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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11/42)

2장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본디 세상은 카오스라는 절대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카오스는 수백 개의 차원계와 그 차원계를 가꾸고 이끌어 나갈 창조주라 불리는 신들을 만들었다.

수백 개가 넘는 차원계 중 하나인 플론테아... 이곳은 다른 차원계와는 달리 창조주 외에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져 있는 두 개의 차원 중 하나였다.

원래 차원계의 모든 속성과 세상의 흐름은 순리대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 플론테아와 나머지 하나인 네오스는 특이하게도 정령왕에 의해 세상의 흐름이 흘러갔다.

카오스가 정령왕이라는 것을 만든 건 많은 차원계를 만들던 중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의 흐름을 누군가 일일이 가꾸어준다면 그 세상은 좀더 아름답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이 생각 하나로 인해 플론테아와 네오스에는 네 명의 정령왕과 정령계가 만들어졌다.

카오스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플론테아와 네오스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세월의 흐름을 이어갔고 그 어느 차원계보다 아름답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오스는 이제 편안한 휴식에 들었다. 그의 긴 잠은 영원히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차원계와 창조주를 만들고 이제 자신만의 공간에서 긴 휴식을 취하고자 했던 카오스는 뜻하지 않게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의 몸 속에 남아 있던 힘이 문제였다. 카오스의 몸 속에 조금씩 남은 여러 가지 힘이 요동쳐 그의 잠을 방해한 것이었다.

카오스는 어서 다시 휴식에 들고 싶은 마음에 그 힘을 모두 모아 한 존재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의 몸 속에 있던 모든 속성의 힘이 모여 만들어진 그것은 정령왕과 성질이 가장 유사했다. 그랬기에 정령계가 있는 플론테아와 네오스 중 플론테아로 보내졌다. 전혀 다른 존재가 오면 그 차원계의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령계가 있는 그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이것이 절대신에게서 처음으로 버림받은 존재, 비극의 정령왕, 또는 혼돈의 정령왕이라 불리게 되는 다섯 번째 정령왕 다크로얀의 탄생이었다.

회색빛 머리카락에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는 탁한 눈동자, 날카로운 손톱, 그리고 등 뒤에 나 있는 거대한 날개... 그 칠흑 같은 날개는 눈부신 백색 깃털로 이루어진 천족의 날개는 물론이고 박쥐 날개 같은 마족의 날개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다크로얀의 날개는 검은 연기가 날개의 형상을 이루고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플론테아로 떨어진 정령왕 다크로얀은 조금씩이긴 하지만 절대신 카오스의 몸 안에 있던 여러 가지 힘이 복합된 존재답게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힘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태어나자마자 차원계의 모든 생명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대로 죽이고 부쉈다. 천신과 마왕이 합심해서 그를 공격했으며 지상의 수많은 생명체와 네 명의 정령왕까지 나섰지만 모두 그에게 소멸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플론테아는 수많은 차원계 중 처음으로 한 존재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다크로얀의 광분이 멈춘 것도 그때였다. 차원계가 붕괴되면서 일어난 충격 때문인지 그의 정신은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차원계가 부서졌음에도 그는 어두운 우주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미쳐야 했으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죄없는 존재를 죽여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카오스가 잠든 성전으로 향했다.

광활한 차원계의 틈... 그곳을 신들은 무한의 공간이라 부른다. 자신이 있던 차원계가 붕괴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다크로얀은 카오스의 성전을 찾아갔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카오스는 자신이 아끼던 차원계인 플론테아가 붕괴해 버리자 그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분노한 그는 자신을 찾아온 죄인 다크로얀을 직접 맞이했다.

카오스 앞에 선 다크로얀은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존재인 카오스에게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태어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놈은 나의 실수로 인해 태어난 존재다.”

카오스의 음성은 너무도 차가워 다크로얀은 몸을 떨었다.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존재 따위가 감히 그런 학살을 자행하다니!”

“쿡쿡쿡.......”

너무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오스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다크로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크하하하! 당신의 몸에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겨주리다! 그리고 이 세상에 혼돈의 정령왕은 어디에서든 존재할 것입니다!”

쿠아아앙......!

다크로얀은 온 힘을 끌어올리며 형체가 없는 빛 덩어리인 카오스를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런 다크로얀의 행동에도 카오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가거라, 나의 실수로 태어난 불쌍한 존재여. 소멸!”

파하핫!

카오스의 손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그를 향해 돌진하던 다크로얀의 몸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크르륵... 크아아악!”

푸욱!

다크로얀의 날카로운 손톱이 카오스를 관통했다. 절대신의 몸에 손을 박아 넣은 그는 카오스의 말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카오스의 몸에 오른팔을 관통시킨 다크로얀은 아직 그 오른팔과 영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카오스는 이제 오른팔도 소멸되고 영혼의 소멸만을 기다리고 있는 다크로얀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다크로얀의 영혼 속에는 카오스 자신의 잡다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카오스는 그를 정령계가 있는 나머지 차원계인 네오스로 보내 그곳의 절대적인 어둠 속에 봉인시켜 버린 것이다.

실수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식이었다. 또한 혼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자신과 아주 흡사한 생명체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을 사는 동안 처음으로 자신의 육체에 공격을 가한 존재가 아니던가?

카오스는 자신의 성질과 흡사한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그를 풀어놓는다면 이전과 같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또다시 한 차원계를 소멸시켜 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생각하며 깨우쳐 진정한 정령왕으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네오스로 보내면서 어둠 속에 봉인시켜 놓은 것이었다.

다크로얀은 봉인된 이후로도 카오스가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로얀은 기나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는 지금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떠올린 것은 전대 다크로얀으로부터 받은 그의 기억이었다.

모든 존재의 부모라고 불리는 카오스에게서 버림받은 존재인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로얀은 자신이 전대 다크로얀에게 선택받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도 신에게서 버림받았지 않았던가?

사박사박.......

그의 발끝에 낙엽이 이리저리 채였다. 이곳은 가을의 대륙인 만큼 낙엽은 어딜 가든 존재했다.

사박.

로얀의 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긴 상념에 빠져 있다 보니 자신 앞에 누군가가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가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로얀은 자신 앞에 있는 존재에게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어린 꼬마 아가씨였다. 자신을 페어리들의 여왕이라 밝혔던 분홍빛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인형 같은 외모의 레아였다.

레아는 평소 활달하고 발랄한 성격이었지만 로얀 앞에서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7만 년을 넘게 살아온 그녀였지만 어쩐지 로얀만큼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슬픈 그의 분위기가 무서웠다.

사박사박.......

로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레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사박사박.......

그러자 레아가 짧은 다리로 로얀의 뒤를 총총히 따라갔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정령왕이에요?”

멈칫.

로얀의 움직임이 멎자 레아의 움직임도 덩달아 멎었다.

“어떻게 알았지?”

“헤헤... 페어리들은 몸을 잘 숨길 수 있거든요.”

로얀은 황혼의 궁에서 스스로를 정령왕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이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날 지켜보고 있었군.”

그의 눈동자가 매섭게 변했다. 그러자 레아가 얼른 말을 돌렸다.

“이제 뭐 할 거예요?”

로얀은 그녀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기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도마뱀을 잡으러 간다. 그러니 이제 귀찮게 하지 마라.”

그러나 레아는 계속 로얀의 뒤를 따라가며 도대체 도마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도마뱀이란 단어에 레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존재는 셋이 있었다. 불의 하급 정령인 샐러맨더, 몬스터인 리자드맨, 그리고 그녀가 봤을 때 아무리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인간인 로얀이 죽이기에는 힘든 존재인 드래곤이 그 후보였다.

로얀이 정령왕이라고 밝히는 것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지만 레아는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페어리의 여왕으로서 보통 인간의 몇 배를 살아왔지만 혼돈의 정령왕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박사박.......

레아는 고민 끝에 후보 중에서 한 존재를 골랐다.

“리자드맨이죠?”

그녀는 그날 로얀과 헤어질 때 따라오지 말라던 로얀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 몰래 따라갔다. 그리고 황혼의 궁에서 그가 보인 실력과 죽었다가 살아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정령왕이라 칭한 것이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진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해 결국 로얀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로얀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나 레아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드래곤이다.”

흠칫.

생글거리던 레아의 작은 몸이 흠칫 떨려왔다. 설마 그 도마뱀이 드래곤일 줄이야!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레아는 소리나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해츨링!”

“마법과 브레스를 쓰는 해츨링이 있던가?”

로얀은 자신도 모르게 어린 꼬마에게 계속 휘말려 대답을 해주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와 빨리 헤어지고자 빠르게 걸었지만 레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해츨링이 아니라면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드래곤은 못 죽여요. 마법을 난발하고 브레스를 쏘아대는 드래곤을 어떻게 죽여요? 그래도 진짜 갈 거예요?”

레아의 입에서 브레스라는 말이 나오자 로얀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드래곤의 브레스도 복사할 수 있을까?’

현재 자신은 한 번 죽고 난 뒤로 6서클의 마법까지 복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서클 마법을 브레스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브레스는 적어도 9서클 이상의 마법과 맞먹는 것으로 이시스의 절반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로얀은 브레스를 복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드래곤 산맥으로 가는 것은 미뤄두기로 마음먹었다. 카엔과 이리아에게 레이나가 당한 것과 똑같이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가 이곳 가을의 대륙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서 힘을 길러야 했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봄의 대륙으로 간다. 따라오면 죽이겠다.”

로얀의 말에 레아의 머릿속이 빛으로 번뜩였다. 뭔가가 떠오른 것이었다.

“드래곤과 원한 관계가 있어서 힘을 기르려는 거죠?”

“.......”

“그럼 봄의 대륙의 빛의 숲으로 가요.”

빛의 숲은 렌과 세리나가 간, 엘프들의 고향이었다.

사박사박.......

로얀은 레아의 말을 무시했다. 그가 봄의 대륙으로 가는 것은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지 그런 곳에 놀러(?)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아, 빛의 숲 속엔 칸 대륙에 세 명밖에 없다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한 명 있는데.......”

움찔.

레아가 혼잣말로 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녀를 무시하고 자신의 갈 길만 갈 생각을 하고 있던 로얀은 단번에 무너져 버렸다. 자신과 동급인 상대와 싸우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련이 된다.

로얀의 반응을 본 레아의 얼굴에 회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헤에! 길 모르죠?”

가을의 대륙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로얀이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 턱이 없었다.

“제가 길을 안내할 테니 몇 가지 부탁만 들어줘요.”

“뭐지?”

“첫째, 저와는 이제 일행이니까 일행으로서 대우해 줄 것.”

“죽지는 않게 해주지.”

“쯧쯧! 전 페어리들의 여왕이라고요. 저도 충분히 강해요.”

팔을 걷어붙이고 그것을 허리에 가져다 댄 채 말하는 레아의 말은 전혀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귀엽게 보이기는 했지만 무슨 힘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아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에헴! 둘째는 호칭.”

“......?”

“겉으로 보기엔 제가 어려 보이지만 저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그냥 로얀이라고 부를게요. 덤으로 말도 놓게 해줘요.”

황혼의 궁에서부터 그를 쭉 지켜보았던 그녀이기에 그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로얀이 싸우는 도중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 두 가지로 끝인가?”

끄덕끄덕.

“알겠다. 그리고 동행은 그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만날 때까지만이다.”

“꺄아! 로얀, 우리 잘해 봐. 헤헤.......”

레아는 나이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그렇게 묘한 그들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배고프다.......”

타탁.

한 어린 소녀의 처절한(?) 외침 뒤에 불꽃이 바스락거렸다.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와 흑안의 다크로얀이라고 불리는 로얀은 꽃의 대륙이자 봄의 대륙이라 불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레아의 안내에 따라 여행을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난 밤,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영을 하고 있었다. 한데 아직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레아는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직접 먹을 것을 구하러 가기는 싫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로얀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런 레아의 말에도 로얀은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레아는 로얀의 정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큼직한 눈동자에 로얀의 모습이 담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배고파.......”

“.......”

로얀은 인상을 찌푸리며 육포 몇 개를 건네주었다.

“히잉, 다른 정령왕은 이렇게까지 매정하지는 않는데... 로얀은 가짜야?”

레아가 육포를 거부하자 로얀은 그것을 도로 집어넣으면서 나무에 등을 기댔다. 시끄러운 소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꿈이라는 장소를 택한 것이었다.

레아는 눈을 감는 로얀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곧 다른 정령왕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걱정도 안 하고.......”

“무슨 말이지?”

로얀의 눈동자가 다시 떠졌다.

“저번에 숨어서 로얀을 볼 때 거기에 나 말고 도마뱀들도 있었어.”

레아의 말에 그의 눈썹이 휘어졌다.

“드래곤?”

“에휴, 그놈의 드래곤 타령 좀 그만 해. 난 불의 하급 정령 샐러맨더를 말한 거야.”

로얀이 그날 황혼의 궁에서 거대한 파이어 볼을 사방에 날리는 바람에 불꽃이 터졌었다. 그러니 엄청난 열기를 좋아하는 불의 하급 정령들이 거기에 있었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니 그 녀석들도 로얀이 정령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거야.”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건가?”

“당연하지. 정령왕을 사칭하는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도마뱀들은 그 바람둥이 변태한테 알렸을 테니 그 변태는 분명 나타날 거야.”

뒤에 바람둥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레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로얀은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듣고 싶어 레아를 쳐다보았다. 그가 계속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씩씩거리던 레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좋았어!’

“배가 너무 고파서 더 이상 말을 못 하겠어.”

“.......”

“배고파.......”

스윽.

로얀은 결국 자신의 새로운 삶인 정령왕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헤헤! 요정은 신선한 과일이 주식이야.”

숲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사라지면서 나무 한 그루를 주먹 모양이 선명하게 찍힐 정도로 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레아가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 * *

한 시간.

“아아, 언제 오는 거야.......”

두 시간.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아아, 배고프다... 심심하다.......”

세 시간.

“우씨, 설마 날 버리고? 에이! 설마 나처럼 예쁜 소녀를... 로얀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레아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화악.

그녀의 몸 주위로 밝은 빛이 퍼져 나왔다. 주위에 있을 작은 요정들에게 로얀의 위치를 묻기 위함이었다.

요정들이 알려준 로얀의 위치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레아는 씩씩거리며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 * *

“죽어라......!”

피를 뚝뚝 흘리며 다 죽어가는 기사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는 시퍼런 검날이 번뜩였다.

부욱.

기사의 정면에 서 있던 로얀이 허리를 약간 숙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기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얀은 황혼의 궁에서와는 달리 에리오네는 꺼내지 않고 다크리온만 들고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 소드가 아닌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만으로 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허리가 두 동강 난 채 죽은 기사 주위에는 그와 같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로얀은 살아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수수한 옷을 입었지만 기품이 흐르는 귀부인 한 명과 척 보기에도 귀족의 자제처럼 보이는 소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들 이외에도 귀족처럼 보이는 어린아이들과 귀부인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다섯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타닥.

그들 모두가 여기서 야영을 하고 있었는지 한쪽에서는 커다란 모닥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많은 기사들이 죽고 남은 다섯 명의 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파핫!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기사들은 로얀을 향해 몸을 던졌다. 로얀을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훙.......

부욱.

“커컥!”

로얀은 달려드는 기사들의 검을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처럼 부드럽게 몸을 움직여 피하고는 그들을 베어버렸다. 붉은 피가 다크리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자 한 중년의 기사가 귀족들로 보이는 자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어서 피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황태자 전하만큼은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황태자... 지금 이 땅은 이론 제국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크아아!”

중년의 기사는 노장의 힘을 발휘하여 힘차게 돌진했다. 그러나 로얀의 표정은 여전히 암흑 그 자체였다. 그의 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핏빛 이슬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스팟!

부욱.

“크억! 제, 제국이여 영원하라!”

털썩.

“꺄아아아......!”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황태자라 불린 소년은 몸을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터벅터벅.......

로얀은 레아의 부탁(?)으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왔을 때 멀리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보았다. 그것을 본 로얀은 이런 숲 속에서 과일이나 열매를 따러 다니는 것보다는 저곳에서 야영하고 있을 이들에게 얻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곳에서 야영하던 이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하며 모두 검을 빼 드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게다가 이제 그들은 몸을 피하라고 소리를 질러 로얀에게 어린 소년의 정체를 알려주기까지 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어린 소년은 바로 이론 제국의 황태자였고,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제국의 마지막 혈손들이었다.

스릉.......

에리오네가 답답한 검집 속에서 나와 빛을 뿌렸다.

터벅.

“흑흑.......”

번뜩.

츄하학......!

슬피 울던 여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붉은 피가 대지를 적셨다. 그러나 로얀의 검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의 눈동자 또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꺄아아악!”

“오, 신이시여!”

부욱! 스걱!

푸화학......!

그는 검을 천천히 휘두르며 한 명, 한 명 죽여갔고 그럴 때마다 붉은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터벅터벅.......

이제 그는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엘레나를 만나거든 사죄하라.”

덜덜덜.......

“으흐흐흑!”

스걱!

푸화확!

로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허공을 수놓은 피는 황태자의 것이 아닌 황가의 한 여인의 것이었던 것이다.

“으아아아! 어, 어머니!”

황태자는 죽은 여인의 시체를 잡고 오열했다. 그녀가 바로 이론 제국의 황후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려 로얀의 검을 받았던 것이다.

로얀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황태자라는 소년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괴로운가? 나도 나의 여동생을 잃어 괴로웠다. 하지만 너의 괴로움은 길지 않을 것이다.”

스윽.

로얀의 검이 들어 올려졌지만 황태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죽은 황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럭.

“자, 잠깐!”

로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숲 속에서 나온 이는 레아였다.

스걱!

푸화화확!

어린 소년의 머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이론 제국 황가의 마지막 핏줄인 그가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어, 어떻게... 로얀!”

레아의 음성과 그녀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려왔다.

* * *

가을의 대륙에서 봄의 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드래곤 산맥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대륙 간의 이동을 막는 것은 신의 뜻에 위배될 수도 있는 일인지라 그들은 산맥의 양쪽에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두었다.

그 중 한 곳인, 가을의 대륙과 봄의 대륙을 잇는 통로를 향해 두 남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흑안의 사내와 매우 귀엽게 생긴 소녀... 로얀과 레아였다.

“내가 잠깐 멈추라고 했는데도 검을 휘두르고 말이야!”

그날, 이론 제국의 황태자를 죽인 뒤로 뚱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레아는 다음날 아침부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로얀이 짤막하게 원수였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핀잔은 계속되었다.

이론 제국의 황태자를 죽인 곳은 드래곤의 통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로얀을 피해 봄의 대륙으로 갈 생각이었던 듯했다.

레아의 끊임없는 투덜거림에 로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가 불만이지?”

레아는 로얀이 멈추어 서자 덩달아 멈추어 서며 그를 째려보았다.

“어차피 나에게 인간의 목숨은 중요한 게 아냐. 하지만!”

“......?”

“왜 음식을 구하러 가서 사람을 죽였어? 아무리 원수라도 나의 말에 잠깐이나마 멈춰줄 수는 있었잖아!”

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내심 로얀이 걱정되었다. 그녀가 보기에 로얀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동요 없이 저항도 못 하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동료니까.”

“.......”

약간(?)은 황당한 답변을 한 레아는 로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꼭 그렇게 죽여야 해?”

로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할 존재를 죽였을 뿐이다. 뭐가 문제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의 말에 레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것이 진심일까?

“휴우... 알겠어.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죽이지 말라고 하면 절대 죽이면 안 돼.”

“어째서?”

“생각해 봐. 그냥 장난으로 널 건드린 사람을 넌 어떻게 하겠어?”

레아의 말에 로얀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답은 물론 ‘죽인다.’였다. 장난이건 뭐건 자신에게 검을 들이민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 멈칫거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면? 정말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장난으로 날 건드릴 만큼 친분이 있는 존재가 나에게는 없다.”

물론 얀이 있었지만 그는 로얀에게 해가 될 장난은 치지 않는 친구였다.

로얀의 말에 레아는 순간 흠칫했다.

‘윽! 로얀을 묶어두기 위한 완벽한 작전이.......’

레아는 여행을 하는 동안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로얀의 성격을 뜯어 고치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여행은 피의 여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얀의 행동을 제어하리라는 이 생각은 황태자가 죽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였다.

“아, 암튼! 그, 그냥 그렇게 해줘. 대신 어둠의 숲에서 몬스터를 만나지 않고 빛의 숲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로 안내할게.”

“어둠의 숲?”

“응. 거긴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거든.”

로얀은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름길은 사양하지. 그냥 정면으로 돌파한다.”

“에엑! 거기 몬스터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못생겼는데!”

‘안 돼! 여기서 지면 난 영영 로얀에게 끌려(?) 다닐 거야!’

그녀의 권력(?)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생기려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로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을 묶어두려는 레아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레아의 생각을 간파하고 있었다.

“걱정 마라. 네가 동료로 있는 동안은 네 말대로 할 테니. 그러니 어둠의 숲을 정면 돌파한다. 그리고 정령왕에 대해 말해 줬으면 한다.”

로얀은 몬스터와의 싸움으로 실전 경험을 쌓을 생각이었다.

“으응.......”

레아는 자신의 생각을 로얀이 알고 있는 듯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그렇게 봄의 대륙으로 가는 통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길을 가는 동안 레아는 로얀에게 정령왕에 대해 말해 주었다.

먼저 땅의 정령왕인 노아스는 로얀에게 검을 주었던 대장간의 그 정령 노인이었다. 그는 정말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할아버지 같은 정령왕으로 밭을 일궈 뭔가를 키우는 것을 좋아했고,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정령이었다.

그리고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은 여성체로 매우 냉랭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는 매우 자상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여성체 여인이었다. 하나 그녀의 연인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뭔가 잘못할 때면 엘라임보다 더한 냉기를 뿜는다고 레아는 말했다.

레아는 다른 정령왕들은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준 것에 비해 불의 정령왕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 주지 않았다. 로얀으로서는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어떤 인물인지 제일 궁금했는데 말이다.

“이프리트는 어떤 존재지?”

레아는 로얀의 말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그 귀여운 얼굴에서 험악한 표정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천하제일의 바람둥이에, 최악의 아저씨야.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능글거리는 미소... 으으! 느끼한 아, 저, 씨!”

로얀은 그녀의 말에 저 멀리 보이는 이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능글거리는 미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렇게 생겼다는 건가.”

“응? 어, 똑같이 생겼... 꺄아악!”

그 남자는 이미 로얀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어렸다.

“훗! 오랜만이구나, 꼬마 할망구.”

“이익! 이 변태! 저질! 바람둥이!”

“하하하! 내가 너무 반가워서 비명까지 질렀으면서.”

“그건 절망의 비명소리야!”

그때, 로얀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인가?”

“호오... 너로구나.”

타오르는 불꽃같이 붉은 머리에 붉은 눈, 조각 같은 얼굴에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이프리트가 로얀의 외모를 훑어보았다.

로얀을 기다리고 있던 이프리트는 노아스가 만든 망토를 두른 로얀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기다린 건가?”

“하하, 물론이지!”

로얀은 그를 경계하며 눈동자를 빛냈다.

“후후후... 스스로를 혼돈의 정령왕이라고 칭했다고? 게다가 노아스 그 영감탱이한테 들으니까 성검과 마검을 동시에 들 수 있다며? 정말 특이한 녀석이란 말이야?”

“용건이 뭐지?”

“시험!”

“시험?”

이프리트는 노아스로부터 로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정령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네가 정령왕이 맞는지 아닌지를 말이야. 합격하면 정령왕으로 인정해 줄게.”

씨익.

화르륵.

이프리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고 그의 손이 불길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싸움을 거는 그의 행동에 레아는 격분하여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저씨!”

레아는 기가 막혔다. 정령왕 시험이라니!

“시끄럽구먼. 발육 부진의 꼬마는 저리 좀 가 있으렴.”

이프리트가 레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젓자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프리트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나의 공격을 받아봐라.”

로얀의 두 손이 검을 향해 나아갔다.

“너에게 시험을 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날 공격하면 죽이겠다.”

화르르륵!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꽃이 강하게 피어오름과 동시에 로얀의 두 검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우웅.......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백색 오러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프리트의 손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휘오오오.......

가을 바람이 한차례 불어 두 사람 사이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자 로얀의 긴 흑발이 살짝 휘날리고 이프리트의 불꽃이 출렁였다.

파핫!

두 사람은 마주보며 동시에 달려갔다. 그와 함께 이프리트의 정령왕 시험이라는 황당한 결투가 시작되었다.

화르륵!

이프리트의 주먹에서 불꽃이 출렁이며 뻗어 나왔다.

콰항!

다크리온에 부딪힌 불꽃이 폭발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청난 고온의 열기를 느꼈을 것이다.

스팟!

그때, 로얀의 에리오네가 이프리트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히죽.

이프리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그는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콰가가강......!

그의 마구잡이식 공격은 웃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화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자신을 덮쳐오는 불꽃을 향해 두 개의 검을 풍차처럼 돌렸다.

화르르륵!

두 개의 검이 일으키는 풍압에 불꽃들이 퉁겨 나갔다. 이프리트의 눈동자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그것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로얀은 이런 식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검을 허공을 향해 강하게 그었다.

콰가가강......!

화륵!

백색 오러에 불꽃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흩어졌다. 로얀은 불꽃들이 잠시 멈추자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그가 피한 자리에 불꽃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이프리트는 로얀이 피하든 말든 충분히 다시 공격할 수 있었지만 무슨 생각인지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령왕씩이나 되는 인물이니 하늘을 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화르륵!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꽃이 퍼져 나왔다. 붉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제 장난은 끝이다. 파이어 레인!”

그의 붉은 눈동자도 덩달아 타오르는 듯했다.

화르륵!

엄청난 열기가 이프리트의 몸에서 뿜어지고 스멀거리던 아지랑이가 로얀이 있는 지면으로 날아갔다.

콰가가강!

불의 비가 하늘에서 내렸다. 화염 계열 마법 중 하나인 7서클의 파이어 레인이었다.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는 불 계열의 모든 마법을 부릴 수가 있었다.

파팟!

보통 사람들보다 감각이 월등히 발달한 로얀에게 날아오는 뭔가를 피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저기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그냥 피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으나 불의 비를 피하면서 이프리트가 있는 곳까지 간다는 것은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령왕의 불꽃은 지면과 부딪치면서 큰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빛 막 안에서 로얀과 이프리트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레아는 인상을 구겼다.

이프리트가 쏘아대는 불꽃에 주위는 불바다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리 그녀라 해도 맨몸으로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랬기에 은빛 막을 쳐야만 했는데,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그녀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이프리트가 못마땅해 저리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드래곤들의 영역인 이곳을 부수는 것은 곧 드래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레아는 은빛 막 안에서 허공에 둥둥 뜬 채 즐겁게 불꽃의 비를 뿌리고 있는 이프리트에게 외쳤다.

“변태 아저씨! 미쳤어?”

“하하하! 꼬마 할매, 넌 거기서 구경이나 해. 우하하하.......”

“이익! 여긴 드래곤의 영역이라고!”

“하하하! 걱정 마. 드래곤 로드에게 그걸 해주기로 했거든. 여기 숲을 볶아 먹든 튀겨 먹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

이프리트는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하늘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레아는 한숨을 쉬었고, 로얀은 여전히 불꽃을 피해 뛰어다녔다.

드래곤 로드에게 해주기로 했다는 그것이란 바로 중매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프리트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중매를 서주고 있었다. 마족이나 천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신들 중에도 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진 커플이 많았다.

이프리트는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언어 구사 능력도 뛰어났고 매너도 좋았기 때문에 많은 여자들에게 호감을 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웬만큼 예쁜 여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발은 하늘만큼 땅만큼 넓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웬만큼 예쁘다는 기준은 실로 심오한 것! 덕분에 그가 취미로 하고 있는 중매는 백발백중이었다.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프리트가 다른 남성체에 소개시켜 주는 여인들은 모두 그와 몰래 사귀었던 여인들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남성체들이 알았다면 당장 이프리트를 죽이려 들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명 그것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레아였다. 물론 레아도 이프리트를 만나고 한참 뒤에나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때 레아는 이프리트가 중매를 하면서 남성체들에게 뭔가를 받아먹는 것을 보고는 그의 오랜 연인인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에게 달려가 고자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와아,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여기서 싱긋 웃는 실피드. 그녀는 이미 이프리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프리트가 정말 바람을 피운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실피드에게 발각되어 천하의 쾌활남 이프리트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기저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던 레아는 그 후 이프리트의 여자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차리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는 그 사실을 실피드에게 알리기보다는 그것을 빌미로 오랜 세월 동안 천족이 간식으로 먹는 맛있는 사탕을 받아먹고 있었다.

레아는 둘의 싸움을 말리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레아는 그것이 이상했다. 분명 로얀은 황혼의 궁에서 파이어 볼 비슷한 것을 주문도 없이 마구잡이로 날렸다. 거기다 6서클의 기가 라이트닝도 날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법을 써서 하늘을 날아 싸운다면 정령계가 아닌 이곳 중간계에서는 절반에 해당하는 능력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이프리트와 동수를 이룰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다니.......

파팟!

로얀이 높이 뛰어올라 떨어져 내리는 불꽃을 마치 계단처럼 밟고 올라갔다. 그는 마침내 강행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의 발끝에 밟힌 불꽃이 찌그러지기도 전에 그는 다른 불꽃을 밟았다. 쾌속한 그의 움직임에 이프리트는 순간 흠칫했다.

“죽어라.”

스팟!

화르륵!

쾅!

로얀의 몸이 이프리트의 몸으로 파고듦과 동시에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엄청난 열기가 파도처럼 로얀을 향해 덮쳐왔다.

“크아아악!”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츄아아악!

로얀은 지면으로 떨어진 후 뒤로 쭉 밀려났다. 그의 발에 흙이 밀려 땅이 파였다.

옷에 여기저기 불이 붙은 것 빼고는 상처 하나 없는 로얀은 먼지를 털 듯 옷에 붙은 불꽃을 꺼트렸다.

비명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프리트였다. 그의 몸은 어느새 토막토막 잘려 있었다.

스윽.

로얀은 허공에 잘려 있는 이프리트의 몸을 보며 자신의 검을 집어넣으려 했다. 이제 곧 그의 시체가 지면으로 떨어지리라.

“로얀!”

멈칫.

검을 검집에 반쯤 넣고 있던 로얀은 레아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뜨거운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콰카카캉......!

“크으윽, 더럽게 아프네! 너 설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거야?”

이프리트는 자신이 쏘아 보낸 불덩어리를 로얀이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는 것을 보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봐, 너 정령왕 맞아? 정령이 죽는 거 봤어? 정령은 죽는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소멸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신의 육체에 상처를 낼 수 있는 마검과 성검이라지만 정령왕은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는 한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야.”

이프리트의 몸이 불꽃에 휩싸이더니 상처 하나 없는, 싸움을 시작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검과 성검은 확실히 에고 소드나 여타의 마법검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 즉 죽지 않는다는 신의 육체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검으로도 이프리트를 죽이지 못한 것은 이프리트가 정령이었기 때문이다.

이프리트의 말처럼 정령은 죽지 않는다. 하급 정령 실프를 예로 들어봤을 때, 실프를 검으로 베어 사라지게 만든다 해도 그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갈 뿐이지 소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령을 죽이려면 정신체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소멸시켜야 했다. 불꽃은 잘라도 여전히 불타오르는 것처럼 조금 전처럼 단순히 육체를 토막내 봐야 어느 정도 고통만 줄 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것이다.

뜨거운 불꽃이 걷히고 두 개의 검을 잡고 있는 로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옷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사이로 피가 비쳤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너무도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자, 제2라운드다!”

이프리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의 팔이 뜨겁게 타올랐다.

화르륵!

이프리트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모습에 레아는 로얀이 걱정되었다. 그녀가 보기엔 로얀은 사람이었다. 인간은 정령왕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로얀! 어서 마법을 사용해!”

레아는 로얀이 물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이프리트에게서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긴, 만약 보통 인간이라면 물의 마법을 쓴다고 해도 이프리트의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로얀은 레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좀 전에 7서클의 파이어 레인은 수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자신은 6서클의 마법까지 복사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령왕인 이프리트가 지금 쓰는 것은 마법일까?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의 순수한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힘이 반감되어 있는 정령왕이었지만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불끈 말아 쥐었다. 그의 손끝으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이프리트의 웃음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정령왕은 피를 흘리지 않지, 이 가짜야.”

화르륵!

이프리트는 로얀을 향해 덮쳐갔다. 그 모습은 정말로 뜨거운 태양이 강림하는 것만 같았다.

‘도전이다!’

로얀은 이프리트의 불꽃을 보았다. 과연 정령왕이라는 대단한 존재의 힘을 복사할 수 있을까?

콰가가강......!

이프리트의 몸이 떨어지고 로얀의 검과 맞부딪쳤다. 엄청난 불꽃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 뜨거운 불꽃을 보며 이프리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재가 되어 화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마, 말도 안 되는!”

화르르륵!

이프리트는 그와 대등한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로얀을 보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에 백색 오러가 둘러쳐져 있고 그 주위를 타오르는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다. 이프리트가 몸으로 뿜어대는 것을 로얀은 검으로 펼친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레아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불의 정령왕인 자신에게 불로 공격하려 하자 이프리트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로얀이 자신과 대등한 힘을 가진 불을 내뿜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 로얀의 두 검이 내뿜는 화염은 이프리트가 내뿜는 화염과 대등했다. 불의 정령왕이 내뿜는 화염과 느낌도 열기도 비슷한 화염! 결코 인간이 내뿜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있단 말인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제까지 수십만 년 동안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프리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핫!

화르륵!

이프리트가 너무 놀라 이런저런 생각에 잡혀 있을 때 로얀이 몸을 날렸다. 그러자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내뿜는 화염이 이프리트를 향해 덮쳐왔다.

“큭!”

이프리트는 급히 화염을 내뿜으며 양 옆구리로 들어오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주먹으로 쳐냈다.

쾅! 쾅......!

엄청난 화염끼리 부딪치다 보니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죽지는 않으나 고통은 느끼는 이프리트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폭발 속에 그의 몸이 흔들렸다.

커다란 폭발에 이프리트는 물론이고 분명 로얀도 그만큼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 로얀은 바닥에 떨어진 직후 재도약해 이프리트를 덮쳤다. 그의 두 개의 검은 여전히 이글거리는 화염을 머금고 있었다.

‘같은 정령왕이라 그런가? 정령왕의 힘은 복사가 되는군.’

화염 속에서 로얀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평범한 인간이 괴물로 변한 자신의 존재를 납득하는 과정은 쓸쓸한 길이었다.

화르륵!

콰가가강......!

“크윽!”

두 사람이 충돌했는데 이프리트만이 신음을 내뱉었다. 화염의 농도는 같았지만 로얀에게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가 화염을 내뿜는 심지가 백색의 오러라는 점이었다.

타탁!

다시 지상으로 떨어진 로얀은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이번 공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온 힘을 끌어 모았다. 이번 한 방으로도 정령왕을 소멸시킬 순 없겠지만 정령계로 돌려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크아아아!”

화르르르르......!

이프리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일까? 괴성과 함께 그의 온몸에서 화염이 출렁였다.

타탁!

그는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오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로얀의 엄청난 능력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레아는 분노한 이프리트를 보며 긴장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심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은 지상에서도 정령왕 본신의 힘을 모두 사용할 방법이 있었다. 다만 3분 후에는 강제로 정령계로 보내진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은 정령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레아는 백 년간 정령계에 틀어박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프리트가 본신의 힘을 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본신의 힘을 쓴다면 아무리 로얀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이프리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로얀을 주시하며 다가왔다.

로얀은 두 개의 검을 고쳐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화르르륵!

한데 이상하게도 로얀에게 다가갈수록 이프리트의 몸에서 뿜어지는 화염이 잦아들고 있었고, 덩달아 로얀의 검에 맺힌 화염도 잦아들었다.

이프리트나 레아는 로얀의 화염이 잦아드는 이유가 이프리트 쪽에서 먼저 힘을 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로얀은 이프리트가 내뿜는 화염을 그대로 복사해 쓰고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프리트의 몸에서 흐르던 화염이 모두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준수한 청년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로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얀은 여전히 검을 든 채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화염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의 백색 오러는 여전히 출렁였다.

무겁게 닫힌 이프리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살짝 올라갔다.

“항복.”

휘오오오.......

그의 단 한마디가 주위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 석상 같은 로얀조차 휘청거릴 정도로 맥 빠지는 소리였다. 흥미진진해지고 있는 싸움을 지켜보며 걱정하고 있던 레아의 황당함은 하늘을 뚫고 우주를 날고 있었다.

“하하하! 아무리 날 베어봤자 난 죽지 않으니까 괜히 힘 뺄 필요 없잖아?”

“정령계로 돌려보낼 순 있겠지.”

“이봐, 친구. 어떻게 그런 섭섭한 말을!”

“친구?”

“하하! 기뻐해. 널 정령왕으로 인정하겠어. 우하하하......!”

이프리트는 하늘을 향해 화통하게 웃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쉰 그는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하아! 정령계에서는 말이야... 우리 실피드는 엘라임과 놀지, 그놈의 영감탱이는 꽃이랑 놀지... 난 뭐냐! 하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같이 술도 마시고 이것저것(?)도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거야!”

로얀은 두 개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프리트가 한 말이 맞았다. 그는 어차피 죽지도 않는 괴물이니까.......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그렇게 쉽게 인정하지?”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황당한 존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정할 수 있을까?

“험험! 그건 네가 쓴 화염 때문이야. 그 화염은 나의 것과 똑같은 기운과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 불의 정령왕인 내가 쓰는 것과 똑같은! 이거면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어?”

물론 그것만으로는 정령왕으로 인정하긴 힘들다 할 수 있었지만 워낙에 정령계에서 왕따당하다시피 하는 그는 친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여자를 더 좋아하는 그였지만 정령계에는 그와 놀아줄 여자가 실피드 외에는 없었다.

엘라임은 이프리트를 극도로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정령계에서 작업 들어갔다가는 곧바로 실피드의 바람의 칼날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이프리트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실피드였던 것이다.

로얀과 이프리트 간의 싸움이 정리되려 할 때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왔다.

타타탓!

퍽!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와 이프리트의 복부에 주먹을 꽂은 것은 레아였다. 그러나 그녀의 주먹에 고통스러워할 그가 아니었다.

“하하하! 뭐야, 그렇게 내게 안기고 싶었어?”

이프리트가 품안에 있는 레아를 안으려는 순간 그녀는 잽싸게 빠져나왔다.

레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게 항복할 거면 왜 화난 것처럼 연기한 건데!”

“아하... 그건 연출이야. 멋지잖아? 하하하!”

“이, 이 사이코 정령왕!”

레아의 격한 반응에 이프리트는 혀를 찼다.

“쯧쯧! 역시 어린 할망구는 이런 것도 이해 못 해요. 그건 그렇고 너희들 일행에 나도 끼워주라.”

그의 반응에 레아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외쳤다.

“죽어도 안 돼! 절대 안 돼! 불가! 불가!”

터벅터벅.

이프리트는 레아의 말을 무시하고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나도 끼면 안 될까?”

레아는 로얀이 절대 허락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이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뜻밖이었다. 그의 말에 이프리트는 레아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고 보너스로 브이 자를 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으윽! 이건 말도 안 돼......!”

레아의 외침이 드래곤 산맥에 울렸다.

그리하여 로얀의 일행에 이프리트도 끼게 되었다.

한데 로얀이 이프리트를 동료로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 녀석이 옆에 있으면 좀 전의 화검을 다시 쓸 수 있겠지.’

그는 이프리트를 무기로 여겼다. 아니, 불을 피울 수 있는 부싯돌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답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프리트는 레아를 놀리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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