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혈투의 서막 (24/42)

6장 혈투의 서막

혈투의 서막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던 그라운 산맥이 깨어났다.

험준하기로 유명한 그라운 산맥에 위치한 실라카에 불빛이 아른거렸고 떠들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얀과 엘라임, 그리고 바로크가 이끄는 실라카의 전사들이 리치 콘이 이끄는 키메라들을 물리친 지 하루가 지났다. 바로크와 남은 이백여 명의 전사들은 쉬지 않고, 밤을 지새며 이동한 끝에 아침이 되어서야 실라카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키메라들이 지나간 실라카는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집들은 하늘에서 운석이 다발로 떨어진 것처럼 뭉개져 있었고, 딱딱한 대지 위에 꿋꿋이 솟아 있던 여름의 대륙 특유의 나무들도 뿌리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어서어서 움직여!”

“하나, 둘!”

달그락, 달그락!

쿠쿠쿵.......

크산에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실라카 전사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도착한 직후부터 마을을 재건하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실라카의 사람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격투술을 배웠기에 그들도 어엿한 실라카의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로얀과 엘라임은 멀리서 그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들을 불러 그들을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어쌔신이라 소개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암살자들이 검은 복면을 한 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이상할 터였다. 무엇보다도 세드니스의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하하! 이거 손님 대접이... 정말 미안하네.”

바로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호탕한 그 웃음을 향해 엘라임 역시 웃음을 보냈다.

“실라카 사람들이 왜 강인한 전사들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네요.”

“하하하! 너무 과분한 말이군. 우리 실라카 사람들의 인생 목표가 강인한 전사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조금 강하게 보이는 것뿐이네. 아가씨의 이름이......?”

“엘런이에요.”

엘라임은 평소 유희를 할 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남자 앞에서 웃음을 짓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가장 달라진 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은 로얀은 여전히 이리저리 짐을 나르고 마을 재건을 위해 일하고 있는 실라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엘라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바로크가 손을 저었다.

“안 될 말이야. 손님 대접도 제대로 못 해줬는데.”

빙긋.

츄아아악.

엘라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가 싶더니 그녀 앞에 물방울이 뭉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열 개의 커다란 물방울이 모두 운디네로 변하는가 싶더니 그들은 모두 엘라임의 손짓에 따라 일하고 있는 실라카 사람들에게로 날아가 물건을 날라주고, 딱딱한 대지에 물을 뿌려 파기 쉽도록 도와주었다.

“하하하!”

바로크의 마음속에 두 개의 감정이 교차했다. 하나는 손님에게 일을 시켰다는 미안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령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엘라임의 실력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그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마을 재건을 위해 일하던 실라카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운디네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곧 그들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고는 웃으며 일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럼 로얀이 할 만한 일은 없을까요?”

운디네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엘라임이 바로크에게 시선을 옮기며 그렇게 말하자 묵묵히 서 있던 로얀은 영문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하! 대전사에게 시킬 일이라.......”

갑작스런 엘라임의 말에 당황한 바로크는 로얀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다 손뼉을 쳤다.

짝.

“그렇지! 조금 전 집을 지을 나무를 구하기 위해 숲으로 간 사람들이 있네. 그들을 좀 도와주게나.”

“숲이요?”

엘라임이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에는 딱딱한 바위뿐이었다. 간혹 풀과 나무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리고 실라카 주변은 키메라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기에 황폐하기만 했다.

“우리는 그 숲을 축복의 숲이라 부르지.”

“축복의 숲?”

“하하! 그 숲은 그라운 산맥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원 모양으로, 그 안에서만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지.”

그런 숲에 관한 이야기는 엘라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유희를 잘 하지 않는 그녀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와아! 그런 곳이 그라운 산맥에 있었나요?”

“그게 우리 마을의 비밀이자 자랑거리라네.”

바로크가 말하는 숲은 그라운 산맥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숲이었다. 한데 녹음이 우거져 언제나 푸른빛을 뿌리는 그 숲은 그야말로 신이 만든 숲 같았다. 오래 전 이곳에 실라카가 생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숲 때문이었다.

그 숲은 실라카 사람들의 생명이었다. 하지만 그 숲으로 가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넘기 힘든 험준한 그라운 산맥 깊숙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다.

때문에 그 숲으로 가는 것은 숙달된 실라카의 전사들에게만 허락되었다. 하나 이번에 그곳으로 간 사람들 중 절반은 아직 어린 실라카의 아이들과 숙달되지 않은 실라카의 젊은 전사들이었다.

아이들과 몇몇 실라카의 사람들은 비밀 장소에 몸을 숨겼기에 키메라들로부터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크 일행이 옴으로 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마을을 재건하려면 많은 목재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직 어리지만 실라카 전사의 피가 흐르는 소년들과 젊은 청년 전사들은 스스로 가기를 지원했고, 실라카 사람들과 바로크는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목재를 구하기 위해 축복의 숲으로 향한 것이다.

아이들의 의지를 꺾기 싫어 그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바로크는 그들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뒤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제 자신은 이곳의 책임자였기에 마을을 함부로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쪼록 잘 부탁하네.”

짧게나마 사정을 이야기한 바로크가 그렇게 말하자 로얀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얀, 우리 도와주자. 응?”

“.......”

“여기서 마냥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너의 명령?”

“아냐, 부탁이야.”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엘라임의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계속... 웃었으면 좋겠군.”

스윽.

마음속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은 로얀은 엘라임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에 어색하게 웃고 있던 바로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로얀의 눈이 요구하는 바를 눈치 채고는 손을 들어 실라카 마을의 뒤편을 가리켰다.

“이 방향으로 똑바로, 쭈욱 가게나. 아무리 험난한 길이 나오고 갈림길이 나와도 무조건 일직선으로 가게. 그럼 잘 부탁하네, 대전사.”

빙글.

로얀은 몸을 돌려 말없이 바로크의 손이 가리켰던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엘라임의 몸은 굳어 있었다. 갑작스런 로얀의 말에 그녀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래 가장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바로크는 의아해 물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 같은데, 어째서 연인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이요?”

“네. 아닌가요?”

“이 마음이 사랑.......”

한동안 로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엘라임이 다시 바로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얀은 위험한 곳에 간 것이 아니라 산책을 간 거예요.”

살짝 붉게 물든 엘라임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어떠한 여인의 웃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 * *

로얀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을 재건을 위해 일하는 실라카 사람들을 지나쳐 바로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곧장 걸어갔다.

터벅터벅.......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그의 발길에 딱딱한 돌멩이가 수 차례 걸리며 퉁겨져 나갔다.

자잘한 돌멩이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는 울퉁불퉁한 길을 평지 걷듯 느긋하게 걷고 있던 로얀에게 첫 번째 관문(?)이 나타난 것은 실라카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로얀의 눈앞에 길이 끊어져 있었다. 빗물에 산사태가 나 거대한 돌들과 자잘한 돌멩이가 한데 뭉쳐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위로 누군가가 타고 올라간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한두 명이 지나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바로크가 말한, 축복의 숲으로 들어간 실라카 전사들의 흔적인 듯했다.

그라운 산맥은 나무나 풀이 잘 나지 않는 삭막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가 안 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토지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풀과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았다. 이곳은 여름 대륙의 기후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의 대륙 기후의 가장 큰 문제는 장마였다. 한동안 퍼붓는 비에 항상 산사태가 났고 그때마다 실라카 사람들은 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실라카 사람들에게는 신이 내리는 커다란 시련과도 같았던 것이다.

한데 지금 로얀의 눈앞에 있는 돌무더기는 장마의 상처가 아니라 며칠 전 내린 소나기 때문이었다. 작은 비에도 쉽게 산사태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그라운 산맥이었던 것이다.

스르릉.......

로얀은 오른손을 움직여 마검 다크리온을 뽑았다. 섬뜩한 칼날이 태양의 강렬한 빛을 받아 번뜩였다.

우웅.......

다크리온의 검은 검날에 푸른색 오러가 맺혔다. 그리고 로얀의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로얀이 말과 함께 다크리온을 휘두르자 검날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반월 모양의 푸른 오러 수십 개가 돌무더기를 향해 날아갔다.

콰가가강......!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음이 그라운 산맥을 울렸다.

투투툭!

투퉁......!

요란한 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부서져 버린 돌무더기의 잔해가 여기저기 튀어 오르며 요란한 소리를 이어간 것이다.

로얀에게도 자잘한 돌멩이가 튀었다. 물론 자잘한 돌멩이 외에 큼직한, 어른 머리통만 한 돌도 튀었지만 그 어떤 것도 로얀의 몸에 닿을 수는 없었다.

우우웅.......

슈가각!

육안으로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로얀이 빠르게 팔을 휘두르자 그 손에 들린 마검 다크리온이 하늘에서 파괴의 춤을 춰 그에게로 날아오는 돌들을 모두 부숴버렸던 것이다.

후두두.......

바스락!

떨어지는 돌들을 외면한 채 로얀은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축복의 숲으로 향해 걸어가는 로얀에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수 차례 벌어졌다. 세 갈래의 길이 나오기도 했고 갑자기 위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길과 길 사이가 뻥 뚫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터벅터벅.......

로얀은 그 모든 것을 엘라임의 말대로 산책하듯 여유있게 지나쳐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로얀이 지금 걷고 있는 곳은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비탈길이었다. 좁은 길 왼쪽 편은 단단하고 매끈한 암벽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고, 오른쪽은 훤히 뚫려 있는 허공이었는데, 그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으아아아악......!”

멈칫.

가파른 길 위를 여유있게 걸어가던 로얀의 발이 우뚝 멈추어졌다. 멀리서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파박!

그 소리에 로얀은 그 가파른 길 위를 달렸다. 그 비명소리가 자신이 부탁받은 실라카 사람들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로얀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뿌리기 시작하자 그의 눈동자에 청년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년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안타까운 시선만 보낸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 또한 보였다.

파바박!

로얀은 힘껏 달려 나갔다.

팟!

그리고 실라카 사람들과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로얀이 갑자기 밑으로 뛰어내렸다.

휘오오오오......!

차가운 칼바람이 로얀의 몸을 옭아맸다. 서늘한 바람은 몸을 압박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 왔고, 가속이 붙은 로얀의 몸은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그런 모습에 실라카의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팟.

파바바박!

그것도 모자라 로얀은 가파른 절벽 위에 발을 올려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와중에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파바바박!

휘오오오!

“으아아악......!”

로얀의 귓가로 소년의 비명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갔고, 그의 눈동자에도 소년의 모습이 다가왔다.

터턱!

로얀은 왼손을 뻗어 소년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려 있던 마검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콰지지직!

날카로운 다크리온의 날이 칼바람을 뚫고 절벽 깊숙이 박혔다. 그 바람에 로얀과 소년은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다.

로얀은 자신의 손에 들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어린 실라카 소년을 바라보았다.

“가라.”

웅웅웅.

그렇게 말하는 로얀의 왼팔이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러의 푸른빛이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그가 검이 아닌 팔에 오러를 두르다니, 정말 놀랄 만한 일이었다.

“으하합!”

아무리 치열한 싸움이라도 기합소리를 잘 내지 않는 로얀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는가 싶더니 그와 동시에 오러가 감겨져 있는 왼팔을 휘둘렀다. 아니, 왼손에 들린 소년을 위로 집어던졌다.

“으아아아......!”

소년은 엄청난 힘에 의해 바람을 헤치며 하늘로 날아갔다. 틀림없이 위에 있는 실라카 사람들이 솟아오르는, 아니, 높이 올라갔다 떨어지는 소년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로얀의 생각대로 소년은 실라카 사람들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었다. 하지만!

콰지직!

마검 다크리온이 문제를 일으켰다.

날이 너무도 날카로운 다크리온이 드디어 발동(?)된 것일까? 다크리온의 검날이 절벽의 돌을 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크리온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로얀 역시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냥 떨어질 때보다는 바람의 충격이 적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칼바람이었다.

“크윽.”

절로 신음성을 흘리는 로얀, 그러나 그의 몸은 하염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 * *

콰가가가......!

마검 다크리온은 거침없이 절벽을 부수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바람을 가르며 추락했을까? 정령왕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는 데도 로얀의 눈에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땅은 로얀을 반기며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콰가가각!

쿠쿠쿵.......

차가운 대지에 로얀의 발이 깊숙이 박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고, 그 진동이 충격이 되어 로얀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로얀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을 테지만.......

투툭.

땅 속에서 발을 빼내자 흙과 돌멩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여긴 어디지?”

로얀은 말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온통 돌로 막혀 있었고, 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것인지 흰 뼈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스릉.......

다크리온이 맑은 검명을 흘리며 검집 속으로 들어갔다.

스윽.

로얀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스윽.

위를 올려다보던 로얀이 시선을 다시 내렸다. 실라카의 소년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저 절벽을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하늘을 날 수가 없었고,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기에는 높아도 너무 높았다.

쉐도우를 이용하여 그림자를 통해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근처에 있는 그림자라고는 바위 그림자뿐이니,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는 쉐도우의 특성상 주변 바위만 왔다 갔다 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밤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결정한 로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밤까지 쉴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스윽.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얀의 눈에 작은 동굴이 들어왔다.

터벅터벅.......

스르륵.

로얀이 발걸음을 옮기자 그의 그림자 속에 있는 다크로드와 세드니스들의 그림자가 그 뒤를 따랐다.

눈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동굴은 생각보다 상당히 작았다. 그리고 동그랗게 뚫려 있는 것이 마치 커다란 파이어 볼이 뚫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터벅터벅.......

로얀이 동굴 쪽으로 다가가자 세드니스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돌로 된 벽만 보였기 때문이다. 어둠의 정령들에게는 그 동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화아아앗!

로얀이 동굴 안으로 다가서자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흡수되듯 동굴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로드!]

다크로드가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그의 눈에는 돌벽이 로얀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로얀은 이미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간 후였다.

다크로드는 로얀이 동굴 속으로 들어간 직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퉁겨져 나갔고 다른 세드니스들도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로얀도 다크로드의 목소리에 급히 뒤를 바라보았다.

“뭐지?”

그의 눈앞은 막혀 있었다. 원래부터 입구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돌로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굴 속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곳곳에 박혀 있는 갖가지 보석들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릉.......

마검 다크리온이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웅웅.......

다크리온이 푸른 오러를 흩뿌렸다.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반월 모양의 오러가 막혀버린 입구를 강타했다.

콰가가강......!

하지만 다크리온의 오러로도 돌벽에 자그마한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화아앗.

츄아아악.

다크리온이 뿌리던 푸른빛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백광의 오러가 동굴 안을 환히 밝혔다. 마나 소드를 사용한 것이다.

웅웅.......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콰하하항!

오러 블레이드로 공격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굉음이 울려 퍼졌다.

“.......”

하지만 마나 소드 역시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빙글.

로얀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자신이 갇혔다는 것과 저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뚜벅뚜벅.......

로얀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고,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보석에 그의 모습이 비쳐졌다.

동굴 안이 밝아서 그런지 동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박쥐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물 떨어지는 소리가 동굴이 내는 소리의 전부였다.

침묵 속에서 로얀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정령왕의 힘을 사용해 앞을 내다보았지만 역시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뚜벅뚜벅.......

얼마나 걸었을까?

화아아앗!

갑자기 커다란 푸른 빛이 일었다. 그 빛에 태양도 똑바로 쳐다보던 로얀이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동굴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응?”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의 광경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사방이 꽉 막혀 있었던 것이다.

스르륵.

그리고 그의 눈앞에 빛 무리가 쏘아지더니 어떠한 형상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스윽.

점점 모습이 뚜렷해지는 그 형상에 로얀은 다크리온을 고쳐 잡은 후 에리오네의 그립에 손을 가져갔다.

“.......”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는 그 모습은 바로 자신, 로얀의 모습이었다. 긴 흑발과 땅의 숨결을 두르고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들고 있는 모습까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었다.

로얀은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 형상은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르릉.......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로얀의 오른손에는 마검 다크리온이 들려 있었다. 로얀은 그 모습을 보고 에리오네의 그립을 잡았다.

스릉.

스릉.

로얀이 에리오네를 뽑자 또 다른 로얀도 에리오네를 뽑았다. 그렇게 두 명의 로얀이 서로 두 개의 검을 들고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로얀은 앞의 또 다른 자신을 적으로 판단하고는 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눈앞의 또 다른 자신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박.

파박.

그러자 로얀의 발에 맞춰 또 다른 로얀도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채챙!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맞부딪히며 동굴 벽에 박혀 있는 보석의 빛에 번뜩였다.

챙!

로얀이 검을 퉁겨내자 두 사람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웅웅.

웅웅.

푸른 오러가 맺혔다. 그건 또 다른 로얀의 검도 마찬가지였다.

파박.

콰가강......!

굉음이 동굴 가득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또 다른 로얀은 로얀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싸움을 계속한다면 승부는 나지 않을 것이다.

화아앗!

츄아아앙.......

백광의 오러가 동굴을 환히 밝혔다. 무려 네 개의 검이 백광의 오러를 내뿜자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강!

로얀이 그렇게 외치자 또 다른 로얀도 죽음의 반월을 펼쳤다. 하지만 또 다른 로얀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쾅! 쾅! 쾅!

죽음의 반월이 중간에서 서로 부딪치며 굉음을 터뜨렸다.

‘나의 모든 공격을 정확히 따라하고 있다.’

스윽.

그때, 로얀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검을 내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또 다른 로얀도 검을 내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거울 속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스윽.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동자가 묘한 빛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주위를 가득 메운 돌벽이 들어왔다.

“거울.......”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거울이었는데, 그 안에서 묘한 힘이 느껴졌다.

스윽.

로얀은 왼손에 들려 있는 에리오네를 뒤로 돌렸다. 그의 행동에 또 다른 로얀도 그대로 따라했다.

웅웅웅.......

에리오네는 여전히 백광의 오러를 띠고 있었다.

쾅.

에리오네로 뒤의 벽을 뚫자 앞에 있는 또 다른 로얀도 마찬가지로 그 뒤에 있는 돌벽을 꿰뚫었다.

콰지직!

쿠르르릉......!

에리오네가 박힌 부분을 중심으로 돌벽에 마치 거미줄이 쳐진 것처럼 금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또 다른 로얀이 에리오네를 꽂은 쪽도 마찬가지였다.

동굴이 커다란 진동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거울이 부서짐과 동시에 그 위에 새겨져 있던 이상한 문양과 그 속에 흐르는 묘한 힘이 사라져갔다.

스르륵.

또 다른 로얀의 모습도 점차 흐릿해지더니 사라져갔다.

쿠르르릉.......

동굴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로얀은 덮쳐오는 흙더미를 보며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위로 들어 올렸다.

쿠르르릉.......

로얀의 귓가로 굉음이 울려 퍼졌고 그렇게 동굴은 무너져갔다.

* * *

“크윽.......”

떨어져 내리는 돌무더기를 보며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위로 들어 올렸던 로얀. 그 직후,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빛이 그를 덮쳐왔었다.

강한 빛이 사라지자 로얀은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주위를 둘러보던 로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칠흑의 어둠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고 그는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윽!”

자세를 바로잡으려 해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주위에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혼돈의 정령왕... 이것으로 나의 잠을 깨운 것이 두 번째인가?]

“누구지?”

로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 외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한데 그 목소리는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차갑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정말 묘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나 말인가? 나는 카오스라고 하지.]

흠칫.

로얀의 몸이 떨려왔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을 만든 존재이자 전대 다크로얀을 어둠 속에 가둔 장본인. 그가 바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차원계를 만들었고 창조신들을 만든 절대신 카오스였다. 그리고 교황에게 로얀을 도우라고 한 존재이기도 했다.

“당신이 나를 여기로 소환한 것인가?”

[그 말투는 전대의 다크로얀보다 심하군. 그리고 내가 널 소환한 것이 아니라 네가 날 부른 것이다.]

“.......”

[이곳은 이 차원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원래 차원계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카오스의 힘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와 유일하게 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실라카의 사람들이 말하는 축복의 숲이 존재하는 이유도 사실은 이 장소 때문이었다. 축복의 숲 바로 밑에서 카오스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울창한 나무가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라카의 전사들이 유난히 강한 이유도 이곳에서 나오는 힘 때문이었다.

드래곤이나 다른 존재들도 이 힘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로얀이 들어온 그 동굴도 카오스가 아니고는 보이지도 않고 들어올 수도 없는 절대적인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카오스는 별다른 함정 같은 것을 놓지 않은 채 간단한 마법진만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드래곤도 깰 수 없는 절대적인 진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이곳으로 들어온 데다가 카오스가 만들어놓은 마법진까지 깨버렸다. 그건 바로 로얀의 힘 때문이었다. 카오스 자체가 혼돈이었고 로얀의 힘 또한 혼돈이었다. 두 존재의 힘이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교황에게 로얀을 도와주라는 말을 전하고 다시 잠들었던 카오스는 이곳으로 들어온 데다 자신의 마법진까지 누군가에 의해 깨지자 잠에서 깨어나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전대의 다크로얀이 무슨 생각으로 널 혼돈의 정령왕으로 만들었는지.......]

“무슨 뜻이지?”

[인간의 몸에 나의 힘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 강한 힘이 들어 있다. 과연 인간의 나약한 육신이 견딜 수 있을까?]

“.......”

[너의 몸은 부서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육신을 잃었을 때 너는 폭주하게 될 것이고 이 차원계도 과거 다크로얀이 다른 차원계를 부순 것처럼 사라지겠지.]

“알고 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다. 죽지 마라. 이 차원계를 위해서라도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

화아아앗!

카오스의 말이 로얀의 마음속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강한 빛이 로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슬픈 운명을 가진 아이구나. 어서 깨어나라. 나는 네가 목숨을 잃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우주에서 유일하게 나와 힘이 통하는 아이여!]

파하하핫!

그렇게 로얀은 빛에 휩싸여 다른 곳으로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들려온 카오스의 말속에는 왠지 모를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 * *

“로얀!”

바다 소리처럼 시원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로얀은 서서히 눈을 떠 자신의 이름을 부른 존재를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푸른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엘라임이 보였다.

엘라임은 쓰러진 로얀을 안고 있었다.

실라카 사람들에게서 로얀이 이곳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그녀는 즉시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로얀이 이곳으로 떨어진 흔적은 분명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라임은 로얀을 찾기 위해 이 주위를 모두 뒤졌고 하루가 지나서야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로얀을 발견한 것이었다.

자신이 그를 이곳으로 보냈기 때문에 로얀이 이런 일을 당하게 됐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스윽.

로얀이 손을 들어 엘라임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그렇게 로얀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실라카로 돌아간 로얀과 엘라임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바로크가 말한 실라카의 전통 술이라는 것을 대접받을 수 있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붉어져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만큼 하늘도 무척이나 맑았다. 어둠이 칠해진 하늘에 아름다운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오늘따라 별들이 유난히 뚜렷하게 잘 보였다.

“하하하......!”

실라카의 전사들은 모두 호탕하게 웃으며 술이 담긴 커다란 술잔을 부딪쳤다. 술이야 마을의 땅 속 창고에 있었기에 무사했고 컵은 실라카의 사람들이 조금 전 즉석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화르륵!

움찔.

불꽃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로얀의 몸이 살짝 떨렸다. 옆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던 엘라임이 그 떨림을 느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때문인지 로얀이 입을 열었다.

“불안해... 심장이 왜 이렇게 뛰고, 마음이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로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잔을 기울이며 피로를 풀고 있었다. 그런데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이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괴이한 느낌이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에도 이렇게 불안하고 심장이 뛰진 않았다. 그리고 카오스가 마지막에 한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평소 강인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로얀이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자 엘라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전사의 예감이 여자들의 예감보다 더 확실할 때가 있지. 전사는 자신의 검을 우선적으로 믿어야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네.”

바로크가 다가와 그렇게 말하고는 왼손으로 로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런 그의 오른손엔 커다란 술통이 들려 있었다.

그의 말이 그라운 산맥을 넘어 바로 제국으로 가겠다던 로얀의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아무래도... 내일 그 녀석에게 가기 전에 얀에게 한번 들렀다 가야겠어.”

빙긋.

“나야 어디든 따라간다고 했으니까.”

엘라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왠지 마음이 풀리는 로얀이었지만 술잔을 기울이는 그의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로얀과 엘라임이 실라카에서 밤을 보내고 있을 때, 몰딘 왕국의 수도 모르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지나가는 듯했다.

“응? 비라도 오려나?”

몰딘 왕국의 왕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자 하늘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스거거걱!

비가 오는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던 병사들의 손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푸화확!

솟아오르는 피들!

하늘을 덮고 내려앉은 그림자는 구름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이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덮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작은 틈새로 보이는 그들의 피부는 어둠처럼 어두웠다.

콰가가강......!

그때, 왕성의 문이 터져 나갔다. 그 엄청난 굉음에 잠을 자던 모르딘의 일반 가정집과 가게에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가 울려 퍼지자 기사들과 병사들은 왕성의 문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왕성의 문을 날려버린 자가 부서진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태연하게 왕성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뒤로 흑색 야행복을 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뒤따랐다.

“와아아아......!”

철그덕, 철그덕!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와 앞서 걸어오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창과 검을 겨누었다.

“누구냐!”

“후우! 좋은 밤이군, 케인.”

자신의 뒤에 있는 케인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 카엔이었다.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학살하며 몰딘 왕국의 왕성에 정면으로 쳐들어온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군대를 두 번씩이나 전멸시킨 로얀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를 최대한 처절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다른 드래곤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 이 성에 다른 드래곤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오늘의 사건은 내일이나 되어야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드래곤들은 그저 검은 야행복 입은 어쌔신들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나라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대륙이 갑자기 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들지 않는 한 그들은 인간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지금 몰딘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엄청난 사건은 드래곤들에게는 별로 상관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 마스터.”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이들 중 한 명이 카엔의 말에 대답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바로 이 흑의인들을 이끄는 대장인 케인이었다.

카엔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본 듯한 표정이었다.

“난 복잡한 길은 딱 질색이다.”

“지금 즉시 깨끗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팟!

케인이라는 흑의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흑의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스거거걱!

“크아악!”

푸화화확!

피가 바닥을 적셨고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모습이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하나둘 흑의인들의 검날에 사라져갔다.

뚜벅, 찰박!

명을 내렸던 카엔은 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기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이 딱딱한 바닥을 밟으며 뚜벅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고 붉은 피가 고인 곳을 밟으며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체조차도 흑의인들에 의해 멀리 던져져 바닥에 이미 스며든 피만이 카엔을 반겼던 것이다. 그의 눈앞에 불그스름한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뚜벅뚜벅.......

찰박찰박.......

카엔의 발이 성 안을 누볐다.

부우욱.

스거거걱!

“크아아악......!”

몰딘 왕국 기사들과 병사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성 안을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성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카엔이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케인은 다크 엘프들을 이끌고 카엔 앞을 막는 이들을 모두 도륙했고, 그들의 검이 왕성 가득 비명소리를 흘려보냈다.

뚜벅뚜벅.......

“이곳이었던가?”

한참 동안 왕성 안을 누비던 카엔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금으로 화려한 문양을 새긴 거대한 문 앞이었다.

“이곳이 몰딘 왕국 왕의 집무실입니다.”

등 뒤에서 케인의 스산한 음성이 들려오자 카엔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가 웃는 이유가 무엇일까?

카엔은 지금 문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의 기운을 읽고 있었다. 마나가 어느 정도 몸에 담겨 있는 상급 검사들이었다.

스윽.

거대한 문을 바라보던 카엔이 손을 뻗었다.

“헬 파이어.”

화르륵!

콰가가강......!

초고온의 불꽃이 폭발하듯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거대한 문을 강타하자 그것은 그대로 불타올라 버렸다.

“크아아악!”

그와 동시에 문 뒤에 숨어 있던 기사들 또한 지옥의 불꽃에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불꽃이 스치기만 한 기사들도 꺼지지 않고 타들어 가는 헬 파이어의 불꽃에 죽어갔다. 그 엄청난 열기에 문에 새겨져 있던 금빛 문양도 서서히 녹아 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륵.

뚜벅뚜벅.......

바닥에서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불꽃을 뒤로하고 카엔은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국왕의 집무실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노인 한 명과 많은 기사들이 빽빽이 들어차 그를 맞이했다.

웅웅.......

카엔이 들어오는 순간 늙은 인간 마법사의 손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카엔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짤막하게 말했다.

“디스펠.”

궁정 마법사인 그리알은 미리 외워두었던 마법을 펼치려 했으나 카엔의 짤막한 말 한마디에 그 생각을 지워야 했다. 궁정마법사인 그의 마법을 주문도 영창하지 않고 간단히 봉쇄시키는 존재는 드래곤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법으로 드래곤을 상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 드래곤!”

그리알은 너무도 놀라 소리쳤다. 좀 전에 보았던 마법도 화염계 최강의 마법이라는 헬 파이어였다. 주문도 없이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중간계에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드래곤!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달려들어도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인간들에게 있어 드래곤은 너무도 강하고 무서운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검은 흑발의 외모로 보아 상대는 성미가 더럽다는 블랙 드래곤이었다.

“크흡!”

기사들의 몸이 떨려왔다. 물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답게 드래곤 앞에서 검을 떨구거나 물러서는 이는 없었지만 대신 그들은 동상이 된 듯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피피핑!

쉐에엑!

카엔이 집무실 안으로 한 발, 한 발 들어오고 있을 때 천장에서 빛이 튀어나와 그를 덮쳤다.

피식.

“실드.”

티티팅!

그러자 빛은 단검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타탁.

그러자 천장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이 나라의 젊은 국왕인 얀이었다.

얀은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닥으로 착지해 카엔을 바라보았다.

“폐, 폐하!”

그리알은 얀이 계속 숨어 있기를 바랐다. 하나 얀은 그의 생각을 뭉개고 스스로 이곳에 나타나 버린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 로얀을 죽인 거냐!”

얀은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카엔이 스스로 드래곤이라는 것을 밝히면서까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로얀이 죽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뭐라고 했나, 벌레 같은 인간?”

“커컥!”

카엔의 몸에서 드래곤 피어가 뿜어져 나오자 집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기사들은 모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검을 축 늘어뜨렸다. 드래곤 앞에서 대놓고 도마뱀이라 말한 인간이 역사상 과연 몇이나 될까?

으득.

“도, 마, 뱀, 자, 식!”

얀은 드래곤 피어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도마뱀이란 단어를 내뱉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그는 입술이 터지도록 꽉 깨물며 카엔을 직시했다.

뚜벅.

퍼억!

“커컥!”

쿠당탕dispell.

천천히 얀에게 다가간 카엔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꽂히자 얀은 저항 한번 못 하고 허공을 날아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자 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을 흘렸다.

“폐, 폐하!”

기사들과 그리알이 얀을 향해 외쳤지만 이미 굳어버린 그들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카엔이 케인을 보며 눈짓했다.

파파팟!

스거거걱!

다크 엘프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에 불과한 기사들을 처참하게 뭉개기 시작했다.

“케인, 저 늙은 인간은 내버려두어라.”

“예, 마스터.”

뚜벅뚜벅.......

케인에게 그렇게 명을 내린 카엔은 쓰러져 있는 얀을 향해 다가갔다. 다크 엘프들에 의해 하나하나 목숨을 잃어가는 기사들을 보며 카엔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지금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눈을 빛내던 카엔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어리자 그 모습을 보던 얀의 눈에는 반대로 독기가 서렸다.

파지직.

카엔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아공간이 생기며 그 속에서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보물을 수집하기 좋아하는 드래곤의 물건이라면 필시 범상치 않은 검일 것이다.

뚜벅.

그 검을 쥔 카엔이 얀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으드득.

얀은 이를 갈며 다가오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카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그의 몸을 쇠사슬처럼 꽁꽁 묶고 있었던 것이다.

뚜벅.

푸욱.

“커커컥!”

카엔이 매우 천천히 그의 복부로 검을 박아 넣자 얀은 고통에 찬 음성을 터뜨리며 피를 토해 내었다. 검이 꽂힌 복부에서 붉은 피가 옷을 적시며 번졌다. 붉은 피는 끊임없이 흘러나와 이윽고 바닥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푹.

카엔의 검이 다시 뽑히자 검이 빠져나간 얀의 복부에서는 더욱 많은 양의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스윽.

화르륵......!

이제 죽어가는 얀을 보며 카엔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뜨겁고 밝은 불빛을 띠기 시작했다.

히죽.

“나의 멋진 작품을 부순 그 인간 녀석이 오면 네가 말해 주는 거다. 모르드 평원에서 내가 친히 기다린다고.”

카엔은 웃으며 뜨거운 불꽃이 깃든 손을 뻗어 얀의 팔에 뭔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치지직.......

“크윽!”

얀은 입술을 깨물며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내뱉지 않으려고 애썼다.

“됐다. 넌 앞으로 정확히 일주일을 살 것이다. 내가 모르드 평원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일주일. 뭐, 그 안에 그 녀석이 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하지만 역시 이곳으로 와 너를 보는 쪽이 더 재미있겠는데 말이야. 하하하!”

피를 토하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얀의 몸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엔이 팔에 그려놓은 마법진이 환하게 빛났다. 은은한 마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저주 계열의 흑마법인 듯했다.

얀은 카엔이 등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독기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다 혀를 물어 자살하려 했다.

“아차! 멍청하게 그 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죽는다면 내가 친히 이 나라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해주마. 그리고 늙은 인간!”

카엔은 고개를 돌려 집무실에서 얀 외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인간인 궁정 마법사 그리알을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그 기간이 지나고 죽는다면 네가 직접 그 녀석에게 말해 줘라. 그때에는 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말이야. 그것이 너를 살려둔 이유니까.”

뚜벅뚜벅.......

“케인! 저 두 인간을 제외한, 나의 정체를 눈치 챈 인간은 모두 죽여라.”

“예, 마스터.”

“이거 앞으로의 일이 너무 기대되는걸. 하하하하......!”

카엔의 웃음소리가 왕성 가득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은 곧 빛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왕성 안에 다시 그림자가 아른거림과 동시에 고통에 찬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그리알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얀을 향해 달려왔지만 그는 그저 카엔이 사라진 곳만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얀은 자신을 저주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버릴 수가 없기에 또다시 친구에게 아픔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 * *

슈아아앙.......

실라카를 떠난 엘라임과 로얀은 곧장 수도인 모르딘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슈아아앙.......

두근두근.......

갑자기 로얀의 심장이 급격히 날뛰었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뚫고 자신의 심장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몸 속에서 갑자기 고통이 엄습해 왔다.

“크윽!”

로얀의 신형이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아니, 추락하고 있었다.

슈아앙.......

쿠쿠쿵......!

로얀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굉음을 내자 그 소리에 비로소 앞장서서 날아가던 엘라임이 멈추어 섰다.

“로얀!”

그녀는 빠른 속도로 로얀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다행히 로얀은 바닥에 처박히지 않고 무사히 착지해 있었다. 조금 전에 났던 굉음은 높이가 높이인 만큼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타탁.

땅으로 내려온 엘라임은 곧장 로얀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윽!”

지금 로얀의 몸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아무리 전대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힘을 네 개로 나누어 봉인했다고는 하지만 로얀의 몸은 나약한 인간의 육체였다.

또한 첫 번째 봉인이 풀리고 난 뒤 그는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쉬지 않고 싸움을 벌였고, 어둠의 정령까지 휘하로 들이면서 힘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한 바람에 몸 안에 가득 찬,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정령왕의 기운이 그의 몸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을 떨고 있는 로얀을 보고 엘라임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쿨럭!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게 말하는 로얀이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 지금 쉬지 않고 계속 힘을 쓴다면 이대로 폭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 쉬는 게 좋겠어.”

엘라임의 말속에는 로얀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 안 돼. 어서 가야... 쿨럭!”

“.......”

로얀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고 엘라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로얀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네 번째 봉인이 풀리면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은 과거 폭주한 상태에서 한 차원계를 붕괴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의 기억까지 물려받은 로얀은 차원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늘로 떠오르는 엘라임의 모습을 쳐다보던 로얀은 문득 과거 혼돈의 정령왕이 될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차원계라는 것은 칸 대륙과 정령계 모든 것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얀이 있고 레이나와의 추억이 있는 바로 이 세계.......

만약 자신이 폭주하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엘라임도 자신의 손에 의해 사라질 것이다.

“쉬었다... 가지.”

로얀의 입이 힘겹게 열리자 하늘에 떠 있던 엘라임이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로얀의 떨리는 어깨를 다시 잡았다.

그 상태로 잠시 숨을 고른 로얀은 몸 속에 가득 찬 힘을 배출하듯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를 정신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엘라임이 바라보았고, 그렇게 그들은 이름 모를 숲 속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 * *

두근두근.......

몰딘 왕국의 수도인 모르딘으로 들어서자 로얀의 심장은 또다시 급박하게 뛰었다.

모르딘은 매우 혼란스러워 마치 메테오라도 떨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세 명씩 모여 수군거렸고 왕국의 병사들이 모르딘의 대로를 오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로얀과 엘라임은 이름 모를 숲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곧장 모르딘으로 향했다. 하지만 로얀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기에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모든 힘을 검으로 쏟아내서일까? 지금 로얀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비록 모르딘에 도착하는 데 며칠씩이나 걸렸지만 말이다.

뚜벅뚜벅.......

그의 발걸음은 모르딘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빨라졌다.

“로얀, 진정해!”

보다 못한 엘라임이 그를 향해 그렇게 외쳤지만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멈춰라!”

왕성 앞까지 당도한 로얀과 엘라임은 그곳에서 산산조각이 난 왕성의 문을 볼 수 있었다. 한데 안으로 들어가려는 두 사람을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이 병사들은 그때 대로에서 로얀을 보지 못한 듯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로얀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기에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어쌔신들이 갑자기 나타나 왕성을 피바다로 만들고 국왕 이얀을 해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얀의 생존은 불분명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스윽.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그립 쪽으로 손을 보낸 로얀은 눈을 번뜩였다.

지금 그는 무척이나 흥분해 있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소울 체인지를 겪은 그였지만 불길한 예감은 그를 평상시처럼 냉정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자신을 한 인간으로 대해 준 사람이자 유일한 친구인 얀이 위급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평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냉정을 유지하던 로얀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로얀님 아니십니까. 모두 물러나라!”

그때 다행히 은빛 갑옷을 차려 입은 기사가 로얀을 알아보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뵙.......”

뚜벅뚜벅.......

로얀은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기사를 지나쳐 왕성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의 정체가 밝혀진 이상 이제 그의 앞길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얀은 얀의 침소까지 단번에 달려갔고, 그런 그의 뒤를 걱정스런 눈동자를 한 엘라임이 따라갔다.

이윽고 로얀은 거대한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문을 밀어 젖혔다.

끼이익.......

문을 여는 이 짧은 순간 동안 마치 수십만 년의 세월이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뚜벅뚜벅.......

로얀의 눈동자에 거대한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얀이 비쳤다. 그는 잠을 자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니, 로얀님!”

침상 옆에 있던 그리알이 그를 알아보고는 급히 다가왔다. 한데 커다란 방 안에는 시중드는 하녀도 없이 달랑 그 혼자였다.

“어떻게 된 거지?”

“드, 드래곤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으드득!

역시나 드래곤의 짓이었다.

로얀은 침상 옆으로 가 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서 미약하나마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불안해 보였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는 데도 말이다.

“저주에 걸려 있어.”

“응?”

엘라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얀에게 다가가 침구 안에 있던 그의 팔을 들어 올렸다. 얀의 팔등에는 불로 지진 듯 작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 알아보시는군요. 그 드래곤이 새긴 것으로... 복수를 하고 싶다면 모르드 평원으로 일주일 이내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알이 사실대로 말해 주자 로얀은 모르드 평원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저주에 대해 물었다.

“저주?”

“마계의 악질적인 악마들이나 쓰는 거야. 아마 길어야 이삼 일.......”

그의 물음에 답한 것은 엘라임이었다. 로얀은 그 말에 크게 흥분하여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목청을 높여 외쳤다.

“이삼 일이라니!”

엘라임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로얀이었지만 그는 확인 차 다시 그리알을 쳐다보았다.

“예. 드래곤의 말에 따르면 폐하께서는 일주일을 사실 거라 하였으니 정확히 이틀 후면 폐하께서는.......”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어째서!”

빠드득.

자신을 해하고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 고통을 주는 것은 상관없었다. 이제 질릴 정도로 적응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 주위에 몇 없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로얀을 거쳐간 인연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나마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정말 신이 저주스러웠다.

“폐하께서, 만약 로얀님께서 오신다면 깨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알의 말에 로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얀은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약을 먹으면서까지 잠만 잤다. 로얀이 오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로얀이라면 분명 친구의 복수를 위해 당장이라도 드래곤을 만나러 갈 테고 그러면 얀 자신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로얀에게 친구가 얀뿐이듯 왕인 얀에게도 친구는 로얀뿐이었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로얀님께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미안하다고.......”

으득!

미안한 건 자신이었다. 자신과 인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얀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건 자신 때문이었다.

“크으윽......!”

로얀의 어깨가 들썩이며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기괴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너무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 * *

로얀과 엘라임은 왕성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로얀은 항상 얀 옆에 붙어 있었다. 그에게는 복수보다는 바로 눈앞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친구가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이얀의 생명은 고작 하루밖에 남지 않는다.

침대 옆에 앉아 죽은 듯 누워 있는 얀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자신이 혼돈의 정령왕이 된 것도, 복수를 결심하게 된 것도 후회되는 로얀이었다.

자신이 혼돈의 정령왕이 되어 복수를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얀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뒤에서 바라보던 엘라임이 가느다란 손을 들어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 인간이 로얀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야?”

“내 목숨을 내줄 만큼.”

뒤에서 그의 어깨를 짚고 있는 엘라임에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떨림만큼은 분명히 전해지고 있었다.

“로얀이 과거 인간이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정령왕이야. 이제는 인간의 법칙이 아닌 정령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정령인 거야.”

“나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엘라임이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로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엘라임은 웃음을 지었다.

“어디에 있든 항상 지켜볼게. 완전한 정령왕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봉인이 모두 풀려야 하겠지만 로얀은 그때마다 고통을 겪을 테고 난 그걸 지켜볼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멀리 있어도 제발 스스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마.”

엘라임의 음성이 떨려왔다. 마치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말하는 그녀였다.

스르륵.

그리고 그녀의 몸이 로얀에게로 숙여졌다.

흠칫.

자신의 등 뒤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로얀은 몸을 떨었다.

잠시 그렇게 로얀을 안고 있던 엘라임은 곧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얀과 단둘이 남게 된 로얀은 여전히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왜 엘라임이 갑자기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 * *

아침이 밝았고 왕성 안은 분주해졌다. 국왕이 오늘밤이 지나면 죽을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왕의 침소에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알이 자글자글 주름진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문 앞에서 자신의 국왕을 쳐다보고 있었고, 로얀과 엘라임은 얀의 침대 옆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엘라임은 고개를 돌려 슬픔에 잠겨 국왕을 지켜보고 있는 그리알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왠지 모르게 저들이라면 이얀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던 것이다.

끼익, 쿵!

문이 닫히자 엘라임이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를 살릴 방법이 있어.”

번뜩.

“뭐, 뭐지!”

엘라임의 말에 로얀은 몸을 돌려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거세게 붙잡았다. 그의 손 떨림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를 살리려면 내 본신의 힘을 써야 해.”

스륵.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로얀의 손이 힘없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중간계에서 엘라임이 본신의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3분. 게다가 그 3분의 대가는 정령계에서 백 년간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주의 신, 만물의 신 카오스가 만든 법칙이었다.

화아아악!

엘라임의 몸이 푸른 빛에 휩싸이고 있었다. 너무도 강렬한 그 빛은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뒤덮더니 잠시 후 가라앉았다.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본신의 힘을 쓴 것은 로얀 때문이었다. 그녀가 본신의 힘을 쓰려 한다는 것을 안다면 로얀이 말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얀의 저주를 풀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라임이 보기에 지금 얀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본래의 힘을 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로얀의 머릿속으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

로얀은 엘라임이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백 년이라는 세월을 감내해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방법이라면 나와 계약을.......”

로얀의 외침에 엘라임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바보. 그렇게 정령왕이라고 외치더니. 어둠의 정령들이 널 왕으로 받들고 너에게 귀속된 이상 넌 누가 뭐라고 해도 정령왕이야. 나와 같은 정령왕... 혼돈의 정령왕이야.”

엘라임은 그렇게 말하며 얀을 향해 걸어갔다.

“나... 기다릴게. 백 년을 기다릴게. 이게 내 마음이니까.”

빙긋.

미소짓는 엘라임의 전신에서 은은한 푸른 빛과 함께 강한 정령의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그 순간, 그녀가 얀을 향해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그 어떠한 생명체보다 치유능력이 뛰어나다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힘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할 말을 잃고 쳐다보던 로얀은 지금 엘라임이 펼치는 힘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정령왕 본신의 힘이라서일까? 엘라임의 힘은 복사할 수가 없었다.

화아아앗!

1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얀의 팔등에 새겨져 있던 화상 자국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몇 초 후, 엘라임은 손을 거두자 얀의 팔등에 머물러 있던 푸른 빛도 사라졌다. 그러자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가 보였다.

후우웅.

“너를 위해서... 백 년을.......”

“나, 나는.......”

엘라임은 하얀 빛과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다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남겨둔 채 그녀는 카오스의 율법에 의해 정령계로 강제 소환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미처 자신의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로얀은 엘라임이 사라진 자리를 손으로 한번 휘저을 뿐이었다.

이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그녀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리자 로얀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얀을 바라보았다. 정말 생명 하나는 질긴 녀석이다.

스윽.

뚜벅뚜벅.......

얀의 얼굴을 보던 로얀은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리알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얀을 향해 웃음 짓던 로얀의 얼굴은 방을 나서는 순간 싸늘한 살얼음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그리알은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블랙 드래곤 카엔을 대하는 것만큼 두려움이 들어서였다.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던 그리알은 왕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로얀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엘라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국왕 이얀이 있는 침상으로 향했고 잠시 후, 왕의 침소에서 그리알의 격한 음성이 울려 나왔다.

그리알의 기쁨에 찬 음성을 뒤로하고 로얀은 계속 걸었다. 주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그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 없어 죽지 않는 것이다! 카엔......!’

콰드득.

불끈 쥔 로얀의 두 주먹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붉은 핏방울을 바닥에 점점이 떨어뜨리면서 그는 모르드 평원을 향해 걸어갔다.

* * *

황량한 대지 위에 바람이 불었다.

까아악......!

귀가 따갑게 짖어대는 까마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한두 마리의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단체로 합창을 하는지 까마귀들은 대지를 온통 흑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까마귀들이 단체로 모인 이곳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해골들이 처량하게 보이는 모르드 평원이었다. 칠흑의 깃털을 지닌 까마귀는 더 이상 먹을 것도 남아 있지 않는 하얀 해골의 뻥 뚫린 안구 속을 부리로 깨작거리고 있었다.

이곳 모르드 평원은 여름의 대륙에 속한 곳으로 비가 잘 오지 않는 삭막함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그런 이곳에 수십,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니 죽은 채로 전장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피의 전쟁이라 불리는 빈트러드 제국과 몰딘 왕국 간의 모르드 평원 대전투가 끝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몰딘 왕국의 ‘슬픔을 마시는 자’라는 부대가 빈트러드 제국의 병사들을 몰살시키자 한동안 모르드 평원엔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시체는 부패해 굶주린 까마귀들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다.

까악......!

마치 까마귀들의 세상이 된 듯한 모르드 평원이었지만 그들조차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한 곳 있었다. 바로 모르드 평원에서 빈트러드 제국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아담하게 지어진 그 집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집 근처에는 복면을 한 이들이 수백 명 지키듯 서 있었다.

이 집은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새 집이었다. 인간들에게는 용병왕 카엔이라 불리는 블랙 드래곤이 일주일 전 갑자기 찾아와 마법으로 간단하게 지은 것이었다.

카엔은 그동안 로얀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지루한 나날들이었지만 다가올 로얀과의 즐거운 싸움을 기대하며 그는 꿋꿋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이익.

“오늘이 마지막이군.”

블랙 드래곤 카엔이 이 아름다운 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따분함에 지친 표정으로 황량한 모르드 평원을 바라보았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는 모르드 평원은 제일의 시체 청소꾼인 까마귀들에게 오늘도 청소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구역질을 할 이 광경을 카엔은 마치 한 장의 그림을 감상하듯 태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터, 지금 가시는 겁니까?”

카엔의 무료함에 질린 얼굴을 보고 복면인들의 대장인 다크 엘프 케인이 다가왔다.

케인은 벌써 몇백 년 동안 그의 옆에서 가디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카엔의 명령만 받들던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간계의 신이라 믿고 있는 오만한 드래곤이라는 족속이 아무리 자신의 부하를 죽인 인간을 혼내주려 하는 것이라지만 이런 황량한 곳에 집까지 짓고 일주일이나 기다리는 것이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오오오......!

삭막한 바람과 함께 시체 썩은 내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블랙 드래곤 카엔의 집 주위에는 마법진이 쳐져 있어 냄새는 정화되고 시원한 바람만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후후후... 케인,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네?”

카엔의 눈동자는 케인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저 멀리 모르드 평원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검은 장벽이 쳐져 있었다.

휘오오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일까? 검은 장벽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너무 멀리 있어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 그 장벽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두둑!

그것을 바라보며 카엔은 손을 들어 뼈마디를 풀었다. 드래곤인 그에게 준비 운동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지평선을 바라본 채 웃으며 몸을 풀었다.

“케인, 가자.”

“예, 마스터!”

카엔은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기쁨으로 가득 들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를 케인이 이끄는 다크 엘프 수백 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많은 수가 움직이는 데도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직 카엔의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질 뿐이었다.

까아악......!

카엔과 수백 명의 다크 엘프들이 다가오자 놀란 까마귀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지직!

카엔의 발에 하얀 해골이 부서졌다.

검은 장벽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카엔은 눈을 반짝였다.

검은 후드에 전신을 검은색으로 치장한 상급의 어둠의 정령 세드니스들은 양손에 빛나는 흑검을 생성시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둠의 정령임을 모르는 카엔은 그들에게서 정령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자 리치 콘과 마찬가지로 아티팩트를 생각했다.

드래곤인 그가 어둠의 정령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둠의 정령은 검은색의 구체로, 아무런 힘도 없는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휘오오오.......

드디어 카엔 앞에 선 백 명의 세드니스들!

그들 앞에는 바람에 흑발을 나부끼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두 개의 검을 허리에 매달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흑안의 다크로얀이었다.

카엔에게 당한 친구 얀, 그리고 엘라임과의 갑작스런 이별 때문에 로얀은 카엔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어 그의 두 주먹은 몰딘 왕국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줄곧 펴질 줄을 몰랐다.

뚝뚝!

빠른 속도로 걷는 로얀의 두 주먹이 카엔을 보자 급격히 떨리며 붉은 눈물을 흘렸다. 몰딘 왕국에서부터 붉은 눈물을 흘리던 그의 두 주먹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낸 것이다.

휘오오오......!

카엔과 로얀, 두 사람은 그렇게 점점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네가 흑안의 다크로얀이라는 인간이냐?”

팔짱을 낀 카엔이 웃음을 띄운 채 자신을 향해 그렇게 묻자 로얀은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콰드득!

로얀의 두 주먹이 떨렸고 그의 입 안에서 피가 살짝 새어 나왔다. 그의 하얀 잇몸이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들며 흘러나온 피였다.

‘저 사내였다! 저 남자였다!’

그의 머릿속에 순간 레이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레이나는 카엔 옆에서 웃으며 행복해 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나가 있는 팔레인을 향해 브레스를 쏘았다. 레이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그녀를 한낱 장난감처럼 여긴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화가 났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로얀은 전대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과 계약을 맺을 때만 해도 정말 그냥 하늘만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나자마자 복수를 결심한 것은 황량하게 변한 팔레인의 모습에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행복하게 웃던 레이나의 웃음소리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브레스를 쏘았을 카엔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카엔이 여기서 죽는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장난감처럼 버린 여인 이리아뿐이었다.

까아아악......!

멀리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나의 이름은 다크로얀... 아니 시엔. 과거의 사슬을 끊으러 왔다. 카, 엔!”

로얀의 입이 열리며 까마귀 울음소리보다 더 구슬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슬픔과 고통으로 찌들어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그 누구라도 죽일 듯 살기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엔? 뭐, 용병들은 가명을 자주 사용하니까.”

카엔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래곤에게는 망각이 없다고 하지만 수천 년을 살아온 그가 한낱 인간의 이름을,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간 인간의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콰득!

스르릉.

로얀의 두 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서서히 검신을 드러내었다.

웅웅.......

그의 분노를 느낀 것일까?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가 검신을 떨었다.

그런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보며 카엔은 턱을 쓰다듬었다.

“호오, 마검과 성검이라! 이거 꽤나 큰 수확인걸. 케인, 저들을 모두 죽여라. 단, 저 다크로얀... 아니, 시엔이라는 인간은 두 팔만 잘라라.”

카엔은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을 바로 알아보고 탐욕스런 표정을 지었다.

“예, 마스터.”

그러자 카엔은 웃음을 담은 채 하늘로 솟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마치 검투장에 온 귀족처럼 흥분해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다크 엘프의 수장인 케인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도 죽일 수 있는 어쌔신이었다.

휘오오.......

다시 한 번 모래를 동반한 바람이 한 차례 불고 지나가자 로얀과 세드니스, 케인과 다크 엘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검의 날을 세웠다.

이윽고 그들은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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