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협곡에서의 사투 (23/42)

5장 협곡에서의 사투

협곡에서의 사투

로얀과 엘라임은 빠른 속도로 날아간 탓에 날이 저물기 전에 크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크산은 마치 거대한 미로처럼 보였다. 험준한 산세에 콸콸거리는 폭포, 그리고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물이 풍부해 풀이 많이 자라 있는 이곳에는 여러 가지 동물들도 많이 살고 있었는데, 크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몰딘 왕국을 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크산을 내려다보던 로얀과 엘라임은 카엔의 수족인 콘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로얀과 엘라임은 콘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3천 명이나 되는 키메라가 이동하니 안 보려고 해도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치인 콘은 허공을 날고 있었는데, 그에게 발각될 것을 염려한 엘라임이 급히 지상으로 내려가자 로얀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 밑으로 하강했다.

타탁.

다행히 콘에게 발각되지 않고 지상에 내려선 두 사람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진열을 맞추어 지나가는 키메라 무리를 지켜보았다.

쿵! 쿵! 쿵!

키메라들은 자신들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부수고 거치적거리는 풀을 뭉개버렸다.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키메라들이 줄지어 좁은 산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행진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또 마법을 써서 이동했다가는 드래곤의 레어에 마나석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스윽.

로얀의 손이 다크리온의 그립을 더듬자 부드러운 끈의 느낌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지금 그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나갈 기세였다.

“잠깐! 저들은 키메라야.”

“키메라?”

그의 되물음에 엘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와 가까운 정령인 그녀는 키메라의 몸 속에 자리 잡은 마나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마나석을 몸 속에 박고 사는 생명체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이 만든 키메라였다.

“키메라는 커다란 짐승이 아니었나?”

“아냐. 드래곤들이 만든 키메라들은 각양각색으로, 일정한 기준이 되는 모습이 없어.”

“.......”

로얀은 키메라든 뭐든 싸울 생각이었기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엘라임은 그의 행동에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휴우! 마나석을 노려. 너도 정령이니 마나석의 위치를 알 수 있겠지.”

엘라임의 말에 로얀은 행진하는 키메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마나석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한참을 주위의 모든 것에 감각을 집중하던 그는 결국 마나의 기운을 느끼는 것을 포기하고 눈으로 키메라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살짝 빛났다. 시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 외에도 다른 것이 있는지 그의 눈에 마나석이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 마나석이 느껴진 것이 아니라 보였다.

키메라마다 마나석이 있는 위치가 달랐다. 머리에 있는 녀석도 있었고 가슴에 있는 녀석도 있었다.

“보인다.”

“응?”

[다크로드.]

엘라임의 의아해 하는 얼굴을 지나쳐 그는 나직이 다크로드를 불렀다. 아무리 그라 해도 혼자서 3천 명의 키메라를 상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스르륵.

로얀의 부름을 받고 다크로드는 그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하겠다.]

스르륵......!

[예, 마이 로드.]

그가 말하는 정령어가 기류를 타고 숲 속으로 퍼지자 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꽃과 풀의 그림자 속에서 세드니스들이 튀어나왔다.

[모두 느껴지는 마나석을 부순다.]

[잠깐! 마나석 위에 마법을 걸어놓았어. 마나 소드 정도가 아니면 부술 수 없어.]

풀숲으로 뛰어 나가려는 그들 사이에 엘라임이 끼어들며 그렇게 말하자 로얀이 다크로드를 바라보았다.

[출, 흑검.]

츄아아앙!

백 명의 세드니스의 양손에서 검은색 검날이 솟아났다.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왕께서 계시는 곳이 곧 정령계입니다. 전력을 다한다면 벨 수 있습니다.]

세드니스는 정령계의 제약을 받지 않기에 자신들의 힘을 백 퍼센트 모두 쓸 수 있는 상급 정령들이었다. 그런 그들이라면 마나석을 부술 수 있을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엘라임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세드니스들은 예전과는 달리 물의 정령왕 엘라임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있었다.

[좋다. 모두 나를 따라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모든 마나석을 부숴라.]

웅웅웅.......

세드니스의 검날에서 검은 기류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총합 2백 개의 검날이 일제히 웅웅거렸다.

[예, 마이 로드.]

파파팟!

로얀은 다크로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크르르릉?

길게 줄지어 행렬하던 키메라들은 갑자기 풀숲을 뚫고 나타난 로얀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에 따라 앞으로 전진하던 키메라의 긴 행렬이 자동적으로 멈췄다.

파사사삭!

그리고 줄지어 세드니스가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타탁!

로얀은 두 자루의 검을 뽑으며 키메라들의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촹! 웅웅웅.......

그리고 검에서 마나 소드가 뿜어져 나온 순간 로얀의 손이 맹렬하게 움직였다.

푹, 부욱!

에리오네가 키메라의 단단한 갑옷과 가죽을 뚫고 가슴에 있는 마나석을 꿰뚫었다. 다크리온은 힘차게 날아가 키메라의 허리를 갈라버렸다. 그 키메라의 마나석은 허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마나석이 부서진 키메라들은 힘없이 쓰러졌다.

느긋하게 하늘을 날며 이동하고 있던 리치 콘은 로얀이 등장과 동시에 키메라의 약점인 마나석을 부숴버리자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웬 놈이냐!”

“카엔, 그 도마뱀이 보냈나?”

“네, 네놈이 어떻게......!”

로얀의 말에 콘은 크게 당황했다. 그가 카엔이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집어냈을 뿐만 아니라 주군의 정체 또한 알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맞는 것 같군. 너희들이 죽을 이유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죽어라!”

부웅.

콰지직!

다크리온이 로얀 바로 옆에 있는 키메라의 몸통을 베었다. 역시나 마나석이 부서져 나갔다.

콘은 본능적으로 더 높이 날아올랐다. 주군의 정체를 알고도 저렇게 말하는 녀석을 향해 그의 본능이 적색경보를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 모두 저놈을 죽여라!”

쿠어어어!

콘의 명령을 받은 키메라가 일제히 로얀을 에워싸며 덤벼들었다.

로얀은 콘을 먼저 죽이려 했으나 그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일단은 그에게서 관심을 끊고는 사방을 가득 메운 키메라들부터 상대해 나갔다.

스거거걱.

하지만 키메라들의 행동은 세드니스에 의해 멈춰졌다. 세드니스의 흑검이 그들의 마나석을 부숴버린 것이다.

채채챙!

그렇게 로얀과 세드니스는 키메라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붉은 피가 대지를 적셨다. 불사신이라는 키메라가 차가운 대지에 몸을 뉘었고 세드니스는 진정한 불사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 수십 개의 무기에 관통당하고도 태연하게 검을 휘둘렀다.

후웅.

로얀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커다란 철퇴가 허공을 갈랐다. 고개를 숙여 그것을 피한 로얀은 손목을 비틀어 위로 올리며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그러자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다크리온의 날이 철퇴를 휘두른 키메라의 어깨를 갈랐다.

두꺼운 살덩이가 깨끗하게 베였다. 이 키메라의 마나석은 바로 어깨에 있었던 것이다.

쿠쿵.......

육중한 무게의 키메라가 쓰러졌다.

빙글.

그러나 로얀에게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사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키메라들이 으르렁거리며 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빙글 돌린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둘렀다.

푸욱.

에리오네의 날카로운 날이 마나석이 숨겨져 있는 키메라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마나석이 있는 키메라의 머리를 다크리온이 갈라놓았다.

그립을 감고 있는 보라색 끈은 그립을 묶고도 흘러 내려와 로얀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휘날렸다. 그의 예상대로 키메라의 몸에서 뿜어진 붉은 피는 이미 보라색 끈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스윽.

3천이나 되는 키메라들이 바글거렸다. 세드니스들이 열심히 싸워주고는 있었지만 이런 속도라면 날을 새도 모자랄 판이었다.

[모두 사신의 춤을 펼친다.]

로얀이 두 개의 검을 돌려 잡으며 그렇게 말하자 세드니스들이 그의 말에 응하여 검을 밑으로 내렸다.

사신의 춤을 펼치며 곳곳에 있는 마나석을 부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빠른 시간 내에 키메라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사신의 춤!]

휘오오오......!

로얀과 세드니스들의 몸을 바람이 감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의 손은 점점 빨라졌고, 그들의 신형은 키메라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쿠어어어......!

스거거거걱!

스가가각!

츄아아악!

여기저기에서 사지가 튀어 오르고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이제 막 사신의 춤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덩치가 큰 키메라들의 시신은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키메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가뜩이나 좁은 길목을 동료들의 시체가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에 로얀과 세드니스들을 공격하는 데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시체를 으깨며 지나가도 시체는 쌓여만 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제일 당황한 건 리치 콘이었다. 그는 3천 명이나 되는 키메라들이 일방적으로 당하자 놀라는 한편 분함을 떨치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키메라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로얀과 세드니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전멸뿐이다. 어떤 대안이 필요해!’

“크으윽, 일단 모두 후퇴한다! 전방의 백 명은 그들을 막아라!”

리치인 콘은 결국 백 명의 키메라를 방패막이로 삼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키메라들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 명령대로 따랐다.

로얀 앞에 있는, 정확히 백 명의 키메라들이 괴성을 지르며 더욱 열심히 싸우는 동안 다른 키메라들은 질서 정연하게 뒤로 물러나 앞서 하늘을 날아 사라지고 있는 콘의 뒤를 빠른 속도로 쫓아갔다. 매우 날렵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채챙.......

크르르릉!

스가가가각!

로얀과 세드니스는 검을 휘둘러 남은 백 명의 키메라를 상대해 나갔다. 그런 그들에게로 밤의 어둠이 은은히 깔렸고, 키메라와 로얀의 첫 대면은 그렇게 싱겁게 끝나 버렸다.

* * *

로얀과 세드니스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피한 콘은 크산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의 앞에는 3천 명에서 2,500명으로 줄어든 키메라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 있었다. 명령없이는 움직이는 않는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석상처럼 서 있었다.

키메라 백 명의 희생으로 무사히 이곳으로 도망쳐온 콘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뼈밖에 없는 그의 얼굴엔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꽤나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놈들 분명 정령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어.”

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금 전 보았던 세드니스를 떠올렸다.

대마법사이던 그는 리치가 되면서 훨씬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정령의 기운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한데 그런 모습의 정령은 들어본 적도, 문헌에서 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그렇게 많은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있다면 그건 정령왕뿐이었다.

“하지만 정령왕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공격한단 말인가?”

정령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바로 정령의 힘으로 만든 무구를 착용하고 있을 경우였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콘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의 무구를 무력화시킬 묘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휘오오오.......

고산 지방이라 그런지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강한 바람이 수십 차례 지나간 뒤 콘은 괴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드디어 좋은 묘책이 생각난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퍼져 나갔다.

“크크... 정령석과 그 주문이라면 무구에 걸린 정령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겠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그렇게 외친 콘은 몸을 일으켰다.

스윽.

“너희들은 모두 여기 있어라.”

스팟.

콘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마법을 써서 향한 곳은 카엔의 레어였다. 그 많은 무구를 무력화시키려면 정령석이 꽤 많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얀과 세드니스가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 했다. 벌써 주위가 어두워진 밤, 적들은 어딘가에 자리 잡고 야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야밤에 누군가를 찾기 위해 이 험준한 협곡을 돌아다니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대로 로얀은 모닥불을 피워두고 엘라임과 함께 숲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타탁!

불꽃이 바스락거리며 이글거렸다.

리치인 콘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로얀과 엘라임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많은 수의 키메라가 죽었지만, 그보다 몇 배나 많은 키메라들이 달아났다. 그러나 수천의 대군은 멀리 달아나진 못했을 것이다.

세드니스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을 단숨에 찾을 수도 있었다. 또한 어둠 속에서의 싸움은 로얀과 세드니스에겐 더욱 유리하지만 로얀은 그들을 찾지 않았다. 엘라임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어둠의 정령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빨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엘라임은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타탁.

타오르는 불꽃을 사이에 두고 로얀과 엘라임은 크산의 이름없는 숲 속에서 말없이 하룻밤을 보냈다. 그렇게 그들은 타들어 가는 불꽃을 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숲 속에서 밤을 보낸 로얀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리치와 키메라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엘라임도 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풀숲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로얀은 이미 키메라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밤 사이 세드니스들이 크산을 뒤져 찾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얀은 다크로드의 안내를 받아 키메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곧장 향했다.

밤에는 이곳 세계의 그림자라 할 수 있는 어둠이 깔리기에 세드니스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어두운 밤에는 바람의 정령보다도 더 빠르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어둠의 정령들이었다.

다크로드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칼로 반듯하게 잘라놓은 듯한, 커다랗고 높이 솟은 벽이 사방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크산의 협곡 중 하나로 로얀과 엘라임이 들어온 길 외에는 나갈 방법이 없었다. 있다면 날아가거나 마법을 쓰는 방법뿐이었다.

병풍처럼 절벽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공터는 상당히 넓었다. 2,500명이나 되는 키메라들이 서 있는 데도 전혀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로얀의 등장에 키메라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쏘아보았고, 곧 이어 키메라들 뒤에 앉아 있어 보이지 않던 리치 콘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콘이 사용한 것은 정령의 기술이 아닌 7서클의 마법인 플라이였다. 때문에 6서클까지의 마법만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로얀은 하늘을 날 수가 없었다.

“크크크... 데리러 가려 했더니, 수고를 덜어주는군.”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하는 콘의 말에 로얀은 묵묵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맑은 검명을 토해 내며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동시에 뽑혀 나왔다. 그러자 그와 같이 등장한 다크로드는 흑검을 생성시켰고 엘라임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라임은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기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주위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정령석.......”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엘라임은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최상급의 정령석 백여 개가 협곡 곳곳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령석은 정령의 힘을 담고 있는 돌로 정령의 힘을 불어넣거나 정령을 가두어 마법무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였다. 또한 마나의 반응력이 뛰어나 마법사들에게는 마나석만큼이나 귀중한 실험도구이기도 했다.

사방에 깔려 있는 정령석이 빤짝거렸다. 그 광채를 보고 엘라임은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엘라임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로얀은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의 그립을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파파팟!

다크로드를 선두로 세드니스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질서 정연하게 도열했다.

[오늘의 명령도 역시나 저들의 말살이다.]

[예, 마이 로드.]

츄아아앙.

세드니스들은 일제히 복명하고는 다크로드와 마찬가지로 양손에 흑검을 생성시켰다.

“가자.”

스르르륵.

로얀의 말과 동시에 세드니스들은 미끄러지듯 키메라들을 향해 나아갔고, 그런 그들의 선두에서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든 로얀이 빠른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킥, 모두 저놈들을 막아라!”

쿠어어어......!

콘의 명령을 받은 키메라들도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듦으로써 로얀이 이끄는 슬픔을 마시는 자와 리치 콘이 이끄는 키메라들 사이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쿵! 쿵! 쿵!

스르륵!

채채챙......!

스가가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키메라들은 팔이 잘리고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도 적을 죽이기 위해 괴성만 질러댔다. 그런 그들의 위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거거걱!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다시 슬픔을 마시는 자가 일방적으로 키메라들을 몰아붙였다. 그러자 콘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그의 모습은 키메라들의 거대한 몸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가 내려선 곳에서 강한 빛이 발산되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자연의 원소들이여, 저기 평온한 안식처에 내려앉아 영원토록 기쁨을 누려라.”

“이, 이건......!”

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는 순간 엘라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뒤늦게 그녀는 콘을 막으려 달려가려 했으나 그의 주문은 이미 끝난 뒤였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콘이 미리 그려놓았는지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츠츠츠......!

원래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던 데다가 키메라들에 의해 가려져 보이지 않던 마법진이 마법이 펼쳐지면서 생성되는 빛으로 인해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우우우웅!

마법진에선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천지가 뒤흔들렸다.

[크윽!]

모든 세드니스들이 휘두르던 손을 축 늘어뜨렸다. 콘이 펼친 마법은 주문의 말과는 달리 억지로 자연의 힘인 정령의 기운을 가두는 마법이었다. 그 주문으로 인해 정령의 힘이 정령석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에 정령들이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사방에 깔려 있는 정령석은 최상급의 정령석이었다.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조차도 자신의 힘이 미약하지만 조금씩 빨려 들어감을 느낄 정도였다.

휘오오오......!

[로드, 힘이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정령석 안에 갇히진 않았지만 사방에서 힘을 빨아들이니 세드니스들은 도저히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뭐지?”

“크크크... 너희들이 가진 마법무구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크하하하!”

리치인 콘은 자신이 그렇게 말해 놓고도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마법무구의 힘만 무용지물로 만들었을 뿐인데 세드니스가 모두 몸을 늘어뜨리고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의문을 던져버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적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쏴아아아......!

콰가가가강!

그때, 엘라임의 주위에서 생성된 물이 협곡 곳곳에 박힌 정령석을 때렸다. 최상급 정령석이라 잘 부서지지 않았지만 물의 정령왕인 그녀가 전력을 다해 몇 번 물길을 쏘아내니 여기저기 부서지기 시작했다.

[정령석을 부숴야 돼!]

쏴아아아......!

콰가가강!

엘라임의 외침에 로얀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에 여기저기서 빛나는 정령석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콘은 적잖게 당황여 외쳤다. 설마 이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푸른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은 마법도 아닌데 물을 마음대로 다루고 있었다.

“저, 저 년을 죽여라!”

쿠어어어......!

본신의 힘을 절반밖에 쓸 수 없는 엘라임에게 키메라들이 떼지어 달려들기 시작하자 그녀 주위에서 물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녀도 정령석에게 힘을 조금씩 잃고 있었기에 제대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로얀은 점점 키메라들에게 포위당해 가고 있는 엘라임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 자신도 키메라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몸을 뺄 수 없었다. 그는 정령석에게 힘을 빨리지는 않았지만 어둠의 정령들을 거두면서 생긴 기술들은 쓸 수가 없었다. 그 기술을 펼치는 순간 힘이 정령석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키메라의 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키메라들은 베어도 죽지 않는, 이제는 힘을 쓸 수 없게 된 세드니스들은 내버려두고 로얀과 엘라임만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콰가가가......!

엘라임 주위로 물보라가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지면을 깎아내며 출렁이던 물줄기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키메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키메라들은 푸른 물줄기에 모두 휩싸여 물의 소용돌이에 갈려버렸다.

쿠카카카칵!

“감히 마족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리치 따위가!”

그 뒤를 이어 흘러나오는 엘라임의 싸늘한 음성과 서늘한 눈초리! 많은 정령들이 두려워하는 그녀의 본 모습이 나온 것이다.

그녀의 몸 주위를 도는 물의 소용돌이. 그것들이 춤을 추듯 움직여 벽에 붙어 있는 정령석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가가강!

“뭐, 뭐지?”

리치는 갑자기 변한 엘라임의 기운과 힘에 크게 당황하여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새를 틈타 로얀이 자신 앞에 있는 키메라를 베고는 허공에 떠 있는 리치에게로 다가갔다.

로얀은 하늘을 날 수가 없었기에 키메라의 허벅지를 밟고 그들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묵직한 로얀의 몸이 어깨를 눌렀지만 키메라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탓!

그는 키메라의 튼튼한 어깨를 받침대 삼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손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백광의 오러를 발하고 있었다.

“윽, 이런!”

멍하니 있던 콘은 로얀의 검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는 급히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피했다.

타탁.

로얀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는 다시 지면으로 내려왔다.

목표물이 다시 땅 위로 내려오자 키메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후웅.

쿠가가각!

날카로운 다크리온의 날이 키메라의 몸통을 갈랐다. 마나석의 위치는 생각지 않고 그냥 휘둘러 벤 것이다. 곧 다시 재생될 테지만 로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목표물은 바로 리치 콘이었던 것이다.

츄아아아......!

허공을 올려다보는 로얀의 눈가에 바로 위에 있는 리치의 모습이 담겨지는가 싶은 순간, 에리오네의 주위를 푸른 물줄기가 감싸기 시작했다. 푸른 물줄기는 에리오네의 검신을 돌며 회전하고 있었다.

후웅.

콰직!

날카로운 에리오네의 검신이 반이나 땅 속으로 잠겼고 그와 동시에 푸른 물줄기가 폭발했다.

콰하하항!

쿠구구궁......!

“이, 이게 뭐.......”

리치 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커다란 물의 기둥이 솟아올라 그를 가두었기 때문이다. 물기둥은 길이만 긴 것이 아니라 두께 또한 매우 굵직했다. 마법으로 치자면 광범위 마법이었다.

로얀의 주위로 물줄기가 넓게 퍼져 키메라들까지 가두었다. 딱 한 곳, 로얀이 있는 곳만 물기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쿠구구구......!

콰드드득.

콘과 키메라를 가둔 물기둥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그 속에 있는 키메라와 리치의 몸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쿠구구구......!

물의 소용돌이는 엘라임이 시전한 것을 모두 합친 파괴력을 가진 듯했다. 그 모습에 정령석을 부수던 엘라임은 행동을 멈추고 로얀을 바라보았다. 몸으로 강하게 느껴지는 물의 힘 때문이었다.

쿠구구......!

잠시 후, 물기둥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꽤나 많은 수의 키메라가 떨어져 내렸다. 리치인 콘도 지상으로 떨어졌는데 그는 힘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무사히 착지했다.

그가 죽지 않은 이유는 물기둥 속에서 가까스로 방어막을 펼친 탓이었다. 정말 질긴 생명이었다.

‘이 녀석의 정체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지만 저년은 분명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다. 어서 마스터께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콘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물기둥 속에서 방어막을 치기 전, 그도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콘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와아아아......!”

정령석을 부수는 것이 시급했기에 엘라임은 로얀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정령석을 부수려 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들었던 손을 밑으로 내렸다. 사람들의 커다란 함성소리!

그렇다. 엘라임은 자신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싶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린 것이었다.

잠시 후 체인 메일과 간단한 방어구를 걸치고 있는, 2백이 넘는 사람들이 협곡 위에서 로얀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얼굴과 몸에는 하나같이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들은 전사의 후예, 신성한 대지를 더럽힌 너희들을 처단한다!”

그 중 상체를 드러내고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으로 쥐고 있는 사람이 맨 앞에 서서 그렇게 외쳤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협곡 가득 울려 퍼지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기세로 보아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향해 달려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들은 키메라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전멸당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마나석의 위치를 알 수 없었고, 저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인간인 이상 키메라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얀은 그들을 쳐다보다 이윽고 협곡의 벽을 바라보았다.

리치가 정령석을 하루 만에 모두 설치했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이곳은 물이 풍부한 곳이라 땅이 다른 곳보다 물렀던 것이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파팟!

그는 키메라들 사이로 몸을 숨긴 콘을 쫓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머리를 짧게 밀고 상체를 다 드러내고 있는 남자는 로얀이 다가오자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부하들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로얀의 검에 맺힌 마나 소드를 보았기 때문이다.

검을 추앙하고 검의 길을 걷는 이들 부족에게 있어 새로운 강자는 세상 무엇보다도 강한 흥밋거리였다.

콰가가강!

로얀은 키메라를 베어 넘기며 정체 모를 이들이 있는 협곡 바로 밑으로 향했다.

“하하, 이런 곳에서 대전사를 만나다니! 나는 실라카의 대전사 바로크라고 하네.”

바로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로얀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로얀 또한 얼떨결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순간, 로얀은 급히 자신이 여기로 온 이유를 상기하며 말했다.

“저들은 인간이 아닌 키메라, 죽일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저기 쓰러져 있는 놈들의 시체는 뭐란 말인가?”

이들은 실라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로 실라카의 진짜 실력파들이었다. 또한 그들을 이끌고 있는 바로크라는 이 남자는 바로 대륙에서 단 세 명뿐이라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바로크는 산에 틀어박혀서는 검의 끝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실라카를 떠나 대륙을 떠돌며 경험과 실력을 쌓아왔다.

하나 들려오는 실라카의 소식에 급히 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그곳에서 산 속 깊은 곳에서 수련하는 바람에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실라카 사람들과 함께 이곳까지 키메라들을 쫓아왔던 것이다.

“키메라는 몸 속 곳곳에 숨겨져 있는 마나석을 부숴야만 죽는다. 그리고 우린 그 마나석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음, 그것이 사실이었던가.......”

웅성웅성.

로얀의 말에 바로크는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고 실라카의 전사들은 웅성거렸다. 바로크는 키메라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어 로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는 로얀은 급히 말을 이었다. 어느새 몸을 회복한 키메라가 그의 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말을 믿고 곳곳에 박혀 있는 정령석을 부숴줬으면 한다. 정령석만 없앤다면 키메라들은 우리가 단번에 해치울 수 있다.”

“정령석?”

바로크의 말에 로얀은 손으로 협곡 곳곳에 박혀 있는 정령석을 가리켰다.

실라카의 전사들은 로얀의 말을 무시하고 당장 키메라들을 죽이러 가자고 고함을 쳐댔지만 바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로얀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하겠다. 그대는 전사의 눈을 가진 자. 모두 여기 전사의 말대로 정령석이라는 돌을 부순다!”

웅성웅성.

마을의 복수를 다짐하고 왔거늘 고작 돌멩이를 부수자고 하니 실라카의 전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키메라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그들은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신으로 여기 전사의 말이 모두 맞다. 그러나 여기 이 전사와 그의 동료들은 많은 수의 키메라들을 죽였다! 나는 전사로서 나와 같은 대전사에 오른 이 청년의 말을 믿는다. 모두 나의 의지를 받들라!”

웅성웅성.......

전사들의 웅성거림이 계속되는 동안, 어느새 엘라임이 키메라들을 돌파해 로얀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콰가가강......!

로얀은 다크리온을 휘둘러 엘라임 뒤로 다가오는 키메라들을 베어버렸다.

붉은 피가 후두두 떨어졌지만 곧 다시 합쳐졌다. 로얀이 일부러 마나석을 부수지 않고 살을 벤 것이다. 그 모습이 실라카의 전사들에게 각인되었다.

“와아아아......!”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전사들의 눈빛이 변하는가 싶더니 그들은 곧 함성을 내질렀다. 저들이 키메라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로얀의 말을 믿고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싸우기 전에 항상 함성을 지르는 실라카 사람들답게 그들은 어떻게 할지 결정이 나자 함성을 지른 것이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바로크는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협곡의 벽을 무너뜨리겠다. 그럼 전사여, 여길 부탁한다. 모두 시작하라!”

“와아아아......!”

바로크와 실라카의 전사들은 그렇게 함성을 지르며 각자의 무기를 꺼냈다. 메마른 고산 지대에서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들은 항상 깊은 굴을 파야 했기 때문에 땅 파는 기술은 몰딘 왕국에서 그들이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이곳에서 벗어나자.”

끄덕.

엘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얀은 검을 움켜쥐었고 엘라임은 물줄기를 휘감은 채 키메라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곳에 있다가는 무너져 내린 협곡의 흙더미에 깔릴 것이기 때문이다.

콰가가강!

스거거걱!

엘라임의 힘과 로얀의 힘이 협곡에서 몸부림쳤다. 그 두 사람은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키메라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쿠구구궁......!

로얀과 엘라임이 서서히 지쳐갈 때쯤, 드디어 협곡의 꼭대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실라카의 전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땅을 파고 협곡을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로얀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바로크의 바스타드 소드에서 빛나는 백광의 오러, 마나 소드였다. 로얀은 그제서야 바로크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큭! 아, 안 돼!”

그들의 행동에 리치 콘은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 내었다. 갑자기 나타난 실라카의 전사들이 그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콘은 카엔에게 돌아가 빨리 상황을 보고하고 싶었지만 광범위로 정령의 힘을 빨아들이는 주문을 쓴 데다 로얀에게 워낙 큰 타격을 받았기에 매직 미사일 하나 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쿠구구궁......!

2백 명이 넘는 실라카의 실력있는 전사들이 협곡을 무너뜨리기 위해 땅을 뭉그러뜨리며 파자 순식간에 협곡의 벽이 후두두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후우우웅.

콰가가강!

그리고 마지막 한 방이 이어졌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바로크의 바스타드 소드가 협곡의 벽을 내리찍은 것이다.

콰르르릉!

쿠어어......!

무너져 내리는 협곡!

거대한 바위와 돌들이 떨어져 내리며 밑에 있던 키메라들을 덮쳤다. 그리고 정령석도 묻히기 시작했다. 비록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정령석이 땅에 묻혔기에 세드니스들은 서서히 힘이 다시 생기는 것을 느꼈다.

스오오오......!

축 처져 있던 세드니스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붉은 눈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들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신의 춤.]

“사신의 춤.”

세드니스와 함께 로얀도 검을 고쳐 잡고는 키메라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안 돼......!”

혼신의 힘을 다한 콘의 절규가 협곡 가득 울려 퍼지는 가운데 로얀의 두 검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메라들의 몸뚱이가 차가운 대지 위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스가가각!

촤아아아......!

세드니스들과 로얀이 휘두르는 검은 키메라의 사지를 베었고 그들의 몸 속에 숨은 마나석을 부숴 나갔다.

세드니스들은 앞서 달려 나가며 로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 끝에는 바로 리치 콘이 있었다.

“어, 어서 날 보호해라!”

리치 콘은 바닥에 앉아 벌벌 떨며 뼈뿐인 입을 달그락거렸다. 과거 대마법사로 추앙받던 이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쿠어어어......!

그러자 명령으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불쌍한 키메라들이 괴성을 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로얀에게 달려 나갔고, 몇몇은 콘의 앞을 막아섰다.

“쉐도우.”

스르륵.

쿠어어?

로얀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자 키메라들은 발길을 멈춘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던 리치 콘은 몸을 떨며 키메라들 사이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로얀이 사라진 사실을 알지 못했고, 기의 흐름도 읽지 못했다.

마족에게 영혼을 판 리치는 죽으면 마계로 끌려가 죽지도 못하고 영원토록 일만 하며 살아야 했다. 그것이 영원한 수명을 얻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스르륵.

로얀의 신형이 콘의 그림자 속에서 솟아났다.

“......!”

“죽음의 반월.”

스가가각!

그리고 다크리온에서 뿜어지는 반월의 검은 오러가 콘의 신형을 덮쳤다.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오러를 바라보면서도 콘은 마법을 써서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라이프 배슬이 카엔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불사의 존재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스가가각!

그의 몸을 성검 다크리온이 훑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그의 뼈로 된 몸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회복되지 않고 이윽고 무너져 내렸다.

“아, 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크아아아!”

콘이 그렇게 소멸하자마자 세드니스와 로얀은 콘이 죽기 전에 했던 명령대로 자신들을 공격해 오는 키메라들에 맞서 검을 휘둘렀고, 엘라임은 협곡 위에서 구경하는 실라카 전사들의 시선 때문에 정령왕의 힘을 쓰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얀과 세드니스가 펼치는 사신의 춤은 검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의 신형은 부드러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키메라들 사이를 누볐고 그 바람 속엔 검은 칼날이 내장되어 있었다.

쿠어어어어......!

하늘을 가득 메우는 키메라들의 거친 울부짖음은 붉은 비가 그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닥은 갑자기 내린 붉은 물줄기로 곳곳에 작은 강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새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협곡을 가득 메운 시체들 위에는 로얀과 세드니스만이 서 있었다.

[모두 수고했다. 몸을 숨겨라.]

[예, 마이 로드.]

스르릉.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검집에 집어넣은 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쏴아아......!

그녀의 손에서 생성된 푸른 물줄기가 로얀에게 날아가 그의 몸을 덮어씌웠다. 겉으로 보기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로얀의 옷이 젖지 않게 그의 몸에 묻은 붉은 피와 키메라들의 살점을 말끔히 씻어냈다.

“하하! 이거 말이 다 나오지를 않는군. 정말 대단하구먼!”

로얀의 모습이 이제 막 말끔해졌을 때 어느새 바로크가 실라카의 전사들을 이끌고 협곡으로 내려와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응? 그 친구들은 어디 갔나?”

바로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던 세드니스들이 사라지고 없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실라카의 전사들도 모두 궁금한 듯 로얀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어쌔신 출신들이다.”

“아아, 그렇구먼.”

바로크는 아무리 어쌔신 출신이라 해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자신조차 그들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는 것에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마을의 복수를 해준 고마운 이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실라카 사람들은 전사들의 부족으로 긍지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네.”

“.......”

“실라카의 사람들이군요.”

로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 대신 엘라임이 바로크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길로 실라카로 돌아가 마을을 재건할 생각인데, 같이 가지 않겠나?”

“우린 따로.......”

“로얀, 자신의 부하를 찾기 위해 카엔이 실라카로 올지도 모르잖아.”

로얀은 거절하려 했으나 엘라임이 중간에 끼어들어 말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싸우면서 가다가는 카엔에게 가기도 전에 지칠 것이다. 또한 영악한 드래곤이 무슨 수를 쓸지도 모르니 일단 쉬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

“하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게. 어쨌거나 놈들과 같이 싸운 인연도 있고 하니 내가 실라카의 술을 대접해 주고 싶네.”

로얀은 바로크의 말에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실라카로 가는 것으로 정한 듯 확고해 보였다.

어쨌든 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라운 산맥을 넘는 게 빠르다. 그리고 실라카는 그 그라운 산맥 위에 있었다.

“그렇게 하지.”

결국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 바로크와 엘라임이 웃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라운 산맥의 실라카를 향해 길을 떠났다.

* * *

로얀과 엘라임이 그라운 산맥의 실라카로 향하고 있을 때, 빈트러드 제국의 트라이언에는 굉음과 함께 괴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왕성을 지키는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달려가려 했지만 황제 빈센이 두 손 걷어붙이고 그들을 막고 있었기에 기사들은 굉음이 들리는 현장으로 갈 수 없었다.

“으아아아......!”

콰가강!

초토화가 되어 있는 거대한 방의 중앙에는 검은 장발을 휘날리는, 무척이나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엔. 본명은 아니지만 그는 블랙 드래곤 카엔이었다.

방 안의 자잘한 가구와 장식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을 때 카엔은 유일하게 남은 흔들의자로 다가가 털썩 몸을 뉘었다.

으득!

카엔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디언 중 한 명인 리치 콘이 소멸당했다는 것을 그가 못 느낄 리 없었다. 이에 그는 마법으로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백 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만든 키메라 3천 명의 전멸과 자신의 가디언 중 한 명인 리치 콘의 소멸을 알게 되었다.

분명 콘의 라이프 배슬은 자신에게 있건만 그는 소멸당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라이프 배슬은 저절로 부서져 버렸다.

여기에 의문을 가진 카엔은 다시 한 번 그때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검 에리오네! 강한 신성력 덩어리라 할 수 있는 성검에 가격당했기에 리치 콘이 그 자리에서 소멸당해 버린 것이었다.

빠드득!

카엔의 입에서 스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인.”

“예, 마스터.”

그가 허공을 향해 부른 것은 이제 하나 남은 그의 또 다른 가디언이었다.

카엔의 부름에 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부복했다. 그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옷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디언의 정체는 바로 다크 엘프였다. 그는 다크 엘프들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리치 콘이 카엔의 비서라면 케인은 바로 카엔의 경호대장이라 할 수 있었다.

“후우! 이얀이라고 했던가.......”

“이얀 폰 크라이센, 몰딘 왕국의 현 국왕입니다.”

그러자 카엔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이 빌어먹을 녀석과 이얀이 친구 사이라지?”

“.......”

“후후후! 철저히 뭉개주마.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처절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다!”

카엔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케인.”

“예, 마스터.”

“모든 다크 엘프들을 이끌고 몰딘 왕국으로 간다. 그리고... 나도 가겠다.”

“예, 마스터.”

케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카엔의 모습도 빛에 휩싸여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데 그의 입가엔 부하의 복수를 하러 가는 자의 표정이 아닌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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