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바람이 불어올 때
바람이 불어올 때
몰딘 왕국의 모르딘은 지금 축제 분위기였다.
로얀이 이끄는 ‘슬픔을 마시는 자’가 그 누구도 꺾지 못한 빈트러드 제국의 깃발을 꺾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 명의 병사와 한 명의 대장으로 이루어진 단 한 개의 군단이 말이다.
스스로를 슬픔을 마시는 자라고 칭한 이들을 이끄는 대장은 왕인 이얀 폰 크라이센의 절친한 친우였다. 왕의 인덕은 나라의 복이라 할 수 있다.
이얀 폰 크라이센이 데려온 친우는 용병계에서 이름을 조금씩 알리고 있는 흑안의 다크로얀이라는 사람이었다. 용병생활을 하는 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는지 그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흑안의 다크로얀의 행적은 용병계를 통해 알려져 있었다. 원래 실력이 좋은 용병은 행적 하나하나가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호사가들이나 음유시인들이 부르짖으며 다니기에 쉽게 퍼져 나갔고, 일상에 찌든 서민들에게는 좋은 안주거리가 되어주었다.
아무튼 흑안의 다크로얀은 가을의 대륙에 있는 팔란 왕국의 엘레나 공주 구출 의뢰를 끝내고 난 뒤 왕국의 수도로 향했다. 그 후 엘레나 공주의 호위가 되었다가 그녀가 어쌔신들에게 살해당하자 복수를 하기 위해 홀로 이론 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제국의 참사라고 불리는 커다란 사건을 일으킨 뒤 종적을 감추었다.
한데 그 당시만 해도 중급의 소드 마스터였던 그가 어떠한 기연을 얻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됐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엄청난 기연을 얻어다 해도 단 몇 달 사이에 소드 마스터에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변할 수는 없었다.
만약 흑안의 다크로얀이 정말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이라면 그는 그야말로 칸 대륙에서 인간으로서는 최연소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 검의 천재일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에게는 그가 실력을 숨겼다는 것으로 굳혀졌다.
흑안의 다크로얀, 그가 이끄는 슬픔을 마시는 자라는 부대를 모르드 평원에서 본 병사들은 한결같이 그들을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사신처럼 보이는 이들이라고 사람들에게 묘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이었다. 빈트러드 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잔인한 살인자로 불릴 그들이 이곳에서는 영웅이 된 것이다.
제국의 바람 아래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 같던 몰딘 왕국의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측정할 수는 없지만 강한 힘을 가진 백 인의 검사들, 그들은 몰딘 왕국의 촛불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가져왔다.
모르드 평원에서 빈트러드 제국을 물리친 몰딘 왕국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고 사람들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도 자지 않고, 달빛을 등불 삼아 술을 마시며 너나 할 것 없이 즐거워했다.
그건 성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몰딘 왕국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귀족과 평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거의 평등한 나라나 마찬가지였지만 귀족이라는 족속이 존재하기는 했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에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귀족들이 춤을 추며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영웅으로 급부상 중인 로얀과 이 나라의 왕인 얀은 별빛이 잘 보이는 탁 트인 테라스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에선 파티가 한창이라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부하들, 정체가 뭐냐?”
얀의 손에 들린, 크리스탈로 만든 잔 안에서 붉은 와인이 출렁였다.
“나의 정령들.”
얀은 흑섬에서 로얀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기에 그가 혼돈의 정령왕임을 알고 있었다. 로얀이 진짜 정령왕이라면 당연히 다스리는 정령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얀은 세드니스의 정체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피식.
얀은 웃음을 지으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참나, 어떻게 그리 똑같냐?”
“뭐가?”
“너랑 네가 다스리는 정령들.”
얀은 잔 안에 든 와인을 가지고 노는 듯 흔들거렸다.
그는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봉인이 풀릴 때마다 뭔가를 잃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로얀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아.......”
그의 입 안 가득 밤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옛날 생각 난다.”
“.......”
로얀은 언제부터인가 붉은 와인 잔을 테라스 난간 위에 올려놓고 숫돌을 꺼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의 날을 갈고 있었다. 아무리 틈틈이 검을 갈았다지만 숫돌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오르하리콘으로 되어 있는 두 개의 검을 간 대가였다.
오랫동안 검을 잡은 검사들 중에는 검을 다듬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하는 사람이 많았고 로얀도 그러한 쪽에 속했다. 이것이 그가 굳이 신검과 마검을 가는 이유였다.
“난 말이야, 강제로 가을의 대륙으로 보내졌을 때 정말 아버지를 저주했어.”
항상 편안한 생활을 하던 그였으니 그건 당연한 감정이었다.
얀은 하늘에 박힌 별을 보며 계속 과거를 회상했다.
“왕족인 내가 용병생활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지. 난 매일매일 놀고 먹고 꾀만 부렸어.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때 널 만났다.”
치이익, 치이익!
다크리온의 날 위로 숫돌이 스쳐 지나가자 날이 달빛에 광채를 빛냈다.
“킥! 넌 용병들 사이에서 독종으로 불리고 있었고, 난 그날 너무도 심심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널 보게 되었지. 눈도 없는 데다 나이까지 어린 네가 용병이 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고 신선하게 다가왔어. 그때 난 보았지. 피를 덮어쓰고 자신의 몸을 베어가며 검을 연마하던 널 말이야. 너의 그런 점은 이곳에서 제발 쫓아만 내지 말라며 밟히고 밟혀도 빌고 또 빌던 너의 모습에서도 나타났지.”
“그게 너의 삶이 바뀐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하하, 많은 관계가 있지! 넌 다른 사람들이 자는 밤에는 몰래, 나와 그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검술 수련을 했잖아. 눈도 없는 네가 자신의 검날에 베이고 또 베이면서 말이야. 아무튼 너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고 나도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의지가 생겼다고나 할까?”
“.......”
“에헴!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내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죽었을 거야. 그때 나의 수행원으로 있던 마법사가 매일같이 수련하다 정신을 잃은 널 치료해 주었거든. 그게 다 이 몸이 명령한 일이다, 이 말씀!”
“누군가 내 몸을 치료해 주고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고맙다.”
“하하하!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흑섬에서 이어 벌써 두 번이나 들었다! 우하하하......!”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화통하게 웃어젖히고는 붉은 와인을 단번에 들이켠 후 몸을 돌렸다.
“이런 날은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하는 거라네, 친구. 그럼 난 간다!”
그리고 한창 연회가 열리고 있는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얀.
“히힛, 잘해 봐라.”
들어가기 전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순간, 검을 모두 갈고 허리에 차던 로얀은 저 아래에서 자신이 있는 이 높은 테라스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니, 그는 그 사람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 그녀가 달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스르륵.
테라스에 있는 로얀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신형이 물방울이 되어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 바로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말없이 로얀에게로 다가와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드래곤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종족이 아냐. 더구나 그 블랙 드래곤은 에이션트 드래곤이라고.”
드래곤은 나이에 따라 등급을 매겨진다. 5백 살 이하의 어린 드래곤을 해츨링이라 부르고 그 뒤부터 2천 살까지를 그냥 드래곤, 5천 살까지를 웜급, 그 이상은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말한다. 그리고 흔치 않게 만 살을 넘기는 고룡은 대부분이 드래곤 로드를 차지한 이들이었다.
블랙 드래곤 카엔의 등급은 에이션트 드래곤. 그의 힘은 인간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해도 에이션트 드래곤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죽이는 것이 내가 다시 살아난 이유다.”
로얀이 엘라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아! 드래곤이 전쟁놀이를 할 때에는 혼자 움직이지 않아. 그들에게는 몬스터들도 있어. 더 중요한 건, 그들은 그 알량한 자존심을 위해서는 어떠한 짓이든 한다는 거야.”
엘라임은 자신이 로얀의 일에 왜 이렇게 열을 내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편히 쉬려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불안하고 찜찜하다고나 할까? 그런 복잡한 마음 때문에 밖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로얀과 얀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온 것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드래곤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로얀은 하늘만 바라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덩달아 하늘을 바라보던 엘라임은 무심결에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오르하리콘으로 만들어진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은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 있었다. 손잡이 부분인 그립도 금속으로 되어 있었고 손을 보호하는 천이나 가죽 같은 것은 전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 검을 휘두르면 손이 남아나지 않겠어.”
엘라임이 흘러가듯 그렇게 말하자 로얀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의 그립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상처를... 이런 쪽으론 알지 못한다.”
그렇게 중얼거린 로얀은 그립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었다.
“내일 일이... 없다면 내일 같이 시장에 가줄 수 있나?”
로얀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그가 금속만으로 된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손이 까질 리 없었지만 그는 엘라임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대신 약속해 줘. 나를 두고 그 도마뱀에게 절대 가지 않는다고.”
“알겠다.”
로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라임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엘라임은 로얀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지만 그때마다 뭔가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느껴야만 했다.
죽는 기분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그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우리라.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말이다. 엘라임은 더 이상 로얀의 눈동자 속에서 고통과 슬픔... 여러 가지 어두운 감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에 구름이 조금씩 몰려와 별빛이 흔들거렸지만 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구름이 꽉 끼여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로얀은 왕성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침 일찍 시장에 가기로 지난 밤 엘라임과 약속했기에 그는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왕성의 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가 빈트러드 제국의 깃발을 꺾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여 분이 흐른 뒤, 로얀에게 고정되어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옮겨갔다.
병사들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로얀이 고개를 돌리자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아름다운 엘라임의 모습이 보였다.
나란히 선 둘은 아무 말 없이 왕성을 나섰다.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수십 명의 병사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장으로 향하는 대로를 걷던 로얀이 엘라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옷이 바뀌었군.”
“다, 단지 이것도 저, 정령왕의 힘일 뿐이야.”
그녀는 로얀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간편한 여행복 차림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물론 그 옷은 물로 만들어진 푸른빛이 감도는 옷이었다. 그것은 항상 깨끗함을 유지했기에 그녀는 그 옷만을 계속 입고 있었던 것이다.
정령왕의 힘으로 만들어진 옷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물의 색상을 띠긴 했지만 물처럼 투명하지 않았고, 그 누가 보아도 고급 천으로 만든 평범한 옷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여행을 할 때 계속 입었던 옷이 아니라 푸른빛이 감도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 역시 물로 만들어져 별다른 무늬가 없었고 액세서리라고는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로얀은 달라진 모습의 엘라임을 쳐다보다 다시 대로를 거닐었고, 두 사람은 이윽고 시장으로 접어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왁자지껄하던 시장이 두 사람의 등장으로 사일런스 마법을 광범위하게 펼친 것처럼 침묵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엘라임의 모습에 어디에나 있는 건달들은 당장이라도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녀 옆에 있는 로얀 때문에 말도 걸지 못했다. 로얀은 얀과 개선을 할 때 이곳 백성들 모두에게 얼굴을 보였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건드릴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어제도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믿고 엘라임에게 접근했지만 그녀는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는 어떠한 힘과 함께 살기가 느껴져 그 누구도 그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로얀과 얀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엘라임이었던 것이다.
시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걷던 로얀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검병을 감쌀 가죽이나 천을 구하러 포목점으로 가려던 엘라임은 로얀이 갑자기 다른 가게로 들어가자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로얀과 엘라임이 들어간 곳은 여자들의 장신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액세서리 점이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그 소리에 맞춰 점원이 달려와 허리를 숙이며 반갑게 맞이했다.
가게 안에는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시장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반찬거리를 사러 오는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여긴.......”
엘라임은 주위에 널린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바라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로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얀이 갑자기 이곳으로 들어온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로얀은 점원으로 보이는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저걸 사려고 하는데.......”
그의 손은 입구에 진열해 놓은, 긴 천으로 된 끈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머리를 묶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두께가 제법 두꺼웠다.
점원 일을 하고 있는 소녀는 로얀과 엘라임이 들어올 때만 해도 평소 하던 것처럼 자동적으로 튀어나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로얀의 모습을 확인하자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엄청난 인물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네, 네.”
점원은 로얀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진열대 쪽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잠시나마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끈을 모조리 들고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로얀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단순한 색색깔의 끈들을 뒤적거렸다.
그 끈들은 대량으로 만들어진,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값싼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한 여자들이라 해도 이렇게 볼품없는 것은 잘 사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들은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은 그제야 로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그 끈으로 그립을 감싸려는 거야?”
끄덕.
“그립을 감쌀 천이나 가죽은 포목점에서 사야지. 그런 머리카락을 묶는 끈은 잘 손상돼.”
“.......”
그러나 로얀은 아무 말 없이 끈만 뒤적거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그냥 사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원은 엘라임의 말을 듣고 로얀의 검이 두 개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저... 몇 개를 사실 건가요?”
“두 개.”
역시나 머리끈 두 개를 요구하는 그였다.
그러자 점원은 웃으며 다른 머리끈들을 들고 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 여유있어진 그녀였다.
“두 개를 사실 거면 이 세트를 사세요. 무늬가 없는 단순한 끈들이라 사람들이 잘 사지 않아서 이렇게 세트로 만들었거든요. 한 개는 덤으로 주는 거랍니다.”
그녀의 말은 두 개를 살 가격으로 세 개를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로얀은 낱개로 떨어져 있는 끈에서 눈을 떼고 가는 끈으로 세 개씩 묶여 있는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어차피 두 개를 살 생각이니 같은 값으로 한 개를 더 얻을 수 있는 그것을 사기로 결정한 것이다.
로얀은 끈을 뒤적거렸다. 아직도 그의 앞에는 수많은 싸움이 남아 있었고 분명 그때마다 피와 전장의 흙이 많이 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때가 잘 타지 않는 색상을 골라야만 했다. 하지만 여자들의 머리카락을 묶는 머리끈은 모두가 화려한 색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참 이것저것 뒤적이던 로얀은 겨우 한 세트를 집어 들었다. 보라색 끈 세 개가 같이 묶여 있는 것이었다.
“그걸 사시겠어요?”
점원의 말에 로얀은 끈의 가격을 지불하고는 엘라임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그날 이후 그 팔리지 않던 싸구려 끈의 인기는 급상승하게 되었다.
* * *
거리를 걸으며 얇은 끈을 푼 로얀은 두 개를 오른손으로 꺼내 왼손으로 옮겨 쥐었고 남은 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터벅.
로얀이 멈추어 서자 엘라임도 멈추어 섰다. 그는 왼손에 있던 두 개의 끈은 품속에 넣고 나머지 하나는 오른손에 쥔 채 엘라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엘라임은 의아해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응?”
“난 두 개만 있으면 돼.”
“.......”
선물(?)을 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엘라임은 그 보라색 끈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혼자 고를 거면 난 왜 데려왔는지... 대신 지금 바로 들어가기엔 여기까지 걸어온 게 아까우니 마을을 구경하다 가면 안 될까?”
보라색 끈을 품속에 넣으며 말하는 엘라임을 향해 로얀은 애써 따라온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 마음대로 끈을 산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을을 걸어 다니며 사용될 돈은 모두 네가 내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엘라임의 입가로 미소가 스쳐 지나갔고 로얀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얀에게서 받은 금으로 된 패가 있었기에 돈 걱정은 없었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게 공짜였다. 물론 그 돈은 왕국의 금고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아무튼 끈을 산 비용은 품속에 든 짤랑거리는 돈을 없애기 위해 지출한 것이었지만 로얀에겐 돈보다 유용한 금으로 된 패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르딘의 거리를 다시 걸었다.
* * *
로얀과 엘라임이 모르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몰딘 왕국의 그라운 산맥 위에서는 검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실라카! 이곳은 몰딘 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맥들 중 가장 높고 험준한 그라운 산맥 위에 지어진 곳으로, 다른 나라와 경계를 지어주는 왕국의 두 개의 국경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실라카는 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요새였다. 어느 성보다 단단한 이 요새는 오랜 옛날부터 전사들의 마을로 불렸다.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여자든 남자든 어려서부터 자신들만의 무기를 잡고 평생을 수련에 매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곳에서 길러낸 소드 마스터만 해도 열 명이 넘으니 이들 전사들의 마을의 저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만했다.
게다가 이곳은 칸 대륙에서 단 세 명 존재한다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배출된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로얀을 포함해서 칸 대륙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네 명이 되었지만 말이다.
여름의 대륙에서만 나는 딱딱하고 커다란 나무로 외벽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실라카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굉장해 국가에선 그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아니, 다스릴 수가 없었다. 실라카 사람들은 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돼지들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귀족이 없는 실라카는 하나의 부족이라 할 수 있었다. 몰딘 왕국도 그들의 전통과 관습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실라카는 부족 마을로서 오랜 세월 유지될 수 있었다.
사실 몰딘 왕국 쪽에서 보면 실라카는 참으로 고마운 부족이었다. 그들이 왕국의 국경에서 다른 나라들의 공격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몰딘 왕국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들은 감히 실라카 쪽으로는 쳐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산악지방에서 움직임이 빠른 실라카 사람들과 험준한 그라운 산맥에서 싸우는 것은 너무도 큰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병사들은 몰딘 왕국으로 쳐들어올 때 또 다른 국경인 모르드 평원을 이용했다. 모르드 평원을 지나 작은 산맥 하나만 넘으면 바로 몰딘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아직까지 외세의 침입이 없었던 실라카에 검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을 시간... 실라카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갈고 닦는 수련에 들어가기 위해 벌써부터 모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실라카의 중앙에는 그들이 모시는 신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전사들의 신이라 불리는 신으로 한 손엔 창을 들고 다른 손엔 방패를, 등엔 검과 활을 메고 있는 장신의 남자 상이었다.
오늘도 그 석상 앞에는 실라카 사람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는데, 문신을 좋아하는 그들 부족답게 그들의 얼굴이나 몸 곳곳에는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후우우웅.......
바로 그때, 평화롭기만 하던 실라카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그리고 커다란 석상 위로 검은 빛이 모여들고 있었다.
츠츠츠츠......!
“저게 뭐지?”
“저, 저길 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곳곳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에 얼굴을 다 가리는 헬름을 쓴 거대한 괴인들이었다. 오우거보다는 작지만 보통 성인 남자의 키보다 훨씬 큰 거구의 사람들!
그들의 손에는 철퇴며 검이며 여러 가지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거대하다는 것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들의 수가 불어났다. 나중에는 산맥 위를 가득 메울 정도까지 늘어났다.
땡땡땡......!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실라카 사람들은 수련을 하러 산맥 곳곳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종을 울렸다. 그러는 사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수상한 인물들을 경계했다.
후우웅.......
석상 위로 기괴한 불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클클... 3천 명이나 이동시키려니 너무 힘이 드는군. 최상급의 마나석만 도대체 몇 개나 든 거야?”
터지는 불빛 속에서 괴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석상 위로 검은 로브를 걸친 이가 내려섰다.
실라카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리치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머리를 밟고 서자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의 웅성거림과 살기로 번뜩이는 눈빛에도 리치는 이상한 웃음만 흘렸다.
석상 위에 있는 리치는 카엔의 명령을 받았던 콘이라는 자였다. 그는 실라카를 공격하라는 카엔의 명을 받고 3천 명이나 되는 인간 형태의 키메라를 한꺼번에 워프시켰다.
이 워프를 위해 콘은 최상급 마나석을 백여 개도 넘게 사용했다. 하나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마나석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써버린 것이다.
콘이 쓴 마나석은 모두 카엔의 레어에서 갖고 온 것이었다. 드래곤에게 있어 마나석은 빛나는 보석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카엔은 콘에게 쓸 만큼의 마나석을 자신의 레어에서 가져다 쓰라고 한 것이다.
[크크... 이곳에 먹잇감이 잔뜩 있구나. 모두 먹어치워라!]
마나가 실린 콘의 음성이 산맥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크르르......!
그의 말이 끝난 직후 산맥 위를 가득 메운 괴인들의 입을 막고 있는 헬름이 스르르 열리더니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드러난 그들의 입 안에서는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이고 있었다. 바로 키메라들이었다.
쿠어어어......!
콰지지직!
쿠쿠쿵......!
키메라들은 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곧바로 무기를 휘둘러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실라카 사람들은 경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키메라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하자 일방적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키메라의 움직임은 날렵했고 힘은 오우거만큼 강했던 것이다.
“모두 침착하게 적을 상대하라!”
일방적으로 몰리던 실라카의 사람들에게 강한 힘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검을 들고 나온 족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장에 실라카 사람들은 모두 무기를 고쳐 잡고 키메라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마을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이 중 세 명은 수련을 위해 산맥의 조용한 곳으로 가 있는 상태였지만 좀 전에 종을 쳤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올 터였다.
마을에 남아 있던 두 소드 마스터가 각각 도끼와 검에 마나를 씌운 채 키메라를 향해 돌진했다.
크르릉.......
카캉!
“......!”
오러를 씌운 검과 도끼가 키메라가 입은 갑옷에 막혔다. 강철도 자르는 오러 블레이드가 막힌 것이다.
두 소드 마스터가 당황하는 모습을 콘은 석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에는 많은 마법이 걸려 있지. 크크!”
“마법 무구인가.......”
콘의 말을 듣는 순간 실라카 사람들은 키메라의 재빠른 움직임이 납득이 되었다. 키메라들의 움직임은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도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었다. 아마도 그 갑옷에는 경량화 마법도 걸려 있을 것이다.
두 전사는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헬름과 갑옷을 이어주는 목 부분, 그 틈 사이로 희미하게 키메라의 살이 보이고 있었다.
“타아아압!”
부우욱!
촤아아......!
오러를 띤 검날이 키메라의 목을 날려버렸다.
쿵......!
바닥에 머리가 떨어지자 커다란 소리가 울렸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러자 그 목을 날린 소드 마스터 검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모두 목을.......”
“뒤, 뒤를 조심해!”
턱, 퍽!
하나 그 외침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동료의 음성에 뒤를 돌아보려던 찰나 그의 시야를 두꺼운 손이 덮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손은 주먹을 쥐듯이 그대로 움켜쥐어 검사의 머리를 터뜨려 버렸다.
듀라한도 아닌 괴인은 목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괴인은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더니 자신의 머리를 주워 들었다.
크르륵.......
목과 머리가 맞닿자 키메라의 입이 열리며 괴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쭈우욱.
“헉!”
바닥에 떨어진 키메라의 피가 목과 머리가 맞닿는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접착제라도 되는 양 목과 머리를 이었다.
순식간에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재생된 키메라는 자신의 무기를 들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키메라.......”
실라카를 다스리는 족장의 입이 힘없이 열리며 괴인들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보통 병사들이라면 이쯤 되면 전의를 상실하고 망연자실해 할 테지만 실라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힘껏 쥐고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상대가 누구건 자신들의 고향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와아아......!”
그렇게 실라카 사람들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키메라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라운 산맥에는 학살이 행해졌다.
“크아악......!”
으드득.
으적으적!
쿠어어어......!
키메라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단단한 이빨로 그들을 씹어 먹었다.
“크하하하! 트롤의 재생 세포를 극대화하고 살아 있는 듯한 피를 만들었지. 어때, 멋지지 않은가? 크하하......!”
리치가 되어버린 콘. 그는 백여 년 전 대마법사로 추앙받던 인물로 키메라를 연구하기 위해 스스로 드래곤에게 찾아가 그의 수족이 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스스로 리치가 되어 카엔의 레어 속에 틀어박힌 채 키메라에 대한 연구를 했던 것이다.
뭐든 실험할 수 있는 드래곤의 레어. 연구비와 재료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연구를 하는 마법사들에게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백여 년이 흐르자 그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불사신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를 말이다.
키메라의 약점은 심장. 이 키메라의 몸 속에는 최상급의 마나석이 들어가 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강한 방어마법이 걸려 있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마나 소드가 아니라면 부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심장의 위치는 저마다 달랐던 것이다.
이른 아침.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에 그라운 산맥은 피로 씻겼고 그 뒤를 괴이하고 섬뜩한 괴성이 뒤따랐다.
* * *
“이틀 전 그라운 산맥의 실라카족이 습격당한 직후 이욘드, 미리아 등 다섯 개의 마을이 습격당했습니다. 이들의 정체는 빈트러드 제국에서 키운 특수병들로 보이며 실라카를 출발지점으로, 길을 따라 나타나는 마을을 차례차례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전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크흠.......”
몰딘 왕국에서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이의 말이 있은 직후 몰딘 왕국의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회의장엔 큰 탁자를 중심으로 왕국의 대신들이 모두 앉아 있었는데, 지금 그의 한마디로 이곳의 공기는 급격히 무거워지고 있었다.
회의장 상석에 앉아 있는 이얀 폰 크라이센, 얀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그 괴인들이 지나간 곳이 붉은 줄로 그어져 있었다.
그 괴인들은 몰딘 왕국의 외곽을 돌고 있었다. 그들이 왕국을 노리는 거라면 실라카를 무너뜨리고 곧장 모르딘으로 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외곽을 돌며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얀은 한숨을 쉬며 정보를 담당하는 이가 건네준 전서를 펼쳐 읽었다.
“끄응! 모두 좋은 의견 좀 내봐라. 그리고 죽지 않는 불사신? 뭐 이딴 걸 전서로 가지고 오냐! 기냥 확!”
얀은 전서를 던지며 으르렁거렸다. 상식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왕이라는 이미지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얀이었다.
얀의 바로 앞 오른쪽에는 흰색 로브를 입은 궁정 대마법사 그리알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흠! 아무래도 이번에도 로얀님이 힘 좀 써주시는 것이.......”
궁정 마법사인 그리알이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말하자 얀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로얀은 분명 몰딘 왕국에 속한 기사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들은 이번에도 그가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얀은 회의장이 가득 울릴 정도로 외쳤다.
“그 녀석은 내 부하가 아니라니까! 녀석은 몰딘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끼익, 쿵......!
“내가 싸우겠다.”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커다란 회의장 문이 열리더니 로얀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 로얀은 이윽고 커다란 탁자 앞에 섰다. 그러나 그의 행보를 막는 병사는 그 누구도 없었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다.”
“아니, 분명 빈트러드 제국 놈들의 짓이다. 너의 적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적이기도 해.”
얀은 빈트러드 제국의 소행이라 단정지었다. 무엇보다도, 무슨 의도인지는 몰라도 폐허가 된 마을 중앙에 모두 제국의 깃발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놈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분명 나를 부르는 거다.”
로얀이 말하는 그놈이란 당연히 카엔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얀은 알고 있었다.
“.......”
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자신의 친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알.”
“예, 폐하.”
“이 녀석들의 경로로 보아 다음 목적지는 어디지?”
“그들이 향하는 방향엔 협곡이 많고 험난한 크산이 있습니다. 그 크산 너머에 있는 마을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알은 얀의 의도를 눈치 채고는 작은 지도를 품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로얀에게 다가가 그것을 그에게 건넸다.
로얀은 그것을 받아 품속에 넣더니 몸을 돌려 탁자에서 멀어져갔다.
“이 길로 그 녀석을 죽이러 가겠다.”
얀은 로얀의 말에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그리알.”
“예, 폐하.”
“말 백 필 준비해 줘. 아니, 백한 필.”
얀의 명령에 대답하려던 그리알의 입을 로얀이 막았다.
“그럴 필요 없다. 그냥 가는 게 더 빠를 거다.”
로얀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지만, 고집불통에 막무가내의 그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만큼은 얀도 알 수 있었다.
“젠장, 맘대로 해라! 대신 그 자식 몸뚱이는 나 주기로 한 거 잊지 마.”
로얀은 알 수 있었다. 얀이 드래곤의 몸이 탐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뜻을 돌려 말한 것이라는 걸!
끼익, 쿵......!
모르드 평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로얀의 퇴장과 함께 회의는 막을 내렸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사람들 모두가 안심하며 웃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얀은 그대로 길을 떠나기 위해 왕성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엘라임이 서 있었다. 그녀도 함께 가기로 약속했기에 로얀은 아침 일찍 그녀에게 미리 말해 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험난한 여행을 하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원피스가 아닌 처음에 항상 입고 다녔던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
“.......”
로얀은 엘라임의 긴 머리를 묶고 있는 보라색 머리끈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허리에 매여 있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병을 둘둘 말고 길게 나와 있는 보라색 끈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가 말없이 자신의 앞을 지나가자 엘라임은 왕성을 한번 쳐다보았다. 얀의 모습이 보였다. 엘라임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로얀을 따라나섰다.
왕성을 나와 대로를 걸은 두 사람은 곧 모르딘을 벗어났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터벅터벅.......
모르딘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로얀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날아가는 것이.......”
그 말에 엘라임은 로얀도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로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먼저 앞서 가.”
“......?”
로얀이 건네준 지도를 펼쳐본 엘라임 눈에 붉은색으로 표시해 둔 지명의 이름이 보였다. 크산이라는, 그녀도 잘 아는 곳이었다.
험난한 협곡이 많은 이곳은 폭포가 많아 물이 풍부했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정령들에게는 휴양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하늘을 날 수 없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 날 수는 있다.”
지도를 보고 있던 엘라임의 귓가로 그런 말이 들려오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
“묻지 말고 그냥 앞서 갔으면 한다. 부탁한다.”
엘라임은 도무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좀처럼 하지 않는 말 중 하나를 사용했기에 그러려니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로얀이 그저 지독한 방향치이거나 다른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로얀도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을 날아보는 로얀은 처음엔 서툴러 불안해 보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고 엘라임 못지않게 익숙한 모습으로 하늘을 날았다.
엘라임은 그런 로얀을 바라보다 곧 고개를 돌려 크산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로얀이 바짝 쫓았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학살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