔 말이다!]
깨진 기억의 파편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던 로얀은 멀리서 들려오는 카엔의 괴성에 머리가 한층 더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후우웅......!
턱.
멀리 차가운 대지에 꽂혀 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백광의 오러가 아닌 금색의 다른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
츄아아앙!
묘한 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금빛 오러가 웅웅거리며 빛났다. 그것은 마나 소드처럼 오러가 나풀거리는 것이 아니라 검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마치 금으로 검신을 만든 것처럼 검신 전체가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윽.
로얀은 고개를 들어 거대한 체구의 블랙 드래곤 카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시끄러워!”
후우웅, 후우웅.......
로얀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심하게 떨었는데, 그 진동은 로얀의 팔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스윽.
로얀은 팔을 들어 두 검을 허공에 휘두르자 두 개의 검이 지나간 자리엔 금빛 잔상이 남았다.
지금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이 금빛으로 변한 것은 로얀의 봉인이 또 하나 풀리면서 그가 새로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름만 전해지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다음 단계인 골든 마스터가 된 것이다. 또한 그는 7서클까지의 마법을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아주 오래 전 검에 미친 드래곤이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검을 놓지 않았고, 그가 마지막에 이룩한 것이 바로 금빛이 감도는 이상한 오러였다고 한다.
드래곤 중에서 가장 검의 경지가 높았던 그는 금빛 오러를 쓰는 자를 골든 마스터라 정해 놓고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 그 드래곤의 책을 발견한 다른 드래곤들에 의해 그가 저술한 책자가 몇 개 인간 세상을 떠돌았고, 자연스레 골든 마스터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기 시작했다.
골든 마스터라는 이름을 드래곤이 지어서일까? 드래곤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분명 골든 마스터의 다음 단계가 있을 거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갓 마스터라고 불렀다.
한데 지금 로얀이 뿜어대고 있는 것은 그 검에 미친 드래곤이 칭한 골든 마스터의 금빛 오러와 아주 흡사했다.
스윽.
허공을 휘젓고 다니던 두 검이 이윽고 멈추더니 에리오네의 뾰족한 검 끝이 카엔에게로 향했다.
“지금 나는 어떤 소중한 것을 잃은 것 같아 고통스럽고 슬프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네가 레이나라는, 나에게는 매우 소중했던 동생을 죽인 사실과 도마뱀을 죽이는 것이 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유라는 것을 말이다.”
스오오오.......
그의 몸에서 강한 마나와 함께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한 로얀의 모습을 보면서 카엔은 머릿속에 골든 마스터를 그리고 있었다. 인간이 이 경지에 든다면 드래곤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고 그 검에 미쳤던 드래곤이 적은 책은 말하고 있었다.
같은 동족이 적은 책을 카엔은 당연히 보았고, 그 구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절대 인정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앞발로 살짝 밟기만 해도 죽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과 같은 위대한 존재를 죽일 수 있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놀라 로얀을 바라보던 카엔의 눈에 두 자루 검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검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혼돈의 정령왕」 3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