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빛의 숲
빛의 숲
검은 장발의 차가워 보이는 로얀과 즐거운 듯 밝게 웃는 분홍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 레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바라보는 푸른 머릿결의 엘라임이 빛의 숲으로 들어섰다.
리치와의 싸움 이후 좀비나 스켈레톤을 제외한 다른 강한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기에 로얀 일행은 언데드들을 무시하고 빛의 숲으로 향했던 것이다.
밝은 빛을 싫어하는 데스는 거대한 나무 그림자 속에서 로얀을 따라왔고 다크로드는 여전히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로얀은 리치와의 싸움에서 꽤나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 아직 로얀과 서먹한 사이인 엘라임이 치료해 줄 리 없어 레아가 그를 치료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레아와 엘라임은 그가 저번처럼 리커버리로 상처를 치료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간단한 지혈과 응급처치만 하더니 곧 묵묵히 걸어가는 게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레아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더 이상 리커버리를 쓸 수 없다는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레아와 엘라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로얀이 기술을 흉내 낸 것뿐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녀들은 아직까지도 그 말의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페어리인 레아는 자신의 고향인 빛의 숲에 들어서자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신 듯했다. 엘라임도 한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게 여전히 덤덤한 로얀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분 좋아 보였다.
사박사박.......
세 사람이 밟고 지나가는 길에 깔려 있던 꽃잎이 발에 붙어 허공을 날았다. 레아가 발걸음도 가볍게 일행의 선두에서 앞장서서 걸어갔다.
사사삭.
로얀의 귓가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적의 수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적이다.”
“어?”
꽃을 보며 즐거워하던 레아는 로얀이 그 말과 함께 검의 그립에 손을 가져가자 그를 말리려고 타박타박 뛰어왔다.
빛의 숲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엘프들이 빛의 숲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나타나는 몬스터들도 모두 그들에 의해 퇴치되었던 것이다.
몬스터가 아니라면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엘프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숲 속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움직임이 매우 민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숲의 요정족이며 평화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라 해도 로얀이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엘프들은 몰살(?)이었다. 때문에 레아는 그녀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엘프들이 걱정되어 로얀을 말리려고 그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사사삭.
엘프들로 보이는 이들이 로얀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수풀 속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화살촉을 로얀 일행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풀 숲 사이로 보이는 뽀얀 피부와 뾰족한 귀... 역시나 엘프들이었다.
스릉.
우우웅.
그러자 레아의 움직임보다 로얀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다크리온을 뽑음과 동시에 검에 백광의 오러를 피워 올렸다.
피피피핑!
로얀의 오러를 본 한 엘프가 화살을 쏘자 덩달아 다른 엘프들이 일제히 활의 시위를 놓았다. 헌터들의 기술인 에로우 샷이 일제히 로얀 일행을 덮쳤다.
로얀 일행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얼떨결에 화살을 쏜 엘프들도 당황했다. 그들은 로얀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기술을 쓰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를 하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활을 쏜 것이었다.
로얀은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레아를 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페어리의 여왕이라 해도 그녀에게는 화살을 막을 시간이 없었다.
“워터팩.”
촤르르륵!
쏴아아아......!
그의 말과 함께 로얀 일행의 주위로 거대한 물의 장벽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겹겹이 솟아오른 워터팩은 로얀 일행의 주위를 성벽처럼 감쌌다.
그 순간, 달려오던 레아는 그 자리에 멈춰 로얀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엘라임은 아예 돌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물의 정령의 기술을 쓰다니! 게다가 이 엄청난 크기와 두께, 여러 장의 워터팩은 적어도 상급 정령의 힘이었다.
놀라긴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령 친화력이 높은 그들이었건만 지금까지 어떠한 정령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물의 정령의 기술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엘라임은 정령왕답게 완벽하게 기운을 감추고 있었고,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도 본신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프들은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엘프들은 갑자기 생성된 워터팩에 자신들이 쏜 화살들이 가로막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로얀이 아닌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처럼 빛나는 엘라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본 엘프들은 물의 정령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모두 숲 속에서 나왔다. 그들은 엘라임이 워터팩을 펼쳤다고 확신한 것이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여성체로 알려져 있었기에 로얀이 워터팩을 썼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분명 그가 워터팩이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을 뵙습니다.”
엘프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자 물의 장벽 속에서 로얀이 엘라임을 바라보더니 장벽을 거두었다.
엘라임은 로얀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레아에게서 듣기로는 이프리트의 불꽃도 뿜은 적이 있다고 했다. 물의 정령왕과 불의 정령왕의 힘을 쓸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던가?
“.......”
그녀의 시선에 로얀은 다크리온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엘프들과의 대화는 엘라임과 레아의 몫이었던 것이다.
엘라임은 아직도 얼어 있었기에 엘프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나 엘프들은 물의 장벽이 걷히자 이것이 엘라임의 대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화사한 웃음을 담은 채 말했다.
“빛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빛의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로얀 일행의 눈에 어둠의 숲의 괴이하게 뒤틀린 나무들과는 달리 빛의 열매를 머금은 듯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나무 위에는 집으로 보이는 것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마치 나무의 일부분인 듯 자연과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는 집들이었다.
엘프들은 인간과는 달리 수백 년의 세월을 사는 종족으로 숲의 요정족이라는 명호답게 숲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이런 점은 백 년에 한 번 나무를 잘라 집과 가구를 만드는 그들의 특성에서도 잘 나타났다.
엘프들은 백 년에 한 번 나무를 자르기 전에 큰 제사를 지낸 후 자른 나무의 몇 배나 되는 수의 나무를 심었다.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들의 마음은 어찌 보면 집착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연을 아끼는 만큼 엘프들은 자연을 훼손하고 이용하기만 하는 인간을 적대시했다. 그런 그들의 마을에 인간(?) 세 명이 엘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고 있으니 당연히 모든 엘프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한 엘프가 로얀 일행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먼저 앞질러 가자 로얀 일행은 마을 중앙에 멈추어 섰다.
그러나 일행 중 그 누구도 엘프들의 시선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레아는 산뜻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는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엘라임은 앞에 서 있는 로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로얀은 모든 인간들이 죽기 전에 보고 싶어한다는 엘프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손이 검의 그립 쪽으로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의 원수인 드래곤이 엘프의 모습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이다.
“크윽!”
갑자기 로얀이 오른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얀,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로얀은 레아의 물음에 머리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곳으로 오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무튼 엘프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는 로얀은 그들의 시선을 흘려버렸다. 그때, 그의 귓가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얀 형!”
그것은 몇 달 전 해적들에게서 엘레나 공주를 구하는, 일생의 마지막 용병 의뢰에서 지겹게 들은 목소리로 짧게 기른 갈색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소년 음유시인이 그 주인이었다.
분명 로얀과 헤어지기 전 렌은 엘프인 세리나를 따라 빛의 숲으로 간다고 말했다.
과일 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던 렌은 엘프들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곳에서 용병 의뢰에서 인연을 맺었던 로얀을 본 것이었다.
엘프들 속에서 서럽다면 서러운 생활을 했던 렌은 동족이자 형인 로얀을 보자 기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달려가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마음이야 그것도 내팽개치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나중에 찾아올 엘프들의 잔소리가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로얀은 자신에게로 달려와 눈물을 글썽이는 렌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숲의 향기를 만끽하던 레아는 로얀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처음 보기에 눈을 빛냈다. 혹시나 로얀의 과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로얀, 이 꼬마는 누구야?”
“누가 꼬마라는 거야!”
렌은 로얀 뒤에 서 있던 작은 소녀가 자신을 가리키며 꼬마라고 말하자 발끈했다. 아무리 봐도 레아는 렌보다 나이를 더 쳐줄 수가 없었다.
“로얀 형, 이 버릇없는 꼬마는 누구야?”
빠직.
꼬마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레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로얀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 화를 꾹 참았다.
“꼬마 인간, 죽고 싶어?”
살벌하게 말하는 귀여운 꼬마 소녀를 보며 렌은 피식 웃었다.
“로얀 형, 얘 너무 버릇없다.”
“.......”
렌의 말에 로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렌과 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빠직.
“호호호! 로얀, 저 꼬마 반만 죽여도 되지?”
드디어 이성이 끊긴 레아가 이를 갈며 그렇게 묻자 로얀은 덤덤하게 말했다.
“목숨을 잃지 않는 선에서라면.”
이렇게 말해 준 것만 해도 그가 렌을 상당히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렌이 그와 인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로얀은 일절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아 앞에 커다란 빛 덩이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커다란 주먹의 형상을 갖춰가자 렌은 왠지 모를 불안감과 함께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이게 뭐지?”
렌이 빛 덩이로 생성된 두 개의 커다란 주먹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레아는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각오해라. 꼬, 마, 인, 간, 아!”
후우웅.......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날아가는 두 개의 커다란 주먹.
퍼억!
경쾌한 타격음.
뻐억.
시원한 격타음.
렌은 끝임없이 날아오는 빛의 주먹에 이리저리 얻어터져야만 했다. 주먹에 몰매를 맞는 순간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바라며 로얀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다른 엘프들은 레아가 빛을 다루자 신기하게 바라보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인간 중에서 빛을 저렇게 다루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퍽! 퍽! 퍽!
아무튼 렌이 그렇게 한참을 맞고 있을 때.......
“허허허... 요란하게 인사를 하시는군요.”
긴 수염을 드리운 나이 든 엘프가 다른 엘프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존대에 비로소 주위에 있던 엘프들은 로얀 일행이 심상치 않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토토, 오랜만이야.”
빛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추는 것과 동시에 렌은 바닥을 굴렀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레아의 말에 늙은 엘프는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허허! 오랜만입니다, 페어리들의 여왕이신 레아님. 그리고 전 토토가 아니라 토시트라고 합니다.”
그렇게 레아에게 인사를 건넨, 전 엘프들을 다스리는 장로인 토시트가 이번에는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미리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저희 마을을 방문해 주신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을 환영합니다.”
엘라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토시트는 마지막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물의 정령왕과 페어리들의 여왕과 여행을 하는 인간... 정말 인간일까?
로얀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엘프들은 토시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곧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로얀 일행을 안내해 왔던 엘프들도 레아가 페어리의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이나 놀랐고, 이제 막 깨어나려 했던 렌은 꼬마 소녀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 부들부들 떨며 다시 기절했다.
렌은 의식의 끈을 놓는 그 순간 직감했다.
‘난 이제 죽었다.’
“혹시 위대한 존재이신지요?”
토시트는 그의 정체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얀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위대한 존재라는 말은 흔히 드래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자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나를 도마뱀과 비교하지 마라.”
그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자 그 기운에 토시트는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흑발에 흑안, 게다가 드래곤을 벌레 보듯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마족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토토, 로얀은 정령왕이야.”
그들의 궁금증을 레아가 풀어주었다. 그녀는 이제 로얀을 정령왕으로 완전히 인정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토시트를 더욱 미궁 속으로 빠뜨려 놓았다. 아니, 모든 엘프들이 의아하게 여겼다. 검은 흑발에 남성체 정령왕에 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
“그냥 그렇게 알아둬. 그리고 시르 좀 줘.”
그들의 반응에 레아는 웃으며 시르를 요구했다. 시르는 빛의 숲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진액으로 만든 사탕의 이름이었다.
스윽.
토시트는 아직도 약간은 못미더운 듯한 눈빛으로 로얀을 쳐다보고 있었다. 엘프들은 상대의 눈동자를 통해 상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지만 토시트는 로얀의 눈동자에서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공허한 어둠... 그의 눈동자에서는 어둠만이 보였다.
하지만 토시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인 엘라임이 부정하지 않으니 로얀을 정령왕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시트는 어쨌거나 정령왕인 로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본 죄가 있기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험험!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런데 레아님은 이번에도 가출이십니까?”
“아니야. 그냥 여행이라고.”
“허허! 그럼 페어리의 마을에 연락을.......”
레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여왕이 되고 나서부터 페어리의 마을에 오래 붙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유분방한 그녀는 많은 페어리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매일같이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번 붙잡혀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레아는 얼굴을 굳히며 소리쳤다.
“안 돼! 절대 안 돼! 토토, 알았지?”
“허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파티를 시작해야지요.”
토시트가 겉모습만으로는 귀여운 손녀딸 같은 레아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활짝 웃었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언제나 한바탕 파티를 벌이는 엘프들이었다.
로얀 일행이 머물 곳으로 안내하는 토시트 옆으로 레아가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로얀은 뻗어 있는 렌의 발목을 잡고 그를 질질 끌며 따라갔고, 엘라임은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로얀의 정체에 대해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 * *
엘프들의 파티라는 것은 인간들의 파티와는 많이 달랐다.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정도로 인간들의 파티에 비하면 상당히 조촐했다. 그러나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엘프답게 노래와 춤은 빠지지 않았다. 그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모두들 한가족처럼 즐거워했다.
레아는 장로인 토시트 옆에서 시르라는 사탕을 할짝이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달콤하면서도 묘한 맛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토시트에게서 엘프 마을에 있는 거의 모든 시르를 받아내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로얀은 파티에서 세리나를 만났지만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만남을 끝냈다. 그들 사이는 여전히 서먹했고 싸늘했다.
여자인 세리나가 로얀을 알자 레아가 눈을 빛냈지만 렌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로얀이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파티는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로얀은 저녁 식사를 마친 직후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버렸다. 원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데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귀가 밝다 보니 엘프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가 파티장을 벗어나자 그를 뒤따라 가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정령이 있었다. 바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뚜벅뚜벅.......
나무로 만든 집답게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빙글.
방 안으로 들어선 로얀은 몸을 돌려 자신을 따라온 엘라임을 쳐다보았다.
끼익.
문이 닫히자 나무로 만든 집 안은 이제 로얀과 엘라임만의 공간이 되었다.
“나에게 볼일이 있나?”
로얀의 무심한 눈동자가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존재에게 반말을 쓴 것이...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존댓말을 사용할지 안 할지를 결정했다. 엘라임이 아무리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겉모습은 2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온 것이었다.
스윽.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어떠한 결의를 띠고 로얀의 흑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정령왕다운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오늘이야말로 들어야겠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지?”
그녀의 음성에서는 강한 압력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로얀은 그녀의 기운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나는 혼돈의 정령왕이다.”
“무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4대 정령왕 외의 정령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이제 똑같은 질문은 사양한다.”
로얀의 무뚝뚝한 대답에 엘라임은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주먹이 절로 쥐어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의 정령의 기술과 불의 정령의 힘을 쓴 거지?”
“그대로 따라했을 뿐.”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스오오오.......
엘라임의 기운이 거세졌다. 차가운 바다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사실이다.”
로얀은 말을 하면서 검의 그립을 어루만졌다. 지금은 싸움을 말릴 레아도 없었기에 엘라임이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가차없이 그녀를 벨 생각이었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정령왕에게는 살아가는 이유인 사명이라는 것이 있었다. 엘라임의 경우에도 그녀는 세상의 원소 중 하나인 물을 관장하고 다스리기 위해 태어났다.
“혼돈의 정령왕은 무슨 일을 하지?”
“인간의 일이 끝나면 생각해 볼 생각이다.”
“.......”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로얀.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일이란 드래곤에게 복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엘라임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로얀을 보며 분노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존재인 자칭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이런 정령왕은 수십만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엘라임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엘라임은 인간의 일이라는 말을 할 때 그의 눈동자가 흐려지며 슬프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도 레아도 로얀의 슬픈 과거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물은 곧 마음이고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다. 덕분에 상대의 눈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로얀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느낄 수가 있었다.
무한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일생에 이토록 강한 슬픔을 지닌 존재는 없었다. 보는 그녀도 슬퍼지는 것만 같았고, 그 때문에 로얀을 보면 항상 화가 났다.
“정말 정령왕이라면 인간계에서 소멸하는 순간 정령계로 돌려 보내지겠지.”
촤르륵.
엘라임의 두 손을 푸른 물줄기가 감싸더니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얀의 손은 이미 다크리온의 그립에 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이때에 로얀은 이곳을 향해 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곳에 서 있으면 위험하다.”
로얀이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엘라임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잔뜩 화가 난 그녀가 로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당신을 시험해 보겠다!”
끼익.
턱!
엘라임의 외침과 함께 방문이 열렸고, 문 앞에 있던 엘라임은 로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문에 떠밀려 몸을 휘청거렸다. 갑자기 누군가가 힘차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엘라임은 순간 당황하며 로얀이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와락.
앞으로 넘어지려던 그녀는 로얀이 허리를 살짝 숙여 받음으로 해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로얀은 자신에게로 넘어지는 엘라임을 얼떨결에 받은 것이었다.
로얀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렌이었다.
렌은 로얀이 그동안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가 엘라임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허둥지둥했다.
“서, 설마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과 로얀 형이.......”
렌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로얀이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정령왕인 엘라임과 인간인 로얀 사이가 진한(?) 듯하자 큰 혼란에 휩싸인 것이다.
팟.
그러자 엘라임이 로얀의 품에서 벗어나며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나가버렸다.
“당신이라는 존재, 정말 싫어!”
그러나 로얀은 검의 그립에서 손을 치우며 아무 표정 없이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타탁.
“이 바보!”
그때 레아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파티 도중 빠져나가는 로얀과 엘라임을 보고 그들을 따라와서는 페어리 특유의 기술로 창가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온 즉시 렌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얀 빛을 내뿜는 커다란 주먹을 생성시켰다.
“우연이긴 했지만, 일단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들어줬으면 눈치를 봐서 얼른얼른 나가야지! 하여튼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레아는 모든 책임을 렌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렌은 지금 정령왕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노래의 소재로 쓸 생각에 살짝 들떠 있었기에 레아가 무슨 행동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응?”
“그냥 좀 맞자.”
휘잉.
“자, 잠깐!”
퍼퍽! 퍽!
주먹들이 가차없이 렌의 이곳저곳을 두드려대며 한밤에 시퍼런 멍을 그려내었다.
렌이 구타당하는 것을 외면한 채 레아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 달리 사뭇 진지했다.
“로얀, 언니를 벨 생각이었지?”
“.......”
레아에게 있어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엘라임과 로얀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내심 그들이 잘되기를 기대하고 있었건만 로얀은 엘라임을 동료로도 생각지 않고 있는 듯했다. 그때 만약 렌이 문을 열고 나타나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로얀은 필시 엘라임을 베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아는 렌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컥, 그만 좀.......”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렌은 바닥을 뒹굴며 호소했다. 그러자 레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넌 더 맞아야 돼!”
그녀의 외침에 렌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찬 신음성을 토했다.
뚜벅뚜벅.
로얀은 떠들썩거리는 레아와 렌에게로 다가와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린 뒤 발로 방문을 차서 열어 그들을 밖에 내려놓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로얀! 언니도 동료라고!”
로얀은 밖에서 들려오는 레아의 음성을 뒤로하고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허리에서 떼어낸 후 침대의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망토를 벗은 그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내일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만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레아와 엘라임과 함께 여행할 이유는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레아와의 여행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있는 곳까지라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그들과 이제 곧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순간 엘라임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루만져 주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
로얀은 눈을 감으며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지켜야 할 존재가 늘어나면 나의 복수는 멀어질 뿐이다.”
이 한마디와 함께 로얀의 방엔 침묵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