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빛의 정령
빛의 정령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장막도, 대지를 뒤흔들 듯 두드리던 빗줄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사라졌다.
비 온 뒤의 하늘은 정말 푸르고 맑았다. 한데 그 맑은 하늘 위에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높이 떠 있었다.
터벅터벅.......
로얀과 엘라임은 쉬지 않고 여름의 대륙을 향해 걸었다. 사람이라면 벌써 더위에 지쳐 쓰러졌을 테지만 로얀과 엘라임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걷고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서는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엘라임이 문득 자리에 멈춰 서더니 푸른 머리카락을 날리며 로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가 봄의 대륙과 여름의 대륙의 경계가 되는 곳이야.”
그녀의 말에 로얀은 주위의 풍경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뒤쪽으로 드래곤 산맥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져 있고 한쪽 옆에는 푸른 초목이 가득한 빛의 숲이, 그 반대편에는 말라버린 대지가 놓여 있었다.
빛의 숲과 말라버린 대지는 서로 붙어 있었지만 어떠한 결계라도 쳐져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빛의 숲이 지금 더운 날씨라고는 하지만 여름의 대륙의 날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푹푹 찌는 햇살 속에 있는 말라 버린 대지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던 것이다. 살짝 발을 내딛어보기만 해도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분명 어떠한 힘이 두 대륙을 나누고 있기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 게다.
상반되는 환경을 보며 로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엘라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스르릉.......
몸을 돌리려던 엘라임은 로얀이 있는 쪽에서 들려오는 맑은 검명에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로얀이 천천히 다크리온을 뽑아 들고 있었다.
“로얀, 무슨 일.......”
엘라임은 로얀의 시선이 향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드래곤 산맥! 항상 초목이 무성한 그곳에서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 힘은 그녀에게 친숙한 것으로... 정령의 힘이었다!
“마검을 꺼낸 게 이 힘 때문이야?”
멀리서 다가오는 힘에서는 정령의 힘 외에도 신성한 기운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성스러운 힘에는 에리오네보다는 역시 마의 힘이 깃들인 다크리온이 효율적이었다.
스르륵.
멀리서 다가오는 힘의 주인은 나무를 통과하고 푸른 풀잎을 그냥 지나쳐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이 사물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든 것이 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로얀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나 엘라임은 힘이 다가오는 쪽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지이잉.......
그 힘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다크리온이 검신을 가늘게 떨었다.
스르륵.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이상한 힘을 지닌 존재는 밝은 빛으로 된 구체였다. 하급 어둠의 정령 다크와 흡사한 모습의 정령. 그러나 그것은 다크와 상반되게 하얀색의 밝은 구체였고, 성스러운 기운 또한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지잉.......
스륵.
이윽고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 정체불명의 정령은 로얀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마검 다크리온의 마기를 느끼고는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잖아!”
엘라임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천계에 있어야 할 빛의 정령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윽.
그녀의 반응에 로얀은 천천히 다크리온을 내렸다. 빛의 정령이 자신의 검에 겁을 먹고 몸을 숨겼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어둠의 정령 다크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던 것이다.
“빛의 정령.......”
로얀은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4대 정령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었지만 다른 세 정령, 빛의 정령, 어둠의 정령, 숲의 정령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해서인지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어둠의 정령 다크와 마찬가지로 겁이 많은지 나무 뒤에 숨어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무가 상당히 컸지만 윌오위스프의 몸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 어둠의 정령과는 달리 천계에서 잘 먹고 잘 살았는지 빛의 정령은 상당히 통통했던 것이다.
통통한 빛의 구가 나무 뒤에 숨자 약간 몸이 비어져 나왔고 그 부분을 통해 빛의 정령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귀여운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모습에 웃음을 지었겠지만 로얀은 무뚝뚝한 표정을, 엘라임은 무감정한 눈을 고수하고 있었다. 아니, 윌오위스프를 쳐다보는 로얀의 모습에는 오히려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빛의 정령이 허튼 수작이라도 부린다면 당장이라도 벨 기색이었다.
빛의 정령은 차가운 눈을 한 엘라임의 정체는 금방 눈치 챘지만 로얀은 인간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하급 정령을 복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마기를 풀풀 날리는 마검 다크리온 때문에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함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지 않으면 나무와 함께 베어버리겠다.”
로얀의 차가운 음성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스윽.
그의 오른팔이 천천히 다시 들어 올려지더니 그의 발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엘라임은 로얀이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터벅.
[갈게요! 갈게요!]
스르륵.
통통한 몸을 가진 윌오위스프가 정령어로 다급히 외치며 나무를 뚫고 로얀 앞으로 잽싸게 튀어나왔다. 그는 로얀의 눈에서 그가 정말로 벨 것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커다랗고 토실토실한, 풍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빛의 정령이었다. 그 커다란 빛의 구에 큼직한 눈이 두 개 달려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눈동자가 아닌 빛으로 만들어진 듯한 동그란 눈이었다. 한데 그 눈이 지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윌오위스프가 엘라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항상 천계에만 틀어박혀 있는 빛의 정령들은 다른 정령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고, 정령왕과의 만남은 더욱 희박한 일이었다. 지금 이 빛의 정령 또한 엘라임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빛의 정령의 어색한 인사를 받은 엘라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빛의 정령들이 정령왕을 대할 때 왜 서툰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로드.”
스르륵.
묵묵히 윌오위스프와 엘라임의 만남을 지켜보던 로얀은 어둠의 상급 정령인 다크로드를 불러내었다. 빛의 정령이 어둠의 정령과는 상극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 마이 로드.]
로얀의 부름에 다크로드는 즉각 응답하며 그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었다.
흠칫.
끔뻑.
윌오위스프의 몸이 살짝 떨림과 동시에 그 큼직한 두 눈이 끔뻑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다크로드의 주위를 돌며 그를 호기심 깃든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면 다크로드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다. 원래 어둠의 정령과 빛의 정령은 상극이었고 빛의 정령이 천계로 가기 전까지는 앙숙이라 할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다크로드는 빛의 정령인 윌오위스프를 알아보았지만 윌오위스프는 어둠의 정령인 다크로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둠의 상급 정령인 세드니스로 진화한 다크로드는 하급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겁 많고 약했던 어둠의 하급 정령 다크의 모습만 기억하는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로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역시 변한 모습의 다크로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능숙한 정령어! 그것은 그가 혼돈의 정령왕이 되면서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지식을 모두 넘겨받아 자연스럽게 익혀진 것이었다.
흠칫.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윌오위스프는 인간으로 보이는 로얀이 정령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자 다크로드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빛의 정령은 천계에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로얀의 이번 질문은 엘라임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끄덕.
“맞아. 천계의 신들의 동의가 없다면 천계를 빠져나올 수가 없지.”
스윽.
로얀과 엘라임의 시선이 윌오위스프에게로 모아졌다.
[그, 그게... 허락받고 나왔는데요.]
츄아아악.
갑자기 허공에서 푸른 물줄기가 생겨나 엘라임의 팔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정령어로 말했다.
[수천 년 동안 그들은 너희들을 천계에 가두어놓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허락을 한 거지?]
그녀의 말속에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빛의 성지에서... 흑! 뭘 찾으러 온 거예요. 흑흑.......]
윌오위스프는 울며 대답했다.
[빛의 성지는 사라졌을 텐데?]
빛의 성지란 고대 빛의 정령들이 중간계에 있을 때 살던 곳이었다.
[흑! 빛의 성지는 땅 속에 묻혔을 뿐 아직 존재해요. 저희들이 천계로 가기 전 세상에 남겨두었던 지도도 있고.......]
[지도.......]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고 더군다나 땅 속에 묻혀버리기까지 했기 때문에 빛의 정령들도 기억만으로는 그곳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네. 그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지도를 드래곤 로드께 맡겨두었어요.]
[그건 그렇고, 혼자 중간계로 온 건 아니겠지?]
[네. 천사 아델레이트님과 함께 왔어요. 헤헤.]
윌오위스프는 이 차가운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귀엽게 웃어 보였지만 두 석상, 로얀과 엘라임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로얀은 천사라는 말에 강한 호기심과 함께 호승심이 일었다.
‘천사는 얼마나 강할까?’
역사상 천사와 싸웠던 인간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사의 강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자 지금껏 조용히 있던 다크로드가 로얀이 아델레이트라는 천사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말했다.
[로드, 지금 이 근처에는 천족이 없습니다.]
“그런 것 같군.”
그 대화로 인해 다크로드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 윌오위스프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스윽.
엘라임의 차가운 시선이 윌오위스프의 몸에 와 닿았다.
[그 천사는 어디에 있지?]
[그... 지도를 찾으면 연락해 달라고 하셨어요.]
엘라임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천족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정령을 마치 노예처럼 부리는 그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에 천족은 겉으로는 빛의 정령을 감싸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빛의 정령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위선자처럼 보였다.
아마 천사 아델레이트라는 자는 중간계에 내려오는 이 자주 오지 않는 기회를 이용해 일은 빛의 정령에게 시키고 자신은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것이다.
[지도는 드래곤 로드가 지니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님께서 가지고 오신다고 하셨어요. 빛의 숲과 맞닿은 이쯤에서 기다리라고 하셨거든요.]
윌오위스프가 말하는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는 엘라임도 익히 아는 자였다. 미친 드래곤이라고도 불리는, 너무도 유명한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성격이 포악해서가 아니라 그 특이한 성격 탓이었다.
그의 소원은 인간이 되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정신 나간 드래곤이라 불릴 만했다.
그는 고기를 반드시 구워먹었으며 꽃을 가꾸고 예술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드래곤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본체로 돌아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 이유를 드래곤 로드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큰 몸집에 징그러운 모습! 싫은 건 당연한 겁니다!”
드래곤을 드래곤이 징그럽다고 말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답변에 드래곤들은 그를 욕했지만 그를 추방하거나 배척할 수는 없었다. 그가 드래곤 로드의 비서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광적으로 노력한 그는 세상의 모든 책을 독파해, 가장 머리가 좋다는 골드 드래곤을 꺾고 당당히 드래곤 로드의 비서가 되었다. 아무튼 화려한 전과(?)가 있는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라는 말에 로얀은 역시나 살기를 띠고 있었고, 엘라임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름만 드래곤 로드의 비서지 일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그라시드가 왜 그런 일을 스스로 맡은 것인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엘라임도 로얀도 한동안 말이 없자 지금껏 궁금증을 참고 있던 윌오위스프가 다크로드를 흘깃 쳐다보며 엘라임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저... 저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자 생각에 잠겨 있는 엘라임 대신 살기를 살짝 띠고 있던 로얀이 대답해 주었다.
[어둠의 정령.]
[.......]
로얀의 짤막한 대답에 윌오위스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을 믿기에는 어둠의 정령의 모습과 힘이 자신이 아는 것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윌오위스프는 아직도 로얀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크게 소리쳤다.
[너, 거짓말 하지 마!]
스르륵.
턱.
윌오위스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다크로드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윌오위스프가 붙잡혔다.
[출, 흑검!]
츄아아앙!
다크로드의 오른손에서 거무튀튀한 검이 솟아나 곧장 윌오위스프에게 겨누어졌다. 다크로드는 지금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한 그였다.
[나의 왕께 말을 삼가라. 저분은 혼돈의 정령왕이시다.]
[네, 네?]
뒤에서 느껴지는 다크로드의 살기에 윌오위스프는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어둠의 상급 정령 세드니스이자 왕께 다크로드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자. 빛의 정령이 왕께 무례를 범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둠의 상급 정령.......]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제야 로얀이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하급 정령인 자신을 분명하게 알아보았다는 점과 정령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것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 로얀이 인간이 아닌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새롭게 탄생한 다섯 번째 정령왕이란 말인가?’
[다크로드, 누군가 오고 있다. 몸을 숨겨라.]
로얀의 말이 울려 퍼지자 다크로드는 드래곤 산맥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부터 강한 마나를 지닌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정도의 강한 마나를 몸 속에 지닐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뿐이었다.
스르륵.
다크로드는 조용히 물러났다.
스르릉.......
“휴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로얀?”
엘라임은 로얀이 에리오네를 뽑아 들자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웅웅웅.......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 위로 백광의 오러가 빛을 뿌렸다. 그리고 로얀의 두 눈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고 그의 몸에서는 강한 기운이 폭사했다.
그 모습에 빛의 정령은 급히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바스락.
이윽고 긴 초록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반짝거리는 은색 안경을 끼고 있는 키 큰 청년이 모습을 나타냈다.
로얀은 그 남자의 몸 속에 있는 거대한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어라? 손님이 있었네.”
팟!
화사한 웃음을 담으며 인사를 건네던 초록 머리의 미청년은 갑자기 몸을 날리는 로얀을 보고 순간 당황했지만 곧 눈빛을 가라앉혔다.
“실드.”
쾅!
가장 기본이 되는 방어 마법이었지만 역시 마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이 펼쳐서인지 로얀의 마나 소드는 거기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굉음이 울려 퍼졌고, 엘라임은 사색이 되어 로얀과 미청년 사이에 끼어들었다.
“로얀! 그와 적이 되는 건 정말 드래곤 산맥의 전 드래곤과 적이 되는 거야!”
로얀 앞에 있는 초록 머리의 미청년은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였다. 엘라임의 외침대로, 다른 드래곤들은 그라시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의 지위는 어쨌거나 드래곤 로드의 비서였다.
그러나 그라시드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도 계셨군요. 이쪽에 계신 분도... 정령왕?”
웃음을 잃지 않던 그라시드가 처음으로 웃지 않고 멍하니 로얀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의 그런 반응에 로얀과 엘라임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눈에 로얀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로얀을 정령왕이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보았지?”
드래곤 로드가 아니라면 말을 높이지 않는 그녀였기에 냉랭하게 대꾸했다.
“와아, 정말 정령왕? 아! 제 발명품 덕분이죠.”
그라시드는 말과 함께 끼고 있던 안경을 툭툭 쳤다.
“원래는 계약을 하지 않고도 정령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발명품을 만들려 했는데 만들다 보니 상대방의 몸 속에 있는 힘의 성분을 분석해서 알려주는 기능이 부가되어 버렸네요. 하하! 아무튼 천 년이나 걸려 운 좋게 만들게 되었답니다. 아하하하!”
천 년 동안이나 저 작은 발명품에 힘을 쏟았다니,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는 천 년 전 정령의 아름다움과 귀여움에 반해 그런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스르릉.......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다시 검집 속에 집어넣었다. 엘라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고, 상대방이 전혀 싸울 의사가 없었기에 싸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 그였다.
스르륵.
분위기가 전환되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윌오위스프가 조용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파팟!
그의 등장에 그라시드가 몸을 날렸다. 그 엄청난 속도는 로얀이 흠칫할 정도였다.
그라시드는 윌오위스프를 안고 부비부비하며 즐거워했다. 윌오위스프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꼭 죽은 시체 같았다.
그라시드는 안고 있는 상태 그대로 윌오위스프에게 말했다. 한데 그의 입에서 능숙한 정령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그냥 말하고 은색 안경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그 말을 정령어로 바꾸어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실버 드래곤 루시어스가 가져갔다지 뭐야.]
[에에에엑!]
[걱정 마. 그 천사한테는 내가 같이 가줄 테니까. 넌 일이 다 끝나고 나의 모델이 돼주기만 하면 돼.]
토닥토닥.
그라시드는 윌오위스프를 안고 씨익 웃으며 토닥여주었다. 그가 윌오위스프를 도와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를 모델로 삼기 위함이었다. 천계에만 틀어박혀 있는 빛의 정령을 보는 것은 그라시드로서도 매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라시드는 예술을 사랑했고 그림 솜씨도 조각을 하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그는 이미 윌오위스프를 그리고 조각하고 온갖 예술 작품을 남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둔 상태였고,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만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앞일이 결정된 그라시드는 지체하고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정령의 모습인 만큼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쪽... 새로운 정령왕께서는 다음에 저의 레어에 한번 들러주세요. 흠흠! 좀더 시간을 갖고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전 바빠서 이만.”
그리고 새로운 정령왕인 로얀도 은근히 탐내는(?) 그였다.
스팟.
그 말과 함께 그라시드는 윌오위스프를 안고 사라져 버렸다.
로얀은 그라시드의 마지막 말을 되니었다.
“레어로 와 달라......?”
“가지 않는 게 좋아. 아마 로얀의 모습을 조각하고, 그리고 책에 기록하려 할걸. 새롭게 등장한 다섯 번째 정령왕이니까.”
웃음기 어린 엘라임의 말에 로얀은 드래곤 산맥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가자.”
“응.”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앞서 걸어가는 로얀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로얀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로얀 앞에서만 웃음 짓고 있었다.
* * *
높은 온도를 자랑하는 여름의 대륙이 눈앞에 펼쳐졌다. 로얀과 엘라임은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바싹 마른 대지를 걸었다.
빛의 숲을 떠나 이곳으로 넘어온 지 어느덧 5일이 지났다.
무더운 더위 속에서도 로얀은 땅의 숨결이 체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시원한 여행을 하고 있었고, 엘라임도 정령왕 중에서 물의 속성을 지닌 물의 정령왕이라 그런지 더위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몰딘 왕국의 영토였다.
몰딘 왕국은 여름의 기후에 맞게 곡식이 많이 나는, 비옥한 토지가 많은 국가였다. 아마도 드래곤 산맥과 붙어 있어 그런지도 모른다.
여하튼, 여름의 대륙에 있는 국가인 만큼 항상 물이 부족한 이곳은 덕분에 저수지와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여러 기술이 발달해 언제나 토지의 비옥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의 대륙에 제국이라는 명호를 쓰는 나라는 없다고 엘라임은 기억하고 있었다. 왕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몰딘 왕국이었다.
비옥한 토지와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몰딘 왕국을 주변 나라들은 호시탐탐 노렸지만 몰딘 왕국은 신기하다고나 할까 운이 좋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여기에는 드래곤 산맥과 붙어 있다는 지리적인 요건도 한몫했다. 아무리 국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드래곤 산맥이 옆에 붙어 있는데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배짱이 있는 자들은 없었다. 자칫 드래곤의 분노를 산다면 그들의 나라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드 평원.
몰딘 왕국에서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이곳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이었는데, 현재 로얀과 엘라임은 그곳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처 몰랐지만 지금 모르드 평원에서는 몰딘 왕국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로얀이나 엘라임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몇 달 전, 갑자기 명호를 바꿔 제국이라 칭하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빈트러드 왕국이었다.
한데 자칭 제국이라고 명명하는 이 나라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원래 여름의 대륙에서 가장 약한 세력과 가장 작은 땅을 보유한 데다가 국왕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는 바람에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그런 빈트러드 왕국이 갑자기 명호를 제국으로 고치고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들을 우습게 본 주변 왕국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집어삼켜졌고 몇 달 만에 여름의 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이 빈트러드 제국의 눈치를 살펴야 할 판이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주변 왕국이 정리가 되자 빈트러드 제국은 여름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왕국이자 몰딘 왕국만큼 비옥한 영토를 소지한 크로노드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몰딘 왕국을 물량보급지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몰딘 왕국은 비옥한 토지에 비해 군사력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나라였다. 지금의 왕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였지만 전대 왕은 평화주의자였기에 병력을 늘리기보다는 상업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여름의 대륙에서 상업이 가장 활발한 몰딘 왕국은 그야말로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몰딘 왕국이 돈으로 용병을 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빈트러드 제국에는 용병왕이 떡하고 버티고 있었으니 제국으로서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빈트러드 제국은 몰딘 왕국을 노렸고, 그렇게 해서 벌어진 전쟁이 지금 모르드 평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 전쟁이었다.
몰딘 왕국에서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몇 달 전 갑자기 나타나 왕이 된 이가 직접 이곳 모르드 평원으로 나와 엄청난 수의 용병을 대동한 빈트러드 제국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망해 가던 작은 왕국에 불과하던 빈트러드 제국이 이렇게 강한 군사력을 갖게 된 것은 모두 용병의 힘 덕분이었다.
용병들의 우상이자 왕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빈트러드 제국에 갑자기 나타나 공작의 작위를 받고는 용병들을 동원, 정복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사실 빈트러드 제국의 병력은 용병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용병왕이라고는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그가 무슨 수로 방탕하기만 하던 왕을 일깨우고 다 쓰러져가던 왕국을 제국으로 거듭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아무튼 용병왕은 주위의 왕국을 정리할 때에만 전쟁터에 모습을 보였고 지금처럼 멀리 떨어진 몰딘 왕국을 정복하는 데에는 직접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귀찮아서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황당한 말을 믿지 않았다. 귀찮다는 이유로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지금 모르드 평원에 모인 몰딘 왕국의 병력은 대략 5천, 반면 빈트러드 제국의 병사 수는 제국의 병사가 5천, 용병이 1만이었다. 수적으로 많이 밀리는 몰딘 왕국이었다.
가뜩이나 가뭄철이라 사람도 많이 죽고 형편이 좋지 않는 여름의 대륙이었지만 빈트러드 제국의 용병왕은 봄의 대륙에 있는 용병들까지 대거 이끌고 왔다. 평온한 봄의 대륙에서 일거리라고는 몬스터 사냥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가뭄에 콩 나듯 했기 때문에 돈을 벌거나 귀족이 되어 팔자를 고치려는 용병들은 여름의 대륙으로 와 전쟁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수적으로는 훨씬 밀렸지만 빈트러드 제국의 병사를 맞이하는 몰딘 왕국의 병사들의 눈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침략자인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병왕은 점령한 땅의 사람들을 거의 모두 죽였고 산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손속이 아주 잔인한 자였던 것이다.
때문에 몰딘 왕국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생각하며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나라가 망하면 자신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은 죽거나 모두 노예로 전락해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게 뻔했기에 한 치도 물러날 수 없었던 것이다.
휘오오오......!
모랫바람이 거세게 불자 몰딘 왕국의 상징인 불꽃이 그려진 국기가 펄럭였다. 그리고 덩달아 태양 무늬가 그려진 빈트러드 제국의 국기도 펄럭였다.
몰딘 왕국의 선봉에는 젊은 국왕과 홍염의 기사단이, 빈트러드 제국엔 용병계에서 ‘매의 창’이라 불리는 안드라가 말 위에 탄 채 뒤에 도열해 있는 태양기사단을 둘러보고 있었다.
태양기사단은 원래부터 빈트러드 제국에 속한 부대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용병 출신의 안드라가 단장이 되어 지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반발이 심했지만 퇴색할 대로 퇴색한 그들의 실력으로는 매의 창 안드라를 꺾을 수 없고, 여러 차례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진심으로 그를 대장으로 인정하며 따르게 되었다.
안드라는 말 위에서 창을 밑으로 내린 상태로 자신의 뒤에 도열해 있는 태양기사단과 끝없이 이어져 있는 병사와 용병을 훑어보았다.
“드디어 역사의 순간이 다가왔다! 저 몰딘 왕국을 점령하고 크로노드 왕국까지 단숨에 점령해 버리는 거다! 역사의 첫 장엔 우리의 이름이 남을 것이다! 역사는 우리가 쓰는 것이다!”
“와아아아아......!”
빈트러드 제국군이 모든 전쟁 준비를 끝냈을 때, 몰딘 왕국 쪽도 대열을 정비하며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아직 젊은 국왕이 말고삐를 잡고 돌리며 긴장감에 빠져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런 그의 손에는 아무 무기도 없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우리는 더 이상 내뺄 곳도 없다! 모두 피 터지게 싸우다 죽자!”
“와아아아......!”
“몰딘 왕국을 위해! 나의 가족을 위해!”
국왕의 말치고는 조금 이상했지만 몰딘 왕국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자신의 무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힐끔 바라본 빈트러드 제국의 안드라가 긴 스피어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전군 돌격하라!”
다그닥!
“와아아아......!”
안드라는 진군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고삐를 틀어 몰딘 왕국이 있는 쪽으로 질주했다. 그러자 태양기사단이 그 뒤를 이었고, 이어서 각 부대를 책임진 백부장과 천인장들 또한 병사들을 인솔해 그 뒤를 쫓았다.
엄청난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자 바닥에 깔려 있던 모래들이 들썩거리더니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렸다.
한편 몰딘 왕국 진영 쪽에서는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탁 트여 있는 이 드넓은 평원에서는 적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우리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고 했지! 그리고 이왕 죽을 거 저 자식들 목 하나라도 더 끊어놓길 바란다!”
몰딘 국왕의 말에 병사들은 일제히 입을 열었다.
“와아아아아......!”
다그닥!
두두두두두......!
그렇게 몰딘 왕국과 빈트러드 제국 간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와아아아......!”
채채챙!
마주 달려온 그들 두 나라의 병사들은 이렇게 모르드 평원의 중간 부분쯤에서 서로 맞부딪쳐 대지를 피로 적시는 혈투를 시작하였다.
피가 튀고 날이 튀었다. 그리고 끔찍한 비명소리가 천지를 메웠다. 몰딘의 젊은 국왕은 작은 단도 두 자루를 양손에 쥐고 적들을 죽여 나갔는데, 그는 한 번 던질 때마다 한 명을 죽이는 깔끔하고 빠른 단도술을 구사했다.
하나 아무리 엄청난 단도술을 부리며 전장을 날아다니는 몰딘 국왕이라 해도 이렇게 수적으로 많이 차이가 나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점점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지를 적시는 붉은 피 대부분이 몰딘 왕국 결사대의 것이었다. 승리자이자 학살자의 위치에 서 있는 빈트러드 제국의 병사들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그들의 시체와 붉은 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피의 전쟁!
수적으로 밀려 학살을 당하고 있는 몰딘 왕국의 선봉에 서 있는 국왕의 모습이 멀리서 전쟁을 바라보고 있던 로얀의 눈에 찍혔다.
로얀은 전쟁을 하고 있는 두 나라 중 어디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눈동자에 찍힌 몰린 왕국의 국왕의 모습에 그는 더 이상 무관심할 수 없었다.
이리저리 날뛰며 단도를 날리고, 작은 대거로 적의 목을 베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사내는 바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 얀이었던 것이다.
“얀......?”
로얀은 낮은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급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엘라임이 허공에 살짝 뜬 채 따라갔다.
* * *
“와아아아......!”
채채챙!
병장기가 부딪치며 단단한 쇠붙이가 고통에 찬 음성을 토해 내었다.
채채챙!
“크아아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무색해질 정도로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모르드 평원에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몰딘 왕국 병사들의 시체는 쌓여만 갔다. 그들은 이미 빈트러드 제국의 병력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절망감이 감도는 인간들이 펼치는 잔혹한 전쟁 속에서 몰딘 왕국의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콰가가가강......!
그때!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몰딘 왕국 병사들의 귓가로, 승리를 확신한 빈트러드 제국 병사들의 귓가로 굉음이 들려왔다.
“크아아악!”
그리고 잇따라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모르드 평원을 울렸다.
그 비명음의 주인은 태양 무늬의 깃발을 들고 있는 빈트러드 제국의 병사들이었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빈트러드 제국의 병사들을 날려버린 곳에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긴 흑발을 휘날리며 왼손엔 늘씬하게 솟아 있는 성검 에리오네를, 오른손엔 커다란 다크리온을 든 로얀이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피를 머금은 다크리온은 웅웅거리며 울어댔다.
전쟁터로 뛰어든 로얀은 어느새 제국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를 뒤따라오던 엘라임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공중에서 그런 로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기 때문이다.
피가 끓었다. 십 년간 자신이 속해 있었던, 고향과 같은 전장에 돌아온 것이다. 인간들의 가장 어리석고 잔인한 행동인 전쟁 속에서 로얀은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와아아아......!”
갑자기 나타나 수십 명을 베어버린 로얀을 보고 제국 병사들은 순간 흠칫했지만 곧 자신들의 병력을 생각하고는 무기를 고쳐 잡고 돌진했다.
사위를 가득 메운 병사들이 머릿속에 새겨지자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부드럽게 돌리며 눈을 감았다.
후웅, 후웅......!
전쟁터에서 눈을 감다니! 다른 사람에게는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무척이나 편안하고 여유있어 보였다. 전쟁이라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놀이를 그는 십 년 동안 매일같이 해왔던 것이다.
전장의 중심에 선 그는 눈을 감고 주위에서 풍기는 병사들의 긴장감에 찌든 냄새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나오는 미세한 소리 하나하나를 감지했다.
쇄에에엑!
촤자자작!
“끄아아악!”
아니, 감지할 필요도 없었다. 휘두르기만 하면, 손을 놀리기만 하면 병사들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날에 닿아 모두 베였다.
그들이 너무 몰려 있어 그런 것이었다. 휘둘러도 휘둘러도 검 끝에 베이고, 살 끝이 베이는 느낌이 손에 와 닿았다.
웅웅......!
로얀의 두 검에서 푸른빛을 띤 오러 블레이드가 솟아났다.
병사들을 베는 데 마나 소드를 사용하는 것은 힘 낭비였다. 오러 블레이드만으로도 충분했다.
“끄아아악!”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뿐인데 로얀의 주위에는 시체가 쌓였고 붉은 피가 강을 이루었다. 그의 놀라운 위용에 제국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일어 주춤거렸다.
“뭣들 하느냐! 그 녀석을 없애지 않고! 적은 한 명이다!”
그런 병사들의 모습에 이번 전쟁의 총지휘관으로 나선 매의 창 안드라가 외쳤다.
그는 갑자기 등장한 로얀으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의 분위기가 바뀌려 하자 급히 외친 것이다. 전쟁에서 분위기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로얀으로 인해 몰딘 왕국의 병사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그가 적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기에 모두 안심했다. 그리고 몰딘 왕국의 국왕 또한 단도를 던지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시엔......?”
로얀의 얼굴을 확인한 몰딘 왕국의 국왕 얀은 놀란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 그 옆에는 그의 파트너인 실프의 모습도 보였다.
휘이익.
퍽!
얀이 던진 단도는 기상천외한 변화를 보이며 제국 병사들의 머리에 박혔다. 그러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단도가 얀에게 돌아갔다. 몇 달 사이 한 나라의 국왕으로 변한 그였지만 그는 여전히 수전노였다.
매의 창 안드라의 외침에 제국 병사들은 움찔하며 다시 로얀을 향해 몰려들었다.
다시 사방이 병사들로 채워지고 점점 좁혀오자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역으로 잡았다. 그러자 두 검의 날이 그의 등 뒤로 향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세를 살짝 낮춘 로얀의 몸을 어디서 갑자기 생겨났는지 모를 검은 바람이 휘감았다.
그는 지금 어둠의 중급 정령이 상급 정령으로 변해 생겨난 기술을 쓰려 하고 있었다. 새롭게 탄생한 어둠의 상급 정령의 이름은 세드니스, 그들의 기술은 로얀의 기술이 되었다.
그의 입술이 살포시 열리면서 그의 손,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쾌속하게 움직였다.
“사신의 춤!”
콰가가강!
스가가가각!
“끄아아악......!”
흑풍의 바람이 된 로얀은 제국 병사들 사이를 누볐다. 그의 검은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토막토막 잘린 병사들의 육신이 튀어 올랐고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로얀의 손놀림은 소드 마스터인 매의 창 안드라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그저 커다란 흑색 덩어리가 병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붉은 조명 아래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노래가 된 화려한 무대가 펼쳐졌다. 그 모든 것이 전쟁터라는 무대에서 하나의 공연처럼 펼쳐졌고, 몰딘 왕국의 병사들은 관객이 되어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얀은 병사들을 베어가며 안드라를 향해 다가갔다. 전쟁터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총지휘관의 목이 필요했다. 그의 피가 전세를 단번에 바꿔놓을 것이다.
기마대인 태양기사단은 말과 함께 단번에 베였다. 일반 병사들과 다른 점이라면 튀어 오르는 피와 육신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단단한 갑옷도 로얀의 검날 아래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사신의 춤사위는 로얀이 안드라 앞에 당도했을 때 드디어 끝났다.
로얀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훙!
터턱.
그는 두 검을 허공으로 던져 똑바로 잡고는 말 위에 있고 안드라를 쳐다보았다.
우웅.
안드라가 급히 마나를 담자 그의 길다란 스피어엔 푸른 오러가 맺혔다.
“크아아압!”
안드라는 말의 옆구리를 차며 로얀을 향해 달려갔다. 푸른 오러가 맺힌 스피어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로얀의 신형 위로 떨어졌다.
우우웅!
달려오는 안드라를 보며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를 없애고 마나 소드를 일으켰다. 제국의 총지휘관인 그에 대한 배려로 자신의 진짜 실력으로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다.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검에서 흘러나오는 수십 가닥의 검은 검날, 그리고 베여지는 안드라의 몸!
피가 튀고 육신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의 창은 로얀이 있던 자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 모습에 얀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검을 들어 올렸다.
“적장이 죽었다! 모두 돌격하라!”
“와아아아......!”
하늘을 찌를 듯 사기가 오른 몰딘 왕국 병사들이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총지휘관을 잃은 제국군은 당황해 허둥댔고, 몰딘 왕국 병사들의 검에 목숨을 잃어갔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제국 병사들은 태양기사들의 인도에 의해 모두 신속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총지휘관이 죽는 모습을 본 그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으로 추락했기에 더 이상의 전쟁은 많은 피를 일으킬 무모한 싸움일 뿐이었다.
도저히 패할 것 같지 않던 모르드 평원의 전투는 제국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의해서 말이다.
* * *
모르드 전투가 그렇게 끝나고 몰딘 왕국 병사들은 제국 병사들을 끝까지 쫓지 않고 물러나 진을 치고 있었다.
그건 제국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로얀과 엘라임은 얀을 만나기 위해 그의 군막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 전투를 끝낸 장본인인 로얀을 저지하는 병사들은 없었다. 게다가 왕의 당부 또한 있었던 것이다.
군막의 천을 젖히고 들어가자 얀을 중심으로 여러 장수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로얀과 엘라임의 등장에 모든 시선이 일제히 둘에게 쏠렸다. 대륙에서 몇 명 없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전쟁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서 와라.”
얀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장수들은 의아한 눈초리로 로얀과 얀을 바라보았다.
로얀이 인사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얀이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쪽은 내 친구 로얀이다.”
얀의 말에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왜 그들을 도왔는지 그제야 이해한 탓이다. 이에 지금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장수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로브를 입은 백발 노인을 제외하고 장수들은 일제히 경외감 담긴 눈빛으로 로얀에게 인사를 건넸다.
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꿈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른 로얀은 존경의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험험! 친구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모두 나가 봐.”
로얀을 보며 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을 꼼지락거리는 장수들을 보며 얀은 서둘러 그들을 밖으로 쫓아냈다. 로얀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다는 것을 잘 아는 얀은 로얀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얀의 마음을 모르는 장수들은 퉁명스럽게 자신들을 내쫓는 얀을 보고 서운함을 느꼈다. 그들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로얀과 대화를 좀더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장수들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왕의 명으로 밖으로 내쫓기는 와중에도 책사인 그리알은 입이 쭉 찢어질 정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같은 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러는 것도 당연했다. 이 절망적인 전쟁 속에서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궁정 마법사이자 책사인 그리알까지 밖으로 나가자 막사 안에는 얀과 로얀, 엘라임만 남았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얀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얀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를 안은 뒤 떨어졌다. 반갑게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이었다.
“이게 그늘이냐?”
“아하하하!”
로얀의 말에 얀은 뭐라 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젠장, 나도 국왕이 돼서 잘해 보려고 했다고.”
“어떻게 된 거지?”
로얀은 얀의 화려한 금빛 군장을 보며 말했다. 그가 갑자기 국왕이 된 이유를 묻는 듯했다.
“하하, 그게 말이지... 그 전에, 저 아가씨는 누구냐?”
로얀의 물음에 얀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춰 화제를 돌리며 엘라임을 가리켰다. 그러나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호오! 혹시 네 애인이냐?”
얀이 능글거리는 미소를 담으며 그렇게 말하자 로얀이 다크리온의 검신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만큼 많은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건만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크리온이 웅웅거렸다.
로얀의 그런 반응에 얀은 그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지며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얀의 친구인 얀이라고 합니다. 정확히는 몰딘 왕국의 왕으로 있는 이얀 폰 크라이센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전 엘런이라고 합니다.”
엘라임은 이름을 바꿔 자신을 얀에게 소개한 후 로얀을 슬쩍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이는군요. 평소 그답지 않게.”
크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로얀이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느낀 엘라임. 그런 그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자 얀이 웃으며 답해 주었다.
“하하! 이 녀석이 원래 저를 너무 좋아해서.......”
후웅.
퍽!
로얀의 주먹이 얀의 복부에 깊숙이 박혔다.
“크윽! 야, 이건 반역이야!”
“내 물음에나 답해.”
얀은 입술을 삐죽이며 옆에 있는 의자를 빼 거기에 앉았다.
“윽, 아파 죽겠다! 난 원래 이 나라의 왕자였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너도 앉아. 엘런도 어서 앉아요.”
로얀과 엘라임이 근처에 있는 의자를 빼내 앉자 얀은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얀은 몰딘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아들을 하나밖에 낳지 못한 국왕은 커가면서 점점 싸가지가 없어지는 얀의 성격을 고치기 위해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아주 먼 곳으로 보내버렸다.
고작 열 살짜리를 멀리 보내버릴 정도면 그 싸가지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만했다.
호위기사와 마법사 둘을 그에게 붙여준 얀의 아버지는 그들을 통해 아들을 감시했고, 흥청망청 돈을 쓰는 얀의 성격도 고칠 겸해서 조금의 돈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를 이용해 국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전수해 주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얀은 가을의 대륙에서 용병이 되어 생계를 이어갔다. 물론 그의 호위기사와 마법사들도 용병으로 위장하여 전쟁터에서 그를 보좌했다.
몰딘 왕국의 국왕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험난한 여름의 대륙에 있는 몰딘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강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용병 일을 하는 동안 얀은 용병들 속에서 찌들어 말투도 성격도 변해 버렸다.
얀의 아버지는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이제 본격적으로 얀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여러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 그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자신을 용병으로 전락시켜 전쟁터로 보내버린 아버지의 말을 순순히 따를 얀이 아니었다.
그는 기사들을 따돌리며 이리저리 대륙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23살이 되었고 그날 흑섬에서 로얀을 만났던 것이다.
그곳에서 로얀과 대화를 나눈 그는 자신이 지금 있어야 할 곳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스스로 여름의 대륙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름의 대륙으로 넘어올 때 그동안 용병일(?)을 하며 번 돈을 드래곤에게 절반이 넘는 양을 헌납해야 했지만 그는 돌아왔다. 물론 그 돈은 대부분이 도둑질한 것이었다.
한데 그의 아버지인 국왕은 얀이 몰딘 왕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얀의 어머니와 함께 잠적해 버렸다. 부전자전으로, 얀과 그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닮은 곳이 많았던 것이다.
얀은 그렇게 왕이 되었고, 궁정 마법사인 그리알과 대학자인 히폰이 옆에 붙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로얀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왕이 된 거냐?”
“물론!”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요.”
엘라임은 지금 인간으로 행동하고 있었기에 얀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높였다.
로얀은 웃음 짓고 있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곧 얀을 향해 말했다.
“그럼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된 거냐?”
“그게, 그놈의 빈트러드 제국 때문이야. 정확히는 용병왕 때문이지.”
“용병왕.......”
로얀이 의자에 앉은 채 그렇게 중얼거리자 얀이 웃으며 원래 그가 앉아 있던 자리 앞에 놓여 있던 수정구를 가지고 왔다. 그러자 엘라임이 그것을 보고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아티펙트.”
그렇다. 이 수정구는 뭔가를 찍고 저장할 수 있는 아티펙트로 칸 대륙 어디에서나 사용되는 아주 유용한 물건이었다. 다만 무지막지하게 비싸다는 게 한 가지 흠이었지만.......
얀은 엘라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거렸다.
“기억된 시간을 보여라.”
파아아앗!
수정구에서 밝은 광채가 흘러나오자 로얀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서서히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검은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매우 잘생긴 젊은 남자였다.
“이름은 카엔. 그의 뒷조사를 하다 보니 그가 한동안 가을의 대륙에 머물러 있다가 이쪽으로 왔다고 하더군. 그 과정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지만.”
“블랙 드래곤.......”
엘라임은 수정구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수정구 속의 카엔이라는 용병왕에게서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정령왕인 엘라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적이 드래곤임이 밝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걱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친구인 로얀이 걱정되었다. 만약 이 드래곤이 친구의 복수의 대상이라면 그는 당장이라도 전장에 뛰어들 것이다. 십 년을 살았던 끔찍한 전장 속으로 말이다.
‘카엔.......’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순간, 그의 기억이 짜 맞춰졌다.
잊을 수 없는 이름 카엔! 모습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레이나를 죽인 장본인이자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마법사, 아니 블랙 드래곤 카엔이 눈앞에 있었다. 자신에게는 마법사의 모습으로 다가왔지만 그는 지금 용병왕이자 빈트러드 제국의 귀족으로 수정구 속에서 웃고 있었다.
“찾았다.”
“응?”
너무도 스산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얀과 엘라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만났군, 드디어......!”
꽉 쥐여진 로얀의 두 주먹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얼마나 세게 쥐었으면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그는 얀이 아닌 수정구 안의 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전쟁, 나도 참여하겠다. 녀석의 유희에 또 한 번 놀아주겠다. 그리고 결말은 주인공인 너의 죽음이다!”
뚜벅뚜벅.......
펄럭.
로얀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오호! 드디어 나의 진가를 알아보고 나의 기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구나, 친구! 우하하핫!”
얀이 웃으며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지만 로얀은 이미 막사를 벗어나고 있었다.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막사를 벗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본 엘라임은 얀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로얀의 뒤를 따라 나갔다.
혼자 막사에 남게 된 얀은 탁자를 주먹으로 치며 중얼거렸다.
“젠장할! 이거 운명의 장난 치고는 너무하잖아. 빌어먹을 신들아, 녀석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쉬게 할 순 없겠냐! 빌어먹을 자식들아!”
막사 안에서 홀로 외치는 그의 음성이 가볍게 떨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데도 그들은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