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핏빛 불꽃(2권) (10/42)

1장 핏빛 불꽃

핏빛 불꽃

언제나 이론 제국에서 열리는 파티의 무대가 되었던 황혼의 궁에는 지금 수백 명이 넘는 기사들과 파티를 즐기던 귀족들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한 남자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팔이 잘리고 허리가 두 동강 난 로얀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귀족가의 여인들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고, 귀족가의 나이 어린 자제들은 두려움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감히 로얀의 시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었다.

샤이니어스는 로얀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두 자루의 명검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뚜벅뚜벅.......

샤이니어스는 바닥을 적시고 있는 로얀의 피를 밟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발에 밟힌 로얀의 피가 작은 방울을 여러 개 만들며 그의 바지와 근처의 바닥으로 튀었다.

고오오......!

그 순간, 엄청난 기류가 로얀의 시체 주위를 감돌았다.

흠칫!

샤이니어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범상치 않은 흑색 기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저, 저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놀라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로얀의 잘린 팔이 검은 연기로 화하더니 그의 어깨 쪽으로 다가가 일렁였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검은 연기가 서서히 팔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니, 잘린 팔뿐만이 아니라 두 동강이 났던 그의 몸도 원래대로 붙었다. 심지어 잘린 옷까지도 처음처럼 붙어버렸다.

로얀의 몸은 마치 슬라임이라는 몬스터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다크리온도 함께 딸려와 로얀의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스오오오.......

로얀의 죽어버린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스스.......

샤이니어스는 자신의 발 밑에 있던 붉은 피가 갑자기 방울방울 떠올라 사라지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바닥을 흐르던 붉은 피가 모두 허공으로 떠올라 로얀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챙강! 챙강!

로얀의 몸이 갑자기 액체 형태를 띠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 박혀 있던 두 자루 검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검이 빠져나간 부분은 순식간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회복되었다.

고오오오!

몸이 완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온 로얀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따각.

그의 양손에 들린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은 주인이 살아나서 기쁜지 검명을 떨치며 검날을 떨기 시작했다.

웅웅.......

콰하하하!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의 검신이 백색 오러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 백색 오러는 바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기술인 마나 소드였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마나를 단순히 검신 위에 덮어씌우는 것이었지만, 마나 소드는 마나가 검 속에 녹아들어 융합되는 것이었다. 검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나 소드는 오러 블레이드와는 달리 백광의 오러를 뿜었고 오러를 발산해 멀리 있는 적도 벨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샤이니어스는 중풍에 걸린 환자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한 발, 한 발 물러났다. 그의 말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사람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기사들은 칸 대륙에 단 세 명밖에 없다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마나 소드를 보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고, 마법사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나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로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마나 소드를 지닌 로얀... 흑안의 다크로얀의 부활이었다.

번뜩.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떠졌다.

스오오오.......

로얀이 눈을 뜸과 동시에 그의 몸 주위를 떠돌던 흑색 기류가 그의 눈동자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요동치는 기운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조금 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기도가 달라졌다.

소울 체인지!

소드 마스터가 되면 바디 체인지라는 것을 겪으며 몸이 재구성된다. 하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소울 체인지라는 것을 겪으면서 영혼이 강해진다.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은 곧 정신력이 강해진다는 말과 같다. 소울 체인지를 겪은 로얀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로얀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의 몸을 스윽 훑어보았다. 정말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것도 한층 더 강해져서 부활한 것이다.

한 번 죽을 때마다 강해진다고는 하지만 로얀은 이제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을 때의 그 기분이란... 완벽하게 부활한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이자 목적인 황제 이론을 바라보았다.

로얀의 눈과 마주친 이론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는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것도 아니고 강한 살기를 띤 것도 아닌, 공허한 로얀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이론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화르륵.

화르륵.

로얀의 주위로 붉게 타오르는 화구 십여 개가 생성되었다. 그것들은 바로 파이어 볼이었다. 기존의 파이어 볼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커다란 화구!

지금 그가 생성시킨 파이어 볼은 그가 죽기 전에 두 마법사가 쏜 파이어 볼의 수식이 기억된 것이었다.

로얀의 눈동자는 여전히 이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론은 밀려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얄 나이트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로얀은 이론을 쫓지 않았다. 강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파이어 볼.”

훙, 훙, 훙......!

커다란 파이어 볼 열 개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기사들과 귀족들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들에게로 떨어지는 화염의 구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콰가가강!

“꺄아아악!”

훙, 훙, 훙, 훙......!

콰가가강!

“크아아악!”

붉은 피의 향연이 벌어졌다. 타오르는 불꽃과 붉은 피가 어우러진, 황혼의 궁전이 지어진 이래로 가장 화려한 파티였다.

불꽃에 휩싸인 황혼의 궁전은 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에 탄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 많은 기사들과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기에 그 피해는 더 컸다.

뚜벅뚜벅.......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로얀은 이론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검은 여전히 마나 소드라 일컬어지는 백광의 오러를 뿜고 있었다.

“거기 서라!”

멈칫.

이론이 사라진 곳으로 향하던 로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해준 놈들 중 한 놈의 것이었다.

샤이니어스와 샤엘, 그리고 마법사 두 명과 다른 소드 마스터 한 명도 보였다. 그들 다섯 명과 살아남은 기사들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아직 죽지 않은 귀족들을 옮기고, 움직일 수 있는 귀족들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샤이니어스의 검엔 푸른빛 오러가 담겨 있었다. 다른 두 명의 소드 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비장한 각오로 로얀을 대하고 있었다. 몸을 두 동강 내어 죽였으나 훨씬 강해져 다시 부활한 로얀이 그들의 눈엔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로얀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기사다운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폐하께 저 괴물이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와아아아......!”

샤이니어스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로얀을 향해 뛰어갔다.

철그럭, 철그럭!

“괴물이라.......”

스윽.

로얀의 오른손이 들어 올려졌다.

“와아아......!”

번뜩!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는 순간,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허공을 갈랐다.

“끄르륵!”

푸화화확!

그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앞에서 달려오던 십여 명의 기사들이 모두 반 토막이 나버렸다. 그들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거대한 폭포수처럼 지면으로 추락했다. 모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인 마나 소드에 당한 것이었다.

“한 소녀를 죽이고 파티를 즐기는 너희는 그럼 뭐지?”

“......!”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잠시 바라보던 로얀은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보통 사람의 눈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샤이니어스의 외침에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던 기사들은 사라진 로얀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무서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스슥.

“히에에엑!”

로얀과 눈이 마주친 기사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놀라 비명을 질렀다.

푸욱!

백광의 오러를 머금은 에리오네가 기사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와 함께 백색 오러가 번쩍거렸다.

로얀은 에리오네를 기사의 머리에 박은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푸푸푹!

순식간에 로얀의 왼손에 네 명의 기사가 꽂혔다. 그들은 모두 머리통이 뚫려 있었는데, 뒤에 있는 두 기사는 에리오네에게 직접적으로 뚫린 것이 아니라 백광의 오러에 관통당한 것이었다.

푸푸푹!

푸화화확!

로얀이 에리오네를 뽑자 네 기사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화살을 뿜었다.

뚜벅뚜벅.......

그는 다시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꿀꺽!”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너나 할 것 없이 샤이니어스와 소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남은 세 명의 소드 마스터와 두 명의 마법사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두 마법사 중 한 명이 샤이니어스에게 다가왔다.

“조금만 더 버텨주게.”

“어떤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마법진을 그리고 있네.”

그 말에 샤이니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은 시전자의 한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5서클의 마법사 두 명이라면 마법진을 그려 6서클의 마법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샤이니어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놈은 인간이다. 분명 인간일 거야. 인간이어야만 해!’

어떠한 인간이든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우웅.

“가자!”

그가 푸른빛 오러를 뿜으며 기사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샤엘과 살아 있는 소드 마스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아......!”

철그럭, 철그럭!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은 일제히 로얀을 향해 돌격했다.

스윽.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부우욱!

“크아아악......!”

지옥은 황혼의 궁에 강림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죽음을 선물로 주었다.

로얀과 기사들이 피 튀기는 지옥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두 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6서클의 마법진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두려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콰가강!

푸화화확!

“아직 멀었습니까!”

“이, 이제 다 되었네.”

샤이니어스는 부들부들 떨며 말하는 마법사의 말에 기사들을 모두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잠깐이었지만 족히 백여 명의 기사가 죽었다. 그 중에는 소드 마스터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급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로얀에게는 초급의 소드 마스터는 그냥 기사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얀은 물러가는 기사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자 창백한 얼굴을 한 마법사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죽어라, 이 괴물아!”

“기가 라이트닝!”

파지지지직!

엄청난 전류가 마법진 안에서 흘러나왔다. 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는 그 푸른 전류를 바라보며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이글거리는 푸른 전류는 마법진이라는 우리에 갇혀 있는 사나운 맹수처럼 보였다.

파직, 파직!

푸른 전류의 구가 마법진에서 떠오르더니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쿠하하항!

콰가가가강......!

엄청난 전류가 황혼의 궁 안에 튀었다. 라이트닝의 강화판인 6서클의 기가 라이트닝은 5서클의 마법사 두 명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기에 한층 더 강해 보였다.

휘오오오.......

찬 바람이 불었다. 그에 따라 뿌옇게 내려앉은 연기가 서서히 걷혀갔다.

황혼의 궁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로얀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죽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신들은 그들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파지직.

파지직.

로얀은 여전히 두 개의 백색 마나 소드를 들고 있었고, 그의 양옆에는 그를 호위하듯 전기를 머금은 두 개의 구가 떠 있었다.

“어, 어떻게!”

마법사는 절규하며 외쳤다. 어떻게 기가 라이트닝을 맞고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단 말인가?

로얀은 친절하게도 마법사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그냥 베었을 뿐이다.”

그냥 베었다니... 마법진까지 그려 시전한 기가 라이트닝을 그냥 베었다는 말을 들은 마법사는 허무한 마음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얀의 주위를 맴돌던 두 개의 기가 라이트닝이 기사들과 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푸른 전류 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전류 앞에선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했던 것이다.

파지지직!

콰가가가강......!

휘익.

로얀은 엄청난 폭발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후두두......!

황혼의 궁이 흔들리며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차례의 강한 폭발로 인해 황혼의 궁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으, 으... 이 악마!”

스윽.

로얀은 자신의 앞에서 외치는 이를 바라보았다. 작은 키의 어린 꼬마였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귀족가의 자식인 듯했다.

꼬마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한 채 작지만 화려한 단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꼬마가 쥐고 있는 단검으로 보아 아마도 죽은 귀족의 자식 중 하나인 듯했다. 기특하게도 소년은 공포를 딛고 일어나 복수를 하려 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꼬마의 행동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걸었다.

꼬마는 부들부들 떨며 다가오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올수록 꼬마의 떨림은 심해졌고, 눈물과 콧물이 전보다 더욱 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꼬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 속에는 길가의 바위를 보는 듯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스걱!

데구루루.......

어린 꼬마의 머리가 허공을 날더니 이윽고 바닥을 뒹굴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이 자식!”

검은 그림자가 로얀의 곁을 스치고 지나더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전신을 붉은 피로 적시고 있는 샤이니어스였다.

“어,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이를 죽일 수 있느냐!”

로얀의 공허한 흑색 눈동자가 샤이니어스의 눈동자와 조우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앞을 가로막은 적을 죽였을 뿐이다. 그리고 난 인간이 아니다. 정령왕이지.”

부우욱!

푸화화확!

“끄르륵.......”

샤이니어스는 눈동자를 굴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로얀의 정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기다려라, 이론 폰 클라스!”

타오르는 황혼의 궁을 뒤로하고 로얀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빛이 살짝 빛났다.

* * *

“와아아......!”

그에게 달려들며 질러대는 기사들의 함성이 들렸지만 로얀에게는 그저 귓가를 앵앵거리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처럼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스걱!

부우욱!

두 개의 마나 소드가 달려드는 기사들의 몸을 가르고 목을 베었다. 아무리 단단한 검도, 아무리 튼튼한 갑옷도 로얀의 마나 소드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챙강!

쿠쿵......!

기사들의 검은 주인을 잃고 바닥을 굴렀고,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갑옷을 걸친 그들의 몸뚱이는 차가운 대리석 위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높은 백색 계단 위에서 몸을 굴리는 기사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당당하게 이 계단을 올라 황제에게 기사의 칭호를 받았던 이들이 지금은 참혹한 시체가 되어 흰 대리석 계단을 붉은 피로 적시고 있었다.

로얀이 향하는 곳은 황좌가 있는 곳이었다. 황좌는 백색 계단을 올라 정면으로 가면 나타나는 거대한 문 뒤에 있었다.

이론이 벌써 성을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로얀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황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론이 벌써 도망갔다 해도 상관없었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죽일 테니 말이다.

황좌를 향해 걸어가는 그에게 기사들과 병사들이 달려들었지만 그 누구도 로얀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화르륵!

계단 위에 있는 화롯불이 붉은 화염을 토해 내었다.

척척척!

로얀에게로 달려들던 기사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기사들이 물러난 자리 뒤로 대리석 계단 위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는 백 명이 넘는 궁수들이 보였다.

끼리릭.

“쏴라!”

쏴아아아......!

수백의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화살이 소나기가 되어 퍼부어졌다. 앞줄의 궁수들이 활을 쏜 뒤 몸을 숙이며 자리에 앉자 뒷줄에 있던 궁수들이 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팟!

화살이 로얀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로얀이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촘촘히 박혔다.

타탁!

갑자기 사라졌던 로얀이 활을 쏘고 몸을 숙이고 있던 궁수들 앞에 나타났다.

스윽.

“히에엑!”

“사, 살려줘!”

두려움에 질린 제국 궁수들의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마나 소드의 빛이 그들을 뒤덮었다.

콰가가각!

뼈가 갈리고 피가 튀었다. 활을 쏘기 위해 도열해 있던 궁수들은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목이 잘리고 몸이 갈라졌다. 근접전에서 궁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텅그렁.......

궁수들이 그들의 생명과 다름없는 커다란 활을 내팽개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로얀은 그들을 향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자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뚜벅뚜벅.......

스거걱!

“크아악......!”

로얀의 두 손이 부드럽게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아직 도망가지 않은 궁수들의 몸뚱이가 시린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을 굴렀다.

“와아아아......!”

궁수부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물러났던 기사들이 다시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 같았다.

콰가강......!

“여기군.”

로얀은 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하고 커다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긴 복도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죽어라, 이 악마!”

타탁!

금빛 문을 쳐다보고 있는 로얀의 귀에 한 기사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를 지른 기사는 로얀의 오른쪽으로 검을 들고 빠르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푸욱.

“컥!”

다크리온이 기사의 복부에 박혔다. 기사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지만 백색의 오러 앞에서는 초라한 천으로 만든 옷과 다름없었다.

로얀은 다크리온을 기사의 배에 꽂은 상태에서 그대로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기사의 뼈가 갈리고 몸이 쪼개졌다.

푸화확!

기사의 몸이 붉은 피를 토해 냄과 동시에 로얀의 다크리온은 허공을 치솟은 상태 그대로 거대한 문을 향해 날아갔다.

콰강!

로얀의 뒤를 쫓아오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인 거대한 문이 부서지는 것을 보며 로얀은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

황좌를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곳에 황혼의 궁에서 겁을 먹고 도망쳤던 이론 황제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로 금빛 갑옷을 입은 로얄 나이트들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분명 도망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황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얀의 등장에 이론은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태연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철그덕!

로얄 나이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얀도 그들을 마주보며 몸을 날렸다.

타타탁!

철그덕, 철그덕!

백 명의 금빛 기사들과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흑안의 검사 모습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휘리릭!

스거거걱!

아무리 로얄 나이트들이 빠르고 힘이 넘쳐도 두 개의 마나 소드를 가지고 있는 로얀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로얄 나이트들 사이로 뛰어든 로얀이 두 개의 검을 들고 한 바퀴 회전하자 일곱 명의 몸이 양분되었다.

부우욱!

로얀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로얄 나이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베었다. 로얀 단 한 사람에게 백 명의 로얄 나이트가 모두 몰살당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런 로얀의 모습을 보던 이론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힘은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론은 마법을 쓰고, 두 자루의 검에 마나 소드를 입히며 싸우는 로얀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아무리 적이라지만 사람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죽이는 로얀의 모습은 같은 종족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론은 그가 드래곤 아니면 마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찰박.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로얀의 발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퍼졌다.

로얀은 이론 황제의 눈동자 속에서 굳은 의지를 느꼈다. 죽음을 앞두고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인가?”

로얀의 말에 이론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이론의 입술이 열리더니 살짝 떨리면서도 제국의 황제다운 위엄이 서려 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이미 가족들은 모두 성을 빠져나갔겠지.”

뜻밖의 말이었다. 천하의 야심가인 이론 황제가 가족을 위해 죽음을 자초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뚜벅.

“너의 목을 가지러 왔다.”

“내가 이곳에 남은 것은 가족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너를 죽이기 위함이다!”

이론은 위엄있게 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고작 단검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려는 것일까?

한데 이론은 그 단검을 자신의 왼팔로 가져갔다.

스윽.

주르륵.

검날에 베인 왼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진 이론의 피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황좌를 돌았다. 그 모습을 보는 이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론 제국의 초대 선왕께서 이 성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 넣으셨지. 황가의 피로써만 발동하는 거대한 죽음의 마법진! 이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사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크크큭, 크하하하......!”

붉은 피는 황좌를 한 바퀴 돌더니 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론의 왼팔에선 끊임없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 황혼의 궁에서 보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죽어라, 다크로얀! 데스!”

푸욱.

이론의 단검이 그의 복부에 박혔다. 스스로 단검을 자신의 복부에 꽂아 넣은 것이다. 이론의 몸에서 피가 샘처럼 치솟았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로얀은 자신의 꿈과 야망을 짓밟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으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이고 싶은 상대인 것이다.

쿠쿠쿠쿵......!

성이 크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로얀은 엄청난 진동을 느끼며 만면에 웃음 짓고 있는 이론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로얀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스걱.

데구루루......!

웃고 있는 이론의 목이 허공을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말했다. 너의 목을 원한다고.”

그에게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레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론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었다.

쿠쿠쿵!

부스스.......

흔들리던 성이 이제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맞으며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바라보았다.

마검과 성검은 서로 부딪치면 폭발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마나 소드를 머금은 마검과 성검이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아니, 이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쿠쿠쿠쿠쿵!

화아악......!

이론 제국의 황궁이 거대한 빛에 휩싸였다. 성 전체가 통째로 폭발하려는 듯했다.

금단의 마법인 데스는 이론 제국의 초대 황제인 이론이 적에게 자신이 세운 것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다.

콰가가강......!

엄청난 빛에 휩싸인 이론 제국의 황궁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그 속에서 로얀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엑스 자로 맞대려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쾅! 쾅! 쾅......!

지축을 뒤흔들며 그렇게 이론 제국의 황성은 칸 대륙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따스한 아침 햇살이 이시스를 비추었다.

지금 이시스에는 옛 황성의 잔해들만이 보였다. 황성을 둘러싸고 있던 이시스의 민가와 가게들은 외곽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로얀이었다.

폭발의 여파 때문인지 그의 입에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온몸은 피로 뒤범벅이었다.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는 무슨 힘이 깃들어 있는지 피가 스며들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옷은 전부 피에 절어 있었다.

로얀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혀로 살짝 핥았다.

“이제 가야겠군. 이번엔 레이나의 빚을 받으러 가야지.”

긴 흑발을 휘날리며 혼잣말을 내뱉은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쉴 시간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이, 그의 흑안이 향하는 곳은 드래곤 산맥 쪽이었다.

0