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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8/42)

외전

친구

친구

와아아아......!

“크으윽!”

정말 짜증이 솟구치는 아침을 맞이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전장의 함성소리는 이젠 환청이 되어 이렇게 매일 아침 나의 단잠을 깨우는 것이었다.

이곳은 가을의 대륙에 있는 스크라이언이라는 대평원이었다. 넓게 펼쳐져 있는 푸른 풀 밭은 지금쯤 붉게 변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따뜻한 집도 없고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가족도 없는, 오로지 전장의 함성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내가 이곳 전쟁터에 있는 것은 나의 직업이 용병이기 때문이다.

나라 사이의 전쟁의 승패는 고용한 용병의 질(?)과 수가 판가름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쪽 나라건 고용된 용병에게는 애국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대가를 위해 검을 휘두르고 피를 내줄 뿐이었다.

허험! 하지만 난 이들 냄새나는 용병들과는 다르다. 아주아주 멋진 명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이얀 폰 크라이센!

이것이 나의 이름이었다. 척 보아도 정말 끝내주는 이름이 아닌가? 게다가 이름에 성이 붙어 있다는 것은 귀족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가장 높다는 황족이었다. 나의 나라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잔혹한 대륙, 여름의 대륙에 있었다.

그런 고귀한 신분인 내가 왜 여기 있느냐 하면.......

“도련님!”

이런! 너구리 자식이 왔다.

아! 그리고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내 말투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흠흠! 한 달 동안이나 이 빌어먹을 전쟁터에서 몸을 굴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환청에 잠을 깬 나에게로 그 너구리가 다가왔다.

커다란 초록색 로브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상당히 젊은, 내 나라에 속해 있는 마법사였다. 한마디로 나의 쫄다구였다. 아니, 아버지의 부하이자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였다.

“에휴... 알았어, 알았어!”

툭툭.

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초록색 로브를 입은 그를 지나쳐 갔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여름의 대륙에 있는 몰딘 왕국의 황태자인 나를 정신 나간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이곳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뭐, 세상 사는 법을 배우고 오라나?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와 함께 딸려온 건 지금 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초록 로브의 마법사와 기사 한 명, 그리고 서클은 낮지만 마법사이자 학자로 이름 높은 영감탱이뿐이었다. 물론 이들의 신분도 여기선 나와 같은 용병이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틈만 나면 나에게 정치와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영감탱이가 있는 곳이었다.

“여어, 레닌! 누가 자넬 찾더군.”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싸, 이런 횡재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초록 로브의 마법사 레닌을 찾는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으음... 알겠어.”

레닌은 나를 힐끔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련님, 오늘도 땡땡이를 친다면 저도 더 이상은 참지 않겠습니다.”

“아아, 염려 마.”

그럼, 내가 잘 놀아줄 테니까!

레닌은 이제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의 입가엔 웃음꽃이 피었다. 매일 영감탱이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기사 녀석에게서 검술을 배우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 팔팔한 나이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냔 말이다? 난 미래의 왕이 될 몸이란 말이다!

학문이야 왕이 되고 나서 천천히 익혀 나가면 되는 것이고 검술이야 깔린 게 기사들인데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이곳 전쟁터에서만 봐도 나는 그냥 흉내만 내도 나의 부하들이 알아서 나를 보호해 주었다.

“하암.......”

사람은 그저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끄응... 그나저나 이곳에서 뭘 해야 잘 놀았다고 칭찬받을까? 냄새나는 용병들만 모여 있는 이 전쟁터에서.

타박타박.......

용병들로 인해 거칠어진 대지를 한참 돌아다니던 나는 실망감으로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사는 게 다 재미가 없어질 정도였다.

“크윽!”

후웅......!

그러다 내 귀에 누군가의 신음소리와 함께 무거운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호기심 많은 나이의 나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후웅, 후웅!

“응?”

나의 눈에 비친 것은 이제 14살 정도로,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나야 레닌과 나의 부하들이 나를 포함해 고용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다고 했기에 용병이 되었지만 저 꼬마는 어떻게 용병이 된 것일까?

그런 궁금증과 함께 달리 할 짓도 없었기에 나는 멀리서 소년의 모습을 구경했다.

“크압!”

등만 보이고 있던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빙글 몸을 돌리며 양손에 들려 있는 롱 소드를 휘둘렀다. 14살의 소년이 들기엔 무거운 롱 소드를 두 자루씩이나 들고 휘두른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에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두 눈... 덕분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있었다.

후웅.

스핏.

맹인 소년은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고, 종종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소년은 점점 혈인이 되어갔다. 그러나 붉은 피가 온몸을 적시도록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한 번뿐인 인생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자라는 나의 좌우명처럼 편하게 살면 될 것이 아닌가? 한데 저 소년은 어째서 저렇게 처절하게 검을 휘두르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뚝뚝.

털썩!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피로 목욕을 한 그 작은 소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소년의 작은 두 손은 여전히 롱 소드의 그립을 잡고 있었다.

“얀......!”

멀리서 레닌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눈이 없는 그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레닌은 다른 용병들이 근처에 있을 경우에만 나의 애칭을 불렀는데, 마침 이곳은 용병들의 막사와 가까운 곳이었던 것이다.

타타탁.

턱!

“헉헉... 도, 련, 님!”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달려온 레닌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저 녀석을 치료해 줘.”

“네?”

왠지 그러고 싶었다.

항상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았던 나였다. 하지만 나와는 정반대로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나와 동갑으로 보이는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눈도 없으면서 왜 이런 전쟁터에 나온 것인지 알고 싶었다.

레닌은 쓰러진 소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나의 말대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가 쓸 수 있는 힐링이라는 치료마법이었다.

밤공기가 시원하게 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내 앞에 누워 있는 눈이 없는 소년도 함께 감싸 안았다.

“크윽.......”

정신을 잃었던 소년이 눈을 떴다. 그의 손엔 여전히 두 검이 쥐여 있었다.

“여어, 일어났냐?”

흠칫.

“넌 누구지?”

하! 은인도 몰라보고 녀석은 일어나자마자 검을 꽉 움켜쥐며 나를 바라보았다. 소리로 내가 있는 곳을 발견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눈이 없으니 그냥 고개만 돌렸다고 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 적은 아니니까. 그보다 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눈이 없으면서 왜 전쟁터로 온 거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나였기에 이제 막 일어난 소년에게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스윽.

“나에겐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터벅터벅.......

눈이 없는 작은 소년은 전혀 아이 같지 않은 소리를 내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너덜너덜한 소년의 옷 사이로 보이는 살결은 언뜻 보아도 칼자국으로 정신이 없었다.

‘살아가는 이유? 내가 해야 할 일? 나에겐 뭐가 있지......?’

“자, 잠깐!”

“.......”

“난 얀이라고 해! 우리 친구하자!”

“전쟁터에서 친구는 짐일 뿐이다. 나의 이름은 시엔... 네가 이름을 말해 주었기에 말해 주는 것뿐이다.”

터벅터벅.......

여린 소년의 발걸음 소리가 나의 귓가를 울렸다.

이것이 시엔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내 인생의 좌우명은 바뀌었고, 그날 이후 옆 막사에 묵고 있던, 용병세계에서 유명한 단검술의 고수로부터 단검술을 배웠다. 이것이 기사의 검보다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검술의 고수라는 그 사람은 전쟁터에서 꾀만 부리던 날 알고 있었는지, 덕분에 그를 설득하는 건 무진장 힘들었다. 그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훗날 나의 스승이 될 사람이 시키는 대로 뭐든 했다.

물론 나의 부하들이 손을 걷어붙이고 결사 반대했고, 내 예비(?) 스승과 대판 싸움을 할 뻔도 했지만 난 결국 내가 원하던 대로 단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저 눈이 없는 소년, 시엔처럼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기 위해 나는 살 것이다. 지금 단검술을 익히고 전쟁터를 누비며 바람을 맞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즐겁다.

내게 살아가는 이유를 알려주고, 나의 검을 찾아준 내 친구 시엔에게 감사한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녀석은 여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용병이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 많은 것을 준 시엔에게 뭔가를 보답하고 싶었던 나는 그와 여동생을 편지로 이어 주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녀석과 나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고,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한 뭔가로 이어져 있는 친구가 되었다.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처음 단검술을 배우기 위해 단검을 잡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과거 바보 같던 나에게도 살아가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지금 나는 몰딘 왕국의 왕좌에 앉아 언젠가 나에게 드래곤의 몸뚱어리를 선물로 가져오겠다던, 이제는 다크로얀이라 불리는 나의 친구 시엔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혼돈의 정령왕」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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