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어둠의 정령 (14/42)

5장 어둠의 정령

어둠의 정령

다음날 로얀 일행은 아침 일찍 다일리아를 떠났다.

이제 곧 어둠의 숲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접근도 하지 못할 어둠의 숲을 향해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갔다.

“힝... 이 숲은 언제와도 싫어.”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어둠의 숲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레아였다.

어둠의 숲은 이름에 걸맞게 햇살이 숲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밤처럼 칠흑 같은 것만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기괴한 모양의 나무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어둠의 숲에서 레아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페어리인 그녀로서는 이곳이 싫어 빠르고 안전한 페어리들만의 지름길로 로얀을 안내하려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몬스터와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로얀은 어둠의 숲을 정면 돌파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부스럭.

숲 속을 걷던 로얀 일행의 귓가로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어둠의 숲에 들어서면서부터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엘라임이나 레아보다 더 빨리 그 소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부스럭.

그러나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뽑기는커녕 오히려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취에엑!”

숲 속에서 나타난 몬스터는 오크였다. 초록색 피부의 오크들이 열 마리쯤 보였다.

“취엑! 인간이다.”

오크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어둠의 숲에서 인간을 구경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아니, 본다고 해도 대부분이 무리를 지어 사냥 나온 용병들이나 기사단이었다.

그러나 오크들을 본 레아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고 엘라임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로얀은 품속에서 ‘몬스터 도감’이라는 두꺼운 책을 꺼내 들더니 오크를 힐끔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오크라... 흠.......”

그는 몬스터와 싸워본 적은 있지만 눈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신기한 뭔가를 발견한 듯 오크를 관찰했다.

“취에엑?”

오크들은 인간이 공격은커녕 갑자기 책을 꺼내 들자 당황했다. 그러다 인간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판단한 오크들은 분노했다.

“취엑! 인간, 죽어라!”

그들은 책을 보고 있는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탁.

로얀은 책을 덮고 품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몬스터라는 거 신기하군. 오크는 피가 초록색이라지?”

스르릉.......

“너희들의 몸을 관찰하겠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빛을 뿜는가 싶더니 어느새 로얀은 오크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날에 오크들은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고 모두 차가운 땅에 몸을 눕혔다.

로얀은 순식간에 도륙을 끝내고는 죽은 오크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으로 오크의 몸을 잘라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엽기적인 그의 행동에 엘라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저 인간 원래 저러니?”

“그냥 단순한 관찰인데 뭐.”

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엘라임의 머릿속에서는 로얀에 대한 생각이 더욱 안 좋게 자리 잡아갔다.

콰가가강!

“꾸에에엑.”

콰가가강!

“키에엑.”

로얀은 어둠의 숲을 거닐면서 오크 외에도 고블린이나 코볼트 등 여러 몬스터를 만나는 족족 쓸어버렸다. 그는 몬스터의 씨를 말리려는 듯 마구잡이로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움직이지 못하는 식인식물인 만드라고까지 가까이 다가가 죽였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여러 몬스터의 피가 깔리자 엘라임은 그것들을 밟기 싫어 물로 깨끗이 씻어냈다. 로얀이 피를 깔고 엘라임이 길을 씻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콰가가강!

“키에에엑.”

또 다른 몬스터가 등장했다.

파드드득......!

날개가 달린 비행형 몬스터였다.

“하피. 하반신은 독수리에 상반신은 인간 여성의 몸, 팔은 독수리의 날개.”

로얀은 몬스터 도감에서 하피에 대한 정보를 읽고는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파드득......!

하피들이 날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로얀을 공격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로얀은 현재 어둠의 숲의 학살자로 몬스터들 사이에서 조금씩 소문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들과는 달리 영리한 하피들은 로얀이 남성체임을 감안해 일단 그에게로 가까이 접근해 자신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고 다가오는 하피의 얼굴은 예쁜 축에 속했다.

“.......”

하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몸을 밀착시켜 왔다. 그러나 로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엘라임은 ‘역시 남자들이란!’이라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레아는 무뚝뚝한 로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득.

이윽고 로얀이 교태 어린 몸짓을 보이는 하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남자와는 다른 신체군. 인간 여성의 몸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번뜩.

그리고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빛을 뿌렸다.

푸화확!

하피의 몸이 이 등분되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뒤로 로얀이 하피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자 레아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이었고 엘라임은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다.

* * *

콰가가강......!

로얀 일행이 어둠의 숲에 들어선 지 어느덧 5일이 지났다. 그동안 로얀은 아침이고 밤이고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밤에 야숙을 하는 그들 일행을 몬스터들이 쉴 틈 없이 공격해 왔지만 로얀은 그들 모두를 가볍게 처리했다. 덕분에 레아와 엘라임은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정말 편안하게 어둠의 숲을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5일 밤낮을 끊임없이 싸운 로얀의 얼굴에는 피로가 뭉쳐 있었다. 그의 몸은 몬스터의 체액과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도 보였다. 숲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강하고 큰 몬스터가 나왔기 때문이다.

쿵쿵쿵!

“일곱 마리.”

바스락.

로얀의 말대로 몬스터 일곱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4미터 정도의 거대한 오우거들이었는데 손에는 두꺼운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네 마리.”

또다시 로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풍성하게 자라 있는 반대쪽 푸른 풀숲이 바스락거렸다.

바스락.

그리고 이번엔 거대한 트롤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우거와 트롤이 동시에 나타난 건 정말 의외였다. 엄청난 덩치의 몬스터들이 로얀 일행을 둘러싸자 거대한 성벽이 둘러쳐진 것만 같았다.

“로얀, 빨리 끝내줘.”

흉측한 오우거와 트롤이 보기 싫어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엘라임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워터팩.”

촤아악......!

물로 된 장벽이 그녀들 주위로 나타나 레아는 그 속에서 마음 놓고 로얀과 몬스터 간의 싸움을 구경했다.

파밧!

로얀의 신형이 솟구쳤다.

콰가가강......!

부욱!

“쿠어어억!”

쿠쿠쿵.......

이제까지 로얀에게 덤벼들었던 다른 몬스터들과 똑같이 거대한 오우거도 그의 검에 단번에 잘려 나갔다.

후웅.......

로얀의 머리 위로 오우거의 방망이가 스쳐 지나갔다. 방망이를 피한 그는 오우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부우욱!

“쿠워웍.”

쿠쿠쿵.......

일곱 마리의 오우거를 순식간에 처리한 로얀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오우거의 육중한 몸과 튼튼한 가죽을 가르려면 마나 소드를 펼쳐야 했는데, 로얀은 마나 소드는 쓰지 않고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만 쓰고 있었다. 지난 5일간 너무 많은 힘을 썼기 때문이다.

파밧.

로얀은 남은 트롤 네 마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걱!

부우욱.

오우거보다 약한 트롤을 쉽게 처리한 로얀은 숨을 헐떡이며 근처 나무 아래에 가서 앉았다.

“후욱, 후욱.......”

검을 검집에 넣고 로얀은 숨을 골랐다.

워터팩을 제거한 엘라임이 레아와 함께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레아는 상당히 지쳐 보이고 자잘한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르는 로얀을 보다 못해 엘라임에게 말했다.

“언니가 치료 좀 해줘.”

페어리도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얀을 매우 좋지 않게 보고 있는 엘라임은 딱 잘라 말했다.

“싫어.”

“에이! 이제까지 우린 손도 까닥 안 했잖아. 로얀이 밤에도 지켜줬고.”

“.......”

레아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망설이던 엘라임은 결국 큰 맘 먹고 로얀에게 다가갔다.

로얀은 자신 가까이 다가온 엘라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치료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로 손을 가져오는 순간, 그가 짤막하게 읊조렸다.

“리커버리.”

화악.

밝은 빛이 로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상처뿐만 아니라 지친 체력도 회복되었던 것이다.

정말 큰 맘 먹고 그를 치료해 주러 왔던 엘라임은 자신의 눈앞에서 리커버리를 시전한 로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로얀을 향해 손을 날렸다.

턱.

자신의 뺨을 향해 날아오는 엘라임의 손을 로얀이 붙잡았다. 엘라임은 남자인 로얀에게 손을 잡히자 흠칫 놀랐다.

촤악......!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 생성된 물이 벼락처럼 떨어지자 로얀은 엘라임의 손을 놓았다. 그의 머리를 타고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흥!”

엘라임이 코웃음을 치며 휑하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자 레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로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엘라임과 레아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군.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피식.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엇! 로얀, 방금 웃었지!”

레아는 로얀이 하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가 지었던 미소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던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쿵쿵쿵......!

바스락.

“우어어어.......”

레아가 로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뒤로 소의 머리를 한 거대한 미노타우로스가 양날의 배틀 엑스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큰 배틀 엑스를 로얀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턱.

여전히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로얀은 자신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날카로운 배틀 엑스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살갗조차 베이지 않았다.

스윽.

로얀이 배틀 엑스를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힘으로 누군가에게 밀릴 거란 생각을 아예 해본 적도 없던 미노타우로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로얀은 배틀 엑스를 잡은 상태에서 미노타우로스를 그대로 바닥으로 메쳤다.

후웅.......

“우어억!”

쿠궁.

로얀은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보며 그가 놓친 배틀 엑스를 집어 들었다.

후웅.......

콰직!

그리고 그것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잘랐다.

엘라임에게 물벼락을 맞아 아직도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로얀이 다시 어둠의 숲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레아와 엘라임이 조용히 뒤따랐다.

레아는 사라진 로얀의 웃음을 다시 한 번 보려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그것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 *

“쿠어어억!”

쾅......!

어둠의 숲 속에 터진 굉음.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들 사이에서 몬스터와 인간의 힘 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는 오우거보다 크고 육중한 몸을 가진 자이언트였고 인간은 두 개의 검을 가진 로얀이었다.

로얀은 검을 뽑지 않고 두 손으로 대형 몬스터인 자이언트의 손을 맞잡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강한 힘이 오가고 있었다.

근육질로 꿈틀거리는 자이언트는 땀방울을 연신 떨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언니, 자이언트랑 힘 겨루기 하는 인간 봤어요?”

“.......”

레아는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의 숲 속으로 들어온 지 어느덧 6일이 지났다.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강하고 몸집 또한 점점 더 커져 이제는 대형 몬스터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자이언트가 나타났을 당시 로얀은 역시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디 관광 온 사람 같았다.

책의 내용 중 그의 관심을 가장 끈 것은 자이언트는 물리적 힘으로는 몬스터 중 가장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읽은 로얀은 검을 뽑지 않고 맨손으로 공격해 오는 자이언트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자이언트와 인간의 힘 대결은 십 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자이언트의 힘을 받고 있던 로얀이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약하다.”

“크륵.......”

자이언트는 갑자기 로얀의 손에서 흘러나온 힘에 뒤로 밀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기괴한 나무가 서 있는 곳까지 쭉 미끄러졌다.

파밧!

자이언트를 밀친 로얀은 그의 허벅지를 타고 위로 솟구쳤다.

번뜩!

그리고 두 개의 빛이 반짝였다.

타탁.

가뿐히 땅 위로 내려선 로얀은 곧바로 레아와 엘라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푸화화확!

그의 뒤쪽에서 갑자기 엄청난 피가 솟구쳤다. 엑스 자로 깊은 검흔이 새겨져 있는 자이언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였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낼 거면서 힘 싸움은 왜 했어?”

레아는 로얀 옆에 붙어 물었다. 엘라임은 일명 리커버리 사건 이후 로얀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긴 원래도 거의 말을 안 했지만.

“.......”

로얀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책을 꺼내 펼쳐놓고는 손으로 그 중 한곳을 가리켰다.

거대한 근육질 몸을 가진 자이언트는 힘에 있어서는 사이클롭스와 동수 이상을 이루는 괴력의 몬스터다.

“힘을 시험해 보려고?”

“피해라.”

“응?”

“키에에에엑!”

하늘을 찢을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하늘을 나는 거대한 몬스터 다섯 마리가 나타나면서 어둠은 지금까지보다 더욱 짙어졌다.

촤라라락.

로얀은 책을 빠른 속도로 넘겼고 엘라임은 레아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워터팩!”

촤아아악......!

땅에서 푸른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엘라임은 몬스터의 공중 공격을 대비해 지금까지의 워터팩과는 달리 자신들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막을 쳤다.

그 속에서 엘라임과 레아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지 엘라임의 방어막은 로얀을 감싸주지 않았던 것이다.

“키에엑!”

괴성을 지르며 등장한 다섯 마리의 몬스터를 보며 로얀은 책장을 계속 넘겼고, 곧 그의 입이 열렸다.

“드래곤의 아류 와이번. 지능이 낮고 매우 난폭함.”

와이번...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드래곤보다는 훨씬 작은 몬스터. 드래곤과는 달리 앞발이 없고 브레스나 마법도 쓸 수 없었지만 날카로운 이빨엔 강한 독이 묻어 있었다.

와이번들은 자이언트의 시체를 보고 날아온 것이었다. 자이언트의 육중한 몸은 맛있는 식사거리였다. 그러나 아무리 와이번이라 해도 자이언트와 싸우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니 언제 또 이런 진수성찬을 먹어볼 수 있겠는가?

“키에에엑!”

와이번들은 자이언트에게로 다가가기 전 로얀을 향해 먼저 날아왔다. 엘라임과 레아는 물의 장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먼저 날아간 것이었다. 설마 이 작은 인간이 거대한 자이언트를 죽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와이번이었다. 지능이 낮고 난폭한 와이번이 생각이라는 것을 했을 리 없지만 말이다.

“드래곤의 아류인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로얀의 눈이 번뜩였다. 다른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엘라임은 로얀의 바뀐 분위기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 드래곤과 무슨 일 있었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오늘따라 로얀이 사나워 보이네?”

“사나워 보이는 게 아니라 슬퍼 보이는 거야.”

그녀는 레아와는 달리 로얀의 눈동자를 보았다. 눈동자는 물들의 조화로 만들어진 구슬 같아서인지 오래 전부터 엘라임은 사람의 감정을 잘 느끼고 읽어냈던 것이다.

와이번이 로얀의 머리 위로 날아와 날카로운 이빨로 그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콰가각!

로얀이 재빨리 그 자리에서 이탈하자 그가 있던 자리를 와이번의 날카로운 이빨이 갈아버렸다. 바닥에 이빨 자국을 선명하게 남긴 와이번이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뒤로도 와이번 다섯 마리는 번갈아 가며 로얀에게 달려들었다. 한번 공격하고 하늘로 잽싸게 날아오르는 와이번의 행동에 로얀은 쉽게 공격할 틈을 찾지 못했다.

엘라임은 물의 장벽 안에서 이리저리 와이번의 공격을 피해 몸을 움직이는 로얀을 바라보댜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물의 사슬.”

츄아아악!

그녀의 음성을 뒤로하고 땅 속에서 수십 가닥의 물줄기가 솟아오르더니 와이번에게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 그들의 몸과 날개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키엑!”

두 마리의 와이번이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물의 사슬 속에서 발버둥쳤다.

스윽.

쿠쿠쿵!

엘라임이 손을 휘젓자 두 마리의 육중한 와이번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스릉.

그러자 로얀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뽑아 들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스걱.

푸화확......!

와이번 두 마리의 목을 거리낌없이 베어버린 로얀은 그 피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대로 엘라임을 향해 다가왔다.

물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방해하지 마라. 부탁이다.”

빙글.

로얀은 그 말과 동시에 몸을 돌려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스윽.

로얀의 말을 들은 엘라임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손을 내렸다. 로얀의 입에서 뜻밖에도 부탁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와이번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레아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로얀을 바라보았다.

‘복수는 내 손으로 한다.’

로얀은 와이번을 드래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드래곤과의 실전에 앞서 연습 상대로는 적격인 상대였다. 비록 드래곤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 힘의 차이가 났지만 공중을 자유자재로 나는 드래곤과의 전투에 앞서서는 좋은 연습 상대임에 틀림없었다.

“키에에엑!”

동료들의 죽음에도 와이번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난폭한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로얀을 향해 날아왔다.

후우웅!

강한 풍압이 전신으로 뻗어왔다.

‘지금이다!’

쿠가가각!

와이번이 또다시 바닥을 스쳐 지나가자 로얀은 그 등 위로 올라탔다.

퍼득!

스윽.

거대한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로 날아오른 와이번은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로얀은 중심을 잡기 위해 왼손에 들린 끝이 뾰족한 에리오네를 빙글 돌려 와이번의 등 위에 내리찍었다.

푸욱!

“키에에엑!”

살을 찢는 고통에 와이번은 주변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고, 와이번에게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와이번의 몸부림이 더욱 심해지자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아내고는 그대로 커다란 머리를 향해 달렸다. 그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욱.

베기 위해 만들어진 다크리온답게 와이번의 두꺼운 목을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푸확!

공중에서 엄청난 양의 피의 비가 떨어져 내렸다.

탓!

죽은 와이번의 시체가 땅으로 추락을 시작했을 때 로얀은 근처에서 날고 있던 와이번의 몸 위로 뛰어올랐다.

타탁.

정확히 머리 위에 착지한 그는 에리오네를 빙글 돌려 그대로 내리찍었다.

푸욱.

피핏!

“키에에엑!”

에리오네가 작은 구멍을 만들며 와이번의 뇌를 관통하자마자 뇌수와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쳤다.

“꾸에엑!”

마지막 남은 와이번이 로얀의 힘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몸을 돌리려 했다.

탓!

그러나 옮겨 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우우웅......!

로얀은 백광의 마나 소드를 다크리온에 생성시킨 후 남은 와이번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콰가가강......!

다크리온에서 출렁이던 백광의 마나 소드는 굉음을 내며 와이번을 덮쳤다.

푸화화확!

밟을 곳을 잃은 로얀은 와이번의 시체와 함께 땅으로 추락했다. 덕분에 그는 와이번이 뿜어낸 붉은 피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로얀은 지상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숲 전체를 볼 수 있었다. 한데 기괴한 나무들이 우거진 어둠의 숲 사이로 작고 둥근, 검은색의 뭔가가 언뜻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미약하나마 정령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문득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어둠의 정령이라는 것들이 연상되었다.

타탁.

좀더 상대를 관찰하고 싶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로얀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바닥 위에 내려섰다.

쏴아아아......!

붉은 피가 로얀에게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피의 비는 와이번이 로얀과 비슷하게 떨어지면서 금세 그쳐버렸다.

뚝뚝!

로얀의 긴 흑발을 타고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붉은 피를 떨구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엘라임과 레아가 뒤따랐다.

레아가 자신 옆에 있는 엘라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언니가 좀 씻어주면 안 돼?”

“.......”

엘라임은 말없이 운디네를 소환했다.

갑자기 엘라임과 레아가 걸음을 멈추고 운디네를 소환하자 로얀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운디네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로얀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뭐 하는 것이냐!”

서릿발처럼 차가운 엘라임의 음성에 운디네는 울먹이며 그녀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분에게서 정령왕의 기운이.......]

운디네의 말에 엘라임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러나 레아는 하급 정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령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엘라임도 로얀에게서 정령왕의 기운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의 기운을 지녔으면서도 인간의 냄새를 풍기는 로얀... 그는 인간과 정령왕 사이에 태어난 존재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엘라임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은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예로 실피드와 이프리트 사이에서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흑! 다른 분들과는 달리... 무서워요.]

운디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엘라임은 그녀를 돌려보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왕인 자신의 명령에도 머뭇거릴까?

“역시 두려워하는군.”

로얀의 말을 들은 엘라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뜻은 곧 그가 정령왕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하급 정령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혼돈의 정령왕이라 칭하고 다닌다는 이프리트의 말이 떠올랐다.

운디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단 한 존재, 레아는 영문을 몰라 엘라임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들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왕의 말을 거부하는 정령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레아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엘라임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사실이야.”

“그러면 언니가 직접 해주면 되잖아? 어휴, 저 뚝뚝 떨어지는 피 좀 봐!”

“싫어.”

“히잉... 왜?”

터벅터벅.......

로얀이 몸을 돌려 옆의 숲으로 들어갔다.

“피가 싫다면 씻고 오겠다.”

바스락.

숲 속으로 사라지는 로얀을 보던 레아는 그가 처음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로얀이 사라지자 엘라임과 레아는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나무 밑으로 나란히 가 앉았다.

* * *

촤르륵!

졸졸졸.......

로얀은 신발을 벗고 시원한 냇가에 발을 담갔다. 어둠의 숲에 어울리지 않게 물은 깨끗했다.

망토 안에 있던 그의 옷은 많이 젖지 않았다. 담요처럼 몸을 감싸는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는 땅의 정령왕의 작품답게 훌륭한 방수, 방오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핏방울도 유리에 물 떨어지듯 미끄러져 내려 항상 깨끗함을 유지했다.

촤악.

얼굴에 물을 적신 로얀은 옷을 하나하나 벗고는 오랜만에 목욕을 시작했다.

냇가의 중앙은 로얀이 앉으면 목까지 올 정도의 깊이였다. 계곡의 물치고는 꽤나 깊다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묵은 때를 벗긴 로얀은 물기 어린 몸을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대충 닦고는 짐 속에서 새 옷을 꺼내 걸쳐 입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검은색 신발을 신고 두 개의 검을 허리에 찬 후 마지막으로 망토를 등에 두르려던 그는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따라올 것이냐?”

그의 차가운 음성이 맑은 냇가의 물소리와 함께 숲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숲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어둠의 정령 다크라고 했던가?”

후웅.

쏴아아......!

로얀의 말에 사나운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로 검은 구체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백 개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구체는 로얀이 말한 대로 어둠의 정령 다크였다. 모든 존재에게 배척당하고 다른 정령왕들이나 높은 존재들에게 수없이 소멸당했던 그들... 때문에 겁이 많기로 소문난 그들은 지난 6일 동안 로얀 일행을 따라다녔다. 로얀 일행이 어둠의 숲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따라다닌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있었지만, 그들은 애써 두려움을 몰아내며 로얀 일행을 따라다녔다. 한데 그토록 겁이 많은 그들이 왜 로얀 일행을 따라다닌 것일까?

엘라임도 어둠의 정령들이 자신들을 따라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소멸시키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녀도 이렇게 많은 수의 어둠의 정령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저희들이 보이시나요?]

검은 구체 속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은 어둠의 정령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로얀에게 말을 건 것이다.

“보인다.”

흔들!

그러자 이곳에 모인 어둠의 정령 다크들이 동요하며 서로서로 웅성거렸다.

[제, 제 말이 들리세요?]

“들린다. 한데 왜 우리를 따라다닌 거지?”

[그, 그건.......]

로얀은 두 손을 허리에 매여 있는 검 쪽으로 가져갔다.

“적이냐?”

[으아아......!]

모든 다크들이 조금씩 물러나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로얀의 동작 하나에 엄청 겁을 먹는 그들이었다.

로얀은 그런 그들의 반응에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

[자, 잠깐만요!]

“뭐냐?”

[당신에게서 정령왕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다른 정령왕들을 만나면 마냥 두려웠지만 당신은... 따뜻했어요.]

“.......”

한동안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건 로얀이었다.

“나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혼돈의 정령왕.......]

그런 정령왕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로얀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이 자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그들의 왕이라 생각했다.

잠시 로얀을 바라보던 어둠의 정령들이 이윽고 모두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희들의 왕이 되어주세요.]

“왕.......”

그 말과 함께 로얀의 머릿속으로 전대 다크로얀이 남겨둔 메시지가 스쳐 지나갔다.

[난 해본 적이 없지만 카오스가 나의 머릿속에 넣어준 지식에는 왕이 없는 정령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이 있다. 수하를 둔다면 폭주를 막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정령들은 자신들의 왕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아쉽게도 얻을 수 있는 정령은 정령왕이 없는 세 정령 중 한 가지 속성의 정령뿐이다.

로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정령들.......

“어떻게 너희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냐?”

[.......]

그 말은 곧 자신들을 받아준다는 의미라 어둠의 정령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그들 또한 그 방법을 몰랐기에 금세 다시 침울해졌다. 그때 로얀의 머릿속으로 또다시 전대 다크로얀의 메시지가 스쳐 지나갔다.

[나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내 앞의 존재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

그러자 로얀의 입에서 평소와는 다른, 신비한 힘이 깃들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내 앞의 존재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

파하하핫!

엄청난 빛이 로얀의 몸에서 폭사되는가 싶더니 그 빛은 세상을 한순간에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정말 한순간이었기에 어떠한 존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갑작스런 빛은 어둠의 정령 다크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칸 대륙에 퍼져 있는 모든 어둠의 정령들에게도 깃들었다. 그것은 눈을 한번 깜빡이는 것보다 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된 건가? 간단하군.”

그의 말에 어둠의 정령들은 웅성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자신들의 몸 속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니, 가장 큰 변화는 그들에게 그들만의 정령 기술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하급 정령인 그들에게 생긴 기술은 상대의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는 능력인 쉐도우라는 기술이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의 왕인 로얀에게도 자동적으로 생겨났다. 다른 이들의 기술을 복사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기술이 생긴 것이다.

로얀이 자신의 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이곳에 모인 어둠의 정령들이 그의 앞에 도열했다. 칸 대륙에 퍼져 있는 많은 어둠의 정령들은 자신들에게도 왕이 생긴 것을 언뜻 짐작만 할 뿐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으리라.

[혼돈의 정령왕이시자 저희들의 왕을 뵙습니다!]

백 명이 내뱉는 어린 소년의 함성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로얀은 정령들을 대표하는 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어둠의 정령을 지목하여 불렀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네가 대표로 한다.”

[네? 저, 정말요?]

드디어 자신들에게도 왕이 생겼다.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다. 그런 왕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정령이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이 이런 행운을 불러온 것이다.

[우우우우.......]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우아아앙! 절 시켜주세요!]

아직 어린 소년 같은 다크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조르기도 하고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들의 격렬한 반응에 로얀은 얼굴을 찌푸렸다.

“명령이다.”

왕의 명령, 그것은 절대적이었다. 수십만 년 동안 왕을 기다려온 어둠의 정령들은 그 어떤 정령들보다도 굳은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를 앞으로 다크로드라 부른다. 쉐도우로 나의 그림자 속에 항시 대기하고 있도록. 그리고 다크로드에 걸맞는 말투를 사용해라.”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말투는 딱 질색이었다. 이런 타입은 레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예, 나의 왕이시여!]

굳은 음성으로 말하는 로얀의 명령에 다크로드가 된 어둠의 정령도 그에 걸맞게 대답했다. 언제 아이처럼 말했었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다크로드.”

[예.]

“너희들을 어떻게 진화시키지?”

진화... 하급 정령인 그들을 어떻게 중급으로, 상급으로 진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령은 단계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단계마다 힘이 달라지는 생명체였다. 왕이 없을 때에도 어둠의 정령들은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하급 정령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왕이 생겼으니 하급부터 최상급까지의 정령이 모두 존재해야만 했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둠의 정령은 모든 존재의 감정에 부응합니다.]

“감정?”

[빛의 정령이 기쁨이나 행복 같은 감정에 반응한다면 저희는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에 반응합니다. 이것이 저희를 진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로얀은 눈을 감고 다크로드가 말한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의 참담했던 과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분노가 솟구쳤다.

순간, 주위에서 그를 지켜보던 어둠의 정령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의 몸에서 마족의 마기보다 더 검은 칠흑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무의식적으로 앞에 도열해 있는 어둠의 정령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칠흑 같은 기운이 모든 다크를 감싸는가 싶더니 곧 그들에게로 흡수되었다.

화아악!

잠시 후, 로얀은 눈을 떴다. 그리고 앞을 보고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의 앞에 있던 어둠의 정령 다크 백 명이 모두 모습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어른 주먹만 한 크기였지만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사신이 들고 다닌다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힘 또한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성공인가?”

스륵.

로얀의 중얼거림에 다크로드가 다가왔다. 그도 모습이 변해 있었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모든 다크가 중급 정령으로 진화한 것 같습니다.]

로얀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죽음의 낫이라는 기술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물끄러미 눈앞에 있는 다크로드를 관찰했다.

“어째서 중급으로밖에 진화하지 못한 걸까?”

[진화가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왕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감정이라 미약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고 슬퍼해야 강해진다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아니다... 재밌군.”

로얀은 다시 한 번 그들을 둘러보았다.

재미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뭉쳤으니 말이다. 로얀이 이들을 받아준 것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피식.

어쨌거나 지금까지 혼자라고 생각한 로얀에게 절대로 배신할 리 없는 어둠의 정령이라는 식구가 생겼다.

“나에게 허락된 모든 시간을 너희들과 함께하겠다.”

로얀의 말에 백 명의 어둠의 정령들이 바닥으로 내려와 부복했다.

“그리고 어둠의 중급 정령을 앞으로 데스라고 부르겠다.”

[예, 왕이시여!]

그들의 음성은 좀더 어른스러워져 있었고 느껴지는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이렇게 어둠의 정령들과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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